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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하 평전 (양장) - 개정판
김삼웅 지음 / 시대의창 / 2012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얼마 전 유병언의 시신이 부패된 채로 발견되었다. 정부에선 유병언의 시신이 맞다고 우겨대지만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국민은 아무도 없다. 현역 치과의사는 주장한다. 담배를 피지 않는 유병언 치아에 니코친이 끼어 있을 순 없다고.

 

마찬가지로 장준하 선생이 산에서 추락사 했다는 걸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두 번에 걸친 <장준하 의문사 위원회>는 비록 결정적인 물증을 찾아내진 못했지만 적어도 추락사가 아닌 것만은 분명히 밝혀냈다. 추락사 당한 시신에 아무런 외상이 없을 순 없다. 그렇다면 장준하 선생은 왜 살해당해야만 했을까?

 

현대사의 선각자 중에서 장준하 선생만큼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온 이도 드물 것이다.

 

장준하는 일제 강점기 때 부러 일본군에 지원, 마음이 맞는 일행들과 목숨을 건 탈영을 감행한다. 그는 갖은 고생 끝에 제비도 넘지 못한다는 파촉령을 넘어 꿈에 그리던 임시정부가 있던 중경에 도착한다. 목숨 걸고 임시정부를 찾아간 장준하를 맞아들인 건 임정의 파벌싸움이었다.

 

일군에 가면 항공대에 들어가 중경폭격을 자원, 이 임정청사에 폭탄을 던지고 싶다. 선생님들은 왜놈들에게 받은 설움을 다 잊으셨는가. 그 설욕의 뜻이 살아 있다면 어떻게 임정이 이렇게 분열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이곳을 찾아온 것은 조국을 위한 죽음의 길을 선택하러 온 것이지, 결코 여러분의 이용물이 되고자 이를 악물고 헤매여 온 것은 아니다.”

 

임시정부 체류 3개월 후, 그는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에 지원, 고된 훈련을 이겨내고 정식 대원으로 선발, 목숨을 각오하고 서울 침투 작전에 지원한다. 이범석 장군을 대장으로 장준하, 김준엽, 노능서, 이계현, 이해평등 5명의 한국인과 미군 측 22명이 탑승한 비행기가 814일 새벽 4시에 서안비행장에서 이륙한다. 이륙 6시간 40분 후 회항명령이 떨어졌다. 결국 장준하 선생은 18일 오후 3시경에 여의도 공항에 착륙했다. 그보다 이틀 전에 일본이 항복했다. (광복군이 815일 이전에 서울 침투 작전이 성공했다 하더라도 미군정에 의해 남북이 갈라져야 했을까?)

 

광복 이후 장준하는 백범 김구 선생의 비서로 활동했으며, 시대의 양심인 <사상계>를 간행한다. 그는 신성 중학교 때 은사였던 함석헌 선생을 필자로 모셔 와 그야말로 대박을 터트리기도 한다. 이승만 독재 정권기에 선생은 반이승만 투쟁을 이끌었다.

(후대의 사람들은 <사상계>4.19의 도화선이었다고 평하기도 했다.)

 

장준하는 이후 이승만 독재정권을 종식시킨 5.16 군사쿠데타를 지지한다. 박 정희가 정권을 차지할 거라고는 미처 예상 못한 것이다. 박정희의 독재가 시작되자 장준하 선생은 살해당하기 전까지 독재자와의 끊임없는 싸움을 지속해 나간다.

 

박정희가 일본군 장교였다면 장준하는 광복군 장교였다.

빨갱이였다 동료들을 배신해 살아남은 박정희로서는 <사상계>를 통해 연일 자신의 과거를 폭로하는 장준하야말로 눈엣가시였을 뿐더러, 장준하 앞에만 서면 쪼그라드는 자신의 열등감을 참을 수 없었을 것이다.

 

1966년엔 삼성이 사카린을 밀수한 것이 폭로되면서 장준하는 박정희란 사람은 우리나라 밀수왕초다라는 발언으로 국가원수 모독죄로 체포되기도 했었다.

 

장준하는 개헌청원 100만인 서명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무려 열흘 만에 30만 명이 서명에 참여했다고 한다. 오늘날처럼 인터넷으로 서명을 받는 게 아니라 일일이 손으로 서명을 받았다는 걸 고려해보자면 실로 놀라운 성과다.

 

이에 박정희는 긴급조치 1,2호를 선포해 곧장 장준하를 잡아들여 징역 15년을 선고한다. 그러나, 장준하의 병이 악화되어 옥중에서 죽어 장준하가 민주화의 영웅이 될까 무서운 박정희는 그를 풀어준다. 장준하는 굽히지 않았다. 풀려나자마자 197518, 그는 박정희에게 장문의 공개서한을 보내, 비열하고 음흉한 탄압정책을 그만두라고, 일인 독재체제 강화를 위한 유신헌법을 철회할 것을 촉구한다.

 

오죽했으면 박정희가 장준하 때문에 대통령 못해먹겠단소릴 내뱉었을까?

 

그해 817일 장준하 선생은 포천 약사봉 계곡에서 의문의 시체로 발견된다. 이 사건에서 의문점은 너무나 많아서 여기선 굳이 언급하지 않겠다. 단지 초등학생의 지력만 있더라도 사고사가 아니라 타살임을 알 수 있을 것이라는 점만 밝혀두자.

 

한 가지 짚어둘 점은 인근 군 부대에서 장준하의 사고현장에 도착한 시간이 오후 530분이었다고 하는데, 오후 1시에 장준하의 집으로 의문의 전화가 걸려왔다는 것이다.

전화를 건 사람은 장준하의 아들에게 장선생이 산에 올라갔다가 떨어졌으니 서울에서 사람들이 많이 와야 모셔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누굴까? 혹자는 이 전화의 주인공이 김재규일 것이라 추측하기도 한다.

 

만일 장준하 선생이 암살당하지 않고 김재규와 손을 잡았더라면 역사는 또 어떻게 변했을까? 대부분 군인 장성들은 광복군 출신인 장준하 선생을 존경했었다고 한다.

 

장준하의 죽음을 누군가 민주주의의 한 소절이 묻힌다고 말했다.

 

내년 이맘이면 장준하 선생 사후 40주기가 되건만, 평생의 악연인 박정희의 딸이 대통령이 된 작금의 대한민국을 보면 무덤속의 선생은 무슨 말을 할까?

아니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장준하 선생의 좌우명은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였고,

그는 자신의 좌우명에 투신한 삶을 살았다.

 

장준하 선생의 삶을 회고하며

오늘날 우리의 삶을 살펴보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2014816일에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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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6-11-07 11: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광복군 영웅은 살해당하고, 일본군 장교는 신화가 되고... 참.. 이게....

시이소오 2016-11-07 12:12   좋아요 2 | URL
딸내미는 접신하려구 발악이구요 ㅋ

짜라투스트라 2016-11-07 12: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참 슬픈 현실입니다ㅜㅜ

시이소오 2016-11-07 12:45   좋아요 0 | URL
지금도 참 그러하죠 ^^;

마립간 2016-11-07 14: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이종찬 장군은 스스로를 부끄러워 하면서
이승만 정권의 군투입을 반대하며 <육군본부 훈령 제217호, 육군장병에 고함>를 작성했는데,
그 초안자가 `박정희`인 것도 또한 아이러니죠.

시이소오 2016-11-07 14:38   좋아요 0 | URL
그래도 박근혜 애비는 말은 할줄 알았네요.

2016-11-07 14: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1-07 14: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6-11-07 16: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박근혜 두 번째 사과문 발표 이후로 60대 이상 국민의 지지층이 반등했다고 합니다. ‘못난 조상’이 되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

시이소오 2016-11-07 16:28   좋아요 0 | URL
바크네를 위한다면 치료를 받게 해야죠 ^^;

mira 2016-11-08 0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는 후대에 못난 조상으로 남겠군요 사이비대통령을 뽑았다고 ,부끄럽네요

시이소오 2016-11-08 11:59   좋아요 1 | URL
이번에 박근혜 지지하신 분들 중에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분들도 많더군요.

박근혜 게이트를 계기로 보다 더 나은 사회를 만들수만 있다면 그것도 나름 의미 있는 일이 아닐까요? ^^

고양이라디오 2016-11-09 16: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ㅠㅠ 저는 과거에 순진하게도 이 땅에 민주주의와 정의가 들어섰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한국의 근현대사와 현재에 무지했을때요. 역사를 장준하선생을 교과서에서 배우게 해야합니다!!

민주주의 운동은 끝없는 투쟁의 과정이며 현재도 계속되고 있음을 몰랐습니다.

