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성 없는 남자 1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25
로베르트 무질 지음, 박종대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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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함께 무질의 특성 없는 남자20세기 모더니즘 소설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이 세 소설은 ‘20세기 소설의 삼위일체라고도 일컬어진다. 무질은 토마스 만, 프란츠 카프카와 함께 20세기 초 독일 소설을 대표하는 작가이다. 1999년 르 몽드가 선정한 세기의 도서 100권에도 이름을 올렸다. 이 소설의 어떤 점이 그렇게 대단한 건지 궁금했다. 그리고 율리시스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었기 때문에 그 다음엔 당연히 무질의 특성 없는 남자를 읽어야했다.

 

프루스트와 조이스에 비해 나에게 생소했던 작가인 무질의 이 소설이 결코 쉽지 않을 것이라 예상했다. 각오를 단단히 하고, 마음을 다잡아 시작했지만 읽기 어려움은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책장을 넘기기 어려운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일단 작가가 쓴 문장의 장황함이 큰 역할을 했다. 무질의 장황함은 프루스트, 발자크,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의 장황함과는 많이 달랐다.

 

무질의 문장에는 동시에 상대적인 것이 같이 들어있어 일관성이 없어 보인다. 작가가 말하고자 한 것이 무엇인지 한 번에 알 수 없어 모호하고 맥락을 이해하고 연결시키기 어렵다. 간결한 문장을 선호하는 작가 헤밍웨이였다면 50페이지에 족했을 내용을 무질은 500페이지가 넘는 문장으로 늘어뜨린다. 하나의 사건과 주목해야 할 간단한 에피소드도 무질은 여러 페이지에 걸쳐 그것을 설명한다. 비유를 들고, 여러 단어로 부연 설명하며 거기에 성찰과 사유를 들이밀며 독자를 고통에 빠뜨린다. 이 소설의 번역자는 원문이 워낙 어렵고 독특해 그대로 살리기보다 어떻게든 독자가 읽을 수는 있게끔 번역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이 소설 읽기는 무척 난해하다. 다음 문장을 읽으면 그 전의 글은 휘발되어 버릴 정도다.

 

로베르트 무질은 군사중등학교를 마치고 대학에서 기계공학을, 대학원에서는 철학을 전공하고 그 뒤 문학으로 진로를 바꾸어 작가가 되었다. 이러한 무질의 이력은 특성 없는 남자의 주인공 울리히와 소설의 내용에 많이 반영되어 있다. 작가가 지나온 길과 비슷하게 이 소설에는 과학적인 요소와 철학적인 것이 섞여 있으며 그것을 문학으로 나타내고자 하는 작가의 치열한 20년간의 고민이 담겨있다. 무질은 사유 소설(사건은 별로 없고 성찰과 사유가 주를 이루는 소설-3, p.602)의 형식으로 인간과 세계를 실험과 추상화 작업으로 서술한다.

 

 

이 소설은 19138,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어느 아름다운 여름날로 시작된다. 1차 세계대전 전 해이다. 여기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카카니엔이라고 불린다. 오스트리아 황국인 ’kaiserlich und kὂnigich’의 약자인 k.u.k를 의미한다. 공적으로는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이었지만, 사람들은 그냥 오스트리아로 말했기 때문이다. 제국의 수도이자 황궁이 자리 잡은 빈이 공간적 배경이다. 오랫동안 명성을 누렸던 왕가인 합스부르크가가 거의 몰락 직전에 있는 상태다. 자본주의와 과학의 발달, 진보는 어느 누구도 꺾을 수 없을 정도로 대세로 자리 잡았다.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의 패배로 오스트리아는 독일에 밀리고, 점점 독일의 영향이 제국에 스며들고 있었다. 다민족 국가의 한계로 여러 민족의 반발에 직면했고, 결국 이것은 제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된다.

 

 

스위스 아르가우 주의 합스부르크 성에서 출발한 합스부르크 가문은 전략적인 결혼과 영리한 외교술을 통해 세력을 넓혀갔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오스트리아 공작령을 획득하여 점차 주변 영토를 통합해 나중에 거대한 다민족 제국을 건설했다. 14세기에 프리드리히 3세와 레오폴트 3세 집권 시기 빈이 중요한 문화 중심지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알브레히트 2세 시대에 신성로마제국 황제 자리와 보헤미아와 헝가리의 왕위도 계승하게 되어 중부유럽 지배자로 부상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제국의 마지막 황제였다. 그의 통치시기에 빈은 화려한 문화예술이 꽃피운 시기였다. 그는 새벽부터 밤까지 국정에 매진하는 성실한 군주였으며, 이러한 그의 근면성은 제국 관료제의 모범이 되었다. 프란츠 요제프 시대의 오스트리아는 산업혁명의 물결을 타고 급속한 경제발전을 이루었다. 그의 통치기는 제국의 마지막 황금기였지만, 동시에 심각한 도전에 직면한 시기이기도 했다.

 

프란츠 요제프 1세의 개인적 삶은 불행했다. 부인 엘리자베트가 무정부주의자의 암살로 목숨을 잃었고, 외아들 루돌프는 마이어링 사건(유부남인 루돌프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비관해 일으킨 동반자살 사건)으로 젊은 나이에 죽었다. 후계자로 지목된 조카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사라예보에서 암살되었다.

 

오스트리아 제국이 이탈리아 통일전쟁과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연이어 패배하면서 제국 내 여러 민족의 반발이 일어났다. 오스트리아는 헝가리와 오랜 협상 끝에 아우스글라이히 협약을 체결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국가체제를 탄생시켰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11개의 주요민족이 공존했다.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는 두 개의 독립된 정치체제로 재편성되어 각자 독자적인 의회와 행정부를 가지게 되었다. 헝가리의 자율성은 제국 내 다른 소수민족들의 불만을 키우는 결과를 가져왔다. 크로아티아, 슬로바키아, 루마니아계 주민들이 강한 반발을 했다. 이중제국 체재는 여러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산업화로 체코의 민족의식도 급속히 성장하였다.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에서는 독일계와 체코계 주민들 사이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20세기 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표면적으로는 강대국이었지만 내부적으로는 다양한 민족들 간의 갈등이 끊임없이 표출되는 상태였다. 이들 다양한 민족은 각자의 정체성과 자치권을 요구했다. 프란츠 요제프 1세는 다양한 정책을 시도했지만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제국의 균열은 심해져 갔다. 독일, 프랑스, 영국, 러시아 등 강대국들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히면서 유럽은 전쟁의 기운이 감돌았다.

 

이러한 시점에서 제국의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를 방문했다. 페르디난트는 제국의 개혁을 주장하는 온건파 인물이었는데, 이는 제국 내 보수파와 헝가리 귀족의 반발에 부딪혔고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에게도 환영받지 못했다. 보스니아 청년단체 젊은 보스니아의 회원이었던 가브릴로 프린치프는 사라예보를 방문한 황태자 부부를 저격했고, 이 사건은 제 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되었다.

 

제국은 세르비아에 강경한 태도를 보였고, 결국 전쟁으로 이어졌다. 러시아의 세르비아 지원, 독일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지원, 프랑스의 러시아 지원이라는 동맹 체제가 연쇄적으로 작동하면서, 순식간에 유럽 전체의 전쟁이 되었다. 전쟁이 길어지면서 제국의 경제는 급속도로 악화되었고, 제국의 내부는 붕괴되기 시작했다. 전쟁 후반기에 각 민족들은 독립을 위해 움직였고, 제국이 전쟁에 패배하면서 완전한 해체되었고, 여러 개의 독립국가들이 들어섰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역사에 대한 내용은 다음의 책에서 발췌했습니다.

