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온실 수리 보고서
김금희 지음 / 창비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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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에 가는 것을 좋아한다. 한 번씩 딸아이와 함께 가고, 자주 혼자 간다. 사는 곳이 흩어져있는, 1년에 서너 번씩 만나는 대학 동기들과는 중간 지점인 종로에서 만나 그들과도 가끔 궁에 들러 산책을 한다. 덕수궁 앞에서는 와플을 사 먹고, 경복궁에 갈 땐 인사동에 들리고, 창경궁이나 덕수궁에 갈 땐 대학로에서 점심을 먹는다.

 

나에게 궁은 외롭고도 씁쓰레한 느낌을 주는 곳이다. 조선의 역사가 어디 한 번이라도 찬란할 때가 있었는가 말이다. 궁에 가면 그저 쇠락하거나 비굴했던, 제대로 된 개혁도 하지 못한 힘없고 우유부단한 왕조만 생각난다. 특히 덕수궁이 그렇다. 고종과 민비가 자동차를 타고 다니고 고희를 즐겨 마셨으면 뭐하겠는가?

 

그래서 궁에 가면 되도록 역사를 생각하지 않고 과거를 돌아보지 않는다. 그냥 자연을 본다. 궁은 천천히 걸으며 산책하기 좋다. 인공적으로 수더분하고 아기자기하게 잘 가꾸어져 있어 그곳 벤치에 앉아 있으면 낭만적인 감상에 젖기 좋다. 창경궁은 가장 풍부한 자연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봄이나 여름은 푸름으로, 가을은 온갖 색깔로 물드는 낙엽으로 운치가 있고 종묘와 같이 있어 그것도 매력적이다.

 

창경궁은 한때 창경원이었다. 일본이 식민지의 역사를 말살하고 왜곡시키기 위해 궁을 식물원과 동물원으로 만들었다는 가장 많이 알려진 대로 나는 알고 있다. 역사의식이 있든 없든, 창경원은 인기가 많은 곳이었다. 봄에 벚꽃이 필 때 수많은 상춘객이 몰려들었다. 케이블카까지 있었다.

 

내가 창경원에 처음으로 간 건 초등학생 때였다. 서울 누하동(지금의 서촌)에 살던 이종사촌언니와 단둘이 버스를 타고 갔었다. 지금 생각하면 납득이 잘되지 않는 것이 있다. 그때는 초등학생이라서 지방 소도시에 살던 내가 분명 서울에 혼자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엄마나 언니와 함께 갔을 텐데 창경원에는 대학생이었던 사촌언니가 왜 나만 데리고 갔는지 잘 모르겠다. 창경원 안에서 뭘 구경했는지 기억이 하나도 안 나고 언니와 버스를 타고 창경원 앞에서 내렸다는 사실만 또렷하다.

 

강화의 석모도는 딸아이가 어렸을 때 가 본적이 있다. 차를 배에 싣고 갔다. 보문사에도 가고 바닷가도 갔다. 이 소설에서 석모도 사람들이 사용하는 사투리를 읽을 수 있었다. 강화도 쪽만의 사투리인지, 인천 사람들도 이런 말을 사용하는지 잘 모르겠다.

 

 

대온실 수리 보고서를 읽으며 자꾸 나와 연관된 생각만 했다. 좋은 소설은 소설의 알맹이도 중요하지만, 그 안에 내가 있고 나를 찾을 수 있어야 한다. 공감하고 공유할게 있으면 더 좋다. 소설과 어우러져 어느 곳에서 만나는 순간에 희열을 느낀다. 그것이 단지 한 순간, 한 지점 일지라도 나에게 그 소설은 좋은 것이다.

 

이 소설은 그러지 못했다. 끝가지 기대에 못 미쳤다. 마지막에 뭔가 해줄 것이라는 희망을 가졌지만 실망한 상태에서 책을 덮어야 했다. 내가 좋아하는 김금희 작가의 소설이라서 나의 노스탤지어를 끌어오고 인물에 대한 연민도 가져보고 그들도 이해했지만 끝내 버무려지지 않았다. 내가 끌어온 것에 내 것만 남았다.

 

뷔페에 가면 오늘은 정말 많이 먹으리라 결심한다. 작정하고 음식에 달려든다. 이 코스 저 코스로 다니며 한 가지씩이라도 다 맛보자며 접시에 조금씩 담는다. 배가 불러와도 일어나 새로운 접시를 가지고 다른 음식을 담아 온다. 배가 터져도 맛있는 디저트를 포기할 수 없다. 커피를 계속 들이키며 여러 종류의 디저트를 먹고, 마지막에 꼭 아이스크림도 먹는다. 그렇게 많이 먹고도 뷔페를 나올 때, 내가 어떤 음식을 먹었는지, 맛있었는지 잘 모른다. 그저 내가 낸 돈 만큼, 뷔페의 장점인 가성비를 달성했다는 느낌만 남아 있다. 내 몸 속은 부조화로 가득 차 있을 뿐이다.

 

딱 이 소설이 그랬다. 많은 맛있는 것이 이 소설에 들어 있었다. 창경궁의 대온실 수리, 문화재 공사 백서 기록 담당자라는 좋은 소재가 있었다. 정독 도서관과 원서동, 낙원 하숙이라는 과거(나에겐 진한 노스탤지어다)와 거기에 얽힌 영두, 안문자 할머니, 리사, 산아 등 여러 인물이 있었다. 창경원 대온실을 설계한 일본인의 회고, 문화재를 관리하는 공무원의 행태, 일제 강점기, 육이오 전쟁, 대온실 지하의 미스터리 등 여러 내용이 있었지만 결국 이것들이 하나로 버무려지지 않고 끝까지 각자 겉돌아 아쉬웠다. 장편 소설이지만 여러 단편 소설을 읽는 듯했다.

 

오랜만에 수리라는 말을 들었다. ‘대온실 수리라는 눈에 보이는 변화 이면에 깔리고 쌓인 여러 모습을 이 소설은 보여준다. 각자의 수리보고서에는 과거로부터 시작된 역사와 환경, 사람, 슬픔, 인내, 아픔, 상실, 수난이 들어 있다. 수리되어 더 웅장하고 멋지게 변한 창경궁 대온실 처럼 나와 우리들의 삶의 수리도 잘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그렇게 많이 믿지는 않지만. 그것이 가능한지도 잘 모르겠다.

 

[서울에서 내린 나는 주차해둔 차를 찾아 원서동으로 갔다. 낙원하숙도 대온실도 들어갈 수 없는 시각이지만 오늘은 그 공간 곁에 있고 싶었다. 창경궁으로 걷는 내 옆에는 여전히 아무도 없고 발을 내밀면 잠시 아무것도 없는 공중인 것도 같았지만 허방을 짚는 듯한 실패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마치 팔짱을 끼듯 할머니의 스케이트를 옆구리에 끼고 고궁의 담장을 따라 걸었다.

-p.375]



-작년 6월에 갔을 때의 창경궁 대온실



이 소설을 다 읽고 창경궁에 다녀오자고 했다. 깡통만두 식당도 가보고 싶었다. 그런데 11월에 폭설이 내렸다. 아직 나무에 빨간 단풍이 매달려 있는데 그 위를 하얀 눈이 급습해버렸다. 아무래도 내년 봄에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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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4-11-27 22:1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어릴적 창경궁에 자주 소풍가고, 중학교때 사생대회도 여기서 자주해서, 커서는 잘 안가게 되요. 너무 황량했던 기억이 있어서...!
지금은 잘 정비했겠지만,
전 창덕궁이 더 좋아요. 후원이 더 좋구요.^^
대온실이 여기를 말하는 건가봐요.

