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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년 10월과 11월 사이에 할머니 산소가 있는 전라도 강진을 갑니다. 하루동안의 짧은 일정이지만, 산소에 들르고 어른들께 인사를 드린 다음 강진과 해남의 문화재나 유적지를 돌아본지도 5년 정도 되었습니다. 그동안 다산 유배지, 김영랑 생가, 백운동 별서정원 등을 들렀고 이번에는 병영(兵營) 성터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멀리서 바라본 병영성터는 황금색 벌판과 어울어져 마치 황금성처럼 보였습니다. 곡창지대인 호남에서도 병영이 위치한 곳은 산으로 둘러싸여 천연의 군사요새임을 한 눈에도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병영과 관련한 내용을 해설 <대동여지도 大東輿地圖>에서 찾아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병영(兵營) 조선의 전라도 육군 전체를 호령하던 병마도절제사영(兵馬都節制使營)이다. 원래 광주(光州)에 있었는데, 1417년(태종 17년) 도강고현(道康古縣)으로 옮겨온 것이다. 전라도는 물론 제주의 군대를 총괄하는 본부였기에 소속 군인들과 몰려든 상인들로 제법 큰 고을을 이루었다. 17세기 중반, 제주도에 표류한 네델란드인 헨드릭 하멜(Hendrick Hamel) 일행이 곳에 8년 동안 억류되기도 하였다.(p247) <해설 대동여지도> 中


 전라도 육군을 총괄하는 군사기지인만큼 요충지에 자리잡고 있는 것도 당연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제는 성 가까이 다가가 보겠습니다.



 원래 성터만 남은 곳이었으나 최근 복원 공사가 한창이라 제법 모습을 갖춘 읍성(邑城)의 모습을 확인하게 됩니다. 마치 서산의 해미읍성(海美邑城)을 연상케 하는 성의 외관입니다. 복원된 성에는 성곽 일부분을 외부로 돌출시켜 적을 제압하는 치성(雉城)도, 외적으로부터 침입을 방어하는 해자(垓字)도 갖추어져 있어 작지만, 완벽한 요새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읍성(邑城)은 고려 말에 홍건적(紅巾賊)과 왜구(倭寇)가 들끓자 이를 방어하기 위해 관아가 있어 나라를 다스리던 지역에 쌓기 시작하여 조선시대로 계승된 것이다. 세종, 성종 때에 많은 읍성들을 축조하였는데, 기존의 토축성을 석축성으로 다시 쌓은 것이 많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95개소, <증보문헌비고>에 따르면 104개소의 읍성들이 있었다고 한다. 읍성의 모양은 방형과 원형이 많은데, 이는 산 위에 건축되기보다 평지나 구릉지에 축성되기 때문이다. 또 때로는 부정형의 읍성도 있다. 성내에는 관아, 객사, 향청, 훈련원, 중영, 군기고 등을 두어 나랏일을 보고 평시나 비상시 성을 방비한다. 현재 전국에는 동래읍성 등 109개소의 읍성이 남아 있다.(p229) <한국건축사> 中


 역사 속에서 병영은 하멜(Hendrik Hamel, 1630 ~ 1692)과 그 일행이 머물던 곳으로 유명합니다. 이곳에서 하멜과 일행은 1656년부터 1663년 대기근이 일어나 남원, 순천, 좌수영(여수)로 분산되기까지 약 7년간 머무르게 됩니다.


 1656년 3월 어느날 아침에 출발하여 오후에는 태창(泰倉 큰 창고) 혹은 전라 병영(兵營)이라 불리는, 성채가 있는 어떤 큰 고장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관찰사 다음으로 권위가 있는 전라도 군사령관인 절도사 節度使의 관저가 있었다... 우리가 있는 곳은 제주로부터 90km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고 해안과 가까운 곳이었다.(p55) <하멜표류기> 中


 <하멜 표류기> <조선왕국기>로 처음으로 서양에 조선을 소개한 하멜이기에, 그가 한동안 병영에 머물렀다는 사실때문에, 병영성 근처에는 하멜 박물관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병영과 조선에서의 기억은 하멜에게 그리 좋은 기억만은 아닌 듯 합니다.


 신임 좌수사가 7월에 부임해 왔는데 그도 역시 전임자와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많은 일을 시키려 했다. 우리들 각각에게 매일 일백 패덤(fathom 약180m)이나 되는 새끼를 꼬라고 했다. 우리는 이 일이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전임자에게 했던 것처럼 우리의 제안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그는 만약 우리가 그 일을 할 수 없다면 다른 종류의 일을 시키겠다고 협박했다. 만약 그가 우리에게 일을 시키면 후임자들도 계속 똑같이 할 것이며, 일단 그런 관행이 이루어지면 쉽사리 바꾸어지기 어렵기 때문에 우리는 노예가 될 것이라는 자각이 들었다... 그래서 우리는 배를 구하려고 온갖 수단을 다 모색했다. 이 심술궂은 사람들 밑에서 매일 슬픔에 젖어 노예 상태로 사느니보다 차라리 한번 모험을 해보기로 했다.(p68) <하멜표류기> 中


 그렇다면, 조선에게 하멜은 좋은 방문자였을까 생각해보면 이 역시도 아닌듯 합니다. 인도네시아를 식민지로 삼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소속의 하멜은 밀린 급여를 받기 위해 일지를 썼으며, 조선의 풍습, 지리 등을 기록하는 것이 제국주의(帝國主義) 국가들의 초기 탐색 과정임을 생각한다면 조선에게도 하멜은 그리 달가운 손님은 아니라 여겨집니다.


 원전인 <하멜일지>는 헨드릭 하멜이 조선에서의 억류생활 후 탈출해 네덜란드로 돌아간 다음에 쓴 기록이며 보고서였다. 그리고 이 보고서의 목적은 조선에 억류된 기간의 임금을 동인도회사에 청구하기 위함이었다.(서문)... 조선을 서해안으로 접근해야 하는 이유는 동해안과 남해안에는 만의 안쪽과 입구에 눈에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절벽과 암초가 많기 때문이다. 조선의 수로 水路 안내인은 우리에게 서해안이 가장 접근하기 좋다고 말했다.(p141)<조선에 관한 기술> 中


 하멜과 조선과의 관계는 하멜의 말처럼 포로 - 간수의 관계 이상은 아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원수일지도 모를 이들의 관계를 오늘날 우리가 필요에 의해 친한 관계로 포장한 것은 아닐까 생각을 하면서 병영성을 떠나왔습니다... 



 그러나 우린 이교도의 국가에 잡혀 있는 불쌍한 포로라는 것을 깨닫고 그들이 우리를 살려 주고 죽지 않게 먹여 주는 것만으로도 하나님에게 감사하며 이 모든 고통을 견뎌야 했다.(p66) <하멜표류기>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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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9-12-06 09: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래전 정민 선생님과 함께 한 강진 답사
에서 하멜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나네요.

하멜 표류기가 사실은 하멜이 소속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인가에서 보험금
을 받기 위해 작성한 보고서라는 이야
기도 어렴풋이나마 기억이 납니다.