전자책 인간의 역사와 문명-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의 중부유럽 지배,

이진호, 루미너리북스, 20251

 

 

이러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1913년 전후의 상황은 이 책을 이해하기 위해 꼭 먼저 알아야 할 내용이다. 이 소설 1권의 핵심적 내용은 1918년 독일이 빌헬름 2세 황제의 치세 30주년을 기념해 큰 행사를 여는 것에 대해, 공교롭게도 같은 해에 있는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즉위 70주년을 맞아 오스트리아에서도 성대하고도 뜻깊게 기념하자는 것이다. ‘삼십 주년에 불과한 독일 즉위식과 비교해서 축복과 비통함의 역사가 함께한 황제의 칠십 주년의 장대한 무개를 부각해야(p.131)’한다는 것이다.

 

황제의 즉위 칠십 주년을 계기로 다시 한 번 위대한 오스트리아의 영광을 되찾고자하는 애국운동준비위원회가 결성되고 거기에 주인공 울리히가 참여하는 것이 이 소설의 큰 축을 이룬다. 애국대운동’, 다른 말로 독일과 관련되어 평행운동이라고도 불리는 이 거대한 사업에 울리히와 함께 여러 인물이 얽힌다.

 

특성 없는 남자에서 특성은 무엇일까? 왜 울리히는 스스로 자신을 특성 없는 남자라고 선언하는가? 얼마 전 외국에서 돌아온, 지금은 수학자인 특성 없는 남자인 울리히는 32세이다. 그는 출세 지향적이고 조화로운 공존과 일반적 원칙에 따르는 인간(p.21)’69세의 자신의 아버지와는 다른 사람이다. 특성 없는 남자는 반골적이며, 남들과 생각이 다르고 남들의 이상을 경멸한다. 몽상가이기도 하고, 허무적이며 허영기도 조금 가지고 있다.

 

울리히는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외부에서 주어진 특화된 특성을 거부한다. 보통의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 현실감각이라면 울리히는 가능성감각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능성감각 현실과 똑같이 존재할 수도 있는 것을 생각해내고, 존재하는 것을 존재하지 않는 것보다 더 중히 여기는 능력이다(p.22) 무척 섬세한 그물망 즉 안개, 몽환, 가정법의 그물망 속에서 살아가고 현실을 기피하는 대신 과제이자 창작영역으로 다루는 의도적 유토피아주의 같은 것이다.

 

[특성을 가진다는 것은 그것의 실재로 인한 모종의 기쁨을 전제로 하기에,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서조차 현실감각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남자가 어느 날 갑자기 스스로를 특성 없는 남자라고 여기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p.25]

 

울리히의 어릴 적 친구인 발터는 특성 없는 남자인 울리히를 아무것도 아닌, 별 것도 아닌, 현대가 만들어 낸 인간 유형이며, 그만의 고유한 내용이 없는 사람이라고 정의 내린다. 울리히는 모든 것에 뛰어나지만, 그것들 개개의 특성을 지니는 것을 거부한다. 하지만 울리히가 오늘날 모든 현상에 담긴 해체된 본질을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인 것을 알기에 발터는 울리히를 질투한다.

 

이 소설을 이끄는 또 하나의 인물은 매춘부를 잔인하게 살인한 서른 네 살의 목수 모스부르거이다. 울리히는 겉으로 드러나고, 사람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전개되는 모스부르거의 재판을 비판하며 모스부르거의 본질을 들여다보기를 원한다. 이 사건에 존재하는 양면의 모습들을 보고자 한다.

 

특성 없는 남자1부는 특성 없는 남자 울리히와 그의 사상, 시간적, 공간적 소설의 배경이 되는 것을 서술했고, 2부에서는 구체적인 사건이 진행되고 여러 다른 인물이 등장한다. 하지만 사건보다는 계속되는 작가 무질의 사유가 주된 내용이다. 무질의 사유는 독특하고 깊이 있으며, 모든 문장에 들어있는 비유 또한 뛰어나다. 다만 문장 하나하나에 집중하다 보면 전체적 맥락과 흐름을 이해하고 따라가기 힘들다. 나무만 보고 숲을 잘 보지 못하는 것 같다. 별다른 사건도 없어 리뷰 쓰기가 무척 어렵다. 아직 1000페이지 넘게 남아있는 무질의 문장이 두렵지만, 이왕 시작했으니 끝장을 봐야겠다.

 

[‘내게 남는 것은 무엇일까?’ 울리히는 씁쓰레하게 생각했다. ‘혹시 누구에게도 양도할 수 없는 용감한 인간이 아닐까? 내면의 자유를 위해 외부 법칙을 거의 인정하지 않는다고 자부하는 인간이 아닐까? 하지만 이런 내적 자유의 본질은 자신이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생각할 수 있다는 점에 있지 않을까? 그것은 곧 모든 인간적 상황에서 자신이 왜 그 상황에 묶일 필요가 없는지는 알지만, 정작 무엇에 묶이고 싶은지는 모르는 것이 아닐까? 그를 사로잡은 이 독특하고 작은 감정의 물결이 다시 해체되는 불행한 순간에는 그도 자기 자신에게 모든 사물에서 두 측면을 발견하는 능력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지 모른다. 그 능력은 거의 모든 동시대인들의 두드러진 특징이자, 울리히 세대의 속성을 형성하거나 그 세대의 운명이기도 한 도덕적 양가감정이다. -p.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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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5-10-15 03: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화이팅 기대합니다. 전 이 책 읽기를 포기했기에.

페넬로페 2025-10-15 07:48   좋아요 0 | URL
네, 꼭, 완독해 보겠습니다.

yamoo 2025-10-15 10:4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와~~~ 이 책을 읽으셨네요...읽다가 지루해서 덮었는데...지루하고 재미없으면 덮게되던데, 율리시스도 그렇고...언젠가 한 번 더 도전해 보고 그때도 못읽겠으면 팔아버려야 겠으요~~ㅎㅎ

페넬로페 2025-10-15 11:49   좋아요 1 | URL
일단은 ‘그냥 천천히 읽어보자‘를 목표로 두고 있습니다. 꼭 도전 성공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잠자냥 2025-10-15 11: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아.... 예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읽기 어렵군요.
넘 지루할 거 같아서;;; 저도 아직 도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요. 페넬로페 님은 파이팅입니다!

페넬로페 2025-10-15 11:50   좋아요 0 | URL
어렵고 지루합니다.ㅠㅠ
잠자냥님,
저랑 같이 읽으시고
꼭 무질을 주인공으로 한 장편소설 써 주시면 좋겠습니다.

stella.K 2025-10-15 11:1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와, 존경합니다! 저는 다음 생에...ㅎㅎ

페넬로페 2025-10-15 11:51   좋아요 2 | URL
네, 굳이 안 읽으셔도 괜찮다고 생각해요 ㅎㅎ
이 책 말고도 좋은 책이 너무 많습니다.

