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뒷세이아, 어떻게 읽을 것인가 - 위대한 영웅의 여정에서 내 인생의 길을 찾다
김태진 지음 / 민음사 / 2026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영화 한 편의 파급력이 얼마나 큰지 많은 사람과 여러 매체에서 ‘오뒷세이아’ 얘기를 하고 있다. 웬만큼 이름 있는 유튜버들은 각자의 채널에서 한번쯤은 영화와 호메로스 서사시를 다룰 정도다. 다들 자신이 남들과 차별되고 특별한 것 같이 말하지만 들어보면 거의 내용의 흐름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영화와 유튜브만으로 ‘오뒷세이아’를 다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꽤 있을 것이다.

 

호메로스의 원작은 내용이 그리 어렵지는 않다. 다만 여기에 나오는 그리스 신들과 고대 희랍 용어, 그 당시 생활 방식이 익숙지 않아 주석을 의지해 읽어야만 한다. 당연히 진도가 잘 나가지 않아 읽는 속도가 느려진다. 천천히 시간을 두고 읽을 수밖에 없다. 그러다 지쳐버려 중간에 포기하기 쉽다. 완독하더라도 3000년 전 고대 희랍의 생소한 이야기에서 어떤 것을 가져와야 할지 막막한 경우가 많다.

 

‘오뒷세이아’의 범위는 거대하고 여기에 들어있는 의미는 다양해 사실 이 책은 여러 번 읽으면 좋겠지만 그 또한 쉽지 않으므로 번역자나 연구자의 해제나 해석을 참고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기본 개념을 먼저 알아야 자기 주도 학습이나 응용이 가능할 것이다. 이 책을 번역한 천병희, 이준석, 김헌의 개성 있는 해석도 나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다.

 

김태진의 『오뒷세이아, 어떻게 읽을 것인가』는 원전의 구성과 달리 시간 순으로 10개의 중요한 에피소드를 선택해 설명한 책이다. 제목과는 달리 ’어떻게 읽을 것인가‘보다는 주로 내용을 서술했다. 거기에 저자의 느낌을 표현했는데 사실 깊이는 별로 없다. 각 챕터 마지막에는 ‘오뒷세이아 미술관‘이란 제목으로 내용에 맞는 그림을 소개했는데 이 부분이 좋았다. 호메로스의 두 서사시가 서양 예술에 미친 영향이 얼마나 큰지 이 그림들의 다양함으로 새삼스레 보여 진다. 또한 ’오뒷세우스의 서재‘라는 제목으로 각 에피소드에서 가져올 수 있는 의미를 다른 책으로 확대해 서술해 놓았다. 책의 첫 부분에 주요 등장인물에 대해서도 짧게 설명한다.

 

저자는 오뒷세우스의 이야기가 무수한 시간을 지나 생생하게 지금까지 살아올 수 있었던 이유로 재미와 감동, 인간적인 우리의 모습을 그리고 있어서라고 말한다. 신화학자 조지프 캠벨의 말을 인용하며 오뒷세우스의 여정은 결국 ‘떠나기 전에는 알지 못했지만 모든 여정을 통과한 끝에 비로소 만나게 되는 나(p.10)’라는 것이다. 이 말이 오뒷세이아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인 것은 확실하다.

 

‘오뒷세이아’는 워낙 방대해 한 번에 모든 것을 이해하기는 어렵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에도 사실 일부분만 담겨 있을 뿐이다. 보통 ‘오뒷세이아’를 설명하는 기본 키워드는 김태진 저자가 언급한 부름, 의무, 망각, 우티스(nobody), 의심, 기억, 정체성, 갱생, 귀환 등이다. 여기에서 읽는 자가 지금 현재 가장 필요한 부분을 가져올 수밖에 없다. ‘어쩌면 어떻게 읽을 것인가’보다 내가 여기에서 ‘무엇을 가져올 것인지’가 더 중요할 수 있다. 다만 그것이 무엇이든, 그 어떤 것을 가져오든 이 이야기로 지금의 나와 우리를 설명할 수 있다는 것에 이 서사시의 위대함이 있을 것이다.

 

[블리스(Bliss)는 온전히 살아 있는 느낌을 의미한다. 진정한 나 자신이 되기 위해 해야 하는 일에 몰두하는 그런 순간의 희열이다......당신의 이타케는 어디인가? 그것은 남이 그려준 지도에는 없다. 처음부터 당신의 마음속에 있었다. 무엇을 할 때 당신은 온전히 살아 있는 느낌을 받는가? 언제 현실의 시간이 사라지고 피곤함도 달아나고 평소와 다른 당신이 활짝 깨어나는가? 진정한 당신이 되기 위해 꼭 해야 하는 일에 몰두하는 그런 순간, 감당할 수 없는 희열을 안겨주는 건 무엇인가? 그런 블리스의 순간이 있다면 그 순간을 믿어라. 그 길이 향하는 곳, 그곳이 바로 당신의 이타케다.

-p. 365, 368]


-오뒷세우스


-페넬로페와 오뒷세우스, 구혼자들


-키르케


-칼륍소

 

**본문의 그림을 편집했으며 페이지는 생략합니다.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48)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카스피 2026-09-03 19: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2030들은 만화로보는 그리스로마신화 덕분에 오디세이를 잘 안다는 착각에 빠지는것 같아요.하지만 그 덕분에 외국과 달리 한국에서 오디세이가 스파4를 제치고 1위를 하는 이유기도 하지요.

페넬로페 2026-09-03 20:23   좋아요 0 | URL
정말 그런 것 같아요. 저의 딸아이도 만화 덕분에 그리스 로마 신들 이름을 기억하고 있더라고요 ㅎㅎ
스파이더맨은 시리즈물이라 전 편을 다 보지 못해 영화 보러 가기가 조금 주저 되더라고요.

