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아이가 어렸을 때(4살이나 5살 즈음) 구립 도서관에서 무료강좌를 들은 적이 있다. 부모와 아이가 함께 참여해 종이로 뭔가를 만드는 수업이었다. 소란스런 분위기에서 작품이 하나씩 완성되어 강의가 거의 끝나갈 무렵, 강사는 우리들에게 탁자에 남아있는 자투리 종이를 찢어서 소리 지르며 위로 날리라고 했다. 강사는 그런 방식으로 우리들에게 깜짝 이벤트를 마련해주고 싶었던 것 같다.
생각지도 않던, 갑자기 들어온 강사의 그 말에 다른 사람들은 기쁘게 소리 지르며 종이를 찢고 흩날렸지만 난 그저 멍하니 있었던 것 같다. 어떤 감각을 느끼거나 즐겁지도 않았던 그 날의 내가 지금도 또렷이 기억난다. 딸아이는 아마 내 옆에서 종이를 날렸을 것이다. 난 딸아이가 종이를 찢고 날리는 것을 도와주며 막막하게 세상과 동떨어져 있었다.
한강 장편소설, 『그대의 차가운 손』을 읽는 내내 그 날이 생각났다. 이 소설이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들의 껍데기와 그 속을 들여다보는 내용이라 그런 것 같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난 그 날의 느낌만을 기억하고 있었는데, 이 소설로 ‘내가 왜 그랬었는지?’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다. 나를 둘러싼 껍데기가 너무 억세고 굵어 그것을 제거하고 내 속을 볼 시간이 터무니없이 짧아 나에게 종이를 찢고 흩날리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었던 것이었다.
특별하지 않은, 남들이 보기에 동정을 느낄만한 지독한 상처가 별로 없는, 그저 하루를 평범하게 사는 사람에게도 이 세상은 만만치 않다. 나를 다독거리며 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쓴다. 더 많은 껍데기를 쌓아 올리며 버티고 나를 구슬리며 괜찮다고 자족하며 산다. 이러다 우리는 영영 속을 볼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이 소설은 예술 작품으로 시작된다. 조각가인 장운형은 사람의 신체에 석고를 입혀 그것을 떼어내는(라이프캐스팅) 작업을 한다. 글을 읽으며 그가 하는 작업을 상상해본다. 석고를 개어, 뜨고 싶은 신체에 바르고 마르기를 기다린다. 석고는 굳으면서 피부에 일어나는 화학 반응으로 점점 뜨거워진다. 뜨겁게 느껴지지만 화상을 입을 정도는 아니다. 석고가 완전히 마르기 전에 끌로 신체의 선을 따라 절개해 떼어낸다. 몸의 껍데기는 주름과 터럭의 자국까지 남길 정도로 정교하지만 속은 ‘시커멓게’ 비어있다.
[결국 그 작가가 보여주려고 한 건 누더기 같은 껍데기가 아니라, 그 속의 컴컴한 공동(空洞)이었는지도 모른다. -p12]
어떤 형식이든 예술가가 추구하는 것은 세계와 인간에 대한 탐구이다. 장운형은 큰 상처가 있어 자신을 학대하고 자신에게 솔직하지 못한 사람의 몸을 집요하게 석고로 라이프캐스팅하기 원한다. 속을 보고 드러내기 위해 먼저 자신의 껍데기를 직시하게 한다. 겹겹이 쌓아 단단해졌다고 여겨진 껍데기는 사실 자신이 붙들고 있는 허울이다. ‘익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조용히 뒷모습을 보이는 순간(p.270)’ 일지도 모른다.
타인의 껍데기를 깨부수며 안을 보기를 원했던 장운형은 E에 의해 자신의 몸이 라이프캐스팅 될 때 견디기 힘들어 한다. 공포와 노여움을 느낀다. 끈질기게 타인의 몸을 뜨기를 원했던 그는 정작 자신의 껍데기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죽은 사람의 것 같다’는(p.312)’ 느낌만 있을 뿐이었다.
자신의 몸이 고스란히 프린팅된 것의 이물감과 난처함으로 L과 E, 장운형은 껍데기를 깨부순다. 여태껏 아무것도 아닌 것을 몸에 감싼 채 살아온 집착은 허탈함만을 남긴다. 동시에 뭔가로 부터 꺼내어진 그들은 자유를 얻는다.
장편인데도 이 소설은 군더더기 없이 치밀하다. 한강 작가가 지금도 계속 붙들고 있는 폭력과 상처, 그럼에도 희망과 사랑으로 가는 여정이 여기에도 있다. 여러 에피소드로 연결된 인물들의 생각과 행동에 많은 것이 담겨 있어 좋았다. 읽는 재미도 있었다. 다만 마지막 E 부분이 약간 평범하고 신파적이기도 해서 아쉬웠다.
이 소설에는 『채식주의자』의 전편 정도로 여겨질 만큼 불편한 방식도 들어있다. 한강 작가 특유의 그 방식 말이다. 작가의 그 방식에 불편을 느끼는 독자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 방식을 질책하거나 안타까움을 표현하는 것에 반대한다. 예술에서의 소재와 방식은 예술가의 권한이자 독창성이기 때문이다. 작가마다의 고유한 방식을 존중하고 싶다.