시이소오 2016-11-09 17:27   좋아요 1 | URL
고양이라디오님 말씀대로 민주화는 아직도 이땅에서 진행중이죠.

저 역시 어릴땐 역사에 너무 무지했어요. 같이 계속 공부하자구요 ^^

고양이라디오 2016-11-09 21:47   좋아요 0 | URL
역사는 정말 바로 알아야되요ㅠ 아직 모르는 부분이 많습니다. 같이 계속 공부해요ㅎ

시이소오 2016-11-10 23:11   좋아요 0 | URL
요즘 교육부가 최순실 교과서를 국정교과서 만든다고 발악중이라죠. 국민들이 올바른 역사교육의 중요성에 관심을 가져야겠습니다. ^^

애니맨 2016-11-13 2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청와대 공주님 제발 사라지세요. 모든 친일파는 단두대로

2016-11-14 16: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1-14 17: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1213 2016-11-15 0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박정희 김대중 친일파는 재평가가 시급합니다
 
바람 없는 천지에 꽃이 피겠나 - 김재규 평전
문영심 지음 / 시사IN북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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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1026, 안중근은 이토우 히로부미를 쏘아 죽였다.

그로부터 70년 후, 19791026일 김재규는 다카기마사오를 쏘아 죽인다.

 

안중근은 영웅이 됐지만 김재규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아직 갈피를 못 잡고 있다.

김재규는 영웅인가? 역적인가?

 

김재규는 박정희를 왜 쏘았을까?

 

 

19791017, 유신 선포 7주년 기념행사가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렸다.

 

하루 전, 부산에선 학생들이 <민주구국투쟁선언문>을 낭독했다.

 

한민족 반만 년 역사 위에 이토록 민중을 무자비하고 철저하게 탄압하고 수탈한 역사적 지배집단이 있었단 말인가. 모든 경제적 모순과 실정을 노동자의 불순으로 뒤집어씌우고 협박, 공포, 폭력으로 짓눌러왔음을 YH사건에서 본다. 타율과 굴종으로 노예의 길을 걸어 천추의 한을 맺히게 할 것인가, 아니면 박정희와 유신과 긴급조치 등, 불의와 날조와 악의 표본에 의연히 투쟁함으로써 역사 발전의 장도에 나설 것인가?”

 

학생들은 거리로 뛰쳐나와 시민들과 합세하여 시위를 벌이고 마산에서의 시위로 까지 번졌으니, 우리가 익히 들은 <부마사태>의 시작이었다김재규는 부마사태를 직접 눈으로 보고 와 박정희에게 보고한다.

 

각하, 제가 시위대 속에 직접 들어가서 시위대의 성분을 체크하고 왔습니다. 노동자도 있지만 사무직 종사자들도 있고 상인들도 있습니다.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시위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시위대가 밀리면 시민들이 음식을 날라다주면서 격려하고, 쫓기면 숨겨줍니다. 시위대와 시민이 완전히 한 몸입니다.”

 

박정희는 이렇게 말한다.

 

만약 4.19때처럼 서울에서 데모가 크게 나면 내가 직접 발포 명령을 내리겠어. 그때는 최인규나 곽영주가 발포 명령을 내렸으니까 총살됐지, 대통령인 내가 발포 명령을 내리는데 누가 나를 총살시키겠어, 안 그래?

 

차지철이 박정희를 거든다.

 

캄보디아에서는 300만 명을 쏴 죽이고도 까딱없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폭동이 일어나면 한 100만 명이나 200만 명 처치하는 게 무슨 문제겠습니까? 각하께 불충하고 빨갱이들하고 똑같은 소리나 하는 놈들은 이 차지철이가 탱크로 다 밀어버리겠습니다.”

 

차지철의 말에 다카기 마사오는 심히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고 한다.

 

 

김재규의 변호를 맡은 변호사는 강신옥 변호사였다. 강신옥 변호사를 대면한 김재규는 강신옥 변호사를 잘 알고 있었다고 말한다5년 전, 1974년 민청학련 사건 때 강신옥은 변호를 맡았고 당시 김재규는 중앙정보부 차장이었다.

아무 죄 없는 젊은이들을 빨갱이로 뒤집어씌워 인간에게 가할 수 있는 모든 고문을 총동원해 조작한 사건이 바로 인혁당 사건이다.

 

197548일 대법원 상고가 기각된 지 만 하루가 안 된 20시간 만에, 사형선고를 받은지 20시간 만에 김용원, 도예종, 서도원,송상진,여정남,우홍선,이수병,하재완등이 사형을 당했다. 명백한 사법살인이었다.

(이 군법회의의 판결을 박근혜 대통령은 대선전에 법이 그랬으면 맞을 것이라고 말했다.)

 

인혁당 사건은 19883, 148개월 만에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았음에도 박근혜는 이 판결은 인정하지 않고

1975년 판결이 옳다고 말한 것이다.)

 

인혁당 사건은 세계 사법 사에 길이길이 기록될 업적을 쌓았다.

 

1. 기소자들의 선고형량 합계가 1650년이나 되어 단일 사건으로 최대.

2. 변호사가 법정에서 변론 도중 끌려 나간 전무후무한 재판.

(강신옥 변호사를 끌어낸 게 중앙정보부 요원들이었다.)

 

인혁당 사건에 대해 스위스 제네바에 본부를 둔 국제법학자 협회는 그날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했다.

 

세계 법학자들이 사법사상 암흑의 날이라 말했건만 한 나라의 대통령 후보자는 법이 그랬으면 맞을 것이라고 말했다(아가x를 확 찢어xxxxx 이 개 xx x!!!!)

 

 

그때부터 제가 정말 유신체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더 강하게 품게 됐습니다.

그 민청학련 사건 이후에.”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에도 김재규의 저격의도를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김재규는 유신정권 중앙정보부장이었으니까. 강신옥 변호사 역시 김재규에 대한 감정이 좋을 리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김재규의 주장에 따르면 이번이 네 번째 시도였다.

 

1974914일 건설부장관 임명장을 받을 때

1975년 정월 27일 대통령 초도 순시 때.

19794, 궁정동 만찬 때.

그리고 19791026일 마침내 거사를 실행한 것이다.

 

김재규는 차치하고 김재규의 부하였던 박선호, 박흥주, 이기주, 유성옥, 김태원은 사형이란 판결에 억울하지 않았을까?

 

김재규를 원망할 수도 있었을텐데 이들은 죽음 앞에서도 김재규에 대한 존경심을 내려놓지 않았다.

 

박선호는 아내가 보낸 성경 속에서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라는 구절을 되뇌이며 담담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박흥주는 살고자 했다면 살 수 있었을 테지만, 김재규를 배신하라는 회유를 받아들이지 않고 죽음을 택했다.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그의 딸들은 아빠 냄새 난다고아빠가 늦는 날이면 아빠 옷을 끌어안고 잘 만큼 아빠를 사랑했다고 한다그런 딸들을 두고 가야 했으니.....

 

박흥주는 사형 당일, 평소에 좋아하는 시편을 펼쳤다. 다음 구절이 눈에 들어왔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

<시편 5015>

 

박흥주는 사형직전 눈을 가리지 않았다. 12명의 헌병들이 사격자세를 취하자

그는 큰 소리로 외쳤다.

 

대한민국 만세! 대한민국 만세!”

 

김재규는 다카기 마사오를 왜 쏘았는가.

 

한마디로 자유민주주의의 수호를 위해서라고 볼 수 있다.

유신체제는 박정희만을 위한 독재정권에 불과했으므로.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세 가지 원인을 들 수 있다.

한 가지는 정치적인 것이고 두 가지는 개인적인 것이다.

 

1. 부마사태.

 

분명 박정희는 자신이 직접 발포 명령을 하겠다고 말했다.

차지철은 백만 명, 이백만 명 죽여도 문제가 안 된다고, 탱크로 다 밀어버리겠다고 말했고,

박정희는 흐뭇해했다.

김재규가 보기에 이건 애들 허풍이 아니다. 그가 지켜본 바로 박정희는 충분히 학살을 실행할 만한 도살자였다. 차지철 역시

 

만일 그가 박정희를 죽이지 않았더라면 부산, 마산에선 광주보다 더한 살육이 벌어졌을 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부산, 마산 사람들이 새누리당을 밀어주고 도살자의 딸을 지지하고 있는 현실은 그야말로 아이러니하다.