그렇게혜윰 2026-09-03 19: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닉네임도 이 이야기에서 기원하신 걸까요?^&

페넬로페 2026-09-03 20:25   좋아요 1 | URL
사실 아니예요
다른 소설의 주인공이 너무 맘에 들어 그 이름을 닉네임으로 정했는데~~
이제 그냥 여기의 페넬로페로 살짝 묻어 가려고 합니다.
앤 해서웨이 근처에도 못 가지만요.

잉크냄새 2026-09-03 21: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영화 뒤에 뒤따르는 오뒷세우스 열풍을 보며 ‘오뒷세우스 이야기가 의외로 잘 알려지지 않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페넬로페 2026-09-03 21:28   좋아요 0 | URL
오뒷세우스라는 이름은 알고 있어도 원작을 읽은 독자는 많이 없을 것 같아요. 이번 기회에 원작 읽기 도전을 많이 하더라고요.

잠자냥 2026-09-04 10: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아... 여기서 따오신 거 아니었구나. 전 지금까지 페넬로페 님 오디세이아의 페넬로페에서 닉네임 따오신 줄 알았어요.

근데 전 오디세이아 읽으면서 좀 웃겼던 게 ㅋㅋㅋ 고향이 그렇게 그립다면서 칼립소고, 키르케고 님프들이 자자고 하면 다 자버리는 오디세우스....ㅋㅋㅋㅋㅋㅋ 나원참... -_- 그리고 또 왜 먼바다 보면서 우는지 원 ㅋㅋㅋㅋㅋㅋㅋㅋ 페넬로페가 기다리지 말지 싶었어요. ㅋㅋㅋㅋㅋㅋ

페넬로페 2026-09-04 14:44   좋아요 1 | URL
기회된다면 닉네임의 출처를 리뷰로 쓰고 싶어요. 근데 그 책을 지금 읽으면 주인공에게 실망할까봐 재독을 못하겠어요 ㅎㅎ

맞아요.
뒤의 전승에는 자식까지 낳은 내용이 나온다고 하더라고요. 그뿐만 아니라 오뒷세우스의 부하들은 다 죽고 자신만 살잖아요. 그것도 마음에 안 들고
꼭 여자들이 오뒷세우스의 목욕을 시켜주고 기름도 발라주거든요. 그것도 참~~

책읽는나무 2026-09-04 10: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영화 본김에 원전 한 번 읽어봐야지 싶어 일단 책만 사다놓고….아직 읽을 엄두는 안 나는데 이렇게 페넬로페 님의 리뷰를 읽는 게 더 좋네요.ㅋㅋㅋ 그림 보면서 계속 주인공들 얼굴 떠올리게 되네요. 저는 그 박찬욱 감독과 놀란 감독이 서로 대화한 영상이 좀 인상적였거든요. 놀란 감독이 원전에서 자신이 연출하고 싶은 어떤 주제를 듣다 보니 그 방대한 주제들 속에서 무언가 하나를 콕 집어 그걸 다시 현대화시켜 표현해낸 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겠다. 싶어 그래서 감독을 거장이라 하나보다. 싶더군요.^^ 참 그럼 페넬로페 님의 닉네임은 어떤 소설의 주인공에서 따오신 건가요?^^

페넬로페 2026-09-04 14:49   좋아요 1 | URL
닉네임 따온 소설 재독하고 리뷰 한 번 쓰겠습니다.

이 책은 내용보다는 그림이 풍성해 좋았어요.
제가 올린 그림말고도 여러 에피소드에 맞는 다양한 그림이 소개되어 있었어요. 놀란 감독이 약간 서구적 시각에서 영화를 만들지만 어쨌든 대단한 것 같아요.
 
페루에서 온 신사
안드레 애치먼 지음, 홍한별 옮김 / 비채 / 2026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황당하기도, 우습기도 하지만 ‘질문’이란 카테고리 속에서 우리가 자주 인용하고 떠올리게 되는 것 중의 하나가 ‘당신은 전생을 믿으십니까?’이다. ‘평행이론’이란 그럴싸한 이름을 가진 전생의 존재와 생의 반복 현상에는 그것을 믿기도, 믿지 않기도 힘든 뭔가 찝찝함이 있다. 그렇다고 지금 살아가고 있는 나와 우리들을 단지 ‘자신의 유전자를 후세에 복제하여 전달하기 위한 생물학적 도구’라고 단정하기도 억울하다.

 

힘들거나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나는 꿈속에서 집으로 오는 도중에 똑같은 장소로 길을 잘못 든다. 그곳은 내가 전혀 모르는 곳이기에 길을 잘 몰라 계속 헤매고 다닌다. 잠에서 깨기 전까지 나는 집을 찾지 못해 고통스러워한다. 이제는 아예 그 꿈이 몸속에 체득되어 꿈을 꾸면서도 내가 꿈속에 들어와 있는 사실을 인식하기까지 한다. 이런 혼란과 기시감이 들때마다 내가 알지 못하는 신비로운 ‘뭔가’를 생각하게 된다. 나와 연결된 모든 것이 궁금해질 때가 있다.

 

이 소설에서 60대 초반의 남자, 라울은 이런 현상을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지속적인 존재인 또 다른 자아(p.48)’가 있어서라고 한다. 우리에게는 다른 자아가 있고 그것은 다양하게 여러 형태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전생이나 과거의 인연뿐만 아니라 아직 일어나지 않거나 만나지 않은 자아들 역시 수없이 나를 찾아오고 끌어당긴다고 한다. 그런 그림자 자아들을 접촉하고 연결시키는 것이 삶과 사랑의 정의라는 것이다.

