연초에는 의례적으로 하는 일이 있다. 그 중의 하나는 지나간 <씨네21>이나 영화 블로그들을 돌아보며 작년의 베스트 영화들이 무엇이었는지 확인하는 일이다. 물론, 시간이 나면 그 중의 몇 편을 보기도 한다. 지난 주말에도 시간이 있어 그 중 몇 편의 영화를 보았고, <사라진 시간>은 그렇게 해서 보게 된 영화 중의 하나다. (<씨네21>에서 뽑은 올해의 한국영화 4위, 물론 작년에는 코로나 여파로 개봉된 영화가 적었으니 상대적으로 순위들이 인플레이션된 경향이 있어 보인다.)


언젠가 TV 영화 소개 프로그램에서 보았을 때는 스릴러나 미스터리 영화같은 인상이 있었는데, 그런 영화는 아니다. (그래도 이 영화는 그나마 '빌미'라도 주었지만 사실은 문제인 게, 영화 소개 프로그램들은 전혀 그렇지 않은 모든 영화를 미스터리나 스릴러 영화처럼 재구성하여 소개하는 것 같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내 '소중한' 사라진 시간을 어떻게 보상할 거냐는 관객들의 볼멘 소리가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된다. 아마 대부분은 이 영화를 장르 영화로 생각했을 것이고, 어떤 사건의 진실 찾기 게임을 기대했던 관객의 욕망을 이 영화는 깨끗이 배반하기 때문이다. 잘 짜인 장르물을 기대했던 관객의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황당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영화의 태도는 그런 건 내 알바 아니올시다,인 것 같고 이 영화의 매력도 아마 거기에서 나오는 것 같다.


아무튼 딱한 관객들은 어떻게든 황당함의 늪에서 빠져나오고자 애처롭게 버둥거린다. 어떻게든 이야기의 얼개를 짜맞춰 보려는 수많은 영화 리뷰들의 시도가 아마도 그것이다. 그러나 간단하게 말해서 꿈의 얼개를 맞춰보려는 아침의 시도는 늘 실패하기 마련이다. (물론 나는 이 영화가 일종의 '꿈'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그냥 그런 시도는 덧없다는 말이다.) 도리어 얼개가 맞는 꿈은 급격히 우리의 관심에서 멀어진다. 꿈의 매력은 아마도 그 불가해한 이물감이 아닐까. 아니! 아니, 나는 미스터리가 중요하다고! 그렇게 아무리 주장해봤자, 그런 거 애당초 없었는뎅? 하며 고개를 갸웃거리며 순진한 표정을 지으니, 화내는 이쪽만 더 화가 날 뿐이다.


아무튼 간에. 이 영화의 매력은 도리어 그 중반 이후에 있다. 사건을 둘러싼 마을의 비밀을 어떻게든 밝혀내려고 박형사(조진웅)가, 아니 사실은 관객들이 애쓸 때 영화는 시치미를 뚝 떼고 슬그머니 방향을 돌린다. (사실은 이미 방향은 돌아가 있었다.) 그런데 사실 영화가 흥미로워지는 것은 박형사가 체념한 이후이다. 그가 전화번호를 지갑에 집어 넣고 수업 준비를 시작할 때, 이제 영화는 영화 자체의 욕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그전까지는 어떻게든 "장르물을 내놓으라고!"라는 관객들의 화를 어르고 달래며 쉰 떡밥이라도 던져주었지만, 이제 영화는 그런 것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겠다는 투다. 아니, 나는 이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할거야, 보기 싫으면 관두던가요,라는 투랄까.


그 '영화 자체의 욕망'이라는 것을 뭐 여러 갈래로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나는 일종의 위로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정진영이라는 배우 출신의 영화 감독이 계속 다른 사람으로 바뀌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는 같은 입장의 배우들을 향해서 보내는 일종의 위로. 그러나 그 위로는 그것으로 그치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 위로는 이야기를 관통한 후 묘하게 조금 더 확장된다. 처음에는 선생 부부가 이상하다는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코웃음치며 듣던 박형사가 뜨개질 선생님 초희(이선빈)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거 많이 아프다고 공감하며 다들 어쩔 수 없잖아요,라고 할 때 그것은 어쩌면 이야기 속 배우가 영화를 보고 있는 우리들에게 던지는 위무처럼 느껴진다. (이 장면은 카메라, 그러니까 당신을 정면으로 보고 있는 박형사의 모습으로 비춰진다.) 사실은 우리도 다들 어쩔 수 없이 가끔은 다른 사람들이 되어서 살고 있으니까. 맡고 싶지 않은 역할을 기꺼이 맡고 때로는 체념하면서. 우리가 온전한 우리 자신으로 사는 경우가 얼마나 될까. 온전한 자신으로 살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좋은 삶일 수 있지만, 다른 역할을 기꺼이 떠맡으면서 적당히 체념하면서 사는 것도 꽤나 좋은 삶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라고 영화는 묻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다시 말해서 처음의 "참 좋다"와 마지막 "참 좋다"는 분명히 톤의 차이는 있겠지만, 어느 것이 더 좋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


어떤 게 꿈(소설)이고, 어떤 게 현실인가. 혹은 어느 것이 망상이고 어느 것이 현실인가. 영화는 그것은 사실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나도 그렇다.) 그보다는 영화가 묻는 질문은 조금은 핀트가 달라보인다. 시간은 사라졌어도, 여전히 나, 혹은 나의 기억은 남잖아요? 영화는 되묻고 있다.




덧 1.

영화의 초반부 김선생(배수빈)과 그의 아내 윤이영(차수연)의 연기는 과장되어 있다. 그 이후 등장하여 혼자말을 하거나, 마을 사람들을 거칠게 다루는 박형사의 연기도 마찬가지다. 나는 오랜 배우 경력을 가진 정진영 감독이 이 과장이 가져올 단점을 당연히 모를 리는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는 필요했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영화 속의 영화, 극 중의 극을 보여주는 것은 촬영기법으로도 가능하겠지만, 과장된 연기로도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배우 출신 감독이 쓸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


덧 2.

