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한국근현대사를 보는 눈

 

제국의 렌즈와 재현의 정치학

제국의 렌즈.

 

사진은 객관적이지 않다. 제국의 렌즈에 잡힌 조선인들은 그저 원주민에 불과했다.

 

윤치호가 본 민주주의와 공산주의, 윤치호의 협력일기. 박지향

 

윤치호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상은 사회적 다윈주의와 기독교였다. 그는 세상이 잔혹한 투쟁의 장이기에 3.1운동에도 반대했다. 울고 짜고 해봐야 소용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윤치호는 또한 독실한 기독교도로 하나님이 전쟁을 진보와 이성을 향한 수단으로 만들어놓았다고 믿었다. 저자는 윤치호의 인간적 고뇌에 동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고 에필로그에 적었다고. 로쟈의 말대로 일종의 스톡홀름증후군?

 

어떤 역사전쟁 관전기뉴라이트 사용후기, 한윤형

 

자칭 키보드워리어인 저자가 뉴라이트 역사학자들이 촉발한 역사전쟁을 정리하고 평가한 상식인을 위한 역사전쟁 관전기. 한윤형은 우선 민족과 민족주의가 근대의 산물이라는 뉴라이트의 주장을 적극 수용한다. 3.1운동 이후에 한국 민족주의는 전면화됐고 역사적 실체가 됐기 때문이다. 따라서 저자는 분단국가를 수립한 김일성과 이승만은 사천년 단일민족을 두 동강냈기 때문에 나쁜 것이 아니라 3.1 운동 때 이룬 합의를 위반했기 때문에 나쁜 것이라고 주장한다.

 

둘째로 김구에 대한 평가다. 저자는 김구의 격렬한 반탁 입장이 예기치 않게 친일파와 이승만에게 힘을 실어주었다고 말한다. 셋째로 박정희에 대한 평가다. 뉴라이트는 만한이 자본주의 덕분에 경제가 성장했다고 주장하지만 박정희식 모델은 자유시장경제와는 거리가 멀로 오히려 스탈린식 사회주의에 가까웠다는 것이다. 넷째로는 대한민국사의 주류세력은 일관된 기득권 세력이 있었던 게 아니라 기회주의자들의 역사였다고.

 

사상의 은사에서 사상의 오빠로. 리영희 프리즘. 고병권 외

 

1997년 겨울 <한겨례신문>의 수습기자들이 사내 교육으로 리영희 선생의 강의를 들었지만 모두 잤단다. 한때 멀쩡하던 대학생들이 리영희의 책만 읽으면 이상하게 변해 사회와 나라를 걱정했던 것과 비교하면 대조적인 풍경이다. 무엇이 달라진 것인가. 한윤형에 따르면 그때와 달리 대학 진학률이 달라졌다. 오늘날 대학생들은 자본이 자신을 착취해주길 간절히 바란다. 리영희 선생은 변혁은 반드시 온다는 신념을 거듭 피력했다. 그는 국가 사회의 지배세력이 계속해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없는 사람들을 박탈하고 모두에게 공정히 돌아가야 할 기회를 빼앗는다면 투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고 믿는다.

 

그의 이러한 신념은 레닌을 반복하라고 말하는 슬라보예 지젝의 주장과도 겹친다. 지젝은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에서 혁명적 과정의 두 가지 계기를 극단적인 부정의 제스처새로운 삶의 창안으로 정리한다. 문화대혁명의 실패에 대해 지젝은 문화대혁명이 과격했기 때문이 아니라 충분히 과격하지 못했기 때문에 빚어진 것이라고 말한다. 지젝은 베케트의 말을 인용해 다시 시작하라, 다시 실패하라. 더 잘 실패하라고 말한다.














 

로자의 리스트11. 후쿠자와 유키치 읽기.

 

22. 불한당들의 세계사.

 

부도덕하고 참혹한 미국사를 고발하다. 권력을 이긴 사람들. 하워드 진.

 

권력의 시각이 아닌 민중의 시각, ‘아래로부터의 역사를 지향하는 그가 보기에 미국사는 노예 소유주, 채권자, 인디언 학살자, 군국주의자, 땅 투기꾼, 거대 기업 등 주로 부유한 백인을 위한 역사였다. 그러나 한편 역사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는다. “민중이 저항하고 함께 모이고, 그래서 때로 승리했던 과거의 숨은 사건들이 그가 품은 희망의 근거다. 저자는 미국을 건설한 것은 정부가 아니라 국민이라고 믿는다. 그에게 국민은, 혹은 미국사의 진정한 영웅은 텔레비전이나 신문 헤드라인을 장식하는 인물이 아니라 간호사, 의사, 교사, 사회사업가, 지역운동가, 병원 잡역부, 건설노동자 등이다.

 

전 세계에서 가장 사악한 나라를 뽑자면, 미국과 이스라엘이 아닐까. 일반인들이 미국의 사악함을 피부로 느끼지 못하는 것은 미국 대중문화의 영향 탓이다. 제발, 탐 크루즈는 미국이 아니다! 그런 사악한 나라에 전작권을 되돌려 주는 건 박근혜 정부의 사악함도 그에 못지않음을 증명하는 것이리라.

 

<미 제국의 민중사>

<오만한 제국>

<미국민중 저항사1,2>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

<살아있는 미국 역사>

<권력을 이긴 사람들>

 

1권력 혹은 불한당들의 세계사,

1권력, 히로세 다카시.

부의 제국 록펠러, 론 처노.

 

미국의 재벌 가문 모건과 록펠러가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유지하는 과정에서 어떻게 미국 사회를 지배하고 세계를 조종했는지 추적하는 <1권력>은 말하자면 이 불한당들의 세계사.

시작은 미국의 남북전쟁이었다. J.P 모건은 무기를 판매하면서 6배의 차익을 남겼다.

 

1901년 당시 백수의 왕 사자라고도 불린 필적할만한 거대한 구렁이 아나콘다가 나타났으니 그가 바로 석유사업가 록펠러였다. 이 양대 자본가가 미국을 지배해왔다는 게 히로세 다카시의 주장이다. 20세기의 첫 대통령 올린 매킨리부터 레이건까지 내각의 66개 각료 자리를 조사해 본 결과 그 중 290개의 자리, 79퍼센터가 모건 록펠러 연합의 수족이었다. 1983년 기준 미국 매출 10위권 기업, “1위 액슨, 2GM, 3위 모빌, 4위 포드, 5IBM, 6위 텍사코, 7위 듀폰, 8위 인디애나 스탠더더 오일, 9위 소칼, 10GE”순위를 진짜 주인으로 바꾸어 나열하면 “1위 록펠러, 2위 모건, 3위 록펠러, 4위 모건 록펠러, 5위 모건, 6위 모건- 록펠러, 7위 모건, 8위 록펠러, 9위 록펠러, 10위 모건이 된다.