 

2. 여탐

 

박선호는 한 달에 적어도 열 번 이상 궁정동 모임을 준비해야 했다. 당시 연예인 중에 궁정동 안가를 안 거쳐 간 사람은 없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연예인뿐만이 아니었다. 박정희는 일반인들도 눈에 띄는 대로 끌고 와 강간했다. 중앙정보부라는 국가기관이 동네 양아치마냥 여자들을 닥치는 대로 끌고 와 두목한테 상납한 것이다. 박선호는 후에 채홍사의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다고 말했다. 선비 타입인 김재규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3. 박근혜와 박지만

 

박정희 아들인 박지만은 육사 생도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짓거리를 하고 돌아다녔다고 한다. 김재규는 박정희에게 박지만의 행실에 대해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김재규는 박근혜가 명예총장, 최태민이 총재에 있는 구국여성봉사단을 조사해 박정희에게 보고를 올렸다. 최태민은 사이비 이단 교주로서 1974년부터 태자마마를 자칭하던 사기꾼이다. 최태민은 박근혜의 이름을 팔아 온갖 부정부패를 저지르고 있었지만 박정희는 정보부가 이런 것 까지 간섭하냐며 불쾌해 했다고 한다.

강직한 김재규의 입장에선 박정희 자식들의 부정부패를 눈뜨고 봐주기 힘들었을 것이다.

 

 

역사에 만일은 없다. 그렇지만 생각을 막을 순 없다.

만일 김재규가 박정희를 죽이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국민들이 나서서 민주주의를 회복했을까?

 

나는 김재규가 거사를 하는 바람에 신군부가 집권하고 민주주의가 후퇴했다고 생각했었다.

 

참 답답한 이야기요. 김재규가 박정희를 죽이지 않았으면 얼마나 끔찍한 일이 벌어졌을지 아무도 몰라요. 광주항쟁이나 4.19때보다 더한 희생이 따랐겠지. 전두환의 신군부는 어떤 식으로든 정권을 탈취하려고 덤볐을 테고, 12.12 사태 이후에 군인들은 물론이고 여당 정치들인, 기업인들이나 대학교수까지 전두환 밑에 줄 서기를 했어요. 역사가 왜곡된 것은 김재규 탓이 아니고 박정희가 죽고 나서도 유신 세력들을 몰아내지 못한 정치인들과 국민들 탓이지요.

 

광주시민들을 학살하고도 여전히 뻔뻔스럽게 살아있는 전두환과 노태우를 보면 맞는 말인 듯싶다.

 

 

김재규와 부마사태 때 국밥집에서 만났던 사람은 노인이 되어 그의 무덤을 찾았다.

 

저는 압니더. 얼라 씻겨주는 거 보고 알았심더. 그분은 나쁜 사람 아니라예. 죽기 전에 꼭 한 번 와봐야겠다 싶어서 벼르고 벼르다가 요번에 왔심더. 참말 가심이 아픕니더. 오죽했으면 대통령을 직일 맘을 먹었겠십니거? 김 장군이 그카지 않았시믄 광주 사람덜 대신 우리 부산 사람덜이 다쳤을지도 모르지예.

 

김재규의 고향은 경상도 구미다.

그의 추모비를 세운 건 경상도 사람들이 아니라 광주 전남지역의 재야인사 모임인 송죽회였으니, 역사의 아이러니다. 적어도 경상도 사람들은 자신들의 가족들을 총칼로 학살 했었을 살인마들에게 투표하는 대신, 김재규의 무덤 앞에 국화 한송이라도 바쳐야 하는 거 아닌가?

 

김재규는 국민 여러분, 민주주의를 마음껏 만끽하십시오.”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

그는 정말 자유민주주의를 위해 박정희를 쏜 것일까?

김재규를 믿지 못하는 학생들에게 함세웅 신부는 말했다.

 

누가 박정희를 쏘았나? 자네가 쏘았나? 아니면 자네가? 아니면 내가 쏘았나? 아니야. 김재규가 쏘았네. 그는 박정희를 쏘면 자기가 죽을 걸 알면서도 쏜 거야. 그가 박정희를 죽이고 쿠데타를 일으켜서 정권을 잡았다면 이야기가 다르지. 하지만 그는 군대를 동원하지 않았고 잡혀가서 지금 감옥에 있네. 실제로 자네들이나 나에게 그런 기회가 주어졌다고 해도 실행할 용기가 있었을까? 그건 목숨을 건 싸움이야. 그가 박정희에 의해서 희생될 수도 있었던 많은 사람들을 구했어. 나는 그렇게 생각해.”

 

그의 죽음이후 35년이 지났건만 민주주의는 멀고 신자유주의는 가깝다.

그는 유신의 심장을 쏘았으나 유신세력은 귀신이 되어, 괴물이 되어

우리 곁으로 되돌아왔다.

 

그러나,

非理法權天

 

비리법권천,

이치에 어긋난 것은 이치를 이기지 못하고

이치는 법을 이기지 못하고

법은 권세를 이기지 못하고

권세는 하늘을 이기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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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6-11-01 1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난 인물이죠.. 언젠가는 제대로 된 평가를 받을겁니다..

시이소오 2016-11-01 10:33   좋아요 2 | URL
실행까지는 좋았는데 그 다음에 정신이 나갔어요. 어부지리로 전두환이 정권을 잡게 된게 뼈 아프죠. ^^;

곰곰생각하는발 2016-11-01 13:48   좋아요 0 | URL
제가 알기로는 이때 김재규가 아마 간암 진단을 받았었죠 ? 아닌가요 ? 제가 알기로는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시이소오 2016-11-01 14:02   좋아요 1 | URL
네. 병이 있긴했습니다만 판단력에 문제가 있었죠. 안방인 중정으로 안가고 육본으로 가는 바람에 체포당했거든요.

waxing moon 2016-11-01 10:3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누가 박정희를 쏘았나? 자네가 쏘았나? 아니면 자네가? 아니면 내가 쏘았나? 아니야. 김재규가 쏘았네. 그는 박정희를 쏘면 자기가 죽을 걸 알면서도 쏜 거야. 그가 박정희를 죽이고 쿠데타를 일으켜서 정권을 잡았다면 이야기가 다르지. 하지만 그는 군대를 동원하지 않았고 잡혀가서 지금 감옥에 있네. 실제로 자네들이나 나에게 그런 기회가 주어졌다고 해도 실행할 용기가 있었을까? 그건 목숨을 건 싸움이야. 그가 박정희에 의해서 희생될 수도 있었던 많은 사람들을 구했어. 나는 그렇게 생각해.”


김재규가 중정부장으로서 악행을 저질렀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김재규를 인정하지 않지요. 그러나 이 글을 읽고 나면 더 이상 반박할 말이 없을 것 같네요.

과연 자신의 권력과 삶 등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는 선택을 쉽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아주 적은 피해를 입는 것이 두려워서 행동하지 못 하는 것들이 많으니까요..

시이소오 2016-11-01 10:37   좋아요 2 | URL
김재규의 과도 있지만 공도 있거든요. 잘못한 일을 지적한다면 잘한일은 칭찬해야겠죠 ^^

stella.K 2016-11-01 1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재규 지구의 끝 어느 섬에 살고 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도 있던데
설마 정말 그렇지는 않겠죠?ㅋ

안중근은 일본놈 죽인 거지만 김재규는 나라의 아버지를 죽인 건데
감히 어디에 비하겠습니까?

리뷰를 읽으니 박그네는 역시 대통령 되지 말았어야 했다는 생각이 또 드네요.
그나마 대통령이 되지 않았으면 아버지가 욕을 좀 덜 먹지 않았을까요?
딸년이 들쑤셔놓은 꼴이 됐으니...

시이소오 2016-11-01 12:14   좋아요 1 | URL
전두환이 김재규를 살려둘 이유가 없죠.
미군이 개입했다면 그럴수도 있겠습니다만.....ㅎ

아무도 박정희를 대통령으로 뽑지 않았습니다.

선거부정으로 대통령이 된 것이지요.

그리고 대통령은 나라의 아버지가 아닐수도 있습니다. 왕정에서야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만
민주공화국에선 불가능한 일이지요. 제가 배운 바로는 박정희도 일본 놈이었어요.

스텔라님, 박정희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아시면 생각이 바뀌실지도. 말씀드리기 어렵네요 ^^;
<알몸 박정희>를 읽어보시면 어떨지요?

stella.K 2016-11-01 12:50   좋아요 0 | URL
헉, 그리 말씀하시니 엄청난 뭔가를 알고 계신듯하여
급관심입니다.^^

시이소오 2016-11-01 12:57   좋아요 0 | URL
제가 뭘 알겠습니까? 작가 앞에서 부끄럽네요 ^^;

2016-11-01 13: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시이소오 2016-11-01 13:55   좋아요 0 | URL
저는 제 이름으로 책을 낸적은 없는걸요. 급이 다르죠. ㅎ ㅎ

2016-11-01 16:08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헐 독재자가 나라의 아버지라니...
하긴 북에서도 `김일성 아버이 동지`라고 한다지만

stella.K 2016-11-01 16:21   좋아요 0 | URL
그냥 비아냥으로 쓴 건지, 진담으로 쓴 건지
앞뒤 문맥 구분 못하는 헐님 같은 분을 위해
남의 페이퍼에 쓴 댓글조차도 진지해져야 하는 것인지
잠시 고민이 스치는군요.

