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쓴 것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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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편을 모아둔 소설집을 굳이 하나의 메시지로 관통하여 해석하고자 한다면 하나하나의 작품의 개별성을 무시하고 납작하게 만들어 내 멋대로 소화해 버리는 결과가 되어버릴 수도 있겠다. 그래서 소설집 전체에 관한 리뷰를 쓰는 일은 조심스럽다. <82년생 김지영>으로 유명세를 치른 조남주 작가의 소설집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작가의 목소리에 응답하여 목소리를 내는 일은 중요하다. 꼭 크고 아름다운 목소리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가부장제에 의하여 은폐되고 억압되었던 여성의 이야기를 보여주기 위해 작가가 택한 방법은 ‘부재’다. 이 책에 실린 단편들에는 유독 아버지나 남편, 혹은 아들이 부재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들이 상징하는 가부장제가 함께 부재 상태에 이름으로써 비로소 여성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작가는 이들의 목소리를 전하면서, 가부장제가 사라진 이후, 그 너머의 세상을 꿈꾼다.


 <매화나무 아래>의 동주는 남편이 죽고서야 어릴 때부터 싫어했던 ‘말녀’라는 이름을 개명한다. 아버지와 남편이 사라진 자리에서 동주의 자매들은 어릴 적과 같은 친밀한 관계를 회복한다. “아버지의 그늘도, 남편의 굴레도 참 지긋지긋해해 놓고 그래서 도망친 게 아들의 어깨였다니.”(41쪽)라고 말하는 동주는, 아들이 죽고 나서야 며느리 효경과 진정한 관계를 맺는다. “준철이가 없어서 그래. 이제 내가 준철 에미가 아니고 너도 준철이 집사람이 아니잖아.”(<오로라의 밤> 233쪽)라는 동주의 말은, 가부장제 사회에서 뒤틀리고 반목했던 고부관계에 화해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가부장제의 부재로써 그것이 존재할 때 가졌던 권능과 그것이 사라진 자리에 나타나는 효과를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은 <가출>이다. 아버지가 가출했다는 소식에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인 어머니와 자식들은 아버지가 싫어한다는 이유로 그의 정년퇴직 후 한 번도 먹지 못했던 청국장찌개를 먹는다. 여기서 등장하는 아버지는 <오기>의 화자 초아와 김혜원 선생님의 아버지들처럼 폭력을 휘두르는 나쁜 아버지가 아니다. 그는 화자인 ‘나’를 오빠들보다 예뻐했고 “그건 내 일이지. 그러라고 내가 이 집에 있는 건데.”(97쪽)라고 말하며 공과금 내는 것을 포함한 모든 돈 관리와 가족들 부양을 모두 자신의 일이라고 여기는, 가부장제 하에서 전형적으로 ‘훌륭하다’고 평가될 만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 훌륭한 아버지와 살면서 어머니는 공과금조차 낼 줄 모르는 사람이, 의견을 내는 아버지 옆에서 혼잣말하듯 중얼거리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가출하고 나서야 “간결한 문장과 정확한 발음으로 의견을 말할 수 있”는 모습을 찾았다(96쪽). 이처럼 남성의 입장에서는 나름대로 상대를 위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했던 행동들이 여성의 본모습을 지우고 억압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현상을, 작가는 <현남 오빠에게>에서 상세하게 다룬다.


