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내가 매기는 평점에 이의를 제기하는 이웃 분들이 계신다. 나 역시 다른 이들 평점에 이의를 제기하고 싶을 때도 있다. 내가 생각하는 쓰레기 책들에 높은 평점을 매기는 이웃들을 볼 때마다, 화가 나기도 하고 한심스럽기도 하다. 예를 들어, 칼뱅의 <기독교 강요>에 별 다섯 개 매기는 글을 보면 억장이 무너진다. 이 분은 과연 칼뱅이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화형에 처한 걸 알고도 이런 평점을 매긴 걸까. 칼뱅이 그러했듯, 칼뱅주의자들이 칼뱅의 책을 구실로 집단학살(모히칸족, 피쿼트족, 시먼족, 트와족, 줄루족 등등)을 정당화한 걸 알고도 이런 평점을 매긴 걸까. 루소는 인간은 개차반이었지만 그가 쓴 책은 그와는 비교불가능할 정도로 인류 공통에게 값진 유산이다. 칼뱅은 인간도 개차반이었지만 그가 쓴 책은 더더욱 개차반이다. 기독교인들이 21세기에도 칼뱅의 <기독교 강요>를 아무런 비판적 성찰없이 받들어 모시는 건, 제 정신이라고 볼 수 없다. IS를 만든 건 이슬람이라기보다는 야훼다.

 

어쨌든 나는 내 생각과 다르다고 해서 다른 이웃분의 평점에 이의를 제기한 적은 없다.

그래서인지 평점에 대한 이의를 다는 댓글을 볼 때마다 황당하고 어이가 없다.

 

이 기회에 평점에 대한 기준을 밝힌다. ‘,,의에 입각한 평점’, 혹은 ,,미에 입각한 평점이라고 해야 할까. , 내 지식의 폭을 넓혀 주었는가, 내 얼어붙은 감수성에 쩌억 쩌억 갈라지는 도끼질을 가했는가, 내 차가운 심장을 의기로 채워주었는가,가 관건이다.

독서 전이나 독서 이후에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 별 세 개 정도.

 

지적인 기준으로 볼 때, 두 가지 요인이 중요하다.

첫째, 내 무지를 까발겼는가

둘째, 내 편견과 선입견을 산산히 부섰는가

 

마르크스를 읽는다고 문제를 바로 해결할 수는 없어요. 그렇지만 어느 수준에서 자신의 사고가 막혀 있는가, 자신이 얼마나 인습적인 사고 틀에 갇혀 있는가......, 이런 점은 뼈가 시리도록 잘 알 수 있어요. 마르크스를 읽고 있으면 스스로의 사고 틀(갇혀 있는 감옥에 비유해도 좋겠지요)이 외부의 충격으로 덜컹 흔들려서 감옥 벽에 균열이 생기고 철창이 휘어지는 것 같다고나 할까요. 감옥 벽에 금이 가고 먼지가 풀풀 나면서 철창이 휘어지고 삐걱거려야 비로소 나는 감옥 속에 있었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법이죠......마르크스는 내가 감옥 속에 갇혀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이상, 거기에서 빠져나오는 수를 궁리한다는 것은 꿈도 못 꾸는 법이니까요.

 

우치다 타츠루, 이시카와 야스히로, <청년이여, 마르크스를 읽자> P 43.

(원문의 역어 우리감옥으로 대체합니다.) 

 

위 지문에서 마르크스으로 대체해보자. 내가 어떤 식으로든(,,) ‘감옥속에 있었다는 걸 깨닫게 해주는 책이 내게는 좋은 책이다.

 

위화의 <우리는 거대한 차이 속에 살고 있다>의 경우 '정'과 '의'는 떨어질지 모르지만 다분히 지적인 책이었고(상상력과 통찰력, 소설가의 두 타입 등등) 편견과 선입견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했을 지언정, 내 무지를 완전히 까발겼다는 점에서 나는 별 다섯 개를 던졌다. 위화의 평점에 이의를 제기한 분은 나보단 분명 지적으로 뛰어나실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니었다.

 

별 하나도 과한 책들도 있다. 예를 들면 이지성, 김병완, 공병호의 책들. 사회문제를 은폐하고 조작하고, 사회의 책임을 개인으로 환원시키고, 재벌과 기득권을 위해 거짓된 학문을 유포하는 기득권의 충실한 딸랑이들. 딸랑 딸랑 ~~

 

지식인의 도덕적 책임은 여전히 막중하다. 파리코뮌의 위대한 역사가 프로스페 올리비에 리사가레는 우리에게 이렇게 상기시킨다.

 

민중에게 거짓된 혁명의 전설을 이야기하고 거짓된 사실로 현혹시켜 민중을 속이는 자는 항해자에게 틀린 지도를 그려주는 지리학자와 마찬가지로 처벌받아 마땅하다.”

 

- 장 지글러, <인간의 길을 가다> p. 48 

 

 

간혹가다 ,,가 적절히 혼합된 책을 만날 때도 있다. 리베카 솔닛의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가 그렇다. 록산 게이의 <나쁜 페미니스트>,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의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를 읽을 때도 몰랐던 내 사고의 결함을 리베카 솔닛 때문에 깨달았다. 내 편견과 선입견이 산산이 깨지는 순간.

 

특히 여자들이 억압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남자들이 상투적으로 보이는 반응, 모든 남자가 다 그렇진 않아라는 반응을 비판하는 말이었다.

 

일부 남자들은 솔직히 나는 안 그런데라고 말하고 싶어서거나 아니면, 현실의 시체나 피해자는 물론이거니와 현실의 범인을 논하는 문제로부터 방관자 남성들의 안락함을 보호하는 문제로 대화의 초점을 돌리기 위해서 그런 반응을 보인다. 한 여성은 격분해서 내게 말했다.

 

남자들은 대체 뭘 바라는 거예요. 여자를 때리거나 강간하거나 위협하지 않는다고 상으로 과자라도 받고 싶은 거예요?”

 

여자들은 늘 강간과 살해를 두려워하면서 산다. 때로는 그런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이 남자들의 안락함을 보호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 제니 추라는 여성은 트위터에서 이렇게 말했다.

 

물론 모든 남자가 다 여성 혐오자나 강간범은 아니다. 그러나 요점은 그게 아니다. 요점은 모든 여자는 다 그런 남자를 두려워하면서 살아간다는 점이다. ” 


- 리베카 솔닛,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 세상에. 나는 감옥에 있었구나

얼마 전 쓴 록산 게이의 <나쁜 페미니스트>의 독후감의 요점이 그것이었다.

나는 안 그런데

 

이건 정말 맞는 말이다. 페미니즘 책을 읽으며, 남자로서 나는 안 그런데로 귀결되어서는 결코 안 되는 것이었다. 모든 여자들이 남자에게 착취당하고, 남자를 두려워하며 살아간다는 것. 그것이 요점이다. 등산로에서 연일 여성을 대상으로 한 강간 혹은 살인이 벌어진다. 와이프는 무서워서 대낮임에도 혼자서 자전거길 산책을 나갈 수 없다고 말한다. 실비아 플라스나 버지니아 울프는 여성으로서 밤길에도 걸을 자유에 대해 말했다. 한국 여성들은 아직도 밤은 고사하고 낮에도 걸을 자유가 없다.

 

흔히 남성들이 저지르는 오류는 이렇다. 남성들이 겪는 차별과 여성들이 겪는 차별을 쉽사리 동일시한다. 남성들이 말하는 차별은 오로지 기득권 유지의 차원이다. 그러나, 여성들이 겪는 차별은 실존이다. 차원이 전혀 다른데, 똑같은 잣대라고 착각한다.

 

별 하나도 과분한 허태균의 <어쩌다 한국인>을 보면, 저자는 재벌 2세들이 겪는 외로움에 대해 설파하신다. 재벌 2세들이 겪는 외로움과 노동자들이 겪는 외로움의 차원이 똑같을까? 경상도 사람들이 박근혜에 몰표를 주는 것과 전라도 사람들이 김대중에게 몰표를 주는 것 역시 동일한 차원이 아니다. 경상도 사람들은 기득권 유지의 차원이지만 광주항쟁으로 빨갱이로 몰려, 총칼로 짓밟힌 전라도 사람들이 김대중을 지지하는 건 실존의 차원이다. (강준만의 <한국 현대사 산책> 참고

 

록산 게이의 <나쁜 페미니스트>,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의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 리베카 솔닛의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를 읽으며 정말 놀랐다. 이렇게나 많은 여성들이 성추행과 강간을 당했단 말인가? 전혀 몰랐다. 록산 게이는 <나쁜 페미니스트>에서 어릴 적 집단 강간당한 일화를 고백한다. 독후감을 썼을 때는 록산 게이가 과하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내가 몰랐던 건 그만큼 여성들이 강간 사실을 숨겨야 했던 한국 문화 탓은 아니었을까. 그러니까 더 많은 여성들이 그러한 경험을 더 많이 공론화해야 하는 건 아닐까. 미국은 여성 다섯 명 중 한 명이 강간당한다고 한다. 신고 된 건수로는 6분마다 강간이 벌어진다. 신고 된 건수만 이러니, 실제로 강간은 거의 1분마다 벌어질지 모른다. 매년 87천 건의 강간 사건이 터진다니. 대체적으로 아시아는 강간에서만큼은 미국에 뒤지지 않는다고 하니, 한국에선 얼마나 많은 성폭력, 성희롱, 강간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얼마 전 강남역 화장실에서 묻지마살인 사건이 있었다. ‘여성혐오냐, 아니냐가 논란이 되었었다. 여성혐오인지 아닌지는 내 식견으로 알 수 없다. 그러나, 사건을 여성 혐오로 대중들에게 인식시킨 건, 한국의 페미니즘 역사에 꼽을만한 성과라고 본다. 서중석의 <한국 현대사 이야기>4월 혁명 사진 중에 놀라운 사진이 있다. 마산 의거 자료 사진 중엔 오로지 어머니들로만 이루어진 시위대가 있었다. 이미 1960년대에 여성들은 연대했었다. 한국 여성들에게 이태영 변호사를 아느냐고 물어보면 대부분 모른다는 것도 놀랍다. 한국 여성으로서 이태영 변호사를 모르다니! 호주제 폐지뿐만이 아니라, 이혼할 때 여성들이 재산청구권을 갖게 된 건 99프로 이태영 변호사의 노고 때문이었다. 남성들도 마찬가지지만 여성들 역시나 한국 여성 혹은 모든 이의 인권을 위해 노력한 분들의 노고를 너무 쉽게 잊고 사는 건 아닐까.