페넬로페 2024-11-27 23:47   좋아요 2 | URL
그쪽으로 소풍 많이 갔을 것 같아요. 지금은 너무 잘 정비되어 있어요.
소설에서 말하는 창경궁 대온실이예요.
직접 보면 그렇게 규모가 크지는 않아요.
이 소설 읽고 런던의 큐가든에 가 보고 싶어졌어요^^

망고 2024-11-27 22: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소설 아쉬운 점이 많았어요 페넬로페님 뷔페에 비유하신 점 너무 잘 이해가 됩니다ㅠㅠ
눈 덮인 사진 참 예뻐요😍눈은 가만 보고 있기에는 예쁜데 말이죠

페넬로페 2024-11-27 23:51   좋아요 2 | URL
많이 아쉬웠어요.
장편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연결이 부족하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어요.
별점에 대한 고민을 했는데 그렇다고 3별은 또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3.5 정도가 적당할 것 같아요^^

눈은 보기에는 예쁜데 밖에 나간 식구를 생각하면 그리 반가운 건 아니예요.
다들 눈길에 무탈했으면 좋겠어요^^

전야제 2024-11-28 01: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뷔페에 관한 부분 정말 재밌게 잘 읽었어요. 내 몸 속이 부조화로 가득 차 있다니. 통찰이 너무 재밌습니다 완전 공감해요ㅎㅎ 저도 다음에 서울 여행갈 때 창덕궁이랑 창경궁 꼭 가봐야겠어요! 예전에 경복궁은 가봤는데 나머지는 못 가봤네요ㅠㅠ 겨울 지나서 봄 되면 어머니와 함께 궁궐 여행부터 가고 싶습니다ㅎㅎ 저도 눈이 그리 반갑지는 않네요. 폭설이라는데, 페넬로페님도 눈길 조심하세요!

페넬로페 2024-11-28 10:09   좋아요 2 | URL
좋은 소설에 너무 말도 안 되는 비유를 한 건 아닌지 작가님께 조금 미안했어요.
부조화를 말하려고 했거든요.
저한테 이 소설의 느낌이 좀 그랬어요.
전야제님, 봄이나 가을에 어머니와 궁에 가시면 좋을 것 같아요.
창덕궁, 창경궁도 좋은데
저는 종묘도 좋아하는 장소예요.
춘천에도 눈이 왔어요?
날씨가 춥지 않아 바로 눈이 녹아 완전 길거리가 질척 거려 걷기가 힘드네요 ㅠㅠ

반유행열반인 2024-11-28 09:4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으아니 제 바로 앞에 꽂혀 차례를 기다리는 책인데 한때 좋아하는 작가라 (아마도 아직도 이걸 읽고선 또 바뀔지도) 걱정되어서 아직도 못 펼치고 있습니다. 마침 며칠 전 뷔페가서 한 접시밖에 못 먹고 온 소갈머리 좁아진 인간이라 ㅠㅠ ㅋㅋㅋ

페넬로페 2024-11-28 10:13   좋아요 3 | URL
저도 김금희 작가 좋아해 더 기대가 컸는지도 모르겠어요.
열반인님 느낌은 다를수도 있고 다른 친구분들은 이 책을 선호했으니 한 번 읽어 보시길요.
˝어, 괜찮은데, 왜 그리 생각했지?˝라는 생각을 하며 읽을수도 있거든요.
뷔페가는거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가면 그래도 여러 접시 먹고 오려고 해요 ㅎㅎ

달자 2024-11-28 17:2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알라딘 추천마법사가 오랫동안 추천해 주었지만 사서 읽지는 않았던...책인데그 이유는 뭔가 책 표지에서부터 이전의...김금희작가스러운 딱 그 이상 이하도 아닌 비슷한 책일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아서였어요 (논리 X) 제목이 살짝 SF라든지 판타지가 살짝 가미된 것 같기도 하고..? 무슨 보고서를 찾으러 과거로 떠난다든가... 암튼 그런 이유에서 읽지는 않았는데 페넬로페님 리뷰 잘 읽고 갑니다!! 창경궁에 대온실이 있는 지도 몰랐던 저...

페넬로페 2024-11-28 17:50   좋아요 2 | URL
책 뒤의 작가의 말에 저자가 20대때 창경궁과 창덕궁에 관한 책을 만들었다고 하더라고요. 참고 문헌도 엄청나게 많아요.
너무 많아 과유불급이 되지 않았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도 이번에 알았는데 문화재를 수리하려면 그 과정에 대한 보고서를 써야하는가 봐요.
이 소설은 그것을 쓰는 과정인데
여기에 많은 것이 가미되어 있어요.
보고서에 쓸 자료를 찾는 과정에 과거로도 가고 자신의 추억으로도 가더라고요^^

막시무스 2024-11-28 21:3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흐려져가는 단풍잎의 붉은색을 흰눈이 매워주니 분위기가 묘하네요!ㅎ 그래도 만두국은 겨울에 참맛이니 창경궁은 봄에 가시고 깡통만두는 겨울에 방문하시는게 어떠실까요?ㅎ

페넬로페 2024-11-28 22:11   좋아요 1 | URL
네, 안 그래도 뜨끈한게 넘 먹고 싶어요. 기회되면 가서 먹고 오겠습니다.
날씨가 추워지네요.
막시무스님,
감기 조심하시길 바래요^^

독서괭 2024-12-05 18: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에구.. 작가가 욕심이 앞섰나봐요. 좀더 잘 가다듬어서 냈으면 좋았을 것을.
창경궁 사진이 멋지네요. 저는 가봤는지 안 가봤는지 기억도 안 나요 ㅜㅜ
저는 창경궁, 하면 <토지>에서 창경원 산책 장면이 떠오릅니다. 인실이랑 오가타, 선혜랑 권오성이 만났던 것 같아요(이름이 기억이 안 나서 찾아봤네요 ㅎㅎ).

페넬로페 2024-12-05 18:36   좋아요 1 | URL
작가가 조금 더 탈고의 시간을 가졌다면 더 좋지 않았나 생각 했어요.
창경궁은 고궁보다 유원지의 이미지가 많았는데,
15년쯤 전, 가을에 갔을 때 너무 좋아 요즘은 자주 가요.

토지도 읽어야 하는데ㅠㅠ
그러면서 매번 똑같은 구호를 오늘도 외쳐 보아요.
언젠가는 읽을거야!
 
푸른 들판을 걷다
클레어 키건 지음, 허진 옮김 / 다산책방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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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어 키건의 단편집이 출간되었다는 소식에 빨리 만나고 싶어, 산책하는 동안 가볍게 오디오북으로 먼저 듣기 시작했다. 늘 그렇지만 지금 읽고 있는 책이 마무리되기 전에 읽고 싶은 신간이 쏟아져 나온다. 새 책을 집으면 그 전의 책이 그대로 쌓이는 걸 알기에 일단 오디오북으로 푸른 들판을 걷다를 들으며, 읽고 있는 책을 완독하고 이 책의 종이책을 다시 읽어보기로 했다.

 

하지만 내 계획은 첫 번째 단편인 작별 선물을 다 듣기도 전에 어그러져버렸다. 힘들어서 더 이상 들을 수가 없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성추행(그것도 아빠에 의한)에 대한 내용이 나와 듣기를 그만두었다. 거기에 엄마의 묵인이 있는, 들여보내다가 있어 분노가 솟구쳤다. 심장이 뛰어 진정시켜야만 했다. 이상하게 똑같은 내용이라도 억양이 들어간 사람의 목소리를 듣거나 시각과 청각을 다 이용해 보는 영상은 그냥 글자를 읽는 것보다 더 무겁게 느껴진다. 고민하다 한참 지나 책으로 다시 읽었다. 키건의 소설을 포기할 수 없었다.