 한편, <오로라의 밤>은 관습을 거부한 자리에서 새롭게 발견되는 희망이 있음을 시사한다. 화자 효경은 딸 지혜가 손주 한민이를 돌봐주길 바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를 거절한다. 아이를 낳은 부모가 책임져야 할 육아 문제에서 남성인 아빠는 쏙 빠지고 엄마와 그 엄마 사이의 갈등만 커져간다. 효경은 손주의 육아를 맡아주기를 거절하고 어릴 적부터 꿈꿔왔던 오로라를 보기 위해 캐나다로 떠난다. 그의 동반자는 함께 사는 시어머니 동주다. 돌봄노동에서 해방된 두 사람은 “딱 내 몸 하나만 보살피는 지금은 일상이 얼마나 가뿐한지”(235쪽) 느끼며, 오로라를 보는 순간 관습이 요구하는 것과 정반대의 소원을 빈다. 효경은 “한민이 보기 싫어요!” 동주는 “죽을 때 고와 뭐해? 곱지 않더라도 오래 살 거야.”(248-249쪽)라고 외치며 웃는다. 지혜가 고민하던 육아의 문제는, 그 부담을 어머니가 아닌 남편에게 지우기로 하면서 뜻밖에 해결된다. “아이를 보는 내내 멍하니 창밖만 보던” 자신보다 “아이를 보느라 창밖을 볼 틈도 없던” 남편이 더 육아에 적합하다는 것을 깨닫고(256-257쪽), 시터 고용 및 시터와의 의사소통, 어린이집 상담 등을 남편에게 맡기는 것이다.


 가부장제의 억압에서 벗어날 때 우리는 반목하고 뒤틀렸던 관계를 바로잡고 다른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다. 작가가 전하는 여성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자. 이름조차 상실한 미스 김(<미스 김은 알고 있다>)에게도, ‘되바라진 요즘 여자애들’로 싸잡아 폄하되는 주하(<여자아이는 자라서>)에게도, 할 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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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1-08-13 12:5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어제 쓰셨는데 사라져서 오잉?했었어요. ㅎㅎ
오, ‘부재‘에서 찾으신 점 흥미롭습니다. 그리고 공감하고요.

근데 <가출>에서 그 아버지는 언제까지 딸 카드를 쓸지 약간 궁금... 점점 결제 금액이 커지던데.... ㅋㅋㅋㅋㅋ

독서괭 2021-08-13 13:21   좋아요 4 | URL
앗 처음부터 비공개로 등록해도 일단 떴다가 사라지는군요. 저도 가끔 오잉?한 적이 있는데 그런 거였군요 ㅋㅋ
저도 궁금해요. 이 아버지 대체 뭔 생각인지 ㅋㅋ

scott 2021-08-13 15:0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번 이 단편집 관심이 갔었는데
괭님 리뷰 읽으니 단편 하나하나에 담긴 의미가(현재 우리 삶에) 크네요

요책 일단 찜!👆

독서괭 2021-08-13 21:20   좋아요 1 | URL
찜~^^ 관심이 가셨던 책이라면 한번 읽어보시면 좋겠습니다^^

scott 2021-09-10 15:4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괭님 이달의 당선 축!
이번달은 리처가 아닌 조남주 작가님이 용돈 주쉼 ^ㅅ^

독서괭 2021-09-10 16:12   좋아요 4 | URL
앗, 저 이 글은 잊고 있었는데 이게 됐네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스콧님 손 어쩌죠? <이반 일리노비치의 죽음>이 당선작으로 뽑힐 거라고 손을 거셨었는데.. 음..

scott 2021-09-10 16:13   좋아요 2 | URL
네, 손꾸락 ! 요귀 .🖐

새파랑 2021-09-10 16:0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독서괭님 다음달에는 잭리처로 당선해주세요~!!

독서괭 2021-09-10 16:13   좋아요 4 | URL
ㅋㅋㅋㅋ 지난달 읽은 <원티드맨>이 별로였어서 리뷰를 못 썼네요. 지금 읽고 있는 <네버 고 백>으로 한번 노려보겠습니다!

