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빛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58
존 밴빌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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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현재의 내가 과거로 되돌아간다. 굳어지고 완고해진, 온전하지 못한 기억 속에서 성기고 희미해진 빛을 따라 움직인다. 기억의 숲에서 나뭇잎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오래된 빛은 나를 왜곡되거나 잘못된, 또는 혼란스러운 길로 안내한다. 설령 확실하게 다가오는 몇 안 되는 지나간 인생의 밝은 빛조차 완벽하게 재현될 수는 없을 것이다. 내 식으로 해석되고 비틀어진 그 기억들에 얼마만큼의 의미를 두고 무슨 단어로 그 느낌들을 생생하고도 자세히 표현할 수 있을까?

 

작가 존 밴빌은 제목 그대로 <Ancient Light>를 따라 한 남자의 50년 전과 10년 전의 과거, 현재를 오가며 집요하게 희미한 기억을 끄집어내어 준다. ’알렉산더 클리브의 인생 전체를 지배한 그의 15세 때의 몇 달에 대해-‘머나먼 과거의 이미지들이 머릿속에 우글거리고 대개는 그게 기억인지 내가 만들어낸 것인지 알 수 없지만(p.14)’-서술한다. 매 페이지마다 아름다운 문장이 가득했지만, 하이픈으로 연결된 부연설명이 가득한 삽입구가 읽기를 방해했다. 마치 영어 독해를 할 때, 주어 찾기의 어려움을 겪는 것 같았다. 한 사람의 기억의 파편 조각들을 짜 맞춰 연결시키는 일이 쉽지 않음을 작가는 그런 복잡한 문장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거의 끝부분까지 힘들게 따라가다 마지막에 가서야 소설 전반에 대한 이해를 했고, 결국 나에게 감동과 여운, 무수한 생각을 하게 한 작가의 필력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50년 전, 15세의 소년 앨릭스는 자전거를 타고 언덕을 내려오다 봄바람에 치마가 뒤집어져 팬티가 노출된 어떤 여인을 우연히 보게 된다. 처음엔 그를 향해 하늘에서 곧장 덮쳐 내려오는 듯한 여신의 모습으로 보였지만, 사실은 그의 엄마 같은 중년 여성이었다. 그것이 앨릭스와 가장 친한 친구인 빌리 그레이의 엄마인 미시즈 그레이(실리아 그레이)와의 첫 만남이었다. 그 뒤 빌리의 집에서, 거울 속에 자신의 나신을 비추고 있는 미시즈 그레이의 모습을 또 다른 거울을 통해 엿 본 그는 그녀를 향한 수줍지만 은밀한 욕망에 사로잡힌다. 욕망하지만, 사실 그 대상이 늘 배경에 불과한, 무슨 일을 하느라 바쁜 엄마의 모습이기도 한 미시즈 그레이가 아닐 수도 있었다. 그저 우연히 마주친 미시즈 그레이의 모습이 한 사춘기 소년의 성을 자극했고 그는 어떤 다른 여자와도 사랑에 빠질 수 있었을 것이다.

 

며칠이 지나고 테니스 클럽에서 그들은 우연히 다시 만난다. 미시즈 그레이는 소년을 차에 태우고 으슥한 곳으로 데리고 가 이렇게 질문한다. “나한테 키스하고 싶어?(p.61)” 이 말을 계기로 그들의 사랑은 시작된다. 여기에서 궁금해진다. 왜 미시즈 그레이는 그녀보다 스무 살이나 어린, 아들의 친구를 선택하게 되었을까? 소설의 끝에 그 당시 미시즈 그레이의 사정이 조금 밝혀지지만, 책을 읽는 내내 그녀의 심리를 따라가기 쉽지 않았다. 이것은 단순히 그들의 관계에 대한 비판이나 도덕적 심판이 아니었다. 계속 그들을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드는 의문점이었다. 시한부 인생을 사는 자의 마지막 불꽃이었는지, 한 번의 일탈로 거침없이 시작된 육욕의 향연이었는지, 그 일탈이 소년에게 가져다준 변화에 대한 미안함의 책임이었는지, 답답한 시골구석에 갇혀 사는 중년 여자의 몸부림이었는지.....결국 이 모든 것이 노년이 된 알렉산더의 회상이기에 그 역시 추측과 자신의 생각으로만 머물 수밖에 없다.

 

이 소설은 알렉산더와 미시즈 그레이의 사랑뿐만 아니라 10년 전 임신한 채 자살한 알렉산더의 딸 캐스로 인해 힘든 삶을 살고 있는 자신과 아내 리디아의 현재의 모습. 또한 악셀 판더(문인, 비평가, 교사)‘라는 사람을 기반으로 한 영화에 출연한 알렉산더와 그의 상대배우인 돈 데번포트와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조사원인 빌리 스트라이커의 인생에 대해서도 나이 든 알렉산더는 관심을 갖는다.

 

세상에는 엄청나게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그 속에서 우리는 그 날 하루를 감당하며살아간다. 각자 견디며 살아내야 한다. 늙어버린 알렉산더 역시 아픔과 회한을 가진 채 하루를 감당하지만 지나온 세월이 준 쓰라림을 그는 사람에 대한 이해와 순명으로 승화시킨다. 딸아이를 잃은 슬픔으로 밤새 광증에 시달린 아내 리디아를 진정시키고 힘들어 둘이 침대에 누웠을 때, 커튼 사이의 바늘구멍만한 틈으로 빛이 들어와 마치 카메라 옵스쿠라의 형태로 보이는 바깥세상의 이미지는 아름다웠다. 새벽빛에 비친 선명하게 뒤집힌 세상의 모습에서 이 세상에 완벽하게 슬픈 것도, 온전히 기쁜 것도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소설 오래된 빛에는 몇 개의 단편 소설로 출간해도 좋을 풍성한 내용들이 서로 교차되며 서술된다. 매 페이지마다 단편 소설 하나가 들어있다고 느낄 정도로 생각할 것이 많았다. 단어 하나마다에 들어있는 비유도 좋았다. 구절구절 멈추어, 작가 존 밴빌, 아니 소년 앨릭스 그리고 노년이 된 알렉산더와 얘기 나누면 좋을 것 같았다. 나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고,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었다고 공감하고 싶었다. 그랬기에 읽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고 이 많은 아름다운 문장의 감상을 표현하기 어려워 책을 들고 카페에 간 날이 많았다.

