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머싯 몸, <서머싯 몸 단편선 2>


단편 ‘탈출’(170~176쪽)에서 발췌함. 



어떤 여자가 어떤 남자와 결혼하기로 일단 결심했다면 그 남자가 살길은 당장 도망치는 것뿐이다. 이것에 대한 나의 확신은 변한 적이 없지만, 이 방법이 항상 통하는 것은 또 아니다. 한번은 내 친구가 어렴풋이 도사린 그 사악한 위험을 감지하고 어느 항구에서 무작정(직면한 위험과 즉각적 대응의 필요성을 절감한 터라 달랑 칫솔만 들고) 배에 올랐다. 이후 세상을 여행하며 일 년을 보냈지만, 이제는 안전하겠거니 마음을 놓고(“여자들은 변덕스러워. 게다가 열두 달이나 지났으니 나를 까맣게 잊었을 테지.”) 배에 올랐던 그 항구에 발을 내딛자마자 부둣가에서 그를 향해 열렬히 손을 흔드는 사람을 보았으니, 그가 피하려 했던 그 여자였다.(170쪽, ‘탈출’에서)


⇨ 사귀고 나서 자기에게 1년간 연락 없이 지낸 남자에게 열렬히 손을 흔드는 여자가 있다니 놀랍다. 1년간이나 연락 없이 안 보고 지낼 수 있는 남자라면, 그는 상대편 여자를 사랑하는 게 아니다. 이 단순한 진리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실제로 이런 일이 있다면, 여자는 남자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아 떠났다는 걸 알면서도 다시 잘해 보겠다는 마음으로 상대를 반기는 것인지 모른다. 그런데 다시 잘해 보겠다는 것이 성공할 가능성은 낮다. 왜냐하면 떠난 사람은 떠날 만한 이유가 있어서 떠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떠난 이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다른 사람을 만날 생각을 하는 것이 현명하다. 전화위복의 계기가 될 수도 있으니 상심할 필요는 없다.


소설 속 남자는 결국 기발한 아이디어로 여자가 스스로 물러나게 만든다. 그래서 소설 제목이 ‘탈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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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요정 2023-05-13 20:5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뭔가 가슴이 아픈 것 같지만 서로 오가는 감정이 아니라면 어쩔 수 없는 듯 해요. 읽어보고 싶어요. 기발한 아이디어 궁금합니다. 사진은 어디인가요? 영화 <헤어질 결심>에 나오는 바다와 같은 느낌이네요.

페크pek0501 2023-05-13 23:52   좋아요 3 | URL
꼬마요정 님, 반갑습니다.
더 나은 인연이 나중에 생길 수 있어요. 기발한 아이디어란 결혼해서 살 집을 둘이서 보러 다니는데
보는 집마다 이런저런 이유를 대서 남자가 계속 퇴짜를 놓아요. 그리고 계속 집을 보러 다니는 거죠. 지칠 때까지.
나중엔 여자가 다른 남자와 결혼한다는 소식을 전해 와요. 여자에게 전혀 상처를 주지 않고 이별하는 방법인 거죠.
사진은 제주도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댓글 감사합니다.^^

꼬마요정 2023-05-14 16:51   좋아요 2 | URL
아... 그렇군요 ㅋㅋㅋ 남자는 진짜 여자가 마음에 안 들었나봐요. ㅋㅋ
역시 제주도 멋지군요^^

페크pek0501 2023-05-14 17:07   좋아요 1 | URL
눈에 씌어진 콩깍지가 벗겨진 게 아닐까요? 이런 경우도 있으니까요.
좋은 하루 보내십시오.^^

stella.K 2023-05-14 19:2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요즘 드라마 ‘사랑의 이해‘를 보고 있습니다.
괜찮은 드라마 같아요. 사랑도 젊으니까 하는 거지 싶기도 하구요.
그런데 사랑은 맨정신으로는 못하잖아요.
그래서 드라마 같은 거 보면서 대리만족하는가 봐요.ㅋㅋ