청아 2021-09-10 16:0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괭님 당선 축하드려요~^^*♥

독서괭 2021-09-10 16:13   좋아요 3 | URL
미미님 감사하고, 저도 축하드려요^^

겨울호랑이 2021-09-10 16: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독서괭님 이달의 마이리뷰 당선 축하드려요! ^^:)

독서괭 2021-09-11 10:39   좋아요 0 | URL
호랑이님 감사합니다~^^

그레이스 2021-09-10 17: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독서괭님 축하드려요 🎉 🎈

독서괭 2021-09-11 10:39   좋아요 0 | URL
그레이스님 감사합니다~^^

이하라 2021-09-10 19: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독서괭님 축하드립니다^^

독서괭 2021-09-11 10:39   좋아요 0 | URL
이하라님 감사합니다~^^

페넬로페 2021-09-10 21:5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 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조남주 작가가 단편은 어떻게 썼을지 궁금합니다.**

독서괭 2021-09-11 10:40   좋아요 2 | URL
페넬로페님, 저는 이책이 조남주 작가를 처음으로 접한 거라 비교는 어려운데, 여러가지 생각을 많이 하게 하는 이야기들이라 한번 읽어보심 좋을 것 같아요^^

행복한책읽기 2021-09-11 00:3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괭님 축하드려요. 조남주님 책은 한권도 안읽었어요. 이 리뷰도 이제야 봤어요^^

독서괭 2021-09-11 10:41   좋아요 1 | URL
행복님 저도 이 책으로 처음 접했습니다. 리뷰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단발머리 2021-09-11 09: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독서괭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전 이 작품은 제가 직접 읽고 싶어서 리뷰 한 편도 안 읽었는데, 지금 독서괭님 리뷰 읽으니 읽고 나서 더 읽고 싶네요.
효경은 손주 육아 거절했는데(찬성), 시어머니랑 같이 사는(반대) 이유가 궁금해서요. 미리 알려주시면 감사링!!!!

독서괭 2021-09-11 10:42   좋아요 1 | URL
단발머리님 감사합니다. 여태 안 읽으셨는데 제 걸 읽어주시다니 영광이네요 ㅎㅎ 원래 시어머니 모시고 같이 살며 시어머니가 효경의 딸을 돌봐주셨은데 남편 죽고 나서도 계속 같이 산 것 같아요. 두사람이 잘 맞게 잘 살아서 보기 좋습니다^^

초딩 2021-09-11 14: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이달의 리뷰 당선 축하드립니다~
멋진날 되세요~

독서괭 2021-09-12 13:34   좋아요 0 | URL
초딩님 감사합니다~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

thkang1001 2021-09-12 1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독서광님! 이달의 리뷰에 당선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독서괭 2021-09-12 13:34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저 독서광 됐나요 ㅋㅋㅋㅋ 그 정도는 못 되는데 노력해봐야겠습니다 ㅎㅎ
 

당선축하금으로 열린책들 미드나잇 세트를 질렀습니다!! 새파랑님 땡투!
크기 비교를 위한 <이반 일리치의 죽음> 단독샷. 바로 뒤에 서있는 책은 <술라>. 책이 너무너무 예쁘네요. 생각보다 가볍구요. 나를 위한 선물😍
그리고 <단지 유령일 뿐>은 커피 주문하면서 배송비 절약을 위해 얹어 주문. 폴스타프님께 땡투!

다른 책들은 요즘 중고주문에 맛을 들여 아이 책 산다는 핑계로 얹어 산 책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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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그만 메모수첩 2021-08-09 17:1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늦었지만 당선 축하드립니다 🎉 정말 예쁘네요!

독서괭 2021-08-09 18:15   좋아요 5 | URL
감사합니다~ 제 폰카메라가 좀 깨져서 예쁨이 덜 표현되었어요 ㅠ

봄밤 2021-08-09 17:5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너무 예뻐서 사고싶다는 생각이 들기는 처음이네요! 너무 얇은 책은 안 사고 싶은데 디자인이 너어어어무 예쁘네요🤭

독서괭 2021-08-09 18:16   좋아요 3 | URL
실제로 보면 더 예뻐요. 특히 뒷표지가 쨍한 원색이라^^

새파랑 2021-08-09 18:1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와우 독서괭님 땡투 완전 감사합니다 ^^ 이 책 너무 예쁜거 같아요. 뭐니뭐니 해도 나를 위한 선물이 최고 인거 같아요 😆

알라딘에서 중고책 검색하는거 완전 재미있어요. 특히 같은 우주점에서 2만원 이상 고르기 할때는 더욱 ~!!

