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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8월
평점 :
소설집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를 읽으며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가 말한 아래의 문장이 생각났다.
<현실에서 모든 독자는, 책을 읽는 동안만큼은 그 자신의 독자이다. 저자의 작품은 만약 그 책이 아니었으면 독자가 결코 혼자서는 경험하지 못했을 어떤 것을 스스로 식별하도록 도와주는 일종의 시력보조 장치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 책이 말하는 바를 독자가 자기 속에서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이 책의 진실성에 대한 증명이다
-p.33, ‘프루스트가 우리의 삶을 바꾸는 방법들’, 알랭 드 보통, 청미래>
내가 소설을 읽는 가장 큰 이유는 프루스트의 말처럼 혼자서는 경험하지 못했을 세상의 다양한 것을 간접 경험하고, 선한 방향으로 집요하게 인식의 틀을 넓히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그 인식은 세상과 타협하며 적당히, 편하게 살기 원하는 느슨함에 금방 무뎌지고 만다. 좋은 게 좋은 것이며, 이 정도면 적당하다는 자기기만으로 금방 돌아가 버린다.
이번에 읽은 최은영의 소설은 까탈스럽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호락호락하지 않았다’는 의미가 읽기 어려웠다는 뜻은 아니다. 세심하고 조곤조곤한 말투와 같은 문장으로 세상과 인간을 보는 나의 시선과 이해에 대해 ‘그 정도로는 어림없다’고 말해 주고 있었다. 가족이나 타인과의 관계에서 어느 정도까지가 이해의 폭으로 인정되는지, 정말 상대의 살갗 속으로 들어가지 않는 한 이해한다는 말을 할 수 없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게 했다. 여전히 존재하는 폭력 또한 서늘했고 마음이 아팠다. 책을 읽으며 ‘자기 속에서 인식해야 한다는’ 프루스트의 말을 제대로 실감했다.
성적에 맞춰 들어간 학과 공부가 마음에 들지 않아 괴로웠지만 그럭저럭 졸업을 하고 은행의 비정규직 사원으로 근무한 적이 있는 희원은 자신의 꿈을 위해 다시 대학 3학년에 학사 편입한 늦깎이 영문과 대학생이다. 영어로 된 에세이를 읽고 각자 에세이를 써 와 토론하는 강의에 참가한 희원은 그 수업의 시간강사인 ‘그녀’를 마음에 들어 한다. 수업의 내용과 그녀의 생각, 같은 지역에서 살았다는 동질감을 좋아하고, 희원이 앞으로 가게 될 길의 선배로 여기며 그녀에게 의지하게 된다. 하지만 그녀는 희원이 원하는 그 길에 대해 싸늘한 반응을 보인다. 대학원에 진학해 박사학위를 따고 시간강사로 출발해서 대학에 자리 잡는, 공부하는 인생이 비정규직으로, 날씬하지 못한 어린 여성으로 차별받았던 희원의 과거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희원은 과거와 현재, 현재와 미래에서 그녀의 길을 따라가지만 그들은 계속 대척점에 서 있다. 그녀가 그렇게 벗어나고 싶었던 용산에 지금 희원이 살고 있으며, 희원이 벗어나 다른 길로 가고 싶었던 그 길에 그녀가 있었으며, 결국은 자리 잡지 못하고 글이나 공부와 무관하게 살아가는 그녀의 자리에 현재 희원이 분투하며 버티고 있다. 엇갈림과 짧은 인연 속에서의 그들의 대척은 끝까지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지 못하는 소심한 희원에게는 아이러니하게도 등불과 같은 것이었다. 희원은 그녀라는 빛을 좇고 성장하고 있었다. 이 책의 표제작인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는 짧은 분량임에도 장편소설을 읽는 기분이 들었다. 여러 면에서 생각할 것이 많았다.
현역으로 대학에 입학한 나는 회계학을 전공했다. 희원처럼 성적에 맞춰 학과를 선택했기에 전공이 적성에 맞지 않았고 매번 허덕이며 공부를 따라가야 했다. 우리 과(학과의 특성상)에는 여상을 졸업하고 바로 취업해 회사 생활을 하다가 다시 대학에 온 언니들이 몇 명 있었다. 그들에게 회계 원리는 가지고 노는 장난감이었고, 학점을 향한 집요하고도 억척스러움은 성실과 노력의 다른 말이었다. 그들이 대학에 다시 온 이유는 많겠지만 아마 직장에서의 차별이 가장 컸을 것이다. 가끔씩 그들의 삶이 궁금하다.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나간 그들에게 차별은 없어졌는지, 자신의 꿈을 향해 항상 더 가보고 싶었는지가.