서곡 2025-10-15 19: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에 끌리던 때가 있었는데 지금은 아닙니다ㅋㅋㅋ 모쪼록 완독 성공 기원합니다

페넬로페 2025-10-15 19:42   좋아요 1 | URL
읽기 정말 힘들어요.
그저 완독만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꼭 해 내겠습니다.
응원 감사드려요.

coolcat329 2025-10-16 08: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페넬로페님! 👍 부럽고 멋지세요~

페넬로페 2025-10-16 09:00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꼭 완독해 보겠습니다^^

책읽는나무 2025-10-16 12: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렇게 어려운 책인 줄 모르고 사다놓기만 했어요. 와 읽을 엄두를 못내겠군요.ㅋㅋ
이렇게 리뷰를 쓰시는 페넬로페 님. 저도 존경스럽습니다. 완독 꼭 부탁드립니다.^^

페넬로페 2025-10-16 15:23   좋아요 1 | URL
어려운데 무질 작가가 글은 정말 잘 쓰는 것 같아요.
책나무님!
저랑 같이 읽읍시다^^

책읽는나무 2025-10-16 23:03   좋아요 1 | URL
저는 1,2권만 사다놓았어요.^^
요즘 sf소설에 빠져 있어서 장르가 다른 무질의 소설 세계에 진입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네요. 당장은 아녀도 한 번 생각은 해보겠습니다.
어려운 책이라 미리 후덜덜이네요.ㅋㅋㅋ
 
레오 아프리카누스
아민 말루프 지음, 이원희 옮김 / 교양인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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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변하는 역사 안에서 한 인간의 삶과 정체성이 온전히, 자의적으로 존재하기는 어렵다. 각자 앞에는 양자택일의 선택지가 놓여있는 경우가 많고 그것에 의해 인생은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일쑤다. 무조건 살아남고 가족을 지켜내야 하는 상황에서 란 존재는 없어진다. 종교, 관습, 조국은 한 개인을 죽이기도, 배반하게도 만든다. 사랑과 연민은 욕망과 권력 앞에서 무용지물이 된다.

 

여기 한 남자가 있다. 이름이 알하산 이븐 무함마드 알와잔 알파시 알자야티에서 조반니 레오 데 메디치로 바뀐, ‘레오 아프리카누스(아프리카인 레오)’로 불리는 사람이다. 태어나면서부터 40대에 이르기까지 이 남자가 부딪혀야할 변화무쌍한 역사는 곧바로 그의 것이 되어버린다. 온 몸으로 역사가 원하는 대로 삶을 바꿔야만 살 수 있다. 그에게는 어느 것 하나 비껴가는 일이 없고, 요행과 불운, 행운이 따른다. 그리고 용케 끝까지 존재한다.

 

8세기에서 15세기까지 이베리아 반도는 이슬람 세력인 무어인의 지배를 받았다. 1469년 아라곤 왕국의 페르난도와 카스티야 왕국의 이사벨의 결혼은 이베리아 반도 내에 있는 모든 가톨릭 왕국을 통합하는 계기가 된다.(p.32) 아라곤과 카스티야는 1480년부터 연합하여 그라나다를 공격했고, 1492년 마지막으로 그라나다의 이슬람 세력을 축출했다. 이 책에는 크리스토발 콜론(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이 등장한다. 그는 계속해서 이사벨 여왕과 만나기를 원했고 여왕의 구미가 당기게 할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었다. 1492년도가 흥미롭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해에 그라나다의 이슬람세력은 가톨릭 세력에 의해 영원히 추방된다.

 

이 책은 1488년 이슬람의 가장 중요한 명절인 라마단 시기에 무함마드의 아들 하산이 할례를 받는 것으로 시작된다. 하산이 태어난 때, 이미 그라나다는 흔들리고 있었다. 가톨릭 국가의 침입과 동시에 이슬람 세력 내에서도 7년째 내전을 이어오고 있었다. 어느 세계든 망하기 직전에는 상황이 비슷하다. 그런 면에서 인간은 정말 거기서 거기에 불과하다. 사기열전의 내용을 거의 답습한다.

 

술탄은 후궁, 그것도 기독교도 귀족 가문 출신의 노예에게 반하여 조강지처인 왕비와 아들들을 감금한다. 왕비는 아들을 탈출시켜 아버지 왕을 죽이게 만든다. 술탄이 된 왕자는 향락과 쾌락에 빠져 국사를 등한시하고 측근들은 수탈로 재산을 축적한다. 군인들은 봉급을 받지 못한다. ‘평화를 원하는 파전쟁을 원하는 파로 나라는 분열된다. 왕위 문제로 세 번이나 내전을 벌여 자멸한다. 가톨릭 연합군에 의해 그라나다는 고립되어 기근과 불안에 휩싸인다.

 

1492년 술탄 보아브딜은 카스티야-아라곤 연합군에 항복한다는 그라나다 조약에 서명한다. 그라나다의 몰락으로 알람브라 궁전을 가톨릭의 왕들에게 내주고 수많은 궤와 천으로 싼 물건들을 실은 말과 노새와 함께 술탄 보아브딜은 떠난다. 비참한 신세로 떠나는 보아브딜이 그라나다를 볼 수 있는 마지막 고개를 넘어가는 순간에 거기서 눈물을 글썽이며 한참을 망연히 서 있었다고 전해진다. ’카스티야 사람들은 실각한 술탄이 거기서 치욕과 회한의 눈물을 흘렸다고 하여 그 언덕배기를 무어인의 마지막 한숨이라고 불렀다.(p89)

 

몇 년 후, 하산 가족은 알메리아 항구에서 북아프리카의 페스로 몰락한 조국을 떠나 망명길에 오른다. 그 뒤 하산은 페스에서 카이로로, 다시 로마로 여정을 떠나야 했으며 그 모든 곳에서 일어나는 역사적 상황에 맞닥뜨리게 된다. 외교관인 외삼촌을 따라 사하라 사막을 횡단했으며, 외교관, 사업가, 여행가로 활동했지만, 메카에서 튀니지로 돌아가던 중에 해적에게 납치되어 로마로 보내진다. 로마에서 교황 레오 10세의 눈에 들어 가톨릭으로 개종해 레오 아프리카누스라는 세례명을 받는다. 하산은 그 긴 여정을 기록한 아프리카 지리지라는 연대기를 쓴다.

 

레바논 사람인 작가 아민 말루프는 레바논 내전으로 인해 1976년 프랑스로 귀화했고 프랑스어로 소설을 집필한다. 레오 아프리카누스는 저자의 첫 작품이다. 이 책에는 1488년부터 1527년까지의 하산이 지나온 곳의 역사가 치밀하고도 세밀하게 서술되어 있다. 레오 아프리카누스 말고도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적 인물이 많이 등장한다. 실존했던 인물들과 작가가 만든 허구의 인물이 잘 어우러져 있다. 작가가 얼마나 고심해서 이 소설을 썼을지 짐작이 간다. 정말 대단하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단연 하산이지만, 사실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 하나하나가 모두 주인공이 될 수 있다. 종교, 국가, 관습, 사회, 문화, 인종이 다른 집단이 서로 뒤얽히는 상황에서, 죽고 죽이며, 정복하고 빼앗기는 과정에서, 하루를 버티며 살아내야 했던 그 무수한 사람들의 삶엔 각각 특별한 거대한 운명적 서사가 있었을 것이다. 한 발짝만 물러나면, 모든 것이 부질없고 비합리적이지만, 태풍의 눈 안에서는 그것들이 보이지 않는다. 항상 먼저 신의 이름을 들먹이면서도 정작 신의 뜻을 따르지는 않는 인간들의 모습도 아이러니다.

 

이 책은 소설인데도 한 권의 역사책을 읽는 느낌이 들었다. 이슬람지역에서 사용하는 여러 용어를 비롯해 소설의 내용에 나오는 지역의 역사를 조금이나마 잘 알 수 있게 되었다. 전체적으로 흥미롭고 좋았다. 다만 너무 많은 역사적 내용으로 후반으로 갈수록 묘하게 힘을 잃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다 읽고 나서 모든 것이 산화되는 기분이 들어 아쉬웠다. 별로 여운이 남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아민 말루프 작가와 비슷한 운명을 가졌던 작가 압둘라자크 구르나의 소설과 비교되었다잔지바르가 혁명으로 인해 탄자니아의 일부로 편입되어 이슬람 박해가 심해지자 그는 영국으로 망명한다. 영어로 글을 쓰는 구르나 작가 역시 자신의 뿌리인 동아프리카의 역사를 배경으로 한 소설을 쓴다. 개인적으로 구르나 작가의 작품이 훨씬 좋았다.

