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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의 체계란 실현된 자유의 왕국, 정신이 자기 자신에서 산출한 제2의 자연"에 다름아니다... 헤겔의 파악 배후에서 자유가 이미 사회의 제도들의 원리로서 뿌리 내리고 있다는 인식을 읽어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자유로운 의지가 발전해가는 단계들이 추상법, 도덕성, 인륜의 각 단계인 것이다.(p147) <헤겔사전> 中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 ~ 1831)은 <정신현상학 Pha"nomenologie des Geistes>과 <법철학 Grundlinien der Philosophie des Rechts>을 통해 자유로운 의지가 변증법(辨證法) 체계를 통해 법(法), 도덕(道德), 인륜(人倫)의 단계를 밟으며 발전하고 있음을 말한다.


 법(法, Recht) : 헤겔이 말하는 법은 통상적인 용법과 비교하여 훨신 넓은 내용을 지니고 있다. "우리가 본서에서 법이라고 말할 때 보통 법이라는 말로 이해되고 있는 시민법[추상법]을 의미할 뿐 아니라 도덕성, 인륜 및 세계사도 의미한다. 이것들이 마찬가지로 법에 속하는 것은 개념이란 사상을 진리에 입각하여 총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법철학> 33절 보론]... 헤겔에 따르면 법의 지반은 '정신적인 것'으로서 그 출발점은 의지이다. 이것은 자유로운 의지이다.(p147) <헤겔사전> 中  


 정신적인 존재가 단일한 모습을 하고 나타난 것이 순수한 의식이며 개개의 자기의식이다.(p433)... 자기의식은 자기가 곧 이러한 실체를 자각하는 요체임을 알고 있으므로 법칙이 자기 안에 현존하는 데 근거하여 건전한 이성에게서 무엇이 정의롭고 무엇이 선한지를 직접 알고 있다는 표현을 한다... 더욱이 이것이 특정한 법칙으로 명문화될 때 사태 자체가 충실한 내용으로 채워지게 된다.(p435) <정신현상학 1> 中


 법(法)이라는 것은 어딘가 신성한 데가 있는데, 그 이유는 법이란 바로 절대적 개념인 자각적인 자유가 구현된 것이기 때문이다... 훨씬 더 추상적이며 따라서 좀더 제한된 법에 대립하는 것으로서 이념 속에 포함된 광범한 요소를 현실의 내용으로 하는 정신의 영역과 단계가 있는데, 이렇듯 더욱 구체적이고 내용이 풍부한, 참으로 보편적인 이 영역과 단계에는 바로 이런 까닭에 한층 고도의 법이 있게 마련이다.(p109) <법철학> 中


 자기의식은 의무를 절대적인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자기의식은 의무에 의해서만 구속을 받는데, 의무의 핵심을 이루는 것은 자기 자신의 순수한 의식이다(p172) <정신현상학 2> 中


 자유로운 의지는 그것이 언제까지나 추상적인 상태에 머물러 있지 않으려면 무엇보다 먼저 그 스스로 하나의 존재를 마련해야만 하는데 이 존재의 최초의 감각적인 소재는 갖가지 물건(die Sachen), 즉 외적인 사물이다(p116) <법철학> 中


 헤겔에 따르면 '법'이란 자기의식의 자각적인 자유가 특정한 법칙으로 명문화된 것으로 이는 자유로운 의지로부터 출발한다. 자유로운 의지는 처음에 추상적인 상태에 놓여있기에 아직 관념에 불과하다. 관념에 불과한 자유로운 의지가 보다 구체성을 갖춘 존재로 표현된 것을 우리는 '법'이라 부른다. 이러한 법에 대해, 헤겔에게 도덕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를 살펴보기 전 우리는 먼저 도덕적 세계관을 알아보자.


 도덕성(道德性, Moralitat) : 헤겔이 도덕성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경우에 기본적으로는 칸트의 도덕론이 비판적으로 함의되어 있다. 즉 그것은 "대자존재와 개별성을 원리로 하는" 근대에 특유한 입장이며, 시민 또는 사인(私人)의 인륜"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여겨진다.<자연법 논문>2.504, 2.506 그것은 동어반복적인 무모순에서 성립하는 형식적 보편성을 '도덕법칙'으로서 정립할 뿐이기 때문에, 언제나 개인들의 특수성과 대립할 수 밖에 없다... 결국 칸트적인 '도덕적 세계관'은 그 요청에서의 이율배반적인 사태를 개념적으로 파악하지 못하고 이와 같은 '도덕적 세계표상'에서 마치 해결된 것처럼 보이는 '위선'에 빠져 있다고 지적하는 것이다.[<정신현상학>3.441-463](p88) <헤겔사전> 中

 

 자기의식이 자유로워질수록 그만큼 의식에 맞서 있는 대상도 자유로워진다. 대상 세계는 자기만의 고유한 개성을 지닌 자기완결된 세계(eine zur eignen Individualitat is sich vollendete Welt)이고 자기의 고유한 법칙이 지배하는 자립적인 전체인 동시에 법칙이 자립적으로 진행되고 자유로이 실현되는 세계이다... 이러한 규정에 입각하여 절대적인 도덕세계와 자기완결된 자연계의 관계를 둘러싸고 도덕적 세계관이라는 것이 형성된다. 이는 의무만이 본질적이고, 자연은 전적으로 비자립적이며 비본질적인 것이라는 의식이다. 도덕적 세계관이란 이렇듯 전적으로 상호배치되는 자연과 도덕의 관계를 전제로 하여 이 관계 속에 있는 갖가지 요소가 전개되어 나가는 데에 성립된다.(p172) <정신현상학 2> 中 


 헤겔의 논리에서 자기의식에게 의무는 절대적이다. 그렇기에 타자존재는 자기의식에게 무의미하고, 이로 인해 도덕세계와 자연계의 부조화가 생겨나게 된다. '감각'으로도 불리우는 '자연'의 의지는 '충동'이나 '경향'의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이러한 대립은 도덕과 자연을 분리시킨다. 이들의 통합은 '이성(理性)'에 의해 가능하는데, 이를 가능케 하는 존재를 헤겔은 '세계의 주인이며 지배자'라고 표현한다.


 이성과 감각이 압력을 밎는 마당에 이성이 취해야 할 태도는 대립을 해소하여 그 결과로서 양자의 통일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이렇게 생겨나는 통일은 양자가 동일한 하나의 개체 속에 있는 본원적인 통일이 아니라 양자의 대립을 인식하는 가운데 이를 넘어서는 데서 생겨나는 통일이다. 이러한 통일이야말로 마땅히 현실적인 도덕(die wirkliche Moralitat)이라고 하겠으니, 거기에는 현실의식으로서의 자기와 자기임에는 틀림없는 보편자로서의 자기와의 대립이 포함되어 있다.(p175) <정신현상학 2> 中


 그리고, 헤겔에게 '도덕의식'이란 대립되는 이들이 합쳐진 완벽한 조화를 포함하는 것이다.  헤겔의 법이 '자유로운 의지의 구체적 실재'로 요약될 수 있다면, '도덕의식'이란 '자기와 대상 세계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실재'라 할 수 있다. 다양한 기준을 가진 도덕은 다수의 법칙과 대립되는 도덕세계와 자연세계를 포함하고 있어 모순되는 힘 또한 내재하는데, 이러한 힘이 도덕을 새로운 단계, 곧 인륜(人倫)으로 이끌게 된다. 


 도덕의식이란 순수한 의무만을 단순히 알고 의욕하는 것이지만 일단 행동에 나서면 그의 단순성과는 정반대의 대상, 즉 다종다양한 현실 국면과 관계함으로써 여기에 다종다양한 도덕적 행태가 나타난다. 이로써 내용면에서는 다수의 법칙이 생겨나고, 형식면에서는 지력(知力)을 발휘하는 의식과 무의식이라는 서로 모순되는 힘이 생겨난다.(p178) <정신현상학 2> 中 


 그러나 이렇듯 단지 있는 그대로의 직접적인 존재는 자유에 합당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으니, 이러한 규정을 부정하는 것이 곧 도덕의 영역이다... 그러나 도덕 또한 그 이전의 형식적인 법이나 권리와 마찬가지로 모두가 추상체로서, 인륜성이야말로 비로소 이 양자의 진리이다. 인륜성에 이르러 개념의 틀 안에서의 의지와 개인의 주관적인 의지의 통일이 구체화된 것이다.(p116) <법철학> 中


 인륜(人倫, Sittlichkeit) : 헤겔은 추상법의 외면성과 도덕의 내면성을 하나로 종합한 것이라고 말한다. 헤겔은 사회적제도들을 선의 이념이 자유로운 의지를 통해서 역사 속에 구체화되고 축적되며 발전되어온 것으로 본다. 또한 개인이 도덕적일 수 있는 것은 그와 같은 사회적 연관들에 그렇게 하여 구체화되어 있는 선의 이념을 스스로의 것으로 만드는 것에 의해서다... 인륜으로서의 사회적 제도들은 제도라는 객관적 계기와 자기 의식이라는 주관적 계기의 통일 위에서 성립하는 것이며, 그것들의 상호침투 속에서 발전해간다... 추상법, 도덕, 인륜이라는 전체의 구성 그 자체가 사회적 제도들을 인륜의 체계로서 개념적으로 파악하여 나의 것으로 해나가는 정신의 발걸음을 제시하고 있지만, 나아가 이 '인륜'의 부분에서의 '가족', '시민사회', '국가'라는 구성 역시 가족에 있던 인륜적 일체성이 해체되면서 곧이어 시민사회를 매개로 하여 국가에서 회복되어가는 과정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p328) <헤겔사전> 中


 인륜은 헤겔이 생각한 '법'이라는 정(正)과 이를 부정하는 '도덕'이라는 반(反) 을 통합하는 합(合)의 위치를 차지한다. 헤겔의 논리구조에서 인륜에 근거한 의식이 바로 진리이며, 진리 안에서 자기의식과 존재는 하나가 된다.


