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머싯 몸, <서머싯 몸 단편선 2>



서머싯 몸의 단편 ‘시인’(243~250쪽)에서 발췌함.


화자는 친구의 권유로 위대한 시인인 ‘돈 칼리스토’의 집을 방문하게 된다.


나는 그의 시를 비평할 입장이 아니다. 스물셋의 나이에 그의 시를 처음 읽고 나는 환희에 휩싸였다. 그 열정과 영웅적 오만, 다채로운 생동감은 나를 철저히 사로잡았고, 심금을 울리는 시구와 사람을 홀리는 어조는 내 청춘의 황홀한 추억과 뒤섞여 오늘날까지도 살아 있기에, 지금도 그 시들을 읽으면 어김없이 가슴이 벅차오른다.(244쪽)



하지만 이는 모두 오래전의 일이었다. 돈 칼리스토는 사반세기 동안 더는 그에게 내어놓을 것이 없는 세상으로부터 미련 없이 물러나 고향인 에시하에 은둔하여 살았다. 내가 그곳을 방문하겠다고 말한 것은 바로 그 무렵인데(당시 나는 세비야에서 한두 주일 머물고 있었다.), 그 시인 때문이 아니라 디에고 토레가 더불어 소개한 안달루시아의 매력적인 소도시에 마음이 끌렸기 때문이다. 돈 칼리스토는 편지를 보낸 젊은이들을 가끔씩 초대해서 한창때 청중의 심금을 울렸던 불꽃을 다시 불태우며 젊은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았다.(245쪽)



“지금 그분은 어떤 모습인가?”

내가 물었다.

“멋지다네.”

“그분 사진 있나?”

“그럼 얼마나 좋겠나. 그분은 서른다섯 이후 줄곧 카메라를 피하신다네. 당신의 젊지 않은 모습을 후대에 보여 주고 싶지 않다는군.”(245쪽)



매부리코, 꽉 다물린 입매. 그는 웃음기 없는 눈을 내게 고정하고 다가왔는데, 그의 눈에는 사람을 냉정히 평가하는 눈빛이 어려 있었다. 그는 검은 옷을 입고 한 손에는 챙 넓은 모자를 들고 있었다. 그의 몸가짐에서 확신과 위엄이 풍겼다. 그는 내가 희망한 모습 그대로였다. 그를 바라보니 그가 어떻게 사람들의 마음을 휘어잡고 어떻게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는지 알 것 같았다. 그는 뼛속까지 시인이었다.

그는 안마당에서 천천히 나를 향해 다가왔다. 그의 눈은 진정한 독수리눈이었다. 나는 그것이 일생일대의 순간처럼 느껴졌다. 거기에 그가 서 있었기 때문이다.(249~250쪽)



나는 부끄러웠다. 그를 만나러 오기 전 미리 시를 읽고 준비한 것이 다행이었다. 

“외국인인 제가 이렇게 위대한 시인을 만나 뵙다니 대단한 영광입니다, 작가님.”

꿰뚫어 보는 두 눈에 즐거운 빛이 반짝거리고 단호하게 고부라진 입술에 미소가 순간적으로 스쳤다.

“나는 시인이 아닙니다. 세뇨르.(선생.) 모피 상인이에요. 착오가 있으신가 본데 돈 칼리스토는 옆집에 삽니다.”

내가 집을 잘못 찾았던 것이다.(250쪽)



⇨ 화자는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그를 ‘자기가 만나려는 시인’으로 착각하고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그는 내가 희망한 모습 그대로였다. 그를 바라보니 그가 어떻게 사람들의 마음을 휘어잡고 어떻게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는지 알 것 같았다. 그는 뼛속까지 시인이었다.」 


이 부분을 읽고 화자가 그에게서 뼛속까지 시인인 듯한 느낌이 들었다는 점에 나는 공감하기 어려웠다. 내가 문학 강좌를 들으러 다니던 때를 생각해 보면 강좌를 맡은 소설가는 소설가처럼 생기지 않았고, 강좌를 맡은 시인은 시인처럼 생기지 않았다. 

  

모르는 사람을 만날 때 자신이 예측한 대로의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드문 일이다. 예측은 대부분 어긋난다. 그래서 이 소설의 결말에서 반전이 일어나는 것이 당연하게 느껴진다. 작위적인 느낌이 들지 않는다. 