페크pek0501 2023-05-15 10:14   좋아요 2 | URL
제가 모르는 드라마네요. 요즘 채널 수가 많다 보니 하도 드라마가 많아 남과 공통으로 시청하는 드라마가 없는 것 같아요. 눈에 띄면 볼게요. 저는 젊은이들의 연애보다 중년들의 연애가 재밌더라고요. 대리만족의 즐거움도 좋죠.
넷플릭스에서 시리즈물로 보니깐 시간에 구애받지 않아 좋더군요. 그런데 이것도 부지런해야 볼 수 있어요.
저는 자꾸 미루게 되고 그래서 본 게 많지 않아요. 좋은 하루 보내세요.^^

레삭매냐 2023-05-14 22: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seems like too much sarcastic -

페크pek0501 2023-05-15 10:16   좋아요 0 | URL
무슨 뜻인지요? 무엇이 비꼬는 것 같은가요? 서머싯 몸이? 소설 속 화자가? 혹시 제가?
댓글의 뜻을 모르겠어염. 시간 되시면 자세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당~~

레삭매냐 2023-05-15 10:43   좋아요 1 | URL
서머싯 몸이 쓴 글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그를 향해 열렬히 손을 흔드는 사람을 보았으니,
그가 피하려 했던 그 여자였다.(170쪽, ‘탈출’에서)˝

페크pek0501 2023-05-15 10:57   좋아요 1 | URL
아하! 그런거군요. 자세한 설명에 감사드립니다.
저자가 피하고 싶었던 여자가 있었는지 모르죠. 서머싯 몸은 소설 속 화자의 직업을 작가로 설정하고
주변 지인들에게서 일어나는 일을 쓴 단편들이 있어요. 그래서 읽다 보면 실제로 있었던 일을 쓴 것 같은 착각이 듭니다. 이것도 하나의 작법일 것 같습니다.
고맙습니다. 좋은 하루 보내시기 바랍니다.^^

젤소민아 2023-05-16 02: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모옴의 작품은 장편만 읽었는데, 단편도 챙겨야겠습니다~~

페크pek0501 2023-05-16 12:41   좋아요 0 | URL
몸의 장편은 거의 읽어서-인간의 굴레에서,를 비롯해 다섯 권쯤 읽은 것 같아요.
요즘은 단편을 즐깁니다. 단편도 좋아요.~~~

희선 2023-05-18 02: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남자가 비겁하네요 그때 바로 말하거나 그만두게 하지, 한해나 기다리게 하다니... 상처주지 않고 여자가 떠나게 만들었군요 그건 괜찮다고 해야 할지... 사람 마음은 참 모르겠네요


희선

페크pek0501 2023-05-18 10:54   좋아요 1 | URL
희선 님처럼 볼 수도 있군요. 댓글의 좋은 효과를 봅니다.ㅋㅋ
자기 딴에는 그것이 상대방에 대한 배려인지 몰라도 제가 상대방이었어도 화가 날 것 같아요. 진실을 바로 말하고 끝내야 하는 게 옳아요. 아예 만날 생각이 없다면 조금이라도 재회 가능성을 열어 두지 않아야 합니다. 차갑게 끝내야 해요. 본인의 마음이 약하다는 이유로 상대방을 헷갈리게 하면 그게 더 괴롭히는 게 되지요.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신형철, <인생의 역사>



나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이 죽을 때 : 


내 속에는 많은 내가 있다. 고통과 환멸만을 안기는 다른 관계들 속의 나를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은 당신과 함께 있을 때의 내가 나를 버텨주기 때문이었다. 단 하나의 분인의 힘으로 여러 다른 분인으로도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이었다. 나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이 죽을 때 나 중에 가장 중요한 나도 죽는다. 너의 장례식은 언제나 나의 장례식이다.(131~132쪽)




5천 명이 죽었다고 말하면 안 된다 :


이런 말을 덧붙이자. 언젠가 기타노 다케시는 말했다. “5천 명이 죽었다는 것을 ‘5천 명이 죽은 하나의 사건’이라고 한데 묶어 말하는 것은 모독이다. 그게 아니라 ‘한 사람이 죽은 사건이 5천 건 일어났다’가 맞다.”(132쪽) 




단 한 사람만 죽일 수는 없다 :


이 말과 비슷한 충격을 안긴 것이 히라노 게이치로의 다음 말이었다. “한 사람을 죽이는 행위는 그 사람의 주변, 나아가 그 주변으로 무한히 뻗어가는 분인끼리의 연결을 파괴하는 짓이다.” 왜 사람을 죽이면 안 되는가. 누구도 단 한 사람만 죽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살인은 언제나 연쇄살인이기 때문이다. 저 말들 덕분에 나는 비로소 ‘죽음을 세는 법’을 알게 됐다. 죽음을 셀 줄 아는 것, 그것이야말로 애도의 출발이라는 것도.(132쪽)


⇨ ‘누구도 단 한 사람만 죽일 수 없고 살인은 언제나 연쇄살인이라는’ 글을 난 이렇게 이해했다.  