 

안드레 애치먼의 『페루에서 온 신사』는 주술, 전생, 과거, 환생을 믿어야만 온전히 읽힐 수 있는 소설이다. 여기에 개연성이나 논리를 들이밀면 곤란하다. 위험하지만 작가가 이런 시도를 한 것은 어떤 사람이 가장 소중한 것을 잃었을 때, 그것에 대한 슬픔이 얼마나 크고 아픈지를 보여주기 위한 것인 것 같다. 특히 생각지도 못한 사고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다면 한 번이라도 다시 만나고 싶은 간절함이 있을 것이다. 설사 그것이 이해되지 못한 방식일지라도 믿어보며 접촉하고 싶은 소망이 생기지 않을까.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에서 아이네이아스는 카르타고의 여왕 디도를 떠나 고대도시 쿠마에 도착한다. 거기에 하데스로 가는 입구인 아베르누스가 있고 애도의 땅 ‘루겐테스 캄피’가 있다. 여기는 비극적 사랑을 했던 영혼이 머무는 곳이고 아이네이아스도 디도를 만난다. 라울은 루겐테스 캄피를 인용하며 마고를 통해 자신의 비극적 사랑을 다시 만나 완성하려 한다. 혼란스럽지만 마고 역시 기시감으로 자신의 전생을 믿게 되어 라울의 부탁을 들어준다. 라울을 이해하게 된 것이다.

 

『페루에서 온 신사』는 앉은 자리에서 바로 완독할 정도로 잘 읽힌다. 다만 소설을 읽는 내내 다른 소설과 드라마에서 수없이 많이 본 클리셰 천국이어서 당황할 정도였다. 소설과 드라마에서 이렇게나 자주 같은 소재가 반복되는 것은 그만큼 사람에게 사랑이 중요해서인가 보다. 또한 언제나 죽음을 앞둔 인간에게 미련과 불화가 없는 평화를 주기 위한 선물일 수도 있겠다. 여운이 많이 남는다.

 

[나중에 자기 방으로 돌아갔을 때 라울의 머릿속에서는 이상한 생각이 계속 맴돌았다. 같이 시간을 보낼 수 있어서 기뻤지만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이렇게 만나고 난 지금 이제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었다. 이 순간을 그토록 오래 기다렸는데, 그 순간이 왔다가 이제 지나갔다. 왔다가 갔다. 라울은 혼잣말로 되뇌었다. 왔다가 갔다- 라울은 잠시 후 양치질을 하면서 혼잣말로 속삭이고, 왔다가 갔다-잠들기 전에 잠시 책을 읽으면서 중얼거리고, 왔다가 갔다-마침내 침대 옆 등을 끄고 자려 할 때 생각했다. 육십 년 전에 왔고, 곧 사라질 자기 삶을 생각했다. 안 될 게 뭔가, 라울은 생각했다. 그런 거지.

-p.141]

 

우연히 이 소설을 읽을 때 넷플릭스로 ’이번 생도 잘 부탁해‘ 드라마를 정주행 했다. 둘 다 내용을 잘 모른 상태로 선택했는데 소재가 너무 비슷해 신기했다.

평행이론은 정말 존재하는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5)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압록강은 흐른다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00
이미륵 지음, 안삼환 옮김 / 민음사 / 2026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미륵의 『압록강은 흐른다』는 한국인이 독일어로 쓴 소설이다. 그래서인지 이 소설의 문장은 현상을 설명하며, 많이 정제되어 있다. 이것은 문학평론가 박혜진의 해설처럼, ‘담담하며 고요한 절제의 미학(p.237)'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자전적 내용을 바탕으로 하지만, 경계의 바깥에서 안을 들여다봤기에 절제될 수 있었을 것이다. 몸은 독일에 있지만 영혼을 고국에만 두었다면 이미륵의 문장은 격한 울음이었을 것이다.

 

감정이 절제된 채, 묵묵히 진행되는 이미륵의 글은 비슷한 시대를 자전적 내용으로 쓴 박완서의 문장과 대조적이다. 집요하고도 선득한 느낌마저 드는 박완서의 문장에 비해 그의 글은 건조하면서도 따뜻하다. 글을 읽을 대상이 그 당시 한국을 거의 모르는 독일인이라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작가의 의도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독일인이 아닌 나에게 이 책은 두 가지 시선으로 읽혔다. 여기에 실제 이미륵이란 사람을 넣어 읽는 것과 그를 떠나 단지 이 책을 소설로만 읽는 경우다.

 

이 소설에는 구시대에 태어나 신문물과 신학문을 받아들여야 하는 그 당시 사람들의 혼란이 있다. 시대를 잘못 만나 독일로 망명길에 올라 다시 고향에 돌아오지 못한 한 젊은이의 애환도 있다. 말도 생활환경도 다른 그 먼 곳에서 겪었을 서러움과 인종차별, 고향에 대한 향수는 표현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안전하다고 여기고 간 그곳이 나치의 소굴이자 제 2차 세계대전의 현장이 되었고, 거기에서 살아남아야 했을 이미륵의 고단한 삶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언제 들어도 디아스포라의 사연은 슬프고 먹먹하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담담하게 서술된 여기에 특별한 감정을 드러내진 않지만, 고향, 가족, 지나온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 가득하다. 소설의 모든 곳에 따뜻함이 있다. 사람들의 순수와 사심 없는 태도에 감탄할 정도다. 다만 일본에 의해 식민지가 된 것에 대한 두루뭉술함과 중화사상에 젖은 그 당시 지식인의 태도가 아쉬웠다. 먼 훗날 그 시대를 바라보는 나에게 답답함이 느껴졌다.

 

딸 셋을 낳고 아들을 낳기 원하는 어머니를 위해 대신 부처님께 불공을 드리는 여인의 도움으로 세상에 태어난 ‘나’는 미륵(彌勒)이란 아호로 불리게 된다. 5세의 미륵은 사촌 형 수암과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다. 아버지가 작고한 동생의 식솔을 거둔 것이다. 남편이 죽은 고모와 그의 아들 칠성과도 잠깐 동안 함께 지낸다. 직계가족뿐만 아니라 주변 친척들도 챙겨야 했던 아버지의 고단함이 보였지만 천석꾼 집안이라 가능했을 것이다. 미륵, 수암, 칠성은 아버지가 집에 개설한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고, 장난치며 싸우고 벌을 받으며 개구 진 어린 시절을 보낸다.

