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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 씨를 조심하세요 - 편애하는 마음과 인문학적 시선으로 읽는 무라카미 하루키
우치다 타츠루 지음, 김경원 옮김 / 바다출판사 / 2016년 4월
평점 :
절판
야구를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야구를 과연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우치다 타츠루와 이시카와 야스히로는 <청년이여, 마르크스를 읽자>에서 마르크스의 ‘마’자로 모르는 젊은이들이 “마르크스는 정말 대단한 사람이야!”하는 감탄사가 나올 정도로, 마르크스를 쉽게 설명하겠다는 포부를 밝힌다. 어려운 걸 어렵게 설명하는 건 어렵지 않다. 어려운 걸 쉽게 설명하는 건 정말이지 어려운 일이다. 나는 어려운 걸 쉽게 설명하는 사람을 신뢰한다.
<하루키씨를 조심하세요>라는 제목을 보고 ‘아, 우치다 타츠루가 하루키를 신나게 까겠구나. 재밌겠는걸’ 하고 잔뜩 기대했었으나, 완전 속았다. 이 책은 ‘평론가’가 아니라 하루키의 팬의 입장에서 쓴 하루키론이다. 임경선의 <지극히 개인적인>의 일본판이라고 할까.
‘무라카미 하루키는 왜 세계적인 대중성을 얻었는가?’
우치다 타츠루에 따르면, 일본에서 위와 같은 물음을 던진 이는 아무도 없었다. 타츠루는 하루키 문학의 ‘위대함’에 대해, 여러 각도에서 근거를 제시한다.
아주 평범한 주인공의 일상에 불현 듯 ‘사악한 것’이 잠입해 들어와 사랑하는 것을 훼손합니다. 그러면 힘없고 왜소한 존재인 주인공이 온힘을 다해 그 침입을 저지하고 사악한 것을 억눌러 세계의 일시적인 균형을 회복한다는 이야기 구조입니다.
우치다 타츠루에 의하면, <양을 쫓는 모험>부터 하루키는 세계문학의 정통 계열을 발견한다. 타츠루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하루키 소설을 조셉 캠벨의 ‘영웅의 여정’ 플롯 군으로 분류할 수 있지 않을까. 하루키는 대학 시절 소설보다는 시나리오를 썼다. 따라서 캠벨보다는 크리스토퍼 보글러의 서사 구조가 더 적합할 듯싶다. (‘영웅의 여정’의 틀로 분석한다면, 하루키의 소설과 하야오의 애니매이션은 동일한 서사 구조다. )
평범한 세계 – 모험의 소명 – 소명의 거절 – 스승(조력자)와의 만남 – 관문의 통과 – 시험, 동맹, 적군 – 동굴로 접근- 고난 – 보상 – 귀환 –부활
하루키의 소설이 조셉 캠벨보단 크리스토퍼 보글러의 이론에 더 적합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보다 근원적인 이유는 ‘아버지’ 때문이다. 우츠다 타츠루는 하루키 소설에 ‘아버지의 부재’를 지적한다. ( 유일한 예외는 <1Q84>다. 캠벨에게는 시험이후 ‘아버지의 화해’의 단계가 있지만 보글러는 ‘동굴로의 접근’으로 대체했다.) 라깡 식으로 말하자면 ‘아버지의 자리’
캠벨의 이론을 가장 충실히 반영한 영화는 알려진대로 조지 루카스의 <스타워즈>다.
다스 베이더의 “내가, 니 애비다”의 충격적인 대사를 환기해보라.
“무라카미 하루키는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 작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아버지란 생물학적 부모가 아니라 분석적 의미의 아버지, 즉 세계의 질서를 담보하는 자를 가리킵니다. ‘신’이라고 불러도 좋고 ‘역사를 꿰뚫는 철의 법칙성’이라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이 ‘아버지’는 고대에는 ‘신’이였고, 헤겔에게는 ‘절대정신’이었고, 르네상스에서는 ‘이성’이었고, 낭만주의에서는 ‘인간’이었다..... 현대에는 ‘시스템’일 수도 있다. 니체는 ‘신은 죽었다’ 고 말했다. 즉, ‘세계의 질서를 담보하는 자’가 없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자면 절대적인 가치가 없다는 뜻이다. 니체는 ‘아버지의 자리’에 ‘위버멘쉬’ 즉, 초인을 놓았다. 하루키는?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에는 사람과 사람의 대립이 없다는 비판이 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거기에는 확실히 무언가가 심하게 결여되어 있다. 그러나 기묘하게 들리겠지만, 무라카미 하루키는 자신의 그 결락을 처음부터 스스로 획득한 것일까?