 

키건의 소설에는 전반적으로 아일랜드의 특성이 들어있다. 종교적이고 가부장적이며 항상 뭔가 묵직한 분위기가 존재한다. 그들이 겪은 여러 역사적 상황에서 오는 고통과 갈등이 안에 그대로 고여 있다. 때론, 아니 언제나 그것은 내부로 향한 비난과 불신으로 발산된다. ‘물가 가까이를 제외한 이 책에 들어있는 6개의 단편은 그런 배경에서 살아가지만 한편으로 자신으로 살기위해 발버둥치는 개인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 결과가 좋은 것이든 아니든 인간은 자신의 삶에 대해 선택과 결정을 해야만 한다. 슈테판 츠바이크가 발자크를 사람과 시대를 하나의 맥락으로 보는 방법을 터득하고 있던 젊은이라고 했듯이 키건 역시 아일랜드와 거기에 사는 사람을 하나로 연결시킨다.

 

어떤 세월을 지나왔는지 자세히는 몰라도 가족에 대해 상관없다는 생각을 가진다면 거기에 부재했던 것이 뭔지는 뻔하다. <작별 선물>의 주인공은 그녀가 아닌 당신으로 서술된다. 작가는 그런 일(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이유에 대해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주인공을 당신으로 객관화시켜 떠나야만 하는 운명과 결단을 말해주고 있다.

 

권위적이고 폭력적인, 경제권을 쥐고 있는 아버지 밑에서 자식이 생기면 생기는 대로 낳아야 하는 당신의 어머니는 대가족을 원하지 않았다. 그런 이유로 자기 대신 당신을 남편의 방으로 들여보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떠나야만 하는 당신은 애써 상관없다고 말하지만 남겨진 어머니를 걱정한다. 당신의 불행을 알면서도 방관해온, 미안하다고 말하는 오빠는 당신과 달리 떠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안다. 떠나는 당신에게 정말 약았다고 말하는 가해자 아버지 밑에서 그들은 여전히 견디며 불행하게 살 것이다.

 

누군가에게 작별은 선물이 된다.

남겨진 사람들이 신경 쓰이고 걱정되지만, 그게 뭐 대수인가!

 

[이제 당신은 층계참에 서서 행복을, 좋은 날을, 즐거운 저녁을, 친절한 말을 기억해 내려 애쓴다. 작별을 어렵게 만들 행복한 기억을 찾아야 할 것 같지만 하나도 떠오르지 않는다.

-p.17

 

누군가가 괜찮냐고 묻지만-정말 바보 같은 질문이다-당신은 또 다른 문을 열었다가 닫을 때까지, 칸막이에 안전하게 들어가 문을 잠글 때까지 울지 않는다. -p.27]

 


성당 미사에 참여하면서 미사를 집전하는 신부님은 매번 똑같이 진행되는 전례의 반복이 지겹지 않은지 생각해본 적이 있다. 순명과 영성의 길을 선택했지만 그들 역시 인간이라 경계에 선 사람의 고통이 있을 것이다. 성당에 부임해 오는 신부님들의 특징이나 성격은 다양하다. 천성이 완벽한 신부 같은 사제, 직업으로서 신부를 선택한 것 같은 사제, CEO의 역할을 하는 사제, 권위적이고 본당을 자신의 왕국으로 여기는 사제, 신부는 취미이고 본업은 세계 여행가인 사제, 신부가 되지 않았으면 사업가나 사기꾼 중 하나가 되었을 사제 등 여러 모습을 보인다. 그것이 어떤 모습이든 사제복을 입고 서약을 했다면 신부가 지켜야 할 기본적인 것은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푸른 들판을 걷다>는 소설 첫 두 페이지의 문장에 암시와 복선이 들어 있다. 장황하지 않은 간결한 문장에 많은 의미가 담겨 있다. 키건의 소설을 좋아하는 이유 중의 하나이다. 이 소설은 사제의 관점으로 전개되어 끝가지 사제를 따라가기 쉽다. 사제는 푸른 들판을 걷다 치유를 잘한다는 소문이 자자한 중국인을 찾아간다. “당신 문제 있어요.라고 말하는 중국인에게 치료를 받고 자신 속에 있는 모든 것을 비워냈다고 생각한다. 마치 고해성사를 하고나면 자신의 죄가 모두 없어졌다는 착각에 빠지듯이 사제는 나름의 고해성사를 한 것이다. 자신의 과오와 사랑했던 여자에게 준 상처까지 씻겨 사제의 마음은 편해지고 사제로서 최선의 삶을 다해 살 것을 결심한다. 카타르시스로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준다.

 

[진주가 산산이 흩어지고 사제는 얼어붙은 것처럼 꼼짝도 하지 못한다. 그는 반들반들하게 닦은 플로어에 튀어 오르는 진주알을 바라본다. 진주 한 알이 굽도리에 부딪친 다음 반대로 다시 굴러와 던 양이 내민 손을 지나친다. 진주가 사제의 의자 쪽으로 다시 굴러가자 던 양이 한숨을 쉰다. 그가 손을 아래로 뻗어 진주를 집어 든다. 손에 닿는 진주가 따뜻하다. 그녀의 온기다. 이날 그는 무엇보다도 이 온기에 깜짝 놀란다. -p.52]

 

그녀의 온기는 던 양의 마음이며 사제가 그녀에게 느끼는 감정이다. 사제가 자신의 길을 충실히 가고 던 양이 다른 사람과 결혼한다고 해서 그들의 마음까지 변화시킬 수는 없다. 특히 던 양이 받은 상처는 그녀와 사제가 평생 짊어지고 갈 짐이다. 푸른 들판을 가로지르며 차라리 하느님은 자연이라 여기며 물 흐르는 대로 내일을 위해 살고 싶은 염원은 그저 오늘 하루만 유효할지 모른다.

 


<퀴큰 나무 숲의 밤>은 사제가 아닌 마거릿이 과거를 정리하고 앞으로 나가는 스토리다. 얼핏 푸른 들판을 걷다와 비슷한 맥락이다. 마거릿은 미신을 믿으며, 자신의 세계 속에서 과거를 붙들고 있다. 자신과 결혼하자던 사촌인 신부와 그 사랑의 결과로 얻은 죽은 아이를 생각하며 산다. 마거릿의 잘 이해되지 않은 여러 행동은 거기에서 시작되었다.

 

여자에게 아이의 존재는 무엇일까? 마거릿은 떠나기 위한 동반자로 남자가 아닌 아이를 선택한다. 소농의 딸에게 12년 동안 구애하면서 일요일 저녁 식사를 624번이나 사주었지만 그녀의 치맛자락 하나 못 건드린(p.192), 마거릿의 치유를 도운 아이의 아버지 스택에게 이렇게 상처를 준다. 스택의 마음을 잠깐 느껴본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무엇이 중요한 것인가를 모르는 사람을 보면 답답하다 못해 화가 난다. <삼림 관리인의 딸>에서 삼림 관리인 빅터 디건이 그런 얼간이다. 디건은 아버지가 죽으며 남긴 집 한 채를 땅을 저당 잡히고 돈을 빌려서 형제들의 몫까지 지불하며 이 집을 산다. 그 다음은 뻔하다. 삼림 관리인으로 일하며 돈을 벌어 매달 나가는 담보 융자에 대한 이자와 원리금을 갚고, 가족을 먹여 살리고 소 젖도 짜야 한다. 뭐든 깊이 생각할 시간이 없고', 가족을 살필 여력도 없다. 집이 대출금 없이 온전히 자신의 것이 될 때까지 모든 것을 희생하며 살아가야만 한다.

 

당연히 디건의 아내 마사는 행복하지 않다. 공허하고 쓰라림을 느낀다. 그런 마사에게 온갖 꽃을 싣고 다니는 외판원은 그녀에게 장미 같은 사람이 된다. 마사는 허공에서 무언가를 잡아채듯이웃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것은 마사가 꽉 막힌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탈출하는 방식이다.