 

<제러드 다이아몬드의 나와 세계>에서 제러드 다이아몬드는 국가 간의 불평등이 질병, 이민, 테러를 발생시키는 원인이라고 진단한다. 국가 내의 불평등 역시 로드니 킹 폭동과도 같은 폭동을 불러일으킨다. 최근에 일어난 강남역 화장실 사건은 일차적으로 여성혐오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근본적으론 결국 불평등이 초래한 사태가 아닐까. 차별당한 자, 착취당한 자는 자신을 차별한 자, 자신을 착취한 자에게 복수하기 보단, 자신보다 약한 자를 제물로 삼는다.

나는 강남역 화장실사건을 단지 여성혐오에 국한하는 입장엔 동의하지 않는다. 나는 페미니즘이 단지 여성문제에만 국한하는 것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페미니즘은 모든 불평등, 모든 차별에 반대해야 하는 것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남성과 여성 모두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고, 되야하는 것이 아닐까.

 

과연 남혐여혐의 대안일 수 있을까.

<공산당 혁명>에서 마르크스는 모든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고 책을 끝맺는다.

 

참된 혁명의 선언은 미움이나 파괴를 부추기는 말이 아니라 우애를 담은 말로 끝맺지 않으면 안 돼요. 이렇게 아주 인간적인 자세를 보여주었다는 것만으로도 마르크스는 19~20세기에 출현한 무수한 혁명가들보다 탁월하다고 생각합니다.

 

- 우치다 타츠루, 이시카와 야스히로, <청년이여, 마르크스를 읽자>

 

여성들 입장에서 남혐은 통쾌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미움분열이 여성의 차별 과 착취를 철폐하는 데 도움이 될까.

 

마르크스는 인간이 자기 이익을 최우선으로 추구하는 것을 멈추고 자신의 행복과 이익에 신경 쓰는 만큼의 열의로 이웃의 행복과 이익에 신경을 쓰는 유적 존재가 되는 것을 인간 해방의 완수라고 봤어요.

 

- 우치다 타츠루, 이시카와 야스히로, <청년이여, 마르크스를 읽자>

 

마르크스에 따르면, ‘나를 위해 만드는 자는 인간이 아니라 단지 동물일 뿐이다. ‘유적 존재에게 나의 이익사회의 이익과 구분되지 않는다. 록산 게이의 <나쁜 페미니스트>의 리뷰 소제목을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다로 달았다. 나는 페미니스트 일 수 없다고 생각했다. 리베카 솔닛의 이 책을 읽으며, ‘나는 페미니스트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니, 나는 페미니스트가 되야 한다. 한국의 남성과 여성, 모두가 페미니스트가 되야만 한다.


만국의 모든 남성, 여성이여 단결하라! 

 

나는 페미니스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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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madhi(眞我) 2016-06-25 14: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힘을 모아서 라다크(일처다부제 나라)로 갑시다!! ㅋㅋ

시이소오 2016-06-25 15:58   좋아요 0 | URL
앗, 그건 ㅋ ㅋ ㅋ

cyrus 2016-06-25 16: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리나라 페미니스트들이 앞으로 모든 불평등, 모든 차별에 반대하려면, 다문화 가정, 특히 우리나라에 거주하는 외국 여성을 향한 우리 사회의 차별 문제에 좀 더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시이소오 2016-06-25 16:25   좋아요 1 | URL
외국인 차별도 심각하죠.
전세계적으로요.

말씀
하신것처럼 그래야겠죠.
사이러스님도 우리나라 페미니스트시잖아요 ^^

고양이라디오 2016-08-25 1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원시원한 글이네요^^ 저도 페미니스트가 되고 싶습니다ㅎ

시이소오 2016-08-25 13:01   좋아요 0 | URL
우리 모두 되야죠. 메갈보다 현명하게 ^^
 


이대로 이 책 (우리는 거대한 차이 속에 살고있다) 을 반납하려니 뭔가 미진하다. 잔여물이 남은 듯한 


책에 소개된 작가들의 소설을 읽어보고 싶다. 

일단 위화의 책도. 










 








































내가 읽은 건 <허삼관 매혈기>, <세상사는 연기와 같다>, <인생> 세 권 뿐. 

위화 책이 이렇게 많이 나왔다니. 



쑤둥이 누구냐? 쑤퉁은 위화를 처음 만났을 때, 길거리에서 같이 놀던 아이를 만난 것 같았다고 하는데, 위화 역시 그런 느낌이었다고. 














































이렇게 많은 책을 냈는데, 나는 아직 쑤퉁의 책 한 권도 읽어보질 못했다. 이런 밥통!! 



위화가 처음에 사회에 눈을 뜬 책은 바진의 <가>였다. 바진은 또 누구냐? 






























바진도 이렇게 많은 책이 번역되어 있건만, 아직 한 권의 책도 읽지 않았다니. 



<비상과 변신>에서 소개한 책도 읽어보고 싶다. 

특히나 간보의 <수신기>


















브루노 슐츠의 책도 읽어 본 적이 없다. 












































<삶과 죽음, 죽음 이후의 부활>에 소개된 책들도 











































위화가 특히나 좋아하던 작가들의 책에도 관심이 간다. 









































































이언 매큐언은 전작을 해야겠다. 


하진이 이렇게 위대한 작가란 말인가? 

















츠바이크도 전작을 해야. 허걱, 츠바이크 책이 이리 많을 줄이야. 


























































































어릴 때 읽었던 뒤마의 책도 다시 한 번 읽어보고 싶다. 































루쉰문학원 농구장에서 위화와 같이 축구를 했던 모옌도 내겐 전인미답의 지역이다. 허걱, 모옌의 책도 이리 많을 줄이야. 

























































































그런데 유르스나르의 어느 책 문장일까. 

"그런데 그의 목은 기이한 붉은 스카프를 둘렀다.”는

















이제야 이 책을 떠나 보낼 준비가 되었다. 


모든 사람은 그가 속한 사회에 책임이 있다. 그 사회의 병폐에 대해서도 역시 그러하다.”

헨리크 입센

 

21. 지금 중국 언론에는 이와 유사한 가짜 뉴스들이 넘쳐나고 있다. 가짜 뉴스를 만들어낸 사람을 추적해 법적 책임을 묻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가짜 뉴스를 퍼뜨리는 것은 사기 행위다. 하지만 중국에서 사람들은 이를 그저 홀유忽悠라고 생각한다. 홀유라는 말은 번역하기가 쉽지 않다. 사기를 뜻하기도 하고, 뭔가를 띄워준다는 의미도 있다. 약간 오락적인 의미도 있으니, 어쨌든 진지하게 대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나는 오히려 지렛대란 말이 더 낫다고 본다.

 

내 생각에 작가는 서사 차원에서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첫째 유형의 작가는 여러 해 동안의 창작을 통해 자신의 성숙한 서사 체계를 세우고, 이후의 창작에서는 그 스타일의 서사를 계속 끌고 가면서 다른 제재라도 그 체계 속에 수용하는 작가다.

 

둘째 유형의 작가는 성숙한 서사 체계를 세우자마자 자기의 가장 자신 있는 서사 방식이 새로운 제재를 처리하는 데 적절치 않다는 것을 발견하는 경우다. 그렇게되면 그는 새로운 제재를 표현하기에 가장 적합한 서사 방식을 찾아야 하고, 그러한 작가의 서사 스타일은 늘 변하기 마련이다. 나는 두 번째 유형의 작가다.

 

지금의 내 창작 원칙은 이렇다. 어떤 제재가 나를 충분히 흥분시키고 오랫동안 창작해나갈 욕망을 불러일으킬 때 내가 가장 먼저 할 일은 그 제재에 가장 적합한 서사 방식을 찾는 것이고 동시에 스스로 과거의 창작에서 익숙해진 서사 방식을 잊으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가장 적합한 서사 방식을 찾는 것을 방해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나는 제재가 다르면 표현 방식도 달라야 한다고 굳게 믿는 까닭에 내 서사 스타일은 늘 변화할 수밖에 없다.

 

P66. 여기서 독서를 할 때 중요한 문제가 부상하는데 작가에 대한 선입견을 토대로 문학 작품을 읽는 것은 잘못이며, 위대한 독서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난 상태에서 읽는 것이란 점이다. 그것은 텅빈 마음을 품고 읽는 것으로, 독서 과정에서 마음은 빠르게 풍성해진다. 왜냐하면 문학은 언제나 미완성이고 부조리 서사의 특징도 미완성이기 때문이다.

 

P69. 상상력과 통찰력이 온전히 결합할 때 문학 속 상상력이 진정으로 드러날 수 있으며 그렇지 않으면 터무니없는 생각이거나 공상, 허튼 생각일 뿐이다.

 

내 제한된 독서 경험 속에서, 신선들이 어떻게 하늘에서 내려오고 어떻게 다시 하늘로 올라가는지를 묘사한 것으로는, 나는 중국 진나라 때 간보가 쓴 <수신기>에 있는 묘사를 첫째로 꼽을 만하다고 본다. 간보가 묘사한 신선은 비가 내릴 때 하늘에서 내려오고, 바람이 불 때 땅에서 하늘로 다시 올라간다.

