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차례나 제갈량에게 패한 사마의는 궁지에 몰렸다. 그런 사마의를 구해준 것은 아군이 아닌 적군이었다. 바로 촉나라의 이엄이었다. 당시 한중군에 머물며 촉군에 군량과 무기를 공급하던 이엄은 군량 보급이 여의치 않아 책임을 추궁당할 궁지에 몰렸다. 이엄은 잔머리를 굴려 급한 일이 생겼으니 제갈량에게 회군할 것을 청했다. 그러고는 후주 유선에게도 거짓 보고를 했다.
결국 제갈량은 231년 6월 식량이 다하자 회군했다.

사마의는 수비전에 치중했다. 이미 위나라는 제갈량의 침입에 대비하여 관중 지역의 농토를 대규모로 개발해 식량을 비축했을 뿐만 아니라, 황하 중하류 지역으로부터 군량과 무기를 운반해 저장해뒀다. 지구전을 펼치면 무조건 이기는 상황이었다.

한마디로 진수는 명재상 관중과 소하는 스스로 재상의 자질이지만 장수의 자질이 없음을 알고 장수를 천거해 제나라 환공과 한고조 유방의 성공을 도운 데 반해 제갈량은 장수의 자질이 부족함에도 명장을 발굴해내지 못했다고 지적한 것이다.

『삼국지/제갈량전』에는 제갈량의 북벌 기사가 승패 정도만 간략하게 기록되었다. 이 기사만 보면, 제갈량이 유능하지 않다는 느낌마저 준다. 배송지주에 인용된 『원자』나 『묵기』에서도 제갈량이 명장의 자질은 없었다고 기록했지만, 구체적인 전투 장면을 보면 제갈량이 무능했다고 볼 수도 없다. 오히려 『묵기』에서 주장한 것처럼 1/9의 영토와 5만도 안 되는 군사가 실제 촉의 국력이었다면 위나라 군사들을 격파한 점은 제갈량의 유능함을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

제갈량의 실패는 융중대에서 밝힌 전략의 전제인 형주를 잃어버림으로써 이미 예견되어 있었다. 형주와 익주에서 각각 낙양과 장안으로 진격하는 전략 자체가 불가능했다. 물론 한고조 유방처럼 익주에서 관중으로 진격하는 방법도 있었다.

강유는 제갈량의 후계자인 장완과 비위처럼 수비에 치우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위나라를 공격하려고 했다. 그러나 11회의 북벌에서 25%의 승률을 기록하고, 7차 북벌 때 잠깐 정복한 3현도 그나마 빼앗겼기 때문에, 잦은 북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했다. 강유가 북벌에 실패한 이유는 곽회와 진태, 등애 등 위나라의 장군들을 이길 수 있는 실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제갈량이 북벌에 실패했던 가장 큰 원인인 군량 수송에 신경 쓰지 않고 위나라 땅에서 식량을 조달하려고 했던 무모함도 한몫했다.

나아가 강유는 결과적으로 촉나라가 위나라에 망하는 원인을 제공했다. 259년 이후 강유는 유비가 위연을 시켜 만들어놓은 요새(원문에서는 ‘위
圍’라고 쓰여 있다)의 주둔 병사들을 한성과 악성으로 후퇴시켰다. 적군이 침입하지도 않는데 요새에 병사를 두는 것은 병력과 군량의 낭비라는 게 그 이유였다.

이때는 강유의 대안이 당시 상황에 부합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263년 위나라의 종회鍾會
가 한중군을 점령하는 과정을 보면 결과적으로 잘못된 선택이었다. 강유가 요새의 병력을 철수시키지 않았다면 촉나라는 위나라에게 한중군을 빼앗기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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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에 따르면 왕랑은 같은 해 11월에 죽었다. 이때는 제갈량의 1차 북벌이 실패로 끝나고 9개월이 지난 후였다. 왕랑이 같은 해 죽었다는 데에 착안해 제갈량의 독설을 듣고 죽은 것으로 바꾼 것이다. 소설 삼국지의 저자는 무슨 억하심정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왕랑을 두 번 죽였다. 소설 삼국지에서 자주 사용하는 수법이다.

