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필 이 책을 읽을 때, 집으로 엄청난 양의 택배가 도착하기 시작했다. 영화를 전공하는 딸아이가 졸업 작품을 찍는데 필요한 물건들이었다. 이번 작업에서 PD로 참여한 딸아이는 영화를 찍는 과정에서 원활한 진행을 맡아야 한다. 계획된 모든 것이 차질 없이 진행되어야 하고, 참여하는 스텝들이 불편하지 않도록 배려해야 할 책임이 있다. 적당한 시간에 세끼의 식사를 배달시켜야 하고, 간식을 언제든지 먹을 수 있게 해 그들이 지치지 않게 해야 하며, 심지어 흡연자를 위한 담배 피우는 시간과 스텝들이 커피를 마시는 시간까지 일과표에 넣어야 한다.
택배상자에는 여러 가지 간식, 핫팩(날씨가 그리 춥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전기 스토브와 주전자, 각종 테이프, 심지어 쓰레기를 담는 비닐 등 수많은 자질구레한 물품들이 가득했다. 남편은 이 많은 물건을 은평구 증산동의 촬영장까지 차로 실어주어야만 했다. 전쟁으로 치자면 딸아이는 보급품을 지원하는 병참장교의 역할을 한 것이었다.
30분짜리 영화를 찍기 위해 준비해야 할 것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가장 중요한 시나리오가 있어야 하고, 그것을 관객이 납득할 수 있게 만드느라 많은 다른 의견의 조율을 통한 수정작업이 필요했다. 제작, 연출, 촬영, 미술을 맡은 헤드와 스텝들은 단 며칠간의 촬영을 위해 몇 달 전부터 오프라인과 온라인을 통해 엄청난 회의를 해야만 했다. 흡사 전쟁에 참여하는 군인들처럼 작전, 총사령관, 장교, 병사, 무기, 보급품, 차량 등이 그들에게도 필요한 것이었다.
24명의 스텝이 움직이기 위해 이렇게 많은 물품이 필요하다면, 1941년 ‘열등한 슬라브족을 몰살시키고 볼셰비즘을 박멸’하기 위해 친 추축국(親 樞軸國)의 부대를 합쳐 400만 병력을 소련으로 이동시킨 독일의 총사령관 히틀러가 준비해야 할 것들은 무엇이었을까? 1812년 나폴레옹 군대가 처절하게 패배해 퇴각한 곳을 다시 점령하고자 하는 히틀러의 시나리오에는 어떤 것이 들어 있었고, 우리는 무엇을 납득할 수 있을까?
1933년 권력을 잡은 히틀러는 군비 확장과 동시에 국민 생활을 수준 이상으로 유지시키려는 말도 안 되는 의지가 있었다. 당연히 이런 무리한 정책은 부작용을 가져오기 마련이고 더 많은 재정이 필요하게 되었다. 또한 공업부문의 노동력 부족현상이 일어났고, 이것은 서비스업이나 항만 노동자 등, 다른 곳의 노동력 부족과 농업 인구의 감소로 이어진다. 독일의 모든 것이 원활하게 돌아가기 위해서는 석유가 필요했다. 소련보다 먼저 선점한 루마니아에서 석유를 얻는 독일은 소련의 루마니아 공격을 우려했고, 루마니아뿐만 아니라 코카서스의 유전까지도 필요했다. 이런 여러 가지 위기로 독일은 외부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타국 병합에 의한 자원과 외화 획득, 점령한 국가의 주민 강제노동으로 독일 국민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 방식으로 군비확장 경제를 유지했다. 물론 이러한 내치적 요인으로 추진된 영토 확장정책은 타국과의 분쟁을 고조시키는 것이었지만, 나치 독일은 ‘위기’ 극복을 위해 전쟁에 돌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제2차 세계 대전은 시작되었다.......