 

[하지만 이것은 내가 한 경험의 일부에 지나지 않거늘. 나는 창조주께 무엇을 얻었고, 무엇을 잃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창조주께서 내게 빌려주신 시간. 나는 그 시간의 40년을 여행길에서 보냈다. 로마에서는 지혜로운 세월을 보냈고, 카이로에서는 열정적인 세월을 보냈고, 페스에서는 불안의 세월을 보냈고, 그라나다에서는 그저 순수한 세월을 보냈다. -p.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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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5-09-27 12: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책 바람돌이님 서재에서 본 책인데 ㅋ 저도 보관함에 넣어놨어요~!! 이슬람 문화가 좀 생소하긴 해서 어려운데 묘하게 관심이 가더라고요~!!

페넬로페 2025-09-27 15:02   좋아요 1 | URL
네, 저도 바람돌이님의 소개로 이 책을 읽게 되었어요. 역사적인, 새로운 사실을 많이 알게 되어 좋았어요. 그냥 역사책으로 읽는 것 보다 소설로 읽으니 훨씬 더 쉽게 다가왔어요^^

레삭매냐 2025-09-27 18: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상당히 기대를 하고 만난
책이었는데... 산화된다는 느낌
에 아주 공감합니다.

16세기판 <포레스트 검프>라
고 해야 할까요.

여러 제국들이 흥하고 망하는
역사적 순간들에 그렇게 개입
할 수 있었는지 말이죠.

페넬로페 2025-09-27 19:06   좋아요 1 | URL
정말 포레스트 검프 같았어요. 역사적인 상황이 엄청 흥미있었는데, 그래도 이 작품이 소설이라 거기에서 느껴지는 감동을 기대했었는데 그 부분에서 조금 아쉬웠어요. 그럼에도 잘 짜인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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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2024) 12월 초, 작가(황정은)는 여전히 글을 썼다. 직업이 소설가이기에 당연히 글을 써야 했을 것이다. 세면대 밸브에서 물이 세는 것을 발견해 기술자에게 전화도 했다. 나는 기껏해야 2주일 정도밖에 남지 않을 것 같던 엄마의 임종에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어야 했다. 그때 대다수의 사람들은 대체로 복잡하고 버거운 일상의 삶을 살고 있었을 것이다.

 

123, 저녁을 먹고 집안일을 하고나서 책을 읽고 있었다. 딸아이가 와서 대통령이 계엄을 선포했다는 사실을 알려줬다. 인스타가 난리라고 했다. 아직 귀가하지 않고 있던 남편에게 빨리 집에 오라고 전화를 했다. 제일 먼저 서울 시내를 줄지어 지나가는 탱크가 연상되었다.

 

계엄이라고?’

명동에 외국인 관광객이 넘쳐나고 시스템이 잘 되어있으며, 인터넷 강국인 21세기 대한민국에 계엄이라고? 왜 무엇 때문에? 기가 차고 뜬금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대통령이 자신의 눈에 거슬리는 사람들을 깡그리 잡아넣어 다 제거하려는 그 이유하나만으로 계엄을 선포하다니 믿기지 않았다. 그리고 이상하게 믿음이 갔다. 결국 이겨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엄마는 126일 새벽에 돌아가셨다. 127일 국회에서 김건희 특별법, 윤석열 탄핵안에 대한 표결을 한다고 했다. 남편은 계속 그쪽에 마음이 쏠려 있었다. 자주 방 안으로 들어가 TV를 보는 눈치였다. ‘장모와 엄마라는 한 다리 건너의 차이라 그런 것인가?’는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만약 시어머니가 돌아가시면 내 마음도 남편의 마음과 다를 것이라 생각되어 그를 이해했다. 부결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슬픈 마음에 천근만근 무거운 마음이 추가되었다.

 

그곳에서 이재명이 싫어 윤석열에게 투표한 큰 언니도, 이재명은 싫지만 윤석열에게는 투표하지 않았다는 오빠도 계엄은 잘못된 것이라고 했다. 이재명의 열렬한 추종자인 남편과 둘째 언니는 당연히 분노를 표출했다. 모두 왜 그랬어야 했는지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 정도면 계엄은 사람들을 납득시키는데 실패한 것이었다.

 

 

작가 황정은은 123일부터 38일 윤석열 석방까지 일기 형식으로 계엄의 시작과 진행 과정, 자신의 느낌을 적어나간다. 덕분에 책을 읽으며 시간에 따라 체계적으로 복기할 수 있었다. 문장의 많은 부분에서 내 생각을 발견할 수 있어 반가웠다. 단순한 나의 생각에 보태진, 작가의 짧지만 깊은 문장으로 의미와 느낌이 완성될 수 있었다. 계속 화가 났지만 집 안에서만 머문 나에 비해 추운 날임에도 매번 집회에 참석해 힘을 보탠 작가가 대단해보였다.

 

이 책에는 계엄에 관련된 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 소수자나 사회 약자, 이미 국가권력에 의해 상처받은 사람들에 대한 배려도 있었다. 작가의 일상도 고스란히 담겨있다. 단편과 장편 소설을 쓰고, 몸이 아프고, 산책을 하고, 자매들과 밥을 먹기도 한다. 작가의 과거에 대한 이야기도, 읽고 있는 책의 제목도 있다. 항상 남이 읽는, 특히 작가가 읽는 책이 궁금하기에 그 부분에서 눈이 번쩍 뜨였다. 그 책들을 인터넷 서점과 밀리의 서재에서 검색해 담아 두기도 했다. 그 사이 무안 공항 제주 항공기 사고와 큰 산불이 일어났고, 강동구 싱크홀로 오토바이 운전자가 사망했다. ‘서울서부지방법원 습격이라는 끔찍한 일이 자행되었다.

 

 

평론가 신형철은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에서 조지 오웰의 글을 인용하며 이렇게 말한다.

 

[조지 오웰은 나는 왜 쓰는가(한겨레출판, 2010)에서 작가가 글을 쓰는 네 가지 동력 중 하나로 역사적 충동을 들고, 이를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고, 진실을 알아내고, 그것을 후세를 위해 보존해두려는 욕구라고 규정했다. 우리 시대의 작가들에게서 이런 충동이 희귀해졌다. 그것은 역사학이 할 일 아니냐고? 역사는 세상의 길에서도 흐르지만 인간의 마음속에서도 흐른다. 그 마음의 역사를, 소설가가 아니라면 누가 기록할 것인가.

-P.128,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한겨레출판]

 

나는 우리 시대의 작가에게 그런 충동이 희귀해졌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글쟁이들은 역사와 사회에 무심할 수 없다. 쓰고 싶은 충동이 강한 사람들이라 안 쓰고는 못 배길 것이다. 요즘 작가가 가져다 쓸 수 있는 거시적 서사가 과거에 비해 확실히 적은 것은 사실이다. 빈약하기에 그리 보인다고 생각할 수 있다. 세월호 참사와 코로나 시국에 그에 관련된 소설이 많이 나왔지만 오히려 독자들이 또 그 얘기냐고!’하며 이젠 지겹고 식상하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한국 작가가 쓴 소설은 밋밋하고 재미없다고도 한다. 홀로코스트를 소재로 한 외국작가의 작품에 이런 평가는 드물다.

