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쓴 것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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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편을 모아둔 소설집을 굳이 하나의 메시지로 관통하여 해석하고자 한다면 하나하나의 작품의 개별성을 무시하고 납작하게 만들어 내 멋대로 소화해 버리는 결과가 되어버릴 수도 있겠다. 그래서 소설집 전체에 관한 리뷰를 쓰는 일은 조심스럽다. <82년생 김지영>으로 유명세를 치른 조남주 작가의 소설집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작가의 목소리에 응답하여 목소리를 내는 일은 중요하다. 꼭 크고 아름다운 목소리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가부장제에 의하여 은폐되고 억압되었던 여성의 이야기를 보여주기 위해 작가가 택한 방법은 ‘부재’다. 이 책에 실린 단편들에는 유독 아버지나 남편, 혹은 아들이 부재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들이 상징하는 가부장제가 함께 부재 상태에 이름으로써 비로소 여성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작가는 이들의 목소리를 전하면서, 가부장제가 사라진 이후, 그 너머의 세상을 꿈꾼다.


 <매화나무 아래>의 동주는 남편이 죽고서야 어릴 때부터 싫어했던 ‘말녀’라는 이름을 개명한다. 아버지와 남편이 사라진 자리에서 동주의 자매들은 어릴 적과 같은 친밀한 관계를 회복한다. “아버지의 그늘도, 남편의 굴레도 참 지긋지긋해해 놓고 그래서 도망친 게 아들의 어깨였다니.”(41쪽)라고 말하는 동주는, 아들이 죽고 나서야 며느리 효경과 진정한 관계를 맺는다. “준철이가 없어서 그래. 이제 내가 준철 에미가 아니고 너도 준철이 집사람이 아니잖아.”(<오로라의 밤> 233쪽)라는 동주의 말은, 가부장제 사회에서 뒤틀리고 반목했던 고부관계에 화해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가부장제의 부재로써 그것이 존재할 때 가졌던 권능과 그것이 사라진 자리에 나타나는 효과를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은 <가출>이다. 아버지가 가출했다는 소식에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인 어머니와 자식들은 아버지가 싫어한다는 이유로 그의 정년퇴직 후 한 번도 먹지 못했던 청국장찌개를 먹는다. 여기서 등장하는 아버지는 <오기>의 화자 초아와 김혜원 선생님의 아버지들처럼 폭력을 휘두르는 나쁜 아버지가 아니다. 그는 화자인 ‘나’를 오빠들보다 예뻐했고 “그건 내 일이지. 그러라고 내가 이 집에 있는 건데.”(97쪽)라고 말하며 공과금 내는 것을 포함한 모든 돈 관리와 가족들 부양을 모두 자신의 일이라고 여기는, 가부장제 하에서 전형적으로 ‘훌륭하다’고 평가될 만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 훌륭한 아버지와 살면서 어머니는 공과금조차 낼 줄 모르는 사람이, 의견을 내는 아버지 옆에서 혼잣말하듯 중얼거리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가출하고 나서야 “간결한 문장과 정확한 발음으로 의견을 말할 수 있”는 모습을 찾았다(96쪽). 이처럼 남성의 입장에서는 나름대로 상대를 위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했던 행동들이 여성의 본모습을 지우고 억압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현상을, 작가는 <현남 오빠에게>에서 상세하게 다룬다.


 한편, <오로라의 밤>은 관습을 거부한 자리에서 새롭게 발견되는 희망이 있음을 시사한다. 화자 효경은 딸 지혜가 손주 한민이를 돌봐주길 바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를 거절한다. 아이를 낳은 부모가 책임져야 할 육아 문제에서 남성인 아빠는 쏙 빠지고 엄마와 그 엄마 사이의 갈등만 커져간다. 효경은 손주의 육아를 맡아주기를 거절하고 어릴 적부터 꿈꿔왔던 오로라를 보기 위해 캐나다로 떠난다. 그의 동반자는 함께 사는 시어머니 동주다. 돌봄노동에서 해방된 두 사람은 “딱 내 몸 하나만 보살피는 지금은 일상이 얼마나 가뿐한지”(235쪽) 느끼며, 오로라를 보는 순간 관습이 요구하는 것과 정반대의 소원을 빈다. 효경은 “한민이 보기 싫어요!” 동주는 “죽을 때 고와 뭐해? 곱지 않더라도 오래 살 거야.”(248-249쪽)라고 외치며 웃는다. 지혜가 고민하던 육아의 문제는, 그 부담을 어머니가 아닌 남편에게 지우기로 하면서 뜻밖에 해결된다. “아이를 보는 내내 멍하니 창밖만 보던” 자신보다 “아이를 보느라 창밖을 볼 틈도 없던” 남편이 더 육아에 적합하다는 것을 깨닫고(256-257쪽), 시터 고용 및 시터와의 의사소통, 어린이집 상담 등을 남편에게 맡기는 것이다.


