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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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집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를 읽으며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가 말한 아래의 문장이 생각났다.


<현실에서 모든 독자는, 책을 읽는 동안만큼은 그 자신의 독자이다. 저자의 작품은 만약 그 책이 아니었으면 독자가 결코 혼자서는 경험하지 못했을 어떤 것을 스스로 식별하도록 도와주는 일종의 시력보조 장치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 책이 말하는 바를 독자가 자기 속에서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이 책의 진실성에 대한 증명이다

-p.33, ‘프루스트가 우리의 삶을 바꾸는 방법들’, 알랭 드 보통, 청미래>


 

내가 소설을 읽는 가장 큰 이유는 프루스트의 말처럼 혼자서는 경험하지 못했을 세상의 다양한 것을 간접 경험하고, 선한 방향으로 집요하게 인식의 틀을 넓히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그 인식은 세상과 타협하며 적당히, 편하게 살기 원하는 느슨함에 금방 무뎌지고 만다. 좋은 게 좋은 것이며, 이 정도면 적당하다는 자기기만으로 금방 돌아가 버린다.

 

이번에 읽은 최은영의 소설은 까탈스럽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호락호락하지 않았다는 의미가 읽기 어려웠다는 뜻은 아니다. 세심하고 조곤조곤한 말투와 같은 문장으로 세상과 인간을 보는 나의 시선과 이해에 대해 그 정도로는 어림없다고 말해 주고 있었다. 가족이나 타인과의 관계에서 어느 정도까지가 이해의 폭으로 인정되는지, 정말 상대의 살갗 속으로 들어가지 않는 한 이해한다는 말을 할 수 없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게 했다. 여전히 존재하는 폭력 또한 서늘했고 마음이 아팠다. 책을 읽으며 자기 속에서 인식해야 한다는 프루스트의 말을 제대로 실감했다.

 

 

성적에 맞춰 들어간 학과 공부가 마음에 들지 않아 괴로웠지만 그럭저럭 졸업을 하고 은행의 비정규직 사원으로 근무한 적이 있는 희원은 자신의 꿈을 위해 다시 대학 3학년에 학사 편입한 늦깎이 영문과 대학생이다. 영어로 된 에세이를 읽고 각자 에세이를 써 와 토론하는 강의에 참가한 희원은 그 수업의 시간강사인 그녀를 마음에 들어 한다. 수업의 내용과 그녀의 생각, 같은 지역에서 살았다는 동질감을 좋아하고, 희원이 앞으로 가게 될 길의 선배로 여기며 그녀에게 의지하게 된다. 하지만 그녀는 희원이 원하는 그 길에 대해 싸늘한 반응을 보인다. 대학원에 진학해 박사학위를 따고 시간강사로 출발해서 대학에 자리 잡는, 공부하는 인생이 비정규직으로, 날씬하지 못한 어린 여성으로 차별받았던 희원의 과거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희원은 과거와 현재, 현재와 미래에서 그녀의 길을 따라가지만 그들은 계속 대척점에 서 있다. 그녀가 그렇게 벗어나고 싶었던 용산에 지금 희원이 살고 있으며, 희원이 벗어나 다른 길로 가고 싶었던 그 길에 그녀가 있었으며, 결국은 자리 잡지 못하고 글이나 공부와 무관하게 살아가는 그녀의 자리에 현재 희원이 분투하며 버티고 있다. 엇갈림과 짧은 인연 속에서의 그들의 대척은 끝까지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지 못하는 소심한 희원에게는 아이러니하게도 등불과 같은 것이었다. 희원은 그녀라는 빛을 좇고 성장하고 있었다. 이 책의 표제작인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는 짧은 분량임에도 장편소설을 읽는 기분이 들었다. 여러 면에서 생각할 것이 많았다.

 

현역으로 대학에 입학한 나는 회계학을 전공했다. 희원처럼 성적에 맞춰 학과를 선택했기에 전공이 적성에 맞지 않았고 매번 허덕이며 공부를 따라가야 했다. 우리 과(학과의 특성상)에는 여상을 졸업하고 바로 취업해 회사 생활을 하다가 다시 대학에 온 언니들이 몇 명 있었다. 그들에게 회계 원리는 가지고 노는 장난감이었고, 학점을 향한 집요하고도 억척스러움은 성실과 노력의 다른 말이었다. 그들이 대학에 다시 온 이유는 많겠지만 아마 직장에서의 차별이 가장 컸을 것이다. 가끔씩 그들의 삶이 궁금하다.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나간 그들에게 차별은 없어졌는지, 자신의 꿈을 향해 항상 더 가보고 싶었는지가.

 

[그것이 어떤 문장이든, 그녀는 내가 자신보다 나은 경험을 하기를, 자신이 겪었던 일을 겪지 않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그녀의 자존심이자 힘이었으리라는 생각도 한다. 자신의 조건을 탓하지 않고, 자신이 겪는 부당함을 인지하면서도 인정은 하지 않으려는 마음 같은 거 말이다. 그 마음이 그녀를 지켜 주었는지도 모른다.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p.41]

 

우리가 사회에 대한 비판을 하거나 글쓰기를 할 때, 소재와 내용의 범위를 어디까지 둘 것인지, 어떤 자격을 갖추어야 하는지에 대한 기준을 정하기는 어렵다. 은 그런 고민이 담겨 있는 소설이다. 대학교지 편집 부원이었던 희영은 기지촌 여성이나 가정 폭력에 대한 글을 쓰고 싶어 한다. 희영은 당연히 그런 삶을 경험해보지 못했다. 대학생이고 심지어 좋은 구두도 신고 다닌다. 희영은 자신이 속하지 않은 계급의 문제를 사회적이면서도 공적인 자리로 끌어내어 해결책을 제시하기 원한다. 희영은 입장이 다르고 그들과 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로 거절당한다.

 

직접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그럴 자격이 없는 것일까? 가난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 가난한 사람을 위하고, 폭력을 당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 폭력을 당한 사람을 이해하고, 차별받아 본 적이 없는 여성이 페미니스트가 되는 것이 그렇게 오만하고 위선적인가? 예수처럼 십자가에 못 박혀야만 사람의 죄를 대신하고 그들을 사랑하는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희영과 해진은 미군에게 살해당한 어느 기지촌 여성의 오 주기 추모 집회에서 주한미군의 범죄를 성토하고 미국에 제대로 항의조차 하지 못하는 정권을 규탄하려 모인 사람들이 외치는 구호에 경악한다. “범죄는 모국에서! 그러자 누군가 조금 작은 소리로 따라 외쳤다. 강간은 미국에서!(p.70)” Fucking USA. ‘구호도 그렇지만 주변에서 옅게 퍼지던 웃음소리도 충격적이다. 입장만 바뀌면 강간은 어디서나 가능하다는 생각과 여성 문제를 단지 이슈로써만 이용한다는 사실이 허망하다. 뜻을 같이 하는 조직 안에서도 넘지 못하는 이해와 감정의 폭이 존재한다는 것, 그것으로 서로를 찌르고 분열하는 모습이 지금의 시국을 보는듯해 안타까웠다. 먼 훗날 누군가는 죽고 남아있는 자는 한없이 초라해질 때, 떠오르는 과거에 대한 회한은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최은영은 의 화자인 해진을 라고 지칭한다. 내가 너로 표현되고 불리는 것은 나를 객관화시키는 것이다. 너라는 나를 보며 미흡하고 비겁하다고도 생각하지만 너에 대한 연민과 초라함을 느끼기도 한다. 의 해진과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의 희원은 자신과 사람들의 관계를 통해, 글쓰기에 대한 고민으로 성장해 간다.

