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 서가의 한 켠에는 '스시의 기술'이라는 너무하다 싶을 만큼의 담백한 책이 꽂혀 있다. 스시를 쥘 것도 아닌데, 좀 더 잘 먹어 보겠다는 마음으로 산 책이었다. 예상하는 대로 조금 읽다가 포기했다. 그래도 가끔 생선에 대한 정보를 찾을 때 꺼내서 보기는 한다. 모르겠다, 언제부터 고기보다 생선과 스시가 좋아진 건지는. 처음에는 생선 안주로 술을 마실 때가 고기 안주로 술을 마실 때보다 다음날 숙취가 적어서, 그리고 더 오래 마실 수 있어서였던 것 같긴 하다. 적고 나서 보니, 저 두 가지 이유라면 술 마시는 사람에게 정말 결정적인 것들이긴 하네. 평소에도 생선과 스시를 즐겨 먹지만 해산물과 초밥의 천국인 일본이 바로 옆에 있으니 가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다. 나한테 일본 여행의 다른 이유는 맛있는 해산물을 좋은 술과 함께 즐기는 데 있다.
이번 도쿄 여행에서는 긴자의 번화가에서 살짝 벗어난 곳에 위치한 스시호리노우치를 예약하고 방문했다. 29살의 동갑내기 부부인 카이토 상(남편)과 루미 상(아내)이 영업하는 가게다. 왜 스시의 격전지인 긴자에 가게를 차렸나고 물으니까, “긴자는 최고의 스시야가 몰려 있고, 여기서 최고가 되면 일본 최고의 스시야가 되는 거다. 나는 최고가 되고 싶다.”라는 웅장한 포부를 밝히셨다. 미소가 아름다운 카이토 상은 스시를 쥐고 좀 더 호탕한 웃음의 루미 상이 술과 서비스를 담당하는 구조. 나중에 들어 보니 실제로 카이토 상은 술은 거의 못하고 루미 상이 술을 아주 즐기고 잘한다고, 카이토 상이 루미 상이 카운터를 잠깐 비운 틈을 타서 엄마한테 형의 비밀을 고자질하는 동생처럼 알려줬다.
참치 중뱃살로 코스를 시작하는 강렬함, 꽤나 많은 전어를 먹어 봤지만 단맛과 감칠맛이 이렇게까지 폭발하나 싶을 정도로 주시한 전어, 압도적인 퀄리티의 우니가 특히 인상적이었고, 전체적으로 별다른 기교 없이 깔끔하고 단정하게 내어주는 게 특징적이었다. 여행자의 너그러운 마음이 작용도 했겠지만, 여러 번 감탄사가 나올 만큼 맛있었다. 옆에서 같이 먹던 S가 “야동 배우 같아요. AV KIM 어때요?”라고... 흠, 그 정도는 아니었다고 생각하지만, 그 정도로 보일 만큼 강렬한 리액션이었다면, 아름다운 일이다. 맛있게 먹고, 맛있게 먹었음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손님한테 뭐라도 하나 챙겨 주고 싶은 게 요리사의 마음 아니겠는가. 잠깐, 아무리 그래도 야동 배우는 쫌....ㅋㅋㅋㅋ. 보조 관념의 선택이 화자의 무의식과 일상적 습관을 드러낸다는 점을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다.
점심이지만 이렇게 좋은 음식이 있는데 술이 빠질 수는 없지 않겠는가. 또 여기는 도쿄이고, 종목은 스시니까, 사케를 한 잔 마셔야지. 주류 메뉴판을 봐봤자 아무 의미없다는 걸 알기에 처음부터 루미 상에게 추천을 부탁했다. 첫 사케는 지콘이었는데, 지콘이 이렇게 프루티했던가. 프루티하고 청량해서 시작으로 너무 좋은 선택이었다. 역시 술은 가게에 추천받아 마시는 게 정답이다. 두 번째 사케는 아라마사. 이게 말로만 들었던 그 아라마사구나, 하면서 마시는데 하아 진짜 맛있네. 나보다 사케를 더 모르는 S는 이미 아라마사에 빠져 있다. 앞에 것도 맛있었는데 이게 진짜 맛있다고. 그렇겠지. 그게 더 구하기 힘든 술인데 ㅋㅋ. 아라마사를 맛있게 홀짝이면서 짧은 지식으로 아라마사 중에서는 NO.6(넘버식스)가 아주 유명하다는 말을 하는데, 그걸 루미 상이 들었나 보다. 마침 가게에 NO.6가 있는데, 드릴까요 한다. 네네, 주세요, 두 번 세 번 주세요. 가게에서도 쉽게 구하기 힘들다는 말과 함께 NO.6를 따라 줘서 마시는데, 하아 여기가 극락이다. S도 이미 뭐 ㅋㅋ 음식 먹고 리액션은 크고 좋을지언정 이렇다 저렇다 설명은 많이 하지 않는 S도 NO.6를 마시고는 말이 많아진다. 비싼 술에 저렇게 열렬히 반응하는 혀라니, 너는 자본주의에 최적화된 게 틀림없구나. 열심히 더 열심히 일해서 비싼 술 많이 마시고, 다 마시기 힘들 때는 나한테도 좀 주고 그래 볼까?
편안하고 유쾌한 접객 속에서 완벽한 사케 페어링으로 즐긴 최고의 점심 식사였다. 계산을 하고 화장실에 잠깐 들렀다가 자리에 와서 옷을 주섬주섬 챙기는데, S의 표정이 지나치게 밝은 게 아닌가. 약간 들뜬 표정이었는데, 이 녀석이 좋은 술과 함께하는 맛있는 음식의 가치에 눈을 떴구나, 뿌듯했는데, 개뿔 그게 아니었다. “쉐프님이 핸드폰으로 수지 사진 보여 주면서, 저보고 닮았다고 했어요!” “.....” 쉐프님, 이런 전략으로 긴자 최고의 스시야가 되시겠단 말입니까?! ㅋㅋㅋㅋ 뭐, 덕분에 S는 말 그대로 ‘수지맞은’ 하루가 되었으니까 그거면 된 거다. 나는 내 마음 속의 '수지(를 도둑) 맞은' 하루지만. 중요한 건 덕분에 곱씹을 술안주가 하나 더 생겼다는 사실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