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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7년 이래로 미국 외교정책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일본의 경제적 영향력을 한국에 다시 끌어들이는 것이었다.(p448)... 케네디의 취임 이전 혹은 1961년 군사쿠데타 이전 한일관계에서 중요한 진전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후 미국 정부는 국교정상화를 강하게 밀어붙였고, 로스토우와 로버트 맥나마라(Robert McNamara)는 일본이 동북아시아 지역경제의 축이 되도록 압박하는 에치슨의 전략을 사실상 되살려놓았다.(p449)... 돌파구는 미국의 강한 압력을 받고 나서 1964년에야 뚫렸다. 김종필은 재산청구권의 결정 액수를 매듭짓고자 다시 토오꾜오로 갔는데, 한국인들은 배상을 원하고, 일본인들은 '배상'이라고 불리지 않는 조건이라면 한 보따리의 원조와 차관을 내놓을 용의가 있었다. 1965년 4월 한국과 일본의 합의안은 한국 경제에 경이로운 일을 해냈으나, 이 타결이 차후 일본에 대한 청구의 가능성을 없앴기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논쟁거리로 남아 있다. 한편, '위안부'와 관련된 사항들과 같은 새로운 사실들이 폭로됨으로써 추가 청구의 문제가 거론되었다.(p451)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 현대사>中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에 대한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 Korea's Place in the Sun>의 기술이다. 저자는 1965년 국교정상화의 대가로 받은 3억 달러의 무상원조와 2억 달러의 차관, 일본의 민간기업들이 투자한 3억 달러가 당시 수출 총액 2억 달러에 불과했던 한국 경제가 도약하는데 매우 큰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과 함께 합의안이 가진 불안 요소를 함께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합의안이 가진 '양 날의 검'의 모습은  지난 7월 1일 일본 정부의 한국 수출 규제로 현실화되었다.


 이번 사안에 대해 많은 전문가들이 이슈와 향후 전망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현실의 문제는 쉽게 풀리지 않고 있다. 답답한 현실 속에서 한국 때리기를 이어가고 있는 일본의 모습을 바라보는 한국인의 시선은 좋을 수 없다. 그리고 이런 21세기의 일본 모습은 1869년 일본 메이지 정부의 정한론을 떠올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1869년 1월 23일, 메이지 정부는 조선에 사절을 파견할 때 그 국서에서는 "우리 황제가 즉위하여 강기(綱紀)를 다시 다잡는다"는 등의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전의 문서격식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조선으로부터 거절당했다. 일본정부는 이것을 빌미로 키토 타카요시(木戶孝允) 등은 "정한론(征韓論)"을 주장했고 혹은 다만 50일 내에 30개 대대 병력으로 조선을 정복할 수 있으며 그 전리품을 이용하여 군비를 보충할 것을 강조했다. (p64) <안중근과 동양평화론> 中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이후 도쿠가와 막부와 조선은 개화기에 이르기까지 조선통신사(朝鮮通信使)를 통한 교류를 이어왔지만, 일본이 페리 제독(Matthew Calbraith Perry, 1794 ~ 1858)에 의해 개항되면서 양국의 관계는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대, 제국주의 국가로 발빠르게 변신하려는 일본은 국내외적으로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그림] 征韓論(출처 : https://jpreki.com/seikanron/)


 일본정부는 재정정책을 수립하는 데 난항을 겪으면서 자주 분열되었다. (조슈-사쓰마의 독주에 의구심을 갖고 있던) 오쿠마는 통화팽창적인 관점을 견지한 반면, 다른 사람들은 좀 더 신중한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그들은 또한 부패와 스캔들에 연루되었다... 일본과 러시아는 사할린(가라후토(樺太))과 쿠릴열도(지시마(千島))를 독차지하기 위해 물밑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일본의 외교정책이 어떻게 전개될지 불투명한 상황에서 북방과 인근 대륙을 노리는 러시아의 야심을 우려하는 분위기가 고조되었고, 사이고와 이타가키는 동요하고 있는 구사무라이들의 에너지를 활용하는 동시에 민중의 지지를 얻을 수 있는 방책을 가구할 수밖에 없었다. 1873년 논쟁의 초점은 조선에 맞추어졌다.(p539) <현대 일본을 찾아서 1> 中


  지배층에 대한 일본 국내의 불만과 러시아와의 영토 분쟁 등 당시 일본 정부가 직면하고 있었던 위기 상황은 21세기 일본의 문제들인 일본 금융청이 발표한 '고령화 사회의 자산 형성/관리' 보고서 파문으로 인한 일본국민들의 불만 고조, 아베 신조 총리의 사학 스캔들 문제, 주변국들과의 영토분쟁 - 한국(독도), 중국(센가쿠 열도), 러시아(쿠릴열도) - 등을 연상시킨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 1869년 일본정부는 '근대적 외교관계' 수립을 빌미로 정한론을 구체적으로 검토하였고, 현대 일본은 대한 수출 제한 발표를 하였다.


 일본인은 조선에 대해 유난히 호전적인 태도를 보였는데, 이는 아마도 약소국으로서 그동안 맛본 좌절감을 보상받으려는 심리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조선은 외교관계를 맺자는 일본의 제안을 일관되게 거절해왔다. 도쿠가와 막부는 말기에 조선과 근대적인 외교관계를 수립해보려 했으나, 일본을 의심했을 뿐 아니라 쓰시마를 통해 대일관계를 처리하는 데 익숙해 있던 조선은 막부의 시도에 찬물을 끼얹었다. 메이지 정부는 집권하자마자 국가 대 국가로서 '근대적'인 관계를 맺자는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다시 한번 조선과의 국교정상화를 시도했다. 이 제안 역시 거절당하자 '응징' 차원의 군사원정을 단행할 수 있는 빌미를 잡았다. 조선을 응징해야 한다는 정한론(征韓論)은 막 귀국한 이와쿠라 사절단과 유수정부를 분열시키는 쟁점이 되었다.(p540) <현대 일본을 찾아서 1> 中


 한국 때리기를 통해 과연 일본은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1869년 1월 25일 기도 다카요시 기록은 일본 지배 계급의 의도를 잘 보여준다.