2016-11-01 12: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1-01 12: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1-01 13: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1-01 20: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1-01 16: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1-01 16: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1-01 23: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1-02 10: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시이소오 2016-11-02 11:00   좋아요 0 | URL
긍쵸? 말과글이 달라서요.
오해해서 죄송합니다 ^^;
제가 예전에도 다른 이웃분 농담을 못 알아 듣고 싸운적도 있네요. 이해해주세요 ^^;

21세기컴맹 2016-11-02 0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친한 친구의 큰삼촌인데 ㅋ
He is pure samurai

시이소오 2016-11-02 07:47   좋아요 0 | URL
아 그런가요?
김재규 씨의 비밀을 좀 여쭤보시죠??

2016-11-02 0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과 없이 이룰 수 없었던 공은 도대체 무엇을 위한 공인가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시이소오 2016-11-02 07:48   좋아요 0 | URL
참 딱히 단정짓기 어려운 분이긴 하죠 ^^;

감은빛 2016-11-02 13: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네번째 시도라 보기에는 너무 준비가 부족한 것 아닌가요?
현실 감각이 없는 사람인가요?
그렇다면 보기엔 중앙정보부 부장까지 올라갈 수 없었을 테구요.
여러모로 좀 이해가 안 되는 상황이예요

시이소오 2016-11-02 17:00   좋아요 1 | URL
계획적이라기보단 우발적인 성격이셨던듯.

거사를 치르고나면 미국이 도와줄거라 생각한거 같은데 미국으로부터 완전히 팽당했죠 ^^;

leaders4289 2016-12-21 11: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 카페로 출처 밝히고 펌 했습니다.
좀더 많은 분들이 지금 시국에 읽어 보고 생각해보면 좋을 내용 같아서요.
급히 펌하고 나니 허락없이 펌한 것이 마음에 걸리네요.
허락없이 펌해서 죄송합니다. 원하지 않으시면 삭제하겠습니다.
역사를 다시 생각해볼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시이소오 2016-12-21 11:17   좋아요 1 | URL
퍼가주셔 감사합니다ㆍ 리더스님 말씀처럼 현시국 과도 관련이 있네요. 이번 박근혜게이트를 통해 많은 분들이 역사에 대해 숙고해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한국 현대사 산책 1960년대편 3 - 4.19 혁명에서 3선 개헌까지 한국 현대사 산책 8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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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는 신년사에서 69년을 싸우면서 건설하는 해로 하겠다고 발표한다. 서울지검은 당시 어린이들에게 인기를 끌었던 피카소 크레파스’, ‘파카소 수채화 물감등을 생산하던 삼중화학공업 대표 박정원을 반공법 위반 혐의로 체포하고 제품의 판매 및 광고를 금지시킨다. 이유는 단 하나였다. 피카소가 공산당원이라는 것.

 

3선개헌을 위한 작업도 계속되었다. 전국의 역술계에선 정도령론이 휩쓸었다. 한상범은 정도령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68년 영구집권의 발판으로 3선 개헌을 합리화하는 공작에 그(박정희)역술인이란 직업을 가진 무당, 점쟁이, 관상가 등을 대대적으로 조직, 동원했다. 그들은 전국 조직망을 거미줄처럼 얽어 박정희가 정도령이고 민중 대망의 진인이며 미륵불의 헌선이고 도래한 메시아라고 떠들어댔다.”

 

개헌을 지지하는 정체불명의 정치 단체들도 속출했다. 박정희는 67년 총선 때 “3선 개헌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고 수없이 말했고. 68년엔 내가 만약 3선 개헌을 한다면 김상협 의원 당신도 단도를 들고 나에게 덤벼라. 당신들에겐 당연히 그렇게 할 권리가 있다고까지 말했었다.

 

613일 신민당 원내 총무 김영삼은 국회 본회의에서 “3선 개헌 음모는 제2의 쿠데타이며, 개헌 음모의 총본산은 중앙정보부라고 비판했다. 1주일 후, 620일 밤 김영삼은 자택 근처에서 괴한 3명에게 피습당한다. 괴한들은 김영삼에게 초산을 퍼부었으나 차창이 닫혀 있어 피해는 없었다.

 

박정희는 닉슨 독트린 때문에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과의 정상회담을 갖는다. 박정희는 미군 철수를 막기 위해 제주도를 미군기지로 제공할 용의가 있으며, 또 필요하다면 핵무기 설치도 허용할 것이라고 말했다.

 

베트남 파병으로 한국은 약 10억 달러 이상의 외화를 벌어들인다. 베트남 파병은 많은 신화를 만들어냈다. 그 신화의 주인공 가운데 하나는 한진그룹이다. 한진 그룹은 월남 특수 5년동안 13천만 달러를 벌어들인다. 한진 그룹은 이 공로를 인정받아 693월 대한항공을 인수해 대재벌로 도약하기 시작한다. 베트남 특수를 들어 베트남 파병을 정당화하는 주장에 대해 한홍구는 이렇게 말했다.

 

베트남 특수의 최대 수혜자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일본이었다. 일본은 매년 우리가 베트남 특수의 전 기간에 벌어들인 금액보다 훨씬 많은 달러를 벌어들였다. ...20명의 병력을 파견한 대만, 한 사람의 병력도 파견하지 않은 싱가포르나 홍콩이 베트남 특수를 누리지 못하거나 냉전의 정치경제적 논리 속에서 선택적으로 개방된 미국 시장에서 배제되지는 않았다.

 

한국이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인명 피해에, 민간인 학살이라는 멍에에, 미국 용병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아가며 베트남전에서 얻은 경제적 소득은 겨우 20여 명의 병력을 파견한 대만이 얻은 소득을 약간 상회하는 정도였다.“

 

베트남 전에서 한국군 전사자는 5천 명, 부상자는 16천명에 이르렀다. 한국군의 대량 사망은 은폐된 채, 신중현 작가 작곡, 김추자 노래의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만 울려퍼졌다.

 

53년부터 66년까지 해외 유학한 사람은 모두 7398명이었다. 이중 귀국한 사람은 6%에 불과했다. 상류층 자제들, 이른바  ‘돈 있고 백 있는 놈들은 군대에 가지 않았다. 돈없고 가난한 이들만이 월남에서 피를 흘려야 했다.


 

64년엔 무즙 파동이 있었다. ‘무즙 파동이란 64127일 전기 중학입시의 공동출제 선다형 문제 가운데 엿기름 대신 넣어서 엿을 만들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시험 문항의 답안이 빚어낸 사건이었다. 정답은 디아스타제였다. 그런데, 학부모들이 당시 보기 가운데 하나였던 무즙도 정답이 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법원에 제소했고, 나아가 무즙으로 엿을 만들어 솥 채 들고 나와 무즙으로 만든 엿을 먹어보라는 시위를 전개하기도 했다. 결국 이 무즙 파동6개월 이 지나 무즙을 정답으로 인정, 떨어진 학생 38명을 경기중학 등에 입학시키며 일단락 된다.

 

67년엔 창칼 파동이 있었다. 서울시대 전기 중학교 미술문제 중 목판화를 새길 때 창칼을 바르게 쓰고 있는 그림은 어느 것인가?”의 정답이 두 개라는 것이었다. 서울중학교 낙방생 학부모 549명이 소송을 제기했다. 패소해 불합격 처리됐다

 

그만큼 국민들은 너도나도 교육에 목숨을 걸었다. 66년 봄 한국부인회는 치맛바람 자숙운동을 벌이기도 한다. KS병도 생겨났다. KS (경기고 서울대)병이다. 이에 69년 서울에서부터 중학교 무시험 추첨 배정제가 실시된다. 이른바 뺑뺑이’. 71년에 전국적으로 확대된다.


 

69년엔 패티킴 노래의 <서울의 찬가>가 유행했다. 전체 인구에서 농촌 인구가 차지하는 비중은 6072%에서 70년에는 59%로 감소했다. 도시화율은 6028.3%에서 7043.1%로 뛰어올랐다. 60년대의 10년간은 전 셰에서 유래가 없는 압축적도시화의 시기였다. 66년에서 70년 사이 서울 인구 증가는 한국 전체 인구 증가의 77%를 차지했다. 이에 정부가 취한 대응책은 강남 개발이었다.