 절대적으로 가치 있는 것은 더이상 확신과 진리, 보편자와 개별자, 목적과 현실이라는 대립에 시달리는 일 없이 현실과 자기의식의 행위가 일체화되어 있는 그런 존재이다. 따라서 여기서 가치 있는 사태라는 것은 인륜적 실체를 말하는 것으로서 여기에 바탕을 둔 의식은 인륜적 의식이다. 인륜적 의식이 대상으로 하는 것은 바로 진리인데, 이때 진리는 곧 자기의식과 존재가 하나로 융합된 것이다.(p434) <정신현상학 1> 中


 인륜의 세계는 보편적인 의식으로서의 실체와 개별적인 의식으로서의 실체를 기초로 하여 이루어져 있는데, 이때 보편적인 현실체로는 민족과 가족이 있고 자연발생적인 자기이며 활동하는 개인으로는 남과 여가 있다. 이런 내용이 갖추어져 있는 인륜세계 속에 앞에서 본 실체를 결한 의식의 형태가 표방했던 목적이 달성되어 있다.(p37) <정신현상학 2> 中


 그렇지만, 인륜 역시 관념이라는 한계를 가진다. 때문에, 다시 구체화를 위한 '정'의 위치에 놓여지게 되고, 이제 새로운 '정-반-합'의 단계가 다시 시작된다. 조금은 다른 이야기지만, 이러한 헤겔의 체계를 통해 주역의 마지막 괘(卦) '화수미제(火水未濟)'를 떠올리게 된다. 주역 64괘가 미완성을 의미하는 화수미제로 끝나듯, 합(合)이 다시 새로운 정(正)이 된다는 헤겔의 변증법은 통하는 바가 있어 보인다. 차이가 있다면, 한쪽은 순환이라면, 다른 한쪽은 상승구조라는 차이겠지만.


 인륜적 실체란 한낱 참다운 정신인 데 지나지 않으므로 개인은 스스로 자기의 존재를 확신하는 경지로 복귀하지 않을 수 없다. 인륜적 실체로서의 정신은 보편적인 권능의 소유자로서 현실에 존재하지만 이 정신을 현실적으로 뒷받침해주는 것은 공동체를 부정하다시피 하는 만인의 자기존재이다.(p58) <정신현상학 2> 中


 <주역>의 저자는 모순, 투쟁의 종식은 일시적인 휴식에 불과할 뿐 모순의 진행, 운동이야말로 영원하므로 하나의 과정이 종결되면 새로운 과정이 시작된다는 이치를 깊이 깨닫고 있었습니다. <주역>이 '기제(旣濟)'가 아닌 '미제(未濟)'로 끝난 것은 바로 그 때문이죠. '미제'로 마무리한 것은 우주 만물의 변화는 끝이 없다는 지은이의 인식을 반영한 것임을 암시했습니다.(p927) <주역> 中


 이상의 내용을 통해, 우리는 헤겔의 체계에서 '법', '도덕', '인륜'은 각각 정, 반, 합으로서 자리함을 알 수 있다. 헤겔의 체계에서 '법'과 '도덕'은 다른 것이다. 자기의식의 구체적 선택이 법이고, 법이 하나의 기준이라면, 도덕은 다양한 기준을 담고 있다.  이들은 같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충돌할 수 있음을 헤겔은 <법철학>에서 말한다.


 만약, 도덕/인륜과 법 또는 권리와의 대립을 논의할 경우, 이때 법 또는 권리로 이해되는 것은 다만 추상적인 인격성이 주축을 이루는 최초의 형식적인 법 또는 권리일 뿐이다. 도덕/인륜/국가이익은 저마다 하나의 독자적인 권리를 이루는데, 왜냐하면 이들 형태는 모두가 자유의 규정이 구체화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 형태는 권리라는 동등한 선상에 놓여 있는 한 서로 충돌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충돌은 동시에 다음과 같은 또 하나의 요소를 안고 있으니, 즉 도덕은 제한된 것이며 따라서 또 어떤 하나의 권리는 다른 권리에 종속되어 있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오직 세계정신의 법 또는 권리만이 무제한적이고 절대적인 것이다.(p109) <법철학> 中


 법과 도덕이 충돌했을 경우 이에 대한 가치 판단은 도덕의 기준이 아닌 '세계정신의 법' 또는 완성된 인륜의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함을 헤겔은 지적한다. 최근 1개월동안 조국 법무부장관 후보자 가족의 도덕기준과 관련한 수많은 보도가 언론을 장식했다. 대부분의 내용은 의혹제기였으며, 적어도 이 글을 쓰는 현재시점까지 죄로 결정된 것은 없다. 인사청문회도 거쳤지만, 후보자 본인에 대해서는 의혹조차 제기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의혹을 증폭시켰던 것은 감정이라는 이름의 충동과 경향이 아니었을까. 다양한 기준을 가진 감정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한 법무부 장관 후보자를 요구하는 것은 완성된 도덕성을 갖춘 '신성한 입법자'를 요구하는 것에 다름아니다. 그리고, 헤겔에게 '신성한 입법자'는 신(神)을 의미한다.  

 

 도덕의식으로서도 역시 자기가 아닌 다른 의식에 의해서 무언가가 신성화된다는 것은 생각될 수도 없으니, 그야말로 도덕의식에게서는 자기 손으로, 자기 안에서 신성화되는 것 이외에는 그 어떤 것도 신성하지 않다. 따라서 이 의식으로서는 자기와 다른 존재가 신성하다는 것도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가 없다.(p193)... 신성한 입법자라는 존재가 순수하게 완성된 도덕성을 보유하는 것은 그 존재가 자연이나 감각과 관계를 지니지 않는 데 있다는 것이 된다. 그러면서도 또 순수의무가 실재하는 것은 그것이 자연과 감각 속에서 실현되기 때문이다.(p194)... 도덕이 실재하는 것은 신성한 입법자, 즉 신(神)이라는 또 다른 존재 속에서만 가능한 것이 된다.(p195) <정신현상학 2> 中


 우리가 법무부 장관에 신을 임명할 필요는 없다. 그렇다면, 도덕기준은 결격사유가 될 수 없음은 분명하다. 부언하면, 주관적인 도덕 기준으로 조국 후보자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문제는 개인의 주관적 판단이니 공적인 기준이 되지 못한다. 그렇다면, 조국 후보자의 가족의 위법과 관련한 논란도 살펴보자. 아직 검찰 조사 단계이므로 가족의 위법사실이 있는지 판단하는 것은 2019년 9월 8일 현시점에서는 이른 일이다. 그렇지만, 가족이 법을 위반했는지는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결혼의 두 주체는 각각 개별 주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헤겔 시대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헌법의 조문이기도 하다.

 

 결혼이라는 통일은 실체적으로는 친밀함과 마음가짐일 뿐, 실제로는 그것이 남편과 아내라는 두 주체로 분유(分有)되어 있는데, 이러한 일체성이 자녀들 속에서 여실히 눈에 보이는 대상이 되면서 부부는 그 대상을 자기들의 사랑이 실질적으로 구현된 존재로 여기며 사랑을 쏟는다... 이렇게 해서 유한한 자연성 속에 가신(家神)이라는 단일한 정신의 유(類)가 존재하는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p339) <법철학> 中


 제13조 3항 모든 국민(國民)은 자기의 행위가 아닌 친족(親族)의 행위로 인하여 불이익한 처우(處遇)를 받지 아니한다.(p47) <헌법> 中


 우리가 조국 후보자의 법무부 장관 후보자로서 적격성을 판단하는 기준이 있다라면, 과거 자기의식의 선택으로 표현된 법이 오늘날 우리시대의 정신을 제대로 담고 있지 않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가가 될 것이다. 그는 과연 우리 시대의 정신을 담을 그릇이 될 수 있을까? 이것이 법무부 장관에게 제시할 첫 번쨰 기준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여씨춘추 呂氏春秋> 중 거난(擧難)편은 인재 등용의 어려움에 대해 잘 말해준다.