독서괭 2021-08-09 18:40   좋아요 4 | URL
제가 딱 우주점에서 2만원 고르느라 산 거예요! ㅋㅋ 재밌긴 하더라구요. 시간이 꽤나 걸려서 그렇지;;
감사는요. 정말로 새파랑님 사진 보고 구매했으니 저와 알라딘이 새파랑님께 감사해야죠😜

Falstaff 2021-08-09 19:3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단지 유령, 땡유 땡투! 절대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아...광고 넘 심하면 후회하시던데.... ㅋㅋㅋㅋ

독서괭 2021-08-09 20:21   좋아요 4 | URL
ㅋㅋㅋㅋ 후회하지 않겠습니다. 언제 읽을지 모르겠지만 ㅋㅋ

scott 2021-08-09 21:14   좋아요 3 | URL
유디트 헤르만 팬 요기✋

괭님 절대로 후회 하지 않으신다는 보장!!

그렇게혜윰 2021-08-09 20:5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려요. 저도 며칠 전 저 세트를 샀는데 나머지 세트도 사야할 것 같아요^^

독서괭 2021-08-09 21:19   좋아요 2 | URL
ㅎㅎ 저는 눈세트는 5권 읽었고 미드나잇은 네권 읽어서 미드나잇만 사려고 했는데, 막상 사고 나니 눈세트도 사고 싶어져요 ㅜㅜ

scott 2021-08-09 21:1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 괭님
이거슨 잭리처가 준 선물 ㅋㅋㅋ
열린책 35주년 소장용으로도 좋고 얇고 가벼워서 부담없이 읽기 좋고(독서 슬럼프 빠졌을때 한권씩 뽑아 들기 ^ㅅ^


독서괭 2021-08-09 21:20   좋아요 3 | URL
잭리처 사랑해요~~!! ㅋㅋ
사고보니 넘 맘에 들어서 나머지 세트도 살 것 같아요 ㅜㅜ 그땐 스콧님께 땡투 할 거예요!^^

단발머리 2021-08-09 22:1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나를 위한 선물 완전 멋집니다. 예뻐서 자꾸 사진 보게 되요. 너무 예뻐요ㅠㅠㅠㅠㅠ

독서괭 2021-08-10 01:14   좋아요 0 | URL
부족한 사진도 예쁘다 하시니 단발머리님도 곧 사실 것 같네요^^

레삭매냐 2021-08-13 06: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왕 멋진 낚시글이네요...

사지 말아야 하는데 ㅋㅋㅋ
저는 중고로 기다려 보렵니다.

독서괭 2021-08-13 12:33   좋아요 2 | URL
ㅎㅎ 이 세트는 중고로 쉽게 나오지 않을 것 같습니다.. 대부분 소장용으로 살 것 같아요.
 



이도우 작가를 특별히 좋아한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더듬어보니 작가의 책을 모두 읽은 것이 아닌가. 과작의 작가인지라 네권 뿐이지만. 장편소설<사서함 110호의 우편물>, <잠옷을 입으렴>,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가 있고, 산문집은 이 책, <밤은 이야기하기 좋은 시간이니까요>가 처음이다. 


이 작가의 책을 왜 계속 읽느냐, 그 답을 이 책에서 얻었다. 그의 책은 소설도 산문도 한결같다. 한결같이 다정한 속내가 있다. 쑥스러워 불쑥 손 내밀지는 못하지만 언제든 조용히 이야기를 들어줄 준비가 되어 있는 친구같다. 그래서 그런가. 잔잔하지만 질리지 않는다. 