개인적으로는 이 영화를 보면서 즉각적으로 황규덕 감독의 2007년작 <별빛 속으로>가 떠올랐는데, 이상하게도 그 영화를 이야기하는 리뷰는 잘 보이지 않는다. <사라진 시간>의 감독 정진영은 이 영화에서 교수 역할로 출연하며, 차수연 배우도 중요한 역할로 나온다. 물론 꿈과 현실이 교묘하게 뒤섞여 있는 이 영화의 내용도 <사라진 시간>과 꽤나 유사한 점이 있다. 물론 영화 속에서 교수로 나오는 정진영이 직접 낭독하기도 하는 이 영화의 중요한 테마인 릴케의 이 시 "파괴하는 시간이 정말 있을까?"도.


시간이 정말 있을까 파괴하는 시간이

쉬고있는 산 위에서 언제 시간이 성을 부숴버릴까

끝없이 신들에게 속해있는 이 마음에게

언제 조물주는 폭력을 휘두를까

운명이 우리에게 일러주는 것처럼

우린 정말로 불안에 찬, 깨어지기 쉬운 존재일까

유년 시절은

깊고도 기약에 찬 유년시절은

그 근원에서 말이 없는 것일까, 훗날에


출처: 영화, 별빛 속으로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희선 2021-01-21 0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경찰이 사건을 수사하는 모습을 보면 미스터리처럼 보이는데, 그게 아주 바뀌는군요 자신은 그걸 기억하는가 봐요 형사였다는 걸... 그러고 아주 다른 삶을 살게 되는 건지... 이런 거 언젠가 본 것 같기도 한데, 정말 본 건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아주 처음은 아닐지도 모르겠네요 시간여행을 하는 사람이 역사속 사람이 되는 것도 있던데, 그것과는 다를 듯합니다 여기에서 일어나는 일은 꿈일지 현실일지, 그런 게 나중에 나오지 않는군요 나오지 않는다 해도 그것도 진짜일 수 있다 생각하면 나을지...

늘 다른 사람을 연기하던 배우가 자신은 누군가 하는 생각하는 하는 영화도 있지 않던가요 갑자기 그런 것도 생각나는군요 정말 배우만 다른 사람이 되는 건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많은 사람이 자신과는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할 때도 있겠습니다 그게 힘들다 해도 그렇게 사는 것도 대단하겠지요 그런 걸 아주 못하는 사람도 있잖아요

시간이 사라져도 기억이 있다면 그건 정말 있었던 일이기도 하겠지요 기억조차 없다면 더 안 좋을 듯합니다


희선

맥거핀 2021-01-21 18:03   좋아요 1 | URL
사실 비슷한 이야기는 많죠. 현실과 비현실이 뒤섞이고, 기억이 뒤섞이고...조금씩 버전이 다르지 비슷한 내용은 많습니다. 제목이 ‘사라진 시간‘이긴 하지만, 사실 정확히 말하면 시간이 사라졌다,라고 표현하기 보다는 현실이 바뀌었다,라고 말하는 게 맞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아무튼 흥미로웠던 것은 그런 식의 이야기들은 많지만, 대부분 이걸 미스터리 같은 장르적 관점에서 접근하거든요. 근데 여기에서 얘기하고 싶은 것은 그 얼키고 설킨 실타래를 장르적으로 푸는 게 아니라, 어떤 정서예요. 그런 상황에 놓인 사람의 어떤 정서. 뭐 그래서 이 영화가 싫은 사람이 더 많은 사람이 많겠지만, 저는 도리어 더 좋았습니다.

그렇겠죠. 인간을 무엇에 버티게 하는 것은 아무래도 기억의 힘이 아닐까요. 무엇인가를 기억할 수 있다는 것은 아주 힘든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아주 큰 힘이 되기도 하겠죠.
 



일 때문에 자료조사를 하다가 우연히 이 사건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뒤늦게 찾아본 기사는 이 사건에서 일어난 일들을 무심하게 나열한다. 


2011년 3월 11일 오후 2시 46분. 일본 근대지진 관측사상 최대 규모(리히터 규모 9.0) 지진이 일본 도호쿠 지방을 강타했다. 몇 차례의 여진이 이어졌고, 한 시간 뒤 최대 높이 40.5m의 초대형 쓰나미가 연안 지역을 덮쳤다. (중략) 사고 당일 쓰나미로 이 지역 어린이 75명이 사망했는데, 그 중 74명이 미야기현의 작은 시골 마을 가마야의 오카와 초등학교에서 목숨을 잃었다. 당시 이 학교의 재학생은 108명. 이 중 78명이 파도에 휩쓸렸고 단 4명만이 살아서 나왔다. (중략)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이는 쓰나미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교사 엔도 준지 뿐이다. 그는 교실에서 운동장으로 대피하는 과정에서 파도가 들이닥쳤고, 모든 절차를 따랐지만 속수무책으로 파도에 휩쓸려 갔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지진은 오후 2시 46분에 일어났고 학교의 시곗바늘은 3시 37분에 멈췄다. 아이들에게는 51분의 시간이 있었다. 200m 남짓 떨어진 대피소까지는 달려서 고작 몇 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51분 동안 아이들에게는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한국일보 기사 '동일본 대지진 당시 오카와 초등학생들은 왜 가만히 있었나' 중에서>


그러나 가끔은 사실의 무심한 나열이 더 무섭게 느껴질 때가 있다. 이 사건을 6년에 걸쳐 취재하고 그 내용을 담은 리처드 로이드 패리의 책 <구하라, 바다에 빠지지 말라>을 읽으면서 나를 사로잡았던 정서는 그 어떤 '고도로 조작된 무심함'에서 비롯되는 무서움이다. 그는 <더 타임스>의 아시아 담당 특파원으로서 한 걸음 뒤에 물러서서 이 책을 썼다. 한 걸음 뒤에 물러섰다,라는 것은 내용을 부실하게 담았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는 아이들을 잃은 부모가 아니었고, 그 사건을 실제로 목격한 주민도 아니었고, 지방 공무원도 아니었고, 부모들을 위로한 승려도 아니었다. 그는 한 걸음 뒤에 물러서려고 어떻게든 애썼기 때문에 보다 많은 것을 들려줄 수 있었다.