 

베트남전에서도 미국은 패배했지만 모건 록펠러 연합은 떼돈을 벌었다.

 

로쟈는 매카시는 빨갱이 사냥꾼으로서 자기 역할에 충실한 파시스트였지만 모건과 록펠러 같은 투기꾼에게 빨갱이 사냥 자체는 목적이 아니었다. 그들이 필요로 한건 빨갱이의 위협을 조장해서 전쟁을 고무하고, 그를 통해서 자기 소유의 기업이 거대한 이익을 올리는 것뿐이다. <....>파시스트나 행동대원은 투기꾼들에 의해 교묘하게 이용당할 뿐이라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라는 대목을 강조한다.

 

우리에게도 너무나 친숙하기 때문이고 세상은 파시스트들이 아니라 투기꾼들이 움직인다는 게 히로세 다카시의 핵심적인 전언이라고. 남한사회라고 다르지 않아 보인다.

 

한국 재벌가 지도를 그려보면 10대 기업이 혈연관계로 거미줄마냥 얽혀있음을 볼 수 있다. 그들이 이 나라를 농단하고 있음은 두말할 필요 없다.

 

오만하고 저급한 제국, 미국이 세계를 망친 100가지 방법, 존 터먼.

 

저자는 미국이 세계를 망쳐놨다고 주장한다. 무려 100가지 방법으로. 우선 환경파괴. 부시는 온실 가스 배출량을 규제하자는 교토의정서에 사인하길 거부했다. ‘아메리칸 드림은 환상이거나 거짓에 불과하다. 부자들은 점점 부자가 되어가지만 지난 30년간 미국 가계 실질 소득은 늘어나지 않고 소득 불균형만 점차 심화되었다. 미국 기업 경영진의 봉급은 노동자 평균 임금의 475배에 이른다. 일본이 11, 영국이 22배인것과 비교해보아도 터무니없는 차이다.

 

한국은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세계에서 가장 많은 나라다. 1제곱 킬로미터당 5천 톤으로 미국보다 8배 더 높다. 담배연기만 보면 죽을 듯이 피해가는 사람들을 보면 이해가 가긴 하지만 왜 자동차들이 내뿜는 이산화탄소엔 관대한 걸까.  자동차 매연보다 담배연기가 더 인간의 건강에 위험한 걸까. 혹은 지구에??

 

핵환산금지조약이냐 핵항의금지조약이냐, 뉴레프트리뷰2.

 

몰랐다. 이런 잡지도 있었는 줄은. NPT핵확산금지조약 역시 불평등 조약이었다. 비핵국가들이 핵무기 개발권을 포기하는 대가로 국제사찰 아래 원자력 프로그램을 추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골자였으나 프랑스조차 NPT가 열강들의 독점적 지위를 강화할 뿐이라면서 도의적 차원에서 협상을 거부했을 정도다.

 

결과적으로 NPT는 세계 평화를 지키는 수단이 아니라 미국의 지배력을 강화해주는 도구에 불과하다. 진정한 핵무장 해제로 나아가려면 NPT를 폐기해야만 한다는 게 <뉴레프트리뷰>의 결론이다.

 














로쟈의 리스트12. 미슐레 읽기.

 

여자의 삶

여자의 사랑

프랑스 역사

프랑스 대 혁명사.

 

23. 익사한 자와 구조된 자.

 

익사한 자와 구조된 자. 이것이 인간인가. 프리모 레비.

 

죽음의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레비는 포로 수용소에서 살아남는 구조된 자들에 대해 말한다. ‘익사한 자구조된 자라는 이분법적인 존재 방식만이 허락되는 사회라면 수용소와 구별 불가능하다. 우리 또한 생존을 위한 투쟁 상태에 놓여 있으며 우리 사회를 가르는 이분법이 낙오된 자성공한 자밖에 없다면 이 또한 절멸수용소와 다를 바 없다. 살아남은 레비가 아우슈비츠에서 떠올린 <신곡>의 한 구절은 이렇다.

 

그대는 자신의 타고난 본성을 생각하라

그대들은 짐승처럼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덕과 지혜를 구하기 위하여 태어놨도다.

 

가까스로 살아남은 레비가 결국 자살을 선택한 건 수용소 바깥 역시 수용소임을 견디지 못했기 때문일까.

 

아우슈비츠 가자 용산. 홀로코스트 유럽유대인의 파괴. 라울 힐베르크.

 

이 당시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 이슬라엘은 수백톤의 폭탄을 쏟아부었고, 아이와 여자 할 것없이 수천 명의 팔레스탄인들이 학살당했다. 라울 힐베르크의 <홀로코스트 유럽 유대인의 파괴>1961년 초판이 간행되어 홀로코스트학이라는 분야를 만들어낸 고전이다. 그리고 동시에 아직까지도 이를 넘어서는 저작이 없는 기념비적인 책이라고 한다. 힐베르크는 컬럼비아 대학원에서 프란츠 노이만의 독일 정부론강의를 듣고 나치즘의 지배 구조를 다룬 노이만의 대작 <베헤못:나치즘의 구조와 실행, 1933~1944>를 탐독한다. 노이만은 나치즘이 관료제와 군대, 대기업, 나치당이라는 4개의 독자적인 권력 블록으로 구성돼 있다는 주장을 펼치며, 힐베르크는 자신의 홀로코스토론에 이를 수용한다.