 

[정윤의 글을 읽은 당신은 그 글을 읽기 전의 당신이 아니었다. 당신은 그런 글을 쓰고 싶었다. 한번 읽고 나면 읽기 전의 자신으로는 되돌아갈 수 없는 글을, 그 누구도 논리로 반박할 수 없는 단단하고 강한 글을, 첫 번째 문장이라는 벽을 부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글을, 그래서 이미 쓴 문장이 앞으로 올 문장의 벽이 될 수 없는 글을, 언제나 마음 깊은 곳에 잠겨 있는 당신의 느낌과 생각을 언어로 변화시켜 누군가와 이어질 수 있는 글을.

- ‘’, p.52]

 

이 책의 나머지 소설에도 여러 관계가 있다. 직장 상사와 비정규직 직원인 지수와 다희, 언니와 여동생, 앞으로 만나지 못할 것이 확실한 조카에게 이모가 쓰는 부치지 못하는 편지, 소리와 그녀의 엄마와 삼촌인 민주와 민혁, 서로 다르게 기억되는 모습들, 희진과 이모 숙희, 기남과 그녀의 차가운 딸인 우경, 기남 남편의 전처의 딸인 알코올 중독자 진경, 기남에게 부끄러워해도 된다고말해주는 우경의 아들 마이클......

 

끊어낼 수 없는 관계에, 기억에, 고통과 폭력에 온통 어둡고 음울했지만 사람이 있는 자리에 무조건 있기 마련인 따뜻함과 희망은 책을 읽다가 마음 아파 눈물 흘리던 나를 건져 주었다. 소설 속 많은 곳에서 발견한 나의 부끄러움도 마이클의 한 마디에 위로 받을 수 있었다.

 

촘촘하고 치밀한 각 소설에 대한 감상을 적기가 너무 어려웠다. 써야 할 것이 넘쳐 그 중 무엇을 가져오고 어떻게 써야 할지 암담했다. 그래도 뭔가를 조금이라도 써야한다는 강박에 감상을 적었지만 오히려 아무것도 가져오지 못한 것 같다. 당연한 말이지만 소설은 그저 읽어야 하는 것이다.

 

[“부끄러워도 돼요. 부끄러운 건 귀여워요.”

 

따뜻한 통증이 기남의 등과 배에 퍼져나갔다. 기남은 마이클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면서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이클은 자신을 몰랐고 자신이 살아온 시간을 몰랐다. 하지만 그 순간, 자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그애가 오히려 자신보다 자신을 더 많이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 건 무슨 이유였을까. 부끄러워도 돼요. 기남은 그 말을 믿을 수 없었다. 한 번도 기대하지 않았던 말, 기남은 그 말을 잊을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 p.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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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4-01-22 16: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 저도 읽어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페넬로페 2024-01-22 18:15   좋아요 1 | URL
폴스타프님의 감상 기대하겠습니다.
좋은 느낌이면 좋겠습니다^^

Falstaff 2024-04-04 17:21   좋아요 1 | URL
이거 참. 난감하게 됐습니다. 5월 첫 독후감으로 올릴 거 같은데, 저하고는 극적으로 맞지 않더군요. 흑흑흑.....

페넬로페 2024-04-04 17:59   좋아요 1 | URL
폴스타프님께는 이 작품이 좀 그렇지 않을까라는 예상을 했어요 ㅎㅎ
5월에 올려주시는 리뷰 잘 읽어 보겠습니다^^

새파랑 2024-01-22 19:1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야 저 지금 이 책 읽고 있는데 ^^ 찌찌뽕 입니다. 절반 넘게 읽었는데 내용이 좀 무겁지만 좋더라구요~!!

페넬로페 2024-01-22 19:59   좋아요 1 | URL
새파랑님께서도 읽고 계시는군요.
최은영 작가 좋아해서 벌써 읽으신 줄 알았어요.
생각보다 무거운 내용이 많았지만 글의 힘이 역시나 좋았어요.

미미 2024-01-22 19:3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 책 리뷰 많이 올라와도 크게 관심 없었는데 페페님 글을 읽으니 꼭 읽어봐야겠어요!
페페님이 사고의 폭을 넓히려 애쓰시는걸 저는 종종 느껴요. 글에서, 댓글에서도~^^♡

페넬로페 2024-01-22 20:01   좋아요 3 | URL
미미님의 사고의 폭의 확장을 따라가기엔 아직 멀었습니다.
제가 워낙 소설을 좋아해 이 책이 좋았는데 미미님께도 보람있는 독서가 되었으면 합니다^^

그레이스 2024-01-22 22: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읽다 멈췄는데 마무리 해야겠네요^^

페넬로페 2024-01-23 00:23   좋아요 1 | URL
좋은 문장이 많아 계속 읽게 되더라고요^^

희선 2024-01-23 02: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신이 경험해야만 어떤 글을 쓰는 건 아니겠지요 거기에 관심을 갖고 공부하고 쓴다면 괜찮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듭니다 다 알지 못한다 해도 알려고 하는 마음이 있다면... 최은영 소설은 슬프면서도 마음 따듯하게 해주는 듯합니다


희선

페넬로페 2024-01-23 07:29   좋아요 1 | URL
희선님 말씀처럼 최은영의 소설이 슬프면서도 마음 따뜻해 계속 읽는가 봐요. 문장도 좋고요.
인간의 경험을 넘어서는 것도 많을 것 같아요. 관심 갖는 마음과 함께요.
 
