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장은 원래 단단한 재료로 조각을 하다가 유동적이고 쉽게 뭉개지는 재료로 넘어왔는데, 그랬더니 형상을 조형하는 방식도, 감각하는 방식도, 상상하는 방식도 바뀌더래요. 사장은 이런 생각에 도달했죠. 인간의 재료가 달라진다면 인간과 세계의 상호작용도바뀌지 않을까? 우리가 매끈한 가죽과 살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까끌까끌한 털로 뒤덮인 존재라면, 혹은 석고처럼 단단해 보이지만 잘 부스러지는 존재라면? 인간의 부드럽고 말랑말랑하고 매끈한 피부는 인간의 본질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미치고 있을까? - P15

음, 사장의 표현대로 그건 몹시 실험적이었어요. 그 정도로 과감한 피부라면 재료가 본질을 바꿀 수도 있을 것 같았죠. 하지만 한 가지 도저히 해소되지 않는 의문 하나가 있었어요.
"어, 좋아요. 그런데 ・・・・・・ 대체 누가 이런 피부를 원하는 거예요?"
제가 묻자, 사장이 눈을 또르르 굴리더니 "글쎄, 꽤 많은사람이?" 하고 대답했던 게 기억나요. - P16

어떤 사람들은 지금의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가 되기를 꿈줘요. 그 욕망 중 쉽게 승인되는 것들은 거대한 시장을 이루죠. 하지만 승인받지 못한 욕망들도 결국은 어디론가 흘러들어 조그만 웅덩이를 만들어요. 그런 갈망은 쉽게 떨쳐버릴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 P17

맞아요.그동안은 괜찮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균열이라는 게 그렇잖아요. 잘 밀봉해왔다고 믿었지만 한번 틈이 생기면, 사실은 그 전에도 괜찮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되죠. 계속 충격이 가해지고 있었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주 위태로웠는데, 겉으로는 부서지지 않았으니 현실을 외면하고 있었던 거예요. 지금은 견디다 못해 빠그작, 이미 갈라졌고요" - P64

원래도 불완전한 소통 체계에 그렇게 많은 불일치를 더할필요가 있을까? 이상한 건 그들이 그 무수한 문자 형식의 존재를 이렇게 설명했다는 거야.
"이런 거죠. 원래 우리 언어는 불완전하잖아요. 기록도 불완전하고요. 아무리 애써도 문자로 전하고자 하는 의미에는왜곡이 생겨요. 우리는 문자 그 자체에 담긴 정보로만 서로소통하는 게 아니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문자를 이렇게 수많은 다른 꼴로 새기는 거예요. 문자로는 마음을 온전하게 전달하지 못하니까 더 잘 전해보고 싶은 거예요. 어렵죠?"
그게 대체 무슨 의미였을까? 더 잘 전하고 싶어서 더 많은불일치를 만들어내다니. - P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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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개의 파랑 - 2019년 제4회 한국과학문학상 장편 대상
천선란 지음 / 허블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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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휴머노이드가 이용되는 미래에, 현재와 똑같은 인간의 감성과 고민이 계속된다면 그 세상은 발전했다고 할 수 있을까? 휴머니즘과 타인의 이해에 바탕을 둔 문제의 해결이 따뜻했지만, 흥미로운 앞부분을 계속 살리지 못해 아쉬웠다. SF소설로 분류되기엔 미래에 대한 서사가 약간 부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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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25-12-04 07: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앗. 저도 이 책 오래 전에 사다놓은 책이에요.^^
서점 갔다가 눈에 띄어 사들고 왔더랬죠.
사들고만 왔고…^^
갑자기 책장에서 나를 보고 있는 천 개의 파랑과 눈이 마주쳤습니다.ㅋㅋㅋ
천선란 작가는 다른 소설책에서 몇 번 읽어봤는데 sf소설 중에서도 조금 결이 다른 작가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좀비 이야기도 있었고, 최근에 읽었던 로봇 장의사 이야기는 참 따뜻하게 읽기도 했어요. 그래서인지 페넬로페 님의 백자평 문장들이 좀 와닿는 것 같아요.
이 책도 그런 결인가? 상상하게 되네요.^^

페넬로페 2025-12-04 09:08   좋아요 1 | URL
도서관에서 천선란 작가 북토크가 있어 급하게 읽었어요. 말과 기수 휴머노이드라는 설정은 참 좋았는데 소설의 전개는 청소년 소설처럼 느껴져 아쉬웠어요. 여기도 따뜻한 세상에 대한 것과 로봇 이용의 문제점 같은 것이 있는데 그것이 조금 신파쪽으로 가더라고요. 이 소설이 워낙 유명해 제가 기대를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작가의 신간 소설은 좀비이야기라고 해요.