겨울호랑이 2019-12-06 09:27   좋아요 0 | URL
그렇습니다. 하멜의 이기적인 마음에서 한 행동이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조정되어 의도치 않게 조선을 소개한 역사적인 책이 되버린 듯 합니다.^^:)
 

 박시백 작가의 <35년> 3권은 1910년부터 1925년까지의 시기를 다룬 작품이다. 일제무단통치부터 1920년대 사회주의 운동이 일어난 이 시기의 변환점은 역시 3.1혁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무단통치에 대한 저항으로 일어난 3.1혁명과 이의 좌절. 그리고 이어지는 투쟁이 시대의 큰 흐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35년 1권 : 1910 -1915 무단통치와 함께 시작된 저항>


 1910년 초대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의 임명으로 시작된 일제의 조선지배는 시작되었다. 사상, 언론, 종교, 교육의 모든 분야에서 내선일체(內鮮一體)을 지향하며 기존 질서를 뿌리부터 흔든 일본의 통치는 민족 탄압으로 이어졌으며, 일제는 강제 동화정책을 추진했다. 동양척식주식회사에 의한 토지수탈은 지주-소작제도의 정착과 함께 많은 이들을 국외(특히 간도)로 떠날 수 밖에 없었는데, 이들이 훗날 해외독립투쟁의 주역이 되었다. 


<35년 2권 : 1916 -1920 3.1 혁명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의 영향으로 일본에서 2.8 독립선언, 1919년 3.1 혁명이 일어나게 된다. 서울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은 일본의 야만적인 진압으로 인해 비록 뜻을 이루지 못했지만, 이를 통해 대중들이 깨어나면서 만주, 연해주 지역에서 독립군 투쟁과 1920년대 대중투쟁의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


<35년 3권 : 1921 - 1925 의열투쟁, 무장투쟁 그리고 대중투쟁>


 3.1혁명의 결과 일제는 문화통치를 표방하였으나, 실제로는 조선의 지식인들을 친일파로 포섭하고, 보이지 않는 차별, 검열 등으로 민중에 대한 통제는 더 강화되었다. 또한, 산미증식계획으로 대표되는 식민지 수탈이 이 시기로부터 본격화되었다. 한편, 국외의 무장독립투쟁은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의 성과를 올렸으나, 경신참변으로 대표되는 일제의 민간인 학살 등으로 근거지를 옮기게 되었고,  자유시 참변을 계기로 그 세가 크게 꺾이게 되었다. 이후 독립 투쟁은 약산 김원봉으로 대표되는 의열단 활동과 사회주의 운동이 뒤를 잇게 되었다.


 <35년>이 배경으로 하는 일제시대는 어둡고 희망이 없던 시대로 느껴진다. 원치 않은 식민지배의 역사는 아픔을 전해 주기에, 찢겨진 상처를 바라보는 것처럼 고통스럽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이 시기 역사를 똑바로 바라봐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1910년대 조선에 신작로와 각종 근대화 설비를 가져다 놓으며, 일제 시대 이후 생활양식이 크게 변화한 것처럼, 우리 삶과 현대의 많은 문제들이 일제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시대로부터 결코 눈을 뗄 수 없다. 조선의 근대화를 부르짖은 개화기 지식인들과 독립선언서를 작성한 민족대표들이 1920년대 이후 변절하는 모습에서 우리는 뉴라이트 지식인들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또한, 1920년대 민족 신문인 동아일보, 조선일보가 1925년 일제탄압으로 인해 어용신문으로 변질되는 모습에서 현재 언론 모습의 뿌리를 발견할 수 있으며, 1921년 자유시 참변을 통해 한국전쟁 이전 동족상잔의 비극도 확인하게 된다. 또한, 1920년대 일제에 의한 학교설립 규제가 오늘날 사학재단의 문제와도 무관하지 않음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지금 이 순간도 일제의 잔재와 함께 살아가고 있음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이처럼 일제시대에 이루어진 많은 사건들이 오늘날 우리 삶과 직접, 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기에 우리는 고통스러워도 이 시기로부터 눈을 돌려서는 안될 것이라 생각한다.


 이러한 면에서 볼 때, 박시백 작가의 <35년>은 암울한 시기의 역사를 만화로 그려내면서도 많은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이라 생각된다. 그리고, 이 시기의 문제점과 함께 과거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결코 무기력하게 일본에 굴복한 것이 아니라 국내, 하와이, 연해주, 만주 등지에서 치열하게 독립을 위해 싸웠음을 잘 보여준다는 점에서 일독(一讀)할 가치가 있는 책이라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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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단고기 桓檀古記>는 계연수(桂延壽, ? ~ 1920)가 1911년 간행한 것으로 알려진 책이지만, 정통사학계에서는 이를 위서(僞書)로 판단하고 있어 역사사료로 인정받지는 못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환(한)단고기>와 인연은 꽤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1988년으로부터 시작된다. 중학생이었던 당시 <단 丹>과 함께 흥미롭게 읽었던 책으로 <환단고기>를 기억한다. 소설 <단 丹>도 역시 인상적인 소설이었는데, 특히 소련연방 해체 전에 이를 예언(?)한 내용이 담겨 있어서, <한단고기>는 강대한 우리 조상들의 역사가 담겨 있어 흥분하며 읽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최근 <환단고기>를 다시 읽을 기회가 있어 다시 읽었지만, 예전과는 달리 <환단고기>는 벅찬 감동 대신 몇 가지 의문을 내게 주었다.

 

그리고, 이번에 다시 <환단고기>를 읽으면서 전에 읽었을 때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충격을 몇몇 대목에서 받았다. <환단고기>의 목적성이라고 해야할까. 역사서로서의 사실 여부를 떠나 그 안에 담긴 목적이 너무도 뚜렷하기에, 책을 읽기 많이 어려웠다. 그 중 한 대목을 살펴보자. 


於阿 於阿여 

我等百百千千人이 皆大弓堅勁同心하니 倍達國光榮이로다.

百百千千年의 大恩德은

我等大祖神이로다.

我等大祖神이로다.


어아어아

백백천천 우리모두 큰 활처럼 하나되어

굳세게 한마음 되니 배달나라 영광이로세

백백천천 오랜 세월 크나큰 은덕이시여!

우리 대조신이로세.

우리 대조신이로세.<檀君世紀> 中(p105)


 천조대신(天祖大御神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을 연상하게 만드는 대조신(大祖神)이라는 단어에서 내선일체(内鮮一体)를 표방한 일본의 민족말살정책이 떠올랐다면 지나치게 나간 것일까. 일본인과 함께 아마테라스를 조상신으로 받아들이는 내용의 노래를 통해 전율을 느꼈는데, 역자의 주(註)는 나의 생각이 지나친 공상만은 아니라는 것을 뒷받침한다.


환국의 일곱 분(7세) 환인과 일본 창세기의 족보


<일본서기 日本書紀>와 <고사기 古事記>에 일본 건국신화의 신이 7세(대)로 되어 있음은 매우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일본 창세기의 신세 7대는 환국의 7세 환인과 유사성이 크다. 일본 역사는 우리 조상들이 건너가 세운 기록이기 때문에 일본의 창세기에서도 인류의 종주 민족인 한민족의 뿌리 역사가 당연히 그대로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桓國本紀> 註 中(p346)


그리고, 12환국과 그 위치를 알려주는 <환국본기 桓國本紀>의 내용 안에서 '국(國)'의 사용이 어딘지 어색하게 느껴진다.


天海以東之地를 亦稱波奈留國也라

基地廣이 南北五萬里오 東西二萬餘里니 摠言桓國이오 


천해 동쪽 땅을 또한 파내류국이라 부르는데, 그 땅의 넓이가 남북으로 5만 리요 동서로 2만여리이다. 이 땅을 모두 합하여 말하면 환국이오. <桓國本紀> 中(p340)


  '國'이라는 단어는 한자 사전에 의하면 회의(會意)이며. 갑골문(甲骨文)에는 마을을 본뜬 글자에 창을 뜻하는 과(戈)가 결합하여, 무장한 마을을 뜻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환국이 오래되었다면, 갑골문이 형성된 시기이거나 또는 그보다 이른 시기에 존재했을텐데. 국(國)의 의미가 마을 또는 도시 정도의 규모를 넘지 않음에도 남북 5만리, 동서 2만리의 영토를 가진 나라를 같은 뜻으로 표현했다는 것은 무리가 있다. 


