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가 한중 일대에서 포교한 대상은 가난한 백성들이었지만 위나라에서는 지배층을 상대로 포교하면서 교리와 의식에 변화가 있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장로는 전투에서 패했지만 전쟁에서 이긴 셈이다. 오두미도의 교주였던 그에게는 넓은 땅을 차지하는 것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도교(오두미도)를 전파시키는 것이 중요했을 테니 말이다.

장비 등의 촉군이 무도군을 점령하면 그와 합류한 뒤 위수 상류로 진격하여 관중으로 쳐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장비 등의 군대가 무도군을 점령하지 못하고 후퇴하면서 북벌 시도는 막혔다. 유비는 한중군을 점령하고 조조가 직접 이끄는 군대를 처음으로 격파해 생애 최고의 승리를 맛보았으나, 절반의 승리였다. 장안과 관중을 점령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한중군을 점령한 후 유비가 성도로 돌아온 것이 전략상 착오였다. 형주에서 북진하여 번성을 포위하고 있던 관우는 유비처럼 철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관우의 고립. 그 결과는 관우의 죽음이었다.

회남에 주둔하여 손권의 군대를 막고 있던 장요까지 불러들인 것을 보면 당시 관우의 위세가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심지어 조조가 직접 관우와 싸우려고 했다. 조조의 맹장 5명 가운데 장합을 제외한 4명이 관우를 막기 위해 투입된 것이다. 조조가 관우의 북벌을 막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던 사실에서 관우의 번성·양양 공격은 단순한 영토 확장이 아니라 유비가 제갈량의 융중대 계획대로 추진한 북벌의 한 축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익주와 형주에서 동시에 출정하는 전략 말이다.

손권은 조조와 유비 모두에게 결정적인 순간에 일격을 가했다. 그는 적벽대전에서 조조의 군대를 물리쳐 조조의 천하통일 야망을 무산시켰다. 또한 유비로부터 형주를 빼앗고 2인자인 관우를 죽임으로써 유비의 북벌 계획에 큰 타격을 주었다. 두 사람이 천하를 차지할 수 있는 기회를 손권이 날려버린 것이다. 손권은 두 사람(조조와 유비)의 천하통일 시도를 막는 동시에 자신의 지지기반을 공고히 하는 데 성공했다. 한편으로 형주를 점령함으로써 조조의 공격을 막아내기 좋은 자연의 방어벽인 장강도 확보했다.

『삼국지』에서 관우의 기사는 965자에 불과하다. 이렇듯 짧은 기록으로 관우를 제대로 평가하는 것은 무리다. 그러나 현존 자료에 의지하여 관우를 평가하면, 그는 시기심이 강하고 남을 깔보는 성격이어서 적을 많이 만드는 스타일이었던 것 같다. 관우가 학문에 조예가 깊다는 학자 이미지는 말 그대로 이미지일 뿐이다.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속담도 있지만, 관우가 사후에 이렇게 추앙받은 이유는 무엇일까? 전근대 중국 정부는 백성들이 믿는 종교를 국가권력 안으로 포섭하려고 했다. 조정은 불교의 승려나 도교의 도사들에게 관직을 주어 황제의 신하로 격하하는 작업을 꾸준히 벌였다. 관우는 점점 일반 백성들의 신앙 대상이 되어갔고, 국가 차원에서 그에게 보인 예우는 한편으로 ‘관우 신앙’을 통제하려는 시도였을지도 모른다.

산서상인들이 부를 축적하자 다른 지역 사람들은 산서상인들이 돈을 잘 버는 이유가 관우에게 제사를 지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너도나도 앞다투어 관우의 사당인 관제묘에서 제사 지내며 돈을 잘 벌게 해달라고 빌게 되었다. 이 덕에 관우는 산시성의 토착신에서 전국적인 재물의 신(財神)이 되었다.