 

산책길에서 찍은 많은 사진들을 다시 보면, 햇빛에 완전히 노출된 사진보다 빛이 살짝 들어간 사진이 훨씬 더 아름답고 신비롭다. 세상 모든 빛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을 볼 수 없듯, 노년에서 바라 본 과거는 전체적인 난파 속에서 건져 낸 무작위적인 표류물(p.14)’일 뿐이다. 그것들로 고해성사를 하든, 미숙함에 대한 어리석음을 인정하든, 지나온 인생의 여정은 그 어떤 것이라도 슬프고 아름답다. 여전히 모호하고 불안하기도 하지만 삶의 전진적인 난파에 부표가 되어주기엔 충분할 것이다.

 

[어떤 학자들은 여러 우주가 있고 그것이 모두 함께 존재하며 모두 동시에 진행되는데, 그 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일이 일어난다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으로 붐비는 키티의 낙원의 평원과 마찬가지로, 이 무한한 층이 있고, 무한히 가지를 뻗는 현실 안 어딘가에서도 캐스는 죽지 않았고, 그애의 아이가 태어났고, 스미드리가일로프는 미국으로 가지 않았다. 어딘가에서는 또 미시즈 그레이가 살아남았고, 아마도 지금까지 살아 있고, 여전히 젊고 여전히 나를 기억하고 있다. 내가 그녀를 기억하듯이. 어떤 영원한 영역을 믿어야 할까. 어느 쪽을 택해야 할까? 어느 쪽도 아니다. 나의 모든 죽은 자는 어차피 나에게 다 살아 있고 나에게 과거란 영원히 빛나는 현재이기 때문에. 그들은 나에게 다 살아 있지만 사라졌다. 이렇게 말들로 이루어진 연약한 내세에만 있을 뿐. -p.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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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여름 - 태양, 입맞춤, 압생트 향… 청년 카뮈의 찬란한 감성
알베르 카뮈 지음, 장소미 옮김 / 녹색광선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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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알베르 카뮈에 자연적으로 따라오는 이름이 있다. 번역가 김화영 선생이다. 그가 카뮈의 많은 작품을 번역했기에 결혼여름도 김화영 선생의 번역으로 읽고 싶었다. 그러나 녹색광선 출판사의 표지에 마음이 바뀌었다. 바람에 넘실대는, 흰 포말이 가득한 파도가 일렁이는 푸른 바닷가에서 한 쌍의 남녀가 행복한 표정으로 서 있는 모습을 본 순간, 이 책을 선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책의 제목인 결혼과 완벽히 어울렸기 때문이다.

 

결혼여름이라는 제목에서 나는 이 책의 내용이 카뮈의 연예사와 결혼에 대한 것 인줄 알았다. 하지만 여기에 카뮈 자신은 물론, 그 어떤 남녀의 사랑에 대한 것도 들어있지 않다. 제목과 책표지에서 내가 오해하고 착각한 것이었다. 물론 이건 나의 책임만은 아니다. 출판사의 책표지 역시 한 몫 한 셈이다. 결혼여름1936년에서 1937년 사이에 쓴 에세이를 모은 결혼, 1939년에서 1953년 사이에 쓴 에세이를 모은 여름을 한데 묶은 책이다.(p.9)

 

여기에서 카뮈가 선택한 단어인 결혼은 작가의 알제리에 대한 사랑의 다른 표현일 것이다. 카뮈가 태어나서 자란 알제리에 대한 경의는 사랑하는 연인에게 느끼는 무한한 애정과 같다. 알제리의 강렬한 태양과 바다, 그곳의 사람들은 카뮈에게 지금 이 순간의 환희와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동시에 다음 생을 삭제시켜 버린다. 현실과 자연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그들 인생의 목표이자 가치인 것이다.

 

나에게 알제리는 카뮈의 소설 이방인페스트를 통해 먼저 보고 들은 나라다. 이 책에서 카뮈가 여행하며 서술한 알제리의 도시인 티파사, 오랑, 제밀라, 알제는 여전히 나에게 이국적이다. (나의 남은 생 동안 이곳에 가보기는 할 수 있을까? 어려울 것이다.) 너무 이국적이라 상상만으로는 카뮈의 표현을 모두 이해하기 어렵지만, 그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 길목에서 만나게 될 아름다움, 슬픔, 행복, 죽음이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지금 여기에서 내가 가진 삶의 열정과 감정을 모두 소진할 필요를 말해준다. 애써 남기고 맹세하며 인내하여 신의 약속을 받아낼 이유도 없다고 한다. 카뮈가 서술한 결혼에서 그의 소설 이방인의 의미가 뚜렷하게 보인다.

 

'봄에 티파사엔 신들이 머문다(p.19)’로 시작하는 티파사에 대한 자연찬미는 살아가는 동안 명심해야 할 기본 조건을 가르쳐준다. 편견에 맞서 지금 있는 그대로의 삶과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기쁨이고 생활의 기술인 것이다. 내가 보는 것이 바로 믿는 것이고, 거기에 자유가 있다.

 

침묵과 황폐함이 지배하는, 사멸한 도시인 제밀라에서는 그 어느 것도 기대하지 않게 된다. 내일도, 다른 날도 오늘과 같을 것인 우리의 현존을 인식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포기가 아니라 거부라고 카뮈는 말한다. 세상의 모든 훗날을 거부하고 내 앞에 놓인 현재의 풍요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야말로 내 현존의 불안과 무력함을 없애는 것이다. 거기에 나머지는 내 소관이 아니라는여유만 있다면 그럭저럭 우리는 이 세계에 머물 수 있다.

 

카뮈의 알제에 대한 사랑에는 그곳에서 살아 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특별한 감정과 위트가 있다. 알제는 자연의 혜택이 넘쳐난다. 가르침, 약속, 암시도 없이 그저 아낌없이 내주는 곳이라 그곳에서 맘껏 누리기만 하면 된다. 아름다움과 가난이 공존한 알제에서 사람들은 열정적으로 젊음을 소진하고 곧바로 내리막길로 접어든다. ‘수영을 때리고’, 여인들에게 다가가 풍요를 만끽할 수 있는 그 짧은 찰나를 그들은 즐긴다. 나머지 세월을 뒷골목의 카페에서 수다로 보낼지언정. 알제의 시민은 청춘을 만끽하고 서른 살이 되면 다 쓰고 남아있는 것이 얼마 되지 않은 것으로 나머지 삶을 살아간다. 부모가 되고 자식을 키우며 인생의 끝을 기다린다. 서울 시민들이 절대 할 수 없는 모험이다. 그렇게 하지 않는 우리의 나머지 생은 안정되고 풍요로운가? 걱정은 없으며 행복한가? 자부심으로 똘똘 뭉쳐있는 알제인처럼 우리에게도 자부심이 있는가?