이 책은 단지 사실을 나열하고 그것 자체에서만 어떤 해답을 찾으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왜 교사들은 바로 학교 뒤에 있던 산으로 아이들을 데려가지 않고, 멀리 떨어진 교통섬으로 가려 했던가, 왜 시간은 지체되었고 아이들은 살아 돌아오지 못했는가,와 같은 사건의 진실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은 물론 중요하지만, 이 책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단지 그 뿐만은 아니다. 도리어 나의 흥미를 끌었던 부분은 조금 다른 방향이라고 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시신을 빨리 찾은 부모와 그렇지 못한 부모는 어떻게 달라지고, 어떻게 서로 서먹한 사이가 되었다가 결국 얼굴을 안 볼 정도로 갈라서는가, 혹은 참고 견디는 것이 미덕으로 간주되는 일본인의 특징이 이 사건에 어떤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는가와 같은 사회학자적인 입장에서 흥미를 가질 이야기도 있고, 아니면 아이들과 이야기하려고 심령술사를 찾는 부모들과 쓰나미에 휩쓸린 영혼들에게 사로잡힌 사람들의 이야기 같은 조금은 그대로 믿기 어려운 내용들도 이 책에는 켜켜이 쌓여있다. (그러나 나는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담담한 술회들은 마음을 짓누른다. (물론 그 부모들을 인터뷰한 저자의 마음도 짓눌렀을 것이다. 위에 '고도로 조작된 무심함'이라 한 것도 그 때문이다.) 책의 초반부, 사건이 일어났던 그 날 아침과 아이들의 시신을 찾던 날을 회상하는 부모들의 목소리를 담은 몇 줄의 문장들을 읽어내려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예를 들어 부모들은 견딜 수 없게 하는 것은 지진이 일어난 후 '시간이 있었다'라는 사실이다. 즉 지진이 일어난 후 쓰나미가 오기까지는 한 시간 정도 시간이 있었으며, 아이를 데리러 학교에 갈 수도 있었다. (실제로 몇몇 아이들은 이렇게 살았다.) 그 공백에서 자신은 무엇을 하고 있었나. 부모들의 기억은 때로 한 가지 사물이나 사실에 포커스를 맞춘다. 아이들이 그날 아침 신고간 신발이나 옷, 아침에 아이들이 던졌던 싱거운 질문.


그렇게 연말에서 올해로 넘기는 시간 동안 나는 이 책을 느릿느릿 읽었다. 코로나19라는 거대한 재난 상태에서 또다른 재난에 대한 책을 읽는 것은 조금은 이상한 느낌이었고 몇 가지 질문을 하게 했다.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오고 있다고만 말해지는 무서운 쓰나미. 그것은 다르지만 묘하게 닮아 있다. 재난을 겪고 아이들을 잃은 부모들은 그것을 다른 무엇으로 바꾸려 애쓴다. 그러나 그것은 쉽지가 않다. 부모들은 어쩌면 '그들 자신이 살기 위해서' 아이들의 죽음을 다른 무엇으로 치환하려 한다. 예를 들어 그것은 아이들의 시신을 찾기 위해 굴착기 자격증을 따고 매일 진흙을 퍼올리는 일일 것이며,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심령술사를 찾아 매일 밤마다 이야기를 나누는 일일 것이다.


물론 그 부모들에 비길 수야 없겠지만, 우리도 크건 작건 이 재난들을 무엇으로 바꾸기 위해 애를 쓴다. 우리는 이것들을 무엇으로 바꾸고 있는가. 내 노력 중의 하나는 이 책을 읽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작년에 만난 최고의 책. (이라고 해두자. 올해까지 읽기는 했지만 올해의 최고의 책이라고 하기에는 아직 지나간 시간이 너무 짧으니.)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희선 2021-01-12 0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피할 시간이 있었는데도 아이들이 피하지 못했다니, 왜 그랬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건 나왔을지... 저는 그런 게 더 알고 싶네요 그걸 안다고 해서 결과가 바뀌지는 않겠습니다 누구한테 책임을 물어야 할지도 모를 테고... 이걸 보니 세월호가 생각나는군요

아이를 데리러 학교에 간 부모도 있었군요 그러지 못한 부모는 지금도 마음이 아프겠습니다 그날이 마지막이 될지 몰랐겠지요 시신을 찾으면 좀 나을지... 아무것도 없으면 아이가 죽었다고 믿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살았다고 믿고 기다리지도 못하겠네요 기다리는 사람도 있을까요


희선

맥거핀 2021-01-12 09:34   좋아요 1 | URL
책 내용대로라면 교사들이 갑작스러운 상황에서 허둥지둥했던 것 같고, 패닉 속에서 올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한 것 같습니다. 쓰나미의 위험을 과소평가했던 것도 같구요. 뭐 사실 대부분의 사건들이 그렇듯 여러가지가 중첩되었던 것 같아요.

책에 보면 책을 쓰는 시점(2018년)까지도 아이를 찾지 못한 부모가 나와요. 근데 포기를 못하고 계속 아이들을 찾으러 수색을 계속하는 이야기가 나와요. 우리 세월호 사건에서도 끝까지 시신을 찾지 못한 부모들이 있었죠. 공식적으로 중단한다고 발표한 걸로 아는데, 사실 부모의 마음이라면 지금도 여전히 계속 찾고 싶을 겁니다.
 


<나보코프 문학 강의>의 몇 대목.


그러나 기성품처럼 진부한 일반화부터 시작한다면, 시작부터 잘못된 것이니 책을 이해할 실마리를 잡기도 전에 책에서 멀어질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보바리 부인>이 부르주아를 비판하는 작품이라는 생각을 미리 품고서 책을 읽기 시작하는 것만큼 작가에게 지루하고 지독한 일은 없습니다. 예술 작품은 언제나 새로 창조된 세상임을 결코 잊으면 안 됩니다.