 <환단고기>에는 이에 대한 반박 또한 실려있다. 근대에 이르러 사용된 용어가 혼용(混用)된 사례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며, 만일 그렇다고 해도 <환단고기>가 위서임을 증명하지는 못한다는 것이다.(<환단고기>p102 참조).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이러한 논거의 타당성에 대해 단정적으로 결론을 내리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의심을 거둘 정도의 설명은 못 되는 것 같다. 


 그렇다면, <환단고기>가 만약 위조되었다고 하다면 무슨 의도가 있을까? 이에 대해서 환단고기>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시점이 일제(日帝)강점기라는 상황을 고려해볼 때, 같은 시기 중국에서 등장한 <이하동서설 夷夏東西設>을 놓고 함께 바라본다면 어느 정도 의도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1933년 푸쓰녠(傅斯年, 1896 ~ 1950)에 의해 주장된 하상이원론(夏商二元論)에 따르면 역사 속의 하(夏)나라와 상(商, 은 殷)나라는 다른 민족에 의해 세워진 나라들이다. 푸쓰녠은 하나라는 서쪽의 화하족(華夏族)에 의해서, 상(은)나라는 동쪽의 동이족(東夷族)에 세워졌으며, 중국문명은 이러한 상이한 두 민족의 갈등과 대립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주장인데, 현재는 퇴조한 사상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하동서설>은 이러한 푸쓰녠의 사상이 담긴 책이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하동서설>의 문제점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다. 


 전문적인 내용은  학자들의 몫이겠지만, 이 주장이 나온 1930년대에 대해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시기에 일본은 1931년 만주사변(滿洲事變)으로 일본 관동군이 만주(滿州)를 침략해 이듬해인 1932년 만주국(滿州國)을 세우게 된다. 대륙침략의 야욕이 드러난 이 시기에, '이하동서설'이 나온 것이다. 동쪽의 오랑캐와 중원 민족의 다툼이 1930년대에 시작된 것이 아니라 고대로부터 있었다. 그러니, '중화민족이여 깨어나라!'라는 목소리가 '이하동서설'에 전혀 없지는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지도] 만주사변(출처 : http://crisissome.blogspot.com/2016/03/manchurian-incident-and-manchukuo.html)


 이와 대칭적으로, <환단고기>에서는 몽골-만주-조선-일본의 대동이(大東夷)가 환국(桓國)의 이름으로 하나가 되어 중국 왕조를 신민(臣民)으로 삼았다는 내용은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의 역사적 기원이 되기에 조금의 부족함이 없다 여겨진다. 그렇게 본다면, <이하동서설>과 <환단고기>는 20세기 민족주의(民族主義) 사상을 고취하기 위한 일종의 어용(御用) 사학이 아니었을까.


 <이하동서설>과 <환단고기>의 내용을 실증하기에는 부족함이 있어, 말하기 어려우나 이들 책이 나온 시점은 그 의도가 불순하다는 의심을 하기에 충분하다 여겨진다. 


 사람은 부족함이 많기 때문에 많은 실수를 해왔다. 그리고, 역사(歷史)는 부족함이 많은 인류(人類)의 기록이다. 때문에, 마치 수험생들의 기출문제처럼 우리는 역사 속의 교훈을 통해 앞으로 나갈 방향을 찾는 것이고, 이것이 '과거와 미래의 대화'의 진정한 의미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부끄러운 역사와 자랑스러운 역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교훈을 깨닫지 못하는 부끄러운 자신 또는 역사의 교훈을 깨달은 똑똑한 자신이 있는 것이 아닐까. 이러한 이유로 현세의 이기적 목적을 위한 역사의 왜곡은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여겨지며, <이하동서설>과 <환단고기> 역시 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吾桓建國이 最古라. 우리 환족이 세운 나라가 가장 오래 되었다.<삼성기전  상 三聖紀全 上>(p17)


 <환단고기>이 일부인 <삼성기전  상 三聖紀全 上>의 첫 문장을 마지막으로 이번 페이퍼를 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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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항 이후 식민지 시대를 거치면서 비록 이민족(異民族)에 의한 타율적인 과정으로 이루어지기는 하였지만 당시의 각종 경제제도의 근대화과정이나 경제성장 및 구조적 변동이 얼마나 격렬하게 일어났는가 하는 점 등에 대한 실증적 연구성과가 그것이다. 이러한 실증적 경제사 연구성과를 토대로 하여 17~19세기 조선 후기 이후 오늘에 이르는 한국경제의 긴 역사적 전개과정을 놓고 어떤 측면에서든 기존의 통설과는 다른 시각에서 그것을 재평가/재해석해 보고자 한 것이 이 책을 기획하게 된 주체적 동기라 할 수 있다.(p22) <새로운 한국 경제 발전사> 中


 <새로운 한국경제발전사>는 한국경제사를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는 경제사책이다. 일제 식민지 시대를 수탈의 시대로 알고 있는 일반의 생각과는 달리 이를 통해 근대화를 달성할 수 있었다고 해석하는 이른바 뉴라이트(New Right) 사관에 입각해 쓰여진 경제사다. 그렇다면, 이 책에서 바라보고 있는 근대화란 무엇일까. 이 책의 공동저자 중 한 명인 서울대 이영훈 교수의 <시장경제제도의 성립과 발전>의 내용을 들여다 보자. 


  1840년대 프랑스 앙뜨완 다블뤼(Antoine Daveluy)주교에 의하면 19세기 조선 사회는 양반 지배계급에 의한 지독한 폭정 아래 놓여있었다. 양반은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고 평민들을 마음대로 구금하고 그들의 재산을 약탈하였다. 다블뤼 주교의 기록에는 다소간의 과장도 있어 보이지만, 유사한 내용의 관찰은 이후 조선왕조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기까지 여러 서양인들의 기록에서도 쉽게 발견된다.(p193) <새로운 한국 경제 발전사> 中


 서양인들이 남긴 이러한 기록들은 당시 조선왕조 시대에는 근대적인 재산제도가 성림되어 있지 않았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와 더불어, 최근 일련의 연구에 의하면 조선왕조의 경제는 19세기 내내 침체하고 하강했던 것으로, 즉 산림의 황폐, 미곡생산성의 하락, 물가의 상승과 노동자 실질임금의 감소, 그리고 농촌시장의 분열이 행해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조선왕조는 이러한 심각한 경제 침체의 결과로 일제의 침략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패망하고 말았다.(p194) <새로운 한국 경제 발전사> 中


 이영훈에 의하면 19세기 조선은 세도정치 하에서 지배계급의 수탈, 자원과 생산성의 부족 등으로 붕괴되고 있었다. 이러한 위기 속에서 지배층인 조선왕조는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했고, 그 결과 식민지로 전락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경제 하강의 주요 원인은 심한 수탈로 인한 사유 재산의 부재였다고 진단을 내린다. 사유재산에 대한 인식부족은 자본축적을 어렵게 만들었고, 결국 근대화는 일제 식민치하에서 겨우 달성하게 된다는 것이 그의 주장 '식민지 근대화론'의 골자다.