 

그는 미군이 접수한 나치 문제들 자료를 선별하는 기록보관소 아르바이트 자리를 얻어 자신의 논문을 준비했다. 그가 맡은 자료는 책꽃이로 무려 8킬로미터에 이르렀다고. 그 자료를 바탕으로 그는 <유럽 유대인의 파괴>를 저술, 발표한다. 이 책은 방대한 자료의 집대성뿐만 아니라 두 가지 새로운 통찰을 보여준다


첫째로 그는 나치의 유대인 학살의 구조를 밝혀낸다. 그것은 단지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일련의 연속적 과정이었다. 유대인의 개념 정의, 재산 약탈, 그 이후 절멸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그는 이것을 파괴 과정이라 불렀고 여기에 참여한 집합적 총체를 파괴 기계라고 불렀다. 그가 보기에 전체 과정을 지휘하고 조종한 기관은 없었다


두 번째로 홀로코스트는 어떤 의도나 계획의 산물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나치즘의 파괴 기계는 사실상 독일 주요 기관들이 모두 망라돼 있기 때문에 독일인이라면 누구나 그 기계의 부속물이 될 수 있었다. 악은 일상화되었고 5백만 명의 유대인이 가스실의 재가 되었다. 피해자였던 이스라엘인들은 이제 팔레스타인을 대상으로 홀로코스트를 자행한다.로쟈의 말대로 노이만/힐베르크가 말하는 나치즘의 네 가지 권력 블록은 우리에게도 적용 가능해 보인다. 관료제, 군대, 대기업, 나치당


 

내가 사는 세계의 이야기야. 거꾸로 가는 나라들. 판카즈 미시라.

 

영국의 식민지로부터 해방이후 1970년 중반부터 증가해온 전문 정치인들이 새로운 사회계층으로 부상했다. 대부분은 특별한 훈련을 받았거나 능력을 소지한 사람들이 아니었고 범법자도 상당수였다. 이들은 나랏돈을 챙기고 전리품을 나눠 갖는 것에만 관심을 보였다. 그들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선거 때마다 수행원과 AK 47 자동소총으로 무장한 경호원들을 대동하고 유세에 나다닌다.

 

RSS는 카스트와 종파를 막론하고 모든 힌두교인이 단결하여 힌두국을 설립하겠다는 목표로 세워진 단체다. 간디를 암살한 것도 RSS였다. RSS가 인도의 거대 정당, 교육, 노동조합, 문학협회 및 종교단체까지 장악하고 있다.

 

판카즈 미시라는 플로베르의 <감정 교육>과 에드먼드 윌슨의 평론을 읽고 자신이 잘 아는 세계로의 여행을 떠났다고. 윌슨은 <감정교육>에 대해 인생에서 뭔가를 볼 시간이 있었던 사람만이 이 책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평했다.

 

유러피언 드림은 어디에 있는가.

유러피언 드림, 제러미 리프킨

암흑의 대륙, 마크 마조워.

 

아메리칸 드림의 대안으로 제러미 리프킨이 제시한 것이 유러피안 드림이다. 무엇보다도 공동체 의식과 삶의 질을 중시하는 것이 유러피언 드림의 요체이며 이것이 새로운 시대의 비젼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그 비젼이 참혹한 암흑을 겪고 나서야 세워진 것임을 간과할 수 없다.

 

1870년 프랑스 프로이센 전쟁 사망자는 184천 명 , 1차 세계대전에서 800만명, 2차 세계대전에서 4천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숨졌다. 계몽주의의 유산을 자랑하는 유럽에서 왜 이러한 참상이 벌어졌을까? 저자가 보기에 유럽은 거대한 묘지 위에 세워진 실험실이었다. 서로 경쟁하는 세 가지 이데올로기의 교전장이었다. 자유주의, 공산주의, 나치즘. 나치즘의 몰락과 공산주의의 붕괴는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승리를 뜻한다는 시각에 저자는 동의하지 않는다.















 

로쟈의 리스트 13. 인권의 발명 읽기

 

24. 폭력이란 무엇인가

 

폭력이란 무엇인가.

 

폭력의 철학, 사카이 다카시

폭력, 로제 다둔

폭력의 세기, 한나 아렌트

법의 힘, 자크 데리다

혁명이 다가온다. 슬라보예 지젝

 

태초에 폭력이 있었다. 오직 폭력을 통해서만 새로운 세상은 창조되기 때문이다. 로제 다둔이 <폭력>에서 지적한대로 <창세기>에서 신은 명령하고 명명하고 구분하고 분리하고 분류하는데, 이 모든 행위가 질서를 확립하기 위한 폭력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들이다.” 인류의 조상이 된 자는 아벨을 살해한 카인이다. 성서를 따르자면 인류의 역사는 살인자(카인)와 보호자()가 공모한 역사고, 폭력의 역사.

 

한나 아렌트는 <폭력의 세기>에서 폭력과 권력을 엄격하게 구분한다. 아렌트에게 권력이란 사람들이 함께 모여 행동할 때, 곧 정치적 행위에 참여할 때 생겨나는 것으로 이미 그 자체로서 정당성을 갖는다. 때문에 정당화가 따로 필요한 폭력과는 동일시될 수 없다는 것이다.

 

데리다가 <법의 힘>에서 벤야민의 폭력 비판론을 검토하며 다시 한번 반복하고 있는 것도 그러한 권위의 신비한 토대이면서 법의 구조이다. 법의 힘은 폭력에 대립적이지만, 법의 기원에 놓여 있는 것은 폭력이다.

 

조르주 소렐은 <폭력에 대한 성찰>에서 무력force violence를 구분한다. 전자는 지배 체제가 동원하는 제도적 강압이나 물리적 강제등의 억압적 폭력을 뜻한다.

 

로제 다둔에 따르면, 폭력의 라틴어 원어인 비스vis’ 는 힘의 발휘, 폭력 행위 그리고 군대의 힘을 가리키며 존재의 본질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기도 했다. 즉 폭력은 인간에 대한 본절적인 규정이기도 하다. 호모 비오랑스, 폭력적 인간이라는 규정이 이로부터 생성된다.

 

<폭력의 철학>에서 사카이 다카시는 비폭력이란 단지 평화를 희원하는 것이 아니라 평화에 힘을!’이라고 요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폭력/비폭력이란 이분법은 부적절하다며 반폭력anti- violence이라는 범주를 추가한다. 반폭력은 막연히 올바른 도덕에 대한 반대를 뜻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도덕이 아니라 정치이고 정치적인 것의 복원이다.

 

정치란 무엇인가? 자크 랑시에르는 광의의 행정을 포함시킨 폴리스의 논리와 정치를 일컫는 폴리틱스의 논리를 구분한다. 폴리스란 이미 존재하는 지위나 역할에 사람들을 배분하고 고정시키는 것인 반면 폴리틱스란 배제된 사람들(이민자, 비국민, 이등시민, 정신이상자 등)을 보편적인 이해를 공유하는 자들로 간주하는 것이다. 폴리스의 논리가 사람들을 고립시키고 위계질서를 세우고자 한다면 폴리틱스의 논리는 평등을 도입함으로써 이러한 질서를 뒤흔든다.














