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의 꼭두각시
윌리엄 트레버 지음, 김연 옮김 / 한겨레출판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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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 소설을 읽었을 때, 초반 부분은 약간 밋밋하게 읽혔다. 트레버 작가 특유의 담담하고 간결한 문장에 어떤 감정이 일어나지 않았고, 혹시 번역의 문제인가도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게 천천히 가다가 71페이지에서 갑자기 불안이 엄습했고, 78페이지에서 나의 심장이 쿵 내려앉아 버렸다. 무너졌다는 것이 더 맞는 표현일 것이다. 훅 들어오는 이 운명의 꼬임들 때문에 그 다음은 계속 슬픈 감정으로 책을 읽게 되었다. 언제나 불행할 수밖에 없는 폭력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은 고결하며 용기를 내게 하는 것임에도 따뜻함보다는 서늘한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 소설을 두 번째 읽었을 때, 처음의 밋밋한 느낌은 작가의 치밀한 전략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트레버는 이 책의 초반에 시대적 배경과 인물 하나하나의 성격을 지루할 만큼 자세하게 설명한다. 재독했을 때, 작가가 왜 이런 배치를 했는지가 완벽히 이해되었다. 인물 개개인의 성격과 관계, 또한 영국과 아일랜드의 오래된 반목의 역사를 모르고서는 이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똑같은 윌리엄이라는 이름을 가진 아일랜드의 퀸턴가와 영국의 우드컴 가문의 4대에 걸친 이 엄청난 이야기를 한 권의 책에 압축된 분량으로 서술한 트레버 작가는 역시나 대단한 소설가였다.

 

거의 750년 동안 영국의 지배를 받은 아일랜드는 처음엔 켈트족이 정착해 살던 나라였다. 기독교는 3~5세기 사이 성 패드릭에 의해 전파되었다. 그 뒤 바이킹족이 침략했으나 그들은 토착민의 문화에 잘 동화되었다. 앵글로-노르만이 아일랜드에 들어오고 그로부터 영국과의 기나긴 악연이 시작되었는데, 헨리 8세는 아일랜드를 더 강력하게 통치했고 종교개혁을 실시했다. 가톨릭교회의 재산을 몰수하고 수도원을 해체했다.

 

엘리자베스 1세는 플랜테이션이라는 식민정책을 시행하여 토착민으로부터 방대한 토지를 몰수하여 잉글랜드 귀족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신교도가 아일랜드로 이주했지만 그들은 예전의 다른 민족과는 달리 쉽게 토착민의 문화에 동화되지 않았다. 그들은 얼스터 지역을 장악했으며 결국 이곳은 지금의 북아일랜드로 아일랜드는 아직도 완전한 독립을 이루지 못했다.

 

식민주의자들의 수탈과 약탈은 언제나 지독했다. 전통적으로 농업 국가였던 아일랜드는 유럽의 산업혁명의 영향을 받을 수 없었다. 대다수가 소작농인 아일랜드인은 환금성이 강한 농작물은 거의 잉글랜드로 보내고 그들은 하루 세끼를 감자에 의존했다.

 

1845년부터 시작된 감자 잎마름병은 사람들을 굶주림에 의한 죽음으로 내몰았으며 전염병으로 무수한 사람들이 사망했고 고국을 떠나게 했다. 그 와중에도 영국은 아일랜드에서 재배한 감자를 제외한 작물을 배로 실어 날랐으며 그들의 굶주림을 외면했다. 7년에 걸친 대기근으로 아일랜드는 완전히 폐허가 되었고, 아일랜드어를 버려야 했으며 아일랜드인은 영국에 대해 극도의 증오를 가지게 되었다.

 

운명의 꼭두각시1차 세계 대전에 영국의 편에서 독일군과 싸웠던 아일랜드가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희망했지만 그 꿈은 이루지 못했고 서로간의 폭력이 계속되는 것이 중요한 시대적 배경이 된다. 영국은 전쟁에 투입되었던 아주 잔혹한 군인들인 블랙 앤드 탠즈를 아일랜드의 혁명을 제압하는데 다시 투입한다. 어느 시대에나 그랬듯이 아일랜드인 사이에도 내전과 반목은 존재했고 그것은 계속적인 폭력과 복수로 이어진다.