 

마사는 디건을 떠날 생각을 한다. 여전히 일상은 똑같이 되풀이되며, 현재를 무시하고 찬란한 미래만은 꿈꾸고 사는 디건에게 결국 집이란 존재를 잊어버릴 불가항력적인 일이 일어난다. 그제야 디건은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게 살았는지 인정한다. 집은 그저 집일뿐이고 그들이 살아있다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검은 말>, <물가 가까이><굴복> 역시 고약했지만 털고 일어나 나름의 방식으로 어떻게든 내일을 살아가야 하는 사람을 이야기 한다. 그것이 희망적이지도, 행복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퀴큰 나무는 마가목의 다른 이름이다. 어마어마한 마력과 보호력을 가진 나무로 여겨진다. ‘퀴큰(quicken)’이라는 이름은 활기를 주는, 또는 생명을 주는 마가목의 힘을 가리킨다.(p.188, 클레어 키건의 주석)’]

 

인간은 완전할 수 없다. 실수와 잘못된 선택으로 자신과 타인을 힘들게 한다. 그럼에도 각자의 방식으로 계속 앞으로 나가는 속성을 지녔다. 가끔은 그 속에서 머물기도 하지만 고민이나 고통이 해결되지 않는다. 클레어 키건은 이 책에서 그런 것들을 말해주고 있다. 간결하지만 많은 서사와 깊은 의미가 담긴 글로 마음을 흔들어준다. 언제나 그렇듯 나에게 어떻게 살 것인가?’를 또 남겨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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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4-11-11 21: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알라딘 올해의 책 순위 보니까 클레어 키건이 높더라구요. 페넬로페님도 팬이시군요~!!
아일랜드 작품 특성이란게 있는거 같아요.

전 나중에 읽어봐야겠습니다!!!

페넬로페 2024-11-11 21:34   좋아요 0 | URL
네, 클레어 키건 작가의 팬입니다. 이번 단편집도 좋더라고요. 똑같이 아일랜드를 배경으로 한 제임스 조이스나 윌리엄 트레버와는 다른 결이 있어요. 새파랑님께서도 나중에 꼭 읽어보시기 바래요^^

그레이스 2024-11-11 22: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가목, 아일랜드랑 영국에서 많이 키워진듯요,
득히 아일랜드에사 자라는 나무들은 산사, 마가목, 벚나무 등 우리나라에서 자라는 것들과 겹치는듯 해요^^
초기작이라 아직은 맡겨진 소녀보다는 생략이나 함축이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클레어 키건다운 작품들이었어요.^^

페넬로페 2024-11-11 23:05   좋아요 1 | URL
이 책에서 마가목이 자주 나와 저는 아일랜드 나무인줄 알았는데, 검색해보니 한국에도 많이 있더라고요.
산사, 벚나무도 많군요.
단편이라 내용이 다양해 좋았어요. 발자크와 같이 읽어서 그런지 장황함이 없어 좋기도 하고요 ㅋㅋ

페넬로페 2024-11-11 23:08   좋아요 1 | URL
이 책 리뷰대회 했잖아요.
그레이스님,
좋은 결과 나왔을듯요^^

그레이스 2024-11-12 00:03   좋아요 1 | URL
그럴리가요^^
 
도시여행자를 위한 파리x역사
주경철 지음 / 휴머니스트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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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한 달에 한 권씩 오노레 드 발자크의 소설을 읽고 있다. 한국에 번역된 발자크 전작 읽기를 목표로 하고 있다. 발자크의 소설에서 19세기 전반의 프랑스, 특히 파리의 정치, 문화, 풍속이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고 해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발자크가 자신의 소설에 묘사한 파리가, 한 도시가 가진 모든 것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주경철의 도시 여행자를 위한 파리X역사는 발자크가 놓친 파리는 무엇인지 궁금해 읽게 되었다.

 

2024년 센 강에서 열린 파리 올림픽 개막식을 시청한 사람들의 느낌은 거의 비슷했을 것이다. 어수선하고 의미를 잘 알 수 없는 내용에다가 선정적이기도 한, 굳이 올림픽 개막식에 저런 메시지를 넣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과 지루함이 계속 느껴져 실망했다. ‘파리라는 이름을 건 올림픽이었기에 더 기대한 면도 있었다. 중간에 시청을 포기한 사람이 많았다.

 

그러다 개막식 마지막에 비 내리는 에펠탑에서 병마와 싸우는 중인, 흰 드레스를 입은 셀린 디옹이 부른 에디트 피아프의 사랑의 찬가에 모든 것이 녹아버렸다. 파리는 그냥 에펠탑으로 상징되는, 그들의 문화로 온갖 나쁜 것이 상쇄되는 특별한 도시인 것이다.

 

 

이 책은 고대에서 제2차 세계대전까지 파리에 대해 다이제스트의 형식으로 서술되어 있다. 파리에 대한 전반적인 지식을 얻는데 유용하다. 앙드레 모루아의 프랑스사의 축소판 같은 느낌에, 그 책보다는 사진이 훨씬 더 많이 들어있다. 가볍게 읽기 좋다파리에 대한 다양한 것을 아는 데에 도움이 되는 책이다.

 

다만 이 책의 저자가 역사학자라는 측면에서 이 책은 나쁘다. 역사에 대한 전문가가, 게다가 파리에서 유학까지 한 사람이 썼다는 면에서는 부족한 점이 많다. 왜냐하면 이 책의 내용에 특별한 것이나 저자의 생각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세계 역사의 흐름에 대해 조금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파리에 대해서도 이 책에 서술된 내용 정도는 이미 알고 있다. 그래서인지 이 책의 제목에 도시 여행자를 위한이라는 작은 글씨가 덧붙여져 있다. 저자도 이미 이 책이 가볍다는 것을 알고 있는 듯하다. 최근에 똑같은 내용의 책이 개정판으로 나왔는데 그것도 불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교수라는 든든한 직업을 가진 사람이 이 정도는 배고픈 다른 작가에게 양보하면 좋겠다.

 

발자크의 소설 배경을 더 잘 알기위해 이 책의 3부인 혁명의 도시부분을 더 집중해서 읽었다. 발자크 소설에 묘사된 내용과 다를 것이 없어 내게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 책은 발자크가 얼마나 대단한 작가인지 확인해준 책이다. 자신의 시대를 그대로 넣어 소설로 창작했다는 점에서 발자크는 정말 뛰어난 작가이다. 그 정도로만 만족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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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4-10-30 16:3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발자크 전작! 응원합니닷!!! 아휴, 정말 진심으로 발자크를 읽으시네요.

페넬로페 2024-10-30 18:03   좋아요 2 | URL
어휴, 독서 동아리에서 시작하는 바람에요.
열심히 읽겠습니다^^

coolcat329 2024-10-30 17:2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발자크 전작 저도 응원합니다!

페넬로페 2024-10-30 18:03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달려 볼께요^^

그레이스 2024-10-31 17:0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끝이 난듯하면 새로 출간하고...ㅋㅋ
전작은 안될듯 합니다 ㅠ

페넬로페 2024-10-31 20:57   좋아요 1 | URL
우리 거의 다 읽지 않았나요?
아직도 많이 남았을까요?
축약본은 생략하려고요~~

레삭매냐 2024-11-01 12: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페르 라셰르 묘지에서 발자크를
모르던 시절에 찍어 놓은 사진
은 정말 보물이 되어 버렸네요.

어쩌다 보니 두 번이나 갔었네요.