 

p.s 메를로 퐁티, <휴머니즘과 폭력>

정면환 편, <프랑스지식인들과 한국전쟁>

김홍우, <현상학과 정치철학>

정화열, <몸의 정치와 예술, 그리고 생태학>

 

미국을 재교육해야 한다. 폭력의 시대, 에릭 홉스봄

 

홉스봄이 극단의 세기라 칭한 20세기는 물질적으로 눈부신 발전을 이룩하고 인류의 역량이 우주로까지 뻗어나간 세기였지만 동시에 유사 이래 가장 피비린내 나는 시기였다. 전쟁으로 인해 목숨을 잃은 사람이 187명백만 명에 달했다. 게다가 민간인의 피해는 제 1차 세계 대전시 5%였던 것이 요즘에는 아예 80~90%에 이른다고. 홉스봄은 20세기 중반에 이루어진 단절로 네 가지를 꼽았다. 첫째, 농민 계층의 쇠퇴와 몰락, 둘째, 초거대 도시의 부상, 셋째, 의사소통 수단의 기계화, 넷째, 여성이 처한 상황의 변화.

 

소련의 붕괴 이후 미국은 유일한 패권국가가 되었다. 9.11이후 미국은 자신의 힘만을 믿는 과대망상주의에 빠져서 가공할 군사력을 과시한 것 외에는 국제적인 고립을 자초하고 경제적 허약함만을 노출시켰다. 역사학자로서 홉스봄은 미국의 현재와 같은 위세가 역사적으로 일시적인 현상에 그칠 것이라고 본다. 때문에 전쟁광 미국을 말릴 순 없다 하더라도 미국을 재교육시켜야 한다는 게 홉스봄의 결론이다.

 

러시아 혁명, 그 가능성의 중심.

 

러시아 혁명, E.H .

러시아 혁명, 스티브 스미스

 

카는 볼셰비키 독재 체제를 비난했지만 러시아 혁명의 성과마저 부인하지는 않았다. 혁명이 없는 것보다는 위로부터 혁명이 있는 게 더 나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여전히 목표가 수단을 정당화하는가이다. 스티브 스미스가 <러시아 혁명>에서 제기하는 문제의식도 그것이다. 그에 따르면 볼셰비키는 사악했다기보다는 무능했다. 따라서 저자는 러시아 혁명이 써낸 답안은 틀렸지만 문제까지도 쓰레기통에 집어넣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정치신학 VS 정치철학, 사산된 신, 마크 릴라

 

인간이 전쟁에서 짐승도 하지 않을만큼 만행을 저지르는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신을 믿기 때문이다. 짐승은 먹이나 번식을 위해서 싸울 뿐이지만 인간은 천국에 들어가려고 싸운다.

 

저자는 인간을 짐승보다도 더 잔혹하게 만드는 것이 광신주의고 메시아주의적 열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러한 열정은 종교와 정치를 분리시켜서 사고하지 않는, 이른바 정치신학에서 비롯한다.

 

기독교 정치신학은 신과 인간, 그리고 세상이 신성한 연계를 이루고 있다는 이미지에 의존한다. 그러한 이미지에 가장 강력한 도전장을 내민 철학자가 토마스 홉스다. <리바이어던>의 목표는 기독교 신학의 전체 전통에 대한 공격과 파괴였다는 것이 마크 릴라의 평가다.

 

정치와 종교의 분리주의 전통에서 종교가 이전처럼 정치를 위협하거나 광신주의를 불러일으키지 못할 것이라는 낙관적인 자유주의 신학이 대두한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으로 말미암아 자유주의 신학은 부르주아 사회와 함께 무너진다. 더불이 그들이 꿈꾸었던 신은 사산된 신에 불과했다는 것이 폭로된다. 종말론적 구원사상은 정치적 메시아주의를 정당화하는데 언제라도 악용되었다. 저자는 서구만이 정치신학을 극복했다고 주장한다는데, 당장 미국만 보더라도 제 정신 가진 사람이라면 수긍할 수 없는 망발에 불과하다. 물론 한국은 언급할 가치도 없다.

 

테러리즘과 디오니소스, 성스러운 테러, 테리 이글턴

 

테리 이글턴에 따르면 고대 문명에는 창조적인 테러와 파괴적인 테러, 생명을 부여하는 테러와 죽음을 불러오는 테러가 동시에 존재했다. 이러한 테러의 양가성은 곧 신성 자체의 양가성이기도 하다. 이글턴은 이러한 양가성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바쿠스>를 꼽는다.

 

테베의 지도자 펜테우스는 디오니소스에게 적개심을 품고 상식 밖의 폭력으로 대응한다. 화가 난 디오니소스는 감옥을 나온 뒤 무자비한 복수를 감행한다. 누가 테러리스트인가? 이글턴은 <바쿠스>분명 테러리즘과 부당한 정치적 대응 사이의 결정적 유사성을 강조하는 작품이라고 말한다.

























 

p.s 에우리피데스 비극 <박코스의 여신도돌>

그리스 비극, <바코스의 여신도들>

천병희, <그리스 비극의 이해>

김상봉, <그리스 비극에 대한 편지>

사이먼 골드힐, <러브, 섹스, 그리고 비극>


 25. 정치적인 것의 가장 자리에서

 

아르스토텔레스와 고소영

정치학, 아리스토텔레스

고대 세계의 정치, 모제스 l 핀레이.

 

참주정은 통치자 한 사람의 이익을 위한 통치형태이고, 과두정은 부자의 이익을 위한 통치형태이며, 민주정은 빈자의 이익을 위한 통치형태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올바른 정치질서의 세가지 형태는 왕정, 귀족정, 혼합정이다. 참주정은 왕정의 왜곡이고 과두정은 귀족정의 왜곡이며 민주정은 혼합정의 왜곡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전제는 단순하다. 모든 국가의 시민들은 넉넉한 계급, 가난한 계급, 그리고 그 중간을 형성하는 중산계급으로 구분될 수 있다. 일반원칙으로서 절제와 중용은 언제나 바람직한 것으로 인정되기 때문에, 재산의 소유에 있어서도 가장 좋은 것은 중간 상태다. 중간계급의 시민으로 구성된 국가가 가장 잘 조직된 국가다. 따라서 정치적 공동체의 가장 좋은 형태를 이룩하기 위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국가의 구성원들이 알맞은 재산을 갖는 것이다. 이 글은 2008년에 씌어졌다. ‘고소영’, ‘강부자인선 파문으로 알려져 있듯 명백한 과두정부였다. 박근혜 정부는 민주정인가?