한 명의 기혼 여성이 죽었다고 하자. 그러면 그녀의 부모를 죽인 것과 같다. 그녀의 배우자를 죽인 것과 같다. 그녀의 자녀를 죽인 것과 같다. 왜냐하면 그들 가족은 모두 그녀가 죽기 전의 인생을 살 수 없을 것이므로. 


게다가 그녀가 알고 지낸 사람들까지 범위를 확대해 보면, 한 사람의 죽음은 많은 사람의 죽음을 의미한다.   




내 속에는 많은 내가 있다. 고통과 환멸만을 안기는 다른 관계들 속의 나를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은 당신과 함께 있을 때의 내가 나를 버텨주기 때문이었다. 단 하나의 분인의 힘으로 여러 다른 분인으로도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이었다. 나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이 죽을 때 나 중에 가장 중요한 나도 죽는다. 너의 장례식은 언제나 나의 장례식이다.(131~132쪽)

이런 말을 덧붙이자. 언젠가 기타노 다케시는 말했다. "5천 명이 죽었다는 것을 ‘5천 명이 죽은 하나의 사건’이라고 한데 묶어 말하는 것은 모독이다. 그게 아니라 ‘한 사람이 죽은 사건이 5천 건 일어났다’가 맞다."(132쪽)

이 말과 비슷한 충격을 안긴 것이 히라노 게이치로의 다음 말이었다. "한 사람을 죽이는 행위는 그 사람의 주변, 나아가 그 주변으로 무한히 뻗어가는 분인끼리의 연결을 파괴하는 짓이다." 왜 사람을 죽이면 안 되는가. 누구도 단 한 사람만 죽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살인은 언제나 연쇄살인이기 때문이다. 저 말들 덕분에 나는 비로소 ‘죽음을 세는 법’을 알게 됐다. 죽음을 셀 줄 아는 것, 그것이야말로 애도의 출발이라는 것도.(1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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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3-05-12 19:1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대부분의 경우 한사람의 죽음이 주변의 많은 사람의 죽음을 의미하겠지만,

왠지 아닌 사람도 있을거란 생각이 드네요...

페크pek0501 2023-05-13 12:42   좋아요 1 | URL
오! 새파랑 님, 예리하십니다. 제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을 딱 말씀해 주셨네요.
1인가구가 많은 요즘 고독사도 일어나는 만큼 그런 점도 헤아려야겠네요.
새파랑 님의 댓글 한 줄이 제 사고 영역을 넓혀 주었습니다. 감사드려요. 앞으로도 좋은 말씀 부탁드려요.
좋은 하루 보내시고요...^0^

stella.K 2023-05-12 19:3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책 보다 커피군요.
아무리 책이 좋아도 당 떨어지면 아무 것도 못하죠.ㅋㅋ

페크pek0501 2023-05-13 12:45   좋아요 1 | URL
책과 커피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면 참 어려울 것 같습니다. ㅋㅋ 둘 다 너무 좋아해서요.
장소가 벅스였던 것 같은데 네 명이 만났을 때 찍은 사진입니다. 인간은 혼자가 아니라
늘 옆에 사람들이 있다는 의미로 올린 사진입니다. 저만 글과 사진의 조합 의미를 느끼는...ㅋㅋ

yamoo 2023-05-13 09:3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신형철의 에세이인가요??
음...신형철의 평론은 정말 읽기 힘들더라구요. 뭐, 신형철만 그럻겠습니까. 평론가들의 책 몇권을 본 이후로는 다시는 안 봅니다. 유일하게 열심히 읽는 평론가는 김현 정도.