 

퉁풍으로 아버지가 죽을 고비를 넘기자, 아버지는 서당을 없애고 수암 가족과 칠성 가족도 분가한다. 북적댔던 집안은 조용해지고 미륵은 아버지와 친구처럼 다정하고 친밀한 사이가 된다. 미륵은 계속 한학을 공부하고 있었지만 이미 신식학교가 들어와 서양 또는 유럽이라고 부르는 곳에서 온 신학문을 가르치고 있었다. 고민 끝에 미륵도 학교에 입학하고, 힘들어하며 과학과 수학을 배운다. 특히 영어는 미륵에게 너무 어려운 공부였다. 그곳에서 친구들은 미륵의 공부를 도와준다. 미륵의 집안은 세계정세에 대해 잘 몰랐지만 이미 미륵의 친구들은 잘 알고 있었고 공부에 대한 진도도 많이 나간 상태였다. 미륵도 운명처럼 유럽을 생각하며 새 시대가 오고 있음을 인식한다.

 

일찍 한국에 들어 온 일본인은 거의 장사를 했고 사람들은 ‘왜놈들’이라 지칭하며 무시했다. 하지만 일본에 의해 나라가 합병되고 일본은 군대를 동원해 강압적으로 한국인을 통제한다. 어느 여름 날 미륵은 아버지와 옥계천변으로 물놀이를 나가 좋은 시간을 보냈지만, 그 날 저녁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다. 미륵은 송림으로 가서 잠시 칩거하지만 경성의전(서울대 의대)으로 진학하기 위해 해주에서 서울로 간다. 의학을 배우고 서울 생활을 하며 미륵은 새 시대에 눈을 뜬다. 여지껏 우리나라에서 시행했던 것들이 서양의 학문에 비해 턱없이 비효율적인 것이 많았던 것을 공부를 통해 알게 된다.

 

경성의전에서의 여섯째 학기 중에 3.1 운동이 일어났고 미륵은 참가해 수배자가 된다. 미륵은 망명하기로 결심하고 일본인의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압록강을 건넌다. 만주의 수도 묵덴, 천진을 거쳐 남경, 양자강을 지나 상해에 도착한다. 그곳에서 몇 달 기다리다 여권이 나오자 프랑스의 거대한 여객선인 ‘폴 르카’호에 탑승한다. 사이공, 실론 섬, 싱가포르, 인도양, 지부티, 홍해, 시나이 산, 수에즈 운하, 지중해, 그리스, 이탈리아, 메시나 해변을 지나 마르세유 항에 입항한다.

 

미륵은 그곳에서 독일로 가 어려운 언어를 공부하며 고향을 그리워하고 그곳을 회상한다. 어머니께 편지를 보내고 매일 답장이 왔는지 우체국에 간다. 우체국에서 집으로 돌아오며, 어느 낯선 집 마당에 피어있는 꼬리 관목에 눈이 가 한참을 그 앞에 서 있기도 한다. 해주 자신의 집 정원에서 본 꽃이었기 때문에 반가워서다. 여러 계절이 지나 드디어 도착한 누나의 답장에는 어머니가 며칠의 신고(辛苦)하신 끝에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들어 있다.

 

 

나는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을 겪은 조부모와 부모를 두었다. 할아버지는 집안의 종손으로 존중을 받으셨고 한복을 입고 생활하였다. 지금도 기억나지만 내가 어릴 때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애도하기 위해 9일상을 했었고 시골집 마당에 차양을 치고 조문객을 받았었다. 대를 이어 종손이 된 큰아버지 역시 할아버지와 별반 다를 것 없는 삶을 살았지만 차남인 나의 아버지는 도시로 나와 공부를 해 은행원이 되었다.

 

한 반에 60명이 넘고 강압적이며 일률적인 교육을 초, 중 고등학교에서 받았고, 그때는 철저히 아날로그의 생활을 했다. 친지와 친구의 전화번호를 수십 개 외워 전화를 걸 수 있었다. 각 다른 대학으로 진학한 우리 친구들은 편지를 열심히 주고받기도 했다. 빠르게 컴퓨터가 세상을 점령했고 우리는 또 디지털의 세계에 입문해야 했다. 지금은 곧 대세가 될 인공지능이 고개를 내민다. 아니 달려오고 있다.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난 거기에서 잘 살아갈 수 있을지 걱정이 된다. 언제나 새 시대는 물밀듯이 밀려오고 나와 같이 미륵도 구시대와 새 시대의 경계, 타국에서 끊임없는 선택을 했을 것이다. 다만 거기에 아픈 역사의 반복만은 없길 바란다.

 

『압록강은 흐른다』는 이미륵의 자전적 소설이며 독일에서 혼자 고독한 삶을 살아야했던 그가 고향과 가족에 대한 지독한 향수를 담은 글이다. 어떤 배경이든 노스탤지어와 디아스포라가 있다면 누구나 거기에 마음이 움직인다. 이런 내용으로 담담하고 아름답게 서술된 이국의 서사가 전후 독일인의 마음에 감동을 주었을 것이다.

 

끝내 한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독일에서 위암으로 세상을 떠난 미륵은 억울하고도 착잡한 심정이었겠지만, 인간 삶의 허무와 불가해함을 이해했기에 이렇게 정제된 글로 지나간 인생을 돌아볼 수 있었을 것이다. 감동과 비판의 양가감정으로 이 책을 읽었지만 미륵의 고뇌, 여정, 그의 부모님의 죽음은 애틋했다. 작가 연보에 의하면 미륵은 조혼을 해 두 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아마 그들은 독일로 가지 못한 듯하다. 두 아들은 6.25 전쟁으로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한국인이 독일어로 쓴 소설을 다시 한국어로 번역된 글을 읽는다는 것에 기분이 약간 묘했다. 오래 전 전혜린의 번역으로 읽었을 이 소설은 내용은 전혀 생각나지 않고 제목만 나의 기억에 남아 있었다. 기대했던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00번으로 이 책이 출간되지 않았다면 난 아마 재독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과 마찬가지로 책도 이렇게 우연으로 다가와 인연으로 맺어지는 것 같다.