관우가 반동탁연합군에 종군하는 동안 더운 술이 식기 전에 동탁의 부하 화웅의 목을 베었다는 이야기(5회)는 소설 초반부터 관우의 압도적인 용맹함을 보여주며 독자를 사로잡는데, 정작 『삼국지』에 따르면 화웅을 죽인 사람은 관우가 아니라 손견이었다. 게다가 당시에는 데워먹는 술, 즉 증류주(배갈, 소주)도 없었다. 증류주는 몽골이 중국을 지배하던 원나라 시대 아랍에서 중국으로 전파되었다.

『삼국지/관우전』에서는 관우가 안량을 참했다고 기록했지만 문추를 죽인 주체는 기록하지 않았다. 또 그렇게 조조의 휘하에서 공을 세우다가 유비가 원소 진영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찾으러 떠나는 도중에 5개의 관(五關)에서 자신을 막아서는 여섯 장수를 죽였다는 이야기(24~28회)도 사실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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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3-01-14 13: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삼국지를 정비석 작가의 6권 세트로 읽었어요. 열 권짜리가 길어서 나 나름대로 머리를 쓴 거죠. 히힛^^
좋은 독서 시간을 가지시길 응원합니다.

겨울호랑이 2023-01-14 14:17   좋아요 1 | URL
저도 소설 <삼국지>를 재밌게 읽었는데, 이번에 역사 <삼국지>와 소설 <삼국지>의 차이를 알게 되니, 소설 못지 않게 흥미롭게 읽히네요. 비가 제법 많이 오는 주말입니다. 페크님께서도 여유로운 주말 되세요, 감사합니다! ^^:)
 

『삼국지』와 『후한서』의 유표 관련 기록을 비교하면, 전자는 유표를 평범하면서도 관도 전투 때 원소와 조조 사이에서 간을 본 기회주의자이자 황제 놀이를 했던 역적으로 묘사한 반면, 후자는 유표가 형주에서 선정을 베풀고 헌제를 돕고 조세를 낙양 조정에 보낸 충신으로 기록했다. 『삼국지』는 유표가 먼저 헌제를 도왔다는 기록을 누락함으로써 조조만이 헌제를 도운 유일한 군벌이라고 부각시킬 수 있었다.

유표의 선정을 역사의 기록에서 지워버린 『삼국지』를 보면서, 역사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테러의 신랄함을 절실히 느낀다. 로마에서 가장 심한 형벌은 사형이나 재산 몰수가 아니라 역사와 기록에서 이름을 지우는 것이었다는 사실이 이해가 된다.

정사와 소설에 기록된 적벽대전의 상황을 보면 조조의 수군은 수전을 벌이는 상황에서 화공에 당한 것이 아니라 강가에 정박해둔 상태에서 화공을 당했다. 좁은 공간에 수백 척의 배를 정박해두었으니 배들은 서로 닿을 정도로 촘촘하게 들어서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굳이 배를 묶어놓지 않았다고 해도 황개의 군사들이 불을 질러 조조의 전함으로 돌진하고 바람까지 불면 밀집한 배들에 불이 옮겨 붙기 쉬웠을 것이다.

손권은 북벌을 위한 교두보를 택한 반면 유비는 실리를 취했다고 해석할 수도 있지만, 손권이 남군 전체를 차지한 것도 아니었고 반격 또한 조조군에 막혔다. 반면 유비는 알짜배기 강남 4군을 점령하여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다.

유비의 인생은 제갈량 영입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을 만큼 확연히 달라졌다. 제갈량이 유비와 유비 부하들의 인생을 바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제갈량의 업적은 거기까지였다. 융중대에서 말한 천하삼분은 실현했으나 천하통일은 성공하지 못했다. 차차 이야기하겠지만 천하통일의 실패를 제갈량의 탓으로 돌리기는 힘들다. 북벌의 실패, 관우의 죽음과 유비의 무모한 복수전 등 아마 융중대 당시에는 생각하지 못한 변수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장로가 순순히 조조에게 항복한 것은 나름대로 정치적 계산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부 학자들의 분석에 따르면 조조에게 항복한 후 장로는 조조와 부하들에게 오두미도를 포교했다고 한다. 훗날 조조의 아들이 세운 위魏나라와 사마의의 손자가 세운 진晉나라의 지배층 가운데 도교를 믿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특히 동진과 남조 시대 최고 문벌인 낭야瑯? 왕씨王氏는 대대로 도교를 신봉했다.

