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2026년) 여름은 정말 더웠다. 집에서도 바깥에서도 웬만하면 에어컨 밑으로 가야만 했다. 평소 에어컨 바람을 싫어해 지하철을 탈 땐 약냉방 칸으로, 버스를 탈 땐 좌석 위쪽에 달린 조절기의 방향을 다른 쪽으로 돌렸는데, 올해는 그럴 수 없었다. 뒤늦게 온 갱년기 증상도 뜨거움을 넘어 타버릴 것 같은 몸 상태를 만드는데 일조했다.

 

더웠지만 건강을 위해, 지병인 허리 통증의 완화를 위해 걷기를 포기할 순 없었다. 햇볕이 강한 낮에는 엄두가 안나 주로 밤에 걸었다.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거나, 반납할 때도 해가 지고 어둑할 때 집을 나서야만 했다. 밤에도 더위가 없어지는 건 아니어서 도서관에 도착할 즘이면 땀이 줄줄 흘렀다. 그 상태로 바로 집에 돌아가기가 싫어 시원한 도서관에서 책을 읽었다. 편하게 땀을 식히고 싶어 열람실의 갖춰진 곳보다 소파석에 앉아 주로 한국소설을 읽었다.

 

문지혁 장편소설 『초급 한국어』는 제목 때문에 읽고 싶었다. ‘한국어’가 들어 간 여러 제목의 소설을 연달아 출간하고 있기에 내용이 궁금했다. 에세이처럼 읽히는 이 소설은 땀을 식히는 나의 목적을 충족시켜 주었다. 읽는 자리에서 바로 완독할 수 있을 정도로 애써 고민하지 않아도 쉽게 읽히는 소설이었다. 책을 다 읽고 별다른 느낌이 들지 않았지만, 작가가 힘들게 쓴 작품을 바로 평가하기 싫어 대출해 집으로 가져왔다.

 

집에서 재독했지만 역시 나에겐 좋은 느낌을 주지 못했다. 이 소설은 내가 싫어하는 소설의 요소를 많이 갖추고 있었다. 단편으로 압축시켰다면 더 좋았을 작품을 장편으로 만든 점, 다른 작가의 작품과 문장을 인용한 점, 소설의 의미를 독자가 애써 찾아야 한다는 점, 외국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것과 작가의 처지와 성장, 회고를 억지로 연결시킨 점, 오히려 작가 스스로 소설에 의미를 너무 많이 둔 점이다. 쉽게 읽히는 소설은 무조건 환영이다. 다만 거기에 ‘어떤 것’이 있어야만 한다.

 

본문 중, 예술학교 문예창작과 대학원 졸업 학기에 과 전체가 참여하는 창작 워크숍에 대한 에피소드가 있다(p.148). 거기서 백일장을 했는데 지혁의 작품은 “너무 반듯한 게 탈이라”는 평을 듣는다.

 

[나는 몹시 부끄럽고 수치스러웠다. 상을 못 받아서라기보다는 그 ‘반듯하다’는 말 때문이었다. 그건 마치 너는 결코 진짜 예술가가 될 수 없다는 비아냥처럼 들렸다. 내 딴에는 남들이 정해 놓은 길을 말 그대로 ‘반듯하게’ 가다가 큰 일탈을 결심하고 여기까지 왔는데, 그 자리에서 그런 얘기를 들으니까 속이 뒤집어졌다. 그럼 어떡할까? 그냥 그만둘까? 죽을까? ‘순진하고 찌질하며 뻔하다’는 평가, 날 미치게 만들었던 그동안의 이야기들이 어지럽게 겹쳤다.

 

웃음이 잦아들자 그녀는 정색하며 말했다.

“지혁 씨가 그렇게 대답하면 안 되죠.”

소설가는 덧붙였다.

“반듯한 게 어때서요, 라고 해야지.” -p.149]

 

반듯한 게 어때서? 반듯한 게 나쁜 건 아닐 것이다. 소설에 반듯함만 있는 게 나쁠 뿐이다. 내가 헤밍웨이의 소설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그의 소설이 ‘반듯하다’는 것이다. 물론 찌질함도 있다. 하지만 그의 소설은 읽어갈수록, 머리 뒤쪽에서 시작해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전율이 느껴진다. 반듯함이 보편적이고도 특별함으로 변하는 순간이다.

 

다음은 『중급 한국어』를 읽을 것이다. 기대된다.

 


댓글(8)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2026-10-30 13: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6-10-30 14: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잠자냥 2026-10-30 13: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아... 그런데도 중급 한국어 읽으실 것이라고! 기대된다고!
마지막 반전입니다! ㅋㅋㅋ

페넬로페 2026-10-30 14:57   좋아요 1 | URL
이 소설에 5별도 많더라고요.
<중급 한국어>에 대한 감상이 더 좋아 궁금해졌어요.
이 소설보다 좋기를 기대해 봤어요 ㅎㅎ

서곡 2026-10-30 14: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페넬로페님 환절기 건강 잘 돌보시길 바래요 전 이번 주에 컨디션이 계속 안 좋더라고요 다가올 겨울 준비를 하라는 신호인 것 같습니다

페넬로페 2026-10-30 14:59   좋아요 1 | URL
날씨가 갑자기 추워졌어요.
그래서인지 몸도 마음도 움츠려 드네요.
서곡님, 감기 조심하시고 건강한 겨울 나시길 바래요^^

coolcat329 2026-10-30 14: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페넬로페님 글 읽다가 피식 웃음이 나왔어요.
제가 문지혁이란 작가를 우연히 유투브에서 보고 관심이 갔던 이유가 ‘반듯한‘ 이미지 때문이었거든요. ㅋ 그래서 초급 중급한국어를 읽게 되었구요. 저는 중급이 좀 더 좋았답니다.

페넬로페 2026-10-30 16:02   좋아요 1 | URL
저도 뮨지혁 작가 유튜브를 시청한 적이 있어요. 거기서 헤밍웨이와 조지 엘리엇의 작품을 비교해, 이 글에 헤밍웨이를 살짝 언급했어요.
작가의 유튜브는 작가에게 도움이 될 수도, 아닐수도 있을 것 같아요 ㅎㅎ
 













성해나 작가가 기담(奇談)을 집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기대보다는 걱정이 앞섰다. ‘기담(이상야릇하고 재미있는 이야기)’이라는 특성 때문에 너무 비틀거나 멀리 가, 개연성이 부족하고 황당해지면 곤란할 것 같았다. 그의 단편집인 『혼모노』의 내용과 문장에 반해 팬이 되었는데 혹시 실망하게 될까봐 이 책을 읽을지 고민을 많이 했다.

 

기대 반, 우려 반으로 읽기 시작한 작가의 기담집은 생각보다 훨씬 좋았다. 내가 매력적으로 느끼는 작가의 문장은 여기서도 돋보였다. 감정이 절제되고 건조하기까지 한 문장은 독자의 상상력을 최대로 올리게 해주었다. 딱히 비유나 상징을 내세우지 않아도, 애써 깊이 들어가려하지 않아도 사실과 의미가 잘 이해되었다. 쉽게 읽히면서도, 점점 고조되는 감정과 팽팽한 긴장감으로 몰입할 수 있었다. 읽고 난 후에 느껴지는 서늘함, 여운, 찝찝함도 기담다웠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도쿄 기담집』보다 더 좋았다.