공성전에서 성을 포위한 군대가 유리한 점은 식량 공급이다. 최악의 경우 성안의 식량이 바닥날 때까지 기다리면(지구전) 이길 수 있다. 그러나 촉군은 그럴 만한 식량이 없었다. 겨우 20일 만에 식량이 부족해진 것은 촉군의 전쟁 준비가 부족했거나 군량 보급이 여의치 않았음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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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해 판결문은 ‘자주 경비‘가 주최 측이 경비 계획을세우고 당일 경비를 해야 한다는 의미일뿐, 이로 인해 경찰의 혼잡 경비에 관한책임이 경감되거나 면제되는 건 아니라고 명시했다. "경찰에게는 참석자의 생명, 신체 등의 안전을 확보해야 할 주의의무가 있고, (・・・) 주최자 측의 자주 경비에만 맡길 게 아니라, 스스로도 적정한 계획을 책정해야 할 주의 의무가 있었다."
관련 문헌에 따르면 혼잡 경비는 계획 단계에서 80%, 경비원 등에게 계획을 주지시키는 단계에서 90%가 완료된다. 당일대응이 좌우하는 부분은 나머지 10%에불과하다. 판결문은 피고들이 사고 발생을 사전에 예견할 수 있었으며, "사전 준비 단계에서 혼잡 경비 계획 책정이 준비되지 않은 것이야말로, 압사사고 발생의가장 큰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형사재판에선 제대로 다루지 못했던 책임이다. - P17

그로부터 3개월 뒤, 한국에서 이태원참사가 발생했다. 아카시시 육교 사고로어머니 시라이 도미코 씨(75)를 잃은 시라이 요시미치 씨는 "한국 이태원 압사사고의 원인과 배경이 아카시시 육교사고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실은 ‘사고‘가아니라 ‘사건‘ 입니다. 경찰이 시민의 생명을 지키는 일보다도, 폭주족이나 마약 단속으로 실적을 쌓으려 했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라고 말했다. 혼잡한 장소에간 사람이 나쁘다‘라는 사람도 있지만, 큰착각입니다.  - P18

20년 넘는 싸움을 해오는 과정에서유족들에게 가장 위로가 된 것은 다른 유족들과의 만남과 연대였다. 1956년 일본니가타현 야히코 신사에서 124명이 사망한 압사 사고가 있었다. 이 사고로 18세딸을 잃은 할머니는 사고 50년이 되도록딸의 온기를 손이 기억한다고 미키 씨에게 들려주었다. "우리 때의 교훈이 활용되지 못해서 미안해"라는 그 유족의 사과가 아카시시 유족들의 마음을 어루만져줬다.  - P19

 한국의 이태원 참사에 대해 후쿠다 이사는 "누가 책임을 지는지 불명확한 채 시민분들이 희생되는 것 이상으로 괴로운 일은 없습니다. 사람의 생명을 지키는 게 행정이니까,
저희도 사고로 반성했듯이, 남의 일이 아니라 자기 일처럼 생각하는 마음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마쓰오카 부장은 말했다. "(이태원 사고 골목에)불법 건축물이 방치되었다는 보도를 봤는데, 그런 것은 시 쪽에서 지도해야 하지않을까요? 관계자분들이 잘 검증하셔서, 재발 방지에 힘써주시기 바랍니다." - P21

이태원 참사 같은 압사 사고의 경우에도사고조사위원회를 꾸리는 편이 좋을까?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특히 압사 사고의 경우 더욱더 경찰로부터도, 주최 측으로부터도 독립된 사고조사기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 P23

EU는 특정 조건 아래에서만 간접 배출량을 포함하겠다고 했지만, 재생에너지 비중이 세계적으로 한참 낮은 한국으로서는 날벼락이다. 특정 조건이 무엇인지는 아직 정하지 않았다. 분명한 것은CBAM이 앞으로 한국의 전력산업에도영향을 끼치리라는 점이다. 전기료 인상같은 이슈가 불거질 수밖에 크다. - P29