페넬로페 2024-11-01 14:20   좋아요 1 | URL
와, 두 번이나 다녀 오셨군요!
작년 파리 여행때 프루스트를 보러 가기로 했는데 그 날 비가 너무 많이 와 그냥 카페에 머문 기억이 나 속상합니다.
지금 발자크를 읽어 더 안타까워요.
언젠가 다시 한번 도전할 기회가 있으리라 믿고 싶습니다^^
 
결혼 계약 을유세계문학전집 136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송기정 옮김 / 을유문화사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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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에는 사랑이, 법엔 공정이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법칙라고 보통 생각하지만, 안으로 조금만 들어가 보면 그 속에 온갖 메커니즘이 작용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19세기 프랑스 복고왕정시대를 배경으로, 실제로는 7월 혁명이후의 세태를 그대로 반영한 발자크의 인간극엔 이러한 결혼과 법의 기본 정신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서른의 나이에 첫 책을 출간한 발자크는 그때 이미 6만 프랑의 빚을 지고 있었다. 발자크는 돈을 좋아했고 돈을 좇았지만, 빚을 갚고 글 쓰는 일에만 몰두하고 싶은 이유로도 돈을 벌고 싶어 했다. 하지만 인쇄업, 출판업 등 손 댄 사업마다 실패해 평생 빚을 안고 살아야 했다. 채무자로 산 그에게 돈은 비열함과 고통을 주는 것이었다. 발자크 소설의 아주 많은 부분에서 돈이 언급되는 이유는 발자크가 그런 현실을 몸소 체험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소설에는 재산의 축적과 파산 과정, 돈과 법을 이용한 인간의 파렴치한 음모가 구체적으로 나온다.

 

이 책의 번역자인 송기정 선생의 저서 오노레 드 발자크에는 그 당시 금융 시스템에 대해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발자크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연금 제도에 대해서도 잘 알 수 있다. 19세기 프랑스의 사회와 인간을 그대로 묘사하려는 발자크의 인간극총서를 읽으려면 일단 시대적 배경을 먼저 살펴봐야 한다. 법대를 다녔고, 소송대리인과 공증인 사무실에서 서기로 일했던 발자크는 법에 대한 지식도 상당해서, 그의 소설의 소재가 되는 법에 대해 이해하는 것도 만만치 않다.

 

정치적으로 격변하는 19세기 프랑스는 여러 차례 경제 위기를 겪어 사람들은 지폐를 불신했다. 금화나 은화 등의 금속 화폐를 선호했고 대부분의 경제 활동은 어음이나 채권을 통한 신용 거래로 이루어졌다. 눈에 보이지 않는 어음 유통은 그것을 잘 이용한 사람은 엄청난 부를 쌓았고, 앞을 내다보지 못하거나 흐름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은 파산하거나 엄청난 빚을 져야만 했다. 자본주의의 원리를 이해하고 앞을 내다보는 사람만이 부를 쌓을 수 있었다. 발자크 소설에 이런 내용이 수시로 나온다.

 

1835년에 출간된 결혼 계약은 그 시대의 결혼 풍속을 알 수 있는 소설(사실 발자크의 글은 소설인지, 다큐인지 헷갈릴 때가 많다)이다. 다소 비인간적인 요소가 강한 그 당시의 결혼은 나폴레옹 시대에 제정된 민법을 바탕으로 철저히 계약에 의해 이루어졌다. 지참금 제도가 있어 여성이 결혼하려면 지참금이 있어야 했다. 돈이 우선인 시대에 남자들은 여자가 가져오는 지참금으로 한 밑천 잡으려 했다.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돈 많은 과부도 마다하지 않았다. 발자크도 마찬가지였다.

 

소심하고 우유부단하며 순진한 폴 드 마네르빌 백작은 외아들로 아버지에게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는다. 폴은 파리에서 엄청난 돈을 탕진하고 고향인 보르도로 귀향한다. 그는 결혼해 한 여인과 행복하고 다정하게 살기를 원한다. 폴은 그곳에서 스페인 사업가의 상속녀인 아름다운 나탈리 에방젤리스타양을 사랑하게 되고 그녀와의 결혼을 결심한다.

 

나탈리의 어머니인 에방젤리스타 부인은 부자로 알려져 있지만, 자신과 딸의 미모를 유지하고 사교계의 여왕으로 군림하기 위해 엄청난 돈을 소비했기에 남아 있는 재산이 별로 없다. 남편이 남겨준 딸의 지참금도 거의 탕진했다. 그녀는 딸의 지참금인 100만 프랑에 대한 빚을 지고 있는 것이다. 에방젤리스타 부인은 자기 딸에게 빠져있는 어수룩한 폴의 돈을 희생양으로 삼아 파리 사교계로 진출할 꿈을 꾼다.

 

당시의 관습인 여성의 지참금 제도는 여성이 가져오는 돈이라 당연히 여성에게 유리한 것임에도 여성에게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불합리한 것이었다. 신부의 지참금을 관리하는 사람은 남편이었고, 지참금의 많은 부분은 마조라(한국의 종중 소유의 땅과 비슷한 개념-p.383) 설립에 기여했다. 그 돈의 일부분은 나중에 자식에게 상속되어야 했다.

 

에방젤리스타 부인은 자신의 불리한 상황을 솔직하게 털어놓지 않고 은근슬쩍 넘어가 폴과의 결혼을 성립시키려고 한다. 부인은 시대와 함께 전진하는젊은 공증인 솔로네가 자신의 창이 되어주기를 기대한다. 폴에게는 오랫동안 자신의 집안의 재산을 지킨 위엄 있고 존경받는 찾기 쉽지 않은 구시대공증인 마티아스가 버티고 있다. 솔로네의 창과 마티아스의 방패는 팽팽했지만 일단은 마티아스의 승리로 폴과 나탈리의 결혼은 성립된다. 이 과정에서 언급된 법률적인 내용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5년 후, 두 여자에 의해 폴은 완전 빈털터리가 되어 돈을 벌기위해 인도로 떠나야만 했다. 자본주의 원리인 돈의 속성과 흐름을 이해하지 못하고 앞을 내다보지 못한 폴 드 마네르빌에겐 당연한 결과였다. 발자크는 귀족의 몰락과 마르크스보다 먼저 자본주의의 폐해를 정확하게 예상한 사람이었다. 21세기에도 통하는 돈의 속성을 발자크는 그때 이미 발견한 것이다.

 

이 소설의 첫 부분과 마지막 부분의 앙리 드 마르세의 말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마르세는 발자크의 인물 재등장 기법에서 라스티냐크와 함께 굉장히 많이 나오는 인물이다. 폴의 아내가 된 나탈리 역시 골짜기의 백합에서 펠릭스 드 방드네스의 연인으로 등장한다. 그녀는 폴과 결혼한 상태에서 펠릭스를 사랑하게 되고 나중에 펠릭스를 떠나게 된다. 발자크의 인물 재등장 기법은 그의 소설을 읽는데 쏠쏠한 재미를 준다.

 

마르세는 결혼하겠다는 폴에게 결혼의 무용성을 아주 상세히 설명한다. 나는 그의 말에 완전 공감했다.

 

[결혼이란 가장 어리석은 사회적 자기희생이라네. 자식들만 그 혜택을 받지. 그 자식들은 자기가 부리는 말들이 우리 무덤 위에 핀 꽃을 뜯어먹을 때가 되어서야 그 희생의 가치를 깨닫게 되거든.자식이란 관리하기 어려운 상품과도 같다네.

 

, 결혼, 그건 말이야.. 그건 사회적으로 거기까지임을 의미한다네. 일단 결혼하고 나면 자네는 그저 그런 사람이 될 수밖에 없어. 자네 아내가 자네를 잘 돌봐 준다면 몰라도 말일세. -p.17. 20]

 

앙리 드 마르세는 이 소설의 마지막에도 폴에게 현실을 보라고 따끔한 일침을 가한다. 발자크는 마르세의 입을 빌려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있다.

 

 

발자크는 법에 관련된 소설도 많이 썼다. 그는 법을 소재로 인간의 더러운 술수와 욕심, 속임수를 서술했다. 법은 따로 떨어져 독립될 수 있는 속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돈을 비롯한 인간의 탐욕이 바탕이 되어 성립되는 것이 법이다. 발자크는 이러한 인간의 심리를 파악하고 해박한 법률 지식을 바탕으로 이에 관련된 소설을 쓸 수 있었다. 발자크는 민법(1804)과 민사소송법(1806), 형사소송법(1810), 상법(1807)을 이용했다.