 

어제, 오늘, 내일이라는 세 개의 주제에, 각 3개의 단편이 들어있는 이 기담집은 과거와 현재, 미래로 이어진다. 이미 지나갔지만 역사로 남아 유령처럼 계속 우리 삶에 스며있는 ‘어제’는 지금도 번성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친일로 부를 쌓은 인간들은 대를 이어 부자로 살며 애써 감추려하지도 않는다. 혜택을 누리면서도 이미 지나간 조상의 치부로만 단정하며 자손들은 죄가 없다고 읍소한다. 여태껏 편히 살았으니 자손들도 그대로 살아가길 바란다. 일본의 만행으로 고통 받은 사람들의 상처는 그대로이다. 문중과 가문만을 중시하며 내것만을 지키고자 한 조상의 얼에는 타자에 대한 연민이나 이해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

 

오늘의 세계는 온전히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는다. 어제는 물론이고 내일마저 반영해야 한다. 거기에 인간 각자가 짊어져야 할 무게도 만만치 않다. 현실이라는 땅에 발을 붙이고 정신 차리고 살아내야 할 하루라는 것에 질려 일탈을 꿈꾸기도 한다. 허울뿐인 것에서 탈피하기 위해 아무것도 아닌, 평범하고 보잘 것 없는 다른 이의 인생을 사기도 한다. 말이 안 되게 누군가를 혐오하고, 말도 안 되는 것에 중독된다. 아닌 줄 알면서도, 종이 한 장 차이밖에 없는 폭의 강을 건너자마자 그것이 진짜라고 믿어버린다. 보편적 관념은 존재하지 않고, 내가 믿어버리는 것이 정의와 진리가 되어버린다.

 

미래에 호모 사피엔스 종이 남아 있기나 할 것인지? 온통 AI얘기뿐이다. 자율주행자동차를 3일만 타고 다니면 그동안 인간의 운전이 얼마나 위험했는지를 실감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다. 사람의 기능을 가진 휴머노이드의 역할도 당연시 되고 있다. 고도의 기능성과 편리함을 갖춘 사회가 눈앞에 와있지만, 거기에 따른 인간의 소외와 예측할 수 없는 위험은 어떻게 감당할 것인지는 잘 모른다. 여태껏 그래왔듯이 어떻게든 인간은 위기를 넘기고 살아남을 수 있을것이라는 막연한 희망만 가진다. 어쨌든 낙관보다 음산한 디스토피아적 느낌이 더 강하다.

 

기담의 형식을 띄고 있지만 우리의 문제들을 현실적인 감각으로 서술한 성해나의 『인비인(人非人)』은 생각할 것이 많다. 작가는 여러 방향으로 접근하고 서로 고민을 나누어야 할 사회적 문제를 기발하고도 재미있게, 씁쓸하고도 서늘하게 서술했다. 어렵지 않으면서도,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의미를 발견하게 한 작가의 재치도 좋았다. 각 단편의 소재도 특이했고, 무엇보다 이것이 우리 모두의 이야기라는 보편성이 오히려 기담의 형식을 파괴한 역설인 것도 같아 신선했다.

 

[역사란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일 테지. 홈은 파내고 구실은 잘 덮으며. 그리고 언제까지고 내게는, 아니 우리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아무 일도.

-p.22, '벚나무로 짠 5자 너비의 책상‘ 중에서

다들 제가 무려 1800명을 학살하고 생체 실험한 전범이라던데, 선생, 난 아직도 그 말이 이해 가지 않습니다. 전범이라니, 가당치도 않습니다. 저는 그저 요시무라 교수의 조수이자 하수인이었을 뿐입니다. 제 손으로 죽인 건 가타마리 하나뿐이고, 그 죄를 달게 받겠다고 해도 아무도 내 말을 믿어주지 않습니다. 그저 나를 빤히 바라보고 비웃을 뿐입니다.

-p.46, '인비인’ 중에서

 

얼굴만 남은 로봇과 눈이 마주친다. 그것은 뚝뚝 끊기는 합성음을 내며 더듬더듬 말한다. 당신은..... 무사할 거야, 아미고. 야키마 H1이 바닥에 질질 끌리며 옮겨지고, 감독은 그쪽으로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조급히 다음 촬영을 준비한다.........낯빛이 하얗게 질려 있던 촬영기사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는 오토 모드로 작동하는 카메라로 대체된다. 주위를 둘러 보다 나는 생각한다. 이곳엔 인간이 몇이나 될까. -p.228~229, ‘아미고’ 중에서

 

서둘러 문을 열려는 이익의 어깨를 그것이 지그시 잡았다. 손이 따뜻했고, 둔중한 맥까지 느껴졌다. 산 자의 것도, 망자의 것도 아닌 맥이. 긴장이 풀릴 만큼 나직하고 부드러운 투로 그것은 이익에게 말했다. 필요할 때는 언제든 찾아오라고 했잖아. 나는 네 편이니까. 그것이 이익과 눈을 맞추었다. 그것의 일그러진 한 쪽 눈에 이익이 비쳤다. 그것이 되물었다. 그래, 내가 다시 필요해진 거지?

P.305~306, '고(蠱)‘ 중에서]

 

 

기담집 『인비인』의 어제, 오늘, 내일 카테고리에는 각 5곡씩 작가가 선정한 플레이리스트가 들어있다. QR코드로 접속하면 들을 수 있다. 각 단편 끝에는 두 페이지 분량의 작가 코멘트도 있다. 작품을 쓰게 된 계기와 의도, 약간의 해설이 들어있다. 이 부분은 작품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지만, 없어도 괜찮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품을 읽으면서, 독자가 나름 상상하며 의미를 파악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데 굳이 작가의 해석이 필요했을까 라는 의문이 든다. 물론 코멘트로 여러 사실을 알게 된 것도 유익했다.

 

단편 <인비인(인간 아닌 인간)> 코멘트에서 작가는 미술가 ’패트리샤 피치니니‘의 조각을 노트북 화면에 띄워둔 채 이 소설을 썼다고 했다. ’비인간의 형태를 담아내면서도 결국 인간으로 귀결되는 그녀의 연작이 소설 속 ‘가타마리’와 닮아서일까(p.50)‘라고 쓰여 있다. 패트리샤 피치니니의 작품이 궁금해졌다. 작품의 어떤 점에서 가타마리가 연상되는지 성해나 작가가 언급한 조각이 보고 싶었다. 검색해보니 마침 수원시립미술관에 패트리샤 피치니니의 작품이 전시되고 있었다.

 

<인비인>은 하얼빈의 731부대가 자행한 생체실험을 소재로 한 소설이다. 1943년 히라누마 가즈오로 창씨개명을 하고 교토대로 유학간 나는 요시무라 히사토 교수를 오야지로 부르며 충성을 맹세한다. 나를 신뢰한 교수는 나를 생체실험의 현장인 하얼빈 핑팡구로 데려간다. 나는 120동안 그곳에 머물며 끔찍한 생체실험에 가담한다. 일급 실험체인 조선인 임산부에게는 온갖 균이 주입된다. 심한 고통에도 그 여자는 오래 버텼고, 결국 해산하고 죽는다.