[그것이 어떤 문장이든, 그녀는 내가 자신보다 나은 경험을 하기를, 자신이 겪었던 일을 겪지 않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그녀의 자존심이자 힘이었으리라는 생각도 한다. 자신의 조건을 탓하지 않고, 자신이 겪는 부당함을 인지하면서도 인정은 하지 않으려는 마음 같은 거 말이다. 그 마음이 그녀를 지켜 주었는지도 모른다.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p.41]
우리가 사회에 대한 비판을 하거나 글쓰기를 할 때, 소재와 내용의 범위를 어디까지 둘 것인지, 어떤 자격을 갖추어야 하는지에 대한 기준을 정하기는 어렵다. 『몫』은 그런 고민이 담겨 있는 소설이다. 대학교지 편집 부원이었던 희영은 기지촌 여성이나 가정 폭력에 대한 글을 쓰고 싶어 한다. 희영은 당연히 그런 삶을 경험해보지 못했다. 대학생이고 심지어 좋은 구두도 신고 다닌다. 희영은 자신이 속하지 않은 계급의 문제를 사회적이면서도 공적인 자리로 끌어내어 해결책을 제시하기 원한다. 희영은 입장이 다르고 그들과 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로 거절당한다.
직접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그럴 자격이 없는 것일까? 가난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 가난한 사람을 위하고, 폭력을 당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 폭력을 당한 사람을 이해하고, 차별받아 본 적이 없는 여성이 페미니스트가 되는 것이 그렇게 오만하고 위선적인가? 예수처럼 십자가에 못 박혀야만 사람의 죄를 대신하고 그들을 사랑하는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희영과 해진은 미군에게 살해당한 어느 기지촌 여성의 오 주기 추모 집회에서 주한미군의 범죄를 성토하고 미국에 제대로 항의조차 하지 못하는 정권을 규탄하려 모인 사람들이 외치는 구호에 경악한다. “범죄는 모국에서! 그러자 누군가 조금 작은 소리로 따라 외쳤다. 강간은 미국에서!(p.70)” Fucking USA. ‘구호도 그렇지만 주변에서 옅게 퍼지던 웃음소리’도 충격적이다. 입장만 바뀌면 강간은 어디서나 가능하다는 생각과 여성 문제를 단지 이슈로써만 이용한다는 사실이 허망하다. 뜻을 같이 하는 조직 안에서도 넘지 못하는 이해와 감정의 폭이 존재한다는 것, 그것으로 서로를 찌르고 분열하는 모습이 지금의 시국을 보는듯해 안타까웠다. 먼 훗날 누군가는 죽고 남아있는 자는 한없이 초라해질 때, 떠오르는 과거에 대한 회한은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최은영은 『몫』의 화자인 해진을 ‘너’라고 지칭한다. 내가 너로 표현되고 불리는 것은 나를 객관화시키는 것이다. 너라는 나를 보며 미흡하고 비겁하다고도 생각하지만 너에 대한 연민과 초라함을 느끼기도 한다. 『몫』의 해진과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의 희원은 자신과 사람들의 관계를 통해, 글쓰기에 대한 고민으로 성장해 간다.
[정윤의 글을 읽은 당신은 그 글을 읽기 전의 당신이 아니었다. 당신은 그런 글을 쓰고 싶었다. 한번 읽고 나면 읽기 전의 자신으로는 되돌아갈 수 없는 글을, 그 누구도 논리로 반박할 수 없는 단단하고 강한 글을, 첫 번째 문장이라는 벽을 부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글을, 그래서 이미 쓴 문장이 앞으로 올 문장의 벽이 될 수 없는 글을, 언제나 마음 깊은 곳에 잠겨 있는 당신의 느낌과 생각을 언어로 변화시켜 누군가와 이어질 수 있는 글을.
- ‘몫’, p.52]
이 책의 나머지 소설에도 여러 관계가 있다. 직장 상사와 비정규직 직원인 지수와 다희, 언니와 여동생, 앞으로 만나지 못할 것이 확실한 조카에게 이모가 쓰는 부치지 못하는 편지, 소리와 그녀의 엄마와 삼촌인 민주와 민혁, 서로 다르게 기억되는 모습들, 희진과 이모 숙희, 기남과 그녀의 차가운 딸인 우경, 기남 남편의 전처의 딸인 알코올 중독자 진경, 기남에게 “부끄러워해도 된다고” 말해주는 우경의 아들 마이클......
끊어낼 수 없는 관계에, 기억에, 고통과 폭력에 온통 어둡고 음울했지만 사람이 있는 자리에 무조건 있기 마련인 따뜻함과 희망은 책을 읽다가 마음 아파 눈물 흘리던 나를 건져 주었다. 소설 속 많은 곳에서 발견한 나의 부끄러움도 마이클의 한 마디에 위로 받을 수 있었다.
촘촘하고 치밀한 각 소설에 대한 감상을 적기가 너무 어려웠다. 써야 할 것이 넘쳐 그 중 무엇을 가져오고 어떻게 써야 할지 암담했다. 그래도 뭔가를 조금이라도 써야한다는 강박에 감상을 적었지만 오히려 아무것도 가져오지 못한 것 같다. 당연한 말이지만 소설은 그저 읽어야 하는 것이다.
[“부끄러워도 돼요. 부끄러운 건 귀여워요.”
따뜻한 통증이 기남의 등과 배에 퍼져나갔다. 기남은 마이클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면서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이클은 자신을 몰랐고 자신이 살아온 시간을 몰랐다. 하지만 그 순간, 자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그애가 오히려 자신보다 자신을 더 많이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 건 무슨 이유였을까. 부끄러워도 돼요. 기남은 그 말을 믿을 수 없었다. 한 번도 기대하지 않았던 말, 기남은 그 말을 잊을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 p.3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