 

독서를 통해 우리는 신화나 전설 서사든 초현실이나 부조리 서사든, 문학적 상상이 변신을 서술할 때 남긴 차이가 늘 이야기의 주요 실마리이고 이 차이에서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줄거리가 탄생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그 다음 줄거리도 여전히 차이의 공간을 남기기 마련이어서 차이를 숨긴 새로운 줄거리가 계속 탄생하고, 이는 이야기가 끝에 이를 때까지 계속됨을 알 수 있다.

 

이 이야기에서 상상력이 서사의 차이를 만들었다면 그러한 서사의 차이에 활기를 불어넣은 것이 바로 통찰력인 것이다.

 

언젠가 우연히 하이네의 시구를 읽게 되었다. “죽음은 서늘한 밤이다.” 그러자 진즉 사라졌던 유년의 기억이 순식간에 돌아왔는데 깨끗하게 씻은 마냥 또렷했다. 하이네가 쓴 것은 내가 유년 시절 영안실에서 낮잠을 자면서 느낀 것이었다. 그뒤 깨달았다. 이것이 바로 문학이다.

 

나는 문학 작품에서 상상력과 통찰력이 입과 입술처럼 의존하는 것의 중요성을 설명하기 위해 많은 예를 들었다. 이는 동시에 문학에서 위대한 사상은 모두 현실에 근거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나는 여러 차례 이렇게 말했다. 문학에 진정으로 어떤 신비한 힘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다른 시대, 다른 민족, 다른 문화, 다른 환경에 속한 작품에서 우리 자신에게 내재된 감성을 읽도록 하는 것이라고. 문학은 그처럼 미묘하다.

 

어떤 하나의 단락, 이미지, 비유, 대화 등이 독자의 기억 속에 갇힌 어떤 지난 일을 되살리고, 그런 뒤 그것을 기억의 파일과 그림 속에 영원히 보존한다. 이러한 이유로, 문학을 읽음으로써 특정 시기의 특정 경험을 되살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더 많은 시기의 보다 더 많은 경험을 되살릴 수도 있다.

 

상상력의 길이는 모든 경계를 지워버릴 수 있다. 독서와 독서 사이의 경계, 독서와 생활 사이의 경계, 생활과 생활 사이의 경계, 생활과 기억 사이의 경계, 기억과 기억 사이의 경계......삶과 죽음 사이의 경계.

 

삶과 죽음 사이에는 비밀 통로가 있는데, 바로 영혼이다. .....사람과 영혼의 관계란 어떤 경우 삶과 죽음의 관계다. 이것은 거의 모든 문학의 공통된 인식이다. 다른 점은 표현이 다를 뿐이다. 더구나 모든 일과 모든 사물에는 다 영혼이 있다. 예술은 더욱 그러하다.

 

스테판 말라르메는 세 번째 이후에 여자를 꽃에 비유한 천재다. 그가 어떻게 했는지를 보자. 그는 어떤 아름다운 귀부인을 끌어들여 이런 시구를 바쳤다. “모든 꽃은 리지 부인을 꿈꾼다.”

 

어느날 나는 로런스 소설의 한 부분을 읽게 되었고, 그 뜻은 대강 이러했다. 여인이 아름다운 이유는 여자들 몸에서 성적인 것을 짙게 발산하기 때문이다. 여자가 점점 늙어가는 것은 얼굴에 주름이 많아지는 것이 아니라 여자의 몸에서 성이 점점 사라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로런스의 이 말은 내가 그의 작품을 이해하고, 그가 왜 평생 에로스 묘사에 흥미를 가졌는지를 이해하게 했다. 그의 상상력은 성의 영혼을 찾은 것이다.

 

전설에 따르면 백조가 죽음을 맞이하며 부르는 노랫소리가 가장 아름답고 감동적이라 한다. 그래서 서구 미학 전통에서는 최후의 작품이라고 하고, 중국에서는 절창이라 한다.

 

유르스나르는 이 부분에서 감탄이 나오는 묘사를 한다. 링의 머리가 잘리고 나서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갈 때의 묘사인데, 그녀는 이렇게 썼다. “그런데 그의 목은 기이한 붉은 스카프를 둘렀다.” 이는 원래의 링과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링 사이에 생긴 차이를 드러낸 것이자, 비례를 드러낸 것이다. 서사를 합리적으로 만들었을뿐만 아니라 훨씬 힘있게한 것이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 붉은 스카프가 서사에서 대단한 이유는 삶의 죽음의 비례 관계를 드러냈기 때문이고, 이처럼 완벽한 비례의 출현으로 죽은 뒤 다시 살아나는 것이 이처럼 뛰어나게 묘사됐다는 것이다.

 

스트린드베리의 위대한 점이 여기에 있다. 우아하고 아름다워야 할 때 스트린드베리는 시인이다. 거칠고 저속해야 할 때 스트린드배리는 노동자다. 무미건조해야 할 때 스트린드베리는 고도근시 안경을 쓴 회계사다. ......그런 뒤 그는 뭇소리가 웅성거리는 <빨간 방>을 썼다


국왕이 드넓은 영토를 소유하고 있는 것처럼 매큐언이 보여주는 경계의 서사는 드넓은 삶의 감각을 지니도록 했다. 그는 희망을 쓰는 동시에 절망을 썼고, 공포를 쓰는 동시에 안도감을 썼고, 차가움을 쓰는 동시에 따뜻함을 썼으며, 황당함을 쓰는 동시에 핍진함을 썼고, 폭력을 쓰는 동시에 유약함을 썼고, 이성적인 냉정함을 쓰는 동시에 감정적인 충동을 썼다.

 

예를 들어, <가정 처방>은 내가 <북회귀선>을 읽고 나서 쓴 가벼운 풍자적 이야기다. 나는 헨리 밀러에게 감사하는 동시에 일종의 풍자적 사랑 이야기를 써 그를 놀려주었다. 이 이야기는 로스의 <포트노이의 불평>을 차용하기도 했다. <가장 무도회>는 앵거스 윌슨의 <산딸기 잼>을 본떴다. 나는 모든 이야기의 연원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분명 남의 영토를 순시한 뒤 무언가를 몰래 들고 나왔고, 이것을 빌려 내 자신에게 속한 것을 창작하기 시작했다.”

 

문학 천재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독자들이 자기 작품을 읽을 때 독특함에서 출발해 보편에 도달하도록 하는 자다. 매큐언이 바로 그렇다.

문어는 종류가 많게는 650여종에 달한다. 가장 신기한 것은 암수 자색담요 문어의 크기 차이다. 암컷 문어의 체중은 수컷 문어의 4만 배이고, 수컷은 고작 암컷의 눈 크기만 하다. 문어가 서로 사랑하는 것은 깜짝 놀랄 만하다. ‘사랑의 힘이란 말을 자색담요문어에게 쓴다면 인류는 다시 이 말을 쓰는 것이 쑥스러울 것이다.

 

제임스 조이스의 작품에 나오는 묘사가 생각났다. 그는 이렇게 썼다. 더블린의 날씨는 갓난아이의 엉덩이처럼 종잡을 수가 없다. 금방 오줌을 쌌다가 금방 똥을 싼다. (대강의 의미가 이렇다)

 

10여 년 전에, 내가 처음 미국에 갔을 때 미국 노턴 출판사의 이사장 램 선생이 내게 말했다. “언론이 무엇인지 아세요?”

그는 집 소파에 앉아 검지를 펴면서 내게 설명했다. “예를 들어 당신 손가락이 화상을 입었을 때 언론이 보도를 하면 그것은 진짜고, 언론이 보도를 하지 않으면, 그것은 가짜지요.”

 

마이애미의 바닷물을 햇볕 아래서 그 단계가 분명하다. 먼 곳은 신비한 검은 색이고, 가까운 곳은 친근한 녹색이며, 모래사장에 부딪치는 것은 흰색 파도다. 타오르는 불길 때문에 우리는 붉은 색을 열정적인 색이라 생각하고, 겨울의 쌓인 눈 때문에 흰색을 냉정한 색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열정으로 솟구치는 파도를 보면 이것은 바다의 영원히 쉬지 않는 맥박이고, 흰색도 마찬가지로 열정적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내가 해안에서 본 것은 솟구치는 흰색 불꽃이었다.

 

어제 샤킬 오닐이 은퇴를 선언했다. 이 녀석은 거친 덩크슛으로 농구대를 무너뜨렸고, 싸움도 많이 하고 스캔들도 적지 않았으며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고 권투 시합에도 나갔다. 별명을 셀 수가 없고, 문제점도 셀 수가 없다. 하지만 못된 행적투성이인 이 자는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었다. 이 세상에는 다른 종류의 인간도 있다. 그런 사람은 아무런 문제점이 없지만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진 않는다. 아무 문제도 없는 사람과 사귀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전문가란 무엇인가? 우리 네티즌이 답했다. ‘문가라고. (중국어로 전문가는 좐자專家인데 이 자와 벽돌을 뜻하는 이 발음이 같다. 에피쿠로스가 대답했다. “사람에게 자기 고유의 것이란 없다. 자신만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 이외에는.”

 

뜨거운 댈러스와 습한 마이애미를 거쳐 상쾌한 시카고에 왔다. 기온과 마음이 서로 딱 맞다. 파이널 결승의 폭발적인 열정을 경험한 뒤 이제 안정을 찾았다. 생의 한 단락이 이제 끝났다. 완전히 다른 단락의 생이 이제 시작될 것이다. 기나긴 인생을 사람들은 왜 짧다고 느끼는 것일까? 아름다운 생은 하나하나 작은 단락일 뿐이기 때문이리라. 처음 마이애미 아메리칸 항공 센터에 들어서던 때가 기억난다. 우리 가운데 누가 말했다. “나는 내가 부러워.”

 

뉴욕일기.

 

100명의 학생에 수업하는 것이 수업이고, 100개의 의자에게 수업하는 것은 행위예술이다.