<인생의 역사>가 에세이면 한 번 구매해서 봐야 겠으요~~

페크pek0501 2023-05-13 12:47   좋아요 0 | URL
작년 10월에 나온 신간인데 저자한테 이 책처럼 많이 팔리는 책은 처음일 것 같습니다.세일즈 포인트가 어마어마합니다. 팬이 많아진 것으로 추측합니다. 저는 팟캐스트를 통해 팬이 된 경우인데 목소리도 좋지만 저자의 지적 세계의 탁월함을 알아보게 되었어요. 그래서 구매했어요.^^

레삭매냐 2023-05-14 08: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두 잔 라떼에 담긴 하투하투~
멋지네요.

오늘은 급 소나기가 온다는 말
이 있던데, 카페에 가서 실컷
책이나 읽었으면 좋겠습니다 고저.

페크pek0501 2023-05-14 16:50   좋아요 1 | URL
커피 속 하트가 예쁘지요. 예뻐서 사진을 찍어 놓고 마셨어요.
오늘 소나기는 오지 않지만 공기는 좋아서 산책하기 알맞은 날 같습니다.
저도 레삭매냐 님과 같은 생각을 할 때가 있는데...ㅋㅋ그래서 몇 번이나 책을 들고 카페에 갔었지요. 후훗~~
 



















서머싯 몸, <서머싯 몸 단편선 2>



서머싯 몸의 단편 ‘시인’(243~250쪽)에서 발췌함.


화자는 친구의 권유로 위대한 시인인 ‘돈 칼리스토’의 집을 방문하게 된다.


나는 그의 시를 비평할 입장이 아니다. 스물셋의 나이에 그의 시를 처음 읽고 나는 환희에 휩싸였다. 그 열정과 영웅적 오만, 다채로운 생동감은 나를 철저히 사로잡았고, 심금을 울리는 시구와 사람을 홀리는 어조는 내 청춘의 황홀한 추억과 뒤섞여 오늘날까지도 살아 있기에, 지금도 그 시들을 읽으면 어김없이 가슴이 벅차오른다.(244쪽)



하지만 이는 모두 오래전의 일이었다. 돈 칼리스토는 사반세기 동안 더는 그에게 내어놓을 것이 없는 세상으로부터 미련 없이 물러나 고향인 에시하에 은둔하여 살았다. 내가 그곳을 방문하겠다고 말한 것은 바로 그 무렵인데(당시 나는 세비야에서 한두 주일 머물고 있었다.), 그 시인 때문이 아니라 디에고 토레가 더불어 소개한 안달루시아의 매력적인 소도시에 마음이 끌렸기 때문이다. 돈 칼리스토는 편지를 보낸 젊은이들을 가끔씩 초대해서 한창때 청중의 심금을 울렸던 불꽃을 다시 불태우며 젊은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았다.(245쪽)



“지금 그분은 어떤 모습인가?”

내가 물었다.

“멋지다네.”

“그분 사진 있나?”

“그럼 얼마나 좋겠나. 그분은 서른다섯 이후 줄곧 카메라를 피하신다네. 당신의 젊지 않은 모습을 후대에 보여 주고 싶지 않다는군.”(245쪽)



매부리코, 꽉 다물린 입매. 그는 웃음기 없는 눈을 내게 고정하고 다가왔는데, 그의 눈에는 사람을 냉정히 평가하는 눈빛이 어려 있었다. 그는 검은 옷을 입고 한 손에는 챙 넓은 모자를 들고 있었다. 그의 몸가짐에서 확신과 위엄이 풍겼다. 그는 내가 희망한 모습 그대로였다. 그를 바라보니 그가 어떻게 사람들의 마음을 휘어잡고 어떻게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는지 알 것 같았다. 그는 뼛속까지 시인이었다.

그는 안마당에서 천천히 나를 향해 다가왔다. 그의 눈은 진정한 독수리눈이었다. 나는 그것이 일생일대의 순간처럼 느껴졌다. 거기에 그가 서 있었기 때문이다.(249~250쪽)



나는 부끄러웠다. 그를 만나러 오기 전 미리 시를 읽고 준비한 것이 다행이었다. 

“외국인인 제가 이렇게 위대한 시인을 만나 뵙다니 대단한 영광입니다, 작가님.”

꿰뚫어 보는 두 눈에 즐거운 빛이 반짝거리고 단호하게 고부라진 입술에 미소가 순간적으로 스쳤다.