무라카미 하루키의 결락은 무라카미 하루키에게 귀속시킬 수 있는 그러한 결락일까?
내게는 그가 너무나 민감하기 때문에 일본 사회로부터 순화시킨 형태로 받아들인, 일본 사회에 내재한 결락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 P. 138.
우치다 타츠루는 가토 노리히로의 하루키에 대한 위와 같은 비평에 대해, 가장 통찰력 있는 비평이라고 말한다.
나 역시 무릎을 쳤다.
"진실로 ‘예민한 작가’는 그의 시대에 과잉으로 존재하는 것에 대해서는 별로 쓰지 않습니다.
.....실로 뛰어난 작가는 그 시대가 심하게 결여하고 있는 대상에 대해, 그것을 결여하고 있다는 것 자체를 의식하지 못하는 대상에 대해, 그것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한다는 사실로 인해 그 시대의 성격이 규정되는 것에 대해, 글을 씁니다. 예컨대 그 사회의 ‘그림자’에 대해."
이 대목이 우치다 타츠루의 혜안이 빛나는 부분이고, 하루키를 평가하는 데 굉장히 중요한 분기점이라고 본다. 타츠루는 하루키가 세계적인 지지를 얻을 수 있는 본질적인 이유로, 하루키가 결여한 것을 세계 전체가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공감한다. 공감하는데, 나는 여기서 하루키에 대한 평가가 극과 극으로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루키는 ‘아버지의 자리’에 아무것도 놓지 않는다. 하루키의 등장인물들은 우치다 타츠루가 지적한대로 ‘절대적인 가치’가 결여되어있다. 시크함,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대한 ‘냉담함’, 혹은 ‘무심함’을 특징으로 한다.
부조리한 세계에 내던져져 있다는 것은 한마디로 자신이 ‘서 있는 위치’를 알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어디에 있는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무엇을 하면 좋은지 알지 못합니다.
우치다 타츠루는 존재의 근거가 없는 상황에서 자신의 존재를 의미 있게 만들기 위한 본질적인 물음에 하루키의 대안이 ‘문화적인 눈 치우기’라고 말한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니,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내가 나서서 묵묵히 하는 것. ‘공정함’, ‘예의’를 지키기.등등
감동적인 분석 아닌가. 그러나, ‘아버지의 부재’의 현실이 하루키 소설에선 너무나 매력적으로 묘사된다는 점이 문제다. 재즈음악, 언더락 위스키, 맥주. 섹스. ‘아버지’ 따위 없어도 현실은 ‘잘 만들어진 디저트’와 같은 섹스로 충분하다. 아니, 그냥 이대로가 행복하다. 사회의 불평등이나 부조리 따위 신경 쓰고 싶지 않다. 오로지 나와 내 여자, 내 친구만이 중요하다.
즉, 하루키 소설은 자본주의를 즐기며 사회에 무관심한 이들에게 일종의 마취제로 작용한다. 하루키를 읽는 우리는 무심함에 취하고 정신은 마비된다. 이것이 이데올로기가 무너지는 나라마다 하루키가 팔리는 이유다. 일본의 ‘사토리 세대’가 떠오르지 않는가.
하루키의 문장은 더더군다나 머리에서 나온 게 아니라 몸으로부터 나온다. 하루키에게 소설을 쓰는 행위는 밥을 짓는 행위나 일종의 달리기다. 머리로부터 나온 문장은 거부할 수 있을지언정 몸으로부터 나오는 문장은 쉽사리 거부할 수가 없다. 더군다나 하루키는 있는 재료를 가지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다.
“우리는 그 속에 ‘내던져진’ 형태로 이 세상에 태어납니다. 쓸 만한 것은 주어진 것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두 손에 쥐어진 자원을 활용하여 최고의 성과를 내놓는 것, 그것뿐입니다. ”
하루키 소설 중 <1Q84>를 가장 좋아한다. <1Q84> 만이 ‘아버지’가 나오기 때문은 아닐까.
어디로 가야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암울한 시대다. 하루키 문학에 잠시 취해도 좋으리라. 그러나, 그곳에 줄곧 취해 있다 보면 어느새 어둠이 내려앉을 것이다.
경계를 넘어야 한다.
하루키를 조심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