 우리는 지체 없이 우리나라의 진로를 결정한 다음, 조선에 사절을 본내 조선의 관리들에게 우리한테 무례하게 구는 연유를 따져야 한다. 만약 그들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사실을 공포하고 우리 신국(神國)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그들의 영토에 대한 공격을 개시해야 한다... 이 일이 완수되면 우리 국민의 시대에 역행하는 전통은 하룻밤 사이에 바뀔 것이다... 이 정책은 우리나라에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이로운 것이다.(p540)... 나는 우리가 타당한 이유없이 조선을 침략해야 하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단지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질 논리적 근거를 개진하고 싶은 것 뿐이다. 내가 내세우고 싶은 논리적 근거란 우리의 우월한 국가정책을 그 땅에 베풀어야 한다는 것이다.(p541)  <현대 일본을 찾아서 1> 中


 참고적으로, 이러한 일본의 의도에 대해 <현대 일본을 찾아서>의 저자 마리우스 B.잰슨(Marius B. Jansen)은 다음과 같이 비판을 하고 있다. 아마도, 오늘날 일본 때리기를 바라보는 세계의 시선도 비슷하지 않을까 추측해 본다.


 이보다 더 조잡하고 편협한 '정당화'도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20세기에 이르러 많은 일본인이 바로 이 환상 때문에 고생했지만, 1869년에 이런 환상이 "보편적으로 수용될" 것이라고 기대했다는 것은 더더욱 대경실색할 일이다.(p541)  <현대 일본을 찾아서 1> 中


 결국, 정한론은 뜨거운 논쟁이 벌어지면서 결국은 무산되지만, 이러한 일본의 침략 야욕이 운요호 사건(雲揚號事件)을 통해 강화도 조약으로 이어지면서, 조선은 결국 식민지로 전락한 계기가 되었다. 이렇게 정한론은 실현되었고, 근현대사의 한-일 양국간 불행한 역사는 시작되었다.


 이번 사태에 대해 누군가는 우리의 감정적인 대응을 지적하지만, 사실 우리가 일본과의 관계에 있어서 처음부터 적대한 적은 없었다. 심지어, 이토 히로부미( 伊藤博文, 1841 ~ 1909)를 사살한 안중근(安重根, 1879 ~ 1910)의 <동양평화론 東洋平和論>에서는 일본을 중심으로 한, 중, 일 3국이 힘을 합쳐 외세에 대항할 것을 강조하는 내용이 나오는 것을 보면 한국 의 일본에 대한 감정이 오랜 역사가 있다고 보기 어려울 것 같다. 그렇다면, 일본의 한국에 대한 감정은 어떨까. 그 기원을 찾기 위해서는 삼국시대(三國時代)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이다.


[사진] 저격 직전 하얼빈 역 플랫폼(출처 : http://study.zum.com/book/12502)


 우리 동양은 일본을 맹주로 하고 조선, 청국과 정립(鼎立)하여 평화를 유지하지 않는다면 백년의 대계를 그르칠 것을 감히 두려워한다. 이등박문(伊藤博文)의 정략은 이에 반하여 함부로 한국을 병합하는 데 급급하여 다른 상황을 고려할 틈도 없이 동포를 살육하고 황제를 위박(威迫)하여 그 횡포가 이르지 않는 것이 없다. 그가 잡은 방침을 고치지 않고 이대로 추이(推移)하면 우리 동양 3국은 다 같이 쓰러지고 백색인종의 유린(蹂躙)에 맡기지 않으면 안된다. 러시아와 청국 양국이 일본을 향하여 다시 싸우려고 하는 형세가 있음은 당연한 일이며, 미국 또한 일본의 발호(跋扈)를 좋아하지 않는다. 점차 세계의 동정은 한국, 청국, 러시아의 약자에게 모이고 (이에 따라) 일본은 고립한 위치에 설 것은 지금부터 예상하여도 어렵지 않다. 이것을 생각하지 않고 일시 세력에 의지하여 우리 한국의 독립을 빼앗으려는 것은 천견(淺見)으로서 지자(智者)의 치소(嗤笑)를 초래하고 말 것이다.(p172)  <안중근과 동양평화론> 中


 <일본서기 日本書記>에는 663년 백강 전투(白江戰鬪) 이후 백제(百濟)가 멸망했을 때 왜(倭 일본)의 혼란에 대해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문헌상으로는 이때부터 일본인들의 반한(反韓) 감정이 시작된 것으로 볼 수 있을 듯하다.


 이 해에 천황은 백제를 위해 신라를 정벌하고자 스루가노쿠니(駿河國)에 명하여 배를 만들게 했다... 무술(17일)에 적장(賊將)이 주유에 이르러 그 왕성을 에워쌌다. 대당(大唐)의 장군이 전선(戰船) 170척을 이끌고, 하쿠스키노에(白村江)에 진을 쳤다. 그러나 일본이 져서 물러났다(p341)... 9월 신해삭 정사(7일)에 백제의 주유성(州柔城)이 마침내 항복하였다. 이때 국인(國人)들이 "주유가 항복하였다. 사태가 어찌할 수 없게 되었다. 백제의 이름은 오늘로 끊어졌다. 이제 조상의 분묘가 있는 곳을 어떻게 갈 수 있겠는가? 고 말하였다.(p342) <역주 일본서기 3 >中


 여기에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인들의 피해 의식이 더해지면서 한국에 대한 적개심은 더해진다. 이에 대해서는 역사학자 나가하라 게이지(永原慶二, 1922 ~ 2004)는 <20세기 일본의 역사학>을 통해 확인해 보자.

