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우 작가를 특별히 좋아한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더듬어보니 작가의 책을 모두 읽은 것이 아닌가. 과작의 작가인지라 네권 뿐이지만. 장편소설<사서함 110호의 우편물>, <잠옷을 입으렴>,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가 있고, 산문집은 이 책, <밤은 이야기하기 좋은 시간이니까요>가 처음이다. 


이 작가의 책을 왜 계속 읽느냐, 그 답을 이 책에서 얻었다. 그의 책은 소설도 산문도 한결같다. 한결같이 다정한 속내가 있다. 쑥스러워 불쑥 손 내밀지는 못하지만 언제든 조용히 이야기를 들어줄 준비가 되어 있는 친구같다. 그래서 그런가. 잔잔하지만 질리지 않는다. 




▶ <사서함 110호의 우편물>은 로맨스소설이라 할 수 있는데, 그 분야 책 중 유일하게 세 번을 읽었다. 빠르게 유통되고 잊혀지는 많은 로설들과는 확실히 차별화되는 품격으로 스테디셀러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 <잠옷을 입으렴>은 전작 사서함과는 결이 다른, 성장소설이다. 사서함보다 더 좋은데?라고

 생각했고 이도우 작가의 책네권 중 가장 좋다고 느꼈지만, 안타깝게도 친구에게 선물하는 바람에 책을 가지고 있지 않다. 역시 리뷰를 남겨야 기억이 나는구나.. ㅜㅜ 













  

 ▶ 사서함과 함께 로맨스소설이라고 볼 수 있는 소설. 작은 시골마을에서 독립서점을 운영하는 남자주인공, 이라는 설정이 좋아 빨리 읽고 싶었다.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는데 사서함에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해 사지는 않았다. 

  그런데 <밤은 이야기하기 좋은 시간이니까요>에서 이 책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 부분을 읽으니, 다시 한번 읽고 싶어졌다. 오해를 오해로만 받아들이고, 왜 나를 못 믿고 이상한 오해를 하냐며 따지지 않고, 그 말에 다른 뜻은 없다며 오해의 저변에 깔린 상처까지 감싸 안아주는 사람.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 이런 소통이 가능하다면 비극이 얼마나 많이 줄어들까. 이게 가능한 사람이 현실에 별로 없기 때문에 결국 이 소설은 로맨스소설로 분류될 수밖에 없을지도 모르겠다. 






은섭이 사랑하는 해원은 사람에게 받은 상처가 많은 이였다. 해원은 겨울밤 뒷산 오두막으로 그를 찾으러 가다가 길을 잃는데, 은섭이 그녀를 찾아서 함께 산을 내려가려 하자 순간 오해한다. 그녀가 오두막에 가는 게 싫어서 그런 거냐고. 그의 공간에 들여놓지 않으려는 것 같다고. 은섭은 해원을 감싸며 말한다. 지금 오두막은 춥고, 그게 유일한 이유라고. 그 말에 다른 뜻은 없다고.

은섭이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캐릭터여서 고마웠다. 이 대사를 쓰고 싶어 두 사람이 숲의 오두막에서 함께 밤을 보내는 어쩌면 로맨틱할지도 모를 설정을 포기했다. 하룻밤 더 같이 있지 못하더라도 '그 말 그대로야'라는 말을 해원에게 들려주고 싶었다.

애정이 있는 가까운 이들에겐 언제나 그 말 그대로, 어떤 함의나 간접적인 가시가 없는 담백한 언어를 건네고 싶다. 숨은 뜻을 요령이 있게 내비치는 이들이 복잡한 내면을 가진 듯 멋있게 느껴지던 시절도 있었고, 함의와 행간은 여전히 흥미로운 문학적 텍스트이지만, 그것이 일상을 잠식하게 두고 싶지는 않다. 살아갈수록 그 말 그대로, 그 마음 그대로인 이들이 곁에 남는다. 나도 그들에게 그런 사람이고 싶다.    - <밤은 이야기하기 좋은 시간이니까요> 294~295쪽


 팟캐스트 책읽아웃- 김하나의 측면돌파에 이도우 작가가 출연했을 때, 차기작으로 쓰고 있다는 <책집사> 이야기를 잠깐 했다. <밤은~>에서도 중간중간 짧은 소설이 실려 있는데, 그중 하나인 '이상한 방문객'이 책집사 맛보기가 아닐까 싶다. 책집사를 찾아온 손님들은 어떤 특정한 책의 특정한 장면 속으로 들어가기를 원한다. 그들은 하룻밤 동안 원하는 책 속의 장면에 들어가 머물 수 있다. 하지만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지는 못한다.. 재미난 설정이라 이 책도 나오면 읽게 될 것 같다. 이도우 작가는 책을 '결계라고 생각한다고 썼는데, 이 책의 설정은 그 반영이 아닐지. 