 경제를 이처럼 장기적으로 침체시킨 요인에 대해서는 여러 측면에서의 설명이 가능하겠으나, 가장 중요한 것의 하나를 꼽으라면 근대적인 '재산제도'의 결여가 아닐까 한다.(p194)... 경제 성장 요인은 생산과 혁신을 위해 자본을 투자하도록 유도하는 효율적인 제도(institutions)와 기구(organizations)의 존재이다. 이러한 제도와 기구를 통틀어 여기서는 '시장경제제도'라고 부르기로 한다. 식민지기에 개시된 근대적 경제성장은 그 전제조건으로서 그에 합당한 시장경제제도의 정비가 있었기에 가능하였다.(p195) <새로운 한국 경제 발전사> 中


 조선의 경제는 19세기에 걸친 장기의 침체를 경과한 뒤 20세기 전반 일제하의 식민지기에 근대적 경제성장의 경로를 밟기 시작했다. 그러한 전환이 있게 된 데는 근대적인 사유재산제도의 확립을 중핵(中核)으로 하는 시장경제제도의 성립이 커다란 요인으로 작용하였다.(p216) <새로운 한국 경제 발전사> 中


 그렇다면, 이러한 식민지 근대화론이 타당한가. 여기에 대해서는 여러 반론이 있지만, 이에 대해서는 <한국독립운동사 강의>에서 확인할 수 있으니, 여기서는 그 중 일부의 내용만 간략히 다뤄보자.

 

 먼저 경제발전(經濟發展)에 대해 생각해보자. 경제발전이 단순히 전년 대비 몇 %의 경제성장을 이루었는가를 뜻한다면, 식민지 근대화론에서 근거로 제시하는 통계수치에 의해 조선 시대보다 일제하에서 우리가 근대화를 이루었다고 보는 것이 맞다. 


 그렇지만,  근대화가 경제 측면에서만 바라볼 수 있는 것인가? 일제 식민지 기간을 통해 여러 문제점이 생겨났고, 지금까지도 우리 사회가 깊은 후유증을 앓고 있다면 우리는 통계에 잡히지 않는 만만찮은 비용을 지불하고 있는 셈이다. 이에 대한 고려를 했을 때에도 우리는 식민지를 통해 근대화를 이루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일까? 

 

사실 이러한 수량화 문제는 최근 GDP(國內總生産, Gross domestic product)가 가지는 한계(비시장상품 측정 불가, 소득 분배 상황 미반영 등)나 원자력 발전의 발전 단가 산정 시 고준위방사성 폐기물 비용을 고려해야 하는가 등에 대한 논란과도 맞닿아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때문에, 이러한 비용-편익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은 개인적으로 한계가 있다고 본다. 우리 사회에서 변화의 움직임이 없었다면 비용이 아무리 많이 지불되더라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갈 수 밖에 없지 않을까. 그런 면에서 본다면, 조선말 시기에 변화의 움직임이 있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세기로 들어서면서 시작된 세도정권 시기에는 봉건 지배계층의 농민에 대한 수탈이 절정을 이루었다. 농민 수탈의 내용은 전정(田政), 군정(軍政), 환정(還政) 등 소위 삼정문란으로 집약되었다.(p51)...  세도정권의 횡포 앞에 방치된 농민들은 이를 타개할 수 있는 합법적 방법과 통로를 갖지 못했다. 그들에게는 세도정권의 손발이 된 부패한 아전을 포함한 지방관에 대한 대한 합법적 고발의 길이 막혀 있었다.(p56) <고쳐 쓴 한국 근대사> 中


 <고쳐 쓴 한국 근대사>에서 바라본 19세기 상황은 <새로운 한국 경제 발전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여기까지 팩트(fact)지만, 지금부터 조금 달라진다.


 지배층의 부패와 수탈에 대해 일부 민중은 비밀결사로 저항을 기도했다.1684년에 발생한 검계(劍契), 살주계(殺主契) 사건 등을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다... 이러한 유형의 범죄들이 이 시기에 와서 크게 증가한 것은 기존의 사회질서와 가치관에 대한 민중의 저항과 함께 집권층의 반동화가 동시에 심해지고 있었음을 뜻한다. 이같은 각종 범죄는 점점 빈번히 발생하고 또 극렬화해서, 크게는 농민전쟁으로 작게는 민란으로 발전했다.(p58)... 임술민란 후부터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나기까지 무려 40여건의 크고작은 민란이 계속되었다. 안동김씨 세도정권 말기에 우발적이고 산발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한 민란이 30년 후의 갑오농민전쟁으로 연결되까지 농민들의 끊임없는 투쟁이 계속된 것이다. 이 과정을 통해 전봉준(全琫準, 1854~ 1895) 과 같은 몰락양반층을 중심으로 한 지도세력이 비로소 형성되어갔다.(p65) <고쳐 쓴 한국 근대사> 中


 <고쳐 쓴 한국 근대사>의 저자 강만길 교수는 조선 시대 세도 정치의 폐단을 바로잡는 움직임이 민중으로부터 있었음을 지적한다. 그리고, 이러한 움직임이 홍경래의 난(洪景來의 亂, 1811 ~ 1812)부터 우리가 동학 농민 운동으로 알고 있는 갑오농민전쟁(甲午農民戰爭, 1894)까지 이어져왔음을 지적한다. 


[사진] 녹두장군 전봉준의 압송사진(출처 : https://www.pinterest.co.kr/pin/688417493019697683/)


 정리하면, <고쳐 쓴 한국 근대사>에서는 조선 말에 지배층의 문제를 아래에서부터 고치려는 자발적인 움직임이 있었으나, 이는 일본의 무력개입으로 좌절되었던 것으로 식민지를 겪지 않아도 근대화를 이룰 가능성이 충분했다고 논증한다. 그리고, 이 경우 기회비용(opportunity cost) 측면에서 일제를 겪지 않았을 때의 비용이 겪은 후보다 더 저렴하다는 설명으로 이어질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식민지 근대화론과 이를 뒷받침하는 실증주의 역사학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20세기 일본 역사학은 랑케(Leopold von Ranke, 1795 ~ 1886)와 청나라 고증학(考證學)의 영향을 받으며 탄생하는데, 이에 대한 특성과 한계는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사료편찬계의 사업이 확정된 것은 제국대학을 중심으로 한 아카데미즘실증주의 일본 역사학의 성격이 시게노 야스쓰구, 구메 구니타케 등의 실증주의를 이어받아 국정의 추이를 중심에 두는 편년체식 정치사/외교사를 명확한 기본으로 삼았다는 것을 의미했다. 여기서 사료편찬계(뒷날 사료편찬소)를 중심으로 한 일본사 연구 체제 확립의 의미를 조금 더 다각도에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첫째, 고대와 중세, 특히 중세사 연구의 기초가 되는 사료의 독점 체제가 성립된 점이다. 둘째, 사회, 경제, 문화 등 정치 과정에 직접 관련이 없는여러 측면에 대한 연구가 불리하고 곤란해지거나 일차적으로는 중시되지않는 경향을 낳은 점이다. 셋째로 사료 고증과 고문서 연구가 역사학의 근간에 자리함으로써 역사가가 현대를 살아가는 자기의 주체성과 사상성을 통해 역사인식과 씨름하는 것을 탐탁찮게 여기는 풍조를 낳았다는 점도 놓칠 수 없다.(p56) <20세기 일본의 역사학> 中


 동경제국대학을 중심으로 한 실중주의 역사관이 경성제국대학(서울대 전신)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는 전제에서 위의 글을 읽는다면 <새로운 한국 경제 발전사>에서 보여지는 뉴라이트 사관의 개략적인 모습이 설명된다.