 

 '전후 처리와 연관되는 보상 문제도 벌써 국가로선 해결이 완료되었어야 하지만, 최근의 일본군 '위안부' 문제처럼 기회 있을 때만다 제기된 데서 '전후'가 종료되지 않았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런 문제는 의심의 여지없이 다음과 같은 사안이 겹친 데서 발생했다. 무차별 공습과 원폭 등으로 일본 국민들은 패전을 피해자 감각에서 먼저 받아들였기에 자국의 전쟁 책임을 주체적으로 자각하고 해결하려는 의식이 약했다는 점, 패전 후 이내 냉전이 심각해지고 미국의 반소/반공 정책에 편입되었다는 점, 소련의 일본인 시베리아 억류가 가혹하기 짝이 없었다는 점, 또 국내의 민중 생활이 의식주 그 어느 것도 바닥까지 내몰렸다는 점 등이 그러하다.(p289) <20세기 일본의 역사학> 中


 정리해보면, 고대로부터 한국과 일본은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지내왔지만, 백제 멸망이라는 사건 이후 한국에 대한 일본의 적개심과 식민 지배 경험 그리고, 패전에 대한 일본의 피해 의식 등이 더해지면서 오늘날 일본인들의 한국인식이 만들어졌다. 이러한 일반의 인식 위에 일본 지배계급은 국내외 문제 발생 시 불만을 한국으로 터뜨리는 방식을 통해 위기를 넘겨왔으며(임진왜란, 정한론 등) 이번 일도 이런 일련의 흐름의 연장에 있다고 생각된다.


 일본의 수출 규제가 시작된 이후 한국 내에서의 일본 상품 불매 운동이 이어지고, 이에 대한 여러 목소리가 사회 곳곳에서 나오고 있는 현실에서, 어떤 방향으로 가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지 판단하기 쉽지 않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한-일 간의 문제가 오래되고 복잡한 문제이기 때문에 감정적인 대응보다 이성적인 대응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일본 제품 불매 운동과 같은 단편적인 문제보다, 일본에 종속된 경제문제, 일본 조어(造語)에 오염된 우리말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이루어져야 하지 않을까.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한-일 갈등 문제를 통해 일본으로부터 진정한 독립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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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15 07: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7-15 08: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雨香 2019-07-15 08: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차별 공습과 원폭 등으로 일본 국민들은 패전을 피해자 감각에서 먼저 받아들였기에 자국의 전쟁 책임을 주체적으로 자각하고 해결하려는 의식이 약했다는 점,‘ 이 부분이 잘 짚어낸 듯 합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 문제는 쉽게 정리될 것 같진 않군요. 일본은 지속적으로 한국에 대한 이런 행태를 보일 것 같고요.

한일간의 문제를 역사적으로 보여주셔서 감사합니다. (공부하듯 읽었습니다.)

겨울호랑이 2019-07-15 08:33   좋아요 0 | URL
일본인들 스스로 가해자라는 인식보다 피해 의식을 가지고 있으니, 독일과 같은 태도를 보이기를 기대하는 것은 지나쳐 보입니다. 우리 역시 이런 일본의 태도를 보면서 화해를 말하기는 어려운 처지니만큼 오랜 평행성을 달릴 것 같습니다...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oren 2019-07-15 16: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일관계는 과거로부터 켜켜이 쌓여 온 온갖 감정들이 ‘격류‘처럼 들끓었다가 잠시 가라앉았다가 하면서 용케 여기까지 흘러온 듯싶네요. 중요한 건 과거를 직시하되, 거기에 매몰되지 말고, 미래지향적으로 꾸준히 관계 개선을 해나가야 된다는 점이 아닐까 보여집니다. 일본이 2차 대전에서 미국에게 완패 당하고 나서 자존심을 모조리 거둬들이고 미국에 찰싹 달라붙어 한몸이다시피 우호적으로 지내왔고, 지금까지도 미국에는 무조건 ‘맹종‘하는 듯한 모습을 보면, 그들의 ‘생존 본능‘ 또는 ‘경제적 본능‘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새삼 알 수 있는데, 우리나라는 일본에 대한 원한 감정이 너무 앞서서 ‘일본과의 공생‘ 또는 ‘미래 지향적인 모색‘에는 너무 등한시하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듭니다.

일본이 이번에 저토록 쎄게 나오는 걸 보면 뭔가 단단히 벼르고 작정한 듯한 분위기가 다분한데(한미일 관계에 대한 근본적인 재검토 내지는 재설정 이야기까지 심심찮게 등장하는 판국이고, 이참에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하는 법령 개정까지는 밀어부칠 듯한 분위기고요.), 정치권에서는 너무나 한가하게 이번 사태를 바라보는 게 아닌가 싶어 걱정도 많이 됩니다.

겨울호랑이 2019-07-15 19:53   좋아요 1 | URL
저는 근현대사에서 한국과 일본사이의 문제를 보면, 과거 프랑스와 독일의 경우가 생각납니다. 30년 전쟁 이후 끊임없이 독일을 작은 나라로 쪼개려 노력했던 프랑스의 모습과 한국을 남북한으로 나뉘어 통치하려는 일본의 저의가 크게 다르지 않다 생각됩니다.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와 프로이센의 비스마르크가 사이좋은 이웃이 되지 못한 것은 그들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해서이지, 그들이 냉정하지 못했기 때문은 아니라 생각됩니다... 물론, 19세기 프랑스-독일의 정세와 오늘날 한국-일본의 정세가 동일하지는 않습니다. 당시, 이미 국민총생산과 인구 등 여러 면에서 프랑스를 앞선 독일의 상황과 아직도 일본에 뒤쳐진 부분이 많은 우리의 상황을 생각해 본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오늘날 일본이 보이는 모습은 상호평등, 평화공존을 추구하는 이웃의 모습이 아니기에 지금 평화를 말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어 보입니다. 또한, 과거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을 때, 단호한 의기를 보여준 그를 적이지만 존경하는 모습을 본다면, 일본의 적절하지 못하 태도에 단호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 오히려 향후 양국간 외교 관계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나도 생각해 봅니다...