문제는 한국의 배출권 시장이 지나치게 ‘기업 프렌들리‘하다는 점이다. 한국 정부는 기업에 공짜로 탄소배출권을 나눠주고 있다. ‘무상할당‘이다. 2015~2017년배출권 거래제 1차 계획기간(2015~2017년)에는 100% 무상할당, 2차 때 (2018∼2020년)는 97%, 3차 때 (2021~2025년)는90%를 무상할당했다. - P30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기후위기는 유럽에 기회다. IT 등 신산업에서 미국과 아시아에 뒤지고 있는 유럽이 과거의 영광을 되찾을 무기가 재생에너지와 탄소배출저감기술 같은 기후위기 대응 분야다. - P31

 공모하지는 않았지만, 이들의 과실이모여 참사가 발생했다는 ‘공동정범‘ 논리를 구성했다. 연루된 기관 및 인원을 보면경찰 수사에 일정 부분 성과가 있었다고볼 수 있다.
다만 수사 내용을 뜯어보면 ‘용두사미‘라는 평가가 나온다. 특수본이 검찰에송치한 주요 피의자들과 송치 예정인 피의자들은 모두 용산 지역단위 기관 실무진들이다.  - P33

이재명 대표나 윤석열 대통령이나 내가 하나 딱 질색인 건 둘 다 공통적으로반문투의 말이 많다는 것이다. "전 정권에 지명된 장관 중에 이렇게 훌륭한 사람봤어요?" 이런 식의 발언들. 정치가는 공직을 받은 대신 성실하게 설명할 책임을가진 사람들이다. 질문과 반문은 정치인이 아니라 시민들이 하는 거다. - P43

전세자금 대출은 그동안 서민금융 상품이라는 이유로 DSR 적용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전세자금 대출이 DSR 적용에포함되면 소득에 따라 대출 규모가 결정된다. 소득이 적은 취약계층이 전세자금대출을 받기 어려울 수도 있다. 이로 인해 전세 수요가 줄어들면 부동산 시장 역시 하방 압력이 강하게 작동한다. 가계부채에 민감한 통화 당국은 전세 제도로 인한 부동산 금융의 거품을 줄이고 싶어 하지만, 반대로 집값 폭락을 막고 금융을통해 서민 주거복지를 실현시키고 싶어하는 정치권은 전세를 최대한 활용하려한다. 이 딜레마 속에서 전세 사기는 ‘강고한 전세 수요‘를 바탕으로 피해 규모를키워왔다. - P51

강제매각도 수월치 않고 전면 금지도마땅치 않은 상황에서 미국 정부가 택할수 있는 현실적 대안은 엄격한 사용 조건이 붙은 타협안이 될 가능성이 크다. 틱톡이 미국인 사용자의 정보를 공유하고 보관하는 방식과 관련해 미국 정부가 좀 더엄격한 규칙을 적용하고, 틱톡이 이를 받아들이는 식이다.  - P61

나는 고양이들의 감정과 의사 표현을알아들을 때보다 그렇지 못할 때가 훨씬더 많다. 그들도 아마 그럴 것이다.우리가 서로의 언어를 겨우 몇 개밖에헤아리지 못하는 까닭이다. 그래서각자의 말로 소리치고 울어봤자정확히 이해할 수는 없다. 그러면 우리는어떻게 하는가? 서로 빤히 쳐다본다. - P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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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과학사 연구서에 따르면, 이미 이때 천연가스를 연료로 사용했다고 한다. 산업혁명의 발상지인 영국에서 연료로 사용한 석탄과 증기기관이 제조업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는 사실은 상식이다. 그런데 산업혁명보다 2,000여 년 이전에 파촉 지역에서는 석탄보다도 고급 에너지원인 천연가스를 사용했던 것이다. 이것이 산업혁명으로 발전하지 못한 점이 근현대 중국의 불행이었다.

전국시대와 후한시대 혹은 위진남북조시대의 도량형이 조금씩 달랐지만, 그런 오차를 감안하더라도 면죽현과 낙현의 단위 면적당 쌀 생산량은 전국시대 평균의 20~30배였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파촉에는 매우 비옥한 땅이 많았다. 그리고 지도 16-7에서 확인할 수 있듯 이러한 무논과 비옥한 땅은 성도 북쪽에 몰려 있었다. 이 지역은 익주, 즉 촉나라의 경제적 핵심 지역이었을 것이다.