- p. 43


좋은 독자는 책에서 진짜 삶, 진짜 인간 등을 찾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걸 압니다. 책에 등장하는 사람, 사물, 상황의 현실성은 전적으로 그 책의 세계에 달려 있습니다. 독창적인 작가는 항상 독창적인 세계를 창조하죠. 어떤 등장인물이나 사건이 이 세계의 패턴에 들어맞는다면, 우리는 예술적 진실의 기분좋은 충격을 경험합니다. 한심한 하청 문사인 비평가들이 '진짜 삶'이라고 부르는 것에 그 인물이나 사물을 대입했을 때 그들이 아무리 비현실적으로 보여도 상관없습니다. 천재적인 작가에게 진짜 삶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 p. 55


문체는 도구도 아니고 방법론도 아닙니다. 단순히 단어의 선택만을 의미하지도 않습니다. 이 모든 것보다 훨씬 더 대단한 존재인 문체는 작가의 개성을 구성하는 본질적인 요소 또는 특징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문체를 말할 때는, 예술가 개개인의 독특한 본질, 그리고 그것이 예술적인 작품 속에 표현되는 방식을 뜻합니다. 모든 살아 있는 사람은 자기만의 문체를 갖고 있지만, 우리가 논할 가치가 있는 것은 천재적인 작가들 각각의 독특한 문체 뿐임을 반드시 명심해야 합니다.

- p. 139


문학의 사회적, 정치적 영향에 대한 연구는 주로 기질이나 교육 때문에 진정한 문학의 미학적 울림에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고안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양쪽 어깨뼈 사이의 그 분명한 짜릿함과 설렘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 말입니다(몇 번이나 거듭 말하지만, 등으로 책을 읽지 않는다면 책을 아무리 읽어도 소용없습니다).

- p. 143


하지만 소설이나 시에 대해 실화냐는 질문을 던지지는 마세요. 스스로를 놀리지 맙시다. 문학에 실용적인 가치가 전혀 없다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단 하나 예외가 있다면, 하필이면 문학 교수가 되고 싶어하는 특수한 경우뿐이겠죠. 에마 보바리라는 여성은 실제로 존재한 적이 없지만, <보바리 부인>이라는 책은 앞으로도 영원히 존재할 겁니다. 책은 사람보다 오래 삽니다.

- p. 249~250


맨 처음 이 사건들을 촉발한 사소한 요소가 무엇이든, 당시 프랑스의 상황이 어떠했든, 그가 프랑스의 상황을 어떻게 생각했든 모두 상관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에마 보바리라는 여주인공에게 사회가 객관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반대합니다. 플로베르의 소설은 인간의 운명이라는 섬세한 미적분을 다룬 작품이지, 사회적 조건화라는 산수를 다룬 작품이 아닙니다.

- p. 251


오스틴 폴더의 다른 메모에서 나보코프는 플롯을 "미리 생각해둔 이야기"로 정의한다. 테마, 테마의 가닥line은 "둔주곡에서 어떤 곡조가 반복적으로 나타나듯이 소설 속 여기저기에서 반복되는 이미지 또는 생각"이고, 구조는 "책의 구성, 사건 전개, 한 사건이 다른 사건을 야기하는 것, 한 테마에서 다른 테마로의 이행, 인물들을 교묘하게 등장시키는 것, 또는 새로운 행동 묶음이 시작되거나 다양한 테마가 서로 연결되거나 소설을 진행시키는 데 이용되는 것"이며, 문체는 "저자의 특별한 어조, 어휘, 독자가 어떤 문장을 보았을 때 이건 디킨스가 아니라 오스틴의 문장이라고 외치게 만드는 어떤 것"으로 정의되어 있다. -편집자

- p. 64



앞의 몇 인용문에서 보듯이 나보코프는 작품의 사회경제적 측면이나 역사적 측면은 거의 철저하게 무시했다. 그가 관심을 가진 것은 그보다는 작품에서 나타나는 플롯, 테마, 그리고 문체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 <나보코프 문학 강의>에서 그러한 것들을 집요하게 추적한다. 예를 들어 찰스 디킨스의 <황폐한 집>의 경우라면, 이 작품에서 나타나는 소송 테마, 미스터리 테마, 아이 테마를 쫓거나, 작품의 구조적인 특징을 살펴 보거나, 무뚝뚝한 나열이나 비유, 돈호법과 같은 디킨스의 문체를 세밀하게 들여다보는 것이 그것이다.


그리고 여기 나보코프가 보았더라면 아주 좋아했을 영화가 있다. 에드워드 양의 <하나 그리고 둘>. 2000년에 만들어진 이 영화는 타이완의 중산층 가정의 가족들이 겪는 소소한, 그러나 결코 소소하지만은 않은 며칠 간의 일상을 그리고 있다. 이 영화를 두고 삶의 가치와 지향점에 대한 감독의 물음과 해답, 또는 과거와 현대가 묘하게 결합되며 가족이 재구성되는 타이베이라는 보편적이지만 특수한 공간을 다룬 것이라고 소위 비평적 관점에서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위의 나보코프의 관점대로라면 그것은 집어치워야 할 것이다. 그의 눈을 빌려서 보면, 여기서 보아야 할 것은 사회나 시간, 공간이 아니라 플롯이나 테마, 그리고 문체 - 영화로 치면 촬영기법이라고 해야할까 - 와 같은 것이고, 사실 그것을 빼놓고 보는 것은 영화의 10분의 1도 채 못보는 것이기도 하다. 초반의 10분을 한번 살펴보자.


영화의 시작. 짧은 암전이후 결혼식장에 서 있는 신랑 신부의 모습이 보인다. 신부는 어딘지 불만족스러워하는 듯 보이고, 남자는 그런 여자의 눈치를 살짝 본다. 그리고 음악은 어딘지 모르게 살짝 불길하다. 이것은 물론 뒤이어 등장할 다른 여자와 그 여자와 연결되어 등장할 이야기를 슬며시 암시한다.


다시 짧은 암전 후 음악이 서정적으로 바뀌며, 아이들이 등장한다. 모인 하객들이 기념 촬영을 하고 있지만, 카메라가 집중하여 비추는 것은 아이들이다. 남자 아이를 둘러싼 여자 아이들. 뒤에 선 키가 큰 여자 아이들은 작은 남자아이의 머리를 번갈아가며 찌르는 장난을 치고 있다. 이는 나보코프의 표현을 빌리자면 두 가지의 테마를 가져온다. 하나는 여자 아이들에게 앞으로 계속 시달림을 받게 될 남자아이의 테마, 그리고 다른 하나는 사람은 누구도 뒤를 볼 수 없다는 보다 큰, 아마도 작품의 전체를 가로지르는 테마이다.