『삼국지/장비전』에서는 유비가 익주 평정의 일등공신인 제갈량, 법정, 관우, 장비에게 각각 금 500근과 은 1,000근, 동전 5,000만 전, 비단 1,000필을 하사하고 나머지 장수와 관리, 병사들에게도 차등해 지급했다고 기록했다. 또 여러 부하가 성도성 안에 있던 집과 성 밖의 논밭, 과수원, 채소밭 등을 장수들에게 나눠주자고 건의했지만 유비가 조운의 진언을 듣고 생각을 바꿨다고 하는데, 배송지주에 인용된 『조운별전』의 이 기록대로라면 유비의 군대는 성도의 재산을 탈취하고 자신들이 차지하려고 한 도적과 다름없는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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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 넓은 시각에서 본다면 그래도 인간은 어떻게든 올바른 방향, ‘인간적인’ 길을 찾아왔다. 질병이자 저주였던 어떤 상태가 축복의 대상으로 변해온 과정은 그대로 인간이 자기를 옭아맨 편견과 차별의 굴레를 벗어 던지고 스스로를 해방시킨 역사다.

자폐증이란 병명이 생긴 것은 2차대전 즈음으로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그러나 병명이 사회적 낙인이 되자 자폐로 진단받은 어린이와 가족은 도저히 어찌해볼 수 없는 무지와 편견에 시달렸다.

자폐의 역사에서 한순간도 빠짐없이 항상 그 자리에 있었던 존재는 부모들이다. 때로는 절망으로, 때로는 분노로, 그리고 항상 넘치는 사랑으로 자녀들을 위해 분연히 일어섰던 평범한 엄마와 아빠들이다. 그들의 목표는 두 가지, 왜 자녀에게 자폐가 생겼는지 밝히고, 자폐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인류학, 동물학, 유전학, 심리측정학 등 비교적 새로운 과학들의 결합에서 탄생한 우생학은 인류의 혈통에서 결점과 불순물을 씻어버릴 수 있을 가능성을 제시했다.

당시로서는 매우 이례적으로 정신장애 어린이를 대변하며 기존 의학계에 도전장을 던진 사람은 존스홉킨스 대학 소아정신과 전문의 레오 카너Leo Kanner였다.

카너는 개인의 병력을 구성하는 방법을 개발했다. 무미건조하게 일자와 증상만 나열했던 당시의 방법에서 벗어나 환자의 경험을 완전한 문장으로 적고 문단을 생생하게 전개시켜 가며 자신이 관찰한 세부사항을 더해 하나의 서사를 구성했다. 이런 방식은 결국 다른 의사들과 전혀 다른 그만의 특징으로 발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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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비우스 로마사 2 - 끝나지 않는 전쟁 리비우스 로마사 2
티투스 리비우스 지음, 이종인 옮김 / 현대지성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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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렇게 하여 인간의 욕망이 끝없이 추구하는 세 가지 대상 곧 토지, 돈, 출세가 동시에 시비의 대상이 되었다. _ 티투스 리비우스, <리비우스 로마사 2> , p90/634


  티투스 리비우스 (Titus Livius Patavinus, BCE 59/64 ~ ACE 17)의 <리비우스 로마사 2 Ab Urbe Condita Libri>은 <리비우스 로마사> 6~10권까지 내용을 담고 있다.  BCE 389 ~ 293에 해당하는 이 시기 로마 역사는 일정한 공식 안에서 움직인다.