[저항하는 그녀의 손을 끌어다 내 무릎 위에 놓았다. 그 왼주먹은 몇 시간 전에 석고를 바르려 할 때 그랬던 것처럼 안간힘을 다해 쥐어져 있었다. 나는 구역질을 느꼈다. 내 인생을 관통해온 그 쓸쓸한 미식거림을, 시큼한 침이 고여오는 혀뿌리 아래로 눌렀다. 삶의 껍데기 위에서, 심연의 껍데기 위에서 우리들은 곡예하듯 탈을 쓰고 살아간다. 때로 증오하고 분노하며 사랑하고 울부짖는다. 이 모든 것이 곡예이며, 우리는 다만 병들어가고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잊은 채.
p.312~313]
『그대의 차가운 손』의 L은 어릴 때의 상처로 인해 섭식장애를 앓고 있는 여성이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먹기 시작한 음식으로 살이 찌고 그것으로 성폭력은 벗어났지만, 사람들의 시선에 갇히게 된다. L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자 그녀는 필사적으로 살을 빼려고 한다. 강박은 L을 피폐하게 하고 그녀를 폭식증 환자로 만든다. 10분 동안 엄청난 양의 음식을 먹고 목구멍에 주먹을 넣어 토한다. 거기다 하제까지 사용한다.
언젠가 지인과 차를 타고 어디를 가는데 그 사람이 한 말이 생각난다. 살집이 있는 어떤 여자가 단팥빵을 먹으며 거리를 걷고 있는 모습을 보고 지인은 ‘저렇게 뚱뚱하면서도 어떻게 단팥빵이 넘어가는지 이해가 안 된다.’고 말했다. 난 그 말에 대답을 하지는 않았지만, 내 침묵은 아마 긍정 쪽에 더 가까웠을 것이다. 평소 계속해서 먹어대는 먹방을 싫어하고 살이 찌면 당연히 먹는 것을 조절해야 한다는 기본적인 생각을 나도 하기 때문이다.
정희진은 아니타 존스턴의 『달빛 아래서의 만찬』을 통해 중독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사람들은 그것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다양한 대상에 중독되어 있다. 중독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이유는 의지 부족이나 인격적 결함이 아니라 그 대상이 위로와 즐거움을 주거나 삶의 문제를 부분적으로 해결해주기 때문이라고 한다. ‘중독은 생존을 도와준다’는 말이 가슴에 와 닿았다.
[폭식은 먹는 행위 자체에 대한 중독이다. 배고파서, 맛있어서, 먹고 싶어서 먹는 것이 아니다. 이른바 심리적 허기 때문에 먹는 것이다. 심리적 허기는 아무리 먹어도 포만감이 없다. 위는 한정되어 있는데 음식은 들어온다. 몸이 이 고통을 어떻게 견디겠는가.
몸의 한 부분은 중독되어 있고 한 부분은 벗어나려고 몸부림친다. 대개는 이 싸움에서 패배를 ‘선택’한다. 상실은 너무 아프고 위로 없이 살 수 없기 때문이다.
한때 나를 구원했던 것이 나를 억압하는 시기가 온다. 이것은 나의 성장 때문일 수도 있고 대상의 변질이나 상실 때문일 수도 있다. 어쨌든 나는 그것들과 헤어지거나 최소한 거리를 두어야 생존할 수 있다.
우리가 선택한, 그립지만 괴로운 대상들은 사막을 지나가다 잠시 스친 풍경들이다. 조우했을 뿐 오아시스에서 만나 한참 이야기를 나눈 사이가 아니다. 인생에 오아시스가 없다고 생각하면 익숙한 것들의 막강한 존재감이 다소 상대화된다. 중독보다는 생존의 힘이 세다고 믿는다.]
이러한 말들이 L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소설 속에서 한강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도 이 맥락들과 이어져 있는 것 같다. 타인을 이해하는 데는 많은 공부와 나의 각성이 필요하다.

영화를 보기 전에 이 영화의 상영시간이 인터미션을 포함해 230분이라는 것을 알았다. 영화를 보는 내내 굳이 ‘이렇게도 긴 러닝 타임이 필요했을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브래디 코베 감독의 의도를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결국 ‘라즐로 토스’라는 한 인간의 삶을 온전히 알고 이해하려면 그가 거쳐 온 생의 여정을 알아야 하고 그것을 잘 설명하고 알려주기 위해 그런 시간이 필요한 것이었다.
<라즐로 토스>의 삶엔 여러 사회와 그 속에서 살아내는 개인이 존재한다. 유대인, 예술가, 건축가, 홀로코스트, 이민자, 미국 자본주의와 백인 권위주의에 의한 폭력, 시오니즘, 마약 중독자 등이다. 이 모든 것이 그를 형성한다. 두꺼운 껍데기 속에 들어있는 ‘라즐로 토스’의 아이덴티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통째의 삶이 필요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