“나는 시인이 아닙니다. 세뇨르.(선생.) 모피 상인이에요. 착오가 있으신가 본데 돈 칼리스토는 옆집에 삽니다.”

내가 집을 잘못 찾았던 것이다.(250쪽)



⇨ 화자는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그를 ‘자기가 만나려는 시인’으로 착각하고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그는 내가 희망한 모습 그대로였다. 그를 바라보니 그가 어떻게 사람들의 마음을 휘어잡고 어떻게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는지 알 것 같았다. 그는 뼛속까지 시인이었다.」 


이 부분을 읽고 화자가 그에게서 뼛속까지 시인인 듯한 느낌이 들었다는 점에 나는 공감하기 어려웠다. 내가 문학 강좌를 들으러 다니던 때를 생각해 보면 강좌를 맡은 소설가는 소설가처럼 생기지 않았고, 강좌를 맡은 시인은 시인처럼 생기지 않았다. 

  

모르는 사람을 만날 때 자신이 예측한 대로의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드문 일이다. 예측은 대부분 어긋난다. 그래서 이 소설의 결말에서 반전이 일어나는 것이 당연하게 느껴진다. 작위적인 느낌이 들지 않는다. 

  



나는 부끄러웠다. 그를 만나러 오기 전 미리 시를 읽고 준비한 것이 다행이었다.
"외국인인 제가 이렇게 위대한 시인을 만나 뵙다니 대단한 영광입니다, 작가님."
꿰뚫어 보는 두 눈에 즐거운 빛이 반짝거리고 단호하게 고부라진 입술에 미소가 순간적으로 스쳤다.
"나는 시인이 아닙니다. 세뇨르.(선생.) 모피 상인이에요. 착오가 있으신가 본데 돈 칼리스토는 옆집에 삽니다."
내가 집을 잘못 찾았던 것이다.(2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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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3-05-05 18:0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시인은 옆집에. 그래도 그 정도면 정확도가 상당히 높은 편이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요.
페크님, 편안한 휴일 보내세요.^^

페크pek0501 2023-05-05 22:30   좋아요 2 | URL
제가 뒤에 쓴 글을 수정해서 지금 새로 올렸어요. 제가 자세히 설명하지 않아 이 소설을 읽지 않은 분들은
이해하기 어려울 것 같아서요.
내일도 비가 온다고 합니다. 산불이 나지 않을 것 같아 안심입니다. 내일 좋은 주말 보내세요.^^

stella.K 2023-05-05 19:5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바다네요. 그림 같기도하고, 약간 황량하기도하고. 흐흑~

페크pek0501 2023-05-05 22:31   좋아요 3 | URL
이번 여행 때 제주도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바다 사진을 많이 찍었어요. 흐흑^^

얄라알라 2023-05-10 23:38   좋아요 1 | URL
저도 페크님 직접 찎으신 사진인가 데려온 아이(사진)인가 했습니다^^


하늘과 바다는 청량하니 아름다운데, 잘 살펴보니 제주 바다의 쓰레기라....아름다운 풍경에서 피할 수 없어진 쓰레기인가 불안한 맘도 생기네요^^;

페크pek0501 2023-05-12 17:28   좋아요 0 | URL
저는 사진을 많이 찍어 놨어요. 저장되어 있는 사진을 다 못 올렸어요. ㅋㅋ
알라 님처럼 제주도 쓰레기로 볼 수도 있군요. 저는 바다를 있는 그대로 자연스럽게 찍고 싶었어요.^^

희선 2023-05-06 03: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을 보고 그 사람이 어떨 거다 상상하지만, 그것과 다를 때가 더 많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냥 작가를 상상하지 말고 글을 읽는 게 좋겠습니다 겉모습만 보고 어떻다 하면 안 될 텐데...

