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로 이 책 (우리는 거대한 차이 속에 살고있다) 을 반납하려니 뭔가 미진하다. 잔여물이 남은 듯한 


책에 소개된 작가들의 소설을 읽어보고 싶다. 

일단 위화의 책도. 










 








































내가 읽은 건 <허삼관 매혈기>, <세상사는 연기와 같다>, <인생> 세 권 뿐. 

위화 책이 이렇게 많이 나왔다니. 



쑤둥이 누구냐? 쑤퉁은 위화를 처음 만났을 때, 길거리에서 같이 놀던 아이를 만난 것 같았다고 하는데, 위화 역시 그런 느낌이었다고. 














































이렇게 많은 책을 냈는데, 나는 아직 쑤퉁의 책 한 권도 읽어보질 못했다. 이런 밥통!! 



위화가 처음에 사회에 눈을 뜬 책은 바진의 <가>였다. 바진은 또 누구냐? 






























바진도 이렇게 많은 책이 번역되어 있건만, 아직 한 권의 책도 읽지 않았다니. 



<비상과 변신>에서 소개한 책도 읽어보고 싶다. 

특히나 간보의 <수신기>


















브루노 슐츠의 책도 읽어 본 적이 없다. 












































<삶과 죽음, 죽음 이후의 부활>에 소개된 책들도 











































위화가 특히나 좋아하던 작가들의 책에도 관심이 간다. 









































































이언 매큐언은 전작을 해야겠다. 


하진이 이렇게 위대한 작가란 말인가? 

















츠바이크도 전작을 해야. 허걱, 츠바이크 책이 이리 많을 줄이야. 


























































































어릴 때 읽었던 뒤마의 책도 다시 한 번 읽어보고 싶다. 































루쉰문학원 농구장에서 위화와 같이 축구를 했던 모옌도 내겐 전인미답의 지역이다. 허걱, 모옌의 책도 이리 많을 줄이야. 

























































































그런데 유르스나르의 어느 책 문장일까. 

"그런데 그의 목은 기이한 붉은 스카프를 둘렀다.”는

















이제야 이 책을 떠나 보낼 준비가 되었다. 


모든 사람은 그가 속한 사회에 책임이 있다. 그 사회의 병폐에 대해서도 역시 그러하다.”

헨리크 입센

 

21. 지금 중국 언론에는 이와 유사한 가짜 뉴스들이 넘쳐나고 있다. 가짜 뉴스를 만들어낸 사람을 추적해 법적 책임을 묻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가짜 뉴스를 퍼뜨리는 것은 사기 행위다. 하지만 중국에서 사람들은 이를 그저 홀유忽悠라고 생각한다. 홀유라는 말은 번역하기가 쉽지 않다. 사기를 뜻하기도 하고, 뭔가를 띄워준다는 의미도 있다. 약간 오락적인 의미도 있으니, 어쨌든 진지하게 대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나는 오히려 지렛대란 말이 더 낫다고 본다.

 

내 생각에 작가는 서사 차원에서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첫째 유형의 작가는 여러 해 동안의 창작을 통해 자신의 성숙한 서사 체계를 세우고, 이후의 창작에서는 그 스타일의 서사를 계속 끌고 가면서 다른 제재라도 그 체계 속에 수용하는 작가다.

 

둘째 유형의 작가는 성숙한 서사 체계를 세우자마자 자기의 가장 자신 있는 서사 방식이 새로운 제재를 처리하는 데 적절치 않다는 것을 발견하는 경우다. 그렇게되면 그는 새로운 제재를 표현하기에 가장 적합한 서사 방식을 찾아야 하고, 그러한 작가의 서사 스타일은 늘 변하기 마련이다. 나는 두 번째 유형의 작가다.

 

지금의 내 창작 원칙은 이렇다. 어떤 제재가 나를 충분히 흥분시키고 오랫동안 창작해나갈 욕망을 불러일으킬 때 내가 가장 먼저 할 일은 그 제재에 가장 적합한 서사 방식을 찾는 것이고 동시에 스스로 과거의 창작에서 익숙해진 서사 방식을 잊으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가장 적합한 서사 방식을 찾는 것을 방해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나는 제재가 다르면 표현 방식도 달라야 한다고 굳게 믿는 까닭에 내 서사 스타일은 늘 변화할 수밖에 없다.