▶ <사서함 110호의 우편물>은 로맨스소설이라 할 수 있는데, 그 분야 책 중 유일하게 세 번을 읽었다. 빠르게 유통되고 잊혀지는 많은 로설들과는 확실히 차별화되는 품격으로 스테디셀러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 <잠옷을 입으렴>은 전작 사서함과는 결이 다른, 성장소설이다. 사서함보다 더 좋은데?라고

 생각했고 이도우 작가의 책네권 중 가장 좋다고 느꼈지만, 안타깝게도 친구에게 선물하는 바람에 책을 가지고 있지 않다. 역시 리뷰를 남겨야 기억이 나는구나.. ㅜㅜ 













  

 ▶ 사서함과 함께 로맨스소설이라고 볼 수 있는 소설. 작은 시골마을에서 독립서점을 운영하는 남자주인공, 이라는 설정이 좋아 빨리 읽고 싶었다.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는데 사서함에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해 사지는 않았다. 

  그런데 <밤은 이야기하기 좋은 시간이니까요>에서 이 책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 부분을 읽으니, 다시 한번 읽고 싶어졌다. 오해를 오해로만 받아들이고, 왜 나를 못 믿고 이상한 오해를 하냐며 따지지 않고, 그 말에 다른 뜻은 없다며 오해의 저변에 깔린 상처까지 감싸 안아주는 사람.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 이런 소통이 가능하다면 비극이 얼마나 많이 줄어들까. 이게 가능한 사람이 현실에 별로 없기 때문에 결국 이 소설은 로맨스소설로 분류될 수밖에 없을지도 모르겠다. 






은섭이 사랑하는 해원은 사람에게 받은 상처가 많은 이였다. 해원은 겨울밤 뒷산 오두막으로 그를 찾으러 가다가 길을 잃는데, 은섭이 그녀를 찾아서 함께 산을 내려가려 하자 순간 오해한다. 그녀가 오두막에 가는 게 싫어서 그런 거냐고. 그의 공간에 들여놓지 않으려는 것 같다고. 은섭은 해원을 감싸며 말한다. 지금 오두막은 춥고, 그게 유일한 이유라고. 그 말에 다른 뜻은 없다고.

은섭이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캐릭터여서 고마웠다. 이 대사를 쓰고 싶어 두 사람이 숲의 오두막에서 함께 밤을 보내는 어쩌면 로맨틱할지도 모를 설정을 포기했다. 하룻밤 더 같이 있지 못하더라도 '그 말 그대로야'라는 말을 해원에게 들려주고 싶었다.

애정이 있는 가까운 이들에겐 언제나 그 말 그대로, 어떤 함의나 간접적인 가시가 없는 담백한 언어를 건네고 싶다. 숨은 뜻을 요령이 있게 내비치는 이들이 복잡한 내면을 가진 듯 멋있게 느껴지던 시절도 있었고, 함의와 행간은 여전히 흥미로운 문학적 텍스트이지만, 그것이 일상을 잠식하게 두고 싶지는 않다. 살아갈수록 그 말 그대로, 그 마음 그대로인 이들이 곁에 남는다. 나도 그들에게 그런 사람이고 싶다.    - <밤은 이야기하기 좋은 시간이니까요> 294~295쪽


 팟캐스트 책읽아웃- 김하나의 측면돌파에 이도우 작가가 출연했을 때, 차기작으로 쓰고 있다는 <책집사> 이야기를 잠깐 했다. <밤은~>에서도 중간중간 짧은 소설이 실려 있는데, 그중 하나인 '이상한 방문객'이 책집사 맛보기가 아닐까 싶다. 책집사를 찾아온 손님들은 어떤 특정한 책의 특정한 장면 속으로 들어가기를 원한다. 그들은 하룻밤 동안 원하는 책 속의 장면에 들어가 머물 수 있다. 하지만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지는 못한다.. 재미난 설정이라 이 책도 나오면 읽게 될 것 같다. 이도우 작가는 책을 '결계라고 생각한다고 썼는데, 이 책의 설정은 그 반영이 아닐지. 