 

[한 존재와 삶 사이에 단순한 일치가 행복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을 행복이라 부른단 말인가? 또한 장수하고 싶은 욕망과 죽을 운명에 대한 이중의 자각이 아니라면 대체 어떤 조화가 더 온당하게 인간과 삶을 이어줄 수 있단 말인가? 여기서 우리는 적어도 아무것에도 기대지 말아야 한다는 것과 오직 현재만을 우리에게 덤으로주어진 유일한 진실로서 간주할 수 있다는 것을 배운다......내가 나의 척도와 만족을 찾기 위해 두 눈을 부릅뜨도록 내버려 두란 말이다! 아니 그럴 것도 없이 눈에 보인다. 피에솔레, 제밀라, 그리고 햇빛을 받고 있는 항구들이. -p.71~72]

 

 

1939년 이후에 쓴 에세이를 모은 여름은 지중해에 관련된 것들이 많다. 소설 페스트의 도시인 오랑, 레 콩쉴 계곡의 아몬드 나무, 유럽의 여러 도시, 남아메리카, 이탈리아, 그리스, 토스카나의 화가, 셰익스피어, 호메로스, 아이스킬로스, 프로메테우스, 헬레네, 신화, 전쟁을 넘나들며 카뮈는 순례자가 된다.

 

알베르 카뮈는 부조리는 인간의 부름과 세계의 불합리한 침묵이 대면할 때 탄생한다고 했다. ‘수수께끼에서 그는 작가의 부조리에 대해 서술했다. 책을 많이 읽지 않은 대중은 그저 신문의 기삿거리 하나로 작가를 알게 된다. 대중은 그의 작품을 읽지 않고도 신문기자가 만들어낸 작가의 이미지로 작가의 이름을 알게 되고, 작가는 명성을 얻게 된다. 작가가 여러 작품을 쓸 필요도 없다. 보통 작가는 성실하게 글을 쓰고, 작품을 위해 술도 마시지 않지만 대중은 작가가 해롱거리고 평범한 삶을 살지 않을 거라 믿는다.

 

또한 작가가 책에 쓴 내용이 작가 자신의 얘기가 분명 아닌데도 대중은 그것이 작가 본인의 얘기라고 생각한다. 카뮈는 그것이 낭만주의가 물러준 유치한 유산 중 하나라고 말한다. ‘한 인간의 작품들은 대체로 그가 느끼는 향수나 유혹의 역사를 되짚은 것이지, 실제 자신의 이야기인 경우는 거의 없다....어떤 작가도 감히 자신을 곧이곧대로 묘사하지는 못한다(p.156)’고 말하고 있다.

 

김화영 선생은 앙드레 지드의 지상의 양식’, 장 그르니에의 과 더불어 카뮈의 결혼여름20세기 프랑스 3대 시적 산문이라고 했다. 확실히 카뮈가 쓴 이 에세이는 아름답고도 철학적이며 깊은 의미가 담겨있다. 녹색광선 장소미 선생의 번역은 현대적이고 깔끔하지만 카뮈 문장의 아름다움이 살짝 덜 묻어나오는 것 같아 아쉬웠다. 김화영 선생의 번역에 비해 건조한 느낌이 들었다.

 

카뮈는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알제리에 대해 무한한 사랑을 표현하지만, 프랑스의 알제리에 대한 식민지배에 대한 언급은 없다. 알제리 독립전쟁이 일어났을 때 카뮈의 어머니는 알제리에 계속 남아있는 상태였다. 그는 알제리계 프랑스인의 정체성을 택하여 프랑스 정부를 옹호했다. 카뮈는 알제리 자치권을 인정하거나 연방정부를 구성하면 알제리계 프랑스인과 아랍인들 간의 공존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었으며, 알제리의 완전 독립에는 부정적이었다. 전쟁기간 동안 양측 모두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은 정전협정을 위해 헌신했으며 체포된 알제리인들을 구하기 위해 비밀리에 활동하기도 했다.(작가연보 중, 1954) 나는 카뮈의 인간 실존과 부조리 사상을 좋아하지만 그의 알제리의 독립에 대한 생각에는 항상 실망한다.


젊은 시절의 카뮈는 배우 알랭 들롱을 닮았다.


[우리가 남에게 어떻게 비치든 어떤 온당치 않은 자리를 차지하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우리가 누구이고 마땅히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문제만으로도 삶을 채우고 노력을 쏟기에 충분하다.....또한 죽기 전에 완수해야 할 우리의 책무는 모든 단어들을 동원하여 그것에 이름을 붙이려 노력하는 것임을 배웠다. 예술가들은 저마다 자신의 진실을 찾고 있을 것이다. 위대한 예술가라면 작품마다 진실에 가까워지거나, 아니면 적어도 언젠가는 모두가 찾아와 불타오를, 숨어있는 태양의 중심에서 좀 더 가까이 맴돌 것이다. -p. 158~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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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목련 2026-02-02 15: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김화영 선생이 번역한 책을 갖고 있는데, 언제 읽게 될지...

페넬로페 2026-02-02 16:48   좋아요 0 | URL
이 책은 한 번에 이해가 잘 안되어 천천히 반복해서 읽었어요.
계속 읽으니 뭔가 의미가 조금씩 보이더라고요.
다음엔 김화영 선생 버전으로 다시 한 번 읽어보려고요.

카리나 2026-02-03 04: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애정하는 친구에게 이 책을 선물받아서 읽고있는데
책 표지가 너무 예뻐서 매일 표지만 보고 있어요ㅎㅎ

사실 읽기 시작은 했는데 이해가 잘 안되어서 꾹꾹 눌러읽고 있는 중이에요..

페넬로페님에게도 어려웠다고 하니 조금 위로가 되네요.다 읽고 페넬로페님 글을 다시 읽어봐야겠어요.

페넬로페 2026-02-03 09:40   좋아요 1 | URL
책표지 정말 멋지죠? ㅎㅎ
저렇게 누군가를 기쁘게 사랑해 본 적이 있는지 잘 모르겠어요.

이 책이 생각보다 어렵더라고요.
그래서 조금씩 계속 반복해서 읽었어요. 그랬더니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게 조금은 보였어요.