 

 각이한 민족정신은 저마다 특수한 개체로 실재하는 가운데 스스로의 객관적인 현실과 자기의식을 지니기 때문에 이들 민족정신의 원리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으니, 이로써 민족정신 상호간의 관계에서 본 그의 운명과 행동은 결국 정신의 유한성을 드러내는 변증법 운동(die erscheinende Dialektik der Endlichkeit dieser Geister)을 행하게 된다. 이 변증법 운동에서 나타나는 것이 곧 무제한의 보편정신, 즉 세계정신으로(der Geist der Welt, als unbeschrankt), 이 세계정신이라말로 세계법정이라고도 할 세계사 속에서( in der Weltgeschichte, als dem Weltgerichte), 각이한 민족정신에게 그의 옳고 그름을 판정하는 법 - 즉 최고의 법 - 으로 군림하는 것이다.(p578) <법철학> 中

 

 사물은 본디 완전할 수 없으므로 완전한 것으로써 사람을 천거하기란 본디 어려운 것이 사물의 실정이다. 사람들은 요임금을 자애롭지 못했다는 것으로 헐뜯고, 순임금을 아비를 업신여겼다는 것으로 헐뜯으며, 우임금을 자리를 탐낸 의도가 있었다고 헐뜯고, 탕임금과 무왕을 (천자를) 내치고 죽인 모의를 했다고 헐뜯으며, 춘추오패를 침략하고 강탈한 것으로 헐뜯는다. 이러한 것들로 본다면 사물이 어떻게 가히 완전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군자가 남을 책망할 경우에는 일반인의 기준으로써 하고, 스스로를 책망할 경우에는 도덕적 기준으로써 한다.... 남을 책망할 때 도덕적 기준으로써 하면 나무라는 일이 많게 되고 나무라는 일이 많으면 가까운 사람들을 잃게 된다.(p586) <여씨춘추> 中


 이제 길었던 페이퍼를 요약하며 마무리하자. 법과 도덕의 기준은 다르다. 도덕의 기준은 보다 다양하기 때문에, 이러한 도덕 기준을 법무부 장관 임명의 판단 근거로 삼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 근거가 있다면, 법과 시대정신을 구현할 수 있는 가능성이 근거가 되어야 할 것이다. 법의 기준을 적용한다고 해도, 가족 등 친족의 죄가 본인에게 미치는 것은 헌법의 정신에 위배된다. 이들은 각각 자기의지를 가진 주체이기 때문이다. 이런 기준에 더해 인재 등용의 어려움을 고려한다면, 조국 법무부 장관 임명은 유한한 자원으로 인한 제약 조건 하에서 최선의 선택이라 여겨진다...


 PS. 페이퍼와는 별도로 법과 도덕은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라 하겠다. 이에 대해서는 제러미 벤담(Jeremy Bentham, 1748 ~ 1832)의 <도덕과 입법의 원칙에 대한 서론 An Introduction to the Principles of Morals and Legislation>을 통해 약 100여개의 페이퍼가 지난 후 살펴보려 한다... 상황에 따라 앞당겨 등판도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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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9-09-08 17: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조국이 도덕성에는 일단 문제 있다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ㅠ

겨울호랑이 2019-09-08 18:02   좋아요 1 | URL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일단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조국 후보자의 의혹 많은 부분이 국민 감정을 자극했다는 면에서 본다면, 조국 후보자의 흠결은 도덕적인 부분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후보자 의혹의 많은 부분이 가정과 관련된 부분이 이에 해당하리라 여겨집니다. 청문회에서 후보자 본인이 말했듯 자녀와 가정 문제에 무관심했다는 부분을 생각해본다면, 아빠로서 완벽했다고 볼 수는 없다고 여겨집니다. 다양한 도덕적 기준에 따른다면, 더없이 나쁜 아빠로 해석될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굳이 도덕적 흠결을 따진다면 이 부분이 되지 않을까요.... 그렇지만, 이 기준에 따른다면 21세기 초 한국을 살아가는 많은 아빠들 중 도덕적으로 흠결이 없는 이는 드물지 않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syo 2019-09-08 19: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제 헤겔 입문서나 깨작거리는 저는 대체 언제 이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까요.

전 가끔씩 정말 호랑이님이 사람이 아니라 진짜 호랑이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못 읽으시는 책도 없고 안 읽으시는 책도 없는 도통한 신선호랑이.....

겨울호랑이 2019-09-08 20:05   좋아요 0 | URL
에고 아닙니다. 호기심이 많은 편이라 여기저기 기웃거리기는 합니다만, 깊이있게 알지는 못합니다. 최근 syo님께서 읽으신찰스 테일러의 「헤겔」은 입문서가 아님에도 겸손의 말씀을... 쑥스럽지만 감사합니다^^:)
 


 당신들 프랑스인들은 독일인에 비해 온건하다. 당신들은 기껏해야 왕을 참수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왕은 당신들이 머리를 자르기 전에 이미 머리를 상실했다... 막시밀리앵 드 로베르스피에르를 이마누엘 칸트와 비교한다면, 그것은 로베스피에르를 너무 높이 평가하는 것이다.(p165) <독일의 종교와 철학의 역사에 대하여> 中


 하인리히 하이네(Heinrich Heine,1797 ~ 1856)의 <독일의 종교와 철학의 역사에 대하여 Zur Geschichte der Religion und Philosophie in Deutschland>에서 프랑스 대혁명(Revolution francaise, 1789 ~ 1799)에 필적할 만한 독일혁명이 다가오고 있음을 프랑스인들에게 경고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렇다면, <독일의 종교와 철학의 역사에 대하여>에서 하이네가 말하는 독일 혁명은 어떤 것일까. 그 이야기는 프랑스와 독일의 차이로부터 시작된다.


 일찌기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 BC 100 ~ BC 44)가 <갈리아 원정기 Commentarii de bello Gallico>에서 밝혔듯이, 프랑스인들과 독일인들은 그들의 선조들인 갈리아 인들과 게르마니아 인들만큼 다른 민족이었기에 독일의 혁명은 프랑스 혁명과는 같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하이네는 독일 혁명이 어떻게 이루어진다고 보았을까?

 

 21 (1) 게르마니족의 관습은 갈리족과는 아주 다르다. 그들은 종교적 업무를 주관할 드루이데스들도 없고, 제사에도 관심이 없다. (2) 그들이 신으로 여기는 것은 태양신, 불의 신, 달의 여신처럼 눈으로 볼 수 있고 확실히 이익을 가져다주는 존재들뿐이다. 다른 신들에 관해서 그들은 소문조차 듣지 못했다.(p196)... 24 (1) 전에는 갈리족이 게르마니족보다 더 용감하여 먼저 공세를 취하는가 하면, 인구 과잉과 경작지 부족으로 레누스 강 동쪽으로 이민단을 보낸 적도 있었다... (6) 패배하는 데 점점 익숙해진 갈리족은 전투에서 여러 번 패한 뒤에는 자신들이 용기에서 게르마니족의 적수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25 (4) 이쪽 게르마니아에는 설사 60일을 걸었다 해도 이 숲의 동쪽 끝에 이르렀다거나 또는 이 숲이 어디서 끝나는지 들었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p199) < 갈리아 원정기> 中


 하이네는 독일 혁명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먼저 종교와 철학에서 혁명 원리가 도출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 1729 ~ 1797)가 <프랑스 혁명에 관한 성찰 Reflections on the Revolution in France>에서 지적했듯 사상의 부재는 가져온 프랑스 혁명의 실패 원인 중 하나였다. 그렇지만, 독일 혁명은 종교와 철학의 완성자가 있었기에 프랑스의 전철을 밟지 않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하이네는 주장한다. 먼저 종교를 살펴보자.

 

 자유로운 정부를 형성하는 작업은, 즉 자유와 억제라는 이 반대 요소를 조정하여 하나의 일관된 작품 속에 가두는 일은 많은 사려, 깊은 성찰, 현명하고 강력하며 결합하는 정신을 필요로 한다.(p375) <프랑스 혁명에 관한 성찰> 中 


 독일에서는 혁명의 원리가 토속적이며 독일적인 철학으로부터 나오지 않는 한, 그리고 그러한 철학의 힘으로 보편화되지 않는 한, 어떠한 혁명도 불가능하다.(p100) <독일의 종교와 철학의 역사에 대하여> 中


 독일 철학은 전 인류의 문제와 관련된 중요한 사건이며... 우리와 같은 방법론적인 민족은 개혁으로 시작해서 이를 바탕으로 철학을 세우고, 오직 이를 완성한 이후에야 정치적 혁명으로 이행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p238) <독일의 종교와 철학의 역사에 대하여> 中


 정신주의는 물질을 파괴하고 정신을 찬미하는 사유이고, 감각주의는 정신의 지배에 맞서 물질의 자연권을 옹호하고자 하는 사유이다.(p54) <독일의 종교와 철학의 역사에 대하여> 中


 독일에서 가톨릭에 대한 투쟁은 다름 아닌 정신주의가 일으킨 전쟁이었다. 정신주의는 지배라는 타이틀만을 가지면서 법적으로만 지배했고, 반면에 감각주의는 오랜 은신처를 기반으로 현실적 지배력을 행사하며 실제로 지배했다... 17 ~ 18세기 프랑스에서 있었던 가톨릭에 대한 투쟁은 독일과는 반대로 감각주의가 일으킨 전쟁이었다.(p55) <독일의 종교와 철학의 역사에 대하여> 中


   <독일의 종교와 철학의 역사에 대하여>는 종교 혁명의 완성자로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 ~ 1546)를 제시한다. 하이네가 바라본 루터는 단순한 종교 혁명가가 아니라, 독일어 성경을 보급을 통해 독일 정신을 세운 선구자다. 루터의 독일어 보급 이후 크리스티안 볼프(Christian Wolff, 1679 ~ 1754)에 의해 비로소 독일어로 철학책이 씌어질 수 있었기에, 루터의 업적은 과소평가될 수 없다.