이어지는 장면은 앞서 등장했던 신랑 신부와 결혼식에 참석한 신랑 누나 부부와의 대화. 가장이 되었으니 앞으로 잘하라는 매형의 말이 앞서 뭔가 불만족스러워하던 신부와 연결된다. 또한 아이들이 어디 갔는지 찾는 장면이 바로 아이들의 모습과 이어지며 자연스럽게 등장인물들을 소개한다. 등장한 가족의 큰 딸인 팅팅은 할머니와 대화를 이어가는데, 어딘지 모르게 불편해보이는 할머니의 모습은 앞으로 이어지게 될 내용을 다시 암시한다. 


그리고 다 끝난 결혼식장에 등장하는 또다른 여자 윤윤. 불편해보이는 할머니에게 자기가 며느리가 되었어야 했는데 미안하다며 막무가내로 이야기하는 여자의 모습은 아주 극 초반부의 사건이라면 사건이다. 이는 여러가지의 효과를 불러오는데. 거침없고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는 윤윤의 성격을 보여주기도 하며, 동시에 이 장면 이후 불편함이 한층 가중되어 보이는 할머니의 모습을 보여주며 이 이후 이어질 사건에 대한 세심한 복선이 된다. 또한 이는 앞으로 이어질 아디(신랑)와 윤윤을 둘러싼 일종의 삼각관계 테마이기도 하다. 이 삼각관계 테마는 앞으로 여러 결로 여러 인물을 통해 반복된다. 


집안의 가장이자 아디의 매형 NJ와 딸 팅팅은 뒤집어진 결혼식 사진 뒤에서 대화를 나눈다. 할머니가 집에 빨리 가고 싶어한다는 말을 전하는 팅팅의 목소리는 어딘지 모르게 불길하며 뒤집어진 결혼식 사진은 그러한 분위기를 가중시킨다. 물론 이는 신랑 아디와 신부 샤오얀의 앞으로의 결혼 생활이 순탄치 않을 것임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제서야 검은 화면에 제작사 등을 표시하는 오프닝 크레딧이 나온다. 그러나 이 오프닝 크레딧은 그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는 샤오얀 어딨냐며, 나오라고 그러다 천벌받는다며 소리지르는 윤윤의 목소리가 배경음악처럼 깔린다. 사실 이 영화는 이처럼 화면과 매칭되지 않는 목소리 또는 대화가 계속 이어진다. 즉 화면에는 어떤 이들의 모습이 나오지만 같이 붙어 나오는 소리는 그 사람들의 목소리 혹은 대화가 아닌 경우가 많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불균질해 보이지만, 사실은 어떻게 보면 자연스럽기도 하다. 사실 우리는 대화를 할 때 상대방을 보고 있지 않은 경우가 더 많으니까. 물론 그리고 이는 앞의 주요한 테마를 다시 연상시킨다. 우리는 누구나 뒤를 볼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이제서야 제목이 나온다. 하나 그리고 둘(A One and A Two). 어쩌면 윤윤 그리고 아디와 샤오얀. 그러나 그것은 물론 이렇게 바꿀 수도 있다. 샤오얀 그리고 아디와 윤윤. 오로지 그것은 관점의 문제일 뿐이다.


그리고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할머니. 할머니는 깊은 상념에 빠져 있다. 이 때 카메라는 오롯이 할머니만을 비추지만, 차에서 내리는 할머니를 팅팅이 부축한다. 아마 운전은 NJ가 했을 것이다. 그리고 팅팅과 할머니가 집에 들어서서 엘리베이터를 타는 모습을 CCTV가 비추고 있다. 왜 우리는 이 화면을 CCTV로 봐야 하는가. 카메라와 CCTV라는 이중의 화면, 이중의 필터를 거친 화면. 이는 카메라라는 어떤 절대자의 존재를 다시 상기시키며, 동시에 뒤를 보게 하는 카메라라는 거대한 테마를 다시 연상시키기도 하지만, 보다 간단하게 말하고 싶다. 즉 불길하다. 나는 불길하다는 것을 여러 번 말하고 있다. 그리고 잠겨진 문.


엘리베이터를 올라오니 가족의 옆집에 누군가가 이사를 오고 있고, 옆집의 이사온 리리와 팅팅은 처음으로 만난다. 앞으로 팅팅에게 이어질 또다른 테마를 위한 시초가 여기서 자연스럽게 변주된다. 카메라는 팅팅의 집안을 느리게 비추다가 부엌을 정리하는 팅팅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 화면에 쓰레기를 버리라고, 그리고 베란다에도 쓰레기가 하나 더 있다고 말하는 NJ의 목소리를 입힌다. 자, 이 쓰레기가 불러올 것.


이 말을 하는 NJ는 방에서 무엇인가를 찾고 있는 중인데, 그는 멍한 표정으로 스스로에게 되묻는다. 내가 뭘 찾으러 왔더라? 그리고 쓰레기를 버리러 가는 팅팅의 모습이 여기에 붙는다. 이것은 두 가지의 잊음으로 변주된다. 하나는 이 잊음의 테마의 반복. 잠시 후에 우리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이야기를 한참 하다가 내가 왜 내려왔더라?라고 말하는 어떤 남자를 만날 것이다. 그리고 물론 이는 무엇인가를 잊고 살아온 NJ의 이야기로 반복될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팅팅이 하나의 쓰레기는 버리지만 다른 하나(베란다에도 있다는 그 쓰레기)는 잊게 될 것임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녀(팅팅)은 왜 잊어버렸을까? 쓰레기를 버리러 간 주차장에서 리리와 그녀의 남자친구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며, 베란다에서 쓰레기를 정리하다가 다리 밑으로 밀회를 나누는 리리와 남자친구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잊음은 다음의 이어질 일련의 사건들과 이어진다.



결혼식장에 돌아가기 위해 차를 탄 팅팅과 아빠 NJ의 대화는 샤오얀과 아디, 윤윤의 관계를 보는 이들에게 간단히 정리해서 들려주며, 동시에 이제 늙었나보다,라고 말했다는 할머니, 그리고 그 할머니에게 일어날 사건을 다시 암시한다. 물론 팅팅이 이 말을 꺼낸 것은 단순히 샤오얀과 아디, 윤윤의 이야기를 보는 이들에게 정리하여 보여주기 위해서만은 아닐 것이다. 이 삼각관계가 다시 팅팅 자신에게도 비슷하게 변주될 것임을 이 장면은 묘하게 연상시킨다.