이 책에는 여러 사유가 있는데 작가가 인용한 것들을 우리가 그동안 다 읽어냈다는 것에 자부심 뿜뿜하더라고요.

카리나님, 계속해서 열심히 읽어보자고요, 화이팅♡♡♡

그레이스 2026-02-03 10: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표지때문에 탐나네요
저도 다른 출판사로 있는데,,, ㅠㅠ

페넬로페 2026-02-03 10:40   좋아요 0 | URL
정말 표지가 한 몫 했죠!
 
먼저 온 미래 - AI 이후의 세계를 경험한 사람들
장강명 지음 / 동아시아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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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네이버에 일론 머스크가 한 말이 올라와 읽은 적이 있다. 머스크의 말이 약간 생뚱맞았는데, 거기에 달린 댓글 하나가 강렬해 잊혀지지 않는다. ‘저 미친X이 하는 말이 나중엔 다 맞아 떨어진다는 것이었다. 머스크가 한 말처럼 설마 했던 일이, 인간의 상상이라고만 여겨졌던 것들이 지금 우리 눈앞에 버젓이 실현되고 있다. 단숨에 모든 것이 급변하고 있다.

 

바둑의 원리에 대해 거의 모르지만, 이세돌 9단이 알파고에게 완패(물론 5국 중 이 9단이 1승은 챙겼지만)했을 때 나 또한 충격이 컸다. 바둑은 결코 단순한 게임이 아니다. 엄청나게 다양한 기술과 바둑을 두는 사람의 창의력이 어우러진 고난도의 게임이다. 승부를 예측하기도 힘들다. 그런 진입 장벽이 높은 바둑의 세계를 알파고가 너무 쉽게 정복해버렸다.

 

알파고의 승리는 다시 말해 인공지능의 승리였다. 알파고는 바둑인 뿐만 아니라 다른 업계의 사람들에게도 충격을 주었다. 알파고는 모든 사람에게 앞으로 어떤 세상이 올 것이며, 나는 어떻게 살아야하는가?’에 대해 고민하게 했다. 장강명 작가의 고민도 다르지 않았다. 인공지능이 소설을 쓰고, 그것이 좋고 감동을 준다면 많은 사람이 읽을 것이다. 소설을, 사람이 아닌 AI가 쓴다면 그 스펙트럼이 엄청나게 넓혀질 것은 확실하다. 하물며 거기에 신박함과 재미가 더해진다면 매번 소재가 거기서 거기인 한국 소설을 누가 읽겠는가?

 

장강명 작가뿐 아니라 여러 다른 작가도 인공지능의 영향과 전망에 대한질문을 많이 받는다. 이 책에 몇 개의 대답이 소개되어 있는데, 그들은 별로 대수롭지 않게, 담대하게 받아들인다. 그런데 인공지능이 먹고 사는 문제에까지 영향을 준다면 그들의 대답이 그렇게 여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아직까지는 인공지능이 인간의 편리함을 도와주는 도구이지만, 자본주의 원리에 의해 빅테크 기업이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밀어붙인다면 결국 인간이 설 자리는 없을 것이다.

 

이 책은 장강명 작가가 202312월부터 20241월까지 전 현직 프로기사 30명과 바둑 전문가 6명에 대한 인터뷰를 바탕으로 해 서술된 책이다. 알파고와의 대결으로 바둑계에 먼저 온 미래에 대해 바둑 기사 각자의 생각과 앞으로의 대처방안에 대한 질문과 대답이 들어있다. 이들의 대답이 다른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말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책의 3분의 2정도 분량의, 지루하기까지 한 그들의 대답은 결국 AI가 대세이고 바둑은 인공지능 없이는 성립될 수 없는 영역이 되었다는 것이다.


프로 기사들은 이제 거의 바둑 AI 프로그램을 내려 받아 훈련한다. 인공지능을 거부하고 기존의 방식을 고수하면 전혀 승률을 낼 수 없다. 이런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바둑기사들은 은퇴를 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되었다. 인공지능을 이용한 바둑이 예전의 낭만을 잃었을지는 몰라도 나름 장점도 많아 기사들은 별 불만이 없다고 한다. 인공지능이 훨씬 더 창의적이고 독창적이라는 것을 대다수가 인정하는 분위기다.

 

인공지능이 이렇게 바둑 세계의 판도를 바꾸었다면 문학의 영역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서 장강명의 질문이 계속된다. 사실 그 질문은 끝이 없을 정도로 많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이 계속되지만 이에 대한 답이 확실치 않은 것은 이미 대세가 된 인공지능에 대한 대처방법이 확실치 않기 때문이다. 도덕적이며 인간적인 것을 들이밀기는 늦었다.

 

작가 자신도 답답하고 잘 모르기에 고작 가져온 것이 소설 ‘1984’멋진 신세계. ‘멋진 신세계를 거부하고 ’1984‘를 경계할지라도 우리에게 달라질 것이 있을까? 작가 말대로 신자유주의의 원리로 빅테크 기업이 움직이고 그것을 권력이 받아들인다면 우리가 멋진 신세계를 거부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오픈AI의 이미지 생성 기능을 이용해 지브리의 애니메이션의 인물로 자신이나 가족을 바꾸는 것이 인기를 끈 것도 인간은 현재의 자신의 모습이나 상태에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제는 막을 수 없을 정도로 대세가 된 인공지능이지만, 장강명 작가는 이 시점에서 멈추고 생각하고, 모두에게 더 좋은 방향으로의 진행을 위해 고민하자고 한다. 정말 작가의 말을 이해하고 공감하지만, 작가가 가져온 여러 가지에 역부족을 느낀다. 문학도로서의 한계일 것이다. 하지만 작가의 말대로 여기서 한 번 멈춰서 우리가 어떤 세상을 맞이하고, 어떻게 대처할지에 대한 생각과 고민은 분명히 필요하다. 이 책을 통해 그것이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숙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의 시작과 목적이 바둑 기사와의 인터뷰와 분석이었지만 너무 길게 서술해 지루했다. 뒷부분 역시 관념적이고 현실적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우리 누구나 느끼고 있는 위기와 거기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는 공감했다. 정말이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하는지 걱정된다.

 

장강명 작가의 아내의 쾌유를 빈다. AI이든 뭐든 과학의 발전이 인간의 밥벌이를 빼앗지 말고 인간의 병만 척척 고쳐주었으면 좋겠다. 암과 치매를, 지금 당장.