 

소수 중국인들은 돈 벌기가 너무 쉬워서 돈을 어떻게 벌었는지를 모른다. 다수 중국인들은 돈 벌기가 너무 어려워서 돈을 어떻게 벌 수 있는지를 모른다.

 

루 앤이 내게 미국에서 1년에 2만 종이 넘는 책이 출판된다고 말해줬다. 10여 년 전에 처음 미국에 왔을 때 미국은 매년 12만 종의 책을 출판했고, 중국은 10만 종을 출판했따. 그뒤 몇 년 동안 중국의 출판 종수는 빠른 속도로 미국을 앞질러, 올해는(2011) 30만 종 이상에 이르렀다.

 

자신의 무지를 알면 완전한 무지가 아니다. 완전한 무지는 자신의 무지를 모르는 무지다.

 

끝까지 말을 마친 뒤 이 토고 출신 여기자는 큰 소리로 웃었다. 그는 토고에 이런 속담이 유행했다고 했다

중국인이 남긴 아이가 남긴 벼보다 많다.”

아프리카에 관한 두 이야기는 그 길은 다르지만 목적지는 같다. 둘 다 중국과 아프리카의 우정 이야기다.

 

자기가 위하이궈의 팔을 잡았는데 힘이 셌던 모양이다. 그런데 위하이궈는 세게 잡았다고 말하는 게 아니었다. 그가 말했다.

내 혈관을 꽉 쥐었어요.”

 

문학 작품의 언어는 자신의 존재를 전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서술의 힘과 정확성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문학의 서사 언어는 눈길이어야 한다. 눈길은 무엇을 보았는지를 위한 것이지, 자신을 전시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눈길의 존재 가치는 보았다는 것이다. 서사 언어는 눈길처럼 생활에서 무언가를 찾고, 독서를 이야기 속 인물과 사상, 감정 속으로 인도한다.

 

중국 전통 미학에 구름을 물들여 달을 표현하는 방법이 있는데, 이를 가지고 서사 언어의 역할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달을 그릴 때는 구름만을 채색하고 달은 그리지 않지만, 사람들이 보는 것은 달뿐이고 구름은 없다. 내 생각에 소설의 서사, 특히 장편소설의 서사에서 언어는 공을 세운 뒤 물러나야 한다.

 

그런데 창작 경험은 내게, 서사의 순결성과 표현의 풍부함 사이에는 영원한 대립이 존재하며, 작가는 시시각각 서사를 보호할지 신선함을 담보할지를 취사선택해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었다. 어떤 경우 둘은 하나로 융합되고, 어떤 때는 물과 불처럼 섞이지 않았다. 통상적인 의미에서 하나의 관점을 찾아 서술하는 소설을 나는 관점 소설이라고 부른다. 이는 왕왕 나머지를 버림으로써 서사의 순결을 선택한다. 그러나 정면 서사의 소설, 내가 정면 소설이라 일컫는 소설의 경우는 그렇게 하기가 힘들다. 그런 소설은 모종의 시대적 특징을 표현해야 하기 때문에 그 시절의 유행어를 회피할 수가 없다. ‘관점소설에서 시대는 영원한 배경이고, ‘정면 소설에서 시대는 현장이다.

 

내 과거 창작을 돌아보면, 내 모든 소설은 서사를 거두어들였는데, <형제>만은 서사를 놓아보냈다.........나는 처음으로 정면으로 다루는 것이 무엇을 초래하는지를 알았다. 당시의 어떤 특징이 더 이상 배경이 아니라 현장일 때는 서사가 나도 모르게 개방되었다.....상권을 쓰면서 나는 서사를 풀어놓으려고 노력을 했지만 서술하는 시대에 지나치게 억눌렸고 서사는 늘 숨을 가누기 힘들었다. 하권을 쓰면서 지금 이 시대로 진입했을 때 내 서사는 마침내 진정으로 이완될 수 있었다. 왜인가? 우리가 방만한 시대에 살고 있어서다. 우리 현실의 황당함과 비교하면 <형제>의 황당함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고, 나는 그것에 집중해 서술했을 따름이다.

 

나는 옌펑의 말에 아주 동의한다. “오늘 우리의 최고의 현실은 바로 초현실이다.”

 

왜 작가의 상상력은 현실 앞에서 늘 창백하고 무력한가. 우리 모든 사람들이 하는 모든 말은 우리 역사와 현실만큼 풍부하지가 않다.

 

나는 오늘을 사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삶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하고, 특히 전혀 모르는 사람의 삶에 관심을 가져야 하며, 이는 다른 사람의 삶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자신의 삶을 더 잘 이애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여러 번 말했다....엘리엇의 시구도 이야기했다. “새가 말한다. 인류는 너무 많은 진실을 견딜 수 없다고.”

 

그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형제> 하권을 좋아하지 않는 이유가, 내가 하권에서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고 난 뒤의 시대를 서술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 말은 나를 뒤흔들었다......

 

갖가지 사회 병폐로 볼 때, 오늘 이 시대는 온갖 마귀가 난무하는 시대다. 나는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이 시대에 나 자신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자문했다. 나 역시 난무하고 있는 것 같다. 나는 그저 작은 마귀일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미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뒤의 생활에 습관이 들어 있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 사실을 인정하고 싶어할까? 나는 <형제> 상권과 하권에서 서술한 두 시대를 겪었다. 나는 내가 왜 이렇게 많은 병폐를 썼는지 잘 안다. 나도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이 세 부분은 간결한 언어를 쓸 방법이 없었다.. 왜냐하면 이것은 죽은 사람의 관점에서 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언어는 절제되고 차가워야 했고, 살아 있는 사람의 생기발랄한 말투를 쓸 수 없었다. 현실을 이야기하는 부분은 살아있는 세계의 지난 일을 쓸 때라야 언어의 온도를 조금 높일 수 있었다. 나는 쓰면서 현실 세계의 냉혹함을 느꼈고, 사납게 썼다. 그래서 따뜻한 부분이 필요했고, 지극힌 선한 부분이 필요했으며, 이는 내게 희망을 주고, 독자에게 희망을 주었다. 현실 세계가 사람들을 실망시킨 뒤 나는 아름다운 죽은 자들의 세계를 쓴 것이다. 이 세계는 유토피아도 아니고, 도화원도 아니다. 하지만 무척 아릅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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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16-06-24 15: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언제 다 읽죠 ㅋ

바진은 저도 무척 좋아하는 소설가에요. 루쉰 선생의 제자인데 문화대혁명 때 엄청난 고생을 했죠. `매의 노래`가 특히나 제 기억에 아직도 남아요. `매의 노래`는 아마 바진이 문화대혁명 때 겪은 고통을 3권의 책으로 냈는데 그 중 한권만 번역된 것으로 알고 있어요.

바진 이후 중국 문학은 손을 대지도 못했네요. 츠바이크도 몹시 좋아하는데 ㅋ 거기도 아직 손 대지도 못하고 ㅋㅋㅋ 아 다 읽고 싶어라 ㅋ

시이소오 2016-06-24 15:57   좋아요 0 | URL
오, 대단하세요. 저는 위화 책 읽다 바진을 첨 들었는데요.
그러고보니 루쉰 전집도 읽다 말았네요.

루쉰은 또 언제 다 읽죠.
독서는 정말 네버엔딩이네요^^

루쉰P 2016-06-24 21:11   좋아요 0 | URL
끝나지가 않아요 ㅋ 공포영화 같아요 ㅋㅋㅋ 전 그래서 마음 접고 덕후가 될려고 준비 중이에요 ㅎㅎㅎ 제 몫까지 시이소오님의 리뷰 기대하겠습니다. ㅋㅋㅋ 즐건 금욜이요 ㅎ

시이소오 2016-06-24 21:27   좋아요 0 | URL
저도 루쉰님의 리뷰 기대하겠습니다.
독서불금 되시길 ㅎ ㅎ

cyrus 2016-06-24 17: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위화가 <첫사랑, 마지막 의식>을 호평하는 내용을 보고서, 이 책을 잘 샀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절판된 책인데,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구입했습니다. 위화의 <제7일>을 두 번 읽었습니다. 두 번 다 읽는데, 눈물을 흘릴 뻔 했습니다.

시이소오 2016-06-24 17:54   좋아요 0 | URL
제 7일도 얼른 읽고 싶네요 ^^

물고기자리 2016-06-24 18: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위화의 산문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를 강추합니다! ㅎ

몸으로 읽는 느낌이랄까, 위화의 인생을 같이 살고 돌아온 것 같았고, 읽었던 소설도 다시 펼쳐보고 싶게 하더라고요.

몇 년 전쯤 중국의 여러 지역에서 모험하듯 머물렀던 적이 있는데, 중요한 일을 앞두고 불신과 신뢰 사이에서 많이 고민했던 기억이 나요. (두 가지를 모두 겪었지만요^^) 이런저런 경험들 때문인지는 몰라도 중국을 이해하는 폭이 더 커진 것 같아서 저는 참 좋았어요.

시이소오 님도 좋아하실 것 같은 게, 중국을 읽으며 우리를 돌아보게 되고 또 작가에게 삶의 경험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통찰하는 능력은, 결국 삶 한가운데를 통과하는 데서 나오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어쩌다 보니 책 리뷰를 여기다 쓰는 것 같아졌어요;; 아무튼 저는 좋았습니다^^

근데 리스트 중에 포크너는 없네요? (시이소오 님 취향이 아니신가요?ㅎ)

시이소오 2016-06-24 20:28   좋아요 0 | URL
사람의 목소리도 읽고 싶네요.
포크너는 무덤간 일화 밖에 안나오길래 뺐습니다. 포크너 팔윌의 빛이 너무 읽고 싶었는데 미번역이라 영문판 도전했다가 끝내 다 못 읽은 기억이나네요.

아, 읽을 책이 너무 많아요.
천국에가서 ㅇ
책을 읽을수 있다면 착하게 살아 천국가고 싶어요.