사실 프랑스 등 각국을 정복한 후 독일의 점령정책은 자원과 공업제품 징발, 노동력의 강제 동원이라는 점을 강조한 것이었다. 그 덕분에 독일 국민의 생활은 전쟁 중임에도 불구하고 1944년에 전쟁 판세가 급격히 패배로 기울기까지 상대적으로 높은 수준을 유지했다. 그들은 초기 제국주의적 수탈정책으로 이익을 얻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누린 ‘공범자’였던 셈이다. -p128~129, ‘독소전쟁’]
독일이 소련을 상대로 일으킨 전쟁은 ‘세계관, 절멸, 통상 전쟁’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두 마리도 아닌 세 마리의 토끼를 쫓겠다는 욕심과 나에게 없는 것을 남에게서 가차 없이 빼앗아 내 가족을 배불리겠다는 뻔뻔한 생각이 동시에 있었다. 이런 파렴치한 히틀러와 절대로 그것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 분명한 스탈린이 맞붙은 독소 전쟁은 양쪽에 엄청난 손실을 주었고, 그 어떤 것에서도 도덕과 관용, 국제법이 적용되지 않았다.
“문짝을 부수면 썩은 건물 전체가 무너져 내릴 것이다!(p.54, 스탈린그라드)”라고 소련을 과소평가한 히틀러는 9~17주 정도 만에 소련 침공을 완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그것은 망상에 불과한 희망사항이었고, 생각했던 것보다 소련의 저항이 강해 독일은 모스크바를 점령하는 데 실패한다. 작전을 바꾼 독일은 코카서스의 석유를 포기하지 못해 스탈린그라드로 향했지만, 결국 독일 제6군은 그곳에서 완전히 소련군에게 포위당한다. 히틀러는 끝까지 항복이나 퇴각 명령을 내리지 않았지만 파울루스 원수는 소련에게 항복한다.
독일의 소련 침공에 대한 앤터니 비버의 『피의 기록,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굉장히 미시적인 접근으로 서술된 책이다. 독일 현대사를 전공한 오키 다케시의 『독소전쟁』은 거시적인 관점으로 일목요연하게 독소전쟁을 잘 정리해 놓았다. 예상과 달리 앤터니 비버보다 오키 다케시의 책에서 이 전쟁에 대한 개념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앤터니 비버의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대한 책을 읽어야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이번 여름에 읽은 저자의 다른 책인 『베를린 함락 1945』 때문이었다. 어떤 이유로 소련 병사들은 독일에 대해 복수의 칼날을 갈았으며, 그들이 왜 그렇게 끔찍한 집단 강간을 저질렀는지 궁금했다. 책의 여러 부분에서 계속 언급된 집단 강간과 ‘독일군이 러시아에서 한 짓’, ‘독일군이 소련에서 저지른 만행’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그렇다면 독일군은 소련 침공 시 강간을 하지 않았을까? 이 책(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강간’이란 단어는 딱 한군데에서만 언급된다.
[9월 8일자 스탈린그라드 전선 소식지 『스탈린코에 즈나미아』에는 사지가 묶인 채 겁에 질린 소녀의 사진이 실렸다. 설명은 이러했다. “여러분의 사랑하는 딸이 파시스트들에 의해 이렇게 묶여 있다면 다음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 그렇다. 그들은 이 어린 아이를 무참히 강간한 다음 전차 밑으로 던져 버릴 것이다. 전진하라, 전사들이여. 적을 쏘라. 범죄자들이 여러분의 딸을 강간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바로 여러분의 임무다.
-p.192]
저자는 이 문장에 대한 주석으로 ‘1942년 늦은 여름의 이 “강간”을 모티프로 한 선전이 1944년 말과 1945년 붉은 군대가 독일의 영토로 진격하면서 집단 강간을 저지른 것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는 점은 거의 의심의 여지가 없다’라고 설명했다.