 

[사라져가는 조선의 풍경과 기억을 보존하는 기록인 동시에 식민지라는 역사적 조건이 개인의 삶을 어떻게 이동시키고 변화시키는지 보여 주는 증언으로서 이 소설은 단순히 과거를 회상하는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이 왜 자신의 언어와 장소를 떠날 수밖에 없는지 변호한다. 조국을 떠난 뒤에야 가능해진 회고이자 타국의 언어를 선택한 뒤에야 구성할 수 있는 텍스트였다는 점에서 디아스포라 문학을 대표하는 이 작품이 독일어로 쓰인 것은 선택의 여지 없는 선택이었다. -p.240~241, 작품 해설 중에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8)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도스토옙스키와 톨스토이 - 장편소설 속 만남과 헤어짐
윤새라 지음 / 한양대학교출판부 / 2019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올해 들어 내내 도스토옙스키와 톨스토이의 소설을 읽고 있다. 내가 참여하고 있는 두 개의 독서 동아리는 보통 연말에 내년에 읽을 책을 투표로 결정하는데 이번에 러시아 소설이 거의 선택되었다. 도서관의 ‘클래식’ 독서 동아리는 주로 고전을 읽기에 당연하지만, 동네의 지인들과 함께하는 독서 모임에서도 나중에 남는 건 고전이라며 결국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를 상반기에 읽기로 했다. 선정된 책 모두가 3권과 4권짜리여서 한 달에 한 권씩 읽다보니 어쩌다 매달 러시아 소설을 읽게 된 것이다.

 

나는 톨스토이보다는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을 많이 읽어왔고, 나의 최애 작가 중 한 사람도 도스토옙스키였다. 하지만 이번에 ‘악령’과 ‘안나 카레니나(재독)’를 동시에 읽다보니 살짝 시계추가 도스토옙스키에서 톨스토이로 기울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악령’에서 도작가에게 실망을 많이 했기 때문이다. 전개가 너무 지루했고, 이 작품에서도 여지없이 도작가가 즐겨 사용하는 여러 요소가 있어 식상했다. 작정하고 쓴 정치 소설이라 반감이 들기도 했다. 그에 비해 ‘안나 카레니나’는 너무 훌륭했다.

 

평론가 신형철은 ’세상 사람들이 ‘외도를 하다 자살한 여자’라고 요약할 어떤 이의 진실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 톨스토이는 2000쪽이 넘는 소설을 썼다. 그것이 안나 카레니나다. 이런 작업을 ‘문학적 판단’이라 명명하면서 나는 이런 문장을 썼다. ”어떤 조건하에서 80명이 오른쪽을 선택할 때, 문학은 왼쪽을 선택한 20명의 내면으로 들어가려 할 것이다. 그 20명에게서 어떤 경향성을 찾아내려고? 아니다. 20명이 모두 제각각의 이유로 왼쪽을 선택했음을 20개의 이야기로 보여주기 위해서다.(‘정확한 사랑의 실험’ 중에서, 신형철, 마음산책, 2014)‘고 썼다.

 

신형철의 글처럼 톨스토이는 기승전결의 군더더기 없는 전개로 사람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변화의 과정을 기가 막히게 표현해 ’안나‘라는 한 인간을 이해하게 만든다. 개별적인 것을 보편적인 것으로 만드는 문학의 역할에 잘 맞았다. 요즘 읽고 있는 ’전쟁과 평화‘에서도 톨스토이라는 대작가의 진가는 발휘된다. 막힘없이 잘 읽히면서도, 그 속에서 성장하는 인물과 전쟁의 상황을 어떻게 이렇게 잘 쓸 수 있는지 매번 감탄한다. 그렇지만 너무 세련되고 매끈한 톨스토이의 글을 읽다보면 마음 한 구석에서 도스토옙스키에 대한 그리움이 새록새록 돋아난다. 감상적이지만 절절한 그의 문장이 그립다. 길을 가다 계속 자동차 방지 턱에 걸려 몸이 앞으로 숙여졌다 뒤로 갔다하는, 그런 불편함이 문학의 본질에 더 가깝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러시아는 표트르 대제가 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하기 전에는 중세에 머물러 있었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유럽의 다른 나라들에 비해 발전이 느렸다. 1812년 조국전쟁에서 패주하는 나폴레옹을 쫓아간 귀족 군인들이 유럽의 발전된 모습에 너무 놀라 개혁을 요구한 혁명이 ‘데카브리스트의 난(1825)’이었다. 마침 그 봉기는 니콜라이 1세 황제 취임식에서 일어났고 그 사건으로 겁먹은 황제는 집권 내내 철권정치를 시행한다. 푸쉬킨과 도스토옙스키(페트라솁스키 사건)는 강력한 니콜라이 1세 압제의 희생양이었다. 러시아에서의 개혁은 1860년대 이후 알렉산드르 2세 때에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이런 영향으로 러시아 문학은 영미나 프랑스 문학이 가는 길을 순서대로 따라가지 않아 독특한 개성이 있고, 그것이 또한 큰 매력으로 작용한다.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에 대한 평가는 사람마다 다르다. 러시아의 메레쥐콥스키는 도스토옙스키에게, 나보코프는 톨스토이에게 더 후한 점수를 주었다. 반면 상대적으로 다른 작가에게는 낮은 점수를 준다. 메레쥐콥스키는 톨스토이의 글과 삶이 일치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나보코프는 ‘나보코프의 러시아 문학 강의‘에서 톨스토이, 고골, 체호프, 투르게네프 순으로 순위를 매겼고 도스토옙스키에게는 혐오에 가까운 혹평을 하고 있다. 도스토옙스키의 감상적 글쓰기를 비판했는데, 그의 인간에 대한 연민과 순수, 고통의 숭고함에 대한 시각을 너무 간과한 것 같다.