결국 이런 무해한 상상들은 픽션과 조우하는 나의 마음인가 보다. 언젠가 서점 인터뷰에서 '내게 책이란 OO이다'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나는 빈칸에 '결계'를 써 넣었다. 결계는 다른 존재가 침입하지 않도록 보호해놓는 공간이고, 스노우볼이나 커다란 돔 지붕 아래 깃든 세상처럼 책이라는 다른 차원으로 들어가 작가와 함께 생각하고 즐기다가 돌아올 수 있는 공간이라고. 사랑하는 책과 영화의 일부가 되고 싶다는 마음은 비록 헛되지만, 그 속에서 휴식처를 발견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해할 것 같다.  - <밤은 이야기하기 좋은 시간이니까요> 190쪽


 

▶ <밤은~>에서 언급한 그림책 <도서관>. 궁금해서 당장 사서 아이와 함께 읽었다. '메리 엘리자베스 브라운'이라는 도서관 사서의 전기라고 책 속에서 밝히고 있는데, 실존 인물인지 책 속의 설정인지 확실히는 알 수 없다. 책 소개에도 나오지 않고. 어쩌면 책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헌사인지도 모르겠다. 한순간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는 엘리자베스 브라운의 삶은 어떻게 보면 전복적이다. 이 책이 출간된 것이 1998년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더이상 책을 감당할 수 없게 된 엘리자베스 브라운은 전재산을 기증하여 도서관으로 만들고 다른 여성친구와 함께 살며 도서관 나들이를 다니는 노년을 보낸다. 두 할머니의 그 만족스런 표정이라니. 





누군가 그녀를 붙잡고 인터뷰한다면 이런 질문과 대답이 나오지 않을까. 미스 브라운, 2차 대전이 일어날 때 어디 있었나요? 네, 내 방 흔들의자에서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미스 브라운, 한반도가 통일될 때 어디 있었나요? 네, 내 방 흔들의자에서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달나라에 신도시가 건설될 때는 어디에...? 네, 내 방 흔들의자에서 책을... 난 그 모든 때에 함께했습니다. 저런, 미스 브라운, 그렇다면 당신의 인생은 어디에 있었나요? 이미 말했는걸요, 내 인생은 내 방 흔들의자 위에 있었다고. 그러고는 태평하게 웃어도 그리 나쁜 삶은 아닐 것이다.   - <밤은 이야기하기 좋은 시간이니까요> 209-210쪽 


어떤 시간 어떤 장소에서든 느릿하고 깊게 바라보고 글을 써나갈 것 같은 이도우 작가. 그의 다음 책을 기다린다. 아무래도 나는 이 작가님을 특별히 좋아하나 보다. 


그리고 여전히 나는 가려진 자수의 뒷면을 아까워한다.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없는 것이 아니며 뒷면을 똑같이 수놓지 않고서는 앞면도 수놓을 수 없는 것이건만. 그 자체로 의미 있다 생각하면서도 뒷면은 여전히 애달프니. 

- <밤은 이야기하기 좋은 시간이니까요>  129쪽


아마도 잎이 없는 클로버는 ‘미련 없는, 후회 없고 뉘우침 없는‘이란 꽃말이 가장 어울리지 않을까. 빛나는 행운과 행복은 너무나 한순간. 잎이 차례로 떨어질 때는 두렵고 불안하겠지만, 마침내 사라지고 나면 차라리 초조함은 끝나고 미련 없이 놓아버릴 것만 같다.
그건 마치 웃음을 터뜨리며 그 자리를 떠나는 이의 뒷모습 같은 것. 간절히 기다렸고 지키려 애썼던 갈망이 내 안에서 끝나버렸을 때, 그 마음을 ‘클로버 잎이 다 떨어졌다‘고 표현하고 싶다. - P64

사물이나 다른 생명체가 인간의 특성을 동경하고 갈망한다는 상상은 결국 인간 중심의 시점이기도 하다. 지구에서 사람이 가장우월한 존재라는 무의식적인 믿음. 그건 어른이 되기까지 학습되는 가치관이라서, 아직 세상이 주는 관점이 확립되지 않은 어린아이들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곰이 되고 싶고, 털실이 되고 싶고, 기차가 되고 싶은 것이다. 거기에 어떤 포지션의 우열은 없다. 단지 다름이 있고, 그 다름은 아이들에게 매혹적일 뿐. - P132

그러니 아이러니한 것은 기껏 추억이 없는 따뜻한 곳으로 가 우리는 또 추억을 만든다는 사실이다. 살아가는 건 끊임없이 기억을 쌓는 일이고 때로 그 기억이 힘이 되어주기도 하지만, 어느 순간 누적된 무게에 피로해질 때 한 번쯤 스스로 리셋 버튼을 눌러 아무도 나를 모르는, 추억이 없는 곳에서 새로 시작하고 싶은 마음이 된다. 쉽게 잊지 못하고 기쁨도 슬픔도 오래 간직하는 유형의 인간이다 보니 나 자신을 자책할 때가 많아서일까. - P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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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1-08-09 13:23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tv드라마에서 날씨가 좋으면 찾아 가겠어요를 봤었는데 좋았어요^^
근데 책은 아직 읽지 않았는데 전 해원이 은섭에게 좀 이기적이지 않았나 생각이 들었어요. 이 산문집 읽고 싶어 찜 합니다^^

독서괭 2021-08-09 13:28   좋아요 5 | URL
전 드라마는 못 봤는데 좋다고 하시니 보고 싶네요^^ 책에서도 전반적으로 해원보다는 은섭이 더 사랑하고 감싸주는 느낌입니다. 사실 은섭같은 남자는 없을 것 같아요^^;

단발머리 2021-08-09 15:0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전 이도우 작가 이름을 오늘 처음 들어요. 독서괭님이 좋아한다고 하시니 저 파스텔톤의 예쁜 책을 한 번 읽어봐야겠군요.
리처도 기다리는데 말입니다. 하하하.

독서괭 2021-08-09 17:11   좋아요 1 | URL
제가 작가 한명을 새로 소개해드린 것이 되어 기쁘네요^^ 왠지 단발머리님도 마음에 들어하실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책임은 못 집니다(후다닥)
리처는 좀 기다리시게 해도 됩니다 ㅋㅋ 4위도 나쁘지 않아요 단발머리님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