그리고 다시 결혼식장, 식당에서 극성맞게 축하를 받는 신랑 아디와 신부 샤오얀. 이어지는 장면에서 다시 처음 등장했던 작은 남자아이, 그러니까 가족의 막내 양양은 식당 밖에서 결혼식에 참석한 다른 키큰 여자아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며 신발마저 빼앗긴다. 침울하게 다시 식당 테이블에 돌아온 양양의 모습을 카메라가 비추지만, 이 때 이 화면에 붙는 대화는 양양의 엄마(민민)와 테이블에 앉은 다른 어른들과의 대화이다. 임신을 한 샤오얀이 흠이 될 게 없다는 엄마의 말에 다른 남자 하나가 '여자는 그런 식으로 남자의 발목을 붙잡는다'는 식으로 대답한다. 즉 양양의 발목에 있던 신발은 이미 여자아이들에게 붙잡혔으며, 이때 양양은 슬며시 '뒤돌아본다'. 여자아이들은 자기들끼리 즐겁게 노는 중이다.



이게 겨우 영화의 시작 후 10분이다.

그리고 버릴 단 하나의 씬도 없이 결혼식장에서 시작하여 장례식으로 끝나는 이 영화는 2시간 50분이 넘는 영화이기도 하다. 2000년에 개봉한 이 영화 <하나 그리고 둘>을 나보코프는 볼 수 없었지만, 그리고 나보코프가 영화를 좋아했는지도 알 수 없지만, 혹시라도 보았더라면 그는 아마도 척추에 "틀림없이 찌릿찌릿한 느낌"을 느꼈을 것이다. 그것은 내가 장담할 수 있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맥거핀 2020-08-27 12: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태풍이 지나가고...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이 영화가 갑자기 보고 싶다. 지금 이 시간들은 끝나지 않은 거대한 태풍을 지나고 있는 것 같다. 이제 바람은 잦아들고 매미는 울고 있지만..보이지 않은 태풍은 여전하다.

희선 2020-08-28 01: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이는 게 별일이었군요 앞으로 일어날 일 같은 거, 여자아이한테 괴롭힘 당하는 모습... 그런 건 정말 그냥 그런가 보다 할 듯합니다 앞으로도 그렇게 살게 된다니... 결혼식으로 시작하고 장례식으로 끝난다니, 할머니한테 보이는 안 좋은 모습은 그거였나 싶네요 할머니가 죽으리라고 생각하다니, 아닐 수도 있을 텐데... 이름이 같은 글자 두번 쓰는 사람이 많네요 그건 그저 그 나라 사람 이름이 그런 것뿐이겠습니다

태풍 하나 지나갔는데 또 온다고 하더군요 2020년이 오기 전에는 뭔가 좋은 해일 거야 한 사람 많았을 텐데, 그렇지 않은 해군요 세상도 그렇고 저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게 세상 때문일지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조금 영향이 있는 것도 같군요


희선

맥거핀 2020-08-31 10:23   좋아요 1 | URL
사실 세세하게 들여다보면 더 좋아지는 영화들도 있거든요. 이 영화의 메시지는 간단하지만 큰 울림을 줍니다. 근데 그 힘은 그 메시지 자체라기보다는 그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에서 나오는 것 같아요. 사실 그런 게 영화라는 것의 가치가 아닌가 싶습니다. 메시지 자체가 아니라, 메시지를 직조하는 방식.

뭐 물리적인 태풍도 그렇지만, 코로나가 창궐하는 지금 이 시기는 뭔가 태풍의 한가운데에 들어가 있는 것 같아요. 말씀하신대로 이런 해가 될 줄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요. 피로합니다, 피로해요. 코로나도 그렇지만, 그 코로나를 앞에 두고 벌어지는 이상한 일들이 너무 많고 필요없는 논쟁들도 많아요. 그냥 조용히 영화나 보고 싶은 요즘입니다. 바로 <하나 그리고 둘> 같은 영화요.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 <기생충>, <설국열차>에 대한 스포 있습니다.)

  

 

영화 <기생충>에 대한 반응 중에 흥미로웠던 것은 찜찜하다, 씁쓸하다, 뭔가 개운치 않다는 말이 상당히 많다는 사실이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는 이것이야말로 이 영화의 일종의 성취 지점이 아닌가 싶은데, 뭔가 눅진하고 불길한 무엇인가를 영화 속에 남겨둔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영화가 끝난 후에도 관객에게 길게 달라붙어 있다는 점은 결국 봉준호가 원했던 부분이 아닐까. 영화 속 등장했던 수석처럼 말이다. 영화 속 기우(최우식)는 수석을 껴안고 누워있으면서 중얼거렸었다. 떼어내고 싶은데 떼어내지지 않는다고.

 

사실 그런데 봉준호의 영화가 언제 상쾌한 무엇인가를 준 적이 있던가. <살인의 추억>에서 빗속에서 DNA 분석 결과를 뜯어 보았을 때, <마더>에서 진범이라고 잡혀 들어온 이의 얼굴을 보았을 때, 뭔가 맥이 풀리는 그 순간. 그것이야말로 봉준호의 말대로 그가 즐겨 의도한 거대한 '삑사리'의 하나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괴물>에서 괴물이 쓰러지는 순간이나, <설국열차>에서 열차가 터져나가는 거대한 스펙터클의 순간에서도 모종의 쾌감보다는 어떤 씁쓸함이나 맥풀림이 더 느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영화 <기생충>은 그의 전작들의 연장선상에 서 있는 영화다. 여러가지를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단적으로는 이러한 것을 이야기할 수도 있다. 돌고돌아 처음 위치에 와 있는 것들.  <살인의 추억>의 영화가 시작할 때 등장하는 논바닥 옆 어두운 배수로와 다시 돌고돌아 영화 마무리에서 만나게 되는 어두운 배수로, 아니면 <괴물>에서 한강 둔치에 서 있던 컨테이너 건물과 다시 어두운 한강 옆에서 홀로 서 있는 컨테이너 건물, <마더>에서 영화 시작과 함께 만나게 되는 마더의 춤과 영화의 끝 고속버스 안에서의 망각의 춤. 이것은 <기생충>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영화의 시작, 반지하 방의 창에서 시작하여 걸려 있는 양말들을 비추며 카메라는 천천히 아래로 이동한다. 그리고 다시 이것은 영화의 마지막에 그대로 반복된다. 카메라가 천천히 아래로 이동한 반지하 방에는 여전히 기우(최우식)가 있다.