 

[우리에게는 시간이 별로 없다. 인공지능처럼 쓸모 있고 강력한 기술은 마치 야수와 같다. 일단 거리에 뛰쳐나오면 붙잡아 우리에 가두는 것이 매우 어렵다. 강하든 약하든, 터미네이터처럼 인간에 적대감을 품고 있든, 아니면 월-E처럼 안전하고 유용한 도구처럼 보이든 간에 말이다. 사실상 그 야수를 통제할 수 있는 것은 그게 아직 거리에 나오기 전뿐이라고 봐야 한다. -p.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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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ano避我路 2026-01-28 17: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강명 작가의 건조하리 만큼 사실적인, 그래서 더 또렷해지는 사태 파악과 의미 부여를 사랑합니다. 진정한 사랑은 미화하는 것이 아닌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포용하고 거기서 변화를 찾아야 하는 것이겠죠.

페넬로페 2026-01-28 17:51   좋아요 0 | URL
네^^

단발머리 2026-01-28 21: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문제를 내어 놓고, 정해져 있는 하나의 답이 아니라도, 그걸 진지하게 풀어간다는 점에서 저는 장강명이 한국 사회에서 소설가 이상으로 인정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기는 합니다. 저도 이 책이 있습니다^^

가지고 있다고 알라딘에 자랑만 했었는데, 페넬로페님 글 읽고 나니 더 궁금해졌어요.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감사해요 : )

페넬로페 2026-01-28 20:18   좋아요 1 | URL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한국 사회의 여러 요소에 대한 장강명 작가의 치열한 고민을 존중하고 공감하며 응원해요.
단발머리님의 감상
궁금하고 기대됩니다^^
 
사탄탱고 - 2025 노벨문학상 수상 알마 인코그니타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지음, 조원규 옮김 / 알마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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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사탄탱고는 소설이지만 한 편의 연극이나 영화를 보는듯했다. 도무지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황량함만 있는, 해체된 집단농장 마을에 남겨진 사람들에게는 기본적인 의식주가 없었다. 사람이 사는 곳에 당연히 있어야 할 최소한의 온기도 없었다. 생산적인 것과 물리적 육체를 움직이기 위해 필요한 에너지역시 존재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떠나지 못하는 자들에게 필수적인 알코올과 상실, 경멸, 의심, 비천한 성욕만 있을 뿐이었다. 이 어둠을 크러스너호르커이는 너무나 잘 부각시켜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소설은 어떤 계절에 읽느냐에 따라 감상이 달라진다. 한겨울에 읽은 사탄탱고는 나에게 한없는 우울감을 주었다. 읽는 내내 힘들었다. 소설의 처음부터 끝까지 내리는 가을비와 그로 인해 질척거리고 악취 나는 진흙바다(p.13)’를 마치 내가 걷는 것처럼 느껴졌다. 희망 없음의 허무를 술로 달래는 마을 사람들의 취기역시 늪 같았고, 가난하면 특히 더 열악한 삶을 살아야만 하는 어린 소녀들의 하루에 마음이 아팠다.

 

 

이 소설은 1부와 2부와 구성되어 있는데, 2부는 거꾸로 진행되어 결국 소설의 처음과 끝은 똑같은 장면과 문장으로 만난다. ‘원이 닫히며 그 안의 인간들은 영원의 원속에 갇혀 출구를 찾지 못한다. 그들은 계속 원을 그리며 결코 구원되지 못할 구원을 바라고 있다. 라슬로가 인용한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그러면 차라리 기다리면서 만나지 못하렵니다.구절처럼 역설적이다.

 

1980년대 헝가리 집단농장은 더 이상 기능을 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폐허로 변해가는 그곳에 남은 사람들은 갈 곳이 없다. 돈이 없기 때문이다. 스스로 뭔가를 할 수 없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기다리는 것뿐이다. 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구원을 바란다. 소설 전반에 걸쳐 들리는 종소리는 그런 그들의 마음을 대변해준다. 소성당은 마을에서 멀리 떨어져있고 전쟁으로 종탑마저 무너져 종이 울릴 리 없는데도, 들리는 종소리는 구원을 바라는 그들 마음의 바람이다. 나중에 밝혀진 터무니없는 종소리의 실체는 무의미한 구원의 바람에 대한 뒤늦은 각성을 말해주고 있다

 

마을을 떠나야 하지만, 사람들은 쉽게 결단을 내지 못한다. 서로 돈으로 얽혀 있고, 공산주의 사회 특성상 항상 감시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죽은 줄 알았던 이리미아시와 페트리너가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들에게 구세주와 같은 이리미아시는 사실 사기꾼이며 공산당의 하수인에 불과하다. 이리미아시는 권력 앞에서는 약자지만 마을 사람들에겐 희망을 주는 구세주 같은 사람으로 군림한다.

 

[그자들은 여전히 더러운 의자에 주저앉아 저녁마다 감자 요리나 먹으면서 세상이 왜 이 모양인지 의아해하고 있을걸. 의심에 가득 차 서로를 감시하고 조용한 방에서 큰 소리로 트림이나 하고, 그리고? 기다리는 거지.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끝도 없이 기다리다가, 누군가 자기들을 속인 게 분명하다고 생각하겠지.....그자들은 옛날 성에서 시중을 들던 때와 달라진 게 아무것도 없어....주인 잃은 노예들인 주제에 명예와 자부심과 용기가 없으면 살 수가 없다고들 하지. 둔한 마음 깊은 곳에선 저런 덕목들이 자신들의 것이 아니라는 걸 감지하고 있겠지만 말이야. -p.71]

 

이렇게 마을 사람들을 대하는 이리미아시는 그들이 가진 마지막 돈을 갈취하고자 마을로 돌아온다. 이리미아시는 마을 사람들과 별 다를 바 없는 인간이다. 다만 이리미아시의 조언으로 한 번 돈을 벌게 된 이후로 마을 사람들은 이리미아시를 그들과 다른 존재로 생각한다. 극도의 가난과 계속되는 좌절, 권력으로부터의 심한 감시는 사람들을 수동적이 되게 하며 어긋난 믿음을 갖게 만든다. 사람들로부터 추앙받는다는 것을 아는 이리미아시는 그들을 선동한다. 선동은 생각이 확고한 상태에서만 가능하다. 자기 스스로 그들에게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걸 인식한 이리미아시는 사람들을 선동하며 그들이 자신의 말을 의심하지 않고 따를 것임을 확신한다. 마을 사람들이 그에게 그런 기회를 주었으며, 그것은 자신의 주체와 자유를 사탄에게 양도한 것과 마찬가지다.