 

정치란 무엇인가. 칸트 정치철학 강의, 한나 아렌트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에서 인간의 활동적 삶을 노동과 작업, 그리고 행위로 나누는데 그녀가 가장 강조하는 것은 행위이고, 이 행위의 핵심이 바로 정치적 행위다.

 

정치란 무엇인가? 그것은 함께 함의 형식을 탐구하고 보존하기 위해서 함께 행동하는 것이다. 그것은 함께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이고,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서로에 대한 인정이다.

 

정치에서 다루는 인간은 유적 존재로서의 인류human species나 도덕적 존재로서의 단수적 인간man이 아니라 복수적 존재로서의 인간men이다. 정치의 근본은 인간의 복수성에 대한 인정과 긍정이다. 때문에 정치는 진리와 무관하다.

 

미군 장갑차가 두 여중생을 친 사건을 불가피한 사고라고 보는 판단과 최소한 과실이라고 보는 판단 사이에서 우리는 어떤 판단이 더 공유될 수 있는 판단인가를 물을 수 있다.

 

여기에 필요한 것이 공통감common sense다 이때 공통감은 공적 감각public sense이면서 동시에 공동체 감각community sense. 따라서 정치를 회복하는 일은 우리의 상식, 즉 공통감을 일깨우는 일이며 공동체 감각을 북돋우는 일이다.

 

타는 목마름으로

정치적인 것의 귀환, 상탈 무페,

민주주의의 역설, 상탈 무페.

 

상탈 무페가 말하는 정치적인 것the political은 사회의 특정 분야를 지칭하는 정치politics’와는 다른 차원의 것이다. 인간의 존재론적 조건자체이기 때문이다. 무페가 적극적으로 참조하는 이는 독일 정치 철학자 카를 슈미트이다. 그에 따르면, 정치적인 것이란 적과 친구를 가르는 것이다. 즉 누가 적이고 누가 친구인가를 판별하고 구분하는 것이다. 한데 이것이 어째서 인간의 존재론적 조건이 되는가? 어떤 수준이든 간에 자기 정체성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와 대립되는 타자가 먼저 주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권력과 적대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다는 환상을 버리고서 권력 관계의 실재를 인정하며 그것을 변형해나가려 노력하는 것이 라클라우와 무페가 말하는 급진적이고 다원적인 민주주의프로젝트이다.

 

랑시에르의 가장자리에서,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자크 랑시에르

 

1988년 미테랑과 시라크가 맞붙었던 대통령 선거에서 미테랑은 재선에 임하면서 단 하나의 공약도 제시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시라크를 여유있게 재치고 재선에 성공했다.

 

랑시에르가 보기에 이것은 약속의 종언’, 정치의 종언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새로운 사유에 대한 요청, 랑시에르와 아감벤

 

랑시에르는 알랭 바디우, 에티엔 발리바르 등과 더불어 21세기 벽두 프랑스 철학계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알튀세르의 후예 중 한 사람이고, 아감벤은 정치학, 미학, 언어학, 문헌학 등 여러 주제에 대해 정치한 분석을 내놓고 있는, 2000년대 들어 가장 많이 논의되는 사상가 중 한 명이다.

 

랑시에르가 말하는 정치적인 것은 통치와 평등이라는 두 이질적인 과정의 충돌이다. 통치의 과정이란 사람들을 공동체로 조직하고 그 자리와 기능을 위계적으로 분배하는 것으로서 치안police을 가리킨다. 평등의 과정이란 몫이 없는 자들의 평등에 대한 요구와 그 실천을 말하며 달리 해방이라고 이름 붙여진다. 이 해방의 과정, 혹은 해방을 위한 소송을 랑시에르는 정치politics’라고 부른다. 정치적인 것이란 이 정치와 치안이 마주치는 현장이다.

 

정치는 보이지 않았던 것을 보게 만드는 것이며, 몫을 갖지 않은 자들을 다시 셈하는 것이다. 때문에 정치의 본질은 불일치이며 불화이다.

 

문제작 <호모 사케르>를 통해서 주권의 역설적 논리를 분석하고 수용소야말로 근대성의 노모스이면서 근대 정치의 패러다임이라고 주장했던 아감벤은 <남겨진 시간>에서 바울의 편지에 대한 치밀하면서도 유려한 문헌학적 주석을 통해 그의 메시아주의를 면밀히 분석한다.

 

아감벤의 목적 없는 수단으로서의 삶. 목적 없는 수단. 조르조 아감벤

 

우리의 정치적 전통에서 핵심에 놓인 주권과 제헌권력이라는 개념을 버리든가 처음부터 다시 사유해야 한다.

 

아감벤은 정치철학의 전통적 개념과 범주로는 오늘날의 정치적 현실을 제대로 포착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다고 본다. 근대 이후 특히 20세기에 경험한 현실은 그에 걸맞은 새로운 사유를 요구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아감벤은 미셸 푸코를 따라서 오늘날 문제가 된 것은 생명이며 따라서 정치 또한 생명정치적인 것이 되었다고 본다. 이때의 생명은 벌거벗은 생명’, 곧 단순히 살아 있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생명이다. 우리말로는 목숨에 가깝다. 그런 의미에서 아감벤은 인간이나 시민이 아닌 난민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중심적 형상이라고 본다. 이런 구도에서 현실적 삶은 말 그대로 생존으로 환원된다. 아감벤은 다른 의미의 생명을 그리스어 bios에서 찾는다. 그것은 삶 자체가 문제가 되는 삶살아가는 방식 자체가 문제가 되는 삶을 가리킨다. 아감벤은 삶의 --형태라는 용어로 표현하지만 한 마디로 폼 나는 삶이고 행복한 삶이다.

 

즉 단순히 목숨을 부지하는 삶이 아니라 품위 있는 삶, 행복을 향유하는 삶, ‘더 나은 삶이 새로운 정치철학의 기초가 돼야 한다는 것이 아감벤의 주장이다.

 

아감벤에 따르면 정치권력은 항상 삶의 형태라는 맥락에서 벌거벗은 생명을 분리, 추출해내는 데 기초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지향해야 할 정치적인 삶은 그러한 일체의 주권으로부터 돌이킬수 없는 탈출을 감행함으로써만 사유될 수 있다. 그것은 달리 목적으로부터의 해방을 뜻하는, ‘목적 없는 수단으로서의 삶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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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무미함을 예찬하다.

 

무미함을 예찬하다. 무미예찬, 프랑수와 줄리앙.