 

P66. 여기서 독서를 할 때 중요한 문제가 부상하는데 작가에 대한 선입견을 토대로 문학 작품을 읽는 것은 잘못이며, 위대한 독서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난 상태에서 읽는 것이란 점이다. 그것은 텅빈 마음을 품고 읽는 것으로, 독서 과정에서 마음은 빠르게 풍성해진다. 왜냐하면 문학은 언제나 미완성이고 부조리 서사의 특징도 미완성이기 때문이다.

 

P69. 상상력과 통찰력이 온전히 결합할 때 문학 속 상상력이 진정으로 드러날 수 있으며 그렇지 않으면 터무니없는 생각이거나 공상, 허튼 생각일 뿐이다.

 

내 제한된 독서 경험 속에서, 신선들이 어떻게 하늘에서 내려오고 어떻게 다시 하늘로 올라가는지를 묘사한 것으로는, 나는 중국 진나라 때 간보가 쓴 <수신기>에 있는 묘사를 첫째로 꼽을 만하다고 본다. 간보가 묘사한 신선은 비가 내릴 때 하늘에서 내려오고, 바람이 불 때 땅에서 하늘로 다시 올라간다.

 

독서를 통해 우리는 신화나 전설 서사든 초현실이나 부조리 서사든, 문학적 상상이 변신을 서술할 때 남긴 차이가 늘 이야기의 주요 실마리이고 이 차이에서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줄거리가 탄생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그 다음 줄거리도 여전히 차이의 공간을 남기기 마련이어서 차이를 숨긴 새로운 줄거리가 계속 탄생하고, 이는 이야기가 끝에 이를 때까지 계속됨을 알 수 있다.

 

이 이야기에서 상상력이 서사의 차이를 만들었다면 그러한 서사의 차이에 활기를 불어넣은 것이 바로 통찰력인 것이다.

 

언젠가 우연히 하이네의 시구를 읽게 되었다. “죽음은 서늘한 밤이다.” 그러자 진즉 사라졌던 유년의 기억이 순식간에 돌아왔는데 깨끗하게 씻은 마냥 또렷했다. 하이네가 쓴 것은 내가 유년 시절 영안실에서 낮잠을 자면서 느낀 것이었다. 그뒤 깨달았다. 이것이 바로 문학이다.

 

나는 문학 작품에서 상상력과 통찰력이 입과 입술처럼 의존하는 것의 중요성을 설명하기 위해 많은 예를 들었다. 이는 동시에 문학에서 위대한 사상은 모두 현실에 근거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나는 여러 차례 이렇게 말했다. 문학에 진정으로 어떤 신비한 힘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다른 시대, 다른 민족, 다른 문화, 다른 환경에 속한 작품에서 우리 자신에게 내재된 감성을 읽도록 하는 것이라고. 문학은 그처럼 미묘하다.

 

어떤 하나의 단락, 이미지, 비유, 대화 등이 독자의 기억 속에 갇힌 어떤 지난 일을 되살리고, 그런 뒤 그것을 기억의 파일과 그림 속에 영원히 보존한다. 이러한 이유로, 문학을 읽음으로써 특정 시기의 특정 경험을 되살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더 많은 시기의 보다 더 많은 경험을 되살릴 수도 있다.

 

상상력의 길이는 모든 경계를 지워버릴 수 있다. 독서와 독서 사이의 경계, 독서와 생활 사이의 경계, 생활과 생활 사이의 경계, 생활과 기억 사이의 경계, 기억과 기억 사이의 경계......삶과 죽음 사이의 경계.

 

삶과 죽음 사이에는 비밀 통로가 있는데, 바로 영혼이다. .....사람과 영혼의 관계란 어떤 경우 삶과 죽음의 관계다. 이것은 거의 모든 문학의 공통된 인식이다. 다른 점은 표현이 다를 뿐이다. 더구나 모든 일과 모든 사물에는 다 영혼이 있다. 예술은 더욱 그러하다.

 

스테판 말라르메는 세 번째 이후에 여자를 꽃에 비유한 천재다. 그가 어떻게 했는지를 보자. 그는 어떤 아름다운 귀부인을 끌어들여 이런 시구를 바쳤다. “모든 꽃은 리지 부인을 꿈꾼다.”