 인간 본성과 (그들이 말하는 대로) 자연적 이성은 천성적으로 미신적이고 앞서 주어진 법과 행위에 의해 의에 도달할 수 있다는 생각에 기울어져 있고, 여기에 추가해서 모든 지상의 입법자들 관행에 의해 같은 생각으로 길들여져 있고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자기 스스로 이 행위의 종살이에서 벗어나 신앙의 자유를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주님이 우리들을 이끌어주고 가르침 받은 자, 즉 신께 순종하는 자들로 만들고 그 자신이 우리 마음에 그가 약속한 것처럼 법을 새겨주도록 기도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는 한, 행함은 우리에게 속한다.(p350)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한 논설> 中


 앞에서 나는 우리가 그를 통해 어떻게 가장 위대한 사유의 자유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서술했다. 하지만 마르틴 루터는 단지 운동의 자유만이 아니라 운동의 수단도 가져다 주었다. 말하자면 그는 정신에 육체를 부여했다. 그는 사유에 언어를 입혔다. 그는 독일어를 창조했다.(p74) <독일의 종교와 철학의 역사에 대하여> 中


 종교가 철학에 도움을 바라는 순간부터 종교의 몰락은 피할 수 없다. 종교는 자신을 옹호하려 애를 쓰며 지껄여대다가 점점 더 깊이 파멸로 빠져들었다.(p135) <독일의 종교와 철학의 역사에 대하여> 中


 종교가 철학에 자리를 내주고 난 후, 독일 철학은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 ~ 1831)에 의해 완성되었다. 하이네가 칸트(Immanuel Kant, 1724 ~ 1804)보다도 높게 평가한 헤겔 철학은 <역사 철학 강의 Vorlesungen uber die Philosophie der Geschichte >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프랑스혁명을 세계사적 사건으로서 살펴보아야 한다. 형식적인 자유의 대립과는 별도로 이 혁명은 그 내실로 볼 때 세계사적인 사건이기 때문이다. 자유주의는 모든 라틴국가(로마 가톨릭 세계) 즉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을 지배하는 사상이 되었다. 그러나 이윽고 이르는 곳마다 자유주의는 파산한다.(p430)... 라틴 제국에 대립하는 것으로서는 특히 프로테스탄트 제국이 있다... 독일은 프랑스군의 침략을 받을 뻔했으나 국민의 힘으로 그 압박을 물리쳤다. 명목뿐인 왕국은 완전히 소멸하고 몇 개의 주권국가가 탄생했다. 봉건제도는 폐지되고 재산과 개인의 자유가 근본원리가 되었다. 고매한 군주를 갖는 것은 국민에게는 커다란 행복이지만, 강력한 이성에 지탱이 된 대국에 있어서 그것은 그다지 커다란 의미를 갖지 않는다.(p433) <역사 철학 강의> 中


 역사에 등장하는 민족이 잇따라 교체하는 가운데 세계사가 그와 같은 발전과정을 더듬고 거기에서 정신이 실제로 생성되어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틀림없는 변신론(辯神論)이며 역사 가운데 신이 존재함을 증명하는 사실이다.(p434) <역사 철학 강의> 中


 헤겔이 칸트와 피히테를 훨씬 능가했다는 점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는 칸트처럼 명민했고, 피히테처럼 힘이 있었다. 동시에 그는 근본적으로 평화로운 영혼의 소유자였다. 헤겔은 라이프니츠 이후 독일이 낳은 가장 위대한 철학자였다.(p230) <독일의 종교와 철학의 역사에 대하여> 中 


 발전하는 역사의 흐름에서 이를 주도하는 민족은 교체되는 것이 신의 섭리이며, 과거 프랑스 혁명으로 대표되는 라틴 제국의 패권은 독일을 포함한 프로테스탄트 제국으로 교체되는 것이 필연임을 주장하는 <역사 철학 강의> 를 통해 하이네는 독일 민족의 위대한 혁명의 때가 왔음을 직감했다. 독일 혁명을 예고하는 결연한 문장을 읽다보면 우리는 피히테(Johann Gottlieb Fichte, 1762 ~ 1814)가 <독일 국민에게 고함 Reden an die deutsche Nation>의 결론을 떠올리게 된다. 동시에,  <독일의 종교와 철학의 역사에 대하여>의 마지막을 읽다보면, 약소국의 슬픔과 밝은 미래에 대한 간절함 또한 느낄 수 있다.


 독일의 천둥소리는 물론 독일적이다. 그것은 매우 민첩하지 않고 천천히 다가온다. 하지만 천둥은 울릴 것이다. 그리고 당신들 프랑스인들이 언젠가 그 천둥소리를 듣게 될 때, 세계사에서 결코 울린 적이 없는 그런 천둥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p241) <독일의 종교와 철학의 역사에 대하여> 中

 

 나의 목소리에는 아득한 옛날부터의 여러분의 조상들, 물밀듯이 밀려오는 로마인의 세계 지배에 맨몸으로 대항하여, 지금은 외국인의 악랄함에 맡겨져 있는 여러분의 산하와 평야의 독립을 위해 피 흘려 싸운 조상들의 목소리가 섞여 있다고 생각하라.... 또한 우리들은 신의 세계 계획에 의해 신성해지고 고무받은 사람들로 생각된다. <독일 국민에게 고함> 中


  이처럼 하이네의 <독일의 종교와 철학의 역사에 대하여>에서는 루터 이후 독일 종교와 철학의 흐름 속에서 새로운 시대가 왔으며, 독일 민족의 혁명이 멀지 않았음을 말한다. 또한,  이러한 독일 사상의 흐름 외에 강대국 프랑스의 압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약소국민의 슬픔이 잘 나타나, 아픈 현대사를 가지고 있는 우리에게 더 큰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1919년 <기미 독립선언서> 중 하이네나 피히테의 목소리가 느껴지는 부분을 마지막으로 이번 페이퍼를 갈무리한다.


 아아, 新天地(신천지)가 眼前(안전)에 展開(전개)되도다. 威力(위력)의 時代(시대)가 去(거)하고 道義(도의)의 時代(시대)가 來(내)하도다. 過去(과거) 全世紀(전세기)에 鍊磨長養(연마 장양)된 人道的(인도적) 精神(정신)이 바야흐로 新文明(신문명)의 曙光(서광)을 人類(인류)의 歷史(역사)에 投射(투사)하기 始(시)하도다. 新春(신춘) 이 世界(세계)에 來(내)하야 萬物(만물)의 回蘇(회소)를 催促(최촉)하는도다. 凍氷寒雪(동빙한설)에 呼吸(호흡) 을 閉蟄(폐칩)한 것이 彼一時(피 일시)의 勢(세)ㅣ라 하면 和風暖陽(화풍 난양)에 氣脈(기맥)을 振舒(진서)함은 此一時(차 일시)의 勢(세)ㅣ니, 天地(천지)의 復運(복운)에 際(제)하고 世界(세계)의 變潮(변조)를 乘(승)한 吾人 (오인)은 아모 躊躇(주저)할 것 업스며, 아모 忌憚(기탄)할 것 업도다.我(아)의 固有(고유)한 自由權(자유권)을 護全(호전)하야 生旺(생왕)의 樂(낙)을 飽享(포향)할 것이며, 我(아)의 自足(자족)한 獨創力(독창력)을 發揮(발 휘)하야 春滿(춘만)한 大界(대계)에 民族的(민족적) 精華(정화)를 結紐(결뉴)할지로다. <己未 獨立 宣言書(기미독립선언서)  원문> 中


PS. 라인강의 간격이 현해탄만큼 넓다는 것을 <독일의 종교와 철학의 역사에 대하여>를 통해 새삼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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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9-07-12 09:0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문득 요즘 호랑이님의 도서 목록이 빡세(?)다는 생각을 했는데, 좀만 더 생각해보니 이분은 사시사철 그래왔던 분이시라는 깨달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겨울호랑이 2019-07-12 09:38   좋아요 1 | URL
에고, 제 독서 스타일이 다소 꼬리에 꼬리를 무는 경향이 있어 syo님께서 빡세다는 생각을 하셨나 봅니다. 나이가 들면 독서가 넓이가 아닌 깊이가 있어야하는데, 그러지 못한 것을 보면 부족함이 많아서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사실, 독서 목록 빡센 것으로는 syo님만한 분도 없을 것이라 쑥쓰럽네요 ㅋ 감사합니다.

syo 2019-07-12 09:45   좋아요 2 | URL
아, 호랑이님께서 ˝깊이가 없다˝고 말씀하셔서 깊이라는 단어의 정의에 대해 한참을 생각합니다..... 혹시 무슨 사전 보세요? 제 거랑 너무 다른 것 같아서ㅎㅎㅎ

대뜸 한 마디만 툭 던지고 예의도 갖추지 않았었네요. 좋은 페이퍼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겨울호랑이 2019-07-12 10:36   좋아요 1 | URL
^^:)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syo님의 재치는 따라갈 수 없네요. 그런 재치와 자유로움이 참 부럽습니다. 이제 시헙도 잘 마무리하셨으니, 좋은 글 부탁드려요. 즐거운 금요일, 주말 시작하세요!

2019-07-12 12: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7-12 18: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7-14 10: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7-14 16: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9-07-12 14: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유럽 나라들이 붙어 있다보니 참 옥신각신할 일이 많았던 거 같은데 1차 세계대전도 사실상 유럽 내전이었잖아요. 민족주의도 눈에 보이지 않는 국경만들기에 적절한 방법이었겠지요. 이게 효과가 좋은지 전세계적으로ㅎㅎ;;

겨울호랑이 2019-07-12 18:40   좋아요 1 | URL
AgalmA님 말씀처럼 누구를 위한 민족주의인지 생각하게 됩니다. 민족주의 뿐 아니라 다른 사상도 누군가의 권익을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공간과 시간은 칸트에게는 결코 경험적 개념들이 아니다. 그것들은 도대체가 개념이 아닐 뿐더러 경험적 표상도 아니고 한낱 순수한 직관들이다... "직관은 개별 표상(repaesentatio singularis)"으로서 "대상과 직접적으로 관계 맺는다". 직관은 대상과 무매개적으로 또는 "곧바로(직접적으로)" 관계를 맺는다. 개별 표상이란 여러 대상들에 공통적인지 않은 표상, 그러니까 하나의 특정한 대상 내지는 단 하나의 대상에 대한 표상이다. 그런 의미에서 공간/시간은 개별 표상이다... 공간/시간은 감각 경험으로부터 자유로운 "순수"하고 "선험적"인 직관이다.(p37) <순수이성비판 1> 中


  <순수이성비판 Kritik der reinen Vernuft>에서 칸트(Immanuel Kant, 1724 ~ 1804)는 시간과 공간을 경험으로 인식될 수 있는 개념이 아닌 정신이 직관하는 대상으로, 사물은 정신에 의해 감지될 때에 시간과 공간 속에 나타나는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이러한 칸트의 시간과 공간에 대한 대강의 개념은 오늘날에도 받아들여진다. 예를 들어 시각(視覺)을 통한 정보 전달은 과학적으로 아래와 같이 뒷받침될 수 있다.