 

음식에 관한 책인가 싶었는데, 프랑스 중국학자의 중국 예찬이라 하면 될까? 특히 적인 것들의 예찬. 담박하고 담백하고 단순한 것들. 담박한 음식 중 내가 먼저 떠올렸던 건, 을지로 을미면옥냉면이었다. 처음 먹을 땐 국물이 그저 맹물 맛처럼 느껴졌는데, 먹으면 먹을수록 중독된다. ‘아무런 맛이 없다는 건 우리가 버려야 할 것이라기 보단 오히려 추구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p.s 프랑스와 줄리앙, <운행과 창조>

<불가능한 누드>, <위대한 이미지에는 형태가 없다>

 

가난한 예술가의 초상, 왜 예술가는 가난해야 할까. 한스 에빙

 

저자는 예술이란 사람들이 예술이라 부르는 것이다로 정의 내린다. 여기서 사람들은 대중이 아니라 예술계에 속하는 일부의 사람들이다. 계층의 차이에 따라 예술의 취향도 차이가 난다. 상위 계급에게 인정받는 예술은 존중된다. 저자는 이러한 측면을 문화적 비대칭성이라 부른다. 그러고 보면 문학은 상대적으로 대칭적이고 평등한 예술이다. 우리 같은 서민이 오페라나 음악회에 꼬박꼬박 다니긴 경제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니까.

 

저자는 예술가들이 금전적 보상보다는 자신이 재능있고 뛰어난 인간이라는 자만심과 자기기만이 그들로 하여금 자발적인 가난을 선택하도록 만든다고 말한다. 이건 뭘 모르고 하는 소리다. 예술가들은 자만심보다는 오히려 열등감 속에서, 비자발적인 가난에 내몰리고 있다.

 

슈퍼노멀, 평범함 속에 숨겨진 감동, 슈퍼노멀, 제스퍼 모리슨, 후사카와 나오토

 

슈퍼노멀이란, ‘특별한 평범함을 뜻하는 말이란다. 노멀한 물건이 왜 특별해지는 걸까? 저자들은 일본의 전통적인 미의식을 드러내주는 용어로 와비사비슈타쿠로 이러한 특징을 표현한다. ‘와비사비는 어떤 물건이 시간이 가면서 갖게 되는 고요한 상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실용적인 미를 통달한 이후에 나타나는 아름다움이다. ‘슈타쿠손으로 윤을 낸이란 뜻이다. 사용하면서 자연스레 만지고 또 만지다 보니 윤기가 흐르게 된 것을 가리킨다.

 

영화 촬영장에선 어떤 소품이 간지가 나지 않는다는 말을 자주 쓴다. 한마디로 와비사비가 안 느껴진다는 거다. ‘시간의 경과없이 현실에서 와비사비는 있을 수 없다. 반면 영화는 소품에서도 시간을 창조해내야만 한다.

 

p.s 로쟈는 자신의 형광펜이 슈퍼 노멀이 아닐까하고 사족을 달았다. 저자들의 입장을 고려하자면 이런 건 슈퍼노멀이 될 수 없다. 형광펜은 그냥 형광펜이다.


 

오늘의 미술은 과거의 미술과 어떻게 다른가. 이것이 현대적 미술, 임근준,

 

미술평론가인 임근준 씨가 동시대 작가들의 현대 미술을 소개한다. 저자는 오늘의 미술은 세계를 보는 방법에 관한 성찰은 담은 예술이라 말한다. 나로선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현대 미술에 대한 탄식이 더 설득력 있게 들린다.

 

미술 시장은 개들에게 넘어갔다. 러시아, 중국 등의 신흥 부자를 상대해야 하는데, 그들에겐 문화가 없다. 좀 느끼려면, 최소한 뭘 이해할 필요가 있는데.

 

, 미국과 서유럽의 미술 시장은 개들에게 넘어간 게 아니고?? 미술시장이 개들에게 넘어간 덕분에 리히터는 가난을 면치 않았나?

 

2009년 한국 미술계를 움직이는 인물 1위는 홍라희 전 삼성미술관 리움 관장이고, 2위는 박명자 갤러리현대 회장 3위엔 유희영 서울시립미술관장이라고. 작가가 아니라 미술관 운영자들이 한국 미술계를 움직인다는 건, 세계적 추세와 더불어 한국 미술계도 돈에 놀아나고 있음을 증명한다. 현대 미술은 더 이상 예술이라 부를 수 없을 정도로 추악해졌다.

 

앤디 워홀의 비누 상자, 일상적인 것의 변용, 아서 단토.

 

저자는 워홀의 브릴로 상자가 말해주듯이 무엇이든 예술이 될 수 있기에 이제는 예술에 대한 정의가 가능하지 않다는 인식에서 제기된다. 그는 그의 전작 <에술의 종말 이후>에서 마치 헤겔이 역사가 자유에서 종말을 고한다고 말했던 것처럼, 예술 역시 자유의 확장으로 종말을 맞이했다고 주장한다.

앤디 워홀을 여전히 예술가로 바라보는 사람이 있나? 내가 보기엔 희대의 사기꾼에 불과하다. 워홀은 피카소를 보고 사기 치는 법을 배운 듯하다. 예술의 경지에 이른 사기꾼들.

 

미술관에서 만난 인문학, <미술관에서 인문학을 만나다> 박이문

 

4명의 철학자의 미술과 인문학의 통섭 강의를 책으로 묶었다.

박이문 교수는 예술작품의 구조적 모델로서 둥지를 제시한다. 임태승 교수는 동아시아 미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패턴과 원리이며 동아시아 예술은 철학적인 원리와 미학적인 범주 사이의 관계를 통해 구현된다고 말한다. 이광래 교수는 서양 미술사의 탈재현과 반재현의 과정을 기술한다. 조광제는 매체변화와 혁명이 가져온 의식 및 사회 변화의 양상을 기술하고 디지털 시대 새로운 형이상학의 밑그림을 그린다.


























로쟈의 페이퍼 04. 이런 책을 읽고 싶다.