개인적으로 이번에 일본이 배상판결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것에 향후 북한과의 관계 개선 시 당연히 언급될 배상문제도 걸려 있다 여겨집니다. 1965년 국교정상화를 조건으로 국가간 배상에 합의한 한국과는 달리 아직 배상이 이루어지지 않은 북한에 천문학적인 배상금을 지불하지 않으려는 술수도 있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배상을 하더라도 한국의 전례에 맞춰 푼돈을 쥐어주려는 심산이었는데 갑자기 복병이 튀어나온 것에 민감한 반응을 보인 측면도 있다 여겨집니다. 이러한 이유로도 일본에 대해서는 차가운 대응을 해야하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겨울호랑이 2019-07-16 11:45   좋아요 1 | URL
다른 한 편으로, 우리 나라 경제가 일본에 종속되어 있는 냉정한 현실을 생각해 본다면, 분기탱천해서 일본의 무모한 도발에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것은 자제해야 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현실적으로는 불매운동 같은 사회운동이 아닌 개인의 작은 변화부터 실천해야하는 것이 보다 바람직할 것으로 여겨집니다...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하는데, 가슴은 그렇지 못하니 문제가 참 어렵습니다...^^:) 다만, oren님 말씀처럼 이러한 위기를 정치적으로 활용하려는 움직임에 대해서는 분명 경계해야 할 것으로 생각해 봅니다...

oren 2019-07-16 13:04   좋아요 1 | URL
국가간의 갈등은 대체로 위정자들이 바뀌면 그때마다 변화를 겪게 마련인데, 아베 정권은 너무나 치졸하고 악랄하게 한국을 괴롭히고 있고, 문재인 정권도 거기에 맞대응하는 방식이 너무나 경직되어 있다는 느낌을 떨치기 힘듭니다. 좀 더 길게 보고, 위기를 도리어 역이용해서 ‘문제 해결‘의 발판으로 삼는 지혜도 필요하리라는 생각도 듭니다. 아무튼 뿌리가 깊은 양국간의 정치외교적 문제를 무역 보복으로 치고 나온 데 대해서는 집요하게 그 부당성을 물고 늘어지더라도, 감정적이고 격앙된 맞대응보다는 외교적으로 교묘하게 접근해서 ‘실리‘를 우선으로 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겨울호랑이 2019-07-16 13:36   좋아요 1 | URL
그렇습니다. 우리 또한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책이 급격하게 냉탕과 온탕을 오간다면, 다음에도 빌미를 제공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전 정부 때 말도 안되는 일들이 있었지만 이를 외교문제로까지 커지게 한다면 그것 또한 문제가 될 수 있다 여겨집니다... oren님 말씀처럼 현재의 문제를 냉정하게 판단하고 대처해 나가는 지혜가 필요함을 깨닫게 됩니다. 감사합니다.^^:)

2019-07-16 12: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7-16 13: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7-17 07: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7-17 07: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9-07-17 23: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나치도 그렇고 일본도 그렇고 당시 민족우월주의와 전체주의가 만나 빵~
약육강식으로 일반화하고 싶지 않지만 떨칠 수가 없는 그런 흐름이라니까요. 자유 민주주의 꺼풀 아래 ㅎㄷㄷ 한 게 오죽이나 많습니까ㅎㅎ
삶은 계속되고 이게 반복이 안 된다는 보장도 없고^^;

겨울호랑이 2019-07-18 07:47   좋아요 1 | URL
파시즘의 성격 자체가 극우 민족주의와 프로파간다(대중선동)이 만나 이루어진 것을 보면, 극우에 대한 경계를 하게됩니다. 그렇다고, 극좌에서 이루어진 만행(스탈린의 경우) 역시 좋은 것만은 아니니,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고 중심을 잡아가는 것이 필요하다 생각됩니다... 그리고, 사회에서 중심을 잡을 수 있다는 것은 사람들 각자가 자신의 생각을 위협받지 않고 낼 수 있을 때 가능하다 여겨집니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하니, 역사 속에서 ‘기출문제‘와 답을 미리 예상해 볼 수 있어 어느 면에선 편리합니다.ㅋ
 

 동북공정(東北工程)으로 고구려(高句麗)와 발해(渤海, 大震) 중국역사로 편입시키려는 중국 역사학계의 연구는 마무리되고, 이제는 남아있는 유적(遺蹟)마저 훼손하는 단계에 이른 듯하다. <요동, 고구려 산성을 가다>에서는 이와 같이 사라져가는 고구려 산성의 모습이 잘 그려진다.


 오늘 와서 보다시피 박작성(泊灼城)은 어느 날 갑자기 만리장서 동단의 기점이란 설명하에 호산장성(虎山長城)으로 화려하게 변신을 했다. 고구려 특유의 석성을 벗겨내고 그 위에 명나라의 전형인 벽돌로 쌓은 성으로 완전 탈바꿈했다... 그동안 줄기차게 하북성 산해관(山海關)이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라고 해왔다... 수많은 자료를 무시하고 느닷없이 2009년에 명나라 장성의 동쪽 끝단이 호산장성이라고 발표했다.(p223)... 호산장성이 들어서기 전에만 하여도 단동 관광지도를 보면 그 자리에 "고구려 성터", "고구려 옛 우물터"가 있었지만 지금은 없어졌다고 한다. 지도에서만 없앤 것이 아니라 아예 성은 둔갑을 하였고, 우물을 메워 고구려의 흔적을 지워 버렸다. 이것은 또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오늘에 와서 보는 압록강변의 고구려성들은 이미 그 흔적조차 없다.(p224) <요동, 고구려 산성을 가다> 中


 이제는 다른 나라의 땅에 남아 있는 선조들의 유적들이 소중하게 다루어지지 못한 현실을 생각하면 안타까움을 느끼게 된다. 그렇지만, 역사자료는 건축물만 있는 것은 아니다. 현재 남아 있는 문헌은 고구려가 요동(遼東)에 위치한 나라였으며, 우리는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임을 강하게 뒷받침하고 있음을 생각해본다면, 역사를 왜곡하는 이들의 노력이 궁색해 보이기만 한다. 그 중에서도 최부(崔溥, 1454 ~ 1504)의 <표해록 漂海錄>에서 해당 내용을 살펴보자. 

 

 "당신네 나라는 무슨 비결이 있어서 수/당의 군대를 물리칠 수 있었소?"