 

그녀가 낳은 생명체는 치댄 밀가루를 얼기설기 뭉쳐놓은 형태에, 눈도 귀도 없이 코와 입만 겨우 붙어 있었다. 팔다리는 물론 생식기도 없는 환형동물의 모습을 하고 있어 덩어리란 뜻의 ‘가타마리’라고 불린다. 요시무라 교수가 떠나는 날, 동경으로 데려가 논문의 실험체로 쓸 목적의 가타마리는 그동안 내가 돌보게 된다. 짐승이기도, 사람이기도 한 가타마리를 돌보며 나는 피폐해지기 시작하지만 가타마리는 집요하게 나에게 따라붙는다. 견딜 수 없게 된 나는 결국 땅을 파고 산채로 가타마리를 묻어버린다. 그 후 한국으로 돌아와 평범하게 살던 나는 최근 하얼빈 근린공원에서 유골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거기에 가타마리로 추정되는 뼈도 있었다.


지하철에서 경기도 광역버스를 갈아 타 도착한 수원시립미술관은 수원 화성행궁 광장에 위치해 있었다. 호주 멜버른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패트리샤 피치니니는 실리콘, 유리섬유, 머리카락 등을 이용해 살아있는 듯한 극사실적 조각을 작업한다. 극사실적 초현실주의 작가로서, 그녀가 추구하는 예술은 독창적이다. 환경운동가로도 활동한 피치니니는 인류의 과학적 발전을 반대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의 혜택이 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주장을 한다. 과학의 발달으로 인한 진보가 자연을 파괴하는 것이 아닌 더불어 상생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번 전시 제목은 ’킨쉽(Kinship)'이다. 친족, 혈연, 가족 관계의 뜻으로 해석되는 킨쉽이 피치니니에서는 ‘인간 중심의 전통적인 관계 개념에만 머무르지 않고 낯선 생명과 마주했을 때 느끼는 거리감과 불편함을 넘어, 익숙하지 않은 존재와도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여기는 태도’로까지 확대되는 개념이다. 전시회장에서 본 피치니니 조각의 모습은 새로운 생명체였고 그것은 인비인의 가타마리와 묘하게 닮아있었다. 인간에게서 태어난 가타마리가 인간 아닌 인간이라면, 피치니니의 생명체는 인간이 아니면서 인간인 모습을 하고 있었다.

 

환경의 변화로 인해 앞으로 우리가 맞닥뜨릴 새로운 생명체가 출현했을 때 우리는 어떻게 그들을 대할 것인가가 피치니니 조각의 주제이다. 이것은 AI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만나게 될 수많은 인간 아닌 인간에 대한 우리의 대처방법과도 일맥상통한다. 꼭 인간과 모습이 다른 생명체가 아니더라도 종교, 인종, 국가, 정치 이념의 차이로 인해 생각과 행동을 달리하는 수많은 타자들을 만났을 때, 우리의 태도는 어떤가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할 여지를 준다.

 

메리 셸리의 괴물, 휴머노이드, 과학의 발전으로 인한 환경의 변화에서 저절로 탄생한 새로운 생명체에 대한 책임은 모두 우리에게 있다. 그러한 사실을 당연히 인식하지만, 지금 우리 역시 프랑켄슈타인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임이 명백하다. 영화를 예술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작금의 현실이 자신과 조금이라도 다른 타자에 대한 불신과 혐오가 얼마나 강한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피치니니의 조각에서 인간과 다른 부분이 많지만, 인간을 특징짓는 흰 색과 검은 색으로 구분된 눈, 말 할 수 있는 입을 가진 생명체의 눈은 모두 슬프게 표현되어 있다. 불안하고 고통스러운 자신들의 처지를 말해주고 있다. 영화 호프가 연상되었다. 데이미언 허스트의 작품도 그렇지만 이번 전시 역시 특이했다. 현대미술 특징 중 하나가 독창성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걸 실감했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가능한 사랑>은 처음부터 끝까지 우울하고 무거웠다. 러닝 타임 내내 거의 모든 관객이 소리 하나 내지 않을 만큼 몰입도가 최고인 영화였다. 옆자리에 앉은 남편의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걸려 내가 타박할 정도였다. 특별할 것도 없는 스토리지만 스크린을 통해 너무 현실적인 모습을 봐서인지 서늘하고도 착잡한 감정만 남아 있다.

 

영화 ‘가능한 사랑’에는 여러 관점과 층위, 다양한 욕망과 메시지가 들어있지만 무엇보다도 자본주의에 의한 계급의 극단적 양분화가 가장 중요한 소재였다. 그것으로 인해 끄떡도 없거나 또는 파괴되는 인간의 모습을 대조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그것은 앞으로 절대 깨지지 않고 역전되지 않을, 신처럼 군림할 수 있는 진리로 남아있을 것이라는 암울함도 남겨준다. ‘가능’의 여지가 없는 단단한 불가능의 세계만 있을 뿐이다.

 

영화를 보고나서 패트리샤 피치니니의 전시회가 생각났다. 피치니니의 가능성의 세계가 이창동 감독의 영화로 인해 멀게만 느껴졌다. 현실에 직면한 우리가 아직 오지도 않을 가능성에 대해 과연 생각할 여지가 있을지 의문스러웠다. 타자에 대한 태도는 저절로가 아닌 노력으로 유지되는 경우가 많은데, 현실의 팍팍함에 직면한 우리가 과연 시선을 돌릴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숲속에서의 호석(설경구)이 울부짖는 소리가 잊혀지지 않는다.

 

성해나 기담집의 ‘벚나무로 짠 5자 너비의 책상’은 일제강점기 시절 친일파에 대한 이야기다. 향이 좋고 견고한 벚나무로 짠 책상은 계속 대물림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단죄되지 못한 괴물은 점점 자라 최고의 빌런으로 진화한다. 영화 ‘가능한 사랑’에서 일제강점기에 경찰로 근무한 조부에게 많은 재산을 물려받은 상우(조인성)는 어떤 프로젝트를 성사시키며 이것은 차원이 다른 것이라고 말한다. 벌어들이는 돈의 액수는 중요하지 않다고 한다. 청산되지 못한 역사로 성장한 이 땅의 상우는 벚나무 책상처럼 여전히 건재하다.

 

‘가능함’의 역설은 불가능한 사랑이 아닐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5)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책 읽고 싶어서 회사를 그만뒀습니다 - 일의 시대는 어떻게 읽는 사람을 집어삼켰는가
미야케 가호 지음, 서영찬 옮김 / 동아시아 / 2026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하철에서는 거의 모두가, 심지어 걸으면서도 스마트폰을 보는 사람들이 많은 시대에 살고 있다. 당연히 책 읽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책 읽고 싶어서 회사를 그만 두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책 읽고 싶어 회사를 그만두고 그 후 독서에 관련된 일을 하는 ‘미야케 가호‘는 왜 노동과 독서가 양립할 수 없는 사회가 되었는지 분석한다. 이 책은 일본의 메이지 시대부터 2010년까지 일본 독서 경향의 흐름을 서술한다. 대부분 일본인 작가가 쓴 책을 언급하며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변화와 이유를 쓰고 있다.