 

1226일엔 제3한강교(한남대교)가 완공되면서 강남은 서울생활권으로 들어오게 된다. 3한강교 기공식 이후 이른바 말죽거리 신화로 불리우는 부동산 투기 붐이 일어난다. 당시 강남은 영동이라 불렸다. 영동지구 개발사업에서 사업비 충당용으로 책정된 체비지 가운데 일부 땅은 정치자금용으로 박정희에 제공되었다.

 

영동 땅값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70년에 학동은 20, 압구정동 25, 신사동 50배까지 오른다. 이때 등장한 용어가 복부인이다. 비판의 화살은 투기를 부추긴 정부가 아니라 아줌마의 탐욕에 돌려졌다.

 

개발 열기는 남산에까지 미쳤다. 케이블카, 재향군인회관, 야외음악당, 남산순환도로, 야외음악당, 어린이 회관 등등. 손정목은 남산 외인아파트를 인간이 얼마만큼 바보일 수 있는가의 극치를 알려주는 사례 중의 하나일 것이라고 말했다. 왜 남산이었을까? 김현옥은 주로 고지대에 아파트를 지었다. 왜 그랬을까? 국장과 과장들이 아파트를 너무 높은 곳에 지으면 위험하고 불편하지 않냐고 이견을 제시했다. 김현옥은 말했다지.

 

야 이 새끼들아, 높은 곳에 지어야 청와대에서 잘 보일 것 아냐


와우아파트는 7048일 붕괴했다. 33명의 주민이 목숨을 잃었다.



 

박정권은 강남 개발을 하는 동시에 서울 빈민을 경기도 광주로 강제 이주시킨다. 청계천 일대를 비롯한 판자촌을 철거하면서 145천명의 주민들 역시 광주로 강제 이주시켰다. 당시 경기도 광주에는 뭐가 있었나?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박정희의 조국 근대화의 상징은 고층건물과 자동차였다. 70년 삼일빌딩이 준공되었을 때 전국민이 자랑스러워했다지.

 

<사상계>는 몰락한 반면 여성지들이 각광을 받기 시작한다. 67<여성동아>가 복간했고, 69년엔 <여성중앙>이 창간된다. 여성지 시장은 <주부생활><여원> 과 함께 4파전을 형성해 간다.

 

신문들은 계속 배를 불린 반면, 기자들은 여전히 가난했다. ‘현명한기자들은 촌지를 챙기는 것으로 가계를 꾸려 나갔다. 청와대 출입 기자 가운데, 청와대 대변인이 불러주는 대로 기사를 써주고 5천불의 촌지를 받는 기자도 있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박정희와 닉슨의 정상회담장 주변엔 월남전 반대 시위가 요란했는데도, 기자들은 수많은 시민들이 손에손에 태극기과 성조기를 들고 박 대통령 일행을 열렬히 환영했다는 거짓보도까지 햇다.

 

박 대통령 전세기가 뜨지 못하는 소동까지 벌어지기도 했다. 기자, 경호원 할 것 없이 텔레비전, 냉장고 까지 사서 전세기에 실었기 때문이었다. 소장 언론인들인 <동아일보>의 유혁인, 최영철, 이동복, <한국일보>의 임방현, 임홍빈, ,조선일보>의 이종식, 동양통신의 김성진 같은 기자들이 예외 없이 변절해, 박정희의 총애와 은혜를 입었다.

 

43일엔 미원, 미풍 조미료 광고방송 사건이 있었다. 미풍 조미료 제조회사인 삼상 계열의 제일제당과 미원 조미료 제조회사인 미원주식회사가 조미료 원료인 이노신산 소다를 일본에서 불법적으로 몰래 들여온 게 사건의 발단이었다. 동양방송은 미풍에 대해 보도하지 않고 미원이 밀수 혐의로 조사를 받고 있다는 내용만 보도했다.

 

영화계에선 김지미, 엄앵란, 최은희, 태은실, 이후 문희, 남정임, 윤정희 등의 새로운 트로이카 체제가 구축된다. 관객동원에서 69년은 한국영화사상 최고조를 이룬 해로 기록된다. 영화관객은 6919400만 명으로 최고 기록을 수립한 이후 70년 이후 계속 내리막을 걷게 된다. 텔레비전의 영향 때문이었다.

 

88MBC TV가 개국한다. 이후 TBC와 치열한 경쟁을 벌이게 된다.

 

716일 미국은 인류 역사상 최초로 아폴로 11호를 발사하는데 성공한다. 미국 공보원은 남산 야외음악당에 대형 TV 스크린을 설치, 17일엔 생중계, 22일엔 녹화중계를 방송한다. TV는 또한 만화방이 갖춰야 할 필수 품목이기도 했다. 만화방이 가장 번성했던 시기는 1970년 전후로 이때 전국 만화방은 약 18천 개 였다.

 

68년 코카콜라, 69년 펩시콜라의 한국 상륙은 TV 광고에 큰 영향을 끼친다.

 

10월엔 클리프 리차드 내한공연이 있었다. 여고생과 여대생들이 손수건과 속옷을 무대로 던진 것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남성들의 충격 탓이었을까. 71년엔 리처드의 국내 공연 허가가 나오지 않았다.

 

신중현 작사, 작곡 박인수 노래 <봄비>는 새로운 감성으로 인기를 끌었다.

 

박정희는 67년에 중정에게 공무원 부정부패 단속 지시를 내린적이 있었다. 중정이 단속에 뛰어들었는데 할 수가 없었다. 부패 공무원이 너무 많아 행정과 치안이 마비될 지경이었기에. 이맹희에 따르면, 삼성전자를 만드는 데 에 들어간 뇌물만 5억 원이었다.

 

당시는 어느 기업이나 모두 공장의 건설이나 외자(차관) 도입에 연관되어 정부나 혹은 박 대통령에게 적절한 대가를 전해야 했다. 삼성전자를 설립할 당시 내 기억으로는 5억 원을 주었던 것 같다. 이 액수는 당시 차관액의 약 3%에 해당하는 돈이었다. 그래도 내 경우에는 ....박 대통령과 적절한 라인이 있어서 비교적 액수가 적었던 셈이었다.”

 

박 정권하에서 정치자금 징수는 공화당 재정위원장만의 몫이 아니었다. 힘을 쓸 수 있는 모든 권력자들이 다 동원되었다. 69년 하반기 어느날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 김학렬은 현대건설, 대림산업, 극동건설, 삼부토건, 동아건설 사장 5명을 소집한다. 3선 개헌과 71년 대선과 총선을 위해 돈을 내놓으라는 이유였다.

 

박정희는 돈을 뜯기만 한 건 아니었다. 자신의 수족을 만들기 위해 엄청난 돈을 뿌려댔다. 박정희는 장군들이 청와대로 인사를 오면 서울에서 양옥 한 채 살 수 있을 정도의 돈을 주었다.

 

60년대엔 박정희의 비호아래 약 40개의 기업이 거의 모든 산업을 독점했다. 기존 산업에 신규 업체가 진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약 120여개의 규제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913, 3선 개헌안이 국회 본회의에 회부된다. 14일 새벽 250, 공화당 및 무소속 의원 122명은 야당 의원들이 점거한 국회 본회의장을 버리고, 길 건너편 국회 제 3별관 3층 특별위원실에 집결해 개헌안을 25분만에 날치기로 통과시킨다. 국회의장 이효상은 의사봉이 없자 직원이 가져다 준 주전자 뚜껑으로 책상을 탕탕탕쳤다.

 

922일 중정은 가장 격렬한 개헌 반대운동을 벌인 ‘4.19 6.3 범청년회소탕 작전을 개시한다. 모임 사무총장이었던 최형우는 중정에 끌려가 20여일동안 모진 고문을 당한다. 그의 죄명은 3선 개헌을 반대해서 사회를 혼란케 했으니 북괴를 이롭게 한 용공분자라는 것이었다.


개헌안에 대한 국민투표는 1017일로 예정되었다. 박정희는 밀가루 대통령’답게 돈과 밀가루를 퍼붓는다. 김종필은 개헌안이 부결될 경우 군부가 다시 쿠테타를 일으킬지 모른다며 국민들을 협박한다. 개표결과 투표율 77.1%, 찬성률은 65.1%였다. 각 지역별 찬성표 비율에 따라 총 60만 달러의 보상금이 차등 지급된다.

 

3선 개헌이 통과되면서 김형욱은 폐기처분된다. 박정희는 중앙정보부장에 김형욱 대신 김계원을. 비서실장에 이후락 대신 김정렴을 앉힌다.

 

박정희는 이승만 하야 직후 이승만에 대해 동정적인 사설을 쓴 이병주에게 이런 반론을 펼쳤따.