 

어느날 나는 로런스 소설의 한 부분을 읽게 되었고, 그 뜻은 대강 이러했다. 여인이 아름다운 이유는 여자들 몸에서 성적인 것을 짙게 발산하기 때문이다. 여자가 점점 늙어가는 것은 얼굴에 주름이 많아지는 것이 아니라 여자의 몸에서 성이 점점 사라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로런스의 이 말은 내가 그의 작품을 이해하고, 그가 왜 평생 에로스 묘사에 흥미를 가졌는지를 이해하게 했다. 그의 상상력은 성의 영혼을 찾은 것이다.

 

전설에 따르면 백조가 죽음을 맞이하며 부르는 노랫소리가 가장 아름답고 감동적이라 한다. 그래서 서구 미학 전통에서는 최후의 작품이라고 하고, 중국에서는 절창이라 한다.

 

유르스나르는 이 부분에서 감탄이 나오는 묘사를 한다. 링의 머리가 잘리고 나서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갈 때의 묘사인데, 그녀는 이렇게 썼다. “그런데 그의 목은 기이한 붉은 스카프를 둘렀다.” 이는 원래의 링과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링 사이에 생긴 차이를 드러낸 것이자, 비례를 드러낸 것이다. 서사를 합리적으로 만들었을뿐만 아니라 훨씬 힘있게한 것이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 붉은 스카프가 서사에서 대단한 이유는 삶의 죽음의 비례 관계를 드러냈기 때문이고, 이처럼 완벽한 비례의 출현으로 죽은 뒤 다시 살아나는 것이 이처럼 뛰어나게 묘사됐다는 것이다.

 

스트린드베리의 위대한 점이 여기에 있다. 우아하고 아름다워야 할 때 스트린드베리는 시인이다. 거칠고 저속해야 할 때 스트린드배리는 노동자다. 무미건조해야 할 때 스트린드베리는 고도근시 안경을 쓴 회계사다. ......그런 뒤 그는 뭇소리가 웅성거리는 <빨간 방>을 썼다


국왕이 드넓은 영토를 소유하고 있는 것처럼 매큐언이 보여주는 경계의 서사는 드넓은 삶의 감각을 지니도록 했다. 그는 희망을 쓰는 동시에 절망을 썼고, 공포를 쓰는 동시에 안도감을 썼고, 차가움을 쓰는 동시에 따뜻함을 썼으며, 황당함을 쓰는 동시에 핍진함을 썼고, 폭력을 쓰는 동시에 유약함을 썼고, 이성적인 냉정함을 쓰는 동시에 감정적인 충동을 썼다.

 

예를 들어, <가정 처방>은 내가 <북회귀선>을 읽고 나서 쓴 가벼운 풍자적 이야기다. 나는 헨리 밀러에게 감사하는 동시에 일종의 풍자적 사랑 이야기를 써 그를 놀려주었다. 이 이야기는 로스의 <포트노이의 불평>을 차용하기도 했다. <가장 무도회>는 앵거스 윌슨의 <산딸기 잼>을 본떴다. 나는 모든 이야기의 연원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분명 남의 영토를 순시한 뒤 무언가를 몰래 들고 나왔고, 이것을 빌려 내 자신에게 속한 것을 창작하기 시작했다.”

 

문학 천재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독자들이 자기 작품을 읽을 때 독특함에서 출발해 보편에 도달하도록 하는 자다. 매큐언이 바로 그렇다.

문어는 종류가 많게는 650여종에 달한다. 가장 신기한 것은 암수 자색담요 문어의 크기 차이다. 암컷 문어의 체중은 수컷 문어의 4만 배이고, 수컷은 고작 암컷의 눈 크기만 하다. 문어가 서로 사랑하는 것은 깜짝 놀랄 만하다. ‘사랑의 힘이란 말을 자색담요문어에게 쓴다면 인류는 다시 이 말을 쓰는 것이 쑥스러울 것이다.

 

제임스 조이스의 작품에 나오는 묘사가 생각났다. 그는 이렇게 썼다. 더블린의 날씨는 갓난아이의 엉덩이처럼 종잡을 수가 없다. 금방 오줌을 쌌다가 금방 똥을 싼다. (대강의 의미가 이렇다)

 

10여 년 전에, 내가 처음 미국에 갔을 때 미국 노턴 출판사의 이사장 램 선생이 내게 말했다. “언론이 무엇인지 아세요?”

그는 집 소파에 앉아 검지를 펴면서 내게 설명했다. “예를 들어 당신 손가락이 화상을 입었을 때 언론이 보도를 하면 그것은 진짜고, 언론이 보도를 하지 않으면, 그것은 가짜지요.”