 

 색과 관련된 현상은 부분적으로 물리적 세계의 특성에 따라 좌우된다. 그러나 색이라는 것은 결국 우리 눈이 받아들인 외부의 정보(빛)가 두뇌를 통해 재구성된 결과이다. 물리학은 눈으로 날아오는 빛의 성질을 규명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빛이 일단 우리 눈으로 들어온 후에 일어나는 일련의 과정들은 광화학과 신경학, 그리고 심리학적 과정에 더 가깝다.(35-1)... 눈의 경우에는 세 개의 층을 이루는 세포들이 복잡한 계산을 수행하여 색을 분석한 후, 그 결과과 시신경을 통해 두뇌로 전달된다. 망막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생리학적 과정들은 외부의 자극에 두뇌가 반응을 보이는 첫 단계인 셈이다.(36-2) <파인만의 물리학 강의 1> 中



 [그림] 망막( 출처 : 위키백과)


 '본다'는 행위가 망막을 통해 '빛 light'으로 표현된 세상의 정보가 뇌에 전달되는 과정이라고 할 때, 우리가 오감(五感) 중에서 가장 신뢰하는 '시각(視覺) 정보' 는 대상과 직접적으로 관계를 맺는 직관인 '빛 light'을 통해 전달된다. 우리가 인식하는 정보의 약 70%가 '빛'이라 한다면. 칸트 철학에서 '빛'이 차지하는 비중은 결코 작지 않다 하겠다.


 사실, 빛이 칸트 철학에서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미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고대 철학에서 로고스(logos)로 표현되는 '빛'의 중요성은 고대의 여러 문헌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우리는 빛에 밝음과 긍정적인 이미지를 부여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빛은 '선한 신'의 속성 또는 부분이 되었다.

 

 프로메테우스는 물과 흙으로 인간들을 빚은 다음 제우스 몰래 회향풀의 줄기에 감춰두었던 불을 인간들에게 주었다.(7장 1, p47) <원전으로 읽는 그리스 신화> 中 


 이아페토스이 빼어난 아들은 그분을 속이고는 속이 빈 회향풀 줄기 속에다 감춰 지칠 줄 모르는 불의 멀리 보는 화광(火光)을 훔쳤다.(565 ~ 567, p71) <신들의 계보> 中


 불에 대한 가치 부여의 가장 중요한 이유들 가운데 하나는 아마도 악취 제거(deodorisation)인 것 같다. 냄새란 더없이 위선적이고 성가시게 자신의 존재를 강요하는, 원초적이며 거역할 수 없는 측질이다. 불이 모든 것을 정화한다면 그것은 불이 무엇보다도 악취를 제거하기 때문이다.(p187) <불의 정신분석> 中


 생명은 빛이었다.(요한복음 1:4)


 여기서 말하는 '생명'은 이성적 존재들과 비이성적 존재들을 모두 살아있게 하는 그 생명이 아닙니다 . 여기서 말하는 '생명'은 말씀에 더해진 것으로서 첫 번째 말씀에 참여하게 돌 때 우리 안에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종류의] 생명이 우리 안에 존재하게 되면, 그 생명은 지식의 빛을 얻는 기초가 됩니다.(p98) - 오리게네스의 <요한복음 주해> 中 -


 지혜가 여기에 있습니다. 눈먼 사람 앞에 지혜가 있지만 그의 눈에는 지혜가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지혜가 그의 앞에 없어서가 아니라 그가 지혜 앞에 없기 때문입니다.(p99) - 아우구스티누스의 <요한 복음 강해> 中 - <교부들의 성경 주해> 中


 이러한 빛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은 현대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은 듯하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받아들여지면서 시간(time)과 공간(space)이 시공간(space-time)으로 통합되었고, 빛의 속도는 '절대 속도'로 인정되는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과학의 천재들>은 기차 안에 두 개의 전구와 전구들 사이의 스크린이 놓예 상황에서 기차가 오른쪽으로 지난다고 했을 때 일어나는 경우를 예로 들며 상대성 이론의 개략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날아오는 두 빛이 속도가 달라야 한다... 아인슈타인의 가설대로라면 빛의 속도는 같기 때문에 오른쪽으로 날아가는 빛이 스크린이 스크린에 닿으려면 더 오래 걸려야 한다. 따라서 오른쪽으로 가는 빛을 내는 왼쪽의 전구는 오른쪽의 전구보다 더 먼저 켜졌어야 한다. 두 개의 전구를 켜는 일, 즉 두 사건이 제2관찰자에게 있어서는 동시에 일어난 일이 아닌 것이다. 이렇게 동시성은 관찰자에 따라 상대적이다. 동시성에 대한 이 같은 불일치를 불어오는 핵심적인 이유는 두 관찰자가 왼쪽으로 날아가는 빛과 오른쪽으로 날아가는 빛이 둘 다 같은 속도를 가진다는 가정 때문이다.(p130) <과학의 천재들> 中


  '엠씨스퀘어'로 표현되는 아인슈타인의 유명한 방정식은 에너지가 질량으로 변환될 수 있으며, 광속 이상의 속도를 내는 것이 불가능함을 직관적으로 우리에게 보여주는데, 이를 통해 우리는 광속(光速)을 절대속도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현대에 와서도 빛을 절대적인 존재로 인식하는 태도는 과거와 크게 달라지지 않은 듯하다. 

 

에너지 E는 입자의 정지 질량과 같아진다. 이때 시간의 단위를 보통의 시간으로 바꾸면 다음 식이 얻어진다.  


 

 다시 말해서 질량과 에너지는 본질적으로 동등하며, 같은 것에 대한 서로 다른 표현인 것이다. 즉 물체의 질량은 상수가 아니가 아니고 에너지에 따라 달라진다. 또한 우리는 마지막 식으로부터 q가 1, 곧 광속에 접근함에 따라 E가 무한대로 발산함을 알 수 있다.(p107) <상대성이란 무엇인가> 中


 이와 같은 수학적(또는 과학적)판단에 대해 우리는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받아들이는데, 이러한 판단의 근거를 우리는 <순수이성비판>안에서 찾을 수 있다.

 

 수학만이 입증들을 포함한다. 왜냐하면 수학은 개념들로부터가 아니라, 개념들의 구성, 다시 말해 개념들에 대응해서 선험적으로 주어질 수 있는 직관으로부터 인식을 도출하니 말이다. 방정식에서 환산에 의해 증명과 함께 참값을 구해 내는 대수학자들의 수행방식조차도 비록 기하학적인 구성은 아니지만 기호에서 개념들을, 특히 양들의 관계에 대한 개념들을 직관에서 제시하는 아주 특별한 구성이다.(B762, p880) <순수이성비판 2> 中


 그렇지만, 이와 같은 수학적 판단을 우리는 그대로 받아들여야하는 것일까? 수학적 진리를 선험적이라고 말한 칸트는 같은 책에서 수학적 종합의 한계 역시 지적한다. 수학적 연결이 계열 외의 것을 표현할 수 없다는 칸트의 말을 통해 우리는 '빛의 절대성'에 대해서도 의심할 수 있지 않을까.


 현상들의 계열들의 수학적 연결에서 감성적 조건, 다시 말해 그 자신이 계열의 한 부분인 그러한 것 외에는 어떤 다른 조건도 들어올 수 없게 된다.(B558, p722)  <순수이성비판 2> 中


  '빛'은 고대로부터 지혜, 지식, 생명의 상징이었다. 이러한 상징에 우리는 수학이라는 이름으로 절대속도인 '광속'이라는 또다른 절대성을 부여한 것은 아닐런지...  문화와 떨어질 수 없는 우리의 인식이 부여한 빛의 절대성. 개인적으로 빛의 이러한 속성 함께 아직 입증되지 않은 입자 타키온(tachyon)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림] What is a Tachyon particle anyway?(출처 : https://www.1e.com/news-insights/blogs/what-is-a-tachyon-particle-anyway/)

 

타키온 tychyon 광속(光速)보다 빠른 입자가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예측에서 그 입자에 대한 명칭.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광속보다 빠른 입자는 없으나, 일부 학자들 사이에서는 상대성 이론의 방정식 해석 여하에 따라서는 광속을 넘어설 수도 있다고 생각된다.


 개인적으로 아직 실증되지 않았지만, 타키온의 의미는 과학에만 머무르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사고(思考)가 우리 문화(文化)의 영향을 짙게 받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별다른 문제의식 없이 주어진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닐까. 특히, 그 근거가 구체적인 숫자로 제시되면서 과학(科學 science)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면 이를 논박하기 어려운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많은 것이 객관적으로 측정되고 정량화된 수많은 정보가 쏟아지는 현실안에서 어쩌면 우리는 과학이라는 이름의 비과학적 사실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과학의 출발이 데카르트(Rene Descartes, 1596 ~ 1650)의 방법론적 회의(methodological skepticism) 에서 출발했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우리는 보다 많은 것에 의문을 던져야 하지 않을까. 