결국 이런 무해한 상상들은 픽션과 조우하는 나의 마음인가 보다. 언젠가 서점 인터뷰에서 '내게 책이란 OO이다'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나는 빈칸에 '결계'를 써 넣었다. 결계는 다른 존재가 침입하지 않도록 보호해놓는 공간이고, 스노우볼이나 커다란 돔 지붕 아래 깃든 세상처럼 책이라는 다른 차원으로 들어가 작가와 함께 생각하고 즐기다가 돌아올 수 있는 공간이라고. 사랑하는 책과 영화의 일부가 되고 싶다는 마음은 비록 헛되지만, 그 속에서 휴식처를 발견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해할 것 같다.  - <밤은 이야기하기 좋은 시간이니까요> 190쪽


 

▶ <밤은~>에서 언급한 그림책 <도서관>. 궁금해서 당장 사서 아이와 함께 읽었다. '메리 엘리자베스 브라운'이라는 도서관 사서의 전기라고 책 속에서 밝히고 있는데, 실존 인물인지 책 속의 설정인지 확실히는 알 수 없다. 책 소개에도 나오지 않고. 어쩌면 책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헌사인지도 모르겠다. 한순간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는 엘리자베스 브라운의 삶은 어떻게 보면 전복적이다. 이 책이 출간된 것이 1998년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더이상 책을 감당할 수 없게 된 엘리자베스 브라운은 전재산을 기증하여 도서관으로 만들고 다른 여성친구와 함께 살며 도서관 나들이를 다니는 노년을 보낸다. 두 할머니의 그 만족스런 표정이라니. 





누군가 그녀를 붙잡고 인터뷰한다면 이런 질문과 대답이 나오지 않을까. 미스 브라운, 2차 대전이 일어날 때 어디 있었나요? 네, 내 방 흔들의자에서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미스 브라운, 한반도가 통일될 때 어디 있었나요? 네, 내 방 흔들의자에서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달나라에 신도시가 건설될 때는 어디에...? 네, 내 방 흔들의자에서 책을... 난 그 모든 때에 함께했습니다. 저런, 미스 브라운, 그렇다면 당신의 인생은 어디에 있었나요? 이미 말했는걸요, 내 인생은 내 방 흔들의자 위에 있었다고. 그러고는 태평하게 웃어도 그리 나쁜 삶은 아닐 것이다.   - <밤은 이야기하기 좋은 시간이니까요> 209-210쪽 


어떤 시간 어떤 장소에서든 느릿하고 깊게 바라보고 글을 써나갈 것 같은 이도우 작가. 그의 다음 책을 기다린다. 아무래도 나는 이 작가님을 특별히 좋아하나 보다. 


그리고 여전히 나는 가려진 자수의 뒷면을 아까워한다.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없는 것이 아니며 뒷면을 똑같이 수놓지 않고서는 앞면도 수놓을 수 없는 것이건만. 그 자체로 의미 있다 생각하면서도 뒷면은 여전히 애달프니. 

- <밤은 이야기하기 좋은 시간이니까요>  129쪽


아마도 잎이 없는 클로버는 ‘미련 없는, 후회 없고 뉘우침 없는‘이란 꽃말이 가장 어울리지 않을까. 빛나는 행운과 행복은 너무나 한순간. 잎이 차례로 떨어질 때는 두렵고 불안하겠지만, 마침내 사라지고 나면 차라리 초조함은 끝나고 미련 없이 놓아버릴 것만 같다.
그건 마치 웃음을 터뜨리며 그 자리를 떠나는 이의 뒷모습 같은 것. 간절히 기다렸고 지키려 애썼던 갈망이 내 안에서 끝나버렸을 때, 그 마음을 ‘클로버 잎이 다 떨어졌다‘고 표현하고 싶다. - P64

사물이나 다른 생명체가 인간의 특성을 동경하고 갈망한다는 상상은 결국 인간 중심의 시점이기도 하다. 지구에서 사람이 가장우월한 존재라는 무의식적인 믿음. 그건 어른이 되기까지 학습되는 가치관이라서, 아직 세상이 주는 관점이 확립되지 않은 어린아이들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곰이 되고 싶고, 털실이 되고 싶고, 기차가 되고 싶은 것이다. 거기에 어떤 포지션의 우열은 없다. 단지 다름이 있고, 그 다름은 아이들에게 매혹적일 뿐. - P132