전국시대 진나라 때부터 이미 국가에서 성도의 비단 생산을 감독했을 정도였다. 한나라 시대에도 성도의 비단은 ‘촉금 蜀錦
’이라고 불리며 유명했고, 이 때문에 성도는 비단의 도시, 즉 ‘금성 錦城’이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중국역사지도집』에 따르면 오나라는 3주, 38개 군급, 262개의 현급 행정구역이 있었다. 그와 달리 『삼국회요』에서는 4주 43군 331현, 혹은 4주 47개 군급, 339개 현급의 행정구역이 있었다고 말한다.

오나라의 호수는 후한시대의 27.4%, 인구는 29.5%(242년) 혹은 28.3%(280년)에 불과했다. 이는 오나라 지배층의 절반 이상이 대토지를 소유한 강동의 토호 세력이었기 때문에 제대로 호구를 파악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호구 파악이 어려운 또 다른 이유는 수많은 산지 때문이었다. 광활한 황회해평원(화북평원)과 달리 장강 유역에는 산이 많았다. 관청의 수탈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사람들이 도망갈 수 있는 산간 지역이 도처에 널려 있었다. 오나라의 행정력이 산지 곳곳에까지 미치지 못했을 것이다.

촉군은 한족(중국인)뿐만 아니라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인 월지月氏와 강거康居, 파촉의 이민족인 종수
??, 남만을 평정한 후 데려온 청강靑羌
등 여러 종족으로 구성된 혼성부대였다. 여기에 전한시대부터 용맹을 떨쳤던 부릉군 출신 3,000명의 쇠뇌부대도 포함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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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폐란 진단명이 처음 등장한 20세기 중반에도 아치는 여전히 수용된 채 삶의 황금기를 흘려보냈다. 자폐증이란 진단명으로 그의 행동을 설명할 수 있을지 아무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의 삶을 통제했던 관료주의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미 편리한 진단명이 있었다. 1970년대 들어 계몽적인 문화가 자리잡으면서 임상적 "백치"라는 꼬리표가 "MR", 즉 "정신지체"라는 꼬리표로 바뀌었을 뿐이다.

20세기 전반 70년간 실제로든 겉보기로든 지능이란 영역에서 장애가 있다고 판단되는 사람에 대한 대책은 기관에 수용하는 것이었다. 어린 시절에 "안 보이는 곳에 치워진" 사람들의 문제는 다양했다. 뇌전증, 뇌성마비, 지적장애가 있었고, 진단명이 확립된 후로는 자폐증도 더해졌다.

학대, 방치, 무관심, 박탈. 입소자가 이런 일을 겪도록 의도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시설들은 분명 이런 모습을 띠었다. 높은 담장 뒤에서 흘려보낸 기나긴 시간 동안 아치 캐스토는 한때 지녔던 빈약한 언어조차 잃어버렸다. 성장하지 못했으며, 점점 내면 깊숙한 곳으로 끌려들어갔다.

수십 년간 의사들이 수용시설을 권한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장애 어린이에게는 해결책이 될 수 없다고 해도, 부모가 겪는 수많은 문제를 단번에 해결해줄 수 있었던 것이다. 부모의 문제 역시 너무나 생생하고 고통스럽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24시간 동안 잠시도 쉬지 않고 중증 자폐인 자녀를 돌보는 일은 종종 사랑만으로 해결할 수 없다.

1960년대에 자폐 어린이를 돕는다며 온갖 희한한 방법을 추구했던 연구자들이 끊임없이 주장했던 한 가지 분명한 진실이 있다. 사실상 어떤 방법도 소용이 없다는 점이었다.

강화와 처벌. 두 가지 요소 사이의 도덕적 균형은 20년간 로바스의 자폐 어린이 연구가 끊임없이 논란에 휩싸인 이유였다. 행동주의 심리학자들이 사용하면서 종종 잘못 이해되었던 ‘강화와 처벌’ 이란 용어는 사실 래트, 마우스, 비둘기를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유래했으며, 임상 및 분석 목적으로 사용된 특정 방법들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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