추천감사합니다 ^^

물고기자리 2016-06-24 21:04   좋아요 0 | URL
저도 포크너는 언젠간 도전해야지 하고 있습니다. 위화도 자기 스승이라고 하고, 제가 좋아하는 작가들이 자꾸 언급해서요ㅎ

책 읽는 천국이라면 진짜 천국이네요^^

시이소오 2016-06-24 21:28   좋아요 0 | URL
저도 포크너 소설 벼르고 있어요 ㅎ ㅎ

alummii 2016-06-25 14: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기있는 책 ..죽기전에는 다 꼭 읽겠어요 ㅎㅎ마지막줄 오타나셨네요 ㅎㅎ

시이소오 2016-06-25 15:57   좋아요 0 | URL
ㅋ 요즘 오타가 잘 안 보여용. ㅋ ^^

 
하루키 씨를 조심하세요 - 편애하는 마음과 인문학적 시선으로 읽는 무라카미 하루키
우치다 타츠루 지음, 김경원 옮김 / 바다출판사 / 2016년 4월
평점 :
절판


야구를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야구를 과연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우치다 타츠루와 이시카와 야스히로는 <청년이여, 마르크스를 읽자>에서 마르크스의 자로 모르는 젊은이들이 마르크스는 정말 대단한 사람이야!”하는 감탄사가 나올 정도로, 마르크스를 쉽게 설명하겠다는 포부를 밝힌다. 어려운 걸 어렵게 설명하는 건 어렵지 않다. 어려운 걸 쉽게 설명하는 건 정말이지 어려운 일이다. 나는 어려운 걸 쉽게 설명하는 사람을 신뢰한다.

 

<하루키씨를 조심하세요>라는 제목을 보고 , 우치다 타츠루가 하루키를 신나게 까겠구나. 재밌겠는걸하고 잔뜩 기대했었으나, 완전 속았다. 이 책은 평론가가 아니라 하루키의 팬의 입장에서 쓴 하루키론이다. 임경선의 <지극히 개인적인>의 일본판이라고 할까.

 

무라카미 하루키는 왜 세계적인 대중성을 얻었는가?’

 

우치다 타츠루에 따르면, 일본에서 위와 같은 물음을 던진 이는 아무도 없었다. 타츠루는 하루키 문학의 위대함에 대해, 여러 각도에서 근거를 제시한다.

 

아주 평범한 주인공의 일상에 불현 듯 사악한 것이 잠입해 들어와 사랑하는 것을 훼손합니다. 그러면 힘없고 왜소한 존재인 주인공이 온힘을 다해 그 침입을 저지하고 사악한 것을 억눌러 세계의 일시적인 균형을 회복한다는 이야기 구조입니다.

 

우치다 타츠루에 의하면, <양을 쫓는 모험>부터 하루키는 세계문학의 정통 계열을 발견한다. 타츠루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하루키 소설을 조셉 캠벨의 영웅의 여정플롯 군으로 분류할 수 있지 않을까. 하루키는 대학 시절 소설보다는 시나리오를 썼다. 따라서 캠벨보다는 크리스토퍼 보글러의 서사 구조가 더 적합할 듯싶다. (‘영웅의 여정의 틀로 분석한다면, 하루키의 소설과 하야오의 애니매이션은 동일한 서사 구조다. )

 

평범한 세계 모험의 소명 소명의 거절 스승(조력자)와의 만남 관문의 통과 시험, 동맹, 적군 동굴로 접근- 고난 보상 귀환 부활

 

하루키의 소설이 조셉 캠벨보단 크리스토퍼 보글러의 이론에 더 적합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보다 근원적인 이유는 아버지때문이다. 우츠다 타츠루는 하루키 소설에 아버지의 부재를 지적한다. ( 유일한 예외는 <1Q84>. 캠벨에게는 시험이후 아버지의 화해의 단계가 있지만 보글러는 동굴로의 접근으로 대체했다.) 라깡 식으로 말하자면 아버지의 자리

 

캠벨의 이론을 가장 충실히 반영한 영화는 알려진대로 조지 루카스의 <스타워즈>.

다스 베이더의 내가, 니 애비다의 충격적인 대사를 환기해보라.

 

무라카미 하루키는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 작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아버지란 생물학적 부모가 아니라 분석적 의미의 아버지, 세계의 질서를 담보하는 자를 가리킵니다. ‘이라고 불러도 좋고 역사를 꿰뚫는 철의 법칙성이라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아버지는 고대에는 이였고, 헤겔에게는 절대정신이었고, 르네상스에서는 이성이었고, 낭만주의에서는 인간이었다..... 현대에는 시스템일 수도 있다.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말했다. , ‘세계의 질서를 담보하는 자가 없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자면 절대적인 가치가 없다는 뜻이다. 니체는 아버지의 자리위버멘쉬, 초인을 놓았다. 하루키는?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에는 사람과 사람의 대립이 없다는 비판이 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거기에는 확실히 무언가가 심하게 결여되어 있다. 그러나 기묘하게 들리겠지만, 무라카미 하루키는 자신의 그 결락을 처음부터 스스로 획득한 것일까?

무라카미 하루키의 결락은 무라카미 하루키에게 귀속시킬 수 있는 그러한 결락일까?

내게는 그가 너무나 민감하기 때문에 일본 사회로부터 순화시킨 형태로 받아들인, 일본 사회에 내재한 결락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 P. 138.

 

우치다 타츠루는 가토 노리히로의 하루키에 대한 위와 같은 비평에 대해, 가장 통찰력 있는 비평이라고 말한다

나 역시 무릎을 쳤다

 

"진실로 예민한 작가는 그의 시대에 과잉으로 존재하는 것에 대해서는 별로 쓰지 않습니다.

.....실로 뛰어난 작가는 그 시대가 심하게 결여하고 있는 대상에 대해, 그것을 결여하고 있다는 것 자체를 의식하지 못하는 대상에 대해, 그것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한다는 사실로 인해 그 시대의 성격이 규정되는 것에 대해, 글을 씁니다. 예컨대 그 사회의 그림자에 대해." 

 

이 대목이 우치다 타츠루의 혜안이 빛나는 부분이고, 하루키를 평가하는 데 굉장히 중요한 분기점이라고 본다. 타츠루는 하루키가 세계적인 지지를 얻을 수 있는 본질적인 이유로, 하루키가 결여한 것을 세계 전체가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공감한다. 공감하는데, 나는 여기서 하루키에 대한 평가가 극과 극으로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루키는 아버지의 자리에 아무것도 놓지 않는다. 하루키의 등장인물들은 우치다 타츠루가 지적한대로 절대적인 가치가 결여되어있다. 시크함,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대한 냉담함’, 혹은 무심함을 특징으로 한다.

 

부조리한 세계에 내던져져 있다는 것은 한마디로 자신이 서 있는 위치를 알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어디에 있는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무엇을 하면 좋은지 알지 못합니다.

 

우치다 타츠루는 존재의 근거가 없는 상황에서 자신의 존재를 의미 있게 만들기 위한 본질적인 물음에 하루키의 대안이 문화적인 눈 치우기라고 말한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니,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내가 나서서 묵묵히 하는 것. ‘공정함’, ‘예의를 지키기.등등 

 

감동적인 분석 아닌가. 그러나, ‘아버지의 부재의 현실이 하루키 소설에선 너무나 매력적으로 묘사된다는 점이 문제다.  재즈음악, 언더락 위스키, 맥주. 섹스. ‘아버지따위 없어도 현실은 잘 만들어진 디저트와 같은 섹스로 충분하다.    아니, 그냥 이대로가 행복하다. 사회의 불평등이나 부조리 따위 신경 쓰고 싶지 않다. 오로지 나와 내 여자, 내 친구만이 중요하다.

 

, 하루키 소설은 자본주의를 즐기며 사회에 무관심한 이들에게 일종의 마취제로 작용한다. 하루키를 읽는 우리는 무심함에 취하고 정신은 마비된다. 이것이 이데올로기가 무너지는 나라마다 하루키가 팔리는 이유다. 일본의 사토리 세대가 떠오르지 않는가. 

 

하루키의 문장은 더더군다나 머리에서 나온 게 아니라 몸으로부터 나온다. 하루키에게 소설을 쓰는 행위는 밥을 짓는 행위나 일종의 달리기다. 머리로부터 나온 문장은 거부할 수 있을지언정 몸으로부터 나오는 문장은 쉽사리 거부할 수가 없다. 더군다나 하루키는 있는 재료를 가지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다.

 

우리는 그 속에 내던져진형태로 이 세상에 태어납니다. 쓸 만한 것은 주어진 것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두 손에 쥐어진 자원을 활용하여 최고의 성과를 내놓는 것, 그것뿐입니다. ”

 

 

하루키 소설 중 <1Q84>를 가장 좋아한다. <1Q84> 만이 아버지가 나오기 때문은 아닐까.

어디로 가야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암울한 시대다. 하루키 문학에 잠시 취해도 좋으리라. 그러나, 그곳에 줄곧 취해 있다 보면 어느새 어둠이 내려앉을 것이다.

경계를 넘어야 한다.

 

 

하루키를 조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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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눈 2016-06-23 0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양을 쫓는 모험>을 읽었을 당시 그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겠어서 하루키 소설 중 가장 재미 없게 읽은 기억만 나는데, 그 책의 발간이 하루키가 세계문학의 계열로 들어선 시점이었군요. 저는 하루키 소설의 주인공들에게서 가족이 배제된 개인주의만을 발견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버지의 부재`는 미쳐 읽어내지는 못했네요.