 현재 수학적으로 공인된 방정식에서 상수(常數 a constnant)로 가정되었던 항목이 변수(變數 variable)로 바뀔 때 혁명적 변화가 일어났었고, 이러한  패러다임(paradigm)의 변화는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또한 비켜갈 수 없었다. 칸트 시대 당시 선험적이라 여겨졌던 뉴턴과 유클리드의 사상이 이제는 더이상 선험 지식이 아니라는 변화된 현실 속에서 칸트의 <순수 이성 비판>을 다시 돌아보게 된다.


 비록 <순수 이성 비판>의 구체적 내용은 새로운 경험에 의해 바뀌었지만, 인식의 틀은 현대에도 유효하다는 사실 속에서 서양 철학에서 칸트가 차지하는 위상을 조금이나마 짐각하게 된다. 칸트의 사상이 워낙 큰 틀이었기에, 이러한 틀을 깨기보다는 보완하기 위한 방편으로 변증법(辯證法, dialectics)의 등장하게 된 것은 아닐까 하는 추측도 조심스럽게 해본다.


 우리가 절대적으로 받아들이는 수학의 진리가 사실은 우리 인식(또는 문화)의 산물일 수도 있다는 사실과 열린 가능성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을 최근 읽은 책들 안에서 두서없이 나열하면서 이번 페이퍼를 갈무리한다...

 PS. 시간여행에 대한 뜬금없는 생각 


M이론에 따라 세상이 11차원으로 이루어져 있다면, 시간 여행은 불가능하지 않을까. 11개 차원이라는 이야기를 각 사건(event)마다 11개 좌표를 가진다는 의미로 본다면, 최대 4차원까지 통제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나머지 7개 차원의 7개 좌표를 통제할 수 있는 획기적인 방법이 나오지 않는한 웜홀(wormhole)을 활용한다 하더라도 시간 여행을 불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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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22 13: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6-22 14: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6-22 19: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6-22 19: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오늘 <프로타고라스> 강독 첫 시간이었습니다. 이번 강독에서는 특히,소피스트의 역할과  아테네의 정체(政體)를 배경으로 새롭게 <프로타고라스>를 접근하여 새롭게 <프로타고라스>를 바라볼 수 있어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이하 페이퍼에서는 강의 내용을 다른 책의 내용과 함께 정리해보려 합니다. 

 

 <프로타고라스>는 궤변철학의 영역에서 플라톤이 벌이는 경합입니다. 이는 변증술의 사용이라든가 시인들을 해석하는 일 등등에서 그가 더욱 유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이 대화편에는 이전의 대화편들에서와 같은 신랄함과 예리함은 없습니다. 이 대화편 역시 전적으로 일반인을 위한 것으로서, 궤변철학이 가장 긍정적으로 나타나는 현상들에서조차 그것에 대한 경의의 도를 낮추는데 기여해야 하는 것입니다. 원칙적으로 중요한 대화편도 아닙니다.(p192) <플라톤의 대화 연구 입문> 中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 ~ 1900)의 <프로타고라스 Protagoras>에 대한 평가는 냉정하다. <프로타고라스>에서 보여지는 다른 대화편에 비해 치밀하지 못한 구성, 소피스트인 프로타고라스(Protagoras, BC 485 ? ~ 410)을 압도하지 못하는 주인공 소크라테스( Socrates, BC 470 ~ BC 399)의 논변 등은 이러한 니체의 평가를 뒷받침하고 있다.  


 그렇지만, <프로타고라스>를 당시 정치상황과 함께 바라본다면 어떨까? 새로운 관점에서도 니체의 부정적인 평가는 유효할 것인가? 이를 알아 보기 위해 아테네의 민주정(demokratia)를 먼저 살펴보도록 하자. 이 부분은 로버트 달(Robert Alan Dahl, 1915 ~ 2014) 교수의 <민주주의 On Democracy>가 잘 소개하고 있어 해당 내용을 옮겨 본다. 

 

 아테네 정부는 복잡하여 여기에서 적절히 묘사하기가 곤란할 정도다.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은 모든 시민이 참여할 자격을 갖고 있는 의회(assembly)였다. 의회는 소수의 주요 관리들 - 장군들 -을 선출하였다. 그러나 공적 의무를 수행하는 시민을 선발하는 주된 방법은 자격을 갖춘 시민들은 모두 똑같이 선출될 확률을 가진 추첨제였다. 조사에 의하면, 보통 시민들은 정부의 가장 중요한 통치관으로 선출될 기회를 생애에 한 번은 가졌다고 한다.(p29) <민주주의> 中


 추첨제와 투표제에 의해 유지되고 되었던 아테네의 민주정에서 실권은 장군들(Strategos)에게 주어졌기 때문에 많은 아테네 젊은이들이 명예와 재물을 좇아가는 현상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리고, 민주정은 이러한 젊은 인재들의 공급이 화수분처럼 이어졌을 때 유지될 수 있는 제도였다. 그렇다면, 우리가 궤변론자로 알고 있는 소피스트는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던 이들이었을까? 


 소피스트 Sophist란 원래 '현인(賢人)' 또는 '지자(知者)'를 의미하였다... 민주주의 사회의 시대적 요청에 따라 가장 중요한 과목은 변론술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일신(一身)을 위해서나 국가를 위해서 선(善)을 도모하고, 언론이나 행위에서도 유능한 사람이 되는 길'을 청년들에게 가르친다고 자부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선한 자인 체하는 기술만을 가진 데 불과하였다. 이 같은 사실을 밝힌 것이 철학자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이다. <두산세계대백과사전> 中


 정리하면, 소피스트는 민주제도 하에서 인재공급을 담당하던 민주정의 중추와 같은 역할을 수행하던 이들이었다. 이에 반해, 우리가  <국가 Politeia>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소크라테스(또는 플라톤)이 추구하는 정체는 철인(哲人)에 의한 정체다. 결국, <프로타고라스>에서 소피스트에 대해 비판적인 주장을 하는 소크라테스의 모습은 바로 민주정을 비판하는 <국가>의 예고편이라 할 수 있겠다.

 

우리가 흔히 '소크라테스의 역설'이라고 부르는 철학적 입장들, 즉 덕이 곧 앎이라거나(知德合一) 개별 덕들이 사실은 동일한 하나의 것이라거나 (德의 單一性) 누구도 자신이 아는 것과 달리 행동할 수 없다거나(자제력 없음의 불가능성)하는 입장들에 대한 본격적인 논증이 제시되는 곳이 다름 아닌 <프로타고라스>이다.(p24) <프로타고라스> 中

 

 그렇다면, 이들이 펼치는 논쟁 주제인 '교육(敎育)을 통해 덕(arete)를 기를 수 있는가?' '덕은 단일한가?' 등은 바로 민주주의의 지속 가능성에 대한 논쟁으로 정리된다. 이런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프로타고라스>는 프로타고라스로 대표되는 민주정과 소크라테스로 대표되는 철인정치체제의 체제간 논쟁으로 해석될 수 있다. 정치철학의 관점에서 <프로타고라스>를 바라봤을 때, 왜 처음에 이 대화편이 이해가 안되었는지 그 이유를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하게 된다. 민주정치에 익숙한 우리에게는 소크라테스보다 프로타고라스 논리가 더 설득력있게 다가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리라... 정치철학으로서 <프로타고라스>의 구체적 모습은 다음 수업에 소개될 것이기에 기대감을 품고 이번 페이퍼를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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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14 13:3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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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14 13:4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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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17 21:1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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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17 21:2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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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17 21:4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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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18 05:4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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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19 14:3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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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 연휴를 마치고 플라톤(Platon, BC 427 ~ BC 347)의 <티마이오스 TImaios>에 대한 강의를 청강하고 왔습니다. 플라톤의 우주론(Cosmology)가 담긴 <티마이오스>를 읽었지만, 상당히 어려운 대화편으로 이해하기 어려웠는데, 강의를 듣고 나니 조금은 정리되는 느낌이 들어 강의 자료와 함께 개인적인 내용정리도 함께 올려 봅니다.(이하 반말)


 <티마이오스>는 화자인 티마이오스의 비중이 매우 크다는 점에서 다른 대화편들과 뚜렷하게 구별된다. <티마이오스>의 우주론 역시 티마이오스의 입을 빌려 설명되는데, 우주론은 크게 다음의 내용으로 진행된다.


1. 존재와 생성/소멸


 티마이오스에 따르면 '언제나 존재하는 것'은 '사유'와 '합리적 설명'이 가능한 반면, '생성'되는 것은 '소멸'되는 것이며, '감각'과 '의견'에 의해 파악된다. 그렇다면, 생성된 것이 분명한 우주는 소멸되는 것이며, 불완전한 존재가 된다.(그렇지만, 최상의 아름다움을 가진 필멸의 존재)


 그러니까 제 판단으로는 먼저 다음 것들이 구분되어야 합니다. '언제나 존재하는 것(to on aei)'이되 생성(genesis)을 갖지 않는 것은 무엇이고, '언제나 생성되는 것(to gignomennon ari)'이되 결코 존재(실재)하지는 않는 것은 무엇인지 말씀입니다. 분명히 앞엣것은 '합리적 설명(logos)'과 함께하는 지성에 의한 앎(이해)(noesis meta logou)'에 의해 포착되는 것으로서 '언제나 같은 상태로 있는(aei kata tauta on) 것'인 반면에 뒤엣것은 '비이성적인 감각(aisthesis alogos)'과 함께 하는 의견(판단 doxa)의 대상으로 되는 것으로, 생성/소멸되는 것이요, 결코 '참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데, 생성되는 모든 것은 또한 필연적으로 원인이 되는 어떤 것에 의해 생성됩니다. 어떤 경우에도 원인 없이는 생성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27d - 28a) <티마이오스> 中


 그렇지만, 데미우르고스는 완벽한 존재를 모상으로 우주를 만들었기 때문에, 우주는 생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름답게 만들어져야만 한다. 그래서, 우주는 데미우르고스에 의해 무질서에서 질서가 있는 상태로 이끌리게 된다. 정리하면, 우주는 생성된 필멸의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형상'의 모상이기 때문에, 카오스(Chaos)에서 코스모스(Cosmos)로의 변화된다. 그리고, 이 우주는 몸통과 혼을 가진 존재이며, 이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다음에 이어진다.