 

소재가 빈약하고 글의 세계를 위협하는 다양한 매체가 많아 작가들에게 어려움이 많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젊은 작가들이 조지 오웰과 신형철 평론가의 역사는 인간의 마음속에도 흐른다는 말을 기억해주었으면 한다. 전쟁이 아니어도, 홀로코스트가 아니어도, 식민지의 백성이 아니어도 지금 우리나라 역사의 한 장면 장면을 많이 써주었으면 좋겠다. 그것이 어떤 형식이든 반복해서 써주면 우리는 계속 잊지 않고 각성할 것이다. 계엄에 대해 황정은 작가가 물꼬를 터주어 고맙다.

 

한편으로, 지구상에 각종 폭력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이 너무 많지만 평화로운 지금의 대한민국이 너무 좋다. 빠르게 발전해가고 편리해진 세상에 사는 행운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아날로그 세상으로는 절대 돌아가고 싶지 않다. 스마트폰 하나로 사람들과 소통하고, 음악을 듣고, 책을 읽을 수 있어 행복하다. 아프면 병원에 가서 신경 주사로 통증을 빨리 낫게 하고 약을 먹을 수 있어 고맙다. 급하게 필요한 것을 다음 날 새벽에 집 앞으로 바로 갖다 주시는 택배 기사님들에 너무나 감사하다.

 

그들이 있기에 나의 일상이 있을 수 있다. 그러기에 먼저 국민의 일상이 평화롭게 지속되어야만 한다. 그것을 위해 권력과 정치가 제발 노력해 주기를 바란다. 그것이 위협받지 않고 지켜지는 사회가 가장 절실하다. 절실함을 이해하고 해결해주는 것이 대통령이 할 첫 번째 일일 것이다.

 

[화가 난다는 말로는 부족할 정도로 속이 뒤집힌다. 남의 삶을 조금도 아낄 줄 모르는 사람들이 그 삶을 다 무너뜨릴 막강한 힘을 가졌고 지금도 가지고 있다. 그럴 수 있을까. 군대를 동원해 사람들 목숨을 이런저런 전선으로 내모는 계획을 세우면서, 사람을 납치해 고문하고 없애라 명령하면서, 수많은 목숨이며 삶을 전쟁에 쓸어 넣을 계획을 세우면서, 그 머리와 가슴에 사람이 없을 수 있을까. 자신 말고 누구도 피 흘리는 생명체로 보지 않는 마음으로는 그게 될 것이다. 타인의 삶과 고통에 닿는 감각이 발달하지 않는 삶, 그럴 의지도 없는 마음으로는 그럴 수 있다. -p.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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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5-09-19 12: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황정은 작가의 남의 삶을 아낄줄 모르는 사람들이라는 말이 콱 와닿았어요. 나쁜 놈이라는 말보다 더 실감나는.... 일상의 소중함은 그것이 없어졌을 때 절실한데 그 일상을 잃고싶지 않아요.

페넬로페 2025-09-19 13:45   좋아요 1 | URL
이 책에 들어 있는 많은 문장들이 제 마음을 콕 집어 표현해주는 것 같아 좋았어요.
우리 모두의 일상이 편안하고 잘 돌아가면 좋겠다는 바람뿐이예요^^

책읽는나무 2025-09-20 10:4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작년 겨울. 아빠가 돌아가셔 애도하느라 비상 계엄 저 기간동안 마음이 좀 복잡했었어요. 뉴스를 보면 국민의 한 사람이 되어 분노가 일긴 한데…겉으론 애써 표출이 안 되니…집회 나간다는 친구를 그저 물끄러미 지켜보기만 했었고, 친구의 어떤 말 한 마디가 상처가 되기도 했었죠. 봄이 될동안 계속 슬프고 불안하고 암울했었네요.
그래서인지 이 책을 읽으면서 또 슬픔이 밀려오고 또 부끄러움도 밀려 오고 좀 그랬던 것 같아요.
지금은 서서히 잊어 가며 일상을 살고 있기에 페넬로페 님의 말씀처럼 역사의 한 장면을 자꾸 써줘야 한다는 것에 공감합니다. 요즘 읽고 있는 소설 곳곳에 팬데믹 상황이 언급되는 걸 봤었는데 잊고 있던 무언가를 건드려주며 다시 생각하게 해주는 게 있더라구요. 하물며 비상 계엄 같은 역사 이야기는 더 말할 것도 없겠죠. 이 책은 더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어서 아, 나 그때 무엇을 하고 있었지! 또 상기하게 되었고. 또 한 편으로는 작가 견해의 문장을 통해 마음을 더 단단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는 것 같아 좋았어요.

페넬로페 2025-09-20 12:09   좋아요 0 | URL
그때의 상황이 저와 책나무님이 비슷했기에 그 마음 잘 압니다. 마음이 공허했기에 계엄에 대해 분노하면서도 조금 떨어져 봤었던 것 같아요. 무력감도 있었고요. 아무리 해도 저 권력 가진 자들이 하는 나쁜 짓들을 막지 못 할 것 같다는 생각도 잠시 했어요. 지금도 계속 버티고 있는 걸 보니 기가 차지만 그래도 정권이 바뀌어 얼마나 다행인지~~
이 책이 제 생각을 잘 대변해주어 좋았어요.
근데 전 아직도 엄마의 죽음이 실감나지 않아요.

그레이스 2025-09-22 16:1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문제는 아직도 내란이 안끝났다는 사실! 저는 아직도 불안합니다.ㅠㅠ

페넬로페 2025-09-23 05:40   좋아요 2 | URL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제인 에어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9
샬럿 브론테 지음, 유종호 옮김 / 민음사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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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전에 읽은 소설들 중, 그것이 너무 좋아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은 것들이 있다. 되풀이해서 읽고 또 읽어도 좋았던 책 중의 하나가 샬럿 브론테의 제인 에어였다. 지금보다 훨씬 감성이 풍부했던, 이성보다는 감정이 먼저 움직였던 시절에 읽었던 제인 에어에서 나는 무엇이 그렇게도 좋았던가?

 

이번에 재독한 이 소설은, 하필 샬럿의 동생인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을 읽은 직후에 바로 읽어서인지 다소 밋밋한 느낌이 들었다. 리드 부인이나 로우드 자선 학교에 대한 반감이 그때보다 덜 한 건 그동안 내가 훨씬 더 독한 내용의 영상이나 소설을 많이 접해서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여전히 제인 에어의 이성적이면서도 흔들리지 않은 삶에 대한 진실한 태도가 좋았다. 끝내 터지고 마는, 마음 속 감정을 표출해 부당함을 비난하는 용기도 마음에 들었다. 착하다는 것이 참고 인내하는 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제인은 헬렌 번스의 행동을 이해하면서도 이해하지 못한다. 연민을 가지고 있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마음속에 깊이 담겨있는 것을 덜어낼 줄 아는, 용서할 수 있는 강인함도 멋있었다.

 

이 소설은 제인 에어의 회상으로 그녀의 삶에 대해 연대기적으로 씌여진다. 작가 샬롯 브론테는 글의 여러 군데에서 독자여(reader)’, 심지어 낭만적인 독자여(romantic reader)’라고 말하며 이 글을 읽는 사람을 의식한다. 제인 에어라는 한 여성의 전반적 일생이 주요 내용이지만 연애소설로 분류해도 별 무리는 없을 것 같다.