젤소민아 2025-12-04 23: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국 SF가 요즘 대단한 것 같아요. 대세이기도 하지만 작품 수준도 좋고요~~. 아슐러 르귄이 제 정신적 멘토이기에!

페넬로페 2025-12-05 09:06   좋아요 0 | URL
여러 작가가 활동하고 있는데 저는 김초엽 작가의 작품이 좋았어요. 매번 과학과 문학이 잘 섞여 있더라고요.
 
미술관에서 안아주는 남자 - 르누아르에서 클림트까지, 명화로 읽는 위로의 미술
최예림 지음 / 더블북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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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직 도슨트가 쓴 9명의 유명 화가에 대한 책. 미술관에서 들을 수 있는 기본적인, 평범한 내용뿐이다. 이왕 책으로 출간했으니, 좀 더 깊이 있는 저자 자신의 느낌이 있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또한 우리나라의 메이저 미술 전시가 얼마나 남성 중심의, 유명인에게만 쏠려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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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5-11-26 17: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부 우리나라 미술관에서 전시를 했던 유명 화가들...9명 전부..아마도 그 전시에 도슨트를 했고..그 자료를 바탕으로 책을 낸 듯싶네요..ㅎㅎ 작가가 미술가를 선정해서 묶은 책은 많이도 봤는데...그 중 원탑은 <최초의 현대화가들>인듯합니다. 아직까지는요. 페넬로페님에게도 강추~~!!

페넬로페 2025-11-26 20:20   좋아요 0 | URL
네, 저도 거의 다녔왔던 전시회의 도슨트를 했던 것 같아요. 요즘은 소수의 관객을 대상으로 한 유료 도슨트 설명도 많던데 해설 수준은 이 책의 내용과 별반 다르지 않을 듯 해요.
<최초의 현대화가들>
꼭 읽어 보겠습니다^^

젤소민아 2025-12-04 23: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진짜 여자 화가를 찾기 너무 힘들다는....그래도 소설 문학계에는 또 여자가 압도적 우세..? 그래서 균형이 맞춰지나요? ^^

페넬로페 2025-12-05 09:03   좋아요 1 | URL
한국에서는 비싸게 그림 대여해와서 그만큼 남겨야 하니까 아무래도 유명 작가의 그림을 안전하게 전시하는 경우가 많아요. 지금 주요 미술관에서 전시하고 있는 작품들도 다 조중동 신문사가 주관하고 있어요. 좀 더 다양했으면 좋겠는데 그러면 아마 저 역시도 많이 안 갈지도 모르겠어요.
 
특성 없는 남자 2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26
로베르트 무질 지음, 박종대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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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성 없는 남자』는 사유소설, 즉 무질의 에세이즘 소설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책을 잘 읽고 이해하려면 무질이 쏟아부어 버무린 시대적 상황, 철학, 신학, 종교, 심리, 과학 등 다양한 배경을 먼저 알아야한다. 인간에게 해체와 유토피아의 건설은 공존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한다.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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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5-11-21 05: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고생하십시오!

페넬로페 2025-11-21 08:34   좋아요 1 | URL
너무 힘들고 어려운데
12월까지 완독하겠습니다.

젤소민아 2025-12-04 23: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렵.다. 동감입니다!

페넬로페 2025-12-05 08:56   좋아요 0 | URL
정말 어렵습니다.
이제 3권 시작입니다.
 
닐스 비크의 마지막 하루 - 2023 브라게문학상 수상작
프로데 그뤼텐 지음, 손화수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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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나도 ‘닐스 비크’처럼 생의 마지막 하루를 보내고 싶다. 여느 때와 다르지 않은 일상과 함께, 조용하지만 한편으론 벅차오르는 슬픔과 회한을 간직한 채, 죽었거나 아직 살아 있는 내 삶의 모든 인연들이 초대된 파티에서 춤추며 웃고, 사랑과 감사함을 나누는 그런 마지막 하루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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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5-11-19 13: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같은 날은 두 번 오지 않기에 하루하루가 소중하겠지요.
사랑과 감사함이 있는 하루는 더욱 소중할 거예요.
생각을 부르는 소설 같습니다.^^

페넬로페 2025-11-19 15:43   좋아요 0 | URL
네, 똑같은 날들일지라도 마지막엔 아쉬울 것 같아 더 열심히 살아야겠어요 ㅎㅎ
담담하게 전개되는 이 소설이 저는 좋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