그러니 아이러니한 것은 기껏 추억이 없는 따뜻한 곳으로 가 우리는 또 추억을 만든다는 사실이다. 살아가는 건 끊임없이 기억을 쌓는 일이고 때로 그 기억이 힘이 되어주기도 하지만, 어느 순간 누적된 무게에 피로해질 때 한 번쯤 스스로 리셋 버튼을 눌러 아무도 나를 모르는, 추억이 없는 곳에서 새로 시작하고 싶은 마음이 된다. 쉽게 잊지 못하고 기쁨도 슬픔도 오래 간직하는 유형의 인간이다 보니 나 자신을 자책할 때가 많아서일까. - P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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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1-08-09 13:23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tv드라마에서 날씨가 좋으면 찾아 가겠어요를 봤었는데 좋았어요^^
근데 책은 아직 읽지 않았는데 전 해원이 은섭에게 좀 이기적이지 않았나 생각이 들었어요. 이 산문집 읽고 싶어 찜 합니다^^

독서괭 2021-08-09 13:28   좋아요 5 | URL
전 드라마는 못 봤는데 좋다고 하시니 보고 싶네요^^ 책에서도 전반적으로 해원보다는 은섭이 더 사랑하고 감싸주는 느낌입니다. 사실 은섭같은 남자는 없을 것 같아요^^;

단발머리 2021-08-09 15:0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전 이도우 작가 이름을 오늘 처음 들어요. 독서괭님이 좋아한다고 하시니 저 파스텔톤의 예쁜 책을 한 번 읽어봐야겠군요.
리처도 기다리는데 말입니다. 하하하.

독서괭 2021-08-09 17:11   좋아요 1 | URL
제가 작가 한명을 새로 소개해드린 것이 되어 기쁘네요^^ 왠지 단발머리님도 마음에 들어하실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책임은 못 집니다(후다닥)
리처는 좀 기다리시게 해도 됩니다 ㅋㅋ 4위도 나쁘지 않아요 단발머리님 ㅋㅋ
 

아이구야…
조혼 풍습과 이른바 “변태성욕자”의 범죄를 연결하여, 13세 미만의 아이들을 욕망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동일함에도 불구하고 조혼에는 변태성욕의 이름을 붙이지 않음을 지적한 것이 흥미롭다.
아이구야.. 2년형이라니 열불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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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8-05 21: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8-06 10: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 2021-08-08 1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하하, 이책 제목 때문에 너무 읽고 싶었는 데.. 페이퍼에서 보고 들어가보니, 조선판 <성의 역사>라고..(솔깃) 대한제국 말기~ 식민지 시기가 의외로 너무 퀴어!하고 세기말(?)적이라 놀랬던 기억이나요. 그러고보니 괭님은 LGBT 마니아(?) 시군요! ㅎㅎㅎ

독서괭 2021-08-08 19:12   좋아요 0 | URL
마니아라기엔 아직 명함도 못 내밀 정도고 그냥 좀 알아가는 중이랄까요^^ 일제강점기 때 “에로그로”가 상당히 흥미를 끌었다고 하더라구요. 아직 많이 못 읽었지만 재밌습니다^^
 
밤은 이야기하기 좋은 시간이니까요 - 이도우 산문집
이도우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0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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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 시작했을 때는 그냥 그런데, 하다가 점점 좋아지는 책이 있고, 처음에는 와 멋진데, 하다가 점점 시들해지는 책이 있다. 이 책은 나에게 전자였다. 작가의 소박하고 다정한 글이 내게 다가왔다. 소설도 에세이도 한결같구나. 늦은 밤 조곤조곤 나눈 대화처럼 내용은 잊힐지언정 반짝임은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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