페크 님 주말 편안하게 보내세요 이 말 여러 번 하는 듯하네요


희선

페크pek0501 2023-05-07 10:36   좋아요 1 | URL
좋아하는 작가였는데 그의 외모를 보고 실망하는 독자가 있다더군요.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은 멋진 외모를 가진
사람으로 착각하기 쉽지요.
어제 가족과 함께 외출할 일이 있었는데 바람이 많이 불었어요. 오늘은 괜찮은 것 같군요.
희선 님도 편안한 휴일 보내세요. 여러 번 해도 좋은 인사말입니다.^^

새파랑 2023-05-06 09:4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러나 페크님은 작가처럼 생기셨습니다~!! 겉모습과 실제가 일치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궁금해지네요 ㅋ

페크pek0501 2023-05-07 10:38   좋아요 2 | URL
오! 그런 말 처음 들어요. 젊었을 땐 깍쟁이처럼 생겼다는 말을 들었는데 나이 드니 인상이 바뀌나 봅니다.
요즘은 그런 말 안 들어요. 좋은 휴일 되십시오. 감사합니다.^^

희선 2023-05-08 02: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월 5일과 6일은 비가 거의 하루 내내 왔어요 어제는 흐렸던 것 같아요 오늘은 맑을지... 별 일 없지만 날씨 좋으면 좋겠네요 페크 님 이번 한주 평안한 나날 보내시기 바랍니다


희선

페크pek0501 2023-05-12 17:29   좋아요 0 | URL
아까 일기예보 보니깐 오늘밤에도 비가 온다는 것 같아요. 봄비의 분위기가 나겠어요.
희선 님도 평화로운 나날 보내시기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서니데이 2023-05-08 17: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페크님 주말 잘 보내셨나요. 지난주에 제주에 비가 많이 왔다고 해요.
주말에 비가 평소보다 많이 오긴 했는데, 오늘은 햇볕 좋은 오후입니다.
이번주도 좋은 시간 되세요.^^

페크pek0501 2023-05-12 17:31   좋아요 1 | URL
예, 잘 보냈답니다. 오늘은 아침에 발레, 갔다왔어요. 땀 흘리고 샤워하고 나니 시원하더라고요.
미세먼지만 없으면 요즘 좋은 봄날 같아요. 이번 주도 다 갔네요. 내일 주말이네요.
즐거운 나날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yamoo 2023-05-10 12: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몸의 단편선을 꼭 읽어야 겠습니다. 갖고 있는데 계속 후순위로 밀렸네요..

우와~~ 바다닷!!..ㅜㅜ

페크pek0501 2023-05-12 17:32   좋아요 0 | URL
저도 읽지 못한 책이 너무 많아요. 반 이상 읽은 책도 많고요.
그래도 언제나 목표는 완독, 이지요. 완독할 그날까지~~ 고고~~
 


















<슬픈 인간>

일본 작가들의 산문을 실은 책.



마사무네 하쿠초, ‘한 가지 비밀’(98~102쪽)에서



최근 『뒤마 이야기』의 번역본을 읽는데 문득 마음을 자극하는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인간은 누구나 과거에 자기가 한 짓을 털어놓느니 죽음을 택하겠다고 여길 만한 일을 적어도 한 가지는 갖고 있다고 플루타르코스는 썼다.(98쪽) 



‘무덤까지 가져갈 비밀’을 친구에게 털어놓으면 웃음거리만 될지도 모르고 마음이 후련해질지도 모르지만, 그런 비밀을 누구나 하나둘쯤은 갖고 있고 그걸 품은 채 무덤까지 갈 것도 같다고 나는 공상한다. 

나한테는 그런 비밀 없네.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되도록 비밀로 해두고 싶은 일이야 몇 가지 있지만, 그걸 고백할 바에는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고 할 정도로, 그런 거창한 비밀은 없어.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도 말할 것이다.

과연 그럴까. 자기 일생을 되돌아봤을 때 과연 그럴까. 나는 그런 비밀다운 비밀, 절대 털어놓고 싶지 않은 비밀을 한두 가지는 가지고 있다. 일본의 근대소설에서는 자연주의 부흥과 함께 사소설이라는 것이 유행하여, 작가 자신의 실제 생활과 실제 심경을 철저하게 표현하고자 한 작가들이 속출했는데, 과연 그 모든 작가가 무덤까지 가져가고 싶을 만큼의 비밀을 작품 속에 낱낱이 털어놨을까.(99~100쪽)