 

영국은 나쁘지만 영국인 한 사람, 한 사람을 보면 모두가 나쁜 사람은 아니다. 철천지원수의 나라지만 영국인인 애나 우드컴은 아일랜드 남자와 결혼했고, 킬네이에서 퀸턴 가문을 이끌었다. 그녀는 아일랜드의 대기근을 외면하지 않았고, 토지 대부분을 주변 사람들을 위해 내놓았다. 애나 우드컴의 증손자인 윌리의 어머니도 영국인이다. 킬네이가 있는 로크 지방은 가톨릭 교도와 신교도가 함께 살았고 그들은 일요일에 각자의 성당과 교회에 다닐 수 있었다. 가벼운 계급 사회가 존재했지만, 각자의 위치에서 자신의 신념을 유지한 채 평화를 유지하며 살 수 있는 곳이었다.

 

난세에 중립을 지키고, 평화주의자로 산다는 건 어렵다. 킬개리프 신부는 과격한 아일랜드의 제국주의 혐오자에 의해, 윌리의 아버지인 윌리엄 퀸턴은 영국의 블랙 앤드 탠즈인 러드킨 중사에 의해 자신이 선택한 인생을 살지 못하게 된다. 중립을 지키는 것만 어려운 것은 아닐 것이다. 어느 한 쪽을 선택한다고 해도 그들은 목숨을 담보로 한 상대방의 보복성 폭력에 항상 노출되어 있다. 그것만으로도 이런 시대를 사는 개인은 불행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밤에 잠자리에서 난 더 이상 흐느끼지 않았다. 무의식적으로 손톱을 써서 다른 손 손바닥을 쥐어뜯지 않고도 아버지와 여동생들을 생각할 수 있었다. 심지어 내가 그토록 많이 들었던 천국, 이제 궁금해 할 더 큰 이유가 생겼음에도 여전히 어렴풋한 땅으로 남은 천국에 있는 제럴딘과 데르드러를 상상할 수 있었다. 플린 부인과 팀 패디와 오닐도 그곳에 있다고 여겼다. 물론 나의 아버지도. -p78.]

 

윌리의 관점으로 서술된 이 소설의 78페이지가 이 소설의 다른 어느 부분보다 내게 많은 의미로 다가온 건 이런 상황에 놓인 윌리의 어머니인 에비 퀸턴의 입장을 많이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 역시 엄마이기에 마음이 너무 안 좋았다. 그 뒤로 계속되는 에비의 행동과 결국 아들을 사지로 몰아넣는 것까지 다 이해될 정도였다.

 

이런 일을 당했을 때, 엄마의 역할은 대개 두 가지이다. 맨 정신으로는 살아갈 수 없는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윌리를 위해 정신을 차리고 자신을 수습하며 아들의 미래를 챙겨야 한다는 것이다. 이 세상의 엄마들이 위대한 건 대개 후자를 선택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전자를 선택한 에비의 입장을 너무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총으로 사람 하나 죽이는 게 전혀 이상할 것 없는 세상에 왜 누군가가 러드킨 중사를 쏘지 않았는지 의아해할 수 있다. 사람들이 이 남자에게 복수해주지 않는 것에 좌절한다. 자신과 같은 영국인이 가족을 죽였다는 생각도 이 여자를 미치게 했을 것이다. “단호함은 거의 효과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상실이 너무 깊어서 종종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을 때가, 어떤 위로도 소용이 없을 때가 있습니다.(195.)”라는 킬개리프 신부의 말이 정확하다. 에비에게 닥친 상실은 운명을 뛰어넘는 것이다.