  



나는 부끄러웠다. 그를 만나러 오기 전 미리 시를 읽고 준비한 것이 다행이었다.
"외국인인 제가 이렇게 위대한 시인을 만나 뵙다니 대단한 영광입니다, 작가님."
꿰뚫어 보는 두 눈에 즐거운 빛이 반짝거리고 단호하게 고부라진 입술에 미소가 순간적으로 스쳤다.
"나는 시인이 아닙니다. 세뇨르.(선생.) 모피 상인이에요. 착오가 있으신가 본데 돈 칼리스토는 옆집에 삽니다."
내가 집을 잘못 찾았던 것이다.(250쪽)


댓글(16) 먼댓글(0) 좋아요(4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서니데이 2023-05-05 18:0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시인은 옆집에. 그래도 그 정도면 정확도가 상당히 높은 편이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요.
페크님, 편안한 휴일 보내세요.^^

페크pek0501 2023-05-05 22:30   좋아요 2 | URL
제가 뒤에 쓴 글을 수정해서 지금 새로 올렸어요. 제가 자세히 설명하지 않아 이 소설을 읽지 않은 분들은
이해하기 어려울 것 같아서요.
내일도 비가 온다고 합니다. 산불이 나지 않을 것 같아 안심입니다. 내일 좋은 주말 보내세요.^^

stella.K 2023-05-05 19:5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바다네요. 그림 같기도하고, 약간 황량하기도하고. 흐흑~

페크pek0501 2023-05-05 22:31   좋아요 3 | URL
이번 여행 때 제주도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바다 사진을 많이 찍었어요. 흐흑^^

얄라알라 2023-05-10 23:38   좋아요 1 | URL
저도 페크님 직접 찎으신 사진인가 데려온 아이(사진)인가 했습니다^^


하늘과 바다는 청량하니 아름다운데, 잘 살펴보니 제주 바다의 쓰레기라....아름다운 풍경에서 피할 수 없어진 쓰레기인가 불안한 맘도 생기네요^^;

페크pek0501 2023-05-12 17:28   좋아요 0 | URL
저는 사진을 많이 찍어 놨어요. 저장되어 있는 사진을 다 못 올렸어요. ㅋㅋ
알라 님처럼 제주도 쓰레기로 볼 수도 있군요. 저는 바다를 있는 그대로 자연스럽게 찍고 싶었어요.^^

희선 2023-05-06 03: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을 보고 그 사람이 어떨 거다 상상하지만, 그것과 다를 때가 더 많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냥 작가를 상상하지 말고 글을 읽는 게 좋겠습니다 겉모습만 보고 어떻다 하면 안 될 텐데...

페크 님 주말 편안하게 보내세요 이 말 여러 번 하는 듯하네요


희선

페크pek0501 2023-05-07 10:36   좋아요 1 | URL
좋아하는 작가였는데 그의 외모를 보고 실망하는 독자가 있다더군요.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은 멋진 외모를 가진
사람으로 착각하기 쉽지요.
어제 가족과 함께 외출할 일이 있었는데 바람이 많이 불었어요. 오늘은 괜찮은 것 같군요.
희선 님도 편안한 휴일 보내세요. 여러 번 해도 좋은 인사말입니다.^^

새파랑 2023-05-06 09:4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러나 페크님은 작가처럼 생기셨습니다~!! 겉모습과 실제가 일치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궁금해지네요 ㅋ

페크pek0501 2023-05-07 10:38   좋아요 2 | URL
오! 그런 말 처음 들어요. 젊었을 땐 깍쟁이처럼 생겼다는 말을 들었는데 나이 드니 인상이 바뀌나 봅니다.
요즘은 그런 말 안 들어요. 좋은 휴일 되십시오. 감사합니다.^^

희선 2023-05-08 02: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월 5일과 6일은 비가 거의 하루 내내 왔어요 어제는 흐렸던 것 같아요 오늘은 맑을지... 별 일 없지만 날씨 좋으면 좋겠네요 페크 님 이번 한주 평안한 나날 보내시기 바랍니다


희선

페크pek0501 2023-05-12 17:29   좋아요 0 | URL
아까 일기예보 보니깐 오늘밤에도 비가 온다는 것 같아요. 봄비의 분위기가 나겠어요.
희선 님도 평화로운 나날 보내시기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서니데이 2023-05-08 17: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페크님 주말 잘 보내셨나요. 지난주에 제주에 비가 많이 왔다고 해요.
주말에 비가 평소보다 많이 오긴 했는데, 오늘은 햇볕 좋은 오후입니다.
이번주도 좋은 시간 되세요.^^

페크pek0501 2023-05-12 17:31   좋아요 1 | URL
예, 잘 보냈답니다. 오늘은 아침에 발레, 갔다왔어요. 땀 흘리고 샤워하고 나니 시원하더라고요.
미세먼지만 없으면 요즘 좋은 봄날 같아요. 이번 주도 다 갔네요. 내일 주말이네요.
즐거운 나날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yamoo 2023-05-10 12: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몸의 단편선을 꼭 읽어야 겠습니다. 갖고 있는데 계속 후순위로 밀렸네요..

우와~~ 바다닷!!..ㅜㅜ

페크pek0501 2023-05-12 17:32   좋아요 0 | URL
저도 읽지 못한 책이 너무 많아요. 반 이상 읽은 책도 많고요.
그래도 언제나 목표는 완독, 이지요. 완독할 그날까지~~ 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