저자가 고민하고 말하고자 하는 것이 지금 한국 사회에서도 똑같이 적용되는 것은 사실이다. 다만 이 책에 들어있는 내용이 너무 일본적이라는 것이 아쉽다. 여기서 우리가 가져올 수 있는 내용적 공유가 거의 없어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부족하다. 나머지 짧게 서술한 결론은 사실 평이할 정도다. 독서 인구의 감소와 노동과 독서 양립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굳이 이 책을 읽을 필요가 있을지 의문이 든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37)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건수하 2026-09-11 23: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좀 이쉽기는 했지만 독서 인구의 수를 개인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사회 구조와 관계가 있는지 접근한 점이 좋더라고요. 일본 사회가 시간차는 있지만 한국 사회와 그렇게 다르지 않기도 하고요. 그래도 한국에 대한 책이라면 더 좋았을 것 같아요.

페넬로페 2026-09-11 23:37   좋아요 1 | URL
네, 저도 이 글을 쓴 작가의 의도와 구조적인 접근은 완전 공감했어요. 근데 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일본 독서 흐름의 역사와 가져 온 책들이 거의 일본책이라는 것이 좀 지루하면서도 공유할 것이 없어 아쉬웠어요. 그 부분을 좀 줄이고 사회적 현상이나 대안점을 더 많이 썼다면 좋았을 것 같아요.
그래도 일본인들이 한국인들보다는 독서를 더 많이 하지 않을까요?

건수하 2026-09-12 08:28   좋아요 1 | URL
저도 이 책을 굳이 번역해서 들여왔을까 하는 생각은 잠시 했어요. 한국에서 이런 책을 쓴다면 책 얘기가 더 적을 것 같기는 합니다 ^^

페넬로페 2026-09-12 09:25   좋아요 1 | URL
이 책의 단점 중 하나는 제목인것도 같아요 ㅎㅎ
내용과 제목이 너무 안 맞아요.
한국 작갸가 한국 실정에 맞는 내용으로 출판해 줬으면 좋겠어요
 

큐비즘은 프랑스 출신의 조르주 브라크와 파리에 정착한 스페인 화가 파블로 피카소, 두 젊은 예술가에게서 출발한다. 이들은 다양한 영향을 흡수하는 동시에 전통적 재현의 규범을 해체하고, 기하화와 추상을 통해 새로운 시각적, 개념적 언어를 구축했다. 원근법은 투명한 무채색의 선형 격자로 대체되었으며, 양감과 모티프는 납작한 다면의 평면으로 분해되어 대상을 암시하는 형식으로 재구성되었다. 이후 파리에 거주하던 스페인 작가 후안 그리스 역시 합류하며, 그 전개를 한층 심화시켰다.

 

처음에는 제한된 범위에서, 전개되었던 이들의 급진적인 실험은 곧 로베르 들로네, 알베르 글레이즈, 페르낭 레제 등 다른 그룹에 속한 예술가들에게 확산되었고, 파리의 살롱 전시를 통해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이후 기욤 아폴리네르는 그 내부의 다양한 경향을 구분했다. 앙리 로랑스, 자크 립시츠는 조각 분야에서 큐비즘을 실험했다.(큐비스트: 시각의 혁신가들-퐁피두 한화 서울 제공)



 

 

 

 








1907년 세잔의 회고전을 방문하고 강한 인상을 받은 파블로 피카소와 조르주 브라크는 그 후 3년 동안 실험적 작업을 한다. 브라크의 정물화와 풍경화를 본 평론가 루이 복셀은 ‘기하학적 도식, 즉 큐브(cube)로 환원되었다’는 표현을 써 피카소와 브라크는 <큐비스트>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p.230, 조르주 브라크 ‘에스타크의 집’, 1908년

 

조르주 브라크는 프랑스 남부에 있는 마을인 에스타크를 납작한 모양의 큐브로 그린 작품 ’에스타크의 집‘을 통해 대상을 단순화시킨다. 브라크의 영향을 받은 피카소도 처음엔 그와 비슷한 그림을 그리지만 나중엔 아이디어의 가능성을 더 확대시킨다. 1910년 경의 갈색과 회색톤, 기하학적 형태로 이루어진 이 시기의 그림을 ‘분석적 큐비즘(p.232)’이라고 한다. 모든 것은 파편화 되어 있고 미학적 장치는 모두 생략된 회화였다. 대상들을 쪼개며 다른 여러 시점에서 보았을 때의 형상으로 표현했다.


-p.233, 파블로 피카소, ‘아비뇽의 여인들’, 1907년

 

큐비즘을 말할 때, 바르셀로나의 매춘부를 그린 피카소의 <아비뇽의 여인들(1907년)>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그림은 큐비즘의 시작을 알리는 작품이다. 핑크빛 누드의 다섯 여인 중, 세 명은 정면을 응시하고 있고 두 명은 아프리카 사람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아프리카의 토속 장식품, 세잔의 ‘목욕하는 사람들’, 엘 그레코의 ‘성 요한의 계시’를 참고하여 여지껏 볼 수 없었던 획기적인 그림을 완성시킨다. 그 후 피카소의 그림은 알아볼 수 있는 형태와 선명한 색감으로 변화되며 여러 오브제를 사용한다. 피카소의 ‘파피에 콜레(종이 콜라주)’ 기법이다.

 

브라크와 피카소에 의해 시작된 큐비즘은 후안 그리스, 로베르 들로네, 알베르 글레이즈, 페르낭 레제 등 다른 그룹에 속한 예술가들에게 확산된다. 아폴리네르와 그의 연인인 화가 마리 로랑생도 이 시기에 활동한다. 너무 조각나 피카소와 브라크의 작품이 조금 어렵다면 후안 그리스의 작품은 훨씬 더 알아보기 쉬워 관객에게 친근하게 다가온다. 큐비즘의 여러 실험적 태도는 다른 지역으로 전파되었고 그곳에서 개성있는 양식으로 창조되었다. 러시아의 수프리마티즘과 레이오니즘으로, 또한 다다와 초현실주의, 20세기 조각과 건축에 까지 영향을 주었다.



 

 

 








파리의 마레 지구, 특히 보부르 지역은 낙후된 곳이었는데 이곳에 조르주 퐁피두 대통령은 재생사업을 목적으로 문화센터를 만들었다. 대통령의 이름을 따 1977년에 개관한 <퐁피두 센터>는 현대 미술관, 도서관, 어린이를 위한 공간 등 다양한 문화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금은 프랑스의 메츠, 스페인 말라가, 벨기에 브뤼셀, 중국 상하이에까지 진출했고, 2026년 한국에 파트너십으로 개관했다. 에펠탑처럼 철골을 주재료로 했고, 보통 보이지 않을 내관을 외부에 배치했다. 외관의 파이프는 전기, 물, 공기가 지나가는 통로이다. 피카소, 칸딘스키, 마티스, 샤갈, 미로의 작품이 많다. 4층과 5층에 위치한 상설 전시장에는 주기적으로 전시되는 작품이 바뀌고 나머지는 세계 다른 미술관으로 옮겨가며 전시된다. 퐁피두 센터 5층엔 아방가르드 작품이, 4층은 1965년 이후의 동시대 다양한 예술 작품이 있다.