 집정관 선출을 둘러싼 귀족과 평민의 갈등과 대립으로 인한 분열 상태, 이러한 분열을 틈타 침략하는 외적들 또는 원로원의 전쟁 결의, 전쟁 수행을 위한 독재관 선출과 인테르레그눔(Interregnum)이라는 권력 공백기, 전쟁 이후 내전에 준하는 귀족과 평민의 갈등... <리비우스 로마사 2>에 해당하는 거의 모든 시기는 이 순환고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오히려, 시간이 흘러 로마가 이탈리아 반도로 급격하게 팽창하면서도 이 문제는 해결되지 못하고 로마 공화정의 해묵은 과제가 되버렸음을 본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평민과 귀족들은 무엇 때문에 대립했을까?


 처음에 도시는 그것을 일으켜 세운 똑같은 기둥 되는 인물에 의존했다. 즉 도시의 지도자급 시민인 마르쿠스 푸리우스 카밀루스(Marcus Furius Camillus)에게 의존했던 것이다. 그는 공식적으로 한 해가 끝나는 때에 독재관 직에서 사임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도시가 함락되었을 때 관직에 있었던 집정관급 정무관들은 다음 해의 선거를 주관하지 않는 것으로 결정되었고, 그리하여 국가는 인테르레그눔(집정관 궐위 기간) 체제로 돌아갔다. _ 티투스 리비우스, <리비우스 로마사 2> , p9/634


 평민들의 요구사항은 BCE 367년에 제정된 리키니우스-섹스티우스 법(leges Liciniae Sextiae)에 잘 표현된다. 법안의 내용인 부채 상환과 공유지 면적 제한, 집정관 선출 등에 대한 평민들의 요구는 지속적으로 이루어졌고, 이에 대해 귀족들은 평민들의 통치 능력에 의문을 제기하며 법안을 잘 지키지 않는다. 또한, 실제 전장에서 평민 출신 집정관들이 연이어 패전하면서 귀족들에게 리키니우스 법안을 따르지 않을 좋은 명분을 얻었고, 내분은 가속화되었다. 이러한 심각한 위기 상황에 대해 매번 로마는  독재관 선출이라는 임기응변을 통해 극복한다.


 가이우스 리키니우스 스톨로와 루키우스 섹스티우스가 호민관으로 선출되어 3가지 법안을 주장하고 나섰다. 세 법안 모두 귀족들의 힘을 억제하고 평민들의 이해관계를 강조하는 것들이었다. 첫 번째 법안은 부채 문제에 대응하는 것이었는데, 빌려온 원금에서 지금껏 지불한 이자의 액수를 공제하고 그 나머지 금액을 3년에 걸쳐 3회에 균등 상환한다는 것이었다. 두 번째 법안은 토지 소유에 상한선을 부과하여 개인이 5백 유게룸 이상의 땅을 소유하지 못하게 하자는 것이었다. 세 번째 법안은 집정관급 정무관 제도를 철폐하고 예전처럼 두 명의 집정관을 선출하되 그 중 한 명은 평민 출신으로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들은 아주 중요한 법안으로서, 치열한 투쟁을 벌이지 않는 한 성취하기 어려웠다. 이것을 가리켜 섹스티우스-리키니우스 법안이라고 한다. _ 티투스 리비우스, <리비우스 로마사 2> , p89/634


 귀족들은 그 참담한 실패에 경악하기보다는 평민에게 군대 지휘권을 부여하여 불행한 결과가 발생했다고 분노했고, 온 도시에는 그들의 성난 고함소리가 가득했다: "봐라, 평민들 중에서 집정관을 뽑아서, 그런 권리를 누릴 자격도 없는 자에게 군대 지휘권을 주었더니 이런 참담한 결과가 빚어지지 않았느냐! 평민들은 민회의 투표로 귀족들을 관직에서 몰아낼 수는 있었지만, 그들의 정당하지 못한 법률은 영원불멸의 신들을 설득하지는 못하지 않았느냐. 신들은 그들의 신성과 조점권에 대한 모욕을 그런 식으로 복수한 것이다. 인간이든 신이든 법률에 의해 이런 것들을 관장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는 자가 감히 조점권을 주장하고 나섰기 때문에, 로마 군과 그 사령관이 몰살당한 것이다. 앞으로는 귀족 가문의 권리를 짓밟는 선거를 절대로 개최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인 것이다." _ 티투스 리비우스, <리비우스 로마사 2> , p129/634