시이소오 2016-06-23 14:37   좋아요 0 | URL
저도 아버지의 부재에 대해선 고민해 본 적이 없네요 ^^;

루쉰P 2016-06-23 1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루키에 대한 분석이 재밌네요 ㅋ 우리에게 결여됨 것이 하루키에게도 결여되어 있기에 읽힌다는 ㅎ 하루키는 개인적으로 좋아하지만 신비로운 작가에요 ㅋ 저도 하루키가 왜 인기가 좋을까 항상 궁금했거든요 ㅋ

시이소오 2016-06-23 14:41   좋아요 0 | URL
가토 노리히로의 비평, 대단했어요 ^^

moonnight 2016-06-23 1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심하기엔 이미 늦었네요. 호호^^; 보관함에 넣습니다. 하루키 팬으로서 쓴 책 기대됩니다^^

시이소오 2016-06-23 14:42   좋아요 0 | URL
하루키 팬이라면 누구나 재밌게 즐길수 있는 책이랍니다^^

양철나무꾼 2016-06-23 13: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전 오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를 가져왔는데, 이 책도 끌리는걸요~^^
그러게요, 조심하기엔 이미 넘 늦었네요~--;

시이소오 2016-06-23 14:44   좋아요 0 | URL
비교해 읽음 재밌겠네요.
우치다 타츠루, 돚자리
깔아야할듯 ^^

농담같은오늘 2016-06-24 1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재밌지요?^^ 후회없는 선택이었습니다. 시이소오님 리뷰보고 몇권 선택한 책들도 있었는데 다 재미있었어요.ㅎㅎ 감사 한번 드리고 싶었습니다. 전 시이소오님처럼 이렇게 내용 정리가 잘 안돼서 늘 개인적인 감상들만 주절주절하다 끝나네요.ㅋ 오늘도 좋은 리뷰 잘 읽고 갑니다^^

시이소오 2016-06-24 14:15   좋아요 0 | URL
재밌으셨다니, 기분 좋네욤. 농담같은 오늘님 감사합니다 ^^
 

지난 달, 한홍구의 <사법부>를 읽고, 정신이 번쩍 들어 부랴부랴 현대사 책들을 읽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1,2,4, 강준만의 <한국현대사 산책> 1980년대 편, 1,2,3,4, 한승헌의 <재판으로 본 한국 현대사>, 안경환의 <조영래 평전>, 박상률의 <조영래>. 이 책들 전부 리뷰를 쓰고 싶은데 오늘이 반납일이다.

틈나는 대로 사들여야겠다. 역사책들은 의외로 재미있다. 재밌음에도 빨리 읽히진 않는다. 눈으로 읽었다기 보다는 몸으로 읽었기 때문일까. 역사책들은 눈으로만 읽히지 않는다. 심장으로 읽는다. 한 권 한 권 읽을 때마다 기진맥진이다.

 

누가 광주를 안다고 말할 수 있으랴

 

강준만은 말한다. 광주를 머리로 이해할망정 가슴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그러나, 그 이전에 머리로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국민들이 태반이다. 나 역시 예외가 아니다. 책을 읽으며, 나의 무지에 눈물이 찔끔 나온다. 광주 뿐만이 아니다. 이른바 4.19, 4월 혁명에 대해 누가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국민들이 모르니, 뉴라이트, 새누리당, 박근혜 같은 것들이 이승만을 국부라고 떠든다.

 

우리에게는 역사의 죄인이 있다. 우리 역사에서 제일 큰 죄인은 누구일까. 우선 친일파, 분단 세력, 독재 협력 세력이 쉽게 떠오를 것이다. 이승만을 존경하는 사람들에는 여러 유형이 있다. 친일파, 분단 세력, 독재 협력 세력이 거기 포함된다. 이들은 이승만을 살리고 나아가 그를 건국의 아버지’, ‘국부로 만들어 놓을 수만 있으면 역사의 죄인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는 것 같다. 나아가 이승만이 국부가 되면 권력이나 사회적 지위, 기득권을 계속 움켜쥘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는 것 같다.

 

- 서중석, 김덕련,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p8.


우리 헌법에는 3. 1 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 이념을 계승하고라는 구절이 있다. 4. 19, 혹은 4월 혁명이 무엇인가? 이승만의 독재에 항거해 초등학생부터 노인들까지, 그야말로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한 지역이 아니라, 남한의 전 국민이 들고 일어선 혁명이다. 전 세계인이 손에 꼽는 혁명이다. 그런데 이승만이 국부라고?? 4월 혁명을 부정하는 발언이다. 헌법을 부정하는 발언이다. 한 마디로 위헌이다




 

제주 4. 3 항쟁으로 제주 시민 중 10분의 1이 죽었다고 한다. 4. 3 항쟁의 원인은 친일파 경찰들과 이승만의 분단 정책 때문이었다. 학살 주역들은 군인, 친일 경찰, 그리고 서북청년단이다. (이 서북청년단이 박근혜의 비호로 다시 부활했다.) 이승만과 미군정은 해방 이후, 도망친 친일파들을 도로 불러들여 정부 요직의 자리에 앉혔다. 이들이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이후 숱한 국민들을 학살한다.

 

여순 항쟁(박정희는 남로당 프락치로 목숨을 건진다.), 거제 민간인 학살사건, 노근리 학살사건 등 숱하게 많다. 이승만과 미국의 지시로 10만 명에서 50만 명의 국민들이 학살당했다. 전두환의 5.18도 끔찍하지만 이승만 역시 끔찍한 방법으로 잔인하게 국민들을 살해했다.  민간인 학살 사건의 피해자들은 대부분 어린아이, 여자, 노인들이었다. 그런데도 이승만을 국부라고? (민간인 학살의 주역은 11사단이었다. 이들은 1980년 광주에서 또 다시 학살을 자행한다.) 

 

4. 19 때도 5.18 광주 항쟁처럼 계엄군이 들어왔었다. 만일 이승만이 전두환처럼 군인들과 좀 더 밀착된 관계였다면 어쩌면 캄보디아처럼 수 백만 명의 국민이 잔인하게 학살당했을 지도 모른다.

 

김일성은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놈이다. 박정희, 전두환, 이승만같은 독재자 역시 김일성 못지않게 찢어 죽일 놈들이다. 국민들은 단 한 번도 이승만을 뽑아 준 적이 없다.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부정 선거 방법을 동원해 당선되었지만, 온 국민이 혁명을 통해 쫓아냈다. 그런데 국부


김일성을 찬양하면 잡혀간다. 그런데 왜 이승만을 찬양하는 것들을 버젓이 활보하게 놔두는 걸까. 이승만을 찬양한다는 건, 4월 혁명을 부정하는 짓이고 대한민국 헌법을 부정할뿐더러, 이승만이 자행한 국민 학살을 옹호한다는 뜻이다.

 

이승만을 국부라고 말하는 것은 자유가 아니다. 자유란 언제나 타인을 전제로 한다. 사적 영역에서 이승만을 국부라고 떠들 순 있다. 그러나, 공적 영역에서 이승만을 국부라고 주장한다면, 김일성을 찬양하는 이를 처벌하듯 처벌해야 마땅하다.

 

강준만에 따르면, 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언론은 그렇게 타락하지 않았다. 4월 혁명 역시 언론의 도움이 컸다. 75년 이후로 언론은 완전히 기득권에 장악된다. 80년 광주 항쟁이 터졌을 때, 언론의 '대활약'에 힘입어 광주 지역 이외의 국민들은 아무도 몰랐다. 정권에 아부하는 조선일보의 행태를 보면 절로 구토가 치밀어 오른다. 작금의 방송 역시 독재협력세력에 완전히 장악되었다. 2013년도에 <티브이 조선>과 동아일보 산하 <채널에이>에서 5.18 광주항쟁 때 북한군 600명이 투입됐다는 방송을 했다.

 

사실 역사적으로 영남은 호남과 더불어 민주화의 성지로 불릴 만하다. 4.19 혁명의 도화선도 1,2차 마산 의거 때문이었다. 부마사태 역시 10. 26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만일 김재규가 박정희를 쏘지 않았더라면, 박정희는 차지철과 함께 부산, 마산 시민들 수 백만명을 학살했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5.18 이후, 전두환의 영호남 차별 정책과 독재자들의 나팔수인 언론, 방송에 힘입어, 오늘날 영남은 독재협력세력의 충실한 개새끼가 되고 말았다. 영남에 사는 이들은 지금의 새누리당 국부인 이승만이 주도한 민간인 학살로 수 만명의 영남 시민들이 살해당했다는 걸 모르는 걸까. 자신들의 조상을 죽인 살인범들 앞에서 꼬리를 흔들고 있으니, 억울하게 비명횡사한 조상들이 보면 얼마나 기가 찰까.

 

해방 이후 지금까지, 모든 문제는 결국 친일파, 분단 세력, 독재 협력 세력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여러 번 소개된 대로 프랑스는 나치에 협력한 자들을 숙청했다. 한국 역시 반민특위로 숙청하려 했으나, 이승만과 친일파 경찰들에 의해 무산됐다. 한번이라도 과거사를 청산하지 않는다면, 이명박, 박근혜와 같은 친일파, 분단 세력, 독재 협력 세력들의 국민 탄압은 끝없이 반복될 것이다. 고 노무현 대통령이 비리 검찰 뿐만 아니라 친일파들을 정리하려 했었다. 그러다...... 결론은 국민들 누구나 안다.