 

[흔히 사람들은 현대 미술이 어렵다고 말합니다. 10년만 지나도 급변하는 세상인데 100년 전에 ‘마이웨이’를 걸은 예술가의 마음속을 이해하기란 당연히 쉬운 일이 아니겠지요. 하지만 이 시기가 존재했기에 오늘날의 대중문화가 탄생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내면의 아름다움을 연구하는 현대 미술은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감정을 일깨워주곤 하지요. 다시 말해 예술가가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예술가의 삶에 다가가는 것입니다. -p.270]


<퐁피두 센터 한화 서울>이 개관했다. 개관전인 <큐비스트: 시각의 혁신가들>은 1907년부터 1927년까지의 큐비즘의 변화를 조망하고 여러 큐비스트의 그림을 시대별로 전시한다. 조르주 브라크와 파블로 피카소에 의해 시작된 큐비즘은 로베르 들로네, 소니아 돌로네, 알베르 글레이즈, 페르낭 레제 등으로 이어지고, 작품의 경향도 달라진다. 큐비즘의 시작(1907~1908), 분석적 큐비즘(1909~1911), 살롱 큐비즘(1910~1913), 오르픽 큐비즘(1912~1914), 종합적 큐비즘(1912~1914), 국경을 넘은 큐비즘(1912~1914)의 6개의 섹션으로 전시된다. ’오르픽 큐비즘‘은 예술가가 전적으로 창조하고 강력한 현실성을 부여한 요소들로 새로운 총체를 그려내는 것이다. ‘KOREA FOCUS'라는 이름의 특벽 섹션은 20세기 전반의 큐비즘과 아방가르드의 영향을 받은 한국의 다양한 작품을 보여준다.

 

몇 년 전 파리 여행을 갔을 때, 파리에 있는 미술관 중 어디를 가고 어디를 패스해야 할지 고민이 많았다. 루브르와 오르셰는 무조건 가야할 것 같고, 오랑주리에서 모네의 수련을 보고 싶어 퐁피두 센터는 패스하여 아쉬웠다. 한국에 퐁피두 분관이 생긴다는 소식을 듣고 반가웠는데 드디어 개관을 해 다녀왔다. 63빌딩의 상징이었던 아쿠아리움을 없애고 그곳을 리노베이션한 전시장은 멋있고 쾌적했다. 공간이 넓고 길어 관람객들이 분산될 수 있었고 전시장 가운데에 의자가 많아 중간에 쉴 수 있어 좋았다. 전시장 안에 식당과 카페가 많아 그 안에서 모든 것을 해결하고 셔틀 버스를 타고 지하철역까지 갈 수 있는 편의 시설도 괜찮았다.

 

63빌딩은 우리나라의 고층 건물의 상징이었고, 그곳에 있는 아쿠아리움은 지방에서 친정 엄마가 오셨을 때나, 딸아이가 어릴 때 많이 다녔던 곳이다. 그 후 코엑스와 롯데 월드타워에 아쿠아리움이 생겨 63빌딩은 잘 안 가게 되었다. 시간이 흘러 당신이 오늘 한 일을 금방 잊어버리는 중증 알츠하이머 현상을 보이시던 엄마를 모시고 월드타워 아쿠아리움에 엄마를 모시고 간 적이 있다. 내가 한 일, 보고 들은 것을 금방 잊어버리는 것이야말로 생의 가장 슬픈일이 아닐까? 그래도 우리 형제들은 무조건 엄마를 모시고 다녔다. 엄마는 물 속에 있는 물고기를 보는 것을 힘들어하셨다. 조명 탓에 물이 울렁이는 모습을 보고 어지럽고 무서워 밖으로 나가고 싶어 하셨다. 뜬금없이 큐비스트의 작품 전시 덕분에 돌아가신 엄마를 잠시 생각하게 되었다.

 

제미나이에게 아쿠아프라넷 63에 있던 수중 생물들은 다 어디로 갔냐고 질문했다. 그것들은 한화호텔앤드리조트가 보유한 다른 전국 아쿠아플라넷 지점들로 나뉘어 재배치되었다고 한다. 아쿠아플라넷 일산, 광교, 여수, 제주 등 전국 계열 지점으로 분산 이전 되었다고. 희귀 해양 표본(실러캔스 등)도 다른 곳으로 이동해 보관, 전시 중이라고 한다.

 

모든 것이 조각난 큐비즘은 한 눈에 이해하기 어렵다. 인상주의 화가 그림처럼 그냥 보기만 해도 감정이 뿜어져 나오는 것과는 다르다. 순간의 현상과 느낌으로 그린 그림답게 관객도 순간적인 감상에 사로잡힌다. 반면 큐비즘 계열의 작품은 오래보아야 하고 해설도 참고해야한다. 뭘 말하는지 잘 모르지만, 자세히 보고 해설을 참조하면 그제야 ‘아! 그렇구나!’라고 이해가 되면서 한편으로 감탄하게 된다. 사람이나 여러 가지 형상을 어쩜 이렇게나 창의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지 예술가의 위대함을 실감하며 역시나 존중하게 된다.

 

이번 전시는 모든 것이 새로워 흥미롭고 재미있었다. 조금 알고 있었던 피카소와 브라크 말고도 다른 여러 생소한 화가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었던 것도 좋았다. 어려웠던 피카소와 브라크의 작품도 좋았지만 후안 그리스의 작품은 새로운 발견이었다. 친근하고도 더 의미있게 다가온 것 같아 반가웠다.






-프란티세크 쿠프카


-지노 세베리니


-장 메챙제


-마리 로랑생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43)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Falstaff 2026-09-08 19: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좀 전에 댓글 팍팍 썼다가... 가만 보니까 제가 이 양반들을 좋아 하기는 한데 뭐 아는 게 없어서 도무지 말 해놓고 뭐라 했는지 저도 모르겠더라고요. 그래서 몽땅 지웠습지요. 저 사는 모양이 다 이렇습니다. ㅋㅋㅋㅋ 팔자지요 뭐.

페넬로페 2026-09-08 20:02   좋아요 1 | URL
폴스타프님 말씀 듣고 싶어요. 지운 글 다시 팍팍 써 주세요. 그림들이 좋은데 사실 좀 어렵더라고요.
책을 읽어도 돌아서면 까먹으니 제 사는 것도 별반 다르지 않아요 ㅎㅎ

바람돌이 2026-09-09 09: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화 퐁피두센터가 63빌딩에 있었군요. 저는 63빌딩 한번도 못가본 촌여자. ㅎㅎ 63빌딩 처음 만들어졌을 때 어르신들 관광가고 하던 기억이 있어서 왠지 거기가면 촌스러워지는 느낌이랄까요? ㅎㅎ 이제 서울 나들이 가면 가볼데가 한군데 더 생겼네요. 퐁피두 핑계 대고 63빌딩요. ^
큐비즘 작품들은 처음 나왔을 때 또는 처음 접했을 때의 신선함은 있지만 작품의 여운이 오래가는 쪽은 아니더라구요. 그래서 요즘은 큐비즘 작품은 있어도 그냥 대충 보고 지나가게 되네요. 저기서 다음 전시 주제가 무얼지 궁금해지면서 그 때쯤 63빌딩 가봐야겠어요. ㅎㅎ

페넬로페 2026-09-09 10:06   좋아요 1 | URL
63빌딩이 오래 전 그래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았던 빌딩이라 상징적이었던 것 같아요.아쿠아리움도 좋았어요.
큐비즘은 보기에는 신선하지만 바람돌이님 말씀처럼 오래 여운이 남지는 않아요, 그죠.
그래도 그들의 창의력은 대단한 것 같아요. 피카소는 정말 천재이고요.
다음 전시는 야수파라고 들었는데 확실한지는 모르겠어요.
입장료가 28000원이라 조금 비싸더라고요.