 로마 지도부는 1세기 동안 분열을 위한 적극적인 해결책을 모색하는 대신 전쟁을 택한다. 그들은 때마침(?) 3차례에 걸친 삼니움 전쟁(Samnite Wars, BCE 343 ~ 290)과 라티움 전쟁(Latin Wars, BCE 340 ~ 338)을 통해 내부의 불만을 일단 잠재우고 시선을 외부로 돌릴 수 있었다. 로마인으로서 평민과 귀족들로 갈라져 싸우던 이들은, 로마군(軍)이라는 하나의 조직아래에서는 '지휘관-병사'로 일체가 되어 국난을 극복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여기에서 수많은 역사가와 작가들이 그토록 칭송해마지 않는 '개인보다 공동체를 우선시하는' 진정한 로마인과 로마 공화정의 모습을 처음으로 확인하게 된다. 그들은 사익(私益)보다 공익(公益)을 우선시 한 로마인 정신이 위기 극복의 동력이라고 하지만, 과연 이 시대가 진정으로 위대한 로마정신이 발현되는 출발점이라 할 수 있을까?


 데키우스는 계속 행군해야 하는 병사들이 무거운 짐으로 고생할 것이 우려되어 그들은 불러 모아 놓고 이런 연설을 했다. "병사들이여, 여러분은 이 정도의 승리로 만족하고 이 정도의 전리품으로 흡족하다고 생각하는가? 여러분의 기대가 여러분의 용기에 걸맞은 그런 높은 것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삼니움 족의 모든 도시들과 그 안에 내버려진 모든 물건들이 여러분의 것이다... 그곳에서는 힘든 일은 별로 없고 더 많은 전리품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다!" 전리품은 매각되었고 병사들은 어서 행군하자고 사령관을 재촉하면서 로물레아로 갔다. 그곳에서도 공성 작업이나 공성기 동원은 필요가 없었다. 로마 군이 일단 성벽에 접근하자 그 어떤 것도 그들을 물리칠 수 없었다. _ 티투스 리비우스, <리비우스 로마사 2> , p486/634


 삼니움 전쟁에서 지휘관이 병사들을 독려하는 연설은 로마 공화국의 위기탈출 방식을 잘 보여준다. 귀족(그리고 원로원)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내려놓고, 체제의 약한 부분을 개혁하는 대신 거대한 외부의 적(敵)을 통해 현재의 불만을 가라앉히고 내부 단결을 도모하는 정책을 선택한다. 거대한 적은 막대한 전리품의 다른 말이기도 하다. 전쟁에서 이기기만 한다면. 여기에 평민들 또한 적극적으로 자신의 전쟁에 뛰어들고, 귀족들은 전쟁에서 얻어진 전리품을 평민들에게 배분하면서 그들의 양(量)적인 불만을 채우고, 적들은 동맹으로 끌어들이면서 자신의 기득권과 로마의 몸집을 불리는 정책의 결과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의 패자(覇者)가 되었다. 


 우리는 당신의 노예가 아니라 당신의 병사 자격으로 복무합니다. 우리는 유배를 떠나온 게 아니라 전쟁을 하러 나왔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전투 신호를 내린다면 우리는 남자답게 또 로마인답게 싸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무기가 필요 없다면 우리는 군 진영이 아니라 로마로 돌아가서 편안한 시간을 보내고 싶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귀족들에게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_ 티투스 리비우스, <리비우스 로마사 2> , p144/634 