 "모신(謨臣)과 맹장(猛將)이 병사를 지휘하는 데 도리가 있었으며, 병졸된 자들은 모두 충성스러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소. 그 때문에 고구려는 작은 나라였으나, 충분히 중국의 백만 대군을 두 번이나 물리칠 수 있었소. 지금은 신라와 백제, 그리고 고구려가 한 나라로 통일되어, 인물은 많고 국토는 광대해져 부국강병하오. 충직하고 슬기로운 인재는 수레에 싣거나 말(斗)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소."(p246) <표해록> 中


 진기 일행이 말했다. "우리 요동성 지역은 귀국과 이웃하여 의(義)가 한집안과 같습니다. 오늘 다행히 객지에서 서로 만나게 되어 감히 약소한 물품로써 예를 표합니다." 내가 말했다. "그대들의 땅은 고구려의 옛 도읍지다. 고구려는 지금 조선의 땅이니 땅의 연혁은 비록 시대에 따라 다르지만, 그 실상은 한나라와 같소."(p351) <표해록> 中


 계면(戒勉)이라는 승려가 나에게 말했다. "소승은 본래 조선인 혈통인데 소승의 조부가 이곳으로 도망쳐 온 지 이미 3대가 되었습니다. 이 지방은 조선의 경계와 가까운 까닭으로 이곳에 와서 거주하는 사람이 매우 많습니다... 이 지방은 옛날 고구려의 도읍으로, 중국에 빼앗겨 예속된 지 천 년이 되었습니다. 우리 고구려의 풍속이 아직도 남아 있어 고려사(高麗祠)를 세워 근본으로 삼고, 제례(祭禮)를 올리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으니 근본을 잊지 않기 때문입니다."(p496) <표해록> 中


 정작 중요한 것은 중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유적 훼손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오히려, 우리가  옛 문헌에 수록된 우리 역사를 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더 경계해야 하지 않을까. <열하일기 熱河日記>의 저자 박지원(朴趾源, 1737 ~ 1805)은 요동을 지나면서 우리의 역사 인식에 대해 다음과 같이 탄식하고 있다.


 우리나라 선비들은 요동이 본시 조선의 옛 땅이고, 숙신 肅愼, 예맥 濊貊 등 동이 東彛(彛는 夷와 통해서 쓴다)의 여러 나라들이 모두 위만조선 衛滿朝鮮에 복속되었던 사실을 모르고, 오랄 烏剌, 영고탑 寧古塔, 후춘 後春 등의 땅이 본래 고구려 영토인 줄도 모른다.(p84) <열하일기 1> 中


 비록 반도 안에서 삼국을 합병했으나 그 강토와 국력은 고구려의 강대함에 결코 미치지 못했건만, 후세의 앞뒤가 꽉 막힌 학자들은 평양의 옛 이름만 마음으로 글워하여 한갓 중국의 역사 기록에만 기대고 수나라, 당나라의 옛 자취에만 흥미를 느껴 '이곳이 패수이다, 이곳이 평양이다'라고 한다. 이미 실제 사실과 다르고 차이 나는 것을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형편이니, 이곳이 안시성이 되는지 봉황성이 되는지 어찌 분변할 수 있겠는가?(p88) <열하일기 1> 中


 혼(魂)과 백(魄). 고구려의 백(魄)이 건축물, 미술품 등 유물이라면, 고구려의 혼(魂)은 문헌 속에 담긴 정신이 아닐까. 백(魄)이 죽은 후 3년이 지나면 흩어지는 것처럼, 유물은 세월의 흐름에 사라지더라도, 문헌 속에 담긴 뜻을 새긴다면 그 혼은 우리 안에서 불멸(不滅)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그리고, 이는 잃어버린 땅 회복이라는 거창한 명분보다 더 절실하고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 여겨진다...


PS. 지금은 러시아 칼리닌그라드(Калининград)가 된 쾨니히스베르크(Königsberg). 이 곳이 배출한 유명한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 ~ 1804)를 러시아 철학자로 만들려는 노력이 진행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보면 자신의 역사를 자랑스럽게 만들고 싶어하는 민족의 본성(本性)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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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14 07:4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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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14 08:4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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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14 09:4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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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14 15:5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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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14 10:0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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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14 16:0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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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올 김용옥의 <논술과 철학강의 1>은 역사를 중심으로 논술과 철학 문제를 다루는 책이다. 책의 앞부분은 한국 현대사의 대강이 다루어지는데, 이 중에서 4.3 제주민중항쟁과 5.18 민주화운동과 관련된 내용을 옮겨본다. 


 1. 제주  4.3


[사진] 제주 4.3 (출처 : https://www.ytn.co.kr/_ln/0103_201804031304184899)


 저자는 본문에서 제주 4.3이 일어난 배경으로 육지와 고립되었지만, 일본과 지리적으로 가까워 지식인들의 비중이 높았던 제주만의 특징을 언급한다. 해방 이후 여운형(呂運亨, 1886 ~ 1947)의 주도하에 조직된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의 활동이 다른 어느 지역보다 활발한 곳이 제주도였다.


 제주도는 지정학적으로 고립되어 있었던 덕분에 미군정의 지배가 직접적이질 못했고 인민위원회가 상대적으로 뿌리를 깊게 박아 1948년까지 섬을 장악하고 있었고... 제주도는 일제강점기를 통해 일본 본토문명과 매우 긴밀한 연락관계를 유지했으며 상당한 노동자들이 일본으로 이주하여 재일교포사회를 형성했다. 일제 시대를 통하여 농민들의 자립도가 비교적 높았으며, 분화된 직업구조가 본토의 문화와는 다른 양상을 띠고 있었으며 적색농민조합의 조기 형성은 해방 후 인민위원회의 성장에 이상적 환경을 제공했다.(p79) <논술과 철학강의 1> 中


 이러한 환경에서 서북청년단이 제주도 내에 들어오면서 제주도민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었고, 이후 초토화((焦土化; Scorched eart) 작전을 통해 제주도는 철저하게 파괴되기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제주에서의 유혈참극은 한국전쟁 종료 후인 1954년 9월까지도 계속되는데, 그 사이 기간 일어난 사건이 바로 여수,순천 사건이다.