 

노무현때 만들고 이명박때 폐지된 것들

 

1.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2.일제 강제동원진상규명위원회

3.친일재산조사환수위원회

4.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모든) 정리조사위원회

5.군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

 

한국 현대사엔 실로 끔찍한 순간들이 많다. 친일 경찰들로부터 고문 방법을 전수받은 친일파 경찰들, 중정, 안기부 등등, 어쩜 그리 잔인할 수가 있을까. 이들을 생각할 때 마다, 내가 한국인이라는 게 치욕스럽다. 크리스토퍼 히친스의 <신은 위대하지 않다>를 보면, 히친스가 물고문을 체험한 일화가 나온다. 1분은 버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히친스는 불과 몇 초 만에 포기한다. 그런데 민주화에 투신한 선배들은 어떻게 몇 달간의 고문을 견뎌냈던 걸까. 물고문, 전기고문, 칠성판 고문, 볼펜 고문, 관절 뽑기 등등

 

내가 이 글을 쓸 수 있는 것도, 인간으로 견딜 수 없는 온갖 고문 앞에서도 의연히 민주화에 자신의 온 몸을 내던졌던 선배들 덕분이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시기였다면 나는 이 글 하나만으로 아마 어딘가로 끌려가 고문을 당하거나 맞아 죽었을 거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힘없는 국민을 학살하고 동조한 이들을 생각하면, 나는 내가 한국인이라는 게 끔찍이도 싫다. 그러나, 역사를 돌아보면 그런 자들은 언제나 소수였다. 다수의 한국인들은 총 칼 앞에 굴복하지 않았다. 언급하기 불가능할 정도로 숱한 분들이 힘없고 나약한 국민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내던졌다.

 

조영래 변호사는 이런 유언을 남겼다.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바로 세워라.”

 

우리가 그나마 이 땅에서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은

민주화의 제단 앞에 피를 흘리며 죽어간 이 땅의 선배들 덕분이다.

후손된 도리로서, 비록 가슴으로 이해할 수 없을지언정 머리로라도 역사를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고맙습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공부하겠습니다.

 

독재자 앞에 항거한 대다수 대한민국 국민들을 떠올릴때마다

나는 내가 한국인인 게 자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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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gri 2016-06-22 12: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11사단 장난아니네요. 6.25 행진한단 소리에 정말 기가 찼는데 이승만때부터였는지는 몰랐어요. 제주4.3공원 다녀가면 정말 가슴에서 이승만 묘를 파고 싶다고 ㅡㅡ.

그렇지 않아도 현대사 뭐 읽을지 몰라서 책 검색 하던중이었는데 (교묘한 뉴라이트들이 많아서 고르기가 쉽지가 않아요. )이렇게 목록을 다 불러 놔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시이소오 2016-06-22 12:47   좋아요 1 | URL
서중석의 현대사이야기는 특히나 대화체여서인지 재밌게읽힙니다.

뉴라이트 없었
으면 역사공부 안할수도 있었는뎅, 우리 각하가 역사공부 시키시네요. ㅋ

samadhi(眞我) 2016-06-22 14: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순항쟁입니다. 반란 사건이 아닙니다. 여순항쟁은 조정래, 「태백산맥」을 읽으면 이해하기 쉽지요.

시이소오 2016-06-22 14:16   좋아요 0 | URL
죄송합니다. 용어에 좀 더 신경을 써야겠네요
. 감사합니다. 수정해야겠어요 ^^

samadhi(眞我) 2016-06-22 14:18   좋아요 0 | URL
죄송은요^^; 제가 어설픈 사학과 출신이라서 민감하게 굴었어요. 제 스승님이 여순항쟁 전공이시거든요.

시이소오 2016-06-22 14:22   좋아요 0 | URL
오호, 사학전공이시군요.

앞으로 현대사 좀 갈쳐주세요.

앞으로 삼년간은 현대사 집중적으로 읽으려구요^^


samadhi(眞我) 2016-06-22 14:23   좋아요 0 | URL
전공만 했지 아는 건 없습니다. ㅋㅋ 부끄럽네요.

시이소오 2016-06-22 14:27   좋아요 0 | URL
겸손의 말씀. 우리나라도 알렉시예비치처렁
항쟁마다 증언문학, 목소리문학 하시는분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어요.
^^

samadhi(眞我) 2016-06-22 14: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요. 진짜 잘 모릅니다. 창피할 만큼이요.

시이소오 2016-06-22 14:30   좋아요 0 | URL
필독서라도 추천해주세요 ㅋ

samadhi(眞我) 2016-06-22 15:54   좋아요 0 | URL
한홍구 책 말씀하셨는데 한홍구, 대한민국사(전 4권)는 현대사 공부의 기본이라고 생각해요. 이미 읽어보셨을 수도 있지만요.

시이소오 2016-06-22 15:57   좋아요 0 | URL
읽었습ㄴㅣ다.
대한민국사 리뷰를 써야겠네요.감사합니당~^^

깊이에의강요 2016-06-22 16: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현대사는 관심이 덜 갔었는데...
(아픈 부분이 넘 많아서)
관심 가지고 읽어봐야 겠어요~~^^

시이소오 2016-06-22 16:41   좋아요 0 | URL
강요님, 같이 읽어요^^

깊이에의강요 2016-06-22 16: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녱^^

시이소오 2016-06-22 17:18   좋아요 0 | URL
ㅎ ㅎ ^^

2016-06-24 13: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시이소오 2016-06-24 14:16   좋아요 1 | URL
영성님, 추천하신 책도 읽어보고 싶네요, 감사합니다 ^^
 
우리는 거대한 차이 속에 살고 있다 - 작가 위화가 보고 겪은 격변의 중국
위화 지음, 이욱연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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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책은 실로 짜증스럽다. 나한테 도대체 왜 이러는거냐? 이걸 어떻게 리뷰로 쓰라고? 책을 샀어야 했다. 모든 페이지에 줄을 긋고 싶은 책은 아직도 어떻게 리뷰를 써야 할지 모르겠다. 리뷰를 100페이지 넘게 쓸 수 없지 않은가. 위화는 어떻게 A4지 반 페이지도 안 되는 분량의 일기를 써도 촌철살인의 문장 한 두 개를 박아 넣을 수 있는 걸까.

 

중국과 위화

 

오늘 우리의 최고의 현실은 바로 초현실이다.”

 

위화는 옌펑의 말에 동의한다.

 

위화는 왜 작가의 상상력은 현실 앞에서 늘 창백하고 무력한가. 우리 모든 사람들이 하는 모든 말은 우리 역사와 현실만큼 풍부하지가 않다.”고 말했다. 위화가 겪은 중국 현실의 경험담은 현실이 아니라 초현실처럼 다가온다. 마르케스의 소설 속 한 장면같다. <자무엘 피셔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다>의 낚시 이야기는 분명 경험담이겠지. 위화의 유년 시절, 저수지 물이 배수관을 따라 인근 논으로 흘러가, 점점 저수지 바닥의 개펄이 드러나면, 물고기들이 펄떡 거렸다고. 위화는 고기를 잡는 게 아니라 주웠단다. 이 주운 물고기들로 위화는 물고기 입을 뚫고 끈을 꿰어 아가미 밖으로 나오게 했다. 위화는 마치 탄띠를 차듯 물고기들을 러닝셔츠에 찼다.

 

<농구장에서 축구를 하다>의 이야기도 재밌다. 위화는 루쉰문학원에서 공부했다. 땅덩어리도 넓은 중국에서 왜 그런지 모르지만 운동장은 농구장 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학생들은 농구장에서 축구팀과 농구팀이 동시에 운동을 했다고. 농구 골대 밑이 바로 축구 골대였다. 골대가 너무 작아 대개 공을 맞아야 했으므로 아무도 골기퍼를 하려 하지 않았는데, <개구리>, <붉은 수수밭>으로 유명한 모옌이 골기퍼를 했다지. 위화가 슛을 때리려는 찰나, 모옌은 다른 학생들처럼 도망치지 않았다. 위화는 슛을 때렸고 모옌은 배로 막았다. 중국 현대 작가의 피할 수 없는 외나무 다리에서의 한 장면. 웬만한 월드컵 축구 경기보다 흥미진진하다.

 

문학과 위화

 

최근에 소설가가 쓴 산문을 많이 접했다. 김연수의 <소설가의 일>, 김영하의 <말하다>, <읽다>, <쓰다>, 오에 겐자부로의 <읽는 인간>, 무라카미 하루키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등등. 소설가가 자신이 영향 받은 책에 대해 말할 때, 소설 창작의 비기를 털어놓는 책들은 왜 그런지 전혀 질리지가 않는다. 위화의 <우리는 거대한 차이 속에 살고 있다>도 그러하다.

 

무력감이 든다. 읽어도 읽어도 도무지 나의 무지는 몸 구석구석 달라붙어 있는 나잇살마냥 떨어지려 하지 않는다. 중국이나 중국문학에 대해 이렇게 무지할 수가. 바진? 70년대 말, 중국에선 서점에서 책 쿠폰을 받아야 책을 살 수 있었다고 한다. 책 쿠폰으로 두 권밖에 살 수 없었는데, 위화가 산 책이 바진의 <>. 위화가 시대와 작품의 관계에 관심을 갖게 된 첫 작품이라고.

 

모든 사람은 그가 속한 사회에 책임이 있다. 그 사회의 병폐에 대해서도 역시 그러하다.”


- 헨리크 입센

 

소설가이기 전, 치과의사였던 위화는 시대와 사회의 문제를 간과하지 않는다. 그 외에도 위화는 자신이 좋아하는 여러 작가의 책에 관해 들려준다. 포크너, 하진, 렌츠, 이언 매큐언, 스트린드 베리 기타등등. 이언 매큐언은 <속죄>로 유명하긴 하지만 대표작은 역시나 <첫사랑, 마지막 의식>이 아닐까. 재독해야겠다. 아직까지 하진의 책을 읽지 못했다니, 스트린드베리도. 아으.

 

소설가의 두 가지 유형

 

내 생각에 작가는 서사 차원에서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첫째 유형의 작가는 여러 해 동안의 창작을 통해 자신의 성숙한 서사 체계를 세우고, 이후의 창작에서는 그 스타일의 서사를 계속 끌고 가면서 다른 제재라도 그 체계 속에 수용하는 작가다.

 

둘째 유형의 작가는 성숙한 서사 체계를 세우자마자 자기의 가장 자신 있는 서사 방식이 새로운 제재를 처리하는 데 적절치 않다는 것을 발견하는 경우다. 그렇게되면 그는 새로운 제재를 표현하기에 가장 적합한 서사 방식을 찾아야 하고, 그러한 작가의 서사 스타일은 늘 변하기 마련이다. 나는 두 번째 유형의 작가다.