 

금치산은 데스파르 후작 부인이 남편인 데스파르 후작을 금치산자로 선고할 것을 청구하는 내용이다. 자신의 남편이 루이 14세의 낭트칙령 폐지 후, 신교도에게 가해진 토지 몰수에 대한 양심선언으로 그 후손에게 재산을 돌려주는 것에 분노해 남편을 금치산자로 몬다. 금치산자는 성년임에도 자신의 권리를 행사할 수 없어 법과 가족의 보호가 필요한 자. 후작 부인은 파리 사교계를 대표하는 여자다. 서른이 넘어도 22세처럼 보이기 위해 그녀가 사용해야 할 돈은 엄청나다. 그런 그녀에게 따라오는 것은 당연히 빚이다. 후작 부인은 돈이 필요해 별거 중인 남편을 금치산자로 몬다.

 

이 소설에서는 보기 드물게 양심적이고 훌륭한 인품을 가진 두 사람이 등장한다. 한 명은 데스파르 후작이고 다른 한 명은 데스파르 후작 부인의 소송을 맡은 예심 판사(지금의 검사의 역할) ‘장 쥘 포피노이다. 발자크는 장장 17페이지에 걸쳐 포피노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그만큼 이 인물이 중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포피노는 한마디로 살아 있는 양심을 가진 사람이다.

 

재판은 술수를 사용한 데스파르 후작 부인이 승리한다. 이 소설은 싱겁고도 급하게 끝마무리가 되어 아쉽다. 다만 역자의 설명을 들으면 발자크의 다른 소설, 매음 세계의 영욕에서 데스파르 후작 부인은 몇 년 후 잃어버린 환상의 주인공인 뤼시앵 드 뤼방프레에 의해 패소한다. 데스파르 후작 부인은 파리에 입성한 뤼시앵을 불행에 빠뜨린 인물이고 이에 뤼시앵은 후작 부인에게 복수하는 것이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포피노의 조카인 의사 오라스 비앙숑라스티냐크고리오 영감의 보케르 하숙집의 하숙인으로 등장한다.

 

발자크는 결혼 계약금치산에서 자신의 전매특허인 장황함과 언어유희로 진지하고도 재밌게 자신이 살았던 시대를 얘기해주고 있다. 심심찮게 발견되는 작가의 개입으로 행간에서 뭔가를 찾아야 하는 독자의 고통도 주지 않는다.

 

그렇지만 발자크의 소설을 읽을 때, 너무 장황하거나 나에게 필요 없다고 생각해 어느 부분을 건너뛰어 버리면 난감한 상황이 발생한다. 건너 뛴 순간 앞 뒤 연결이 전혀 되지 않아 다시 돌아가야만 하는 것이다. 그만큼 발자크의 글엔 작가가 쓰고자 하는 것이 촘촘히 연결되어 있다. 그가 말해주는 그 당시 프랑스 사회가 이해되지 않고 가당치도 않는 것이 많다고 생각되지만 사실 거기에 지금 우리 시대의 모습이 엄청 반영되어 있다. 오히려 발자크의 시대보다 더 교묘하고도 은밀한 세계가 작동되고 있다.

 

번역자는 발자크의 글을 번역하는 것이 굉장히 힘들다고 했다. 그럼에도 발자크의 작품보다 인간 발자크에 대한 이야기만 회자되는 것이 안타까워 그의 소설을 번역한다고 한다. 번역자의 고뇌와 우려를 잘 알겠지만, 발자크의 소설을 읽고 이해하려면 그가 살았던 시대와 발자크라는 인물 자체를 알지 않고서는 힘들다. 천재인 발자크가 그렇게 되도록 만든 것이다. 어쩔 수 없다.

 

[폴 드 마네르빌이 이 편지를 읽었을 때, 그는 아르소스제도를 넘어가고 있었다. 편지에 쓰인 한 문장 한 문장은 그가 희망과 환상과 사랑을 가지고 공들여 쌓은 탑을 완전히 무너뜨렸다. 마치 망치가 탑을 내리치는 것 같았다. 부서진 탑의 파편들 한가운데서, 그는 차가운 분노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분노가 끓을 뿐,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자신에게 물었다

도대체 내가 그들에게 무슨 잘못을 했기에?’

이런 질문은 바보들이나 하는 것이다.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아무것도 예측하지 못하는 나약한 사람들이 하는 말이다. -p.231~232]

 

*이 글의 배경 설명은 오노레 드 발자크(송기정, 페이퍼로드)결혼 계약의 역자 해설에서 참조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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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4-10-10 04:3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리뷰가 이렇게 훌륭하면 흑흑.... 조만간에 읽을 예정인데 우짜라고요.... ㅋㅋㅋㅋ

페넬로페 2024-10-10 07:17   좋아요 2 | URL
내용이 장황하고 많아 배경에 대해서만 잔뜩 썼어요.
별점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는데 발자크와 정이 들어 오별 줬습니다. ㅎㅎ

coolcat329 2024-10-10 09: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이 책 벌써 읽으셨군요! 발자크 소설 안 읽은지 오래되서 읽고 싶은데 발자크 책은 왠지 좀 시간과 마음의 여유가 있을 때 읽고 싶어서 겨울까지 기다려야 할 거 같네요.
정성스런 리뷰 넘 훌륭하세요!

페넬로페 2024-10-10 10:10   좋아요 0 | URL
발자크 소설을 읽는 딜레마가 계속 읽을지, 던져 버릴지 고민을 하는 것인데,
저는 일단 고고씽 하기로 했어요.
넘 장황하지만, 그래도 소소한 재미도 있어서요^^

잠자냥 2024-10-10 09: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발자크의 소설을 읽을 때, 너무 장황하거나 나에게 필요 없다고 생각해 어느 부분을 건너뛰어 버리면 난감한 상황이 발생한다.˝ ㅋㅋㅋㅋㅋㅋㅋㅋ 저 진짜 처음에 발자크 읽을 때 너무 지루해서 건너뛰었다가 ㅋㅋㅋㅋ 다시 돌아오고 다시 돌아가고 하는 짓 몇 번 하고는 다시 안 합니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페넬로페 2024-10-10 10:12   좋아요 2 | URL
정말 그렇죠?
그래서 발자크를 다시 봤어요.
프루스트는 좀 뛰어 넘어도 괜칞거든요 ㅋㅋ

젤소민아 2024-10-10 12: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발자크는 좀 천재꽈같어요...이야기를 푸는 솜씨가...

페넬로페 2024-10-10 22:15   좋아요 0 | URL
이야기를 푸는 솜씨가 정말 기가 막혀요.
저는 발자크가 천재라고 생각해요^^

독서괭 2024-10-10 17: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소설인가 다큐인가 ㅋㅋㅋㅋㅋ 아휴, 발자크 언젠가 읽어야겠죠.. 페넬로페님 리뷰 보면 재밌을 것 같은데 지루한 부분 뛰어넘으면 안 된다고 하니.. ㅋㅋ 맘 먹고 읽어야겠네요.

페넬로페 2024-10-10 22:16   좋아요 1 | URL
장황하기도, 재밌기도, 지루하기도 한 것이 발자크 소설인 것 같아요.
그래도 계속 읽게 되는 마법이 분명 있어 매력적이예요^^

희선 2024-10-11 01: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업 같은 건 못할 사람인 듯합니다 글을 쓰고 다른 데서 책을 내는 게 훨씬 잘 되는 사람인 듯합니다 천재여도 못하는 게 있네요 사업... 본래 그렇기는 하죠 천재라고 해서 모든 걸 잘 하지는 못하는군요


희선

페넬로페 2024-10-11 08:06   좋아요 0 | URL
그니까요.
발자크는 사업쪽으로는 아니었나봐요 ㅎㅎ
그래도 위대한 인간극을 만들어 냈으니 대단하죠^^

레삭매냐 2024-10-18 13: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집에 사놓은 발자쿠 선생 책들
마저 읽어야 하는데...