독일이 소련을 침공한 후, 그들은 엄청난 양의 곡식과 가축, 원료와 노동력을 수탈했다. 히틀러는 ‘출동부대’라는 특수기동대를 투입해 유대인과 코미사르, 소련군 포로를 무자비하게 학살했다. 900일 동안 봉쇄한 레닌그라드에는 굶주리다 못해 인육을 먹는 사람들이 생길 정도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스탈린그라드에서 포위된 독일군 역시 나중에는 배고픔을 참지 못해 인육을 먹는 군인이 있었다. 인생사 새옹지마이다.
히틀러가 이렇게 소련인들을 가볍게 학살할 때, 스탈린은 그들을 구하는데 적극적이지 않았다. 독일을 이길 수만 있다면 자국 국민들의 희생은 당연한 것이었다. 소련군 포로는 전쟁이 끝난 후에 굴라크로 가야만했다. 군인들이 전사하면,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 또 다른 국민이 아무런 훈련도 받지 않고 전투에 동원되었다. ‘굶어 죽어가는 국민들은 안중에도 없었다.(p.75)
[한 독일군 장교는 러시아인들이 자기 동포의 시체를 발가벗기며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고 그와 병사들이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얘기했다. 하지만 독일군 병사들은 더 끔찍한 짓을 저질렀다. 그들은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서 옷과 장화를 빼앗은 다음 얼어붙은 허허벌판으로 쫓아 버렸던 것이다. 이렇게 내쫓긴 러시아인들은 대개 추위와 굶주림으로 죽을 수밖에 없었다......
모스크바 퇴각 때 독일군 병사들은 농가에서 닥치는 대로 가축과 식량을 빼앗아 갔다.
-p.86]
이런 독일의 만행으로 러시아인들은 분노와 원한을 키웠고, 그들에게 절대 질 수 없다는 결의를 다졌다.
히틀러는 스탈린그라드에서 포위된 제6군에게 항복을 원하지 않으며 끝까지 싸우라고 한다. 그들의 패배를 확실히 인식했을 때, 각 사단에서 두 명의 병사를 차출해 ‘원래의 6군에서 나온 상징적인 씨앗으로 새로운 6군(p.14)’을 만들 계획을 세운다. ‘히틀러판 노아의 방주(p.14, 스탈린그라드 전투)’였다. 히틀러의 소련 침공으로 붉은 군대가 입은 피해는 사상자 110만 명, 그 중 사망자는 48만 이상이었다. 민간인 피해자의 정확한 수는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
[스탈린그라드 참사 뒤 유일하게 밖으로 터져 나온 불만의 표시는 백장미라는 소규모 뮌헨 학생 그룹에게서 볼 수 있었다. 그들의 주장은 함부르크, 베를린, 슈투트가르트, 빈의 다른 학생들에게로 전파되었다. 조피 숄과 한스 숄 남매는 2월 18일 나치 체제의 전복을 호소하며 전단지를 살포하고 벽에 슬로건을 쓴 뒤, 뮌헨의 무트비히-막시밀리안 대학교에서 다시 전단지를 뿌리다가 체포되었다. 남매는 게슈타포에게 고문을 당한 뒤 뮌헨 인민 재판소 특별 재판에서 폴란트 프라이슬러에게 사형을 선고받고 교수형을 당했다. 철학 교수 쿠르트 후버를 비롯하여 그들 그룹의 다른 많은 인원들도 비슷한 운명을 맞았다.
-p.562, 스탈린그라드 전투]
날씨가 갑자기 추워져 거리는 온통 떨어진 낙엽으로 덮여 있다. 그 길을 걸으며, 낙엽을 밟으며 이 낙엽들이 전쟁으로 고통스럽게 죽어 간 인간의 생명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 개개인에게 죽음은 존재의 소멸이라는 엄청난 것이지만 권력을 가진 자에게 이 죽음들은 자신들이 들고 있는 술잔보다도 가벼웠을 것이다. 가진 것 없고, 약하기만 민중은 무엇을 위해 그렇게 목숨을 바쳤을까? 나 역시 아무것도 아닌 민중이기에 앞으로 걸어가야 할 길이 위태롭게 느껴진다.
지금 당신은 평화롭고 안전하게 살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