 그런데 무엇을 '만드는 이(匠人, demiourgos)이건 간에, 그가 '언제나 같은 상태로 있는 것'을 바라보면 이런 걸 본(paradeigma)으로 삼고서, 자기가 만드는 것이 그 형태(모습 idea)와 성능(dynamis)을 갖추게 할 경우에라야, 이렇게 완성되어야만, 모든 것이 필연적으로 아름다운 것으로 됩니다.(28b) <티마이오스> 中


 이 우주(Kosmos)가 과연 아름답고 이를 만든 이(demiourgos) 또한 훌륭하다면, 그가 영원한 것(to aidion)을 바라보고서 그랬을 것이라는 건 분명합니다... 우주는 바로 그렇게 해서 생겨났기에, 그것은 합리적 설명(logos)와 지혜(phronesis)에 의해 포착되며 '똑같은 상태로 있는 것'에 따라 만들어졌습니다. 이런 점들이 이러할진대, 이 우주가 어떤 것의 모상(模像 : eikon)일 것임이 또한 전적으로 필연적입니다.(29b) <티마이오스> 中


 이 우주를 구성한 이(ho synistas)는 훌륭한(선한 : agathos) 이였으니, 훌륭한 이에게는 어떤 것과 관련해서도 그 어떤 질투심이든 이는 일이 결코 없습니다. 그는 질투심에서 벗어나 있어서, 모든 것이 최대한으로 자기 자신과 비슷한 상태에 있게 되기를 바랐습니다... 그는 그것을 무질서 상태(ataxia)에서 질서 있는 상태(taxis)로 이끌었습니다. 질서 있는 상태가 무질서한 상태보다는 모든 면에서 더 좋다고 생각해서였죠.(29e -30a) <티마이오스> 中


 2. 우주의 몸통


 우주는 물체적인 것으로 시각적인 '불'과 촉각적인 '흙'을 재료로 한다. 그렇지만, 이들을 결합시키기 위해서는 '비례'라는 질서가, 중간재료로 '물'과 '공기'를 필요로 한다. 결국, 불, 흙, 물, 공기의 비례적 관계에 의해 우주의 몸통이 구성되는 것이다.


 생성된 것은 물체적인 것이며 볼 수도 있고 접촉할 수도 있는 것이어야만 합니다. 그렇지만 불 없이는 어떤 것도 볼 수 있는 것으로 될 수 없고, 단단한 어떤 것 없이 접촉할 수 있는 것으로 될 수도 없지만, 흙이 없고서는 단단한 것이 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이런 연유로 신은 불과 흙으로 우주의 몸통을 구성하기 시작하면서 만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셋째 것 없이 이들 둘 만으로는 훌륭하게 결합될 수가 없습니다. 양쪽 중간에서 결합해 주는 어떤 끈(desmos)이 생겨야만 하기 때문이지요. 끈들 중에서도 가장 훌륭한 것은 자신도 묶여진 것들도 최대한 하나로 만드는 것이겠는데, 이 일은 등비 비례(analogia)가 그 성질상 가장 훌륭하게 수행하는 것입니다.(31b)... <티마이오스> 中


 우주의 몸통은 실상 입체적인 형태로 되는 것이 적절하거니와, 입체적인 것을 조화롭게 결합하는 것은 결코 하나의 중항(mesotes)이 아니라, 언제나 두 개의 중항입니다. 바로 그래서 신(神)은 물과 공기를 불과 흙 사이의 중간에 놓고서, 이것들을 가능한 한, 그것들이 서로에 대해 같은 비례 관계를 갖게 하여... 천구(ouranos)를 볼 수 있고 접촉할 수 있는 것으로 구성했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그리고 수에 있어서 이와 같은 네 가지인 것들에서 우주의 몸통이 그 비례 관계로 인해 조화를 이룸으로써 생겨났으니..(32c) <티마이오스> 中


3. 우주의 혼(魂)


그렇다면, 우주의 혼은 어떻게 구성되는가? 우주의 혼은 동일성과 타자성, 그리고 기본적 존재(ousia)의 결합을 통해 혼(魂)으로 결합된다. 그리고, 데미우르고스는 이들을 잘라내어 운동을 만들어 내는데, 이들 중 '타자성 운동'이 이루어지는 곳에서 행성의 움직임이 이루어진다.


 그(우주를 구성하는 이)는 불가분적이고 언제나 같은 상태로 있는 존재(ousia)와 물체들에 있어서 생성되고 기본적인 존재, 이들 양자에서 그 중간에 있는 셋째 종류의 존재를 혼합해 냈습니다. 그리고 다시 그는 동일성(he tautou physis) 및 타자성(he tou heterou physis)과 관련해서도 역시 같은 방식으로 이것들의 불가분적인 것과 물체들에 있어서 가분적인 것의 중간에 있는 셋째 종류의 것들을 구성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셋인 이것들을 갖고서 이 모두를 하나의 형태(idea)로 혼합했는데, 동일성과 섞이기 힘든 타자성은 억지로 조화를 이루게 결합했죠. 그리고는 [이것들을] 존재와 함께 섞어서, 셋으로 하나를 만들고, 다시 이 전체를 그가 적절한 부분들만큼 나누었지만, 나뉜 각 부분은 동일성(tauton), 타자성(thateron) 그리고 존재(ousia)로 혼합된 것입니다.(35a -35b <티마이오스> 中


 그는 혼합된 것, 즉 거기에서 그가 이것들을 잘라 냈던 그것을 이렇게 해서 어느새 마저 마저 써 버렸습니다. 그리고서 그가 이 전체 구조(systasis)를 길이로 둘로 가르고서, 그 둘을 'X' 모양으로 중점이 서로 교차하도록 한 다음, 그 각각이 원형으로 하나를 이루게 구부렸습니다. 이것들이 [처음의] 그 교차점과는 반대편에서 또 한 만나게 한 거죠. 그리고선 그것들을 같은 곳에서 같은 방식으로 회전하는 운동으로써 에워싸서는 이들 원(kyklos) 가운데 하나는 바깥쪽 것으로, 다른 하나는 안쪽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는 바깥쪽 운동을 '동일성의 운동(phora tes tautou physeos)'이라 부르고, 안쪽 운동은 '타자성의 운동(phora tes thaterou physeos)라 불렀습니다. 그는 동일성의 운동은 평면으로 오른쪽으로 돌게 하되, 타자성의 운동은 대각선으로 왼쪽으로 돌게 하지만, 주도권은 동일성과 한결같음을 유지하는 회전[운동](periphora)에 주었습니다.(36c) <티마이오스> 中


[사진] 타자성과 동일성의 궤도(출처 : <티마이오스>)


 4. 시간


 본래 형상은 영원한 존재이기 때문에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 그렇지만, 생성된 존재는 영원할 수 없기 때문에, 데미우르고스는 시간을 만들어내어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 속에서 존재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렇지만, 필멸의 존재들은 시간을 인식할 수 없다. 때문에, 데미우르고스는 시간을 인식시키기 위한 수단을 추가적으로 만들어야 했는데, 그 결과가 바로 '별(star)'이다. 


 본(paradeigma)이 살아 있는 영원한 것이듯이, 그는 이 우주도 그처럼 가능한 한 그런 것이도록 만들어 내려고 꾀했습니다. 그런데 그 살아있는 것의 본성은 영원한 것이어서, 이를 생성된 것에 완전히 부여하는 것은 사실 불가능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움직이는 어떤 영원(aion)의 모상(eikon)을 만들 생각을 하고서, 천구에 질서를 잡아 줌과 동시에, 단일성(hen) 속에 머물러 있는 영원의 [모상], 수에 따라 진행되는 영구적인 모상(aionion eikon)을 만들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우리가 시간(chronos)이라 이름지은 것입니다.(37c) <티마이오스> 中


[사진] 행성의 운동(출처 : <티마이오스>)


 본이 영원토록 있는 것인 반면에, 천구는 그것대로 일체 시간에 걸쳐 언제나 '있어 왔고' '있으며'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간이 생겨나도록 하기 위한 시간의 창조(genesis)와 관련되는 신의 이러한 숙고와 의도로 해서 태양과 달 그리고, 떠돌이별들(행성들 astra planeta)이라는 이름을 갖는 그 밖의 다섯 별(달, 태양, 수성, 금성, 화성)이 시간의 수치들의 구별과 수호를 위해 생겨났습니다.(38b) <티마이오스> 中


 결국 <티마이오스>의 창세기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데미우르고스는 '영원한 존재인 형상의 모상'으로서 '우주'를 만들었기에 우주는 생성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생성된 것으로서는 가장 아름다운 존재가 된다. 그리고, 이러한 우주의 질료는 4원소(불, 흙, 공기, 물)이며, 우주의 혼은 동일성, 타자성과 기본적 존재의 혼합으로 만들어진 회전 운동으로 구성된다. 다만, 이러한 우주의 혼과 몸통은 유한한 것(그렇지만, 매우 긴)이기 때문에, 우주는 '과가-현재- 미래'라는 시간 안에 존재하는 것이며, 시간을 알기 위해 별들이 만들어진 것이다...