계속해서 새로운 책들이 나오는
구만요. 선빵, 아니 선독 고저
부럽삽니다.

페넬로페 2024-10-19 16:14   좋아요 1 | URL
올해 그냥 발자크 마무리 하려고 부지런히 읽고 있어요.

제가 2019년 가을에 서재에 들어왔는데, 그때 선빵, 선독의 쌍두마차는 레삭매냐님과 잠자냥님 이었습니다.
열심히 따라 읽은 기억이 납니다 ㅎㅎ
요즘 발자크 읽기 하는 중에 발자크 신간이 나와 잽싸게 읽었습니다^^

전야제 2024-11-07 21: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발자크의 소설을 추천하신 분이 계셔서 조만간 꼭 읽어야지 했는데 마침 페넬로페님께서 쓰신 결혼계약 리뷰를 읽고 완전 궁금해졌어요! 너무 좋은 해설이라서 읽는데 많이 도움이 될 것 같아요. 저도 꼭 읽겠습니다. 당선 축하드리고, 좋은 글 감사합니다^^

페넬로페 2024-11-07 21:20   좋아요 1 | URL
발자크의 인간극에 그 시대의 풍속이나 법이 정확하게 들어 있어 저도 다른 책을 많이 참고했어요.
제 느낌이 별로 들어 있지 않는 리뷰라 민망합니다.
감사합니다^^
 
가장 파란 눈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49
토니 모리슨 지음, 정소영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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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도에 미국에서 태어난 흑인 여성이 1941년을 배경으로, ‘흑인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자 했을 때 얼마나 하고 싶은 말이 많았을까! 대학에서 강의하며 랜덤하우스 출판사의 편집자로 일하던 토니 모리슨이 직접 글을 쓰겠다고 결심한 것은 자신에게 내재된 경험과 감정을 언어를 통해 풀고, 정리하고 싶은 열망이 컸기 때문일 것이다. 뼛속까지 사무친, 뭉쳐지고 일그러진 무수한 얘기 중에 어떤 것을 꺼내 어떻게 전개해야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잘 전달할 수 있을지도 많이 고민했을 것 같다.

 

토니 모리슨은 자신의 첫 소설을 뻔한 내용으로 채우지 않았다. 작가는 억울하게 핍박받은 피해자로서의 흑인을 서술하기보다, 검둥이로 불리는 흑인 공동체 안을 먼저 들여다봤다. 1970년에 이 소설이 출간되었지만 토니 모리슨은 뒤늦게 1993년판에 서문을 덧붙인다. 서문에서 그녀는 작품을 쓴 의도와 구성방식을 설명한다. 작가는 바깥에서 받은 미움이나 증오로 인한 스트레스와 힘듦을 왜 안에서 풀려고 하는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남들의 멸시나 배척을 저항하거나 피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였을 때 초래되는 더 비극적이고 파괴적인 것에 작가는 관심을 가진다. 지독한 자기비하의 피해자는 둘 중의 하나가 된다. 위험하고 난폭한 성향의 기질로 자신보다 약한 공동체 안(여자와 어린이)을 공격하거나, 또는 자기 정체성을 포기하고 자아를 무너뜨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작가는 어린 나이나 성별이나 인종으로 인해 해로운 외부 영향력에 가장 저항하기 힘들 법한 인물의 삶으로 들어가려는 기획(p.8)’을 했다고 한다.

 

토니 모리슨이 던진 이 문제의식은 단지 흑인사회에서만 통용되는 것은 아니다. 어느 사회든지 보편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런 성향을 가지고 있다. 가정 형편이 좋지 않은, 폭력적인 환경에서 자란 사람(특히 남자)들이 자신의 가족을 파괴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자존감의 결여는 어린 아이의 자존감을 빼앗아 결국 폭력이 재생산되는 악순환을 양산한다. 다만 흑인이나 유대인처럼 민족 전체가 핍박받은 경우는 해결되지 못한, 뿌리 깊고 복합적이며 단단한 문제가 더 많을 것이다.

 

인생사 새옹지마전화위복이라는 말은 우리가 살아가는 삶이 늘 나쁘거나, 좋은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안 좋은 일이 생겨 고통을 받다가도 그것이 극복되면 다시 살아갈 힘을 얻고 희망도 가질 수 있다. 그러다 행운이 찾아오면 웃을 일이 생기고 지난했던 과거는 자신을 성장시킨 밑거름이었다고 스스로 위로할 수 있다. 억울하지 않고 누구에게나 공평하려면 우리에게 주어진 삶은 그래야만 한다.

 

하지만 여기 오하이오주 로레인에 사는 촐리, 폴린 브리드러브부부에게는 결코 그런 삶이 주어지지 않는다. 태어날 때부터 척박한 환경에서 자란 그들은 잠시 사랑(연민인지도 모른다)에 빠져 결혼하지만 곧 촐리는 바깥을 돌며 술을 마시기 시작한다. 집안의 생계를 책임져야 할 폴린이 일하러 가야할 곳은 백인의 집이다. 녹색과 흰색이 섞여있는, 문은 빨간색인 예쁜 집에 행복한 가족이 살고 있고, 어머니와 아버지는 웃으며 제인과 놀아주고, 강아지와 고양이가(p.17)’사는 흑인들이 동경하는 백인의 집에서 폴린은 마치 그곳이 자신의 집인 양 쓸고 닦고 열심히 요리를 한다. 촐리는 분노와 충족되지 못한 욕망을 아내에게 퍼붓는다.

 

당연히 촐리와 폴린은 싸운다. 남자가 가하는 일방적인 폭력에 여자가 되받아치며, 부부는 육탄전을 벌인다. 사태가 심각해지면 그들의 아들인 새미는 촐리의 머리에 프라이팬을 내리친다. 촐리는 정신을 잃고 그제야 싸움은 끝난다. 촐리는 자기 집에 불을 지르고 아내 머리를 후려친다. 그 가족은 나앉게 된다. 전형적인 불행한 집구석이다.

 

[내쫓기는 것과 나앉는 것에는 차이가 있다. 내쫓기면 어딘가 갈 데가 있지만, 나앉으면 갈 곳이 없는 것이다.나앉는다는 건 무언가의 끝이었다. 우리의 형이상학적 조건을 정의하고 보완하는, 돌이킬 수 없는 물리적 사실이었다.()당시 셋집살이를 하던 흑인 촐리 브리드러브는 자기 가족을 나앉게 만들었기에 인간적 배려가 미칠 수 없는 영역으로 스스로를 내던졌다. 짐승 무리에 합류한 것이다. 정말로 늙은 개, , 쥐새끼 같은 검둥이가 되었다.

-p.32~33]

 

그런 짐승 같은 환경에서 자란 그들의 딸 페콜라는 의지할 대상이 없다. 가족이 페콜라를 보호하거나 지탱해주지 않으므로 그녀는 당연히 자존감을 지킬 수 없다. 정체성의 혼란이 와 인종적 자기혐오를 나타내게 된다. 페콜라는 자신을 부정하며 노란 머리의, 얼굴이 하얀, 파란 눈을 가진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 자기 본연의 모습에서 시작된 모든 것을 거부한다.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사람은 페콜라만이 아니다. 백인의 피가 섞여 있는 갈색 피부의 깡마른 여자들은 조용한 흑인 동네에 살며 집을 멋지게 가꾼다. 교회에 열심히 다니며 백인의 일을 세련되게 하는 법을 배운다. ‘펑키함을 죽을 듯이 싫어하며, 자신의 몸에서 그것이 절대로 나오지 못하게 막는다. 그 여자들이 남자를 잘 수발할 것을 알기에 그것을 필요로 하는 남자가 그들을 선택해 결혼한다. 자신은 유색인이라 생각하며 검둥이를 혐오한다. 미묘하며 구분이 잘 되지 않은 자신의 검둥이 성향을 언제라도 뭉개려고 늘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p.113).