 

제인 에어와 에드워드 로체스터와의 연애 감정의 시작과 전개가 상당히 재미있다. 밀당의 묘미가 있다. 그들의 만남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이 첫 만남에서 대다수의 신분 높은 여자나 제인처럼 신분이 낮은 여자에게 볼 수 있는 보편성을 제인은 깨버린다. 제인은 본인의 개성과 생각이 뚜렷한 여자로 로체스터에게 각별한 첫인상을 남긴다. 제인 에어는 독립적이고,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여인이지만 사랑에 있어서만큼은 자신을 제어하지 못한다. 사랑의 감정은 이성으로 통제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제인 에어가 가진 신분과 로체스터가 처한 상황의 어려움이 있음에도 이 두 사람은 사랑에 빠진다.

 

제인에게 마음을 연 로체스터는 구체적이지는 않지만 자신의 불행으로 인한 현재의 상황에 대해 넌지시 얘기한다. 그는 과거의 불행으로 잘못된 길을 밟으며 자포자기하고 타락했다고 한다. 본래는 그렇지 않지만, ‘운명에게 두들겨 맞아 단단하고 억센 사람이이 되었다고 하소연한다. 그로인해 그는 냉소적이고 오만하며 가혹한 인간이 되었다고도.그는 제인과 더불어, 제인으로 인해 다시 부드러운 사람으로, 희망적 삶을 되찾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손필드 저택의 3층에서 벌어지는 기괴하고도 이해할 수 없는 일련의 사건들의 이유는 나중에 밝혀진다. 이것은 페어팩스 부인이 말한 로체스터의 고초의 근원이나 성질(p.229)’의 가장 중요하고도 넘어설 수 없는 딜레마이며 운명이다. 의문의 남성인 메이슨은 심한 부상을 입고 떠나며 로체스터에게 분명 그녀를 잘 부탁한다고고 말하며, 로체스터는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말한다.(이 부분에서 왜 뜬금없이 약간의 눈물이 나왔을까? 모두에게 닥칠 불행과 시련을 미리 알고 있어서일 것이다.) 사랑에 빠진 제인은 이들의 대화를 듣고서도 진실을 알아내지 못한다.

 

로체스터는 제인에게 이 상황을 언제 터질지 모르는 분화구라고 한다. 언제나 자신의 행복은 저당 잡혀 있고, 오점은 죽을 때까지 지워지지 않는다고 한다. 범법이 아닌 과실로 인해, 자신의 의지가 아닌 속임의 결과에 의해 그는 괴로운 현실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나중에 밝혀지는 로체스터의 행동이 타당하다거나,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전후 사정을 무시하고 로체스터의 이 행동만을 쏙 뽑아 세상 모든 페미니스트의 공격의 빌미가 되는 것 또한 공정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2권에서 이 생각이 바뀔 수도 있지만.)

 

이 소설은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보다는 훨씬 순하며 문장에서 사용되는 어휘 역시 단정하다. 그렇지만 내용은 상당히 페미니즘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제인 에어는 그 당시 사회적 통념에서 많이 벗어나려고 한 여성이다. 브론테 자매가 자신들의 가난하고도 척박했던 삶을 넘어서려했던 의지가 그들 소설 주인공의 캐릭터로 표현되었을 것이다. 그들이 창조해낸 이 인물들의 개성적인 성격과 에피소드는 왜 그들의 글이 계속 고전으로 남아있는가의 충분한 이유가 된다. 


"어디다 대고 감히 그러느냐고요? 어떻게 감히 그러느냐고요? 사실을 얘기하는 것 뿐이예요. 제가 감정이 없기 때문에 애정이나 친절이 없이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모양이지만 전 그것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어요. - P60

여성은 대체로 평온한 존재라고 흔히들 생각한다. 그러나 여성도 남성과 똑같은 감정을 가지고 있고 그들의 오빠나 동생들과 똑같이 자기의 능력과 노력을 발휘할 터전을 필요로 하고 있다. 너무도 가혹한 속박, 너무나 완전한 침체에 괴로워한다는 점에서 여성도 남성과 하등의 차이가 없다. 여성들이란 집 안에 처박혀서 푸딩이나 만들고 양말이나 짜고 피아노나 치고 가방에 수나 놓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보다 많은 특권을 누리고 있는 남성들의 소견 없는 생각에 지나지 않는다. 관습에 의해서 여성에게 필요하다고 선고된 일 이상의 것을 하고 또 배우려고 하는 여성을 탓하거나 비웃는 것은 소갈머리 없는 짓이다. - P195

자기의 외양에 관한 철저한 무관심이 엿보이면서 타고난 것인지 후천적인 것인지 용모의 매력의 결핍을 벌충하는 다른 자질에 대해서 오만할 정도로 자신만만하게 믿는 바가 있어서 그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부지중에 그런 초연한 태도에 감염되면서 맹목적으로 그의 자신만만함을 든든히 여기게 되는 것이었다. - P237

"저보다 나이가 많으시다든가 세상 경험이 많으시다는 것만 가지고는 제게 명령을 할 권리가 없으시다고 생각해요. 우위를 주장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은 자신의 시간과 경험을 어떻게 사용했는가에 달려 있다고 봐요." - P240

그러나 나는 질투하지 않았다. 아니, 설령 질투했다 하더라도 극히 드물게밖에는 하지 않았다. 내가 맛보았던 고통은 그런 말로 표현해 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잉그램 양은 질투의 대상도 되지 않는, 질투심을 일으키기에는 너무나 시시한 여성이었다. 언뜻 보아 모순되는 것 같은 말을 용서해주길 바란다. 난 진담을 하고 있으니까. - P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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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5-08-16 20: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로체스터에 대한 생각은 2권에서 바뀌리라 소심하게 예상해봅니다. ㅎㅎ
저도 다시 읽었을때 제인이 너무 좋아졌어요. 2권에 대한 페넬로페님의 글도 기대합니다. ^^

페넬로페 2025-08-17 01:04   좋아요 0 | URL
네, 2권에서 제 생각이 바뀔지도 모르겠어요. ㅎㅎ
저도 여전히 제인이 가진 성품과 단단함을 좋아하더라고요^^

단발머리 2025-08-16 21: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정말 좋아하는 <제인 에어>에 대한 페넬로페님의 글, 너무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제인은 물론이고, 로체스터에 대한 페넬로페님의 생각에도 동의합니다. 다만 저는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를 앞두고 있어서 로체스터 미워하게 될까 좀 염려스러운 마음입니다 ㅎㅎㅎ
2권 리뷰도 기다릴게요!

페넬로페 2025-08-17 01:07   좋아요 1 | URL
단발머리님께서 제인 에어 좋아한다는 사실은 아마 알라딘 서재 친구들 모두 알고 있을거예요. 저도 제인 에어 다 읽고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 읽을 예정입니다. 같이 감상 나누어요. 기대 됩니다^^

책읽는나무 2025-08-17 08: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인 에어는 어릴 때보다 나이 들어 읽는 게 더 좋은 것 같아요. 저는 좀 그랬던 것 같아요.^^
어릴 땐 뭐가 뭔지 좀 잘 몰랐던 것 같아요.ㅋㅋㅋ 좀 둔했었죠.ㅋㅋ
지금도 좀 그런 면이 있는데…^^
로체스터는 음. 잘 모르겠어요. 저는 읽을수록 부정적인 마음이 강해지더라구요. 그래서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책을 못 읽겠더군요. 아주 미워하게 될까봐요.ㅋㅋㅋ
나중에 페넬로페 님의 리뷰도 한 번 참조해야겠습니다.