콜롬비아 나리뇨 산 로렌조 - 200g, 홀빈
알라딘 커피 팩토리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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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겨울엔 유달리 눈이 많다. 눈 오는 날의 운치는 커피와 함께....커피를 마시며 집 밖에서 활동해야 하는 가족의 안전도 걱정한다. 로렌조 커피를 드립해 텀블러에 담아 학교에 가는 딸아이의 가방에 넣어 주었다. 따뜻한 커피 한 모금에 눈 오는 날의 내 마음이 담겨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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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오 2024-01-09 20:2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는 학교에서 잠이 안올까봐(....) 우엉차를 들고다녔습니다. 엄마가 아침마다 커피 대신 끓여주셨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

페넬로페 2024-01-09 21:25   좋아요 2 | URL
우엉차의 효능이 엄청 많은데 잠이 안 올까봐 미리 걱정해주는 효과도 있군요. ㅎㅎ
은오님께서 영특하신 이유가
어머니께서 정성스럽게 끓여주신 우엉차 덕분이었군요🥰👍

독서괭 2024-01-11 18:26   좋아요 2 | URL
아침마다 우엉차 끓여 챙겨주며 애지중지 키운 딸이 곰탱이가 되어 2093년의 약속에 기뻐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머님은 알고 계신지.. ㅜㅜ

은오 2024-01-11 18:52   좋아요 1 | URL
엄마 미안.... 2093년까지 기다려야 한다니 괴롭지만
나 그 사람 아니면 안되겠어.

페크pek0501 2024-01-10 19:3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님의 마음이 충분히 담겨 있을 것 같습니다...^^

페넬로페 2024-01-10 21:01   좋아요 1 | URL
제 맘이 들어있는 따뜻한 겨울, 페크님께도 전합니다^^

그레이스 2024-01-12 18:2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 지금 페넬로페님께 너무나 친근하게 댓글 달고 왔어요. ㅎㅎ
나오고 보니 어 왜 친구가 아니지?
다른 분이었네요.

페넬로페 2024-01-12 18:40   좋아요 2 | URL
어, 동명이인에게 그레이스님 뺏기는 건가요?
닉네임 페페로 바꿀까 고민중입니다~~
근데 딸아이가 그냥 줏대 있게 살라고 해서요 ㅎㅎ

그레이스 2024-01-12 18:42   좋아요 2 | URL
저도 그냥 페넬로페가 잘 어울리시는 것 같아요

서곡 2024-01-14 10: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페넬로페님 ㅎㅎ 일요일 잘 보내시기 바랍니다!!!

페넬로페 2024-01-14 12:52   좋아요 1 | URL
날씨가 흐린 일요일이네요.
비나 눈이 많이 온다고 합니다.
서곡 님!
즐거운 주말 보내시길 바래요^^
 
이처럼 사소한 것들
클레어 키건 지음, 홍한별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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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살아가면서 필요한 최소한의 것들-먹고, 입고, 자고 쉴 수 있는 공간, 사람이라면 해야 할 당연한 행동, 예컨대 주머니에 남아있는 잔돈 정도는 가난한 사람에게 주저하지 않고 줄 수 있는 마음, 부조리하고 폭력적인 것에는 화내고 맞서야하는 용기, 웬만하면 나와 관계를 맺는 사람들과 척을 지지 않고 사는 것-은 중요하지만 너무 당연해 사소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사소하게 보일 정도로 기본적인 것을 일상적으로 유지하기가 쉽지 않고, 많은 사람들은 이 조차도 갖지 못해 매번 허덕이며 살아간다.

 

빈주먹(p.15)으로 태어났지만 운 좋게 석탄목재상으로 빚 없이 그럭저럭 살게 된 빌 펄롱은 아내와 다섯 아이를 둔 가장으로, 가정을 굳건히 지키기 위해 주위의 모든 것을 모른 척하며 눈을 감고 살아야 한다. 1985, 아일랜드의 경제가 혹독하게 힘들었을 때, 자칫하면 모든 걸 다 잃을 수 있는 시기였을 때, 그나마 따뜻하게 살고 있는 펄롱이지만 그의 마음은 언제나 편치 않다. ‘이렇게 사는 것이 옳은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자신에게 던지며 그에 따른 가책을 느낀다.

 

클레어 키건의 소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아일랜드의 막달레나 강제 세탁소(수용소)’를 소재로 했지만 그 내용보다는 빌 펄롱이라는 인물의 마음과 생각을 함께 따라가고 느끼며 읽게 된다. 매 페이지마다 멈춰 사람 사는 것에 대한 생각을 하게하며, 거기에서 오는 수많은 상념과 심란함으로 한숨이 쉬어졌다. 밤마다 잠에서 깨어 자신을 돌아보고 고민하는 펄롱의 양심, 별로 잘나지도 않은 인생에, 자신에게 주어진 더 나아질 것 같지도 않은, 보잘 것 없는 딱 그만큼조차 잃지 않고 지키기 위해, 침묵하고 모른 척 하며 살아야 하는 삶에 대한 회한이 나의 고민과 다르지 않았다.

 

펄롱의 딸들이 다니는, 다른 딸들도 앞으로 다니기를 원하는 세인트마거릿 여자 중학교와 담벼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직업 여학교와 세탁소는 선한목자수녀회가 운영하는 곳이다. 말이 여학교이지 사실 이곳은 교화를 목적으로 들어 온 가난한 어린 미혼모들이 갇혀서 새벽부터 한밤중까지 더러운 세탁물에서 얼룩을 씻어내는 노동을 하는 수용소에 가까운 곳이었다. 이들이 낳은 아기는 미국이나 오스트레일리아로 돈을 받고 보내진다. 선한 목자라고 이름 붙여진 곳에서 아이를 팔아먹고 돈을 버는 것이었다.

 

종교가 무엇인가를 생각한다. 하루 세 번 울리는 종소리에 일손을 멈추고 드리는 삼종 기도에 사람들은 하느님께 무엇을 기도하는가? ‘너희 가운데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이에게 해 준 것이 내게 해준 것이다라는 그리스도의 말을 뉴로스의 사람들은 무시한다. 아일랜드 모자 보호소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았으면서도 그들은 침묵했으며 자신들과는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미시즈 케호가 말했다.

하지만 자네 정말 열심히 살아서, 나만큼이나 열심히 해서 여기까지 온 거잖아. 딸들도 잘 키우고 있고, 알겠지만 그곳하고 세인트 마거릿 학교 사이에는 얇은 담장 하나뿐이라고.”

-p.106]

 

얇은 담장 하나처럼 삶을 떠받치는 것이 불안정한 사람들에게 그 얇음은 언제라도 깨지기 쉽다. 그나마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뒤를, 주위를 돌아보아서는 안 된다. 권력자의 눈 밖에 나서도, 알고 보면 다 한통속(p.117)’인 사람들의 미움을 받아서도 안 된다. 이렇게 살 수밖에 없는 하찮고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을 쉽게 비난할 수도 없다. 그것이 거의 우리 모두의 자화상이기 때문이다.