 그렇다면, 사실에 근거한 실증주의 사관은 문제가 없는 것일까. 통계자료와 객관적 근거를 중시하는 실증사관은 수리 모형을 중시하는 오늘날의 경제학의 모습과도 통하는 바가 있는데, 이에 대해 피게티(Thomas Piketty)는 <21세기 자본>에서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너무나 오랫동안 경제학자들은 이른바 과학적 방법이라는 것으로 스스로를 규정하려 했다. 사실 그 방법들은 수학적 모형의 과도한 이용에 의존하는데, 이런 모형들은 흔히 자기 영역을 지키고 내용의 공허함을 가리는데 대한 변명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오늘날 경제학자들은 통제된 실험에 바탕을 둔 실증적 방법에 대한 열의로 가득하다. 그러나 이 같은 새로운 접근 방식들 자체가 이따금 어떤 과학적 환상에 빠져들게 한다. 학자들은 예컨대 문제 자체는 그다지 큰 관심거리가 아니라는 것을 잊어버린 채 순수하고 참된 인과관계의 존재를 증명하는 데 엄청난 시간을 보낼 수 있다.(694) <21세기 자본> 中


 한편, 피게티는 <21세기 자본>에서 세계적으로 심화되고 있는 불평등을 해소하는 방안으로 민주주의 국가들의 국제자본에 대한 과세, 누진적인 글로벌 자본세를 주장한다. 


 우리가 주목한 것은 20세기에 창안되었지만 미래에도 틀림없이 핵심적인 역할을 계속 수행해야만 할 사회적 국가와 누진적 소득세라는 두 가지 기본 제도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현 세기의 세계화된 금융자본주의를 다시 통제하려면, 오늘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수단을 개발해야만 할 것이다. 여기서 이상적인 수단은 매우 높은 수준의 국제적 금융 투명성과 결부된 누진적인 글로벌 자본세가 될 것이다.(p617)<21세기 자본> 中


 그리고, 이 속에서 우리는 과거 제국주의 시대 한 팀(국가, 자본, 종교, 과학)이 깨지고 있음을 보게 된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국가가 민주주의 국가가 되어야 한다는 전제가 붙지만, 피게티에 따르면 현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국가를 넘는 권력을 가진 글로벌 기업과 국가 연합간의 대립이 필요하다.


 다국적 기업은 복수의 나라의 기업가, 노동자, 소비자가 연결되어 만들어 낸 커뮤니티다. 문자 그대로 다국적 네트워크는 본래의 국가라는 개념이나 단위만으로 파악할 수 없는 초국가적(transnational)인 현상이다. 그리고 복수의 나라의 자본이나 노동을 결합하는 커뮤니티인 이상, 다국적 기업이 추구하는 것은 본래와 같은 특정 국가의 '국익'과는 다른 것이다. 전통적인 국가라는 틀 속에서 결코 해결될 수 없다. 그와 가은 글로벌한 존재는 비국가 행위자들(nonstate actors)로 한 국가의 거버넌스를 넘어설지도 모른다. 각 국가라는 구조와 법률 체계만으로 완전히 규제하기는 불가능하다.(p107) <역사가가 보는 현대 세계> 中


 그런 관점에서 최근(2019년 7월) 일본의 한국 수출 규제는 상당히 흥미롭다(?). 일본 강제징용피해 배상에 대한 일본 정부의 불만으로 한국 반도체 기업인 삼성과 SK 하이닉스에 대한 수출규제는, '국가'의 '글로벌 기업'에 대한 도발이라는 점에서 본다면 피게티 모형과 비슷해 보인다. 물론, 다른 점도 있다. 피게티의 글로벌 기업이 글로벌 금융 자본을 의미하는 반면, 삼성전자/SK 하이닉스는 산업 자본이고, '민주주의 국가 연합'이 '정치 후진국 1개국'이라는 부분은 다소 차이나지만.(다시 생각해보니, 삼성그룹에서 금융계열사인 '삼성생명'과 '삼성화재' 등이 지배구조에서 미치는 영향력을 고려하면, 삼성을 금융자본으로 구분해도 큰 무리가 없을 것도 같다.) 


 피게티는 <21세기 자본>에서 금융자본을 잡기 위해서는 국가들이 연합해서 긴밀하게 정보를 공유해야한다고 주장한다. 그런 면에서, 1개국에 의해 이루어진 이번 봉쇄는 비록 대상이 산업자본이기는 하지만, 상당히 허술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그래서, 중장기적으로 경제봉쇄령이 효과가 없을 것과 복잡하게 얽힌 국제 공급망(Global Supply Chain)에 타격을 입은 자본의 복수가 이어질 것이라는 것은 뻔한 결론이 아닐까. 그런 면에서 삼성과 SK 하이닉스를 일개 한국기업으로 생각하는 일본 정치인의 인식 수준은 20세기에 머물러있다 판단된다. 그런 일본의 도발에 대응하는 일본 상품 불매 운동을 우리는 어떻게 봐야 할까. 개인적으로는 이번 일을 계기로 일본이 싫어져 본의 아니게(?) 불매 운동에 동참하고 있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에 이 문제에 대해 짚어볼 필요가 있다 여겨진다.

  

 많은 다국적 기업들이 점점 더 많이 자신의 생산 활동을 글로벌 경제 내 특정한 거시지역 내에서 조직하고 있다는 점이 분명해진다. 동남아시아국가연합 ASEAN에서 통합 과정은 일본과 보다 최근에는 한국의 다국적기업들에 의해 주로 추동되고 있다... 삼성은 ASEAN에서 광범위한 거시지역적 생산 네트워크를 발전시켜 왔다. 삼성코닝(말레이시아)은 말레이시아에서 컬러 브라운관 생산을 위해 중요한 요소인 튜브 유리를 삼성전관의 공장에 제공한다. 삼성코닝은 또한 삼성전자(태국)와 인도네시아(컬러텔레비전), 말레이시아(컴퓨터 모니터), 베트남(컬러텔레비전) 등의 계열사에 중간제품과 조립품을 판매한다.(p284) <현대 경제지리학 강의> 中


 페이퍼가 다소 길어졌는데, 여기서 내용을 정리해 보자. 식민지 근대화론은 외세에 의한 조선의 문제 해결이 당연한 과정이었고, 이를 통해 우리가 발전을 이루었다는 이론이다. 이에 대해 우리는 경제외적 측면에서 시대를 바라보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역량이 있었는가를 통해 식민지 근대화론을 반박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 일본의 한국에 대한 수출규제는 글로벌 대자본(산업자본)에 대한 의미없는 봉쇄이며, 이제는 일본에 대한 과도한 의존을 탈피해야겠지만, 이제는 글로벌 대자본이 된 재벌들에 대한 우리의 인식 또한 이번 기회에 점검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뉴라이트 사관의 지향점을 잘 표현한 <새로운 한국 경제 발전사>의 결론을 소개하며 길었던 페이퍼를 마치고자 한다. 