 

윤새라의 『도스토옙스키와 톨스토이』(장편소설 속 만남과 헤어짐)는 두 사람의 생애에서 시작해, 6편의 장편 소설을 두 편씩 비교하며 두 작가를 비교 분석한다. 두 작가는 같은 나라, 같은 시기에 살았지만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그들의 작품 역시 공통점보다는 다른 점이 월등히 많다. 태어나고 자란 환경뿐만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서도 차이가 난다.

 

메레쥐콥스키는 톨스토이는 ‘육체의 비밀을 보는 자’고 도스토옙스키는 ‘정신의 비밀을 보는 자(p.16)‘로 표현했다. 톨스토이는 몸의 작은 디테일을 자세히 서술하지만 도스토옙스키는 외모묘사를 최소화하고 나머지는 주로 대화를 통해 나타낸다.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에서 각 인물에 대한 외모 묘사를 굉장히 자세히 서술한다. 환경에 따른 외모 변화에도 각별히 신경 써 표현한다. 심지어 보리스 드루베츠코이의 엄마인 안나 미하일로브나 드루베츠카야가 등장할 때마다 ‘울어서 부은 듯한 얼굴‘이란 표현을 반복해 약간 거부감이 들기도 한다. 이에 반해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에서는 대화체 문장이 많아 그것을 읽어 내기가 피곤할 때도 있다.

 

조지 스타이너는 두 작가의 대립 구도를 톨스토이는 서사시의 시인이며 이교도인 반면, 도스토옙스키는 극작가이고 기독교신자로 놓고 비교한다. 톨스토이는 호메로스에 가깝고, 도스토옙스키의 글은 연극적 경향이 강하다는 것이다. ‘행동을 중심으로 사건을 펼치고, 창작의 뿌리에 살인과 같은 ’극적인 사건‘이 있다고 짚어낸다(p.23). 하지만 미하일 바흐친은 도스토옙스키의 대화는 연극에서의 대화의 역할(극적인 대화)과는 다르게 ’대화적 말‘이라고 하며 ’말‘은 연극적 요소와 다르다고 주장한다. 한 인물의 말 속에 여러 사람의 말이 담겨있다는 것이다.

 

바흐친은 도스토옙스키 소설의 인물들이 작가로부터 독립된 반면 톨스토이 소설은 작가의 말이 인물에 투영되어 있다고 했다. 크로노토프(chronotope)는 시간(chronos)과 공간(topos)이라는 그리스 단어 둘은 한 단어로 결합한 것으로, 그 자체로 시공간이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음을 나타낸다(p.26). 바흐친은 이 단어를 문학에 접목시켜 연구했다. 한 작품 안에 여러 크로노토프가 있을 수 있고 이것은 서로 섞이면서 충돌한다는 것이다.

 

이 책은 메레쥐콥스키와 스타이너의 비교 연구를 이어가며 발전시킨 두 작가에 대한 비평이다. 두 작가의 장편 소설을 발표순서에 따라 두 개씩 묶어(전쟁과 평화/죄와 벌, 백치/안나 카레니나, 카라마조프 형제들/부활) 시공간과 공통되는 주제에 대해 고찰한다. 먼저 두 작가의 생애를 간략히 소개하며 시작한다. 우리가 잘 알듯이 두 작가는 전혀 다른 환경에서 태어났고 그것은 그들의 인생 전체에 영향을 준다. 귀족 출신이자 부자인 톨스토이는 여유 있게 글을 쓰면 되었지만, 도스토옙스키는 돈을 벌기위해 전투적으로 글을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생활을 이어갔다. 원고료도 도스토옙스키에 비해 톨스토이와 투르게네프가 훨씬 더 많이 받았다고 한다. 빚쟁이를 피해 유럽으로 가서 글을 쓴 도스토옙스키는 돈이 궁해 투르게네프에게 돈을 빌린 적도 있었다. 투르게네프는 톨스토이보다 훨씬 더 많은 농노가 있는 영지를 가질 정도로 돈이 많은 작가였다. 그럼에도 도스토옙스키는 나중에 극우주의자이면서 러시아정교의 신봉자가 되고, 톨스토이는 비록 실패했지만 진보적 개혁가가 된다.

 

‘전쟁과 평화’는 1865년부터 ‘러시아 통보’에 연재되고 ‘죄와 벌’은 그 다음해인 1866년에 같은 문예지에 연재된다. 이 시기는 톨스토이가 소피아와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혼 때였고, 도스토옙스키는 시베리아 유형에서 돌아와 1864년 아내와 형을 동시에 잃고 난 후였다. 톨스토이는 행복의 정점에서, 도스토옙스키는 경제난에 시달리며 각 첫 대작을 쓴다. 윤새라는 이 두 소설을 조지 스타이너의 서사시와 비극에 기반해서 비교하며 분석한다. 이 두 소설에 등장하는 나폴레옹에 대한 서술도 굉장히 흥미롭고 유익했다.

 

‘백치’와 ‘안나 카레니나’에서는 그 시대의 여성 문제, 아름다움과 선에 대한 의미에 대해 서술한다. 시공간의 변화도 비교한다. 도스토옙스키의 ‘백치’는 ‘죄와 벌’에 비해 넓어지고,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는 ‘전쟁과 평화’에 비해 좁아진다. ‘죄와 벌’과 ‘백치’는 똑같이 단독 주인공인 라스콜리니코프와 미시킨을 내세우지만 ‘백치’는 여자 주인공인 나스타샤도 부각시킨다. 두 작가의 마지막 장편소설인 ‘카라마조프 형제들’과 ‘부활’에서는 주로 법과 정의의 문제를 다룬다. 두 소설 다 법정장면이 있다. 공교롭게도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과 톨스토이의 ‘부활’은 끝에서 시베리아라는 공간에서 만난다.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읽기 위해서는 작가의 생애에서 출발하여 여러 배경지식이 필요하다. 이 책은 그런 면에서 나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작가 개인과 소설적 배경이 구체적이고도 세밀하게 잘 서술되어 있다. 특히 두 작가의 장편 소설을 두 편씩 비교 분석해 그 차이점과 공통점을 설명해주어 훨씬 더 이해하기 좋았다. 책 전체의 문장이 딱딱하지 않고 읽기 쉬운 점도 이 책의 큰 장점이다.