 

펄롱은 나랑 같이 집으로 가자, 세라.(p.116)”라고 하며 자신의 마음이 시키는 대로 했지만 확신하지 못하고 마음의 갈등을 느낀다. 사람들의 싸늘한 태도에 신경 쓰고, 최악의 상황이 시작되었다고 생각하며 고생길을 예상하며 그냥 그만 두고 싶다는 생각도 한다. 그럼에도 신발도 신지 않은 세라를 데리고 나오는 그의 마음은 편해진다. 펄롱의 선택에 나는 무조건적인 응원을 보내지는 못했다. 펄롱이 자라오면서 받은 도움과 그것에 대한 빚을 갚고자 하는 그의 선택이 가져 올 좋지 않을 대가가 고스란히 그의 가족에게 갈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도 하지 않은 일을 펄롱이 먼저 함으로써 세상이 서서히 달라질 것임을 믿는다.

 

[펄롱은 차를 세우고 노인에게 인사를 했다.

이 길로 가면 어디가 나오는지 알려주실 수 있어요?”

이 길?” 노인은 낫으로 땅을 짚고 손잡이에 기댄 채 펄롱을 빤히 보았다.

이 길로 어디든 자네가 원하는 데로 갈 수 있다네.”

-p.54]

 

우리는 모두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다.

어디로 갈 것인지, 어떤 길을 선택할지는 각자의 몫이다.

 

작가 클레어 키건의 하지만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소녀와 여성이 수감되어 강제로 노동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거의 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지에 대한 질문(경향신문, 2023, 12, 08)”에 대한 답과 계속 버티고 조용히 엎드려 지내면(p.24)’ 마음이 불편하고 행복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침묵하지 않고 내가 할 수 있는 조그만 것이라도 용기 내어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펄롱을 나락에 빠뜨리지 않는 것이다.

 

[문득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나날을, 수십 년을, 평생을 단 한 번도 세상에 맞설 용기를 내보지 않고도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부르고 거울 앞에서 자기 모습을 마주할 수 있나?

-p.119]


-사진 출처(경향신문, 2023.12.08., 임지선 기자), 아일랜드의 막달레나 세탁소(수용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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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곡 2023-12-25 15:3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페넬로페님...성탄절의 참된 의미가 새삼 무겁습니다 오늘 잘 보내시기 바랍니다!

페넬로페 2023-12-25 16:05   좋아요 2 | URL
마침 이 책의 배경도 크리스마스이고 지금 우리도 성탄을 맞이하고 있어 그 의미가 새로웠습니다.
작가가 주는 메시지가 의미 있어 좋았어요
서곡님께서도 남은 연휴, 잘 보내시길 바래요^^

꼬마요정 2023-12-26 00:1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마음이 아프네요. <맡겨진 소녀>도 맘이 좀 아팠지만 이 책은 더 아플 것 같아요. 읽어보고 싶네요.

페넬로페 2023-12-26 05:10   좋아요 2 | URL
네, 짧은 분량이지만 의미가 많이 담긴 책이라 좋았어요.
맡겨진 소녀와도 통하는 부분이 있었어요^^

서니데이 2023-12-26 06: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페넬로페님 연휴 잘 보내셨나요.
클레어 키건의 이 책 출간 소식은 들었는데, 이번에는 실제 사건을 소재로 한 거군요. 아일랜드가 지금은 소득이 높은 나라지만, 예전에는 경제적으로 많이 어려운 시기가 있었다고 들었어요. 크리스마스 시기가 등장해서 그런지, 연말에 읽으면 좋을 것 같기도 합니다.
잘읽었습니다. 따뜻한 연말 보내세요.^^

페넬로페 2023-12-26 10:30   좋아요 2 | URL
지금 아일랜드의 경제가 엄청 좋다고 하는데 신자유주의를 받아들인 것 같은 느낌도 들고요.
실제 사건을 소재로 했는데 주인공의 시선을 따라가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생각할 수 있어 좋았어요.
서니데이님!
따뜻한 연말 인사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얼음장수 2023-12-26 10: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김수영의 시도 떠오르고 여러가지를 생각나게 하네요. 잘 읽었습니다.

페넬로페 2023-12-26 10:33   좋아요 1 | URL
김수영의 시 구절이 떠오르네요.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책이었습니다^^

자목련 2023-12-26 10: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짧은 분량이라 읽는 건 바로 읽었는데 리뷰는 못 쓰고 있어요. 어쩌면 쓰지 못할 것 같기도 하고. 아직은...

페넬로페 2023-12-26 10:34   좋아요 1 | URL
짧은 분량인데 저도 이 글 쓰는데 며칠 걸렸어요.
그래도 자목련님의 리뷰 읽고 싶어요^^

페크pek0501 2023-12-26 15: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완독까지는 하겠는데 정말 리뷰를 완성하는 건 힘든 작업입니다.
페넬로페 님의 리뷰 완성을 응원하는 바입니다.^^

페넬로페 2023-12-26 17:54   좋아요 2 | URL
정말요.
책을 읽기는 쉬운데 매번 리뷰 쓰기가 너무 힘들어요.
페크님의 응원으로 더 열심히 읽고 글 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독서괭 2023-12-26 17:2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으아 쉽지 않은 소설이군요. 여학교를 빙자한 세탁소라니 으 ㅜㅜ 얼마전 읽은 <바람의 열두 방향> 속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이 생각나네요. 모른 척 하고 지내는 편안함을 버리고, 어려운 길로 나선 펄롱이 대단합니다.

페넬로페 2023-12-26 17:57   좋아요 1 | URL
읽기는 쉬운데 매 페이지마다 얼마나 많은 의미가 들어 있는지, 클레어 키건 작가가 대단해 보이더라고요.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과 의미가 통하네요.
우리들을 대신해 누군가가 희생해 주는 것이 이 시대에도 많은 거겠죠 ㅠㅠ

미미 2023-12-26 18:5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공감가는 대목들이 여럿 보입니다.
어제 용기에 관해 책에서 읽는 문장들도 떠오르고요. (하워드 진) 페넬로페님 별5개 주셨으니 저도 내년에 꼭 읽어보고싶네요~♡
연말 웃음가득하시길 바래요🙆‍♀️

페넬로페 2023-12-26 21:21   좋아요 2 | URL
책을 읽으면 주먹을 불끈 지지만 막상 용기를 내야 할 때엔 숨기 바쁜 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어요.
책을 읽으며 매번 달라져야 할텐데요 ㅠㅠ
미미님의 덕담으로 더 한층 웃음짓는 페페가 되겠습니다^^

희선 2023-12-28 00: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일랜드에서는 결혼하지 않은 사람은 아이를 낳지 못한다고 하고는 수녀원 같은 데서 일을 시키고 낳은 아이는 다른 나라로 입양 보내기도 했더군요 그걸 종교라는 이름으로... 막달레나 강제 세탁소는 실제 있었던 곳이기도 하군요

그런 곳이 있으면 있는가 보다 하는 사람이 더 많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자기 살기도 바쁠 테니... 펄롱은 그런 걸 아주 모르는 척하지 않았네요 그런 거 쉽지 않을 듯합니다


희선

페넬로페 2023-12-28 17:41   좋아요 1 | URL
보수적인 생각이 사람을 구속시켰고, 비참하고 폭력적으로 변질된 것 같습니다.