바람돌이 2026-09-09 12:33   좋아요 1 | URL
오 야수파 좋아합니다,. 독특하면서도 스토리가 있어 뭔가 얘기를 할 수 있는 그런 느낌이잖아요. ^^ 저는 서사를 좋아하는 인간이라서인지 이야기가 담긴듯한 그림이 좋더라구요. ㅎㅎ 근데 입장료는 정말 비싸네요.

페넬로페 2026-09-09 13:01   좋아요 1 | URL
저도 서사를 좋아해요. 그래서 책과 드라마, 영화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
저도 야수파도 보고 싶은데 입장료와 부대시설 이용료가 상당히 부담 가더라고요
ㅠㅠ

hnine 2026-09-09 18: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한화퐁피두 전시 보고 왔어요. 안그래도 여기 있던 수족관은 어떻게 되었을까 궁금했었지요.
전시도 좋았지만 63빌딩이 세워지고 있을 당시 거기 살았었고 그 앞에서 버스 타고 학교 다니던 옛날이 생각 나서 감회가 깊었어요.
큐비즘에 대해 이렇게 탐구적인 글을 써주시다니, 전시 만큼 값집니다.

페넬로페 2026-09-09 17:41   좋아요 0 | URL
hnine님, 여의도에 사셨군요.
그럼 그쪽에서의 추억이 많으시겠어요.
전시장이 너무 좋았고 그림도 많아 저는 만족하고 왔어요. 다음 야수파 전시도 가보고 싶더라고요.

책읽는나무 2026-09-10 09: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63빌딩 중학교 때 수학여행 갔었던 곳입니다. 그 시절 수학여행은 도시 학교는 경주로 가고 시골학교는 반대로 도시구경을 하러 갔던 것 같아요. 저는 국민학교 때는 독립기념관 오픈하던 해여서 다녀온 기억이 떠오르네요. 그러다 중학교 갔더니 수학여행 때 독립기념관을 또 들렀다가 63빌딩 갔었어요. 그때 아이멕스 영화관에서 영화를 봤었는데 스크린의 입체적 압도감에 강렬하게 사로잡혔던 기억이 아주 생생합니다. 촌사람이었던 거죠.ㅋㅋㅋ 근데 시간이 흘러 아쿠아리움도 없어지고 미술관이 생기다니…새롭네요. 63빌딩은 제게도 참 추억돋는 장소이긴 합니다. 촌사람은 서울가면 무조건 63빌딩 구경하고 가야한다는 룰?이 있잖아요. 저도 부모님 모시고 63빌딩 구경가서 빌딩을 배경으로 사진도 찍고 했었거든요. 여름에 잠깐 서울 갔었을 때 택시를 타고 지나가는데 건너편에 63빌딩이 보이는데 부모님 생각이 떠올랐었어요. 나중에 시간이 허락되어 서울 간다면 이번엔 쇼핑센타 말고 63빌딩 그림 전시 구경을 가야겠단 생각이 드네요. 전시장이 잘 되어있단 페넬로페 님의 정보가 큰 도움이 되었어요. 덕분에 큐비즘 잘 몰랐는데 큰 공부가 되었구요.^^

페넬로페 2026-09-10 10:11   좋아요 1 | URL
책나무님께서도 63빌딩에 대한 추억이 이렇게 많으시군요.
맞아요. 여기에 아이맥스 영화관도 있었어요. 말씀하시니까 기억나요. 저도 여기에서 어떤 다큐멘터리 영화를 봤던 기억이 납니다.

엄마 모시고 아쿠아리움과 전망대 간 생각이 나 잠깐 울컥했어요. 어떤 장소나 음식에서 생각지도 않게 애도를 하게 되네요.

저도 이번에 처음으로 큐비즘에 대해 책을 읽어봤는데 돌아서면 까 먹습니다 ㅠㅠ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오디세이’가 개봉된다는 소식에 영화를 보기 전에 책을 재독했다. 8년 전쯤 『오뒷세이아』를 처음 읽을 때는 독서의 속도가 빠르진 못했다. 약 3000년 전의 고대 희랍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배경 지식이 필요했고 그것이 만만치 않아서였다. 신화와 거기에 얽힌 인물의 이야기가 워낙 복잡해 주석과 네이버 지식 백과를 참조해 읽어도 헷갈려 다시 돌아가기 일쑤였다. 그 때 이후로 호메로스의 작품뿐만 아니라 고대 그리스 신화와 비극을 열심히 읽다보니 이제는 신과 인물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와 암기가 된 상태다. 그래서인지 이번에 재독한 ’오뒷세이아‘는 훨씬 쉽고 빠르게 읽을 수 있었다.

 

고대 희랍 원전의 번역자로 고 천병희 선생을 거론하지 않고 넘어갈 수는 없다. 원전 번역이 선생 일생의 과업이었고 우리나라에서 선구자였다. 나도 천병희 선생의 2015년 숲 출판사 개정판으로 『오뒷세이아』를 읽었다. 이 책은 선생의 번역도 훌륭하지만 각 페이지 하단에 달린 각주와 부록(주요 인명, 신명, 지명, 가계도), 해설이 자세히 나와 있어 좋다. 해설은 호메로스와 고대 그리스 서사시에 대한 전반적 개념이 서술되어 있다. 책 한권으로 거의 모든 것이 해결될 정도다. ’오뒷세이아‘를 처음 읽는 독자라면 천병희의 책을 추천한다.

 

이번 재독에는 이준석 역의 ‘오뒷세이아’를 선택했다. 이준석의 번역도 정말 좋았다. 두 책 모두 걸리는 것 없이 잘 읽힌다. 천병희의 역이 서술적 흐름에 집중했다면 이준석의 역은 리듬감을 살리기 위해 단어에 집중한 느낌이다. 이준석은 원작의 단어를 그대로 선택했고 그 안에 있는 의미를 최대한 살렸다. 그래서인지 간결하고 정리된 느낌을 받았고 집중력 있게 읽을 수 있었다. 다만 번역자의 직역에 대한 의도가 너무 대쪽 같아 빈번하게 사용된 어떤 단어들은 상당히 거슬렸고 적응하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렸다.

 

예를 들어 여기에는 ’심중(心中, 또는 深重(?))‘과 ’기백(氣魄)‘이란 단어가 많이 나온다. 네이버 국어사전에서 심중은 ’마음 속, 마음에 품고 있는 것, 또는 생각이 깊고 침착하다‘로 기백은 ’씩씩하고 굳센 기상과 진취적인 정신‘으로 풀이되고 있다. 원작자인 호메로스가 심중과 기백에 해당하는 희랍어를 당연히 사용했겠지만 아무데서나 튀어나오는 이 심중과 기백이란 단어가 많이 낯설었다. 이 단어가 사용된 문장 몇 개만 가져와보자.