 

이 소설은 이종 사촌간이며 서로를 사랑했던 윌리, 메리앤과 그들의 딸인 이멜다의 관점으로 순서대로 서술된다. 운명의 수레바퀴 아래서 어느 누구도 그 굴레를 피해갈 수 없었지만 그 모질고 질긴 인연과 인생의 힘듦을 이겨내고 계속 이어갈 수 있는 힘은 결국 사랑이었다. 윌리와 메리앤 뿐만 아니라 이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 모두의 바탕에는 사랑이 깔려있다.

 

이멜다는 킬네이에서 아버지 없이 성장하고 신교도임에도 가톨릭 학교를 다니고 있다. 자신이 살고 있는 곳과 주변이 온통 과거의 운명의 그늘에 휩싸여 있다는 걸 직감하며 비밀을 찾아다닌다. 이멜다를 통해 이 집안의 운명의 흐름이 다시 복기되며 그것은 고스란히 이멜다의 삶을 잠식한다.

 

이멜다는 볼료냐의 성녀 이멜다 람베르티니와 축일을 나누었는데, 성녀는 첫 영성체를 하기 전에 감실 앞에서 성체가 떠 있는 것을 보고 그것으로 영성체를 한다. 그 뒤로 성녀는 세속으로 돌아오지 않았는데, 이 소설의 이멜다 역시 집안의 마지막 운명의 기운을 고스란히 받아들여 세속의 삶을 살 수 없게 된다. 윌리와 메리앤은 노년에 이르러서야 다시 재회하게 되고 그들은 같이 딸의 불행을 지켜낸다.


-p12. ‘아일랜드역사 다이제스트 100’, 한일동, 가람기획

 

[어머니는 이상한 말을 했다. 지도를 보고 있노라면 아일랜드와 영국이 꼭 연인처럼 보인다고. “라니건 씨,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세요? 신기하게도 포옹을 떠올리게 하지 않나요? 이 모든 상황을 만들어낸 가장 특별한 포옹.”

포옹이라고요?”

제가 아일랜드식 환상에 너무 도취했다고 생각하시나요? 킬개리프 신부는 그렇게 생각하죠. 다른 사람들도 그렇고요. 하지만 전 이제 이 모든 것의 일부예요. 제 열정을 어쩔 수 없어요.” -p.287]

 

아일랜드와 영국의 지도를 보면 포옹까지는 아니더라도 친밀하게 마주보고 있다. 어쩌면 키스를 하고 있는 모습인 것 같기도 하다.

 

불행이 뻔히 보이는데도 지옥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을 윌리의 아버지인 윌리엄 퀸턴 씨는 운명의 꼭두각시라고 부른다. 사랑이든, 숙명이든, 선하든, 악하든 그 어떤 이유에도 운명은 결과에 관대하지 않다. 윌리엄 트레버 작가는 킬개리프 신부를 통해 그가 하고 싶은 말을 한다. ‘살인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것이며, 전쟁은 어리석고, 논쟁과 설득만이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이 세상에서 자행되는 폭력은 그것이 어떤 이유이든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상처와 원한만 남길 뿐이다. '운명의 꼭두각시'로 살 수밖에 없는 우리들이 킬개리프 신부의 말을 계속 새기며 살아가야 할 당위가 여기에 있다. 

 

 *아일랜드 역사 부분은 한일동의 아일랜드역사 다이제스트100』(가람기획, 2019년)에서 참고해 정리해서 썼고 페이지는 생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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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3-11-19 14: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역시 엄청난 페넬로페님의 리뷰~!! 저도 윌리의 엄마의 분노가 이해가 되면서도 안타까웠어요. 우리가문이 아일랜드를 위해 한게 엄청난데, 왜 아무도 복수를 안하는거지? 이런 느낌? 윌리는 뭐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는 생각도 들고..

저도 이 책 읽고 인터넷으로 아일랜드 정치랑 종교를 찾아봤습니다 ㅋㅋㅋ

이 작품은 소설을 넘어선 아일래드의 역사서라고 생각합니다~!!