 이러한 로마 귀족들의 정책에 대해 평민들은 종군을 통해 자신의 이익을 얻었으며, 삼니움과 라티움 주변 민족들 또한 동맹의 대가를 적절하게 받는 편으로 절충하는 방안을 선택한다. 전쟁을 통한 막대한 전리품이 보장된다면, 원로원 중심의 정체(政體)와 로마를 중심으로 한 동맹관계에 별다른 이의없이 수긍하는 로마의 평민들과 라티움 동맹국들의 행동에서 과연 로마의 정신이라 할 부분이 있는가. 여기에 위대한 로마인의 정신이 개입할 여지는 없다. 대신 계산빠른 경제적 인간(Homo Economicus)들만이 있을 뿐이라 생각된다. 그들이 로마 공화정에 대해 반기를 들었던 부분은 사실이지만, 결과적으로 그들의 투쟁은 자신의 몫을 조금 더 받기 위한 쟁의 행위에 불과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후에도 그들은 로마 공화정의 이름 아래 정복전쟁에 함께 참여했던 것을 돌이켜 본다면, 부르투스가 지키려 했던 공화정의 가치란, 제정이라는 '독점(獨占)'에 반대하는 '과점(寡占)'주의가 아닌가를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이들 과점주의자들은 현실의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하기 보다 문제를 회피하고 다음 세대로 넘기는 무책임한 모습을 보인다는 점에서 로마인의 정신에 대해 회의(懷疑)를 갖게 된다...


 <리비우스 로마사 2>에서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국내 문제를 덮고 손잡은 평민-귀족의 모습이 그려진다면, 이어지는 시기에서 이들은 한니발(Hannibal Barca, BCE 247 ~ 183)이라는 더 강대한 위협에 대해 하나가 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는 다음 리뷰에서 살펴보도록 하자...


 우리는 무력으로도 라티움을 자유롭게 해방시킬 수 있으나, 그래도 로마와의 지난 관계를 생각하여 이런 양보안을 내놓으려 합니다. 우리는 양국에 똑같이 공정한 평화 조건을 내놓겠습니다. 영원불멸한 신들은 우리가 힘에서 로마와 똑같은 나라가 되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집정관 두 명 중 한 사람은 로마에서 뽑고, 다른 한 사람은 라티움에서 뽑아야 합니다. 원로원 의원 구성도 두 민족에게서 동수로 선출해야 합니다. 그래야 한 민족 한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동일한 권위의 자리가 마련되고 모든 것이 명실상부해집니다. 한쪽이 필요한 양보를 하면 양쪽이 모두 혜택을 보게 됩니다. 그리하여 로마를 우리의 어머니 도시로 만들고 우리 모두 로마인이 됩시다. _ 티투스 리비우스, <리비우스 로마사 2> , p232/634


그해(기원전 352년) 말에, 귀족과 평민 사이의 갈등 때문에 집정관 선거가 열리지 못했다. 호민관들은 선거가 리키니우스 법에 의해 거행되지 않으면 선거를 치를 수 없다고 주장했고, 반면에 독재관은 집정관 자리를 귀족과 평민 모두에게 공개하느니, 차라리 그 자리를 정부 제도에서 아예 제거해 버리겠다고 단호하게 결심했다. 따라서 선거는 독재관 임기가 끝날 때까지 열리지 못했고, 다시 한 번 인테르레그눔 체제가 들어섰다. 인테르렉스들은 평민들이 귀족들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을 발견했고, 그리하여 정치적 갈등이 계속되는 가운데 열한 번째 인테르렉스까지 들어섰다._ 티투스 리비우스, <리비우스 로마사 2> , p162/634

조약이나 동맹은 동등한 권리를 보장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전에 부끄럽게 여겼던 로마의 지배권을 인정하려 합니다. 로마는 ‘동맹군‘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 아래, 우리의 군대를 로마의 군대에 추가하여 그들의 병력을 두 배로 늘리려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군대가 로마의 허가 없이는 전쟁을 시작하고 끝내는 독립된 결정을 하지 못하게 합니다. 이것이 공정이고 동맹입니까? 왜 모든 것이 이처럼 공정하지 못합니까? 왜 라틴 인 출신의 집정관은 없는 겁니까? 힘을 공유할 수 있어야 권위도 공유하게 되는 겁니다.