 

심중에서 견뎌내는 오뒷세우스의 창들(1권 129행)

기백에서 기쁨을 누리며(1권 311행)

훌륭한 판단과 간계까지 기백으로 궁리해가며(2권 117행)

당신들의 기백이 이를 분개한다면(2권 138행)

기백으로 근심하였다(2권 156행)

심중에서 이를 알아차리고 기백으로 경악하였으니(1권 322~323행)

.........

 

‘심중’이란 단어는 보통 사람에게 붙는 것이지만 오뒷세우스가 거지로 변장하고 고향 이타카 섬에 귀향했을 때 그를 알아보는 늙은 개 아르고스에게도 ‘심중에서 견뎌내는(p.427)’이란 표현을 사용한다.

 

심중과 기백에 대해 천병희는 이렇게 번역했다.

 

참을성 많은 오뒷세우스의 창들(1권 129행)

흐뭇한 마음으로(1권 311행)

교활한 재치와 책략을 마음속으로 생각한다면(2권 117행)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여러분은(2권 138행)

마음속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았다(2권 156행)

마음속으로 이를 느끼고 깜짝 놀랐으니(1권 322행)

 

이준석은 심중과 기백의 뜻 차이로 두 단어를 철저히 분리시켰지만 천병희는 두 단어를 거의 하나의 의미로 해석한다. 그런 면에서 이준석의 번역이 더 직역에 가까우며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나는 이 두 단어가 상당히 불편해 독서 초반에는 집중에 방해를 받았고 중간 분량을 넘어갔을 때에 겨우 적응할 수 있었다. 이 두 단어를 분리시키면서 한 번씩 다른 표현을 사용했다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아카넷 출판사의 ’오뒷세이아‘는 주석이 별로 없어 아쉽지만 삽화가 좋았고 거기에 덧붙인 이준석의 의미 있는 해석이 감동적이었다. 책 뒷부분의 해설도 줄거리의 흐름에 대한 설명이어서 이 서사시가 상징하는 의미와 행간을 이해하기 유익했다. 천병희의 해설이 숲을 보여준다면 이준석의 해설은 거기에 있는 나무를 설명해주어 두 책을 같이 참조한다면 더 깊이 읽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태수 서울대학교 명예교수는 이준석의 책을 추천하며 새 번역서의 의미에 대해 감사해한다. 나도 같은 생각이다. 워낙 천병희가 이뤄놓은 세계가 크고 단단해 새롭게 똑같은 작품을 번역하는 것이 부담스럽고 쉽지 않았을 것이다.

 

추천사에서 천병희의 역이 독자들이 읽기 쉬운 의역이고 이준석의 역은 원작에 더 충실한 직역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한 문장을 예로 들며 두 번역을 비교한다. 이준석의 ’네 이빨 울타리를 빠져나온 그 말은 대체 무엇이냐.‘라는 직역을 천병희는 ’너는 무슨 말을 그리 함부로 하느냐?‘로 평이하게 옮겼다고 한다. 생소하고 낯설지만 ’네 이빨 울타리’에 대해 잠시 생각해보면 그것이 사람의 ’입‘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의미로 이태수는 이준석의 번역이 천병희의 번역보다 독자들이 훨씬 더 호메로스의 속뜻을 정확히 파악하고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준석 번역자 역시 옮긴이의 말에서 호메로스가 쓴 표현을 왜곡 없이 고스란히 옮기고 싶었다고 한다. ’미세한 뉘앙스를 결정하는 조각 말(particle) 하나까지 놓치고 싶지 않았다(p.655)'고도 했다. ’기백‘과 ’심중‘도 역자의 그런 의도로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읽다 보면 심중과 기백의 차이가 확실하지 않고 둘 다 거의 ’마음‘의 의미로 혼용되어 이해된다. 그러므로 천병희 선생의 의역이 틀린 것은 아니다. 선생은 문장의 부자연스러움이 독자의 집중력을 해칠까봐 이태수가 비판한 ‘작가가 쓰지 않는 다른 말을 동원(p.7)' 했을 것이다.

 

역자 해설에서 흥미로운 부분이 하나 있었다. 이준석은 1-4권의 텔레마코스 이야기를 ‘저 세상을 향한 여행’으로 해석한다. ‘오뒷세이아’의 흐름과 관계없어 보이는 이 부분을 보통 텔레마코스의 교육과 성장으로 알려져 있지만 역자는 ‘경계로 넘어가는 여행(p.607)‘으로 본다. 여러 문장을 인용하며 텔레마코스가 인간 세상 밖으로 여행하고 있으며 이것은 오뒷세우스의 여행과 연결된다는 것이다. 텔레마코스가 만나는 네스토르, 메넬라오스, 헬레네가 생을 넘어선 사람이고 그들이 사는 퓔로스와 스파르타도 ’저 세상‘에 속한다고 추정한다. ’오뒷세이아‘를 읽으며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사실을 역자는 조목조목 분석하고 있었다. 새롭고 환상적이었다.

 

이타카의 오뒷세우스의 집이 구혼자들에 의해 점령되고 곧 결혼에 대한 답변을 해야 할 페넬로페의 상황을 고려했을 때 텔레마코스의 여행은 위태로워 보인다. 이 상황에서 잠시라도 텔레마코스가 집을 비운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상황이다. 결론적으로 아버지를 찾아 나선 텔레마코스는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고, 구혼자들은 돌아오는 텔레마코스를 죽이려고 매복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텔레마코스의 결단이 없다면 일은 더 복잡해질 수도 있다. 이 시점에서 오뒷세우스의 생사를 확인해야만 하는 당위가 되는 것이다. 나는 텔레마코스의 여행을 이렇게 받아들여서인지 별로 어색하지 않았고, 오뒷세우스 귀향의 좋은 시작이라고 생각했다.

 

『오뒷세이아』는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오뒷세우스의 아들인 텔레마코스의 이야기(1-4권), 오뒷세우스의 방랑과 귀향(5-12권), 오뒷세우스의 구혼자에 대한 복수와 페넬로페와의 만남(13-24권)이다. 놀라운 사실은 여기에 인간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는 것이다. 거의 모든 것이 신에 의해 계획되고 신의 도움으로만 인간은 정진하고 뭔가를 성취할 수 있다. 예언자에 의해 앞날이 예고되고 그 말을 지키기 위해 온갖 유혹과 기본적 욕망마저 이겨내야 한다. 조금이라도 신의 분노를 사거나 예언의 실행이 부정되면 무수한 죽음과 고행, 슬픔과 탄식을 겪어야 한다.

 

그럼에도 ‘오뒷세우스’로 대표되는 인간의 정체성은 귀향을 포기하지 않는다. 시기, 질투로 금기의 영역을 침범해 고향이 눈에 보이는 곳에서 파멸하고, 하데스로 가 죽은 사람을 만나 예언을 듣고, 괴물과 거인을 맞닥뜨리고, ‘아무것도 아닌 자(있지도 않은 자)’라고 말했다가 ‘나는 오뒷세우스’라고 밝히며 도발했다가, 신으로 살아갈 기회마저 거절하는 한 인간은 극심한 고역을 치르지만 집으로 돌아간다. 몸을 묶어도 세이렌의 노래를 듣고 싶은 호기심, 죽은 동료들에 대한 애도, 신께 헤카톰베를 바치며 순종하지만 한편으로 영웅이 되고 싶은 마음, 크세니아를 지키지 않은 자에 대한 복수 등 나약하지만 강한, 복잡하고도 다양한 감정을 가진 인간은 그렇게 필연적이다.