 종합해 보면, 결론적으로 한국경제의 국제화 전략의 기본은 '새 모델'을 어떻게 발전시키느냐 하는데 주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곧 美, 日, 中 3국과의 국제적 분업관계를 어떻게 하면 더욱 발전시킬 수 있느냐하는 문제로 귀착된다.(p545)... 결론적으로 오늘의 한국경제가 당면한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경제 내부의 구조조정이나 거시정책적 수단에 매달릴 것이 아니라. 대외분업적 측면에서 경제의 '국제화 전략'을 올바로 수립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점을 강조해두고 싶다. 대국적 견지에서 경제의 글로벌化를 가로막는 反시장주의적이면서도 시대역행적인 편협한 민족주의 이념으로부터 탈피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선결과제라고 함을 여기에 강조해두고자 한다.(p547)  <새로운 한국 경제 발전사> 中


PS, 어쩌면, 이 결론은 우리보다 현재 일본에 더 필요한 조언이 아닐까. 뉴라이트 역사가들에게는 식민지 시절 근대화에 대한 답례를 할 기회가 주어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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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27 08:2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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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27 08:3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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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27 10:3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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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27 11:2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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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27 09:2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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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27 11: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1947년 이래로 미국 외교정책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일본의 경제적 영향력을 한국에 다시 끌어들이는 것이었다.(p448)... 케네디의 취임 이전 혹은 1961년 군사쿠데타 이전 한일관계에서 중요한 진전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후 미국 정부는 국교정상화를 강하게 밀어붙였고, 로스토우와 로버트 맥나마라(Robert McNamara)는 일본이 동북아시아 지역경제의 축이 되도록 압박하는 에치슨의 전략을 사실상 되살려놓았다.(p449)... 돌파구는 미국의 강한 압력을 받고 나서 1964년에야 뚫렸다. 김종필은 재산청구권의 결정 액수를 매듭짓고자 다시 토오꾜오로 갔는데, 한국인들은 배상을 원하고, 일본인들은 '배상'이라고 불리지 않는 조건이라면 한 보따리의 원조와 차관을 내놓을 용의가 있었다. 1965년 4월 한국과 일본의 합의안은 한국 경제에 경이로운 일을 해냈으나, 이 타결이 차후 일본에 대한 청구의 가능성을 없앴기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논쟁거리로 남아 있다. 한편, '위안부'와 관련된 사항들과 같은 새로운 사실들이 폭로됨으로써 추가 청구의 문제가 거론되었다.(p451)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 현대사>中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에 대한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 Korea's Place in the Sun>의 기술이다. 저자는 1965년 국교정상화의 대가로 받은 3억 달러의 무상원조와 2억 달러의 차관, 일본의 민간기업들이 투자한 3억 달러가 당시 수출 총액 2억 달러에 불과했던 한국 경제가 도약하는데 매우 큰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과 함께 합의안이 가진 불안 요소를 함께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합의안이 가진 '양 날의 검'의 모습은  지난 7월 1일 일본 정부의 한국 수출 규제로 현실화되었다.


 이번 사안에 대해 많은 전문가들이 이슈와 향후 전망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현실의 문제는 쉽게 풀리지 않고 있다. 답답한 현실 속에서 한국 때리기를 이어가고 있는 일본의 모습을 바라보는 한국인의 시선은 좋을 수 없다. 그리고 이런 21세기의 일본 모습은 1869년 일본 메이지 정부의 정한론을 떠올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1869년 1월 23일, 메이지 정부는 조선에 사절을 파견할 때 그 국서에서는 "우리 황제가 즉위하여 강기(綱紀)를 다시 다잡는다"는 등의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전의 문서격식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조선으로부터 거절당했다. 일본정부는 이것을 빌미로 키토 타카요시(木戶孝允) 등은 "정한론(征韓論)"을 주장했고 혹은 다만 50일 내에 30개 대대 병력으로 조선을 정복할 수 있으며 그 전리품을 이용하여 군비를 보충할 것을 강조했다. (p64) <안중근과 동양평화론> 中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이후 도쿠가와 막부와 조선은 개화기에 이르기까지 조선통신사(朝鮮通信使)를 통한 교류를 이어왔지만, 일본이 페리 제독(Matthew Calbraith Perry, 1794 ~ 1858)에 의해 개항되면서 양국의 관계는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대, 제국주의 국가로 발빠르게 변신하려는 일본은 국내외적으로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그림] 征韓論(출처 : https://jpreki.com/seikanron/)


 일본정부는 재정정책을 수립하는 데 난항을 겪으면서 자주 분열되었다. (조슈-사쓰마의 독주에 의구심을 갖고 있던) 오쿠마는 통화팽창적인 관점을 견지한 반면, 다른 사람들은 좀 더 신중한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그들은 또한 부패와 스캔들에 연루되었다... 일본과 러시아는 사할린(가라후토(樺太))과 쿠릴열도(지시마(千島))를 독차지하기 위해 물밑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일본의 외교정책이 어떻게 전개될지 불투명한 상황에서 북방과 인근 대륙을 노리는 러시아의 야심을 우려하는 분위기가 고조되었고, 사이고와 이타가키는 동요하고 있는 구사무라이들의 에너지를 활용하는 동시에 민중의 지지를 얻을 수 있는 방책을 가구할 수밖에 없었다. 1873년 논쟁의 초점은 조선에 맞추어졌다.(p539) <현대 일본을 찾아서 1> 中


  지배층에 대한 일본 국내의 불만과 러시아와의 영토 분쟁 등 당시 일본 정부가 직면하고 있었던 위기 상황은 21세기 일본의 문제들인 일본 금융청이 발표한 '고령화 사회의 자산 형성/관리' 보고서 파문으로 인한 일본국민들의 불만 고조, 아베 신조 총리의 사학 스캔들 문제, 주변국들과의 영토분쟁 - 한국(독도), 중국(센가쿠 열도), 러시아(쿠릴열도) - 등을 연상시킨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 1869년 일본정부는 '근대적 외교관계' 수립을 빌미로 정한론을 구체적으로 검토하였고, 현대 일본은 대한 수출 제한 발표를 하였다.


 일본인은 조선에 대해 유난히 호전적인 태도를 보였는데, 이는 아마도 약소국으로서 그동안 맛본 좌절감을 보상받으려는 심리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조선은 외교관계를 맺자는 일본의 제안을 일관되게 거절해왔다. 도쿠가와 막부는 말기에 조선과 근대적인 외교관계를 수립해보려 했으나, 일본을 의심했을 뿐 아니라 쓰시마를 통해 대일관계를 처리하는 데 익숙해 있던 조선은 막부의 시도에 찬물을 끼얹었다. 메이지 정부는 집권하자마자 국가 대 국가로서 '근대적'인 관계를 맺자는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다시 한번 조선과의 국교정상화를 시도했다. 이 제안 역시 거절당하자 '응징' 차원의 군사원정을 단행할 수 있는 빌미를 잡았다. 조선을 응징해야 한다는 정한론(征韓論)은 막 귀국한 이와쿠라 사절단과 유수정부를 분열시키는 쟁점이 되었다.(p540) <현대 일본을 찾아서 1> 中


 한국 때리기를 통해 과연 일본은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1869년 1월 25일 기도 다카요시 기록은 일본 지배 계급의 의도를 잘 보여준다.


 우리는 지체 없이 우리나라의 진로를 결정한 다음, 조선에 사절을 본내 조선의 관리들에게 우리한테 무례하게 구는 연유를 따져야 한다. 만약 그들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사실을 공포하고 우리 신국(神國)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그들의 영토에 대한 공격을 개시해야 한다... 이 일이 완수되면 우리 국민의 시대에 역행하는 전통은 하룻밤 사이에 바뀔 것이다... 이 정책은 우리나라에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이로운 것이다.(p540)... 나는 우리가 타당한 이유없이 조선을 침략해야 하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단지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질 논리적 근거를 개진하고 싶은 것 뿐이다. 내가 내세우고 싶은 논리적 근거란 우리의 우월한 국가정책을 그 땅에 베풀어야 한다는 것이다.(p541)  <현대 일본을 찾아서 1> 中


 참고적으로, 이러한 일본의 의도에 대해 <현대 일본을 찾아서>의 저자 마리우스 B.잰슨(Marius B. Jansen)은 다음과 같이 비판을 하고 있다. 아마도, 오늘날 일본 때리기를 바라보는 세계의 시선도 비슷하지 않을까 추측해 본다.