 

크리스 하먼의 <1989년 동유럽 혁명과 국가자본주의 체제의 붕괴>

한스 굼브레히트 <1926: 시대의 가장자리에서 살아가기>

레이 황<1587 아무일도 없었던 해>

 

전체를 고민하는 힘

 

고민하는 힘, 강상중

쓰레기가 되는 삶들, 지그문트 바우만

승자독식사회, 로버트 프랭크, 필립 쿡

 

막스 베버는 일찍이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마지막 인간이 도달할게 될 지점을 이렇게 기술했다. 영혼이 없는 전문가, 가슴이 없는 향락자, 이 공허한 인간들은 인류가 과거에 도달하지 못했던 단계에 도달했다고 자화자찬할 것이다.” 강상중 교수에 따르면, 마지막 인간이란 더 이상 의미에 대해 생각하기를 그만둔 사람들을 가리킨다. ‘의미란 한나 아렌트에 따르면 함께 살아감이다. 함께 살아감은 정치의 본래 목적이고 의의다. 그것은 또한 전체에 대한 관심이다.


 <쓰레기가 되는 삶들>에서 지그문트 바우만은 너무 많은 부자들이 양산되는 것을 문제로 보았다. 아프리카에 에이즈가 만연해 사람들이 죽어갈 때 다국적 제약 회사들은 국제협약을 무기로 싼 값에 약을 공급하길 거부했다. <유동하는 공포>에서 바우만은 다가오는 세기는 궁극적인 재앙의 시대가 될 것이다라고 예언했다. 세넷은 <뉴캐피털리즘>에서 관료제 시스템이라는 쇠창살의 삶을 분석한다. 피라미드적 관료제 사회를 대신하여 들어선 것은 무한 경쟁을 독려하는 승자독식 사회.

 

우리는 어떤 혁명을 원하는가.

예수전, 김규항

예수 없는 예수 교회, 한완상,

 

김규항은 예수를 영성가이자 혁명가로 본다. 그는 오늘날 ‘NGO’, ‘시민운동’, ‘개혁운동’, 그리고 실현 가능한 진보’ ‘최소한의 상식의 회복따위를 내거는 양심적인 시민들은 위선자 바리새인들로 진단한다. 아무래도 김규항은 우리에게 너무 일찍 왔다. 그가 한 20년만 늦게 태어났더라면 그에게도, 우리에게도 좋았을텐데. 너무 빠른 건 느린건 만큼이나 멍청해 보인다.

 

한완상의 <예수 없는 예수 교회>에서 사회의 변화를 가로막는 가장 주요한 세력에는 한국 교회도 포함된다. 일명 개독. 개독들을 보면 예전 중세시대 마녀 사냥을 일삼던 카톨릭 수사들이 떠오른다. 한국 교회는 회개를 통해 거듭날 수 있을까.

 

로쟈는 회개에 대한 기대가 미덥지 않다면 프랑스 혁명을 숙고해보길 제안한다. <로베스피에르- 덕치와 공포정치>에서 로베스 피에르는 공화정의 가혹함은 미덕을 바탕으로 한 것이며 인류의 압제자를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응징하는 것이 자비라고 말한다. 자비를 베풀고 싶은 압제자들이 수도 없이 떠오른다.

 

에드먼드 버크는 <프랑스 혁명에 관한 성찰>에서 프랑스 혁명은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내기보다는 무정부 상태를 초래하고 결국엔 군사적 독재자를 출현시킬것이라 예언했다. 한나 아렌트 또한 <혁명론>에서 프랑스 혁명을 실패한 혁명으로 규정짓고 미국 혁명을 혁명의 새로운 모델로 추켜세웠따. - 프랑스아 르벨은 <마르크스 예수도 없는 혁명>에서 20세기 혁명은 미국에서만 일어날 수 있다고 못 박았다. 유혈과 폭력이 없는 혁명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공적 선, 사적 선, 레이몬드 고이스.

 

저자는 책을 통해 자유주의의 교리의 비판과 해제을 말한다. 자유주의의 핵심적인 교리는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의 구분인데, 고이스에 따르면 이것은 환상에 불과하다. 저자는 니체의 계보학을 방법론으로 받아들여, 디오케네스와 카이사르,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의 사례를 검토한다. 오늘날 사적인 것은 무엇인가? 저자에 따르면, “내 은행 잔고.

 

P.S 비판이론의 이념.

미조구치 유조의 <중국의 공과 사>

찰스 테일러, <근대의 사회적 상상>

퀜틴 스키너 <자유주의 이전의 자유>

 

문화로는 국가에 대항할 수 없다국민을 그만두는 방법, 니시카와 나가오.

 

저자에 따르면 국민을 그만두려면 국민 문화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문명이나 문화나 유럽에 기원을 둔 개념이다. 문명이 인류의 보편성을 강조하면서 물질적인 진보를 예찬한다면 문화는 생활의 다양성과 개별성을 강조한다. 문명이 미래 지향적이라면 문화는 과거의 전통을 중요시한다. 문명은 프랑스, 영국, 미국등 주로 선진국으로 전파됐고, 문화는 독일을 중심으로 폴란드, 러시아 등 후진국으로 퍼져나갔다. 프랑스에서는 문명이 국민적 이데올로기로 정착되고 독일의 국민사는 기본적으로 문화사다. 프랑스와 독일의 반복된 전쟁은 문명과 문화 사이의 투쟁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국가이데올로기로서 문화개념은 민족이나 국체개념과 일체였기 때문에 문화로는 국가에 대항할 수는 없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사상으로서의 일본 우익, 일본 우익사상의 기원과 종언, 마쓰모토 겐이치, 요시카와 나기.

 

저자는 근대 일본에서 권력을 장악한 지배계급은 좌익도 우익도 아닌 리버럴이었다고 주장한다. 이토 히로부미 내각이 출현하면서 리버럴은 근대 일본의 지배계급이 되며, 이들이 메이지 국가 체제의 근대화 노선을 적극적으로 주도해갔다. 이러한 노선에 반체제로 좌익과 우익이 마치 쌍둥이처럼 태어났다. 좌익은 계급의 입장에서 우익은 민족의 입장에서, 근대화 노선에 반대했다. 저자는 우익의 사생관은 전통적인 산화의 미학, 아름다운 죽음의 미학 위에 형성된다고 말한다. 이러한 우익이 타락하여 체제내로 편입하면서 아시아주의를 표방한 것이 대동아공영권이다. 로쟈의 지적대로 일본 우익과 한국 우익은 공통점보다 차이점이 더 많아 보인다. 타락한 꼴통들이 모여 아무나 붙잡고 빨갱이라 욕하면 우익이 되는 실정이니.















 

18. 유동적 근대와 쓰레기가 되는 삶, 유동하는 공포, 지그문트 바우만

 

유동적 공포란 자연적 악이건 도덕적 악이건 그 공포의 대상이 되는 악이 불규칙하고 불확실하여 제대로 인식할 수 도 없고 대처하기도 어려운 공포를 말한다.

