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 서재 친구인 scott 님이 요즘 매일 올려주시는 음악들이 참 좋다. 유튜브로 음악을 연결해주시어 듣기 수월하고, 그 음악의 유래와 거기에 딸린 시도 적어주시고 해서 하루 하루 종합선물세트를 받는 기분이다. 넘쳐나는 정보의 홍수시대이지만 나같이 게으른 사람은 그 정보를 충분히 활용하지를 못한다. 그렇지만 누군가가 주는 좋은 것을 덥석 받아먹는 염치는 빠른 것 같다. 알라딘 친구분들이 해주시는 책, 영화, 커피얘기는 물론이고 각자 살아온 사연들, 현재 삶을 살아내고 있는 생생한 이야기들도 좋고 감동적이다.
scott 님이 올려주신 오늘,1월 25일의 음악 이야기는 스코틀랜드 축제일인 '반스 나이트'에 대한 것인데 이 날은 '로버트 레비 번스'의 시를 읽고 전통 음식인 '해기스'를 먹는다고 한다. 또한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인 '만약 우리의 언어가 위스키라고 한다면'의 한 구절을 올려 주셨는데 그 글이 너무 좋았다.(궁금하시면 scott 님의 페이퍼를 읽어 보세요)
.....만약 우리의 언어가 위스키라고 한다면, 이처럼 고생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나는 잠자코 술잔을 내밀고 당신은 그걸 받아서 조용히 목 안으로 흘려 넣기만 하면 된다.......
그 '위스키' 라는 단어에 25일 오늘, 난 지난 시절 생각에 내내 발목이 잡혀버렸다.
나는 지방 소도시에서 서울의 대학에 공부하러 온 유학생이었다. 대학 1학년부터 3학년때까지는 친척집과 기숙사를 전전했고 4학년때는 학교앞에서 하숙을 했다. 내가 하숙을 한 집엔 나와 같은 고등학교 출신 동창인 L이 살고 있었다. 어느 날 L이 이웃에 있는 다른 하숙집에 사는 같은 고등학교 동창인 J를 만나러 가자고 했다. L과 J는 학교 다닐때 친했지만 난 J와는 일면식도 없었다. 그래도 같은 고향 출신이라 처음엔 서먹했지만 금방 친해질 수 있었다.
J의 하숙집엔 전라도 광주에서 올라온 불문과 학생인 A가 살고 있었다. 그녀는 눈이 크고 얼굴도 상당히 예뻤다. 불문과에 어울리는 우아하고 좋은 분위기를 풍기는 친구였다. 그런 그 친구의 말에 사투리가 조금 섞여 있어서 소탈하고 인간적으로 보였다.
요즘 대학생들은 어떤 술을 마시는지 몰라도 우리 때는 맥주, 소주, 동동주를 주로 마셨다. 우리 하숙집과 J의 하숙집 멤버들은 자주 모여 술을 마셨다. 집에서 용돈이 올라오는 날이면 돌아가며 한잔씩 술을 샀다. 다들 각박한 서울살이에 용돈이 모자라 허덕였지만 함께 술 한잔 마시며 얘기나누는 시간이 너무 재미있었기에 누구나 그 자리를 좋아했고 인심좋게 한 턱씩 냈다. 이웃 하숙집의 J와 A는 둘다 주당인데다 유머가 풍부해 우리를 많이 웃겼다.
그런 우리들에게 한번씩 위스키를 마실 수 있는 날이 있었다. 광주 친구인 A가 집에만 다녀오면 '시바스 리갈' 한 병씩을 가져오는 거였다. 집에 쟁여져있는 위스키를 자기 아버지 몰래 가져온다고 했다. 그렇게 예쁘고 우아한 친구가 술 한병씩을 슬쩍 해온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녀가 위스키를 가져오는 날이면 우리는 자동적으로 소환되었다. 그땐 A의 아버지가 뭐하는 사람인지 궁금하지가 않았다. 그저 같이 만나 놀 수 있는 기회가 있음을, 약간 고급스럽게 보일 수 있는 위스키를 마신다는 것이 좋아 그 시간만을 즐긴 것 같다. 맛도 잘 모르면서 우리는 그 위스키를 마시며 시국에 대해 얘기하고, 친구의 연애사를 들어주고, 그 누군가의 뒷담화를 했다.
대학 생활 중 4학년을 어떻게 보내는가가 자신의 진로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데도 우리는 그렇게 놀았으니 지금 사회지도층 인사가 되어 있지 못한 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그때의 하숙집 친구들은 평범하게 제 밥벌이 하면서 열심히 살고 있다. 다들 지방 출신들이라 고향으로 내려간 친구들이 많아 거의 만나지는 못하고 소식만 가끔씩 주고 받는다. '위스키' 덕분에 오늘 그 시절을 생각했고 기분 좋았다. 그때만 생각하면 난 활짝 웃는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글처럼 우리는 잠자코 술잔을 내밀고 그걸 받아서 조용히 목 안으로 흘러 넣기만 하면 되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피곤함도 없었고 거리를 잴 필요도 없었다. 어쩌면 내 인생의 화양연화였던 그 시절이 빛난다.
너무도 심플하고, 너무도 친밀하고, 너무도 정확하다.-무라카미 하루키
하루 종일 수레를 몰아 달리지만
나루터 묻는 사람 보이질 않는다.
만약에 다시 통쾌하게 마시지 않으면
머리 위의 두건을 헛되게 하는 것이리라.
단지 잘못한 말 많을까 유감스럽지만
그대는 마땅히 이 술 취한 사람을 용서하시라.
-도연명,'음주' 20수 중에서 20수의 일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