 가부장제의 억압에서 벗어날 때 우리는 반목하고 뒤틀렸던 관계를 바로잡고 다른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다. 작가가 전하는 여성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자. 이름조차 상실한 미스 김(<미스 김은 알고 있다>)에게도, ‘되바라진 요즘 여자애들’로 싸잡아 폄하되는 주하(<여자아이는 자라서>)에게도, 할 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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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1-08-13 12:5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어제 쓰셨는데 사라져서 오잉?했었어요. ㅎㅎ
오, ‘부재‘에서 찾으신 점 흥미롭습니다. 그리고 공감하고요.

근데 <가출>에서 그 아버지는 언제까지 딸 카드를 쓸지 약간 궁금... 점점 결제 금액이 커지던데.... ㅋㅋㅋㅋㅋ

독서괭 2021-08-13 13:21   좋아요 4 | URL
앗 처음부터 비공개로 등록해도 일단 떴다가 사라지는군요. 저도 가끔 오잉?한 적이 있는데 그런 거였군요 ㅋㅋ
저도 궁금해요. 이 아버지 대체 뭔 생각인지 ㅋㅋ

scott 2021-08-13 15:0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번 이 단편집 관심이 갔었는데
괭님 리뷰 읽으니 단편 하나하나에 담긴 의미가(현재 우리 삶에) 크네요

요책 일단 찜!👆

독서괭 2021-08-13 21:20   좋아요 1 | URL
찜~^^ 관심이 가셨던 책이라면 한번 읽어보시면 좋겠습니다^^

scott 2021-09-10 15:4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괭님 이달의 당선 축!
이번달은 리처가 아닌 조남주 작가님이 용돈 주쉼 ^ㅅ^

독서괭 2021-09-10 16:12   좋아요 4 | URL
앗, 저 이 글은 잊고 있었는데 이게 됐네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스콧님 손 어쩌죠? <이반 일리노비치의 죽음>이 당선작으로 뽑힐 거라고 손을 거셨었는데.. 음..

scott 2021-09-10 16:13   좋아요 2 | URL
네, 손꾸락 ! 요귀 .🖐

새파랑 2021-09-10 16:0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독서괭님 다음달에는 잭리처로 당선해주세요~!!

독서괭 2021-09-10 16:13   좋아요 4 | URL
ㅋㅋㅋㅋ 지난달 읽은 <원티드맨>이 별로였어서 리뷰를 못 썼네요. 지금 읽고 있는 <네버 고 백>으로 한번 노려보겠습니다!

미미 2021-09-10 16:0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괭님 당선 축하드려요~^^*♥

독서괭 2021-09-10 16:13   좋아요 3 | URL
미미님 감사하고, 저도 축하드려요^^

겨울호랑이 2021-09-10 16: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독서괭님 이달의 마이리뷰 당선 축하드려요! ^^:)

독서괭 2021-09-11 10:39   좋아요 0 | URL
호랑이님 감사합니다~^^

그레이스 2021-09-10 17: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독서괭님 축하드려요 🎉 🎈

독서괭 2021-09-11 10:39   좋아요 0 | URL
그레이스님 감사합니다~^^

이하라 2021-09-10 19: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독서괭님 축하드립니다^^

독서괭 2021-09-11 10:39   좋아요 0 | URL
이하라님 감사합니다~^^

페넬로페 2021-09-10 21:5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 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조남주 작가가 단편은 어떻게 썼을지 궁금합니다.**

독서괭 2021-09-11 10:40   좋아요 2 | URL
페넬로페님, 저는 이책이 조남주 작가를 처음으로 접한 거라 비교는 어려운데, 여러가지 생각을 많이 하게 하는 이야기들이라 한번 읽어보심 좋을 것 같아요^^

행복한책읽기 2021-09-11 00:3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괭님 축하드려요. 조남주님 책은 한권도 안읽었어요. 이 리뷰도 이제야 봤어요^^

독서괭 2021-09-11 10:41   좋아요 1 | URL
행복님 저도 이 책으로 처음 접했습니다. 리뷰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단발머리 2021-09-11 09: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독서괭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전 이 작품은 제가 직접 읽고 싶어서 리뷰 한 편도 안 읽었는데, 지금 독서괭님 리뷰 읽으니 읽고 나서 더 읽고 싶네요.
효경은 손주 육아 거절했는데(찬성), 시어머니랑 같이 사는(반대) 이유가 궁금해서요. 미리 알려주시면 감사링!!!!

독서괭 2021-09-11 10:42   좋아요 1 | URL
단발머리님 감사합니다. 여태 안 읽으셨는데 제 걸 읽어주시다니 영광이네요 ㅎㅎ 원래 시어머니 모시고 같이 살며 시어머니가 효경의 딸을 돌봐주셨은데 남편 죽고 나서도 계속 같이 산 것 같아요. 두사람이 잘 맞게 잘 살아서 보기 좋습니다^^

초딩 2021-09-11 14: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이달의 리뷰 당선 축하드립니다~
멋진날 되세요~

독서괭 2021-09-12 13:34   좋아요 0 | URL
초딩님 감사합니다~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

thkang1001 2021-09-12 1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독서광님! 이달의 리뷰에 당선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독서괭 2021-09-12 13:34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저 독서광 됐나요 ㅋㅋㅋㅋ 그 정도는 못 되는데 노력해봐야겠습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