 

그거 안됩니다. 그에겐 동정할 여지가 전혀 없소. 12년이나 해먹었으면 그만이지. 사선까지 노려 부정선거를 했다니 될 말이기나 하오? 우선 그, 자기 아니면 안 된다는 사고방식이 돼먹지 않았어요. 후세에 경종을 울리기 위해서도 춘추의 필법으로 그런 자에겐 필주를 가해야 해요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라는 꼴이라고 할까? 여기서 잠깐. 박정희는 이승만을 돼먹지 않는 놈이라 말했는데, 이승만을 국부라 하는 것들은 박정희 말을 무시하는 건가? 박정희를 무시하는 건가


아놔, 돼먹지 않은 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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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8-15 1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뉴라이트는 진실이 어떻든 신경쓰지 않습니다. 이승만, 박정희를 숭배해서 자신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높이려고 합니다.

시이소오 2016-08-15 19:14   좋아요 0 | URL
뉴라이트 사법처리를 해야된다고 생각해요. 건국절이라는 말은 상해임시정부를 인정치않겠다는건데, 대한민국 헌법을 부정하는것들은 국외추방해야죠. ^^
 
한국 현대사 산책 1960년대편 3 - 4.19 혁명에서 3선 개헌까지 한국 현대사 산책 8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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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대, 70년대의 남북관계는 적대적 공존관계였다. 한쪽이 긴장을 고조시키면 다른 한쪽 정권의 입지가 강화되었다. 그러다보니 서로 닮은 꼴이 되었다. 이종석은 그런 관계를 거울영상효과라고 부른다.

 

박 정권은 자주, 자립, 자위, 주체, 국방, 경제 병진 건설 등 60년대 북한 정권이 즐겨 사용했던 말들을 60년대 말부터 빈번히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유신체제 형성 뒤에는 더욱 일반화해서 사용하였다.”

 

68121일 새벽 4, 북한 산 비봉에 31명의 젊은 남자들이 모여 있었다. 116일 개성을 출발한 김신졸르 비롯한 북한 무장공비단이었다. 김신조 일당은 청와대에서 불과 500미터 떨어진 거리까지 접근하는 동안 단 한번도 제지 받지 않았다. 자하문 고갯길에서 최규식이 강경 대응하자 공비들은 기관총을 난사한다. 공비들은 시내버스 헤트라이트 불빛을 국군 출동으로 착각하고 시내버스에 세 발의 수류탄을 투척한 이후, 각자 도주한다. 김신조 한 명만 생포된다. 나무꾼이 무장공비를 신고한 건 119일 오후 2시였다. 그러나, 군경은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않았다.

 

분노한 박정희는 미국 대사 윌리엄 포터를 불러 북을 공격해야 겠소. 이틀이면 평양에 닿을 수 있다고 생각하오하고 말하면서 미국의 지원을 요청했다. 포터는 이렇게 대답했다.

북을 공격하시려거든 혼자 하십시오.”

 

1.21 사태가 일어난 지 이틀 후 123일 동해상에서 미국 첩보함 푸에블로호가 영해 침범으로 북한에 억류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승무원은 모두 83명이었다. 미국은 핵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호를 원산 앞 바다 배치, 항공호함 2척을 추가 배치, 공군전투기 361대를 이남으로 전진 배치했다. 미국이 청와대 습격보다 푸에블로호에 더 중점을 두자 박정희는 분노한다. 박정희가 전쟁을 일으킬 가능성을 염려한 미국은 대통령 특사 사이러스 밴스를 한국에 파견한다. 밴스는 1억 달러의 추가 군사원조 등으로 박정희를 달래는 한편 베트남에서 한국군을 철수하겠다고 위협할 경우, 미국은 한국에서 미군을 철수하겠다고 경고 메시지를 보낸다.

 

한동안 푸에블로 음모론도 등장했다. 미국이 상호 갈등을 빚고 있던 중국과 소련의 관계를 악화시키기 위해 꾸민 일이라는 것이다. 그 근거로 1. 미국은 이미 정찰위성과 정찰기의 최신예 레이더로 북한의 정보를 수집하고 있어, 정보함을 북한 영해 가까이 보낼 필요가 없었다. 2. 푸에블로호에는 기관총을 비롯, 제대로 된 방어 무기가 없었다. 3. 나포 당시 미 공군이나 해군의 즉각적인 구원 작전도 없었다. 등이 제시되었다.

 

1.21 사태로 야당 입지는 위축되고 반공이 지상명제가 되었다. 41일 향토예비군이 창설된다. 주민등록법1.21 사태로 통과된다. 1121일부터 모든 국민에게 주민등록증이 발끕되었다.

 

반공 교육은 물론 반공법 적용도 강화되었다. 68년은 미군들이 한국 사람을 린치한 신문기사를 놓고 술자리에서 미군을 욕하다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빨갱이로 무수하게 두들겨 맞고, 택시에서 한두 마디 박정희 비난을 했다가 그대로 남산으로 실려가 빨갱이 앞잡이라고 매타작을 당했다는 소문이 떠돌고 있던 세상이었다. 그래서 이 무렵에는 마누라와 정사를 하는 배 사이에도 중정의 촉수가 파고들어 있다고 하는 세상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박정희의 가장 유력한 왕위계승자는 김종필이었다. 김종필은 권력에 대한 야심을 품고 있었고, 박정희는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권력을 계승해 줄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김형욱은 끊임없이 김종필을 괴롭혔다. 이런 와중에 국민복지회 사건이 터진다. 김종필의 측근들이 반국가단체를 조직, 대통령 각하를 비난했다는 것. 이에 김형욱은 김종필의 측근들을 정보부로 연행, 고문한다. 김종필은 정계은퇴를 선언한다.

 

824일은 이른바 통일혁명당 사건이 터진다. 158명이 검거되고 50명이 구속되었다. 공소사실은 김종태, 이문규 등을 중심으로 대한민국 정부 전복과 공산정권 수립을 꾀하였으며 북괴로부터 자금도 받았다는 내용이었다.

 

현대사를 돌아보면서 중정, 안기부, 국정원의 조작질은 정말 이제 지겨울 정도다. 어떻게 수 백번이나 똑같은 조작질을 벌이는데도 국민들은 가만히 있는 걸까. 도대체 얼마나 많은 국민들이 억울하게 죽어야 국정원 같은 조작 단체가 없어질려나.

 

5명이 사형당하고 신영복을 비롯한 많은 사람이 중형을 언도받았다. 김종태는 잡지 <청맥>을 발간했다. <청맥>에 드나들던 멤버 중 한사람이 육군 중위 신영복이었다. 신영복은 2020일 복역하고 88815일에 가석방된다.



 

1030일 울진, 삼척에 130명의 무장 공비가 침투한다. 군은 1224일까지 110명 사살, 5명 생포, 2명 자수의 전과를 올린다. 남한 측은 군인 33, 민간인 16, 부상 37명이었다. 이 사건의 피해자 중에 9살 이승복도 포함돼 있었다. <조선일보>는 이승복이 죽기 전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외쳤다는 특종을 보도한다. 완벽한 소설이었다. 조작 기사였다.

 

68년 이후 20년간 이승복의 반공 영웅화가 국가 정책으로 추진되었다. 교과서에 실렸고, 반공 웅변대회에서 이승복은 필수 소재였다. 이승복 노래도 만들어지고, 동상이 세워지고 기념관까지 건립되었다.

 

90년 이후에야 와서야 교과서에서는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외쳤다는 내용을 삭제했다.

 

이은상, 박종홍, 이인기에 의해 국민교육헌장이 만들어진다. 나라의 융성이 나의 발전의 근본이라니, 반공 민주 정신에 투철한 애국 애족이 우리의 삶의 길이라니. 국민교육헌장은 박정희 3선 개헌을 위한 분위기 조성의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동아일보 기자인 김진배와 박창래는 <신동아> 6812월호에 <차관>이라는 심층보도 기사를 실었다. “차관이 정경유착의 표본이며 정치자금의 원천이 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두 기자는 구속되었다. 다른 언론사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신문은 완전히 중앙정보부 손으로 넘어갔다.

 

이 대신 <주간 중앙>, <선데이 서울>, <주간 조선>, <주간 경향>이 창간했다. <주간 한국>의 발행부수는 68년에 이르러 40만 부에 달했다. <선데이 서울>은 창간호 6만 부가 2시간 만에 팔려 나갈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언론의 치열한 상업성 추구는 박 정권이 바라던 바였다. 박정권은 언론에게 각종 특혜를 베풀어 언론이 오직 상업적 성장에만 몰두하게 유도한다. 특히나 <조선일보>. 