로마는 동맹이 반란을 일으킬 경우, 그 반란의 진압에 조력해줄 동맹을 구하고 또 군사력 강화를 위해 도시의 인구를 계속 늘려나갔다. 그 결과 세계 최강국의 지위에 오를 수 있었다. 로마는 자국을 위해 이탈리아 전역에서 많은 동맹국들을 만들었고, 그런 동맹국들은 법률적 관점에서 볼 때 로마와 유사한 생활을 했다. 하지만 제국의 권좌를 틀어쥐고 군사적 지휘권을 확보했기 때문에 동맹국들이 부지불식간에 로마의 통제 아래로 들어가게 되었다. _ 티투스 리비우스, <리비우스 로마사 2> 작품 해설 , p600/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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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소와 조조의 중요한 차이는, 원소는 모사들의 간언을 듣지 않았던 데 반해 조조는 귀 기울여 들었다는 데 있었다. 게다가 원소는 모사들을 제대로 지켜주지도 못했다.

가족 사이의 불화도 패인의 하나이다. 군웅할거시대에 유독 원씨 가문만 두 사람의 야심가를 배출했다. 바로 원소와 원술이다. 두 사람은 원래 배다른 형제였으나 원소가 양자로 입적되며 사촌지간이 되었다. 이 둘이 힘을 합쳤다면 원소가 더 빨리 화북을 통일할 수 있었겠지만 두 사람은 반목했다. 오히려 서로의 적과 동맹을 맺어 형제끼리 싸웠다. 원술은 원소의 적인 공손찬과 힘을 합쳐 원소에 반항했고, 원소는 조조, 유표와 동맹을 맺어 원술을 견제했다. 결국 원소와 원술의 경쟁은 원술이 조조에게 패해 남양군에서 회남으로 쫓겨남으로써 원소의 승리로 끝났다.

10번 이상 전투에 참여하고 승률 80% 이상인 장수는 장요, 악진, 우금, 장합, 서황, 하후연, 조인 등이다. 이 가운데 조조의 친인척인 하후연과 조인을 제외한 5인은 공교롭게도 『삼국지』 권17에 배치되었고, 다섯 장수를 모두 명장이라고 못 박았다.

유비는 지역 기반을 잃고 새로운 곳을 차지하기 위해 유랑하느라 많은 지역을 돌아다녔던 데 반해 조조는 정복을 위해 여러 지역으로 진격했다. 조조는 유비보다도 더 긴 거리를 행군했고, 더 많은 그리고 더 넓은 지역으로 진격했다.

조조는 오환교위 염유閻柔가 거느린 오환 1만여 락을 중국 내지로 옮기고, 항복한 삼군오환은 군대에 편입시켰다. 삼군오환은 ‘명기名騎’로 이름을 떨쳤다. 오환의 기병들은 ‘돌기突騎’ 혹은 ‘오환돌기烏丸突騎’라고 불렸으며, 용맹함과 막강한 전투력으로 유명했다.
후한시대에도 굴복시키지 못한 오환을 정복한 조조는 역사에 길이 남는 업적을 세웠다.

손권은 통치 기간 동안 적어도 9회나 근거지를 옮겼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결국 손권은 형주, 즉 장강 중류에서 발생한 군사적 대립과 전쟁에 대처하기 위해 장강 중류의 시상, 무창, 육구, 공안에 잠깐씩 주둔한 것이다.

손권의 큰 업적 가운데 하나가 강남 개발이다. 현재의 ‘개발’은 콘크리트 건물들을 잔뜩 세우는 것을 뜻하지만 당시에는 황무지를 농토로 개간하는 것을 뜻했다. 조조가 둔전제를 실시한 것처럼 손권도 둔전을 실시했다. 손권이 언제 둔전을 실시했는지는 기록이 없지만 어떤 학자는 203년 혹은 204년에 시작되었다고 추정한다. 조조의 둔전이 민둔의 비중이 큰 반면 오나라의 둔전은 군둔이 많았다.

한마디로 손권 정권은 공식 통계에 잡히지 않아 부족해진 인구, 세원을 보충하는 방법으로 사람 사냥에 나섰던 것이다. 조조가 농민을 상대로 둔전제를 실시하고 세습 군호를 두어 군사 수를 유지했던 조치와 비교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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