 

내가 읽은 다른 많은 책에서 오뒷세우스가 언급되고 있다. 보통 그는 고통을 당하는 자,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지혜와 지략을 가진 사람, 영웅으로 소환된다. 나 역시 그런 인식으로 오뒷세우스를 받아들였고, 귀향의 과정이 궁금해 『오뒷세이아』를 읽었다. 처음 ‘오뒷세이아’를 읽었을 땐 많이 당황했었다. 그가 너무 인간적인 사람이었고 그저 신이나 예언에 의해서만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끝부분이 충격적이었다. 20년 만의 귀향을 끝으로 오뒷세우스에게 남은 생은 해피 엔딩일줄 알았건만 거기에서 그의 고행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납득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어 그땐 그의 남은 고통이 그동안의 힘듦에 대한 정신적 트라우마 일거라고도 생각했다.

 

이 책을 재독하면서 다시 인식한 사실은 하데스를 찾아간 오뒷세우스에게 테이레시아스는 귀향 후의 고행과 필멸의 인간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죽음에 대해 이미 예언한다는 것이다. 결국 호메로스는 오뒷세우스를 전형적 ’한 인간‘으로 규정한다. 인간의 삶은 끊임없는 고통과 도전의 파도 속에 놓인 돛단배 하나에 불과하며, 그 흔들림은 끝이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인간이 고귀한 것은 오뒷세우스가 귀향의 망각, 불멸의 삶에 대한 유혹을 극복하고 인간으로 남기로 했다는 사실이다. 그것으로 한 인간 오뒷세우스는 영웅이 된다.


-p.567, 제임스 파커, 에칭, 1805년

 

[그러자 그때 꾀 많은 오뒷세우스가 아내에게 말하였다.

“여보, 우리가 모든 투쟁의 끝에 다다른 건 결코 아니에요.

이후에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고 혹독한 노역이 있을 것이고,

나는 또 그 모든 것을 해내지 않으면 안 된답니다.

내가 전우들과 나 자신의 귀향을 찾아내러

하데스의 집으로 내려갔던 바로 그 날,

테이레시아스의 영혼이 내게 예언한 대로지요.

-23권 247~253행]


영화 ‘오디세이’는 좋았다. 러닝 타임 172분이 금방 지나갈 정도로 스펙타클했고 집중력 있게 볼 수 있었다. 책의 여러 장면이 어떻게 표현되었는지 기대도 되었다. 시인 호메로스가 읊어주는 오뒷세우스의 여정은 인간의 영역을 넘어선 극적인 부분이 많다. 책을 읽으며 그것을 머릿속에서 그려보면 상상의 범위가 한없이 확장되며 요동친다. 영화는 웅장했지만 호메로스의 노래를 다 담기는 아무래도 역부족이었다. 책을 두 번이나 읽어서인지 그다지 재미있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오뒷세우스 역의 맷 데이먼의 연기는 너무 좋았다. 거기에 다른 배우가 절대 대체될 수 없을 정도로 멋지게 오뒷세우스의 역할을 해내었다. 페넬로페 역의 앤 해서웨이와 아테네 역의 젠데이아 콜먼도 괜찮았다. 이 영화에서 헬레네 역할로 흑인 배우 루피타 뇽오가 캐스팅 되어 논란이 많았는데, 감독의 어떤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이 영화에서는 시종일관 신은 어떤 모습으로 인간 앞에 나올지 모르니 언제나 모든 것을 존중해야 한다는 ’제우스의 법‘이 등장한다. ’낯선 손님이 오면 주인은 정성껏 대접하고 잠자리를 내주고 떠날 때는 선물을 주는 관습인 ‘크세니아’를 철저히 지킨다. 이타카의 페넬로페의 구혼자들도 이 크세니아 때문에 아무 제지 없이 오뒷세우스의 재산을 약탈할 수 있었다. 하지만 손님의 태도도 존재한다. 겸손하며 예의 있게 행동하며 감사함을 표시해야 한다. 구혼자들은 테미스(themis,-관습, 관행 또는 법도,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하는 바)에 대해 아테미스토스(arthemistos,-도리를 저버린, 사람의 탈을 쓰고 할 수 없는)의 태도를 행했기에 마땅히 응징 당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전작인 ‘오펜하이머’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영화에서도 대의와 도덕적 인간성의 충돌을 얘기한다. 영화에서 아주 극적인 장면으로 등장한 트로이의 목마는 오뒷세우스로 대표되는 인간 지혜의 절대성으로 등장한다. 예언자 카산드라 말고 아무도 그것을 의심하지 않은 트로이 사람들은 패배를 자초한다. 트로이 목마로 굳건히 닫혀있던 성문은 열린다. 10년 동안 기다리며 고생한 그리스 연합군은 그것으로 전쟁에 대한 승리의 기쁨만이 아닌 광기의 폭력으로 트로이 문명을 완전히 파괴한다. 오펜하이머처럼 도시의 파괴자인 오뒷세우스 역시 불타오르는 트로이를 보며 좌절하고 탄식한다. 호메로스가 한 인간을 노래하며 보편의 인간상을 보여주었다면, 놀란 감독 역시 한 인간을 노래하며 지금 우리가 당면한 현실을 보여준다.


가장 갈망하는 것은 가질 수 없는 것이고, 

가장 가질 수 없는 것은 이미 가졌다가 잃어버린 것이다.

 

뮤즈여, 노래하라. 한 얼굴을, 한 함대를,

트로이를 하루 만에 짓밟은 한 전쟁을,

한 생각을, 한 자락을, 한 인간을.   

 



댓글(4) 먼댓글(0) 좋아요(45)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잉크냄새 2026-08-16 17: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직역이 나름의 의미를 가지더라도 의역으로 읽어야 오딧세우스 귀향만큼의 스트레스를 받지 않을 듯 싶네요. 예전에 직역으로 읽다 외눈박이 괴물만큼이나 오딧세우스를 저주하게 되었던 기억이 새로새록 나는군요. 그나저나 남편분의 귀향이라 더 감회가 새로운 독서와 영화 관람이 되었을 것 같습니다. 축하드려요.

페넬로페 2026-08-16 17:22   좋아요 0 | URL
이준석 님의 번역이 몇 개 단어의 남용 외에는 간결하면서도 리등감 있게 잘 읽혔어요. 이번에 또 다른 오뒷세이아가 출간되던데 그 책 번역은 어떨지 모르겠어요.
안 그래도 같이 영화 본 남편이 자기가 계속 오디세우스라며
ㅎㅎ
제 닉네임이 사실 이 서사시의 페넬로페에서 온 건 아닌데 기다림의 미학이 너무 좋아 그냥 이 페넬로페 하려고요.
앤 해서웨이에게 너무 미안하지만요.

blueyonder 2026-08-16 22: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놀란 감독의 영화를 보고 <오뒷세이아>를 읽어보고 싶어졌습니다. 번역을 비교하는 좋은 글 감사합니다~!

페넬로페 2026-08-16 22:41   좋아요 1 | URL
네,
완독 리뷰 기대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