<조선일보>는 박정희가 베푼 특혜에 힘입어 신문사 건물과 코리아나 호텔을 짓기 위한 상업차관을 일본으로부터 좋은 조건으로 들여온다. 7~8%의 상업차관이었다. 당시 국내 금리는 연 26%였다. <조선일보> 뿐만 아니라, 동아일보, 중앙일보, 한국일보, 서울 신문 등이 중앙정보부와 손을 맞잡고 사옥을 지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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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6-08-14 13: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1968년부터 `북풍`이 존재했군요.. 지금까지 애용되는 정치 공작의 역사는 정말 유구하다는 생각이 드네요..시이소오님, 감사합니다^^

시이소오 2016-08-14 15:10   좋아요 2 | URL
몇십년동안 똑같은 짓거릴해도 매번 당하는 국민들이 있다는게 이해불가네요. 이게 무슨 닭대가리도 아닌데 돌아서면 잊어버리고
ㅋ ㅠ ㅠ

곰곰생각하는발 2016-08-14 14: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구야. 이런 글 읽으면 속이 뒤비지는데.....

시이소오 2016-08-14 15:15   좋아요 0 | URL
답답하죠. ㅠ ㅠ

겨울호랑이 2016-08-14 15: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국민들이 문제를 인식하기까지는 시간이 오래 걸리겠지만, 일단 알게된 후에는 좀처럼 잊지 못하지 않을까 기대해 봅니다..^^: 더운 여름 건강하게 보내세요

시이소오 2016-08-14 15:41   좋아요 2 | URL
그렇게 믿어야겠죠. 겨울호랑이 님도 건강하게 보내세요 ^^

깊이에의강요 2016-08-14 1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이소오님 종북...ㅋ

시이소오 2016-08-14 20:25   좋아요 1 | URL
저는 북한도 싫어요

깊이에의강요 2016-08-14 20:3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진실을 알려주거나 바른 말을 하는 사람을 그렇게 부르지 않나요?
무슨 말인지 생각도 안해보고 앵무새마냥 종북종북.

시이소오 2016-08-14 21:08   좋아요 1 | URL
진실을 알려주거나 바른말을 하는 사람으로 생각할께요 ^^

깊이에의강요 2016-08-14 20: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북한 싫어요

마르케스 찾기 2016-08-15 16: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북한이,,, 좋은데ㅋㅋㅋ 북한 정권, 김부자 옹호 세력이 싫을 뿐ㅋㅋ 헌법에 북한도 독도와 같은 대한민국 영토라 되어 있다네요. (북한 주민도 헌법상 대한민국 국민이라는ㅋ).. ˝남 북˝의 지도자들이 어찌 그리 다 자기들만 잘살려드는지,,,, 박정희도 싫고, 북한 김부자 정권도 싫고,, 힘없이 매번 당하는 남북 국민들(우리)만 안타까울 뿐,,, 대한민국은 동서로, 남북으로, 정권세력과 국민으로, 세대차로, 심지어 남녀로,,, 너무 나눠져 있는 거 같아서 안타까워요ㅋ 잘 읽고 갑니다.

시이소오 2016-08-15 18:32   좋아요 1 | URL
ㅋ 맞는 말씀입니다. 김부자가 싫은거죠~~
 
한국 현대사 산책 1960년대편 3 - 4.19 혁명에서 3선 개헌까지 한국 현대사 산책 8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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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이 남한에서는 쌀값이 수시로 변하고 농촌에서는 돈만 있으면 물건을 얼마든지 살 수 있고, 돈 있는 사람은 잘 살고 돈 없는 사람은 못 산다고 말했다.

구속되었다. 군사상 기밀 누설이라는 것. 이른바 반공법 위반이라는 이유로.

 

<현대문학> 653월호에 남정현의 <분지>가 실렸다. (분지는 똥땅이란 뜻)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남정현의 구속에 항의하는 글을 쓴 백낙청, 남재희도 중정에 끌려간다. 2월 문학평론가 이어령은 법정에 피고인 측 증인으로 출두한다. 변호인은 한승헌이었다. 검사는 소설을 읽고 놀랐고, 용공적이지 않냐고 이어령에게 물었다. 이어령은 이렇게 말했다.

 

병풍 속의 호랑이를 진짜 호랑이로 아는 사람은 놀라겠지만 그것을 그림으로 아는 사람은 놀라지 않는다.”

 

이어령의 증언에도 불구하고 검사는 <분지>에 징역 7년형을 구형한다. <현대문학>33년 후인 9810월 호에 다시 <분지>를 실었다.



 

322일 판문점 출입기자 이수근이 북한에서 남한으로 탈출한다. 110개월 후엔 다시 남한에서 북한으로 탈출한다.

 

신변의 위협과 김일성 독재에 염증을 느껴 탈출했다는 이수근은 689월 모 교수와 결혼하는 등 남한에 정착해 행복한 나날을 보낸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이수근이 화장실에서 이빨을 딱딱거리면 전파가 나간다는 둥 이수근은 이중간첩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69년에 이수근은 서울을 탈출하지만 2월에 중정에 붙잡힌다. 중정은 이수근을 이중간첩이라 발표한다. 미국 CIA 관계자들은 웃었다. 이수근의 탈출 동기는 중정의 이중간첩 혐의였기 때문이었다.

 

중정 감찰실장 방준모는 이수근에 대해 분노했다. 이수근의 여자관계 때문이었다. 이수근은 여자 사냥의 천재였다고 한다. 이수근은 20명의 여자와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수근 스토리를 김수용은 <고발>이란 제목의 영화로 만들기도 했다. 영화는 대종상 영화제에서 박노식이 남우주연상을, 조문진이 반공영화 각본상을 받았다. 이후 이수근이 위장간첩으로 몰리자 수상은 취소되고, 수상자들은 상패를 반납했으며, 영화는 상영취소되었다.


 

민중당과 신한당은 27일 통합 야당인 신민당을 창당, 대통령 후보에 윤보선, 당수 유진오로 결정한다. 장준하는 4월부터 윤보선 선거캠프에 뛰어든다. 장준하의 박정희 비판은 화끈했다.

 

박정희 씨는 일본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일본군 장교가 되어 우리의 독립 광복군에 총부리를 겨누었으니 이런 인물이 우리나라 대통령으로 있는 것은 우리의 국가와 민족의 수치입니다.”, “박정희 씨는 국민을 물건으로 취급하여 우리나라 청년을 월남에 팔아먹고 있고 그 피를 판 돈으로 정권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박씨는 과거 공산주의의 남로당 조직책으로 임명되어 남한에서 지하 조직 활동을 한 사람이며 조직원 동료를 팔아 희생시키면서 자기 한 목숨을 산 사람입니다.”

 

개표 결과, 박정희는 5688666(51.5%)을 얻은 반면, 윤보선은 4526541(40.9%)에 그쳤다. 승패는 이번에도 영남에서 갈렸다. 영남에서 박정희는 2266천표, 윤보선은 893천 표. 5대 때 66만 표였던 것이 6대 때는 137만 표로 두 배나 벌어졌다.

 

막대한 선거자금에 힘입은 부정 선거였던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 만일 윤보선이 당선되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중정 감찰실장으로 있다 이수근 사건으로 쫓겨난 방준모는 90년대 초에 윤보선 저격 음모를 털어놓았다.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이 만일 개표 결과 윤보선의 당선으로 나타나면 총으로 저격하라는 지시를 내렸다는 것이다.

 

박정희를 비난한 장준하에 대한 박정희의 보복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박정희는 허위사실 유포 혐의로 장준하를 구속한다. 장준하는 동대문 을구 후보로 옥중 출마해 4만 표 이상을 얻어 압도적 표차로 당선된다.

 

5.16 쿠데타 직후부터 철저한 지역주의와 특정지역 패권주의가 시작된다. 영남을 중심으로 한 지배동맹을 구축하면서 호남을 차별했다. 박정희는 대선 공약으로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발표한다. 반면 호남 민심을 달래기 위한 호남 복선화 사업36년 후인 2003년에 가서야 완공된다. 강준만은 이렇게 말한다.

 

박정희를 사랑하는 영남인은 호남 푸대접론에 별로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그건 중요치 않다. 중요한 건 누가 옳건 그르건 극심한 분열이라고 하는 사실 그 자체다. 문제의 요점은 이것이다. 박정희는 한국인의 분열주의를 증오했다. , 누구보다 한국인의 분열주의를 증오하고 개탄했던 박정희는 자신의 사후 20년이 넘도록 꺼지지 않는 지역 분열주의 화마 또는 그 원흉이 된 것이다.”