모른척하고 살지 않는 것, 정말 쉽지 않죠^^

캐모마일 2023-12-30 20: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일랜드 막달레나 수용소 영화로 만들어지고 역사, 미스터리 유투브로도 많이 봤습니다. 소설 제목이 낯익지만 그 내용일 줄은 몰랐네요. 장바구니에 넣어둡니다.

페넬로페 2023-12-31 00:49   좋아요 1 | URL
캐모마일 님께서는 벌써 알고 계셨네요.
저는 이 소설을 통해 알게 되었고
‘필로미나의 기적‘이라는 영화를 보게 되었어요.
다른 영화도 있는 건가요?
유튜브로도 봐야할 것 같아요^^

책친놈 2024-03-20 11: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첫문단 부터 공감가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너무 당연해서 사소하다고 생각하는것들을 되짚어보게 하는 책이었어요. 저는 책의 후반부에 ‘왜 가장가까이있는게 가장 보기 어려운걸까?‘라는 부분에서 <이처럼사소한것들> 이라는 제목과 맞물린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덕분에 책에대한 생각이 정리되는 느낌이라 잘 보고갑니다. 읽고서 리뷰 쓰는걸 미뤄와서 반정도만 쓰고 저장해놨는데, 페넬로페님 리뷰보고 오늘 꼭 써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ㅎㅎㅎ

페넬로페 2024-03-20 12:13   좋아요 1 | URL
<이처럼 사소한 것들>이라는 제목에 많은 의미가 담겨 있더라고요.
펄롱을 통해 저의 삶도 한 번 되돌아 볼 수 있었고, 사회적 이슈들과 약자들에 대해 회피하고 무관심한 것에 대한 반성도 하게 되었습니다.
그게 다 이처럼 사소한 내 것을 지키기 위해서더라고요 ㅎㅎ,ㅠㅠ
책친놈 님의 리뷰, 기대하겠습니다.
 
운명의 꼭두각시
윌리엄 트레버 지음, 김연 옮김 / 한겨레출판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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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 소설을 읽었을 때, 초반 부분은 약간 밋밋하게 읽혔다. 트레버 작가 특유의 담담하고 간결한 문장에 어떤 감정이 일어나지 않았고, 혹시 번역의 문제인가도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게 천천히 가다가 71페이지에서 갑자기 불안이 엄습했고, 78페이지에서 나의 심장이 쿵 내려앉아 버렸다. 무너졌다는 것이 더 맞는 표현일 것이다. 훅 들어오는 이 운명의 꼬임들 때문에 그 다음은 계속 슬픈 감정으로 책을 읽게 되었다. 언제나 불행할 수밖에 없는 폭력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은 고결하며 용기를 내게 하는 것임에도 따뜻함보다는 서늘한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 소설을 두 번째 읽었을 때, 처음의 밋밋한 느낌은 작가의 치밀한 전략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트레버는 이 책의 초반에 시대적 배경과 인물 하나하나의 성격을 지루할 만큼 자세하게 설명한다. 재독했을 때, 작가가 왜 이런 배치를 했는지가 완벽히 이해되었다. 인물 개개인의 성격과 관계, 또한 영국과 아일랜드의 오래된 반목의 역사를 모르고서는 이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똑같은 윌리엄이라는 이름을 가진 아일랜드의 퀸턴가와 영국의 우드컴 가문의 4대에 걸친 이 엄청난 이야기를 한 권의 책에 압축된 분량으로 서술한 트레버 작가는 역시나 대단한 소설가였다.

 

거의 750년 동안 영국의 지배를 받은 아일랜드는 처음엔 켈트족이 정착해 살던 나라였다. 기독교는 3~5세기 사이 성 패드릭에 의해 전파되었다. 그 뒤 바이킹족이 침략했으나 그들은 토착민의 문화에 잘 동화되었다. 앵글로-노르만이 아일랜드에 들어오고 그로부터 영국과의 기나긴 악연이 시작되었는데, 헨리 8세는 아일랜드를 더 강력하게 통치했고 종교개혁을 실시했다. 가톨릭교회의 재산을 몰수하고 수도원을 해체했다.

 

엘리자베스 1세는 플랜테이션이라는 식민정책을 시행하여 토착민으로부터 방대한 토지를 몰수하여 잉글랜드 귀족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신교도가 아일랜드로 이주했지만 그들은 예전의 다른 민족과는 달리 쉽게 토착민의 문화에 동화되지 않았다. 그들은 얼스터 지역을 장악했으며 결국 이곳은 지금의 북아일랜드로 아일랜드는 아직도 완전한 독립을 이루지 못했다.

 

식민주의자들의 수탈과 약탈은 언제나 지독했다. 전통적으로 농업 국가였던 아일랜드는 유럽의 산업혁명의 영향을 받을 수 없었다. 대다수가 소작농인 아일랜드인은 환금성이 강한 농작물은 거의 잉글랜드로 보내고 그들은 하루 세끼를 감자에 의존했다.

 

1845년부터 시작된 감자 잎마름병은 사람들을 굶주림에 의한 죽음으로 내몰았으며 전염병으로 무수한 사람들이 사망했고 고국을 떠나게 했다. 그 와중에도 영국은 아일랜드에서 재배한 감자를 제외한 작물을 배로 실어 날랐으며 그들의 굶주림을 외면했다. 7년에 걸친 대기근으로 아일랜드는 완전히 폐허가 되었고, 아일랜드어를 버려야 했으며 아일랜드인은 영국에 대해 극도의 증오를 가지게 되었다.

 

운명의 꼭두각시1차 세계 대전에 영국의 편에서 독일군과 싸웠던 아일랜드가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희망했지만 그 꿈은 이루지 못했고 서로간의 폭력이 계속되는 것이 중요한 시대적 배경이 된다. 영국은 전쟁에 투입되었던 아주 잔혹한 군인들인 블랙 앤드 탠즈를 아일랜드의 혁명을 제압하는데 다시 투입한다. 어느 시대에나 그랬듯이 아일랜드인 사이에도 내전과 반목은 존재했고 그것은 계속적인 폭력과 복수로 이어진다.