페넬로페 2025-08-17 09:48   좋아요 1 | URL
어릴 때 읽었을때는 제인 에어의 입장에서만 이 소설을 읽었던 것 같아요.
3층의 로체스터 부인을 제인 사랑의 대척점에 있는 사람으로만 생각했는데, 이번에는 이 세 사람 각자의 삶이 눈에 들어왔어요. 각자의 생의 이면들이 궁금해지더라고요.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는 작가의 개인적 삶에 상상이 가미된 내용이 들어있어 조금 극단적이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잠시 해 봤는데, 역시 직접 읽어봐야겠죠.
책 읽고 리뷰 안 쓴 게 많이 밀렸는데, 그래도 열심히 읽고 부지런히 쓰겠습니다 ㅎㅎ

희선 2025-08-17 19: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잘 모를 때 이 책을 봐선지 페미니즘 같은 건 생각도 못했네요 그래도 오래전에 봤을 때보다 시간이 흐르고 봤을 때는 재미있게 보기는 했어요 제인과 로체스터 이야기만... 로체스터가 어떤지 보기도 해야 했는데, 어쩐지 그러지 못한 듯합니다 페넬로페 님 글을 보니 로체스터 자신은 아무 잘못이 없다고 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아주 나쁜 사람은 아니겠지만, 자신한테 좋게 말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네요


희선

페넬로페 2025-08-18 00:39   좋아요 0 | URL
제가 페미니즘이란 단어를 사용했는데, 완전한 건 아니고 그 당시의 상황에 비해 제인 에어의 생각이나 행동이 굉장히 독립적이었다는 것이예요.
로체스터는 제인과 결혼하고 싶어 그렇게 말하는데 분명 잘못된 행동을 하고 있는건 확실해요.
사랑을 성취하고 싶고 자신도 좀 더 행복하기를 원해서이겠지요^^

젤소민아 2025-08-22 14: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의 롤모델, 제인 에어. 저의 최애 소설!

페넬로페 2025-08-22 16:27   좋아요 0 | URL
저의 롤모델이기도 합니다^^
 
아메리고 - 대항해 시대와 우연의 역사 츠바이크 선집 (이화북스) 4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육혜원 옮김 / 이화북스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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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등학교 시절에 내가 받은 주입식 교육은 거의 모든 것을 달달 외우기만 하면 좋은 성적을 받게 해주는 시스템이었다. 암기가 정석이기에 영어 숙제는 16절지 연습장 앞뒤로 빽빽하게 검정색 볼펜으로 영어단어를 쓰면서 외운 흔적을 제출하는 것이었다. 볼펜 두 자루를 쥐고, 동시에 같은 단어가 두 번 써지는 효과를 보며 숙제시간을 절약하는 친구도 있었다.

 

어떤 역사 수업엔 그 날 날짜와 똑같은 번호를 가진 학생이 지목되어 그것을 시작으로 옆으로, 뒤로, 때로는 사선으로 줄줄이 한 명씩 일어나 전 시간에 배운 내용에 대한 선생님의 질문에 대답을 해야만 했다. 정답을 말하면 앉을 수 있었고, 대답하지 못하면 그대로 서 있어야 했다. 선생님이 준비한 모든 질문이 끝나고 서 있는 학생은 선생님이 힘차게 내리찍는 압력으로 등짝을 한 대씩 맞아야 했다. 역사수업이 시작되기 전에는 공포가 엄습했지만 그 덕분에 의무적으로 복습을 열심히 할 계기가 되어 주었다.

 

암기위주의 학습이나 주입식 교육의 폐해가 언급되지만,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세상에 대한 상식이나 지식은 거의 그 시절의 암기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 그것이 마냥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닌 것 같다. 지금도 중고등학교에 다니는 학생을 만날 때마다 그 시절에 배운 것이 삶의 밑거름이 되어준다고 말하곤 한다.

 

그 시절의 내가 가졌던 싱싱한 뇌는 지금과 다르게 움직임이 활발해 암기는 별로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그때 각인된 암기의 결과로 콜럼버스의 1492년과 그로부터 100년이 지난 1592년의 임진왜란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워낙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라 14921592를 연결해 외웠었다. 콜럼버스가 인도라고 생각한 그곳은 세상 사람들이 네 번째로 인식한 대륙이었고, ‘아메리고 베스푸치라는 사람의 이름을 따 아메리카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 이름도 당연히 역사 시간을 통해 알게 된 것이다.

 

콜럼버스가 발견한 신대륙은 어떻게 콜럼버스가 아닌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이름을 따 아메리카라고 명명되었을까? 슈테판 츠바이크의 아메리고를 읽기 전에는 한 번도 그 이유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당연히 아메리카 대륙이 콜럼버스보다 베스푸치와 더 많은 연관이 있어서일 것이라고 단정해버렸던 것 같다.

 

특정한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이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를 거쳐 가면, 그 모든 것은 흥미롭게 변한다. 군더더기 없이 정돈된 문장으로 츠바이크는 독자를 역사의 현장으로 끌어들인다. 이 책에서 츠바이크는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작가의 지성과 탁월한 문장으로 여러 역사적 사실을 넘나들며 아메리고 베스푸치에 관한 것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방대하지만 짧게 압축된 츠바이크의 서술은 아메리고 베스푸치라는 한 특정한 인물에서 시작해 그러므로 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한다.

 

중세의 어둠에서 깨어나 각성하기 시작한 1300년 정도부터 사람들은 바깥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마르코 폴로가 중국에서 돌아오고, ‘바스코 다 가마가 희망봉을 돌아 유럽에서 인도까지의 직항로를 발견한다. ‘콜럼버스는 산타마리아호를 타고 바스코 다 가마가 갔던 길과는 다른, 반대방향인 대서양을 횡단해 과나하니 섬에 상륙한다. 콜럼버스가 발견한 곳은 지금의 아메리카 대륙이지만, 그는 죽을 때까지 자신이 발견한 대륙이 인도라고 믿었다. 그 후로 거의 10년 동안 엄청나게 많은 새로운 장소가 발견되어 그야말로 대항해시대가 열리고 있었다.


-p.51, 아메리고 베스푸치, 자크 라이히, 미국 의회 도서관 소장

-p.101, 아메리고 베스푸치 조각상, 이탈리아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아메리고 베스푸치>1451년 피렌체에서 출생했다. 초기 르네상스 인문주의 교육과 과학적 지식을 조금 배우고 메디치 가문이 운영하는 은행에서 상인으로 일했다. 그는 스페인으로 파견되었고, 선박회사에서 일했지만 회사가 없어지는 바람에 가난하게 살아야 했다. 다른 회사에서 말단 직원으로 20년 정도 일했던 베스푸치는 1499, ‘알론소 데 오헤다폰세카 추기경의 명령으로 원정대를 꾸렸을 때 항해에 참가한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다른 항해사에 비해 지식이 많았던 베스푸치는 천문학자의 자격으로 탐험에 동행했을 수도 있었다. 그 후 브라질 지역으로 가는 오헤다의 원정에도 참여한다. 베스푸치는 항해사 또는 지도제작자로서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 원정에서 베스푸치는 원하던 재산도, 명예도 얻지 못했지만, 세상 사람들에게 그곳이 인도가 아닌 문두스 노부스즉 '신대륙'이란 새로운 인식을 심어주었다. 콜럼버스도 하지 못한 대단한 업적이었다.