 

마을의 의사는 지식인이며 생활에 필요한 돈을 가지고 있다. 의사만이 오늘 하루를 살 걱정이 아닌 헝가리라는 나라를 생각할 수 있다. 그럼에도 그는 창밖의 농장을 내다보기 위한 집 안의 최적의 장소에 겨울 외투와 이불을 채워 넣은 의자를 놓아두고 거의 하루 종일 앉아있다. 그곳에서 먹고 마시며 독서하고 일기를 쓴다. 쉴 새 없이 독주를 마시고 담배를 피운다. 집 안팎이 엉망이 되어 가는데도 의사는 칩거하며 술만 마신다. 의사는 주변의 외적인 몰락에 맞서 자신의 기억력만을 지키고자 한다. 농장이 해체되고 정직된 그 역시 무력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몰락에 맞설 능력이 없다고 생각한 그는 스스로 자신을 유폐시킨다. 행동하지 못한 기억의 잔존은 그 어떤 의미도 없다. 전의를 상실한 의사는 무기력하며 투쟁하지 않는 지식인의 전형이다.

 

이리미아시가 온다는 소식에 마을 사람들은 기뻐하며 술집에 모인다. ‘몇 년 동안 계속되어온 비참과 불행에 종지부를 찍을(p.194)’ 생각에 희망이 샘솟는다. 비는 계속 내리지만 그들을 구하러 목자가 온다는 소식에 술을 마시지 않을 수가 없다. 마시고 또 마신다. 종소리와 함께 이 소설의 중요한 상징인 거미가 끊임없이 거미줄을 치는 술집에서, 그들은 마시며 탱고를 춘다. 그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술집의 모든 곳에 달려있는 거미줄에 뒤엉켜 잠시 동안의 욕망에 사로잡힌다. 이 부분이 소설의 정점이다. 결코 끝나지 않을 그들의 어긋난 희망과 구원은 거미줄에 걸려 허우적댄다. 작가는 그것을 불행한 사탄탱고라 이름 붙였다.

 

마을 사람들에 대한 이리미아시의 보고서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단박에 설명해준다. 그것을 하나하나 윗사람이 읽기 쉬운 문장으로 다시 고치는 서기들의 모습에 공산주의의 허상이 드러난다. 라슬로는 망해가는 공산주의를 희화화시키며 헝가리의 미래를 예견한다.

 

라슬로가 사용한 문장은 시종일관 비관적이고 암울하다. 마을 사람들이 궤짝에 짐을 싣고 떠나는 모습, 방앗간에서 하루 종일 손님을 기다리는 두 소녀 머리와 율리, 어쩔 수 없이 자살로 삶을 마감하는 어린 소녀 애슈티케, 곧 죽을 것 같은 의사, 뿔뿔이 흩어져 여전히 힘들게 살 마을 사람들....희망이 없는 곳에 구원 역시 없다는 것을 작가는 단호하게 보여준다. 수많은 상징으로 이루어진 종교적이며 현실적인 암시는 지금 이 시대의 나에게까지 연결된다. ‘이번 생은 망한 것 같다고 매번 생각하는 나에게 라슬로는 쐐기를 박아주었다.

 

2025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작가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는 언어의 연금술사였다. 이 한편의 소설에 너무 많은 것을 담았고, 그가 시도한 소설작법역시 작가의 의도를 돋보이게 했다. 각 인물의 특징과 존재가 두드러지면서 서사로 잘 연결되었다. 이 소설은 약간 어려웠지만 그가 전하고자 한 메시지는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직관적으로 느끼고 이해시키면서도, 읽고 난 후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마음을 무겁게 만든 작가의 문장들이 정말 탁월했다.

 

[그는 지금 굶주리고 얻어맞은 몸이 되어, 느닷없이 나타나 어딘지도 모르는 곳으로 사람들을 실어 나르는 트럭에 앉아 있었다. 갈림길이 나와도 어디로 갈지 결정하는 것은 그가 아니었고, 덜컹거리며 달리는 낡은 트럭이 자신의 생을 결정짓는 것을 그는 다만 무력하게 받아들여야 했다. ‘헤어날 길이 없다.’ 무감각하게 그는 생각했다. ‘어쨌든 나는 망한 거고, 내일은 또 나를 기다리는 일이 뭔지도 모르는 채 낯선 방에서 깨어나겠지. 마치 혼자 길을 떠난 것처럼 얼마 되지도 않는 짐들을 침대 옆 테이블에 올려놓고서....글쎄, 침대라도 있을까....창가에서 불빛들이 꺼져가는 걸 바라보겠지.

-p.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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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26-01-18 22: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라스트 울프> 분량이 다른 소설에 비해 얇고, 이 책을 추천한 독서 모임 독자를 위해서 3월 모임 때 읽기로 했어요. <사탄 탱고>와 <라스트 울프>를 읽어봤는데, 이야기에 몰입하는 데 애먹었어요. 눈을 바쁘게 움직이면서 문장을 쫓아가듯이 읽었는데, 팍 떠오르는 게 없었어요. 그래서 어려웠던 거 같아요. ^^;;

페넬로페 2026-01-18 22:46   좋아요 0 | URL
네, 조금 어려웠어요.
헝가리 역사를 세계사의 흐름에서 약간만 알고 있으니 작가가 사용한 상징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할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일단은 직관적으로 의미를 이해했어요. 차차 다른 작품 읽어가며 조금씩 더 알아가리라 생각했어요.
잘 모르지만 그래도 저는 작품이 좋더라고요.^^

그레이스 2026-01-19 21: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제 써서 올렸네요;;;
왤케 정신이 없는지...^^

페넬로페 2026-01-20 08:06   좋아요 1 | URL
네, 기대됩니다^^

카리나 2026-01-25 07:1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사탄탱고를 읽으면서 가장 많이 떠오르는 느낌은 ‘무기력‘이었어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도, 아무것도 하지않는 것도 무기력이죠.

책을 읽으면서 저 상황에서 저 인물이라면 나는 어떻게 했을까 생각해보면.. 저들처럼 무기력하게 살았을거같아요. 수동적인 삶을 살며 주체적이지못하고, 독립적이지도못한 현재의 내 삶과 다르지않고,
현대를 살아가는 청년들과도 별반 다르지않다고 생각했어요.
내가 무기력한것은 개인적인 문제고 청년들의 무기력은 현재의 사회제도의 문제겠지요.