 

이 소설의 화자인 클로디아와 그의 언니 프리다에게 주어진 환경 역시 그다지 좋은 것은 아니다. ‘신분과 계급 모두에서 소수자인 건 페콜라와 마찬가지다. 그들의 부모는 노동으로 근근이 살아간다. 그들도 걸핏하면 매를 맞는다. 겨울날 가죽띠로 맞는 둔탁함보다 봄의 개나리와 라일락에서 꺾은 녹색 회초리로 맞는 쓰라림의 강도가 훨씬 강하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그들과 페콜라가 다른 점은 가족이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 준다는 것이다. 그들은 가족에게 불이익이 닥치면 같이 맞서 싸운다. ‘나앉는 것의 두려움을 알기에 재산과 소유를 향한 갈망을 가지고 셋집살이에서 벗어나고자 악착같이 허리띠를 졸라맨다. 페콜라가 끔찍한 일을 당해 임신했을 때 클로디아와 프리다만이 아기의 안전한 탄생을 기원한다. 그들은 서로 의지할 수 있는 둘이었기에 사랑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었다. 연대, 특히 여성 연대의 필요성을 그들이 보여준다.

 

똑같은 상황일 때, 인간의 행동은 왜 이렇게 다르게 나타나는지 매번 궁금하다. 누군가는 내부로 향해 자신의 분노를 폭력으로 분출하고, 다른 누군가는 내부에서부터 사랑하고 뭉치며 같이 저항하는지가?

 

촐리는 젊은 시절 덤불 속에서 어린 소녀와 성행위를 할 때 백인에게 발각되며 굴욕당한 경험이 있다. 그는 그때 자신이 느낀 충격과 무력감에 대한 분노를 그 대상인 백인에게 표출하지 않고 어린 소녀를 증오하며 경멸한다. 그 이후로 촐리는 모든 분노를 바깥인 아닌 내부로 퍼붓는다. 자신이 가진 트라우마로 인한 고통을 아내와 딸에게 푼다. 이런 일은 너무 많다. 나약하고 졸렬한 인간들이 자신보다 약한 사람을 대상으로 퍼붓는 폭력적 성향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이 책을 읽으면서 어릴 때 갖고 놀던 인형이 생각났다. 그동안 완전 잊혀 진 기억이었다. 누가 나에게 그 인형을 선물했는지 모르지만 인형의 생김새는 페콜라가 되고 싶은 모습이었다. 노란 머리에 파란 눈, 긴 속눈썹이 있고 예쁜 드레스를 입고 있는 인형을 눕히면 눈이 감기는 것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난 인형을 갖고 놀았지만, 똑같은 모습의 인형을 선물 받은 이 소설의 화자인 클로디아는 그 인형에 거부반응을 일으키며 인형을 망가뜨려버린다. 자연스럽게 흑인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백인에게 옮겨놓는 무심함을 클로디아는 경계한다.

 

토니 모리슨의 첫 장편소설인 가장 파란 눈은 촘촘하고도 아름다운 언어로 여러 감정을 표현한 글이다. 사계절로 구분되어 있으면서도 넘나드는 시점에 군더더기가 없다. 작가가 제기한 인종적 문제의식은 결국 보편적 인간 삶으로까지 확대되고 연결되는 역할을 한다. 다만 팽팽했던 전개가 소설의 후반부에 촐리와 폴린의 삶의 설명으로 전환되는 부분이 아쉬웠다. 긴장이 풀어졌다. 서문에서 말했듯이, 작가가 의도한 대로 되지 않은 느낌이다.

 

[그랬다.

흑인 여자아이가 백인 여자아이의 파란 눈을 갈망하고, 그 갈망의 중심에 자리한 참혹함보다 더한 것이 있다면 그런 갈망이 실현되었을 때의 끔찍한 폐해뿐이다.그애가 받은 손상은 전면적이었다.팔을 접어 손을 어깨에 얹은 채 파닥거렸다. 날아오르려 영원히 기를 쓰지만 그 헛된 노력이 기괴할 정도인 새처럼. 닿을 수 없는-볼 수조차 없는-마음속 계곡을 가득 채운 푸른 허공만을 응시하며, 날개는 있지만 땅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헛되이 파닥거리는 새. -p.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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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4-10-02 17:1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다른 출판사 버전으로
읽었습니다.

몇 안되는 제 전작주의 작가
중의 한 명이지요.

어떤 책은 또 모니터링도 해서
더 애착이 가는 그런 작가일까요.

내부의 번뇌와 갈등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자신보다 더
약한 존재에게 투사하는 촐리 속
에 내재된 악에 대한 묘사가 참...

<Home>의 출간도 기대해 봅니다.

페넬로페 2024-10-02 19:29   좋아요 3 | URL
책을 읽다보면 전작 읽기가 얼마나 힘든지 알 수 있는데,
정말 대단하시네요.

오래간만에 토니 모리슨의 소설 읽었는데, 내용도 좋았지만 언어의 풍부함에 놀랐습니다.
기회되면 조금씩이라도 토니 모리슨 다시 읽기 하고 싶어요^^

서곡 2024-10-03 12:4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표지의 꽃잎이 진한 파란색 수국 같네요...페넬로페님 오늘 개천절 휴일 잘 보내시기 바랍니다!

페넬로페 2024-10-03 13:06   좋아요 2 | URL
아, 수국인가요?
저는 파란 눈만 보느라 정작 꽃잎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책에 표지 디자인 설명이 있으면 좋은데 그런게 없더라고요.
서곡님!
휴일 건강하게 잘 보내시길요^^

서곡 2024-10-03 12: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토니 모리슨은 제 기억에 제가 완독한 책은 오래 전에 읽은 ‘재즈‘ 밖에 없는데 지금 다시 읽어보면 꽤 다른 느낌으로 다가올 것 같아요

페넬로페 2024-10-03 13:08   좋아요 2 | URL
네, 저도 예전에 토니 모리슨의 작품을 읽었는데 내용이 잘 생각나지 않아요.
이번 작품은 작가의 의도를 잘 알게 되어 쉽게 읽은 것 같습니다^^

서곡 2024-10-03 14:2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파란 수국 사진 제 블로그에 포스팅했답니다 ㅎ 제주도에서 다채로운 수국꽃들을 잔뜩 본 추억이 떠오릅니다...

페넬로페 2024-10-03 15:11   좋아요 2 | URL
네, 감사합니다^^

새파랑 2024-10-04 15:3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전 <빌러비드>가 취향에 안맞았어서 손 놓았는데, 약간 빌러비드랑 비슷한 느낌이 드네요~!!

페넬로페 2024-10-04 18:31   좋아요 2 | URL
빌러비드보다는 훨씬 편하게 읽으실 수 있어요. 아무래도 흑인의 이야기니 내용은 비슷하게 흐를지 몰라도 이 소설은 잘 읽힙니다^^

독서괭 2024-10-08 13: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똑같은 상황일 때, 인간의 행동은 왜 이렇게 다르게 나타나는지 매번 궁금하다. 누군가는 내부로 향해 자신의 분노를 폭력으로 분출하고, 다른 누군가는 내부에서부터 사랑하고 뭉치며 같이 저항하는지가?˝
이거 저도 항상 궁금합니다.. 어떻게 애들을 후자의 누군가로 키울 수 있을지?!!
<가장 파란 눈> 아직 못 읽었는데, 예쁘게 새로 나왔군요! 페넬로페님 리뷰 잘 읽고 갑니다~

페넬로페 2024-10-08 15:37   좋아요 1 | URL
저도 항상 궁금했는데, 토니 모리슨 작가가 그 부분에 대한 것을 주제로 글을 써주어 흥미로웠어요. 그런데 정답은 없었어요. 나쁜 놈은 끝까지 나쁘게 간다는 것이 아쉬웠고요. 독서괭님께서는 당연히 애들을 후자로 키우시죠. 지금 잘 하고 계시다는 걸 보지 않아도 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