 

그러나 물론 이것은 완전히 같지는 않다. <살인의 추억>에서는 어두운 배수로 안에는 여자가 죽어 있었고, 마지막에는 그 위에 여자아이가 서 있었다. <괴물>의 마지막에서는 컨테이너에 원래 있었던 아이는 죽었지만, 대신 다른 아이가 살아남아 밥을 먹었다. 그리고 <기생충>에서는 마지막 지하방 그 이전에 환상이 이어졌다. 혹시 사실인가 싶은, 믿기지 않는 환상이. 그러나 그는 여전히 그 지하방에 있고, 이제 '근본적인 계획'을 세우는 참이다. 돌고돌아서 얻은 근본적인 계획. 그러나 영화를 보는 우리는 안다. 그가 그렇게 그곳에 앉아서 환상을 보고 있는 한, (아니 사실은 환상을 보지 않더라도) 그 계획은 결코 성공할 수가 없다는 것을. 그러나 아무튼 봉준호의 영화에서 그들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올지라도 돌고돌아야만 한다. <설국열차>에서 결국 같은 곳으로 되돌아올지라도 열차가 같은 궤도를 돌아야 하는 것처럼.

 

<설국열차>. 영화가 봉준호의 전작들 연장선상에 있지만, 이 중에서 굳이 가장 가까운 영화를 꼽으라면 그것은 이 영화 <설국열차>이다. 예를 들어 <기생충> 그 마지막의 그로테스크한 활극은 설국열차의 그 장면을 연상시킨다. 혁명을 꾀하던 커티스(크리스 에반스)가 열차의 머리칸으로 들어가고, 뒤에 남은 남궁민수(송강호)가 일군의 약에 취한 무리들과 대결을 펼치던 장면. 크로놀에 취한, 아니 사실은 크로놀로 상징되는 다른 무엇에 취한 그들은 기꺼이 남궁민수와 커티스를 처단할 참이다. 그들은 열차를 멈추게 하려는 위험한 자들이니까.(예전에 <설국열차> 리뷰에서도 쓴 적이 있지만, 사실 어쩌면 커티스는 처음부터 열차를 멈추게 할 마음 따위는 없었을 것이다. 그가 열차를 멈춰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은 논리 바깥에 존재하는 다른 무엇인가를 보았기 때문이다.) 열차는 어떻게든 돌아야 하니까. 그래야 우리는 살 수 있으니까. 위대한 영도자 윌포드의 뜻대로.      

 

커티스의 반란이 혁명이 아니라 반혁명인 것은 결국 그의 시도가 열차를 계속 돌아가게끔 하는 데 일조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던 시스템의 설계자 윌포드는 기꺼이 그를 머리칸으로 오도록 안내한다. 위험한 것은 커티스가 아니라 열차를 멈춰버릴 생각을 가지고 있던 남궁민수였고, 그래서 그는 광기에 가진 이들과의 대결을 피할 수 없었다. 크로놀에 취한 그들은 윌포드를 위해서,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자신들을 위해서 남궁민수를 기꺼이 처치할 것이고, 그것은 <기생충>에서 비슷하지만 약간 다른 버전으로 변주된다.

 

지하실에 있던 남자가 기택(송강호)과 기우 가족에게 달려드는 것은 언뜻 보면 아내에 대해 복수하고, 자기를 죽이려 했던 것에 대한 분노 때문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런 관점에서라면 사실은 그렇게 보이지만은 않는다. 그가 했던 몇 개의 말들을 여기에 덧붙인다면 말이다. 존경합니다, 박사장님! 리스펙!! 아니, 나는 이것이 이상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매우 당연한 것처럼 보인다. 이미 인터넷에는 이를 방증하는 수많은 글들이 있다. 박사장(이선균) 내외도 피해자이며, 그들은 결코 악인이 아니라고 기꺼이 변호를 해주는 수많은 글들. 아니 조금 더 범위를 넓혀보면 그 존경의 목소리는 우리 사회 곳곳에서 비슷하게 변주되고 있다. 이미 잡스와 빌 게이츠는 위인의 반열에 올라섰다. 이재용이라고 여기에 올라서지 말란 법이 있을까. (아니 이미 올라섰을지도 모르겠다.) 그들에게서는 아무런 '냄새'가 나지 않는다. 냄새나는 것들은 바로 지금 지하철 내 옆자리에 땀을 흘리며 자고 있는 낯선 남자다. 아무나 밀치고 들어오는 할아버지들, 어떻게든 자리를 잡으러 비집고 들어오는 아줌마들, 크게 음악을 들으며, 백팩으로 쿡쿡 찔러대는 젊은 남성들에게 나는 냄새를 혐오하며, 우리는 스마트폰으로 재벌들의 기사를 애써 읽으며 감탄한다. 리스펙까지는 아닐지라도 우와를 연발하며.  

 

아니, 멀리 갈 것도 없다. 나도 이미 <설국열차>의 윌포드에 혹한 바가 있다. 열차는 돌아야 하고, 그렇기 위해서는 누군가는 좁은 구석 그 안에서 열차를 돌리기 위한 부품의 역할을 해야만 한다. 누군가는 희생해야 열차는 돌아가지 않나요? 그것을 <설국열차>의 메이슨(틸다 스윈튼)은 간단하게 말한 바 있다. 자기 자리를 지키라고. 머리칸은 머리칸, 꼬리칸은 꼬리칸. 자, 그렇게 그들은 자기의 자리를 지키러, 아니 사실은 별도리가 없어서 '내려간다'. 빗줄기는 쏟아지고, 그들은 자신들의 반지하방으로 돌아가는 중이다. 그들은 도대체 어디까지 내려가는 것일까. 어디까지 내려가는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계단을 내려간 후, 그들은 겨우 자신들의 반지하방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곳은 이미 침몰하는 중이다. 모든 곳은 가슴까지 물에 잠겼고, 변기는 계속 오물을 토해낸다.