작가가 얘기하고 싶은 주제는 찾기어려웠지만, 내가 지금 살아가는 방향성에 영향을 주는 작가라서 좋았어요.

페넬로페 2026-01-25 16:11   좋아요 1 | URL
네, 저도 무기력과 허무, 그릇된 희망으로 이 소설을 읽었어요.
여기에는 여러 상징과 소설적 작법도 돋보이지만 어쨌거나 전 직관적으로 이 글들이 해석되더라고요.
그때 뿐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도 이 소설의 내용이 여전히 유효하다는게 느껴져, 그것이 노벨상의 큰 이유가 아닐까 생각했어요.
저는 지금도 여기 사람들과 별로 다르게 살지 않은 것 같아 더 깊이 공감한 것 같아요.
다음에 저항의 멜랑콜리인데
그것도 기대되어요.
 
특성 없는 남자 3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27
로베르트 무질 지음, 박종대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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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르트 무질은 특성 없는 남자를 제1차 세계대전 참전 중 구상한다. 1938년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합병하자 무질은 조국을 떠나 스위스로 간다. 나치는 무질의 작품을 금서로 지정해 작가에게 경제적 타격을 준다. 뇌졸중까지 찾아와 그는 가난과 병마로 고통 받아야 했다. 또한 심각한 글쓰기 장애까지 겪어 이 소설을 계속 집필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1942년 뇌졸중을 극복하지 못하고 죽을 때까지 그는 끝내 이 소설을 완성하지 못한다. 무질이 사망한 후, 생전에 발표되지 못한 부분이 유고집으로 출간되었지만 한국에서 그 부분은 아직 번역되지 않은 걸로 알고 있다.


무질의 어머니 헤르미네는 예민하고 별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20세에 결혼했는데, 7년 후 남편의 친구인 라이터와 부적절한 관계를 갖고 라이터는 계속해서 무질의 가족과 함께 한다. 무질은 마르타 마르코발디와 결혼한다. 마르타는 21세에 결혼했지만 그녀의 남편은 일찍 죽는다. 그녀는 재혼하지만 부부 관계가 좋지 않았고 가정이 있는 상태에서 1907년 베를린에서 무질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 그들은 여러 우여곡절을 겪고 나서 1911년이 되어서야 결혼할 수 있었다. 무질은 이러한 마르타의 삶을 그대로 울리히의 여동생인 아가테에게 투영한다. <특성 없는 남자>에서 울리히의 어머니는 일찍 죽은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무질이 태어나기 전,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죽은 누이의 존재와 부모의 비정상적인 결혼생활은 무질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런 이유로 무질의 삶이 거의 반영된 주인공 울리히에서 약간 뒤틀린 성적인 면이 발견된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여인들인 아가테, 레오나, 보나데아, 디오티마, 라헬, 게르다, 클라리세는 모두 뭔가 결핍되어 있다. 근친상간, 소녀성애, 울리히를 향한 성적인 갈망이 그 시대의 본질과 특성의 해체를 위한 비유이자 상징으로 이용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상당히 미묘한 껄끄러움이 존재했다. 프루스트, 조이스의 작품에서 볼 수 있었던, 시대가 가진 은근한 여성 비하를 무질도 넘어서지 못했다.

 

 

울리히는 나의 성공적인 서거를 알린다(p.11)’고 적힌 아버지 자신의 죽음에 대한 메시지가 담긴 전보를 받는다. 울리히가 아버지의 장례를 위해 예전에 살았던 도시를 오랜만에 방문하는 것이 3(천년제국으로)의 시작이다. 아버지의 집에서, 결혼해서 1년 만에 병으로 남편이 죽어 3년 뒤에 재혼한 여동생 아가테를 만난다.

 

서먹한 사이였던 아가테는 울리히에게 남편 고들리프 하가우어와 이혼할 것이며, 그에게 아버지의 재산을 털끝만큼도 남겨주고 싶지 않아 아버지의 유언장을 위조할 것이라고 한다. 현학적이고 특성으로 가득 찬 하가우어와 야생적이고 자연적 성정의 아가테는 처음부터 어울리지 않았다. 울리히와 대척관계에 있는 사람이 2부에서 아른하임 이었다면, 3부에서는 하가우어로 바뀐다. 하지만 울리히에게도 하가우어가 가지고 있는 특성이 없지 않다. 이 문제로 아가테와 울리히는 도덕에 대해 끊임없는 대화를 나눈다.

 

특성 없는 남자’ 3부의 주제는 도덕에 관한 것이다. 아버지의 유언장을 위조하겠다는 아가테의 계획에 대해 울리히는 길게 도덕에 대한 이론을 펼친다. 울리히의 말을 이해한 아가테는 자신의 결심을 더욱 굳히고 울리히를 따라간다. 울리히는 아가테 안에서 자신의 이면을 보고 샴쌍둥이 같다고 생각한다. 그는 아가테에게서 자기애를 발견한다. 울리히는 하가우어에게 이혼을 통보하지만 하가우어는 그것에 응하지 않을 것이며 장인이 남긴 재산을 요구한다. 유언장 위조에 대해 나중에 울리히와 아가테가 곤경에 빠질 것이라는 암시가 있지만, 그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나오지 않는다.

 

아가테와 함께 돌아온 울리히는 다시 애국대운동에 참여하지만, 이미 그곳에는 처음의 선한 의지와 하나를 향한 단결은 없다. 각자의 특성과 이기심은 모든 것이 부질없으며, 평화주의를 가장한 전쟁이 눈앞에 닥쳐와 있다는 것만을 보여줄 뿐이다.

 

결국 울리히의 천년제국은 우리가 절대 다다를 수 없는 곳인지도 모른다. 관념만 있고 실제가 될 수 없는, 울리히 아버지의 서재 같은 우아한 황량함(p.82)’만 있는 곳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무질이 창조한 또 하나의 유토피아이며, 그 어렵고도 험난했던 시도만으로도 유토피아로 가는 길은 열려있다.

 

무질에게 문학은 과거에 벌어진 사건을 충실하게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변하게 될 미래에 새롭게 형성될 삶을 고안해 내는 것이다(’로베르트 무질‘, 최성욱, 한국학술정보, p.16)’라는 작가의 신념이 이 소설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사람의 생각과 행동에 결정적 영향을 주는 고착화된 각 특성을 해체시켜 변화를 받아들이며 창의적이고 선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고자 한 무질의 열정을 알 수 있다.