 이보다 더 조잡하고 편협한 '정당화'도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20세기에 이르러 많은 일본인이 바로 이 환상 때문에 고생했지만, 1869년에 이런 환상이 "보편적으로 수용될" 것이라고 기대했다는 것은 더더욱 대경실색할 일이다.(p541)  <현대 일본을 찾아서 1> 中


 결국, 정한론은 뜨거운 논쟁이 벌어지면서 결국은 무산되지만, 이러한 일본의 침략 야욕이 운요호 사건(雲揚號事件)을 통해 강화도 조약으로 이어지면서, 조선은 결국 식민지로 전락한 계기가 되었다. 이렇게 정한론은 실현되었고, 근현대사의 한-일 양국간 불행한 역사는 시작되었다.


 이번 사태에 대해 누군가는 우리의 감정적인 대응을 지적하지만, 사실 우리가 일본과의 관계에 있어서 처음부터 적대한 적은 없었다. 심지어, 이토 히로부미( 伊藤博文, 1841 ~ 1909)를 사살한 안중근(安重根, 1879 ~ 1910)의 <동양평화론 東洋平和論>에서는 일본을 중심으로 한, 중, 일 3국이 힘을 합쳐 외세에 대항할 것을 강조하는 내용이 나오는 것을 보면 한국 의 일본에 대한 감정이 오랜 역사가 있다고 보기 어려울 것 같다. 그렇다면, 일본의 한국에 대한 감정은 어떨까. 그 기원을 찾기 위해서는 삼국시대(三國時代)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이다.


[사진] 저격 직전 하얼빈 역 플랫폼(출처 : http://study.zum.com/book/12502)


 우리 동양은 일본을 맹주로 하고 조선, 청국과 정립(鼎立)하여 평화를 유지하지 않는다면 백년의 대계를 그르칠 것을 감히 두려워한다. 이등박문(伊藤博文)의 정략은 이에 반하여 함부로 한국을 병합하는 데 급급하여 다른 상황을 고려할 틈도 없이 동포를 살육하고 황제를 위박(威迫)하여 그 횡포가 이르지 않는 것이 없다. 그가 잡은 방침을 고치지 않고 이대로 추이(推移)하면 우리 동양 3국은 다 같이 쓰러지고 백색인종의 유린(蹂躙)에 맡기지 않으면 안된다. 러시아와 청국 양국이 일본을 향하여 다시 싸우려고 하는 형세가 있음은 당연한 일이며, 미국 또한 일본의 발호(跋扈)를 좋아하지 않는다. 점차 세계의 동정은 한국, 청국, 러시아의 약자에게 모이고 (이에 따라) 일본은 고립한 위치에 설 것은 지금부터 예상하여도 어렵지 않다. 이것을 생각하지 않고 일시 세력에 의지하여 우리 한국의 독립을 빼앗으려는 것은 천견(淺見)으로서 지자(智者)의 치소(嗤笑)를 초래하고 말 것이다.(p172)  <안중근과 동양평화론> 中


 <일본서기 日本書記>에는 663년 백강 전투(白江戰鬪) 이후 백제(百濟)가 멸망했을 때 왜(倭 일본)의 혼란에 대해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문헌상으로는 이때부터 일본인들의 반한(反韓) 감정이 시작된 것으로 볼 수 있을 듯하다.


 이 해에 천황은 백제를 위해 신라를 정벌하고자 스루가노쿠니(駿河國)에 명하여 배를 만들게 했다... 무술(17일)에 적장(賊將)이 주유에 이르러 그 왕성을 에워쌌다. 대당(大唐)의 장군이 전선(戰船) 170척을 이끌고, 하쿠스키노에(白村江)에 진을 쳤다. 그러나 일본이 져서 물러났다(p341)... 9월 신해삭 정사(7일)에 백제의 주유성(州柔城)이 마침내 항복하였다. 이때 국인(國人)들이 "주유가 항복하였다. 사태가 어찌할 수 없게 되었다. 백제의 이름은 오늘로 끊어졌다. 이제 조상의 분묘가 있는 곳을 어떻게 갈 수 있겠는가? 고 말하였다.(p342) <역주 일본서기 3 >中


 여기에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인들의 피해 의식이 더해지면서 한국에 대한 적개심은 더해진다. 이에 대해서는 역사학자 나가하라 게이지(永原慶二, 1922 ~ 2004)는 <20세기 일본의 역사학>을 통해 확인해 보자.

 

 '전후 처리와 연관되는 보상 문제도 벌써 국가로선 해결이 완료되었어야 하지만, 최근의 일본군 '위안부' 문제처럼 기회 있을 때만다 제기된 데서 '전후'가 종료되지 않았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런 문제는 의심의 여지없이 다음과 같은 사안이 겹친 데서 발생했다. 무차별 공습과 원폭 등으로 일본 국민들은 패전을 피해자 감각에서 먼저 받아들였기에 자국의 전쟁 책임을 주체적으로 자각하고 해결하려는 의식이 약했다는 점, 패전 후 이내 냉전이 심각해지고 미국의 반소/반공 정책에 편입되었다는 점, 소련의 일본인 시베리아 억류가 가혹하기 짝이 없었다는 점, 또 국내의 민중 생활이 의식주 그 어느 것도 바닥까지 내몰렸다는 점 등이 그러하다.(p289) <20세기 일본의 역사학> 中


 정리해보면, 고대로부터 한국과 일본은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지내왔지만, 백제 멸망이라는 사건 이후 한국에 대한 일본의 적개심과 식민 지배 경험 그리고, 패전에 대한 일본의 피해 의식 등이 더해지면서 오늘날 일본인들의 한국인식이 만들어졌다. 이러한 일반의 인식 위에 일본 지배계급은 국내외 문제 발생 시 불만을 한국으로 터뜨리는 방식을 통해 위기를 넘겨왔으며(임진왜란, 정한론 등) 이번 일도 이런 일련의 흐름의 연장에 있다고 생각된다.


 일본의 수출 규제가 시작된 이후 한국 내에서의 일본 상품 불매 운동이 이어지고, 이에 대한 여러 목소리가 사회 곳곳에서 나오고 있는 현실에서, 어떤 방향으로 가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지 판단하기 쉽지 않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한-일 간의 문제가 오래되고 복잡한 문제이기 때문에 감정적인 대응보다 이성적인 대응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일본 제품 불매 운동과 같은 단편적인 문제보다, 일본에 종속된 경제문제, 일본 조어(造語)에 오염된 우리말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이루어져야 하지 않을까.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한-일 갈등 문제를 통해 일본으로부터 진정한 독립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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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15 07: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7-15 08: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雨香 2019-07-15 08: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차별 공습과 원폭 등으로 일본 국민들은 패전을 피해자 감각에서 먼저 받아들였기에 자국의 전쟁 책임을 주체적으로 자각하고 해결하려는 의식이 약했다는 점,‘ 이 부분이 잘 짚어낸 듯 합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 문제는 쉽게 정리될 것 같진 않군요. 일본은 지속적으로 한국에 대한 이런 행태를 보일 것 같고요.