 

마이애미의 바닷물을 햇볕 아래서 그 단계가 분명하다. 먼 곳은 신비한 검은 색이고, 가까운 곳은 친근한 녹색이며, 모래사장에 부딪치는 것은 흰색 파도다. 타오르는 불길 때문에 우리는 붉은 색을 열정적인 색이라 생각하고, 겨울의 쌓인 눈 때문에 흰색을 냉정한 색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열정으로 솟구치는 파도를 보면 이것은 바다의 영원히 쉬지 않는 맥박이고, 흰색도 마찬가지로 열정적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내가 해안에서 본 것은 솟구치는 흰색 불꽃이었다.

 

어제 샤킬 오닐이 은퇴를 선언했다. 이 녀석은 거친 덩크슛으로 농구대를 무너뜨렸고, 싸움도 많이 하고 스캔들도 적지 않았으며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고 권투 시합에도 나갔다. 별명을 셀 수가 없고, 문제점도 셀 수가 없다. 하지만 못된 행적투성이인 이 자는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었다. 이 세상에는 다른 종류의 인간도 있다. 그런 사람은 아무런 문제점이 없지만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진 않는다. 아무 문제도 없는 사람과 사귀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전문가란 무엇인가? 우리 네티즌이 답했다. ‘문가라고. (중국어로 전문가는 좐자專家인데 이 자와 벽돌을 뜻하는 이 발음이 같다. 에피쿠로스가 대답했다. “사람에게 자기 고유의 것이란 없다. 자신만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 이외에는.”

 

뜨거운 댈러스와 습한 마이애미를 거쳐 상쾌한 시카고에 왔다. 기온과 마음이 서로 딱 맞다. 파이널 결승의 폭발적인 열정을 경험한 뒤 이제 안정을 찾았다. 생의 한 단락이 이제 끝났다. 완전히 다른 단락의 생이 이제 시작될 것이다. 기나긴 인생을 사람들은 왜 짧다고 느끼는 것일까? 아름다운 생은 하나하나 작은 단락일 뿐이기 때문이리라. 처음 마이애미 아메리칸 항공 센터에 들어서던 때가 기억난다. 우리 가운데 누가 말했다. “나는 내가 부러워.”

 

뉴욕일기.

 

100명의 학생에 수업하는 것이 수업이고, 100개의 의자에게 수업하는 것은 행위예술이다.

 

소수 중국인들은 돈 벌기가 너무 쉬워서 돈을 어떻게 벌었는지를 모른다. 다수 중국인들은 돈 벌기가 너무 어려워서 돈을 어떻게 벌 수 있는지를 모른다.

 

루 앤이 내게 미국에서 1년에 2만 종이 넘는 책이 출판된다고 말해줬다. 10여 년 전에 처음 미국에 왔을 때 미국은 매년 12만 종의 책을 출판했고, 중국은 10만 종을 출판했따. 그뒤 몇 년 동안 중국의 출판 종수는 빠른 속도로 미국을 앞질러, 올해는(2011) 30만 종 이상에 이르렀다.

 

자신의 무지를 알면 완전한 무지가 아니다. 완전한 무지는 자신의 무지를 모르는 무지다.

 

끝까지 말을 마친 뒤 이 토고 출신 여기자는 큰 소리로 웃었다. 그는 토고에 이런 속담이 유행했다고 했다

중국인이 남긴 아이가 남긴 벼보다 많다.”

아프리카에 관한 두 이야기는 그 길은 다르지만 목적지는 같다. 둘 다 중국과 아프리카의 우정 이야기다.

 

자기가 위하이궈의 팔을 잡았는데 힘이 셌던 모양이다. 그런데 위하이궈는 세게 잡았다고 말하는 게 아니었다. 그가 말했다.

내 혈관을 꽉 쥐었어요.”

 

문학 작품의 언어는 자신의 존재를 전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서술의 힘과 정확성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문학의 서사 언어는 눈길이어야 한다. 눈길은 무엇을 보았는지를 위한 것이지, 자신을 전시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눈길의 존재 가치는 보았다는 것이다. 서사 언어는 눈길처럼 생활에서 무언가를 찾고, 독서를 이야기 속 인물과 사상, 감정 속으로 인도한다.

 

중국 전통 미학에 구름을 물들여 달을 표현하는 방법이 있는데, 이를 가지고 서사 언어의 역할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달을 그릴 때는 구름만을 채색하고 달은 그리지 않지만, 사람들이 보는 것은 달뿐이고 구름은 없다. 내 생각에 소설의 서사, 특히 장편소설의 서사에서 언어는 공을 세운 뒤 물러나야 한다.