 

다만 거기에 너무 많은 이론과 다양한 세계를 넣어 무질마저 이 소설을 어떻게 끝맺을지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이 소설이 완성되지 못한 이유가 무질이 말년에 처한 힘들었던 물리적 상황에 있겠지만, 작가가 광대하게 펼쳐놓은 내용 역시 무시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번역자 박종대 님의 말처럼 미완성으로 독자들에게 제국의 문을 열어주지 못했지만, 그 치열한 노력만으로 아낌없이 박수를 받고 추앙받을 수(p.602)’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

 


아버지의 장례를 마친 후 울리히와 아가테는 멀리 산책을 나간다. 지친 그들은 중간에 찢어지게 가난하고 무지한, 독일어와 슬라브어가 섞인 사투리로 말하는 어느 양치기의 집에서 쉬어간다.

 

[늙수그레한 양치기 부부는 양손을 무릎 위에 가지런히 올려 놓은 채 오두막을 가득 채우는 대화를 경탄스럽게 듣고 있었다. 단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하면서도 무척 만족스러워하는 표정이었다. -p.121

아가테는 희뿌연 연기 너머로 주인 부부가 싱긋 웃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알아들을 수 없는 짧은 말로 자신들이 얼마나 즐거웠는지 단언하는 것을 보았다. -p.125]

 

경탄스럽게 듣고 있었다.“

알아듣지 못하면서도 무척 만족스러워하는 표정이었다

얼마나 즐거웠는지 단언한다

 

늙은 양치기 부부가 울리히와 아가테의 대화를 들으면서 한 행동을 표현한 위의 말들은,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나의 감정과 정확히 일치했다. 완전 똑같았다. 잘 모르고 이해가 안 되지만, 한 문장 한 문장을 혼신의 힘으로 쓴 무질의 고통스런 영혼을 볼 수 있었다. 문장이 너무 아름답고, 거기에 담긴 비유와 상징이 마음에 와 닿아 이 책의 많은 부분에 수없이 형광펜으로 하이라이트를 했다. 집중해서 읽게 만드는 힘, 끝없이 많은 생각으로 이끌어 주는 무질의 문장은 그 어떤 작가에게서도 볼 수 없었던 특별함을 주었다. 세 달 동안 이 책을 읽으며 즐거웠다.

 

이 책의 마지막, 옮긴이 해설에 등장인물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있다. 일러두기에서 여기에 소설의 줄거리를 포함하고 있으니 될 수 있으면 다 읽고 나서 일독하기를 권한다고 되어있다. 하지만 이 책의 1부를 조금 읽다보면 내용이 어려워 번역자의 해설로 가지 않을 수가 없다. 번역자의 등장인물에 대한 설명은 아주 자세히, 이해되기 쉽게 서술되어 있다. 어차피 이 소설은 서사보다는 무질의 실험이 우선시되는 소설이다. 내용을 알고 시작해도 괜찮다는 뜻이다. 그래서 먼저 등장인물에 대한 설명을 읽고 이 소설을 시작해도 좋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우리가 지금껏 의견 일치를 본 모든 것에 따르면, 너는 이제 그 바다를 수정처럼 순수하고 영속적인 사건들로 가득찬, 움직임 없는 은둔의 상태로 상상해야 돼. 어떤 시대건 지상에서의 그런 삶을 상상하려고 노력해왔어. 그것이 천년제국이야. 우리가 아는 어떤 형태의 제국도 아닌, 오직 우리 자신에 의해 그 형태가 만들어지는 제국이지! 우리는 그렇게 살 거야! 모든 이기심을 버리고, 재물이나 지식, 연인, 친구, 원칙, 심지어 우리 자신에게조차 연연해하지 않을 거야. 그런 연휴에야 우리의 감각은 열리고, 인간 및 동물과의 경계는 허물어지고, 우리가 더는 우리로 남지 않고 오직 모든 세계와 어우러짐으로써 우리를 유지하는 그런 방식으로 펼쳐지게 될 거야!

-p.214~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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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5-12-18 12: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미완성 작품이군요. 이 책 어렵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어봤습니다. 페넬로페님은 완독 하셨군요~!
1900년 초중반 소설들을 읽다보면 참 힘든 시대였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페넬로페 2025-12-18 15:26   좋아요 0 | URL
정말 많이 어려웠어요.
근데 무질 작가의 문장은 좋았어요. 힘들었지만 완독했다는데 의미를 두고 있어요. 책 내용 중에 지금 현재에 적용할 것도 많아 좋았어요^^

책읽는나무 2025-12-19 22: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삼개월의 특성 없는 남자의 집중 독서!
대장정을 마치신 걸 축하드립니다.^^
페넬로페 님의 리뷰를 따라 읽은 이것을 잘 기억했다가 훗날 독서내공이 쌓여 전권 다 갖춰 언젠가 꼭 한 번 읽어봐야겠어요.
무질 작가는 페넬로페 님께 이젠 특별한 작가로 기억에 남겠어요.

페넬로페 2025-12-19 22:55   좋아요 1 | URL
네, 정말 대장정이었어요.
작가가 가지고 있고 활용한 지식의 양이 방대해 그것의 일부만 이용해 읽었지만 그래도 완독했다는 것에 의미를 두고 싶어요.
책나무님께서도 언젠가는 꼭 읽으시길 기원합니다.
축하해주셔서 감사해요^^

독서괭 2025-12-29 13: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역시 어려울 것 같습니다. 번역가도 고생했을 듯 ㅠㅠ 미완성이 아니었다면, 잃시찾처럼 길어졌을라나요? ㅎㅎ

페넬로페 2025-12-29 17:07   좋아요 1 | URL
네, 길어지기도 했을 것이고 아마 결론도 열린 결말도 끝났을 것 같아요.

마힐 2026-01-04 13: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 문장 한 문장 혼신을 다한 문장을 읽는 페넬로페님의 독서 열정이 전 더 부럽습니다. 올 해도 좋은 리뷰 올려주시면 저 역시 혼신의 힘으로 읽어 보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가족 모두 편안하시길 기원드립니다.

페넬로페 2026-01-04 21:22   좋아요 1 | URL
매번 독서를 하면서도 책 선정도 힘들고, 제대로 읽는가에 대한 회의도 많이 듭니다. 그래도 짧게 나마 감상을 적는데 부족한데도 이렇게 읽어주시고 응원해주셔서 감사드려요.
마힐님께서도 항상 건강하시고 바라는 일 모두 이루시길 기원합니다. 타국에서의 생활도 순조롭고 행복하기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