 

베스푸치는 항해에서 돌아올 때마다 메디치가의 로렌초에게 항해에서 본 것을 쓴 편지를 보냈다. 로렌초에게 보낸 세 번째 편지가 라틴어로 번역되어 신세계라는 제목의 팸플릿으로 제작되어 유럽 전역으로 퍼지게 되었다. 이 편지 형식의 보고서가 유명해진 것은 신세계라는 단어 때문이었다. 그들이 발견한 대륙이 인도가 아니라 새로운 곳이었고 또한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여긴 적도를 넘어선 항해로 이루어졌기에 더 대단한 것이었다.

 

그 뒤 베스푸치의 편지는 인쇄업자와 출판업자들에 의해 심하게 부풀어지고 비약된 내용의 책으로 출판되어 자신도 모르게 베스푸치는 신대륙을 발견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한 술 더 떠 발트제뮐러라는 사람은 신대륙을 그 땅을 발견한 사람의 이름을 따 아메리카라고 부르자고 제안한다. 이때부터 그 땅은 영원히 아메리카라고 불리게 되었다.

 

[오늘날 지구의 세 부분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는 이미 완전히 탐구되었고, 아메리고 베스푸치가 네 번째 대륙을 발견하였다. 유럽과 아시아도 여자 이름이기 때문에 내가 보기에 이 부분을 총명한 사람 아메리고가 발견한 아메리고의 땅, 아메리카라고 부른다고 해서 반대할 이유는 없다. -p.89]

 

아메리고 베스푸치가 잘못한 것은 사실 별로 없다. 그저 사람들이 가짜뉴스를 믿듯 그렇게 믿어버린 것이다. 그 후 400년 동안 이 사실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으며 베스푸치는 중상모략가, 위조자, 사기꾼으로 평가받기도 했다. 놀라운 사실은 콜럼버스와 베스푸치가 개인적 친분이 있었다는 것이다. 논란의 대상이 된 그들은 죽기 전, 정작 아무런 명예도 주목도 받지 못했다.

 

츠바이크는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이름을 따 신대륙이 아메리카라고 명명된 사실을 우연과 오류, 오해, 착오에 의해 유발된 것이라고 한다. 작은 진실하나에 수많은 곁가지가 붙은 셈이다. 역사는 보통 이런 것이 아닐까?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 모두가 진실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닐 것이다. ‘우연과 오류는 역사 현장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단어일 수 있다.

 

아메리고 베스푸치는 아메리카를 발견하지 않았고, 최초로 그 대륙에 발을 디딘 사람도 아니다. 그럼에도 그가 사용한 문두스 노부스라는 단어, 신세계라는 표현만으로도 대단한 역사적 업적을 남겼다. 하지만 이 신세계는 파괴와 약탈, 죽음, 고통의 다른 말과도 같다. 바스코 다 가마와 콜럼버스는 많은 원주민을 무자비하게 죽이고 약탈했으며 그것은 사악한 식민지 시대의 시작이었다. 대항해시대로 시작된 그들의 경쟁적 모험은 세계를 쪼개고 양분하는 계기가 되었고, 지금의 글로벌 금융지배의 원천이 되었다. 역사는 언제나 처음 의도와는 다르게 변하며, 그것에는 언제나 여러 개의 의미가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메리카는 자신의 세례명을 부끄러워할 이유가 없다. 그 이름은 올곧고 용감한 한 남자의 이름이다. 그는 오십이 넘은 나이에도 세 차례에 걸쳐 조그마한 배를 타고, 아직 탐험되지 않은 대양을 건너 미지의 세계로 뛰어들었다. 그 역시 시대의 모험과 위험 속에 기꺼이 목숨을 걸었던 수백 명의 이름 없는 선원들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어쩌면 민주주의 국가에 잘 어울리는 이름은 왕이나 정복자의 이름이 아니라 이름없이 용감했던, 그런 평범한 사람의 이름일지도 모른다. 이는 서인도라든가 뉴잉글랜드, 뉴스페인 또는 성스러운 십자가의 나라 같은 이름보다 분명히 더 공정한 명명일 것이다.

-p.186]


-p.44, 아메리카에 도착한 콜럼버스, 테오도르 드 브리, 159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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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5-08-12 17: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츠바이크의 필력은 정말 역사적 사건을 생생하게 되살리죠. 저도 흥미진진하게 읽었습니다. 그나저나 수업시간마다 등짝 스매싱을 날리는 역사 선생님이라니 그 참... 그 시절에나 가능했던 이야기겠지요. ㅎㅎ 지금은 없어진 풍경이라 다행입니다. ㅎㅎ

페넬로페 2025-08-12 18:03   좋아요 1 | URL
네, 일단 츠바이크는 흥미를 유발시키는데 읽을수록 이 사람이 아는 것이 많다는 걸 새삼 느낍니다.

그 시절에 등짝 스매싱은 그나마 가벼운 것이었어요.
생각하면 참 파란만장했는데, 그래도 즐겁게 학교 다닌 것 같아요. 친구들이 다들 좋았어요. 왕따도 거의 없었고요.

건수하 2025-08-12 20: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어쩌다 아메리카가 되었는지, 아메리고 베스푸치는 누군지 궁금했는데 글을 읽으니 무척 관심이 갑니다. 주요(?) 인물이 아닌 사람이 대단한 발견을 했고 이름을 대륙에 남기게 되었다는 점이 인상적이에요.

츠바이크가 결국 남미에서 세상을 떠났잖아요.. 그가 어느 시기에 이 작품을 썼는지도 궁금해지네요.

페넬로페 2025-08-12 21:51   좋아요 0 | URL
저도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이름만 알고 있었는데 이런 큰 사연과 반전이 있는지 몰랐어요.
츠바이크가 베스푸치의 입장이 되어 그를 복권시켜 준 것 같은 느낌도 들었어요.
이 책에서 해설자 후기가 없어 언제 이 글을 썼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츠바이크와 신세계도 인연이 깊은 것 같습니다^^

새파랑 2025-08-13 13: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콜럼버스 때문에 콜럼비아라는 나라명이 생긴걸까요? ㅋ 누가 먼저 신대륙을 발견했냐 보다 누가 먼저 신대륙을 인식했냐가 중요했던거 같습니다. 역시 글 잘쓰는 츠바이크~!!

바람돌이 2025-08-13 13:56   좋아요 1 | URL
맞아요. 볼리바르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운동을 주도하면서 콜롬부스의 이름을 따서 대콜롬비아공화국을 만들어요. 이후 대콜롬비아가 분열하면서 지금의 콜롬비아, 베네수엘라 등 6개국으로 분열하고요. 중남미 지역의 독립운동을 주도한게 전부 현지 출신 백인인 크리오요들이니 자신들의 정체성을 콜롬부스에서 찾은듯해요.

새파랑 2025-08-13 14:11   좋아요 1 | URL
아하 그렇군요~!! 아메리고 콜롬부스 모두 아메리카 대륙에 끼친 영향력이 엄청난거 같습니다~!!

페넬로페 2025-08-13 14:18   좋아요 1 | URL
바람돌이님!
설명 감사합니다.
대 콜롬비아공화국이 6개국으로 분열된 거군요.
콜롬비아 나라이름도 결국은 백인 세력이 주도한 거군요^^
콜럼버스가 발견하기 전에도 이미 있던 곳이잖아요^^ㅠㅠ

페넬로페 2025-08-13 14:19   좋아요 1 | URL
네 정말 츠바이크는 이런 종류의 글을 잘 쓰는 것 같아요^^

바람돌이 2025-08-13 14:35   좋아요 1 | URL
콜롬부스가 이 땅을 발견한 이후 백인들의 학살과 천연두같은 전염병 전파에 의해 원주민의 90%가 죽어갔으니 백인들은 이 땅을 온전히 자신들의 땅이라고 생각한거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