 

그런데 창작 경험은 내게, 서사의 순결성과 표현의 풍부함 사이에는 영원한 대립이 존재하며, 작가는 시시각각 서사를 보호할지 신선함을 담보할지를 취사선택해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었다. 어떤 경우 둘은 하나로 융합되고, 어떤 때는 물과 불처럼 섞이지 않았다. 통상적인 의미에서 하나의 관점을 찾아 서술하는 소설을 나는 관점 소설이라고 부른다. 이는 왕왕 나머지를 버림으로써 서사의 순결을 선택한다. 그러나 정면 서사의 소설, 내가 정면 소설이라 일컫는 소설의 경우는 그렇게 하기가 힘들다. 그런 소설은 모종의 시대적 특징을 표현해야 하기 때문에 그 시절의 유행어를 회피할 수가 없다. ‘관점소설에서 시대는 영원한 배경이고, ‘정면 소설에서 시대는 현장이다.

 

내 과거 창작을 돌아보면, 내 모든 소설은 서사를 거두어들였는데, <형제>만은 서사를 놓아보냈다.........나는 처음으로 정면으로 다루는 것이 무엇을 초래하는지를 알았다. 당시의 어떤 특징이 더 이상 배경이 아니라 현장일 때는 서사가 나도 모르게 개방되었다.....상권을 쓰면서 나는 서사를 풀어놓으려고 노력을 했지만 서술하는 시대에 지나치게 억눌렸고 서사는 늘 숨을 가누기 힘들었다. 하권을 쓰면서 지금 이 시대로 진입했을 때 내 서사는 마침내 진정으로 이완될 수 있었다. 왜인가? 우리가 방만한 시대에 살고 있어서다. 우리 현실의 황당함과 비교하면 <형제>의 황당함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고, 나는 그것에 집중해 서술했을 따름이다.

 

나는 옌펑의 말에 아주 동의한다. “오늘 우리의 최고의 현실은 바로 초현실이다.”

 

왜 작가의 상상력은 현실 앞에서 늘 창백하고 무력한가. 우리 모든 사람들이 하는 모든 말은 우리 역사와 현실만큼 풍부하지가 않다.

 

나는 오늘을 사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삶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하고, 특히 전혀 모르는 사람의 삶에 관심을 가져야 하며, 이는 다른 사람의 삶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자신의 삶을 더 잘 이애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여러 번 말했다....엘리엇의 시구도 이야기했다. “새가 말한다. 인류는 너무 많은 진실을 견딜 수 없다고.”

 

그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형제> 하권을 좋아하지 않는 이유가, 내가 하권에서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고 난 뒤의 시대를 서술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 말은 나를 뒤흔들었다......

 

갖가지 사회 병폐로 볼 때, 오늘 이 시대는 온갖 마귀가 난무하는 시대다. 나는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이 시대에 나 자신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자문했다. 나 역시 난무하고 있는 것 같다. 나는 그저 작은 마귀일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미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뒤의 생활에 습관이 들어 있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 사실을 인정하고 싶어할까? 나는 <형제> 상권과 하권에서 서술한 두 시대를 겪었다. 나는 내가 왜 이렇게 많은 병폐를 썼는지 잘 안다. 나도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이 세 부분은 간결한 언어를 쓸 방법이 없었다.. 왜냐하면 이것은 죽은 사람의 관점에서 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언어는 절제되고 차가워야 했고, 살아 있는 사람의 생기발랄한 말투를 쓸 수 없었다. 현실을 이야기하는 부분은 살아있는 세계의 지난 일을 쓸 때라야 언어의 온도를 조금 높일 수 있었다. 나는 쓰면서 현실 세계의 냉혹함을 느꼈고, 사납게 썼다. 그래서 따뜻한 부분이 필요했고, 지극힌 선한 부분이 필요했으며, 이는 내게 희망을 주고, 독자에게 희망을 주었다. 현실 세계가 사람들을 실망시킨 뒤 나는 아름다운 죽은 자들의 세계를 쓴 것이다. 이 세계는 유토피아도 아니고, 도화원도 아니다. 하지만 무척 아릅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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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16-06-24 15: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언제 다 읽죠 ㅋ

바진은 저도 무척 좋아하는 소설가에요. 루쉰 선생의 제자인데 문화대혁명 때 엄청난 고생을 했죠. `매의 노래`가 특히나 제 기억에 아직도 남아요. `매의 노래`는 아마 바진이 문화대혁명 때 겪은 고통을 3권의 책으로 냈는데 그 중 한권만 번역된 것으로 알고 있어요.