 

영국은 나쁘지만 영국인 한 사람, 한 사람을 보면 모두가 나쁜 사람은 아니다. 철천지원수의 나라지만 영국인인 애나 우드컴은 아일랜드 남자와 결혼했고, 킬네이에서 퀸턴 가문을 이끌었다. 그녀는 아일랜드의 대기근을 외면하지 않았고, 토지 대부분을 주변 사람들을 위해 내놓았다. 애나 우드컴의 증손자인 윌리의 어머니도 영국인이다. 킬네이가 있는 로크 지방은 가톨릭 교도와 신교도가 함께 살았고 그들은 일요일에 각자의 성당과 교회에 다닐 수 있었다. 가벼운 계급 사회가 존재했지만, 각자의 위치에서 자신의 신념을 유지한 채 평화를 유지하며 살 수 있는 곳이었다.

 

난세에 중립을 지키고, 평화주의자로 산다는 건 어렵다. 킬개리프 신부는 과격한 아일랜드의 제국주의 혐오자에 의해, 윌리의 아버지인 윌리엄 퀸턴은 영국의 블랙 앤드 탠즈인 러드킨 중사에 의해 자신이 선택한 인생을 살지 못하게 된다. 중립을 지키는 것만 어려운 것은 아닐 것이다. 어느 한 쪽을 선택한다고 해도 그들은 목숨을 담보로 한 상대방의 보복성 폭력에 항상 노출되어 있다. 그것만으로도 이런 시대를 사는 개인은 불행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밤에 잠자리에서 난 더 이상 흐느끼지 않았다. 무의식적으로 손톱을 써서 다른 손 손바닥을 쥐어뜯지 않고도 아버지와 여동생들을 생각할 수 있었다. 심지어 내가 그토록 많이 들었던 천국, 이제 궁금해 할 더 큰 이유가 생겼음에도 여전히 어렴풋한 땅으로 남은 천국에 있는 제럴딘과 데르드러를 상상할 수 있었다. 플린 부인과 팀 패디와 오닐도 그곳에 있다고 여겼다. 물론 나의 아버지도. -p78.]

 

윌리의 관점으로 서술된 이 소설의 78페이지가 이 소설의 다른 어느 부분보다 내게 많은 의미로 다가온 건 이런 상황에 놓인 윌리의 어머니인 에비 퀸턴의 입장을 많이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 역시 엄마이기에 마음이 너무 안 좋았다. 그 뒤로 계속되는 에비의 행동과 결국 아들을 사지로 몰아넣는 것까지 다 이해될 정도였다.

 

이런 일을 당했을 때, 엄마의 역할은 대개 두 가지이다. 맨 정신으로는 살아갈 수 없는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윌리를 위해 정신을 차리고 자신을 수습하며 아들의 미래를 챙겨야 한다는 것이다. 이 세상의 엄마들이 위대한 건 대개 후자를 선택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전자를 선택한 에비의 입장을 너무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총으로 사람 하나 죽이는 게 전혀 이상할 것 없는 세상에 왜 누군가가 러드킨 중사를 쏘지 않았는지 의아해할 수 있다. 사람들이 이 남자에게 복수해주지 않는 것에 좌절한다. 자신과 같은 영국인이 가족을 죽였다는 생각도 이 여자를 미치게 했을 것이다. “단호함은 거의 효과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상실이 너무 깊어서 종종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을 때가, 어떤 위로도 소용이 없을 때가 있습니다.(195.)”라는 킬개리프 신부의 말이 정확하다. 에비에게 닥친 상실은 운명을 뛰어넘는 것이다.

 

이 소설은 이종 사촌간이며 서로를 사랑했던 윌리, 메리앤과 그들의 딸인 이멜다의 관점으로 순서대로 서술된다. 운명의 수레바퀴 아래서 어느 누구도 그 굴레를 피해갈 수 없었지만 그 모질고 질긴 인연과 인생의 힘듦을 이겨내고 계속 이어갈 수 있는 힘은 결국 사랑이었다. 윌리와 메리앤 뿐만 아니라 이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 모두의 바탕에는 사랑이 깔려있다.

 

이멜다는 킬네이에서 아버지 없이 성장하고 신교도임에도 가톨릭 학교를 다니고 있다. 자신이 살고 있는 곳과 주변이 온통 과거의 운명의 그늘에 휩싸여 있다는 걸 직감하며 비밀을 찾아다닌다. 이멜다를 통해 이 집안의 운명의 흐름이 다시 복기되며 그것은 고스란히 이멜다의 삶을 잠식한다.

 

이멜다는 볼료냐의 성녀 이멜다 람베르티니와 축일을 나누었는데, 성녀는 첫 영성체를 하기 전에 감실 앞에서 성체가 떠 있는 것을 보고 그것으로 영성체를 한다. 그 뒤로 성녀는 세속으로 돌아오지 않았는데, 이 소설의 이멜다 역시 집안의 마지막 운명의 기운을 고스란히 받아들여 세속의 삶을 살 수 없게 된다. 윌리와 메리앤은 노년에 이르러서야 다시 재회하게 되고 그들은 같이 딸의 불행을 지켜낸다.


-p12. ‘아일랜드역사 다이제스트 100’, 한일동, 가람기획

 

[어머니는 이상한 말을 했다. 지도를 보고 있노라면 아일랜드와 영국이 꼭 연인처럼 보인다고. “라니건 씨,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세요? 신기하게도 포옹을 떠올리게 하지 않나요? 이 모든 상황을 만들어낸 가장 특별한 포옹.”

포옹이라고요?”

제가 아일랜드식 환상에 너무 도취했다고 생각하시나요? 킬개리프 신부는 그렇게 생각하죠. 다른 사람들도 그렇고요. 하지만 전 이제 이 모든 것의 일부예요. 제 열정을 어쩔 수 없어요.” -p.287]

 

아일랜드와 영국의 지도를 보면 포옹까지는 아니더라도 친밀하게 마주보고 있다. 어쩌면 키스를 하고 있는 모습인 것 같기도 하다.

 

불행이 뻔히 보이는데도 지옥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을 윌리의 아버지인 윌리엄 퀸턴 씨는 운명의 꼭두각시라고 부른다. 사랑이든, 숙명이든, 선하든, 악하든 그 어떤 이유에도 운명은 결과에 관대하지 않다. 윌리엄 트레버 작가는 킬개리프 신부를 통해 그가 하고 싶은 말을 한다. ‘살인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것이며, 전쟁은 어리석고, 논쟁과 설득만이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이 세상에서 자행되는 폭력은 그것이 어떤 이유이든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상처와 원한만 남길 뿐이다. '운명의 꼭두각시'로 살 수밖에 없는 우리들이 킬개리프 신부의 말을 계속 새기며 살아가야 할 당위가 여기에 있다. 