이 특별한 비밀. (중략) 가족과 친구에게도 알리지 않음으로써 평화가 유지된다. 수십 년씩 친하게 지낸 친구도 나의 진상을 모른다는 걸 체험하고 있다. 우리는 지인에게 오해 받고 있다고 탄식하는 일이 종종 있지만, 오히려 오해 받고 있기에 가까이 지낼 수 있으며 진실을 안다면 서로 서먹해질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모두 고독하다고 할 수 있겠다.(101쪽)   


   


최근 『뒤마 이야기』의 번역본을 읽는데 문득 마음을 자극하는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인간은 누구나 과거에 자기가 한 짓을 털어놓느니 죽음을 택하겠다고 여길 만한 일을 적어도 한 가지는 갖고 있다고 플루타르코스는 썼다."(98쪽)

이 특별한 비밀. (중략) 가족과 친구에게도 알리지 않음으로써 평화가 유지된다. 수십 년씩 친하게 지낸 친구도 나의 진상을 모른다는 걸 체험하고 있다. 우리는 지인에게 오해 받고 있다고 탄식하는 일이 종종 있지만, 오히려 오해 받고 있기에 가까이 지낼 수 있으며 진실을 안다면 서로 서먹해질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모두 고독하다고 할 수 있겠다.(1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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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3-04-27 18:1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사소설 어떻게 생각하세요?
사소설, 메타픽션, 자전소설 기타등등 어떻게 구분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ㅎ
이젠 사소설의 위상도 높아진 것 같아요. 에니 아르노 땜에.

페크pek0501 2023-04-27 23:23   좋아요 2 | URL
사소설은 그 나름대로 견인력이 있지 않나요. 쓸 수만 있다면 괜찮죠.
김영하 팟캐스트에서 사소설을 쓰는 일본 작가를 소개한 적 있는 것 같아요.
자전소설은 체험을 소재로 쓰되 허구적 상상력이 개입된다는 점에서 사소설과 다르겠지요.
메타픽션은 잘 모르겠네요. 허구보다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글쓰기가 대세가 되는 시대가 온다고 말한 작가가 있긴 해요. 영화도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라고 하면 더 관심이 가긴 하더라고요^^

젤소민아 2023-04-27 23:39   좋아요 2 | URL
ㄴㄴ 사소설은 미야모토 테루가 참 좋은 것 같아요~
다사이 오자무의 딸 쓰시마 유코도 좋고요.

저도 ‘사소설‘의 경계가 좀 헛갈려요.
오에 겐자부로의 ‘개인적 체험‘은 딱 사소설 같던데 아니라고 하고요.

[하지만 이 작품이 작가의 개인적 체험만 단순하게 서술한 ‘사소설‘은 아니다. 오에 겐자부로는 아이의 죽음을 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책임감에 시달리는 청년의 모습을 통해 출구 없는 현실에 놓인 현대인에게 재생의 희망이 있는지 물음을 던진다.]https://www.mk.co.kr/news/culture/4617223

그리고 ‘메타픽션‘은 소설속에서 소설을 어떤식으로든 언급하는 걸 말한답니다~.

단순히 인물이 소설책을 읽는 행위 자체만으로는 메타성이 얕겠지만
소설 속에서 ‘소설‘이란 세게와 차원을 인정하고 그걸 다루고 있다면 메타소설이 된다고요.

칼비노의 ‘어느 겨울밤 한 여행자가‘같은 소설이 농도짙은 메타픽션이고요~

페크님, 제 리뷰에 ‘공감‘ 눌러주셔서 감사합니다~.

‘톡톡 칼럼‘ 사러 총총히~~ㅎㅎ

페크pek0501 2023-04-27 23:45   좋아요 0 | URL
젤소민아 님, 전문가 같으십니다. 좋은 정보에 감사드립니다.
메타픽션에 대해 배웠네요. 저는 믿기 어려운 이야기보다 작가가 체험을 바탕으로 쓴 소설에 더 맘이 끌리더라고요. 만약 전쟁 소설이라면 취재해서 쓴 것보다 전쟁터에서 실제 경험한 것을 쓴 것이 관심이 더 가죠.
앞으로도 고급 정보를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밤 되십시오.^^

stella.K 2023-04-28 15:21   좋아요 1 | URL
아, 지금 생각해 보니 메타픽션이 아니라
오토픽션이었어요. 어뜨케...엉엉~

페크pek0501 2023-04-30 09:46   좋아요 1 | URL
괜찮아염. 그럴 수도 있지요. 덕분에 제가 배운 게 있잖아요. 좋은 하루 보내시길...^^

yamoo 2023-04-28 17:3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사소설이 뭔지 궁금했는데.....덧글 읽으면서 사소설의 의미를 새롭게 알게되었네요..ㅎㅎ

저는 근데 일본 소설들은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듯해요. 오쿠다 히데오를 끝으로 졸업했는데...

