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약 내 묘비명 같은 것이 있다고 하면, 그리고 그 문구를 내가 선택하는 게 가능하다면, 이렇게 써넣고 싶다.
무리카미 하루키
작가(그리고 러너)
1949~20**
적어도 끝까지 걷지는 않았다
- 259쪽
풀 마라톤 완주 25회, 울트라 마라톤(100km 달리기. 오타 아니다. 100km가 맞다.)을 걷지 않고 완주한 러너가 남긴 '적어도 끝까지 걷지는 않았다'라는 문장이 어찌나 폼나던지, 풀 마라톤은 고사하고 하프 마라톤 경험도 없는 일천한 러너인 나도 항상 '적어도 끝까지 걷지는 않겠다'라는 생각으로 달려 왔다. 물론, 그 다짐을 지키기 위해 10km를 달리려던 계획이 7km나 5km로 줄어든 적도 제법 있었지만. 어쩌겠는가. 멈출지언정 다짐을 어길 수는 없다는 심정이었다. 풀 마라톤 경험이 없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러닝을 시작할 때 두 가지 결심한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첫째, 풀마라톤 완주 같은 목표는 애시당초 세우지 않는다. 나 자신과의 싸움은 이미 충분할뿐더러, 왜 굳이 풀코스를 뛰어야 하는지 동의가 안 되기도 했다. 건강을 위해 뛰는 건데, 무리하다 건강을 해칠 것 같기도 했고. 마라톤 풀코스가 100km였으면 거기에 맞춰 뛰어야 되는 거야라는 못난 심보였던 것 같다. 뭐, 요는 러닝만큼은 어떤 목표나 구속 없이 마음 내키는 대로 달리고 싶을 때 뛰고 싶은 거리만큼 낼 수 있는 속도로 해 보자, 나는 나의 러닝을 하겠다는 마음이었다. 사람은 참 안 변하지만 사람 마음은 쉽게 바뀌는 것인지, 올해 11월 하프 마라톤을 완주하는 것이 목표가 되었다. 그것도 1시간 50분이라는 시간 내에 들어오는 걸로. 지금의 나는 이런 목표를 가진 러너가 된 것이다. 계기는 없다. 그냥 달리다 보면 그런 마음이 생기기도 하는 건가 보다.
둘째, 장비에 돈을 쓰지 않는다. 안전과 관련된 신발을 제외하고는 장비에 투자할 마음이 없었다. 절약하고자 하는 마음이기도 했지만, 그게 러닝만의 매력이라 생각하고, 진정한 러너의 자세라고 생각했다. 고성능의 시계 차고 이런저런 액세서리 달고, 겉멋이라 치부했다. 그런 내가 가민을 샀다. 가장 기본 모델이긴 하지만 나로서는 놀라운 일이다. 아무래도 하프 마라톤을 준비하기 위한 체계적인 훈련을 위해 필요하겠더라.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가 이해할 수 없는 러너가 된 것이다. 시계 하나 차는 게 뭐라고 의욕이 더 생기기는 한다. 구비했으면 허투로 쓰지는 않는 게 또 나라는 사람이기도 하다.

가민에 적응할 겸 슬슬 달려보았다. 실시간으로 페이스와 심박수를 확인할 수 있다는 게 가장 도움이 된다. 기존의 런데이 어플을 쓸 때의 불편함이 싹 해소되었다. 목표한 하프 1시간 50분을 이 녀석과 함께 잘 준비해 봐야겠다.
처음 결심했던 풀코스 마라톤 도전하지 않기는 끝까지 지킬 수 있을까? 지금 마음으로는 그렇다, 이지만 자신은 없다. 내일의 나를 오늘의 나는 알 수 없다는 걸 이미 배웠으니까. 어쩌면 42.195km를 뛰겠다고 보스턴이나 베를린이나 시즈오카로 떠나는 날이 올지도 모르는 거다. 아니면 당장 하프 마라톤 완주도 목표한 기록을 못 낼 수도 있는 거다. 다만, 끝까지 걷지는 않을 생각이다. 그 생각은 한번도 변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