 

지금의 내 창작 원칙은 이렇다. 어떤 제재가 나를 충분히 흥분시키고 오랫동안 창작해나갈 욕망을 불러일으킬 때 내가 가장 먼저 할 일은 그 제재에 가장 적합한 서사 방식을 찾는 것이고 동시에 스스로 과거의 창작에서 익숙해진 서사 방식을 잊으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가장 적합한 서사 방식을 찾는 것을 방해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나는 제재가 다르면 표현 방식도 달라야 한다고 굳게 믿는 까닭에 내 서사 스타일은 늘 변화할 수밖에 없다.

 

우치다 타츠루의 <하루키를 조심하세요>를 읽고 있다. 우치다 타츠루의 하루키 논을 받아들인다면 하루키는 위화와 달리 첫 번째 유형의 소설가다.

 

상상력과 통찰력

 

위화에 따르자면, 상상력만으로 소설이 되지 않는다. 상상력은 통찰력과 결합할 때라야 문학으로서 가치를 지닌다. 상상력이 서사의 차이를 만든다. 통찰력은 상상력이 만든 서사의 차이에 활기를 불어 넣는 것이다. 위화는 상상력과 통찰력을 설명하기 위해 여러 예를 든다. 이오의 그리스 신화, 비가 올 때 나타나고 바람이 불 때 사라지는 간보의 <수신기>의 신선 등. 그러나, 가장 인상 깊은 대목은 유르스나르의 소설을 예로 들 때다.

 

유르스나르는 이 부분에서 감탄이 나오는 묘사를 한다. 링의 머리가 잘리고 나서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갈 때의 묘사인데, 그녀는 이렇게 썼다. “그런데 그의 목은 기이한 붉은 스카프를 둘렀다.이는 원래의 링과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링 사이에 생긴 차이를 드러낸 것이자, 비례를 드러낸 것이다. 서사를 합리적으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훨씬 힘 있게 한 것이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 붉은 스카프가 서사에서 대단한 이유는 삶의 죽음의 비례 관계를 드러냈기 때문이고, 이처럼 완벽한 비례의 출현으로 죽은 뒤 다시 살아나는 것이 이처럼 뛰어나게 묘사됐다는 것이다.

 

위화의 말대로 감탄스러운 묘사다. 유르스나르는 링이라는 인물의 죽기 전과 부활 후의 차이를 단 한 문장의 묘사로 압축했다.

 

삶과 죽음 사이

 

위화에 따르면 삶과 죽음 사이에는 비밀 통로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영혼이다.

 

삶과 죽음 사이에는 비밀 통로가 있는데, 바로 영혼이다. .....사람과 영혼의 관계란 어떤 경우 삶과 죽음의 관계다. 이것은 거의 모든 문학의 공통된 인식이다. 다른 점은 표현이 다를 뿐이다. 더구나 모든 일과 모든 사물에는 다 영혼이 있다. 예술은 더욱 그러하다.

 

전설에 따르면 백조가 죽음을 맞이하며 부르는 노랫소리가 가장 아름답고 감동적이라 한다. 그래서 서구 미학 전통에서는 최후의 작품이라고 하고, 중국에서는 절창이라 한다.

 

와이프가 TV를 샀다. 와이프 따라 최근에 SBS <신의 목소리>를 봤다. (한 때 나도 한 노래 했었는데) 참 노래 잘하는 사람들 많구나. 아무리 일반인이 노래를 잘 하더라도 프로 가수의 노래에 비하면 무언가 부족해 보인다. 위화의 관점을 따르자면 내가 보기엔 아마추어의 노래에 경우, 대개 영혼이 없다. 아무리 기교가 뛰어나고 고음 처리가 완벽하다 하더라도 한마디로 감동이 없다. ‘절창이 아닌 것이다. 반면 박정현의 <사람들은 모두 변하나봐>는 감동적이다. 박정현의 노래는 사람들이 나이를 먹고 변할 수밖에 없는 현실, 가사의 의미를 청취자에게 돌려준다. 음악에 젖어 있다 보면 저절로 눈물이 찔끔거린다. 박정현의 노래는 절창이다.


문학에 진정으로 어떤 신비한 힘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다른 시대, 다른 민족, 다른 문화, 다른 환경에 속한 작품에서 우리 자신에게 내재된 감성을 읽도록 하는 것이라고. 문학은 그처럼 미묘하다.

 

음악이든 문학이든 예술이란 결국 내 안에 내재된 감성을 일깨우는 게 아닐까. 이제 예쁜 여인을 꽃이라 부르는 건 영혼이 없는 묘사다. 말라르메는 자신이 사랑하는 귀부인을 끌어들여 이렇게 표현했다.

 

모든 꽃은 리지 부인을 꿈꾼다.”

 

문학에서의 언어.

 

여러 작가들이 문학에서의 언어의 아름다움 보다는 서술의 정확성을 중시했다. 그 중에 위화가 예로 든 구름과 달의 비유는 가히 압권이다.

 

문학 작품의 언어는 자신의 존재를 전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서술의 힘과 정확성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문학의 서사 언어는 눈길이어야 한다. 눈길은 무엇을 보았는지를 위한 것이지, 자신을 전시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눈길의 존재 가치는 보았다는 것이다. 서사 언어는 눈길처럼 생활에서 무언가를 찾고, 독서를 이야기 속 인물과 사상, 감정 속으로 인도한다.

 

중국 전통 미학에 구름을 물들여 달을 표현하는 방법이 있는데, 이를 가지고 서사 언어의 역할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달을 그릴 때는 구름만을 채색하고 달은 그리지 않지만, 사람들이 보는 것은 달뿐이고 구름은 없다. 내 생각에 소설의 서사, 특히 장편소설의 서사에서 언어는 공을 세운 뒤 물러나야 한다.

 

스포츠와 위화

 

위화가 이토록 스포츠 광 일 줄은 몰랐다. 남아공에 가서 월드컵을 직접 관람하고, 미국에서는 오로지 NBA 농구를 보기위해 미국의 전 도시를 여행할 정도라니. 촌철살인의 문장들이 대개 농구 여행에 관한 일기에 몰려 있다. 왜 일까. 한 가지 예만 들어볼까.

 

뜨거운 댈러스와 습한 마이애미를 거쳐 상쾌한 시카고에 왔다. 기온과 마음이 서로 딱 맞다. 파이널 결승의 폭발적인 열정을 경험한 뒤 이제 안정을 찾았다. 생의 한 단락이 이제 끝났다. 완전히 다른 단락의 생이 이제 시작될 것이다. 기나긴 인생을 사람들은 왜 짧다고 느끼는 것일까? 아름다운 생은 하나하나 작은 단락일 뿐이기 때문이리라. 처음 마이애미 아메리칸 항공 센터에 들어서던 때가 기억난다. 우리 가운데 누가 말했다. “나는 내가 부러워.”

 

 

문학 천재란 무엇인가? 위화에 따르면, 그것은 바로 독자들이 자기 작품을 읽을 때 독특함에서 출발해 보편에 도달하도록 하는 자. 그 예로 이언 매큐언을 들었다. 그러나, 위화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 위화의 글은 언어의 온도가 높다. 따라서 독자인 우리도 약간이나마 따듯함을 느낄 수 있다

나는 위화가 부럽다

 

이 세 부분은 간결한 언어를 쓸 방법이 없었다.. 왜냐하면 이것은 죽은 사람의 관점에서 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언어는 절제되고 차가워야 했고, 살아 있는 사람의 생기발랄한 말투를 쓸 수 없었다. 현실을 이야기하는 부분은 살아있는 세계의 지난 일을 쓸 때라야 언어의 온도를 조금 높일 수 있었다. 나는 쓰면서 현실 세계의 냉혹함을 느꼈고, 사납게 썼다. 그래서 따뜻한 부분이 필요했고, 지극힌 선한 부분이 필요했으며, 이는 내게 희망을 주고, 독자에게 희망을 주었다. 현실 세계가 사람들을 실망시킨 뒤 나는 아름다운 죽은 자들의 세계를 쓴 것이다. 이 세계는 유토피아도 아니고, 도화원도 아니다. 하지만 무척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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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21 20: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6-21 21: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syo 2016-06-22 0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이소오님이 이렇게까지 격찬하시는 모습은 오랜만이네요.
어떤 책인지 엄청 궁금해집니다.

시이소오 2016-06-22 02:16   좋아요 0 | URL
저는 항상 격찬을 하지 않나요? ㅎㅎ

syo 2016-06-22 02:39   좋아요 0 | URL
격하게 까시는 건 왕왕 본 기억이 납니다! ㅎㅎㅎ
제 기억이 너무 임의적인가봐요 ㅠ

시이소오 2016-06-22 04:16   좋아요 0 | URL
ㅋㅋ 다들 그렇게만 기억하시더라구요.


제 별점 통계를 보면 별이 네 개 넘는데요. ㅎㅎ

희망찬샘 2016-06-22 07: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이소오님 글 읽다보면 덩달아 조금 알게 되어 좋아요. ^^ 도대체 언제 읽고 언제 생각하시고 언제 쓰실까요?! 감탄!

시이소오 2016-06-22 08:23   좋아요 0 | URL
희망찬샘님, 좋으시다니 저도 좋네요 ㅎㅎ

2016-06-22 10: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6-22 13: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6-22 14: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6-22 15: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6-22 16: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6-22 21: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깊이에의강요 2016-06-22 2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짜증날 정도로 좋은 책이라니ㅇㅇ

시이소오 2016-06-22 21:42   좋아요 0 | URL
위화 왕짜증이요
ㅎ ㅎ

2016-06-27 18: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6-27 18: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시이소오 2016-06-27 19:22   좋아요 0 | URL
확인했습니다. 감사합니다. ^^

2016-06-28 11: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6-28 15:02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