 2. 여수, 순천 사건과 박정희


 이러한 제주도의 인민위원회를 뿌리뽑기 위해 전후 아시아에서 가장 잔인하고, 지속적이며, 철저한 소탕작전이 감행되었던 것이다. 그것의 직접 도화선이 된 것은 서북청년단의 학살만행이었다... 서북청년단의 이유없는 양민학살에 대항하여 제주도 인민들은 6년 6개월에 걸친 끈질긴 항쟁을 계속했다.(p80) <논술과 철학강의 1> 中


 제주 4.3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명령을 받은 14연대는 항명(抗命)하게 되고, 이를 통해 군대 내 남로당(南勞黨) 조직이 있었음이 드러나게 된다. 그리고, 이어지는 군대 내 남로당 조직의 숙청과정에서 등장하는 인물이 '박정희(朴正熙, 1917 ~ 1979)'다. 


 여순항명사건이란 바로 제주도 민중항쟁을 진압하기 위하여 출동하라는 명령을 거부한 여수 주둔 14연대의 반란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 사건으로도 약 1만 명의 양민 희생자가 났고, 여수읍의 절반이 소실되었고 인근 지역의 수백 개의 마을이 재만 남기고 사라졌다.(p80)... 14연대의 반란은 남한의 군대 내에 엄청난 공산당 조직이 침투되었다는 사실이 청천백일 하에 드러나게 되었고 이로 인해 국군 내에 거대한 숙군의 회오리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p81) <논술과 철학강의 1> 中


 3. 이어지는 폭력과 5.18 민주화 운동


 박정희 소령은 전남 광주의 여순항명토벌사령부로 갔다가, 1948년 11월 11일 남로당 가입등의 죄목으로 군 수사당국에 체포되었다... 그의 구명 운동에 앞장 선 사람은 백선엽 육본 정보국장이었다... 박정희는 군조직 내 좌익세포들의 상세한 명단을 제공했다. 같은 조직의 동료들의 죽음의 대가로 그는 목숨을 건졌던 것이다.(p82) <논술과 철학강의 1> 中


 박정희는 이 사건으로 사형에 처해질 뻔 했으나, 남로당 간부들의 명단을 제출하는 대가로 자신의 목숨을 건지게 된다. 그 과정에서 그의 만주군(滿州軍) 출신 인맥이 도움이 되었던 것은 해방 이후 친일파들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단면이라 여겨진다.


 박정희의 생애의 최후 일단이 가장 크게 문제가 되는 부분은 그 삶의 폭력성이다. 우적인 전향이 오직 이 땅의 경제도약을 위한 몸부림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면 다행일 수도 있겠지만 그러한 경제발전이 그의 유신치세기간의 모든 폭력성을 정당화할 길은 없다.(p93) <논술과 철학강의 1> 中


 저자는 박정희의 비극을 그의 '폭력성'에서 찾는다. 인간 박정희의 비극은 대통령이라는 그의 위치 때문에 개인의 불행에 그치지 않았다. 10.26에 의해 그가 사망한 후에 그 폭력성은 후계자 '전두환'으로 이어졌고, '광주'에서 그 폭력은 잔악한 모습으로 드러났다.


 5.18 광주민주항쟁은 그 기나긴 폭력의 역사에서도 가장 잔인하고 가장 악랄하며 가장 의도적이고 가장 조작적인 사건이었다. 그 폭력의 주체는 소위 박정희의 정군운동의 맥을 잇는다고 자부하는 신군부였으며, 신군부의 대표주자는 전두환이었다. 다시 말해서 박정희라는 역사적 개인의 모든 가치관의 역사적 화신이었던 것이다.(p94)<논술과 철학강의 1> 中


[사진] 5.18 민주화운동 (출처 : https://news.joins.com/article/22633539)


 한미연합사령관은 20사단의 작전통제권 이양을 요청하자, 이를 기꺼이 수락했다.(Your request is approved). 미국의 허락없이는 움직일수 없는 20사단을 광주코뮨분쇄작전에 사용한 것은 미국의 한국이해의 전형적 한계성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다. 그것은 해방 후 인민위원회를 무자비하게 진압했던 미군정의 행동패턴과 동일한 연속선상에 있다.(p97) <논술과 철학강의 1> 中


 <논술과 철학강의 1>에서는 위와 같이 제주 4.3과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관계를 박정희와 전두환이라는 두 인물을 통해 연결시킨다. 이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저자의 최근작인 <우린 너무 몰랐다 - 해방, 제주 4.3과 여순민주항쟁>에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논술과 철학강의 1>는 중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기초 논술책이라는 한계로 더이상의 현대사를 자세히 말하지 않는다. 다만, 이 책의 짧은 요약본만으로도 한국 현대사의 큰 흐름을 잡기에는 무리없는 내용이라 여겨져 이를 정리해서 옮겨본다. 덧붙여, 저자의 입장이 너무 편향되었다고 비판할 수도 있는 이들에게, 같은 책에 있는 북한 비판 내용도 함께 소개하며 이번 페이퍼를 갈무리한다. 


 나 도올이 생각하기에, 6.25 한국전쟁이 저지른 최악의 죄악은 독립을 향한 20세기의 찬란한 거족적 항일투쟁의 모든 가치를 무화(無化)시켰다는 사실, 바로 그 사실에 있다.(p58) <논술과 철학강의 1> 中


 그토록 피눈물나게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일본민족과 싸웠던 조선의용군과 광복군들이 관동군이 아닌, 바로 해방의 주체인 자신의 동포혈육을 찔러 죽여야만 했던 역사를 과연 어떤 명분으로 정당화할 수 있을 것인가? 김일성은 1953년 7월 28일 평양광장에서 "조선인민의 승리"를 선언했지만, 그것은 실질적으로 "조선인민 전체의 전면적 패배"였다.(p59)...1950년 6월 25일부터 전개된 역사에 대하여 김일성은 책임을 모면할 길이 없다. 그는 분명 성급했다. 그리고 군사적으로도 정확한 판단능력을 결했다.(p61) <논술과 철학강의 1>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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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12 15:0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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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12 18:1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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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12 18:2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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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12 22:0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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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여름에 미국측의 맥아더 장군이 그은 선을 따라 확정된 미•소의 한반도 분할은 좀더 영속적이었다. 양측은 한반도의 반쪽을 통치할 독재자를 각각 선정했다... 한반도 분할은 제2차 세계대전 연합국들 간의 최후의 중대한 협정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5년 만에 가장 큰 충돌의 원인이 되었다.(p686) 「민중의 세계사」중