바진 이후 중국 문학은 손을 대지도 못했네요. 츠바이크도 몹시 좋아하는데 ㅋ 거기도 아직 손 대지도 못하고 ㅋㅋㅋ 아 다 읽고 싶어라 ㅋ

시이소오 2016-06-24 15:57   좋아요 0 | URL
오, 대단하세요. 저는 위화 책 읽다 바진을 첨 들었는데요.
그러고보니 루쉰 전집도 읽다 말았네요.

루쉰은 또 언제 다 읽죠.
독서는 정말 네버엔딩이네요^^

루쉰P 2016-06-24 21:11   좋아요 0 | URL
끝나지가 않아요 ㅋ 공포영화 같아요 ㅋㅋㅋ 전 그래서 마음 접고 덕후가 될려고 준비 중이에요 ㅎㅎㅎ 제 몫까지 시이소오님의 리뷰 기대하겠습니다. ㅋㅋㅋ 즐건 금욜이요 ㅎ

시이소오 2016-06-24 21:27   좋아요 0 | URL
저도 루쉰님의 리뷰 기대하겠습니다.
독서불금 되시길 ㅎ ㅎ

cyrus 2016-06-24 17: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위화가 <첫사랑, 마지막 의식>을 호평하는 내용을 보고서, 이 책을 잘 샀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절판된 책인데,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구입했습니다. 위화의 <제7일>을 두 번 읽었습니다. 두 번 다 읽는데, 눈물을 흘릴 뻔 했습니다.

시이소오 2016-06-24 17:54   좋아요 0 | URL
제 7일도 얼른 읽고 싶네요 ^^

물고기자리 2016-06-24 18: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위화의 산문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를 강추합니다! ㅎ

몸으로 읽는 느낌이랄까, 위화의 인생을 같이 살고 돌아온 것 같았고, 읽었던 소설도 다시 펼쳐보고 싶게 하더라고요.

몇 년 전쯤 중국의 여러 지역에서 모험하듯 머물렀던 적이 있는데, 중요한 일을 앞두고 불신과 신뢰 사이에서 많이 고민했던 기억이 나요. (두 가지를 모두 겪었지만요^^) 이런저런 경험들 때문인지는 몰라도 중국을 이해하는 폭이 더 커진 것 같아서 저는 참 좋았어요.

시이소오 님도 좋아하실 것 같은 게, 중국을 읽으며 우리를 돌아보게 되고 또 작가에게 삶의 경험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통찰하는 능력은, 결국 삶 한가운데를 통과하는 데서 나오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어쩌다 보니 책 리뷰를 여기다 쓰는 것 같아졌어요;; 아무튼 저는 좋았습니다^^

근데 리스트 중에 포크너는 없네요? (시이소오 님 취향이 아니신가요?ㅎ)

시이소오 2016-06-24 20:28   좋아요 0 | URL
사람의 목소리도 읽고 싶네요.
포크너는 무덤간 일화 밖에 안나오길래 뺐습니다. 포크너 팔윌의 빛이 너무 읽고 싶었는데 미번역이라 영문판 도전했다가 끝내 다 못 읽은 기억이나네요.

아, 읽을 책이 너무 많아요.
천국에가서 ㅇ
책을 읽을수 있다면 착하게 살아 천국가고 싶어요.

추천감사합니다 ^^

물고기자리 2016-06-24 21:04   좋아요 0 | URL
저도 포크너는 언젠간 도전해야지 하고 있습니다. 위화도 자기 스승이라고 하고, 제가 좋아하는 작가들이 자꾸 언급해서요ㅎ

책 읽는 천국이라면 진짜 천국이네요^^

시이소오 2016-06-24 21:28   좋아요 0 | URL
저도 포크너 소설 벼르고 있어요 ㅎ ㅎ

alummii 2016-06-25 14: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기있는 책 ..죽기전에는 다 꼭 읽겠어요 ㅎㅎ마지막줄 오타나셨네요 ㅎㅎ

시이소오 2016-06-25 15:57   좋아요 0 | URL
ㅋ 요즘 오타가 잘 안 보여용. ㅋ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