 

 *아일랜드 역사 부분은 한일동의 아일랜드역사 다이제스트100』(가람기획, 2019년)에서 참고해 정리해서 썼고 페이지는 생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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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3-11-19 14: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역시 엄청난 페넬로페님의 리뷰~!! 저도 윌리의 엄마의 분노가 이해가 되면서도 안타까웠어요. 우리가문이 아일랜드를 위해 한게 엄청난데, 왜 아무도 복수를 안하는거지? 이런 느낌? 윌리는 뭐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는 생각도 들고..

저도 이 책 읽고 인터넷으로 아일랜드 정치랑 종교를 찾아봤습니다 ㅋㅋㅋ

이 작품은 소설을 넘어선 아일래드의 역사서라고 생각합니다~!!

페넬로페 2023-11-19 16:29   좋아요 2 | URL
한 권의 책에 트레버 작가가 써 놓은 내용이 너무 많아 그걸 다 글에 나타내는게 불가능하다고 생각되어 그저 제 느낌대로 썼습니다.
아일랜드의 역사도 참 불행한 일이 많았는데 그러한 일을 겪었을 개인들의 가슴엔 얼마나 많은 한이 있었을지 ㅠㅠ

네 정말요.
소설을 넘어선 역사입니다^^

거리의화가 2023-11-19 16:4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페넬로페님 리뷰 읽으니 이 책은 저도 접근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페넬로페 2023-11-19 17:02   좋아요 2 | URL
네, 이 책은 역사의 시각으로 읽어도 되고 여성의 시각으로도 좋아요. 읽으면서 열불이 많이 났습니다. 그걸 다 옮기기가 역부족 이었어요.

미미 2023-11-19 21: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아는 이니스프리가 저 이니스프리에서 왔을까요ㅋㅋㅋ

아일랜드의 역사가 우리의 역사와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많다고 어디선가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페넬로페님 리뷰 읽으니 마음이 급해지네요. >.<

페넬로페 2023-11-19 21:46   좋아요 1 | URL
이니스프리섬은 아일랜드 출신의 시인인 예이츠의 고향 쪽에 있는 호수섬이라고 해요.
이 책에도 언급되어 있어 인용해 보았어요. 떠돌아 다녀야하는 주인공 월리의 마음같았어요.

아일랜드가 여러가지 면에서 우리나라와도 비슷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도 합니다.
미미님의 감상도 얼른 듣고 싶어요^^

희선 2023-11-20 01: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람은 누구나 역사에 영향을 받겠습니다 그런 걸 더 많이 받을 때가 있지 않나 싶기도 합니다 여기에서는 전쟁이 아닐까 싶네요 전쟁뿐 아니라 종교도... 아일랜드는 결혼하지 않고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법도 있었더군요 그런 사람이 아주 없지 않았겠지만, 그런 사람은 수녀원에 들어가서 일하고 아이를 낳으면 다른 곳으로 입양 보냈더군요

전쟁이 일어났을 때 다른 사람을 죽이지 않을 수 있을지,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죽고... 그런 거 생각하면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합니다 여전히 전쟁은 일어나고 쉽게 끝나지도 않네요

페넬로페 님이 쓰신 글을 보니 아일랜드가 한국과 비슷한 면이 있기도 하군요


희선

페넬로페 2023-11-20 09:30   좋아요 1 | URL
사람은 정말 역사에 영향을 많이 받지요. 아일랜드가 핍박받은 민족이지만 ‘밀크맨‘같은 책을 읽어보면 참 통제가 많은 나라였다는 생각도 들어요. 이 소설은 어떤 전쟁에 대한 건 아닌데 전쟁같은 삶과 비슷할 것 같아요. 어쨌든 폭력은 서로에게 끝이 나지 않는 일인 것 같아요.

2023-11-20 01: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11-20 09: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11-20 11: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11-20 14: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서니데이 2023-11-22 06: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윌리엄 트레버 책이 올해 가을에도 신간으로 나왔네요. 그러고보니 표지를 본 것 같기도 해요.
이 책 시리즈를 전에 샀는데, 다른 책보다 판형이 작았어요.
사진을 보니 기억이 맞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페넬로페님, 따뜻하고 좋은 하루 보내세요.^^

페넬로페 2023-11-22 08:35   좋아요 2 | URL
한겨레 출판사의 트레버 시리즈의 판형이 디자인은 좋은데 읽을 때 양손에 꼭 잡고 읽어야해서 조금 불편했어요.

이번 주 날씨는 따뜻해서 좋은 것 같아요. 또 추위가 몰려 오겠죠.
서니데이님!
건강하고 행복한 하루 보내시길 바래요^^

희선 2023-12-09 01: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페넬로페 님 또 축하합니다 십이월에 일어난 좋은 일이군요 살면서 좋은 일이 일어났을 때 기뻐하기도 해야겠네요 그것만 생각하는 게 좋겠습니다

페넬로페 님 남은 십이월 책도 만나면서 즐겁게 건강하게 보내세요


희선

페넬로페 2023-12-10 10:36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희선님^^
 
슬픈 짐승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9
모니카 마론 지음, 김미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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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테의 신곡 지옥 편 중 제5(2)에는 사랑 때문에 삶을 마친 영혼들이 나온다. 그들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무섭게 휘몰아치는 바람에 휩쓸려 다니는 벌을 받는다. 이곳에서 부는 바람인 라 뷔페라 인페르날(la bufera infemal)은 멈춘 적이 없고 난폭하게 영혼들을 몰아붙이며 뒤집고 흔들면서 괴롭히고, 그들은 고통스럽게 태풍에 끌려 다닌다.(p.41~42, 신곡, 지옥, 단테, 열린책들)

 

시동생과 형수 사이인 파올로와 프란체스카도 서로 사랑하게 되었고, 남편인 잔초토는 두 사람을 죽인다. 지옥에서 그들 역시 쉬지 않는 바람에 휩쓸려 다니고 있다. 단테는 얼마나 달콤하고 큰 욕망이 있어야 이런 사랑을 선택할 수 있는지 궁금해 한다. 지옥에서만 함께 있을 수 있는 파올로와 프란체스카는 벌을 받으면서도 행복했을까?

 

 

사랑에 대한 기억만을 간직한 채, 소설속의 나는 세상과 단절한다. 그저 인생에서 놓쳐서 아쉬운 것은 사랑밖에 없다(p.20)’는 자신이 내린 씁쓸한 답만을 껴안고 산다. 그렇게 살아가다 지금은 머리에 떠오른 생각들이 사십 년 전의 것인지, 육십 년 전의 일인지도 잘 모르는 상태로 늙어버렸다.