제주 4.3 을 어떻게 바라보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엇갈린 시선들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엇갈린 관점은 1948년 4월 3일 무장봉기를 4.3의 기점으로 보는가, 아니면 1947년 3월 1일 6명의 민간인이 사망한 3.1 사건을 기원으로 보는가로부터 시작하여 논의되어야할 부분이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제주 4.3을 비롯한 한국 현대사는 단순한 국내 정치사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에 보다 넓은 관점에서 시간을 두고 세계사의 관점에서 깊은 연구가 이루어져야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47년부터 1954년까지 제주도 총인구 30만명 중 약 10%가 사망한 4.3사건은 그 자체로 가슴 아픈 비극입니다. 어느 누구라도 죽어 마땅한 사람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물며 이념을 알 리 없는 10세 이하의 어린이가 약 700명이 사망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우리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가슴 아픈 4.3 71주년을 맞아 제주 4.3 평화기념관 자료 사진을 올려봅니다.

제주도가 아픈 과거의 상처를 딛고 평화의 땅으로 거듭나기를 바라며, 제주 4.3을 기억한 하루를 이렇게 흘려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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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해목 2019-04-04 11:0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김석범작가님의 <화산도>를 언젠가는 완독해야지 하면서 감히 엄두를 못내고 있는데 또 이렇게 4.3.이 지나가버렸네요.
희생자들의 한을 풀어드리위해서라도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지 않나 싶어요.

겨울호랑이 2019-04-04 11:31   좋아요 1 | URL
설해목님의 말씀에 동감합니다. 아직 4.3에 대해 많은 사실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예전보다 높아진 일반의 인식 속에서 바르게 자리잡을 날이 오리라 기대해 봅니다...

2019-04-05 12:1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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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05 13:4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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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05 14:1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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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가도 역시 해석이라는 자신의 임무를 수행할 때 중요한 것과 우연한 것을 구별하기 위해서 중요성에 관한 나름대로의 기준이 필요하며, 그 기준은 또한 그의 객관성의 기준이기도 하다 : 따라서 역사가도 당면한 목적과의 연관 속에서만 그 기준을 찾아낼 수 있다.(p182) <역사란 무엇인가> 中


 E.H.카(Edward Hallett Ted Carr,1892 ~ 1982)는 <역사란 무엇인가 What is History?>에서 역사(歷史 history)란 단순한 과거 사실의 나열이 아닌, 역사가의 해석에 의해 재구성되었음을 강조했다. 카 이후 역사가들의 주관적 해석이 역사적 사실 못지 않게 중요함을 인정받았지만, 역사가들 사이의 서로 다른 역사 해석이 우리에게 혼란을 주는 부작용이 있는 것 또한 현실이다. 이번 페이퍼에서는 2019년 초 다시 사회 이슈가 되고 있는 '5.18 민주화 운동'과 비극적 사건을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는 역사책들을 통해 역사가의 해석이란 무엇인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1. 광주, 5월 18일 ~ 5월 26일 : 누가 먼저 폭력을 불렀는가?

 

커밍스의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 - 이하 한국현대사 - >에서는 시위대의 계엄 철폐 요구에 대해 공수부대의 무차별 학살로 대응하면서 비극이 시작되었다고 바라본다. 이에 반해, 이영훈은 <대한민국 역사>에서 사전에 광주 지역에 유언비어가 퍼졌고, 시위대의 폭력시위로 인해 공수부대의 실탄 사격이 이루어진 것으로 설명한다. 정리하면, 커밍스는 공수부대가 먼저 폭력을 행사했다고 해석하는 반면, 이영훈은 시위대의 폭력이 먼저 였음을 강조한다. 수많은 사람이 죽은 사실은 변함없지만, 역사가들의 해석에 따라 이들은 때론 피해자가, 때론 가해자가 되버리는 것이다.


 5월 18일 광주 거리에 약 500명의 사람들이 몰려나와 계엄령 철폐를 요구했다. 약물을 복용했다고 여겨지는 정예 공수부대가 이 도시에 도착하여 학생, 여성, 어린이 가릴 것 없이 길을 막는 사람은 누구든지 무차별하게 학살하기 시작했다.(p540)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 현대사> 中 


 5월 18일 광주 시내에는 악성의 유언비어가 유포되어 광주 시민의 감정을 자극하였다. 19일, 분노한 학생과 시민의 시위대는 공수부대에 화염병, 돌, 보도블럭을 던지며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시위대는 기름통에 불을 붙여 경찰 저지선으로 굴러 보냈다. 시위대는 공수부대의 장갑차를 탈취하려 했으며, 그에 맞서 공수부대 장교가 위협사격을 하였다.(p398)... 전남도청, 조선대, 전남대를 제외한 광주시 일원이 군경의 통제를 벗어나 시위대에 점거되었으며, 광주세무서 예비군 무기고에서 칼빈 소총이 시위대에 탈취되었다. 공수부대는 시위의 진압을 포기하고 전남도청과 조선대로 집결하여 시위대와 대치하였다. 경찰관과 부대원의 사망에 자극을 받은 공수부대의 장교들은 실탄 지급을 요청하여 분배 받았다.(p399) <대한민국 역사> 中


2. 5.18 민주화 운동에서의 미국 역할


 5.18 민주화 운동에 있어 논란이 많은 부분은 미국의 개입 여부다. 이에 대해 커밍스는 <한국 현대사>에서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이 미국 장성이 사령관으로 있는 한미연합사에 있는 만큼 광주에서 일어난 비극에 대해 미국의 책임을 피할 수 없다고 해석한다. 반면, 이영훈은 <대한민국역사>에서 해당 부대의 작전권은 한국군에 있었다는 미국정부의 성명서를 이례적으로 상세히 소개하며, 미군은 관련 없음을 강조한다. 역사적 사건은 하나이지만, 역사가는 자신의 관점에서 사건을 해석하고, 독자에게 '모든 사실'을 알려주지 않는다. 그의 의도와는 관련없이.