페넬로페 2023-11-19 16:29   좋아요 2 | URL
한 권의 책에 트레버 작가가 써 놓은 내용이 너무 많아 그걸 다 글에 나타내는게 불가능하다고 생각되어 그저 제 느낌대로 썼습니다.
아일랜드의 역사도 참 불행한 일이 많았는데 그러한 일을 겪었을 개인들의 가슴엔 얼마나 많은 한이 있었을지 ㅠㅠ

네 정말요.
소설을 넘어선 역사입니다^^

거리의화가 2023-11-19 16:4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페넬로페님 리뷰 읽으니 이 책은 저도 접근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페넬로페 2023-11-19 17:02   좋아요 2 | URL
네, 이 책은 역사의 시각으로 읽어도 되고 여성의 시각으로도 좋아요. 읽으면서 열불이 많이 났습니다. 그걸 다 옮기기가 역부족 이었어요.

미미 2023-11-19 21: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아는 이니스프리가 저 이니스프리에서 왔을까요ㅋㅋㅋ

아일랜드의 역사가 우리의 역사와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많다고 어디선가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페넬로페님 리뷰 읽으니 마음이 급해지네요. >.<

페넬로페 2023-11-19 21:46   좋아요 1 | URL
이니스프리섬은 아일랜드 출신의 시인인 예이츠의 고향 쪽에 있는 호수섬이라고 해요.
이 책에도 언급되어 있어 인용해 보았어요. 떠돌아 다녀야하는 주인공 월리의 마음같았어요.

아일랜드가 여러가지 면에서 우리나라와도 비슷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도 합니다.
미미님의 감상도 얼른 듣고 싶어요^^

희선 2023-11-20 01: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람은 누구나 역사에 영향을 받겠습니다 그런 걸 더 많이 받을 때가 있지 않나 싶기도 합니다 여기에서는 전쟁이 아닐까 싶네요 전쟁뿐 아니라 종교도... 아일랜드는 결혼하지 않고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법도 있었더군요 그런 사람이 아주 없지 않았겠지만, 그런 사람은 수녀원에 들어가서 일하고 아이를 낳으면 다른 곳으로 입양 보냈더군요

전쟁이 일어났을 때 다른 사람을 죽이지 않을 수 있을지,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죽고... 그런 거 생각하면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합니다 여전히 전쟁은 일어나고 쉽게 끝나지도 않네요

페넬로페 님이 쓰신 글을 보니 아일랜드가 한국과 비슷한 면이 있기도 하군요


희선

페넬로페 2023-11-20 09:30   좋아요 1 | URL
사람은 정말 역사에 영향을 많이 받지요. 아일랜드가 핍박받은 민족이지만 ‘밀크맨‘같은 책을 읽어보면 참 통제가 많은 나라였다는 생각도 들어요. 이 소설은 어떤 전쟁에 대한 건 아닌데 전쟁같은 삶과 비슷할 것 같아요. 어쨌든 폭력은 서로에게 끝이 나지 않는 일인 것 같아요.

2023-11-20 01: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11-20 09: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11-20 11: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11-20 14: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서니데이 2023-11-22 06: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윌리엄 트레버 책이 올해 가을에도 신간으로 나왔네요. 그러고보니 표지를 본 것 같기도 해요.
이 책 시리즈를 전에 샀는데, 다른 책보다 판형이 작았어요.
사진을 보니 기억이 맞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페넬로페님, 따뜻하고 좋은 하루 보내세요.^^

페넬로페 2023-11-22 08:35   좋아요 2 | URL
한겨레 출판사의 트레버 시리즈의 판형이 디자인은 좋은데 읽을 때 양손에 꼭 잡고 읽어야해서 조금 불편했어요.

이번 주 날씨는 따뜻해서 좋은 것 같아요. 또 추위가 몰려 오겠죠.
서니데이님!
건강하고 행복한 하루 보내시길 바래요^^

희선 2023-12-09 01: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페넬로페 님 또 축하합니다 십이월에 일어난 좋은 일이군요 살면서 좋은 일이 일어났을 때 기뻐하기도 해야겠네요 그것만 생각하는 게 좋겠습니다

페넬로페 님 남은 십이월 책도 만나면서 즐겁게 건강하게 보내세요


희선

페넬로페 2023-12-10 10:36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희선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