 

프란츠와 화자는 각자 결혼한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은 우연히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때부터 화자에게는 프란츠와의 사랑이 전부였지만, 대다수의 남자들이 그렇듯 프란츠는 아니었다. 프란츠는 자기 아내는 불행에 단련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아내를 떠날 수 없다고 한다. 이 남자는 화자를 찾아 와 사랑을 나누고 밤 12시 반이면 어김없이 그의 아내에게로 돌아가는 사람이다.

 

화자의 사랑은 점점 집착으로 변해간다. 프란츠가 아내와 함께 스코틀랜드의 하드리아누스 방벽을 보기위해 여행을 가게 되었을 때, 공항으로 가서 프란츠의 아내가 어떤 사람인지 훔쳐본다. 그들이 여행지의 호텔에서 섹스하는 장면과 갈 만 한 곳, 다정한 행동들을 상상한다. 프란츠의 아내를 미행하며, 그녀 행동의 특징들을 살펴보기도 한다.


[브라키오사우루스 앞의 작은 감독관 의자에 앉아 있는 동안 우스운 내 상황을 의식하면서도 나는 이성을 찾을 수 없었다그때 잊고 있던 시구 하나가 내 머릿속에 서서히 떠올랐다. .........‘그러나 두 가지 중에서 재빨리 한 가지를 결정했어요그대를 차지하거나 아니면 죽는 것.’ 펜테질레아에 나오는 문장이었다. -p.106]

 

우리에게 어떤 방식으로든 사랑이 찾아오면, 그것이 순수한 상태로 지속되는 것은 짧은 순간에 불과하다. 화자의 연인인 프란츠가 화자의 집에 오면 항상 여러 식육식물들에 둘러싸여 있다. 이 소설에서 식육식물은 화자와 프란츠 사이를 암시하는 단어인 것 같다. 사랑 또한 식육식물처럼 두 사람이 자라온 환경, 생각과 이데올로기, 관습, 습관 등을 빨아들인다. 이것은 사랑을 변화, 왜곡시키고, 결론을 불행하게 만들기 쉽다.

 

동독에서 자란 화자는 자신이 기이한 시대를 살아냈다고 생각했다, 서독 사람인 프란츠와는 완전 다른 시대를 살았다. 화자는 불행했고, 현재가 아닌 미래의 삶과 자유를 얻는 것을 꿈꾸었다. 박물관에 박제되어 있는 거대한 브라키오사우루스를 관리하며, 언젠가는 매사추세츠 주 사우스해들리에 있는 플리니 무디의 정원으로 가 살아 움직였던 새의 발자국을 보기 원한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지 않았다면, 화자와 프란츠가 만날 수 없었겠지만, 이 장벽 때문에 그들의 사랑에는 무수한 벽이 있을 수밖에 없다. 찬송가를 전혀 모르는 화자는 프란츠에게 러시아어로 스탈린 찬가를 자신 있게 불러 줄 수 있었다.

 

모니카 마론의 슬픈 짐승』은 사랑에 관한 소설이다. 나는 화자가 선택한 삶을 완벽히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소설에는 기이한 시대에 예속되어 있던 사람들(p.151)에 대한 여러 이야기들, 그들과 화자가 느꼈던 허무와 상처들이 섞인 상황이 있다. 이 내용들이 화자의 감정, 프란츠와의 사랑과 잘 어우러져 식상할 수 있었던 것을 상쇄해 주었다. 소설을 읽어갈수록 점점 이 소설의 화자에게 연민을 가질 수 있었다.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고 자유를 얻었을 때, 화자는 자신의 이상향이었던 플리니 무디의 정원으로 가기 위해 뉴욕으로 떠난다. 뉴욕은 아늑했고 프란츠마저 생각나지 않게 해주었다. 그곳에서 잠시 평화롭게 지냈지만, 어느 날 화자는 검은 색 자동차에 치일 뻔한 일을 당한다. 죽음 직전의 상황에서 프란츠가 생각났고, 자유를 누리는 혼자인 삶보다 사랑이 있는 지옥의 삶을 다시 살기 위해 프란츠가 있는 곳으로 돌아온다.

 

뉴욕에서는 아무도 그녀의 마음과 존재를 알아주지 않고, 프란츠에게 자신의 처지와 고통을 각인시켜 줄 수도 없었다. 이 도시에서 느낀 부자연스러움은 인간은 자유보다는 사랑을 택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고 자신이 더 뻗어나갈 수 없다는 한계를 인정하게 해준다. 눈앞에 있음에도 꿈꾸었던 이상향으로 가지 않고 다시 지옥으로 돌아가는 인간은 미련하지만 숙명을 받아들이는 슬픈 짐승이다. 이 소설은 그런 과정을 잘 담고 있으며, 결국 슬픈 짐승은 화자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삶을 선택하는 우리 모두인 것이다.


[순수한 감사의 시간은 사랑의 첫 단계이다어떤 사랑이나 그럴 것이다어떤 사람이 우리를 변화시키는 데 성공한다우리가 원했던또는 심지어 우리 안에 파묻혀 깨어나지 않은 채 숨어 있던 특성들이 우리가 사랑에 빠지는 순간 우리가 더불어 사는 데 익숙해 있던 다른 특성들을 몰아낸다우리는 스스로를 다시 인식하게 된다우리는 더 아름다고 더 부드럽고 현명하다우리는 우리의 소심함과 우리의 악의에서 구원된다우리는 가장 사악한 적도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다우리의 행복으로 모든 나무와 모든 거리와 모든 순간을 환하게 비추고 그때까지 발견하지 못했던 그것들의 아름다움에 대해 경탄한다우리는 마침내 이 세상에 속해 있고 또 마침내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다. -p.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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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3-11-03 19: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그래서 나쁜 남자가 늘 인기인걸까요? ㅋㅋㅋ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각자가 나름의 지옥을 추구하는 것은 어쩜 숙명인것도 같습니다.

페넬로페 2023-11-03 20:05   좋아요 2 | URL
저한테는 좀 그래 보였는데 화자에게는 운명으로 다가 왔겠죠 ㅎㅎ
사랑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선택하는 것들이 이상향보다는 지옥행이 더 많을 것 같아요.
그게 인간의 삶이고 더 스펙타클하게 살 수 있지 않나 생각했습니다^^

새파랑 2023-11-04 09: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었던거 같은데 ㅋ 반전이 있었던거 같은데 기억이 안납니다 ㅡㅡ
그런데 이책을 읽었던 장소(카페)는 기억이 납니다 ㅎㅎ
사랑이 집착으로 변하는건 당연한거 같으면서도 슬픕니다 ㅜㅜ

페넬로페 2023-11-04 09:47   좋아요 1 | URL
새파랑님 리뷰에 제가 쓴 댓글과 새파랑님 댓글 다시 읽어봤어요 ㅎㅎ
반전이 있는데 약간 애매모호하게 표현되었더라고요.
저도 그 부분은 그냥 제외시켰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