 시민 수습대책위원들이 미국대사관에 개입을 호소했으나 오히려 위컴 장군에게는 5월 22일 한국군 20사단을 DMZ의 임무에서 면제하도록 허용하는 일이 맡겨졌을 뿐이다... 미국의 작전통제권이 한미연합사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미국의 책임은 면할 수 없었고 전선부대 이탈을 허용함으로써 카터의 인권정책은 난자당한 꼴이었다.(p541)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 현대사> 中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해서는 광주에서 사태가 전개된 당시부터 미국의 책임론이 제기되었다... 그에 대해 1989년 6월 미국정부는 "1980년 5월 대한민국 광주서 일어난 사건에 관한 미국정부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그 성명서에서 미국정부는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는 처음부터 한미연합사령부의 작전통제권 하에 있지 않았다는 사실, 한미연합군 사령부 설치를 위한 1978년의 협정은 미국과 대한민국은 상대방의 동의 없이 언제든지 자국의 부대에 관한 작전통제권을 행사할 수 있는 주권을 보장하였다는 사실, 그에 따라 한국군은 이미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피살된 후 발포된 계엄 업무의 수행을 위해 20사단의 작전통제권을 회수한 적이 있다는 사실, 이후 동 사단의 3개 연대 중 1개 연대의 작전통제권이 한미연합사령부에 반납되었지만 나머지 2개 연대의 작전통제권은 반납되지 않았다는 사실, 1980년 5월 20일 한국군은 20사단 1개 연대의 작전통제권을 다시 회수하였다는 사실 등을 근거로 제시하면서 미국 책임론을 부정하였다. 이처럼 광주 유혈참극에 대한 미국 책임론은 그 근거가 확실하지 않지만...(p402) <대한민국 역사> 中


 위의 역사적 사실에 대한 진위를 논하기에는 여러모로 한계가 있으므로, 사실에 대한 판단은 넘기도록 하자. 대신, 다른 질문을 던져보자. 이처럼 동일한 역사적 사실에 근거함에도 불구하고 역사가에 따라 전혀 다른 역사가 만들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해 E.H카는 그것은 역사가의 해석에 따라 인과(因果) 관계, 상관(相關) 관계 설정이 달라지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미 앞에서 우리는 역사가가 사실을 선택하고 배열하여 역사적 사실로 만드는 것에서 역사가 시작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모든 사실이 역사적 사실인 것은 아니다... 역사가와 그의 원인의 관계는 역사가와 그의 사실의 관계와 똑같이 이중적이고 상호적인 성격을 가진다. 원인은 역사과정에 대한 역사가의 해석을 결정하며, 그의 해석은 원인에 대한 그의 선택과 배열을 결정한다. 원인의 등급화, 즉 어느 하나의 원인이나 어느 일련의 원인들 혹은 또 다른 일련의 원인들의 상대적인 중요성을 가려내는 것이 그의 해석의 핵심이다.(p156) <역사란 무엇인가> 中


 많은 역사적 사실 속에서 중요한 사건을 골라내어, 이들을 대상으로 의미(意味)를 부여하는 것이 역사가의 역할이라고 하지만, 역사가가 자의적으로 의미를 부여해서 결과적으로 왜곡한다면 유지기(劉知幾·661∼721)로부터 비판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사실을 왜곡하여 문서를 농락하고 비행이나 과오를 미화하는 일도 있었으니, 왕은 王隱과 우예 虞預는 헐뜯고 서로 모욕했으며 배자야 裵子野와 심약 沈約은 분란을 매듭짓고 사과했다. 이들은 모두 자신의 판단으로만 자료를 취사선택하고 다른 이의 화복을 자신의 붓끝으로 좌우했으니 이야말로 편찬자의 추악한 행태이며 사람이라면 함께 미워해야 할 짓이라고 하겠다.(p429)... 무릇 역사서의 곡필과 무함이 한두 가지에 지나지 않더라도, 그 죄를 논하자면 잘못이 이미 크다고 할 수 있다.(p434) <사통> 中


 특정 집단의 이익을 위해 역사가가 역사를 왜곡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피해를 주는가를 한국 현대사를 통해 깊이 느끼면서 이번 페이퍼를 마무리한다.


PS. 다소 관련성은 떨어지나, 개인적으로 5.18 민주화운동과 관련해서 생각나는 인물은 로메로 대주교다. 산살바도르 대주교로서 민주화 운동에 투신하다 반대파의 피습으로 세상을 떠난 로메로 대주교의 삶과 군부통치 하의 산살바도르의 배경이 80년대 한국사회를 떠올리게 해서일까. 올리버 스톤 감독의 영화 <살바도르>와 로메로 대주교의 삶을 다룬 <로메로>는 로메로 대주교의 총격 장면에서 사건이 교차하는데, 관객들은 이 영화들을 통해 라틴아메리카의 모습과 함께 우리의 가슴아픈 현대사도 함께 바라보게 된다...

 

 농지개혁과 더불어 자행된 테러의 가장 두드러진 희생자는 산살바도르의 대주교인 오스카르 아르눌포 로메로(Oscar Arnulfo Romero)였다. 수년간에 걸쳐 군부와 치안부대의 인권유린을 공격한 오스카르 로메로는 정부의 입장에서 보면 눈엣가시와 같은 존재였다. 1980년 2월 2일의 설교에서 그는 "모든 평화적 수단이 고갈되었을 때, 교회는 봉기를 도덕적이고 정당한 것으로 여긴다"고 선언했다. 3월 23일 토지개혁에 따른 탄압에 대응하여, 그는 병사들에게 비무장 민간인들에게 총을 겨누지 말라고 호소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산살바도르에서 미사를 드리던 중 군 장교로 추정되는 사람의 총격으로 사망했다.(p411) <라틴아메리카의 역사(하)>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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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17 10:2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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