한일간의 문제를 역사적으로 보여주셔서 감사합니다. (공부하듯 읽었습니다.)

겨울호랑이 2019-07-15 08:33   좋아요 0 | URL
일본인들 스스로 가해자라는 인식보다 피해 의식을 가지고 있으니, 독일과 같은 태도를 보이기를 기대하는 것은 지나쳐 보입니다. 우리 역시 이런 일본의 태도를 보면서 화해를 말하기는 어려운 처지니만큼 오랜 평행성을 달릴 것 같습니다...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oren 2019-07-15 16: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일관계는 과거로부터 켜켜이 쌓여 온 온갖 감정들이 ‘격류‘처럼 들끓었다가 잠시 가라앉았다가 하면서 용케 여기까지 흘러온 듯싶네요. 중요한 건 과거를 직시하되, 거기에 매몰되지 말고, 미래지향적으로 꾸준히 관계 개선을 해나가야 된다는 점이 아닐까 보여집니다. 일본이 2차 대전에서 미국에게 완패 당하고 나서 자존심을 모조리 거둬들이고 미국에 찰싹 달라붙어 한몸이다시피 우호적으로 지내왔고, 지금까지도 미국에는 무조건 ‘맹종‘하는 듯한 모습을 보면, 그들의 ‘생존 본능‘ 또는 ‘경제적 본능‘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새삼 알 수 있는데, 우리나라는 일본에 대한 원한 감정이 너무 앞서서 ‘일본과의 공생‘ 또는 ‘미래 지향적인 모색‘에는 너무 등한시하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듭니다.

일본이 이번에 저토록 쎄게 나오는 걸 보면 뭔가 단단히 벼르고 작정한 듯한 분위기가 다분한데(한미일 관계에 대한 근본적인 재검토 내지는 재설정 이야기까지 심심찮게 등장하는 판국이고, 이참에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하는 법령 개정까지는 밀어부칠 듯한 분위기고요.), 정치권에서는 너무나 한가하게 이번 사태를 바라보는 게 아닌가 싶어 걱정도 많이 됩니다.

겨울호랑이 2019-07-15 19:53   좋아요 1 | URL
저는 근현대사에서 한국과 일본사이의 문제를 보면, 과거 프랑스와 독일의 경우가 생각납니다. 30년 전쟁 이후 끊임없이 독일을 작은 나라로 쪼개려 노력했던 프랑스의 모습과 한국을 남북한으로 나뉘어 통치하려는 일본의 저의가 크게 다르지 않다 생각됩니다.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와 프로이센의 비스마르크가 사이좋은 이웃이 되지 못한 것은 그들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해서이지, 그들이 냉정하지 못했기 때문은 아니라 생각됩니다... 물론, 19세기 프랑스-독일의 정세와 오늘날 한국-일본의 정세가 동일하지는 않습니다. 당시, 이미 국민총생산과 인구 등 여러 면에서 프랑스를 앞선 독일의 상황과 아직도 일본에 뒤쳐진 부분이 많은 우리의 상황을 생각해 본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오늘날 일본이 보이는 모습은 상호평등, 평화공존을 추구하는 이웃의 모습이 아니기에 지금 평화를 말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어 보입니다. 또한, 과거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을 때, 단호한 의기를 보여준 그를 적이지만 존경하는 모습을 본다면, 일본의 적절하지 못하 태도에 단호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 오히려 향후 양국간 외교 관계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나도 생각해 봅니다...

개인적으로 이번에 일본이 배상판결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것에 향후 북한과의 관계 개선 시 당연히 언급될 배상문제도 걸려 있다 여겨집니다. 1965년 국교정상화를 조건으로 국가간 배상에 합의한 한국과는 달리 아직 배상이 이루어지지 않은 북한에 천문학적인 배상금을 지불하지 않으려는 술수도 있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배상을 하더라도 한국의 전례에 맞춰 푼돈을 쥐어주려는 심산이었는데 갑자기 복병이 튀어나온 것에 민감한 반응을 보인 측면도 있다 여겨집니다. 이러한 이유로도 일본에 대해서는 차가운 대응을 해야하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겨울호랑이 2019-07-16 11:45   좋아요 1 | URL
다른 한 편으로, 우리 나라 경제가 일본에 종속되어 있는 냉정한 현실을 생각해 본다면, 분기탱천해서 일본의 무모한 도발에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것은 자제해야 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현실적으로는 불매운동 같은 사회운동이 아닌 개인의 작은 변화부터 실천해야하는 것이 보다 바람직할 것으로 여겨집니다...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하는데, 가슴은 그렇지 못하니 문제가 참 어렵습니다...^^:) 다만, oren님 말씀처럼 이러한 위기를 정치적으로 활용하려는 움직임에 대해서는 분명 경계해야 할 것으로 생각해 봅니다...

oren 2019-07-16 13:04   좋아요 1 | URL
국가간의 갈등은 대체로 위정자들이 바뀌면 그때마다 변화를 겪게 마련인데, 아베 정권은 너무나 치졸하고 악랄하게 한국을 괴롭히고 있고, 문재인 정권도 거기에 맞대응하는 방식이 너무나 경직되어 있다는 느낌을 떨치기 힘듭니다. 좀 더 길게 보고, 위기를 도리어 역이용해서 ‘문제 해결‘의 발판으로 삼는 지혜도 필요하리라는 생각도 듭니다. 아무튼 뿌리가 깊은 양국간의 정치외교적 문제를 무역 보복으로 치고 나온 데 대해서는 집요하게 그 부당성을 물고 늘어지더라도, 감정적이고 격앙된 맞대응보다는 외교적으로 교묘하게 접근해서 ‘실리‘를 우선으로 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겨울호랑이 2019-07-16 13:36   좋아요 1 | URL
그렇습니다. 우리 또한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책이 급격하게 냉탕과 온탕을 오간다면, 다음에도 빌미를 제공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전 정부 때 말도 안되는 일들이 있었지만 이를 외교문제로까지 커지게 한다면 그것 또한 문제가 될 수 있다 여겨집니다... oren님 말씀처럼 현재의 문제를 냉정하게 판단하고 대처해 나가는 지혜가 필요함을 깨닫게 됩니다. 감사합니다.^^:)

2019-07-16 12: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7-16 13: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7-17 07: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7-17 07: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9-07-17 23: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나치도 그렇고 일본도 그렇고 당시 민족우월주의와 전체주의가 만나 빵~
약육강식으로 일반화하고 싶지 않지만 떨칠 수가 없는 그런 흐름이라니까요. 자유 민주주의 꺼풀 아래 ㅎㄷㄷ 한 게 오죽이나 많습니까ㅎㅎ
삶은 계속되고 이게 반복이 안 된다는 보장도 없고^^;

겨울호랑이 2019-07-18 07:47   좋아요 1 | URL
파시즘의 성격 자체가 극우 민족주의와 프로파간다(대중선동)이 만나 이루어진 것을 보면, 극우에 대한 경계를 하게됩니다. 그렇다고, 극좌에서 이루어진 만행(스탈린의 경우) 역시 좋은 것만은 아니니,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고 중심을 잡아가는 것이 필요하다 생각됩니다... 그리고, 사회에서 중심을 잡을 수 있다는 것은 사람들 각자가 자신의 생각을 위협받지 않고 낼 수 있을 때 가능하다 여겨집니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하니, 역사 속에서 ‘기출문제‘와 답을 미리 예상해 볼 수 있어 어느 면에선 편리합니다.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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