 

여기에 소개된 6개의 장편소설 중 4편을 읽었고, ‘전쟁과 평화’는 읽는 중이고 ‘백치’는 아직 읽지 않았지만, 이 책의 소설에 대한 해석에 대다수 공감했다. 다만 ‘안나 카레니나’에 대한 해석에서는 조금 아쉬움이 남는다. 저자는 안나의 자살을 브론스키에 대한 복수로 본다. 레빈과 안나를 비교하며 그 둘의 차이점을 ‘삶에 대한 기본 태도’로 본다. 여러 단점과 실패에도 레빈은 노력하고 소통하지만, 안나는 질투의 화신으로 브론스키와의 사랑만을 갈구한다는 것이다. 레빈의 견실한 결혼생활을 칭찬하며 안나는 근본적인 삶의 양식을 버리고 레빈과는 정반대의 길을 간다고 한다. 물론 저자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레빈과 안나의 비교는 19세기 러시아가 남자와 여자에게 가하는 차별이 없어야만 정당할 것이다. 똑같이 불륜을 저지르는 브론스키는 안나에 비해 훨씬 더 자유롭다. 안나와 브론스키를 대하는 사교계의 시선도 다르다. 그 시대 여성이 갈 수 있었던 영역은 사교계 아니면 연회뿐이다. ‘전쟁과 평화’의 나탸샤도 파티에 춤을 추러 가거나 집으로 초대된 손님들과 교류하는 것으로만 사회생활을 한다. 마리야 볼콘스카야는 아예 아버지가 짜놓은 시간표대로만 움직여야 한다. 안 그래도 좁은 여성의 영역에서 그마저도 거부당하고 집에 칩거해야할 안나에게 브론스키에 대한 집착과 심리적 불안은 당연한 것이다. 안나의 남편 카레닌은 이혼을 해주지도 않고 안나가 사랑하는 아들을 내주지도 않는다. 그런 면에서 사회적 제약이 너무 많은 안나에게 과연 레빈처럼 건실한 삶에 대한 기본 태도를 보일 수 있을지 의문이다. 안나의 오빠 오블론스키에 비해 안나에 대한 비난과 타락에 대한 프레임도 가혹하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이 테마로 볼 때 두 대가는 첫 번째, 두 번째, 그리고 마지막 장편소설별로 같은 관심사를 가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두 문호가 소설을 통해 만난다고 하겠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점은 같은 테마를 다루는 다른 시각, 다른 가치관, 다른 방식이다. 나폴레옹으로 상징되는 영웅주의에 비판적이면서도 그를 표현하는 방식이 다르고, 사법 개혁으로 달라진 재판의 맹점을 드러내면서도 서술 기법이나 해결책이 다른 식이다. 그렇게 도스토옙스키와 톨스토이는 만나고 엇갈린다. 더 나아가 시공간 매트릭스를 매개로 살펴본 장편소설의 진화 과정은 두 작가의 만남과 엇갈림을 한층 더 뚜렷하게 드러낸다. 톨스토이는 넓게 시작해 좁아져 가고, 도스토옙스키는 반대로 좁게 시작해 점차 넓어져 간다. -p.28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소금이 왜 바다에 있지
브리기테 슈바이거 지음, 박광자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26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의 출간 소식을 들었을 때 제목이 흥미로웠다. ‘소금이 왜 바다에 있지’라는, 너무 당연해 평소에는 생각지도 않던 문장에 소설의 내용도 특별할 것 같은 기대감이 들었다. 본문에서 어린 화자가 바다에 왜 소금이 있는지 물었을 때, 그녀의 아버지가 사람들이 소금을 싣고 와서 바다에 뿌렸다고 얘기해주고 어머니는 그 말에 행복한 미소를 짓는다. 이 문장은 상징하는 것이 많고 소설 전체의 주제를 압축해 보여준다. 바닷물에 소금이 들어있어 짜다는 과학적 사실마저 가부장적인 남자의, 말도 안 되는 농담 섞인 한 마디로 무시될 수 있다. 또한 누구나 저항 없이 받아들이는 명제를 끝까지 인정하지 못하는, 태생적으로 우울하고 창작물이 없는 예술가 기질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인생과 고통을 대변하는 말이기도 하다.

 

소설의 배경은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사이, 또는 양 대전 후의 오스트리아 린츠 부근과 빈이다. 지방 소도시에서 존경받고 꼭 필요한 존재인 의사의 딸로 태어난 화자(끝까지 이름을 알 수 없다)는 할머니와 어머니가 살아 온 삶을 똑같이 되풀이만 하면 중산층의 기득권과 소속감이 있는 낙원의 안정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다. 아버지의 말과 표정으로 행과 불행을 오가는 어머니, 끊임없는 핀잔을 들으며 얌전과 순종을 강요당하는 화자는 강한 가부장제의 그늘아래에 있다.

 

나치를 아무 저항 없이, 당연히 받아들이는 그 당시 중산층을 대표하는 아버지는 너무 전형적이다. 화자가 어릴 때 만나 결혼하게 된 남편 롤프도 마찬가지다. ‘남자는 싫으면 싫다고 해도 되고, 싫은 것은 안 해도 된다(p.23)’라는 사고방식이 그 어떤 상황에서도 적용된다. 사람들에게 존경받고 그것을 당연히 생각하면서도 그들의 입방아에 오르지 않기 위해 위선적인 행동을 하는 것도 가식적이다.