나쓰메 쏘세키는 읽어볼 예정입니다~~

페크pek0501 2023-04-30 09:56   좋아요 1 | URL
미시마 유키오의 <금각사>와 나쓰메 소세키의 <도련님>을 좋아합니다.
이 산문집은 영미권 산문집을 읽고 나서 좋은 것 같아 일본 산문집으로 사 봤어요. 같은출판사에서 나옵니다.
프랑스 산문집도 갖고 있어요. 산문을 공부하려는 마음으로 읽고 있어요.^^

레삭매냐 2023-04-29 09: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비밀이란 정말, 가족이나
친구에게도 알리지 않는 게
비밀이지 싶습니다.

내 입 밖으로 나가는 순간,
비밀의 마력은 깨지니깐요.

페크pek0501 2023-04-30 09:58   좋아요 0 | URL
누구에게나 비밀이 있을 것 같아요. 없었으면 하는 일, 후회되는 일 등
그러나 비밀이 없는 삶은 좀 싱거운 것같이 느껴집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감사합니다.^^
 

















이명원, <마음이 소금밭인데 오랜만에 도서관에 갔다>



‘자기 언어’를 가지면 ‘자기 세계’를 갖는다(60~61쪽)에서



정작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흥미로웠던 것은 부모와의 애착 관계에 실패한 아기일지라도, ‘말(언어)’을 배움으로써 그 난관을 극복할 수 있다는 자못 놀라운 통찰이었다. 저자는 “버림받은 아이들은 내면세계에 애정적 결함을 안고 있으면서도, 말을 통해 그 흔적을 극복할 가능성도 언제나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말은 과거의 기억을 끊임없이 가공해내기도 하고, 지나온 삶의 역사를 예술작품으로 변모시키기도”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나는 이런 비결정론적인 저자의 시각이 마음에 들었다. 세상은 꿈꾼 만큼만 살 수 있다. 내가 말을 배움으로써 어둡고 고통스러운 자기모멸의 터널을 벗어난 것처럼, 상처로 충만한 아이들도 얼마든지 멋진 어른이 되는 일이 가능한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언어는 육친으로부터 상속받은 상처에 대한 사회문화적 보상 체계다. 그러니 자기 언어를 갖는 것은 자기 세계를 갖는다는 말과 같다는 진술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61쪽)


⇨ 이 글에서 책은 보리스 시륄니크의 『관계』라는 책을 말한다. 



정작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흥미로웠던 것은 부모와의 애착 관계에 실패한 아기일지라도, ‘말(언어)’을 배움으로써 그 난관을 극복할 수 있다는 자못 놀라운 통찰이었다. 저자는 "버림받은 아이들은 내면세계에 애정적 결함을 안고 있으면서도, 말을 통해 그 흔적을 극복할 가능성도 언제나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말은 과거의 기억을 끊임없이 가공해내기도 하고, 지나온 삶의 역사를 예술작품으로 변모시키기도"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나는 이런 비결정론적인 저자의 시각이 마음에 들었다. 세상은 꿈꾼 만큼만 살 수 있다. 내가 말을 배움으로써 어둡고 고통스러운 자기모멸의 터널을 벗어난 것처럼, 상처로 충만한 아이들도 얼마든지 멋진 어른이 되는 일이 가능한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언어는 육친으로부터 상속받은 상처에 대한 사회문화적 보상 체계다. 그러니 자기 언어를 갖는 것은 자기 세계를 갖는다는 말과 같다는 진술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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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3-04-27 18:2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이책도 읽어봐야 하는데…ㅠ

페크pek0501 2023-04-27 23:24   좋아요 1 | URL
이 책을 들춰 봤더니 밑줄이 많이 그어져 있더라고요. 그래서 필사하며 공부한다는 생각으로 올려봤어요.
시류를 타지 않는 글이 많아 좋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