 

박정희의 대통령 임기는 1971년에 끝나게 돼 있었다. 박정희는 또 대통령을 해쳐먹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 68일에 치러지는 제 7대 국회의원 선거가 중요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온갖 부정이 자행되었다. 박정희는 자유당 시절에 동원되었던 온갖 비열한 수법들을 부활시켰다. ‘야당 토벌 작전까지 시행되었다. 공화당은 흥청망청 돈을 뿌리고 다녔고, 밀가루에 이어 보리쌀이 공짜로 뿌려졌고, 여당을 찍으면 판잣집을 헐지 않겠다는 은밀한 공약이 판을 쳤다.

 

박정희가 가장 큰 관심을 기울인 선거구는 목포였다. 박정희는 중앙정보부와 내무부에 여당 국회의원 10명이든 20명이든 낙선시켜도 상관없다. 반드시 김대중만은 당선이 안 되도록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 지시에 따라 공화당은 2만여 명의 유령 투표권자를 만들어내는 등 상상을 초월하는 부정을 감행한다. 그럼에도 김대중은 2천 표 차이로 당선된다.

 

공화당은 헌법 개정에 필요한 117석을 훨씬 웃도는 130석을 얻는다. 선거 과정 뿐만 아니라 투개표 과정에서도 전국적으로 엄청난 부정이 자행되었다. 야당은 6.8 총선을 무효로 선언하고, 재선거를 요구, 국회 등원을 거부했다. 전국 각 대학에선 6.8 부정 선거 규탄데모가 벌어졌다. 박정희는 서울 21개 학교에 휴교령을 내린다. 16일까지 전국 31개 대학, 163개 고등학교에 휴교령이 떨어진다.

 

비공식적으로 공화당이 부정선거를 인정하고 야당과 타협할 자세를 취하자, 야당은 또 다시 분열한다. 타협파와 비타협파. 김대중은 정부 측에 3선 개헌을 할 수 없는 보증을 얻을 것과 지방 자치를 실시할 것, 이 두 가지를 조건으로 내세워 타협을 모색하는 게 어떤가?” 하고 제시하지만 강경파는 등원 거부 투쟁을 벌인다. 이후 비타협파는 박정희의 사죄에 아무 소득도 없이 등원한다. 이후 벌어진 북한 무장 공비들의 청와대습격 사건으로 인해 부정선거 문제는 완전히 잊혀진다.

 

동백림, 동베를린을 그렇게 불렀다. 78,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은 동백림을 거점으로 한 북괴 대남적화공작단을 적발했다고 발표한다. 이른바 동백림 사건

 

총 관련자는 194명이었지만, 기소자는 34명이었다. 유럽에 있던 사람들은 617일 전후해 전격적으로 중앙정보부원들에 의해 납치돼 한국에 끌려온다. 서독과 프랑스 정부는 영토주권의 침해 라고 비난한다.

 

730일 대법원 형사 3부가 간첩죄와 잠입죄에 대해 파기 환송 판결을 내린다. 곧바로 2일과 3일 새벽에 용공판사 처단하라는 괴벽보가 나붙었다. 이응로는 국위 선양한 유공자로 초청하고 속여 국내에서 체포된다. 6개월 동안 구금당했던 천상병은 행려병자로 서울시립정신병원에 오랫동안 유치되었다. 천상병은 이렇게 말했다.

 

“677월 내 인생은 사실상 끝났던 것이다. 정부부에서는 나를 세 번씩이나 전기고문하며 베를린 유학생 친구와의 관계를 자백하라고 했지만 나는 몇 차례 까무러쳤을망정 끝내 살아났다. .....나는 찢어지는 고통도 이겨냈다. 지금도 몸서리가 쳐진다. 고문을 한 놈을 찾아 죽이고 싶은 심정일 때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겼으니 이것으로 만족한다. 나는 다리를 비틀거리며 돌아다니지만 진실과 허위 중 어느 것이 강자인가를 알고 있다.”

 

이 사건의 가장 큰 희생자로 알려진 건 윤이상이다. 윤이상은 제 3심에서 10년 형을 언도받았다. 부인도 남편이 보고 싶어한다는 거짓말에 속아 납치된 후 서대문 형무소에서 남편과 함께 수감당했다가 얼마 후 집행유예로 풀려난다.

 

윤이상은 계속되는 고문을 견디다 못해 자살을 기도하기도 한다. 윤이상은 독일 정부와 세계적 예술가들의 줄기찬 석방요구에 의해 69225일에 석방돼 독일로 추방된다. 강준만은 이렇게 적었다.

 

김형욱은 훗날 자신의 회고록에서 ”‘동백림 사건의 모든 관련자들에게 사죄하고 싶다라고 말했지만, 김형욱은 국가 테러리즘의 하수인이었을 뿐이고 그 우두머리는 박정희였다. 박정희는 이후 내 무덤에 침을 뱉으라고 외치면서 조국 근대화를 위해선 국가 테러리즘도 필요악이라는 자세를 계속 유지하게 된다.”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 박정희 씨바라



 

661031일 시청 앞에서 벌어진 미국 대통령 린든 존슨 환영 행사는 엉뚱하게도 서울 도심부 재개발 사업을 촉진시켰다. 한미 양국의 TV 생중계 때문이었다. 서울 시장 김현옥은 세운상가, 낙원상가, 파고다아케이드 등 도심부 재개발 사업에 매달린다. 세운상가는 주상복합아파트로 당시엔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

 

2한강교는 65125일 준공 개통되었고 66119일엔 3한강교 (현 한남대교)가 착공되었다. 여의도, 3.1 고가도로(청계 고가도로)도 건설되었다. 워커힐에선 연일 기생파티가 벌어졌다. 박정희는 청와대 앞 궁정동에 안가가 생기기 전까지 주로 워커힐에서 기생파티를 벌였다.

 

67년 들어 박정희는 언론 탄압에서 언론 포섭으로 언론 대책의 방향을 바꾼다. 중정은 <조선일보> 리영희에게 베트남 전쟁에 대해 정부의 나팔수가 되기를 제의하고 금전적으로 후한 당근을 제시한다. 리영희는 단호히 거절했다. 당시의 언론인으로선 거의 유일하다고 한다.

 

<조선일보>, <동아일보>, <중앙일보> 등은 권력에 빌붙어 영혼 없는 성장을 거듭한다. <조선일보>는 리영희를 쫓아낸다. 신민당은 언론탄압에 대한 소명서를 국제신문인 협회 등에 제출하기로 하는데, 이 사실이 알려지자 오히려 신문들이 신민당을 공격한다. 군사정권 탄압이후 <사상계>는 연일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장준하가 6.8 총선으로 국회의원이 된 후, 사상계는 부완혁에게로 판권이 넘어간다. 66년 창간된 계간 <창작과 비평><사상계>의 역할을 일정부분 수행하게 된다. <창작과 비평>엔 김수영과 신동엽의 저항시들이 본격적으로 게재되었다.

 

이즈음 나타난 독특한 장르의 영화는 이른바 만주물이라고 불리는 액션영화들이었다. 이 무렵부터 쿵푸영화가 수입되어 인기를 누렸다.

 

67년 최고의 화제작은 배석인 감독의 <팔도강산>이었다. 팔도강산은 이후 5편의 속편으로 이어졌고, 드라마 <꽃 피는 팔도강산>으로 까지 제작돼 12년 간의 장기흥행을 이어간다.

 

17일 신동헌의 총천연색 장편만화영화 <홍길동>이 개봉 해 큰 인기를 끌었다. 데즈카 오사무의 <철완 아톰>63년에 만들었던 일본에선 드디어 한국이 일본을 앞지르고야 말았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오늘날 <홍길동>의 필름은 한 벌도 남아있지 않다.

 

17일 미국에서 활동하던 가수 윤복희가 미니스커트를 입고 귀국, 한국에서도 미니스커트 선풍이 일게 된다. 65년에 데뷔한 남진은 66<울려고 내가 왔나>를 히트시킨 데 이어 67년엔 <가슴 아프게>로 대히트를 기록한다. 한편 이미자는 <섬마을 선생님>, <흑산도 아가씨>로 인기를 끌었다.



 

배호는 <안개 낀 장충단 공원>, <돌아가는 삼각지>등 도시형 트로트로 인기를 끈다.

 

북한은 소련, 중국과 갈등을 빚으며 67년부터 김일성 개인숭배가 전면적으로 실시된다. 북한의 자주노선으로 소련과 중국으로부터 원조가 중단된다. 북한의 전쟁불사론에 따라 군사분계선에서 긴장은 점차 고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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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8-13 14: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윤복희 미니스커트 광고 기억납니다. 신세계백화점 광고였죠. ^^

시이소오 2016-08-13 14:30   좋아요 0 | URL
기억력 좋으시네요. ^^

2016-08-13 14: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8-14 11: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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