 

롤프와 오랫동안 연애를 했지만, 결혼에 확신을 가지지 못한 화자는 떠밀려, 부모님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결혼하게 된다. 대학 졸업을 하지 못하고 비서로 일하며 타자만 칠 수 있는 화자는 잘 난 남편을 모시며 전업주부의 역할을 잘 해내야 한다. 자신이 ‘칠칠치 못하고 부당하고 고마워할 줄 모르고 쓸모없고 비현실적이며 우울하고 불만투성이에 게으르고 뻔뻔하다고(p.42)' 생각하는 화자는, 남들처럼 살 수 없는 여자다. 다른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전개하는 삶의 진행을 받아들일 수 없다. 예민하며 겉으로 보이는 내가 자신이 아닌 것 같고, 알 수 없는 슬픔에 잠기고, 창작물이 없지만 예술가 기질을 가진 그녀는 가부장적인 남자가 원하는 내조를 할 수 없다.

 

그런 화자의 결혼 생활은 당연히 불행했고, 그녀는 의사인 친구 알베르트와 외도를 한다. 롤프와 화자는 알베르트와 힐데 부부와 친구 사이이다. 하지만 알베르트 역시 롤프와 별반 다르지 않다. 그는 화자를 섹스파트너로 여기며 그의 아이를 임신한 화자에게 피임하지 않았다고 비난하며 바로 중절 수술을 해준다. 힐데는 두 사람의 외도를 알지만 아이 때문에, 관습으로 그냥 알베르트와 살아간다. 알베르트와의 관계를 롤프에게 고백하고 그들은 이혼하고 갈 곳 없는 화자는 다시 부모님의 집으로 들어간다.

 

작가 ‘브리기테 슈바이거’의 자전적 내용이 담겨있는 이 소설은 따옴표를 쓰지 않고 대화체를 서술형 문장 사이에 넣어 형식을 파괴했지만 앉은 자리에서 다 읽힐 정도로 가독성이 좋다. 화자를 완전히 이해한 것은 아니지만 읽는 내내 공감되는 내용이 많았다. 수많은 소설에서, 특히 여성 작가가 쓴 소설에서 많이 본 한 여자와 그 가족에 얽힌 이야기지만, 이런 에피소드는 읽을 때마다 새롭다. 작가가 발표할 당시 페미니즘 소설로 엄청 관심을 모았지만, 지금 사람들은 언제 적 얘기를 되풀이 하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과연 이러한 내용이 지나간 구닥다리에 불과한 것일까?

 

대학 동기인 A, B와 1년에 서너 번 만난다. 서로 하는 일이 비슷해 대화가 잘 통하지만 한 가지만은 이해할 수 없는 게 있다. 싱글인 B의 전업주부론이다. 나와 A는 결혼했지만 전업주부는 아니라 B가 우리들에게 하는 얘기는 아니지만, B의 말을 들으면 거북하고 기분이 나쁘다. B는 전업주부인데 남편에게 그 역할을 다하지 않는 여자를 싫어한다. 밖에서 돈 벌기 힘든데, 집에 있는 여자가 당연히 가사일과 육아를 전담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긴다. 특히 퇴직한 남편을 싫어하고 귀찮아하는 전업주부도 비난한다. 평생 돈 버느라 힘든 남편이 이제 집에서 좀 쉬어야 하는데 구박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한다. B의 말이 전부 틀린 건 아니지만 들을 때마다 반감이 생긴다. B의 생각에는 여성의 가사노동에 대한 경제적 환산이 포함되지 않기 때문이다. 경제적 가치뿐만 아니라 단지 경제적인 것이 권력과 권위가 되는 것의 무시도 말이 되지 않는다.

 

물론 지금의 MZ세대는 B와 같은 생각을 하지 않겠지만 젊은 남성들은 어떤 태도를 갖고 있는지 의문이 든다. 심지어 극우화 되다시피 하는 젊은 남성들이 걱정된다. 그들에게 서로 같이 간다는 의지가 존재하는지.....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은 지금의 우리에게도 많은 것을 준다. 자살로 생을 마감한 작가처럼 화자에게 남겨진 삶 역시 녹록치 않아 보인다. 부모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계속 정신과를 전전할 화자가 말한 ‘누구나 스스로 돌보아야 한다(p.156)'는 의지가 실천되지 못한 채,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은 예감이 들기도 한다. 일요일에 점심을 먹으며, 저녁은 뭐 먹지라는 생각을 하는 나 자신도 화자와 닮아 있다. 마음이 무겁고 우울해진다.

 

[내가 필요한 것을 인정하면서 당신은 왜 날 떠나려는 거야, 라고 롤프가 묻는다. 그래야 하니까…내가. 그리고 카를도 그렇게 말했다…카를이 당신을 돌봐 준대? 아니, 카를이 누구나 스스로 돌봐야 한다고 했어. 길에 관해, 여행에 관해 글을 쓰면서 카를이 그랬어.

 

사람은 길을 가는 중이다. 어딘가로 여행 중이다, 라는 말을 하려고 내가 롤프를 깨운다. 도로 표시가 되어 있고 아스팔트 깔린 길을 가는 사람들이 내가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고 소리치고 있어. 나는 목적지 이름도 몰라. 아는 것이라고는 나 외에 아무도 거기서 날 기다리고 있지 않다는 거야. 카를이 그러는데, 나는 예술가 타입이래. 창작도 안하는데? 일생 동안 창작하지 못하는 예술가 기질의 사람이 있다고 카를이 말했어. 정말이지 카를이 진실을 말한 것 같아. 당신도 카를처럼 되고 싶은 거야? 자유롭고 별나게 살다가 카를이 어떻게 됐는지 봤잖아. 카를이 그러는데....이제 그만 자. 롤프가 말한다.

-p.155~15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7)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