  <티마이오스>의 우주론은 지금 관점에서 보면 다소 황당한 것이 사실이지만, 우리가 <티마이오스>에서 주목해야 하는 점은 다른 곳에 있다(고 강의에서 말했다.) 그것은 <티마이오스>의 우주론이 말하는 바가 '인간이 우주와 같이 혼을 가지고 운동을 한다면 질서있고 조화롭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티마이오스> 강의에서는 여기까지 강의되었지만, 이에 대해서 플라톤의 다른 대화편인 <파이드로스 Phaedrus>라는 연결 고리를 가지고 조금 더 생각해보자.

 

 <티마이오스>의 대화는 <국가 The Republic> 다음에 이루어지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최선의 정체(政體)가 무엇인가?'를 묻는 <국가> 다음에 '우주(宇宙)'론이 나오는 목적은 무엇일까. 그것은 '국가'가 지향하는 바가 가능한 것인가?에 대한 플라톤의 대답이 될 것이다. 영혼의 불멸을 주장한 <파이드로스>의 내용을 중간에 넣는다면, 이 관계는 더 명확해진다. 우주의 혼은 질서있는 회전 운동을 한다.(티마이오스) - 인간도 혼이 있으며, 이 혼은 불멸한다.(파이드로스) - 인간들이 모여서 질서있고 조화롭게 살아간다면, 우리도 생성되었지만, 영원한 형상의 존재로 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마치 우주처럼(국가).  이것이 강의에서 말하는 도식이었다고 정리해본다.


그렇다면, 과연 <티마이오스>를 정치철학이라고 볼 수 있을까?라는 문제에 대해 생각해보자. 그 전에 먼저 <티마이오스>의 우주론은 과연 플라톤과 그리스 철학만의 고유한 사상일까 부터 살펴보자. 발터 부르케르트(Walter Burkert, 1931 ~ 2015)의  <그리스 문명의 오리엔트 전통 Babylon, Memphis, Persepolis>에 따르면 <티마이오스>의 우주론은 오리엔트 영향에서 자유롭지 않다.

 

 아카드 문헌에서도 생성 혹은 창조(바누), 파괴(훌루쿠), 존재(바슈)의 세 개념이 만물을 포괄하고 지배하는 체계 속에 결합된 것을 볼 수 있다.,,, <에누마 엘리시>는 신이 파괴나 생을 명할 수만 있다고 가정하는 것인데, 파르메니데스는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파르메니데스를 거쳐 그리스어로 변형된 옛 천지창조론은 새로운 토대를 이루었다. 이것은 겉으로 보이는 외양을 넘어 합리적인 논증으로 드러나는 '존재'의토대이다. 훗날 플라톤은 이 논증에 아프리오리 개념이라는 수학적 기초를 놓았다.(p94) <그리스 문명의 오리엔트 전통> 中


 그리스의 창조론이 오리엔트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면, 천문학 역시 오리엔트 영향을 받았음을 추론할 수 있을 것이고, 천문학의 목적 역시 같은 목적으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스 천문학 역시 지배층들의 지배수단이었다고 바라본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문명화의 길로 접어들던 한 종족이 시대적으로 틀림없이 농사를 지었을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사투를 벌였던 곳에 우리 스스로를 놓고 그들이 처한 상황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며, 대부분 거의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언제 땅을 갈고 씨를 뿌리며 농작물을 거두어들이고 풀을 베어내는지'를 꿰뚫은 사람들만 진정으로 성공했을 것이다. 처음에 그런 지식을 얻는 유일한 수단은 천체를 관측하는 것뿐이었을 것이다.(p17) <천문학의 새벽> 中


 그런 의미에서 하늘을 읽고 하늘의 뜻을 아는 것은 정치 행위였다는 사실은 이집트에서만 확인되는 사실은 아니다. 대표적으로 맹자는 다음과 같이 자신을 수양할 것과 천리를 알고 천명을 기다리는 것을 말하는 것을 보면 동양에서도 하늘의 뜻을 아는 것이 중요한 정치수단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孟子曰 盡其心者는 知其性也니 知其性則知天矣니라

存其心하여 養其性은 所以事天也요

天壽에 不貳하여 修身以俟之는 所以立命也니라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그 마음을 지극히 하는 사람은 그 본성 本性을 알게 되니 그 본성을 아는 사람은 그 천리 天理를 알게 될 것이다. 그 마음을 보존하여 그 본성을 수양 修養하는 것은 하늘을 섬기는 것이요, 요사 夭死하는 것과 장수 長壽하는 것에 의심하지 않고서 몸을 수양하여 천명 天命을 기다리는 것은, 자기의 본성을 잘 수양하여 기다리는 것이다." <맹자 진심장구 상 孟子 盡心長句 上> 中 

 

 이렇게 정리하고 보니<티마이오스>의 우주론은 <국가>라는 정치철학을 뒷받침하기 위한 것이라는 내용은 무리한 설명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이와는 별도로 플라톤과 비슷한 시기에 맹자(孔子, BC 372 ~ BC 289)가 멀리 떨어진 동양에서 '천명 天命'을 강조했다는 사실 또한 흥미로운 지점이라 여겨진다. 또, 멀리 플라톤과 맹자 시기까지 거슬러갈 것도 없이 들뢰즈(Gilles Deleuze, 1925 ~ 1995) 철학의 지향점이 정치였음을 생각해 본다면, 정치철학이 철학의 종착점이 아닌가도 여겨진다. 글이 매우 길어졌기에, <티마이오스>와 여기에서 파생된 여러 이야기가 담긴 이번 페이퍼를 서둘러 마무리한다.... 


PS. 창조신인 '비슈누'와 파괴의 신 '시바' 그리고 분신인 '크리슈나'가 등장하는 <마하바라따>를 생각하면 오리엔트 문명의 영향을 인도에서도 확인할 수 있겠지만, 이는 다음 기회로 일단 넘기자... 이렇게 곁가지로 새니 책 한 권 제대로 읽기가 참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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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17 09:4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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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17 12: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황금모자 2019-02-17 15: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소은 박홍규에 관련된 책들을 읽어보는 것도 추천해드립니다.

겨울호랑이 2019-02-17 15:58   좋아요 0 | URL
우리나라 플라톤의 대가라는 정도만 알고 있었는데, 황금모자님의 추천을 받게 되니 반드시 읽어봐야겠습니다. 황금모자님 감사합니다!^^:)

AgalmA 2019-02-17 18:2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요즘 자주 하는 생각은 목적론적 지향, 즉 인과적 사고가 사실상 우리 사고의 브레이크 혹은 빠져나올 수 없는 블랙홀이 아닌가 하는 겁니다.
하라리도 지적하듯이 농경생활은 그 지역에서 그 작물이 재배된 우연한 상황에서 비롯된 것이지 인간이 농경을 위해 그 작물을 재배한 것이 원인은 아니었죠. 물론 후대에서는 목적 달성을 위해 많은 걸 벌이고 있긴 하지만요. 그러나 정작 처음의 목적과는 다른 경로의 발전도 많죠. 원자폭탄이 만들어진 과정이라든지, 실험 중에 우연히 만들어진 것들이 다른 문제에 도움이 되는 경우(탈모 문제를 연구하다 만들어진 비아그라 같은ㅎㅎ;;)도 많고.
인간은 인과적 사고를 하는 특성이 있어 원인 결과를 따질 수밖엔 없긴 하지만, 그런 식의 사고 때문에 이해하기 너무 큰 것에 ‘이것은 신이 만든 게 아니면 설명할 수 없다‘식도 나온 것이라 참...

요즘 마르쿠스 가브리엘 <나는 뇌가 아니다> 읽으면서도 한숨을 계속 쉬었는데요. 그는 신경과학이 인간을 뇌로 설명하는 건 어불성설이라는 관점입니다. 그러나 과학적 설명을 한계로만 치부하며 철학적 관점을 고수하려는 확증 편향 아닌가 싶은 대목이 참 많아요. 인간은 뇌의 어느 부부만 잘못되어도 ‘아내를 모자로 착각하는‘ 교란을 많이 받잖습니까. 여기서 ‘진짜 그‘는 뭐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정상적인(?) 본질적인(?) 그‘에 대해 어떻게 말할 수 있습니까. 그 모든 게 그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성적‘, ‘주관/객관‘이라는 것 자체가 인간의 사고 모형일 뿐입니다. 합리적 설명을 위해 다양한 관점을 받아들이고 톺아보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인간의 사고가 불완전하다는 걸 누구나 아는 만큼.

겨울호랑이 2019-02-17 18:40   좋아요 3 | URL
^^:) AgalmA 님의 의견에 동감합니다. 전지전능하고 완벽한 형상을 따라 만들어졌기에 생겨난 이유가 있다는 말은 우리 삶을 부품화시키는 것 같습니다. 도올 김용옥 선생의 말로 기억됩니다만, 인간은 ‘뇌‘가 아닌 ‘위‘로 설명되어야 한다는 말이 떠오릅니다. 인간은 배고프면 살 수 없다는 그의 말 속에 현실이 잘 녹아있다 여겨집니다.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이니까요. 우리 안의 유전자도 그걸 원할 거라 넘겨짚어봅니다 ^^:)

2019-02-18 09: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2-18 09: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3-04 17: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3-04 18: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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