 

 

 

 


댓글(5)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019-06-11 03: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8-08 01: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8-12 17: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8-14 11: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8-16 02: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출근하는 지하철에서 3편의 영화를 보았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링컨>, 레오스 카락스의 <홀리 모터스>,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코스모폴리스>. 어쩌면 이 첫문장을 보신 분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출근을 도대체 어디로 하기에, 3편이나?


아니, 그 3편의 영화를 (읽어)보았다,는 말이다. 허문영의 <보이지 않는 영화>에 실린 3편의 리뷰. 사실 지하철에서는 영화를 (거의) 보지 않는다. 나는 영화는 절대적으로 사이즈의 문제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작은 스마트폰 화면으로 들여다보는 영화, 더구나 사람들에게 이리 떠밀리고, 저리 떠밀리는 상황에서 보는 영화라면, 그것은 이미 영화가 아닌 다른 어떤 것이 되어버리고 만다. 어떤 의미에서는 거의 그것은 그 영화를 싫어하게 만드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작은 화면으로, 게다가 안좋은 화질로 본 어떤 영화를 우연히 극장에서 다시 보게 된 경우가 있었는데, 내가 본 영화는 그 영화가 아니었다. 전혀 다른 영화로 나에게는 받아들여졌다.


내가 서두에서 일종의 낚시질을 한 것은, 사실 어떤 의미에서는 허문영의 글들이 적어도 영화의 전부는 아닐지라도, 일정 부분을 본 것과도 같은 느낌을 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위에 쓴 3편의 영화를 사실 아직 모두 보지 못했고, 영화 소개 프로그램이나 예고편 등으로 짧게 본 것이 전부이지만, 그의 묘사는 이상하게도 영화의 일정 부분을 본 것처럼 느끼게 한다. 사실 그의 묘사력이 뛰어난 편이 아닌데도 그렇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은 그가 어떤 질문을 던지고 있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그가 묘사하는 그 장면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 답을 찾기 위해서는 글을 읽으면서 그 장면을 머릿속에서 계속 이미지화할 수 밖에 없다. 사실 실제의 영화(장면)를 보는 것도 거의 같다고 말할 수도 있다. 우리는 스크린을 들여다보고 있지만, 그 스크린은 이미지화되어 우리 머릿속으로 들어온다. 우리는 같은 장면을 봐도 다르게 기억한다. 그리고 내가 그 이미지를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 이미지는 더 생생해진다. 보지도 않은 영화의 이미지가.


허문영은 계속 질문을 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질문의 빈도라기보다는 사이즈다. 허문영이 묻는 것은 어떤 장면의 의미나, 그 장면이 소구하는 무엇이 아니다. 그보다는 그 장면이 불러오는 영화라는 것의 작동방식이다. 혹은 그 장면이 단적으로 드러내보이는 영화라는 것의 메커니즘이다. 그 질문들은 점점 커져, 거의 걷잡을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특히 오늘날의) 영화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폭력 이미지, 그것은 어떤 식으로 작동하고 있는가. 혹은 영화는 죽음을 어떤 식으로 넘어서는가, 혹은 넘어서려고 애쓰는가. 아마도 누군가는 이 마지막 문장을 보고 코웃음을 쳤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어떠한 것도 죽음을 넘어서지 못하는데, 고작 영화따위가?


그렇다. 사실 이것은 거의 불가능한 도전이다. 허문영은 일단 벽을 먼저 세우고는 그 벽을 넘어서려고 애를 쓴다. 그 과정에서 벽은 점점 더 단단해지고 거대해진다. 어느 틈에 가면 벽을 넘어서려고 애쓰는 것인지, 그 벽을 더 단단하고 거대하게 만드려고 애쓰는 것인지 모호해진다. 그러나 그의 글들이 흥미로워지는 것은 이 순간이다. 거대한 질문과 작은 답, 혹은 거대한 질문에의 도전. 그리고 예정된 실패.


개별 영화들을 다룬 2부보다, 영화의 윤리라는 거대한 질문에 도전한 잡문 성격의 1부가 더 흥미로운 것은 이 때문이다. 영화에 대한 글을 쓰면 늘 어려움을 느끼는 부분은 알고 있다고 믿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욕망을 억제하는 것이다. 답을 찾아서 제시하려는 욕망. 나는 당신보다 이 영화에 대해 이 만큼 더 알고 있어, 그러니 그것을 말해줄께,라는 식의 소아적인 욕망. 그래서 질문은 자신이 답을 낼 수 있도록 늘 빈곤해지고, 유혹에 쉽게 흔들린 글들은 이제 영화가 아닌 것을 다른 것을 보기 시작한다. 영화가 아닌, 자신이 본 영화, 자신이 만들어낸 이미지들.


영화를 보면서(어쩌면 세상을 보면서도) 왜 우리는 눈앞에 현전한 것을 종종 보지 못하며, 거기 없는 것을 종종 보았다고 느끼는가.(p.7)


그래서 그는 예정된 실패를 알지만, 거대한 질문을 쌓아나가는 것이 아닐까. 자신이 만들어낸 이미지에 휘둘리지 않으려면 결국은 계속 볼 수밖에 없다. 계속 봄으로써 자신이 만들어낸 이미지에 계속 배반당해야만 한다. 그러나 그렇게 보는 것은 결코 쉽지가 않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반복하여 본다고 해도, 그 과정에서 우리의 욕망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고자 하는 욕망, 그 욕망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허문영은 말한다. "우리가 응시해야 할 것은, 이 한 편의 영화 이전에 그 욕망과 충동일 것이다 (p.247)."

그것이 아마도 그가 말하는 '보이지 않는 영화'이다.



덧.

그래서 물론 나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링컨>, 레오스 카락스의 <홀리 모터스>,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코스모폴리스>, 이 3편의 영화를 봄으로써 내가 만들어낸 이미지에 배반당해야만 한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9-01-28 00: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2-02 01: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2-14 16:58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