 

<근대 사상에서의 악>의 저자 수잔 니먼을 따라 바우만은 근대 철학이 시작되는 기점을 1755년 포르투칼 리스본 대지진에서 찾는다. 지진으로 수 만명이 죽었다. 이러한 대재난은 근본적으로 신 존재에 대한 질문을 묻게 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미신 역시 마찬가지다. 별자리 혹은 사주팔자가 다 무슨 소용이냐, 수만 명이 동시에 죽었는데. 세월호에서 죽은 사람들은 사주팔자가 다 똑같아서 죽었을까.

 

근대인은 이성에 의해, 자연적 악과 도덕적 악 모두 교정될 수 있을거라 기대했다. 지금까지 경험은 오히려 거꾸로 진행됐다. 자연재해는 관리 가능한 것이 되지 못했고, 오히려 도덕적 비리가 자연재해에 가까운 것이 돼버렸다. 인간의 부도덕한 악보다 관리가 불가능한 것은 합리적 행동이 산출하는 악이다. 일례로 관료제를 들 수 있다. 관료의 도덕성은 명령에 대한 복종과 빈틈없는 업무 수행으로만 판단된다. 아우슈비츠, 굴락, 히로시마는 이러한 관료제의 합리성이 얼마나 커다란 악을 낳을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게다가 문제적인 것은 유동적 공포가 차별적이라는 것이다. 자연재해 역시 차별적이다. 뉴올리지언즈 카트리나에서 볼 수 있듯 피해자는 대개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더 나아가 이제 사건 사고 역시 차별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강남의 잘 사는 아이들이 배를 타고 가다 좌초됐더라도 국가에서 가만히 앉아 아이들이 죽어가길 기다렸을까. 국가에선 법질서 유지와 경제발전(오늘날 신자유주의)만을 부르짖는다. 근대성은 배려할 만한 가치가 있는 부류가치가 없는 삶으로 구분하며 공포 또한 차등적으로 분배된다. 바우만은 이러한 차별은 근대성의 오작동이 아니라 본질이다.

 

다가오는 세기는 궁극적인 재앙의 시대가 될 것이다.”

 

그들이 너무 맣은가? <쓰레기가 되는 삶들> 지그문트 바우만

 

한마디로 쓰레기를 치우는 사람들이 없다면 우리는 책상앞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을 수 없다.

 

우리가 기부해야 하는 이유, <물에 빠진 아이 구하기> 피터 싱어.

 

살릴 수 있는 생명들이 덧없이 죽어가는 세계에서 저자는 어떻게 할 것인지를 묻는다. 책의 제목이나 질문이나 왠지 저자가 세월호 사건을 예견하고 한국인들에게 던지는 메시지처럼 들린다.

 

저자의 질문은 마치 맹자의 우물에 빠진 아이의 일화를 상기시킨다. 신발이나 양복이 더럽혀지고, 지각을 이유로 우물에 빠진 아이를 그냥 지나치겠다는 사람은 거의 없다. 대한민국 도살자의 딸과 색누리당 국회의원말고는.

 

아직도 매년 970만명의 5세 이하 어린이들이 빈곤 때문에 죽는다. 저자는 기부가 이루어지긴 하지만 여전히 부족하다고 말한다. 한국의 원조 규모는 0.09 퍼센트라고. 한국은 대외원조에서도 전 세계적으로 꼴찌를 달린다.

 

거대한 고통의 기원을 찾아서, 거대한 전환, 칼 폴라니.

 

이 책의 부제는 우리 시대의 정치, 경제적 기원이다. 여기서 우리 시대1940년대를 포함한 20세기 전반기라고 한다. 1차 세계 대전, 러시아 혁명, 경제 대공황, 파시즘, 도로 2차 세계 대전. 대체 왜 이런 전대미문의 비극적인 사건들이 연이어 발생한 것일까? 폴라니는 영국의 산업혁명과 시장 경제를 주범으로 지목한다. 식민주의자들은 원주민을 노동자로 만들기 위해 인위적으로 식량 부족 사태를 일으켰다. 모든 것을 상품화할 수 있다는 불가능한 믿음과 파행적 현실은 주기적으로 반복된다.

 

저자는 2009년이 거대한 전환이라고 보았다. 오늘날 다국적 기업과 신유주의를 주장하는 국가들은 식민지 국가의 전략을 그대로 반복한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99프로의 인간들을 굶주림으로 몰아넣는 것이다. 더더욱 신자유주의는 우리가 상상 못했던 새로운 전쟁을 불러올 지도 모른다.

 

인류학적 가치이론과 자본주의의 외부. 가치이론에 대한 인류학적 접근, 데이비드 그레이버.

 

저자는 유럽중심의 지적 풍토를 비판하면서 인류학이야말로 사유와 개념의 전 지구적 민주화를 도모할 수 있는 최적의 학문이라고 주장한다. 1940년 대 후반과 1950년 초 인류학자 클라이드 클럭혼은 서른 다섯 부족에 대한 비교연구를 통해 가치에 대한 정의를 내린다. 가치란 사람들이 여러 다른 행위의 가능성 중 하나를 선택하게 만드는 바람직한 무언가에 대한 개념이다. ‘가치에 대한 인류학적 접근은 경제학에 포섭된다


그러나 경제학은 지역마다 다른 선호나 판단의 문제에 답하기가 어려워진다. 가치의 기본 대상을 단지 사물에 두는 것이 아니라 다른 기준이 필요하지 않을까. 화폐와 상품만의 교환만을 다루는 시장경제 바깥의 다른 교환 방식에 대해서도 주목해야 하지 않을까. 그레이버는 인류학의 역사에 가장 중요한 단 하나의 업적이 마르셀 모스의 <증여론>이라고 주장한다. 모스는 자본주의 체제 바깥의 부족들에 대한 연구를 통해 그들이 전혀 다른 가치 체계를 갖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로쟈는 저자의 이론을 나카자와 신이치의 <사랑과 경제의 로고스>나 가라타니 고전의 여러 저작에서도 읽을 수 있다고 말한다.

 

사회언약론자가 꿈꾸는 사회, 사회의 재창조, 조너선 색스,

 

색스는 이 책을 통해 영국이 경험한 다문화사회로서의 문제점을 바탕으로 다문화주의의 극복과 다문화 사회의 통합을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기존의 다문화주의는 수명을 다했다. 기존의 호텔로서의 사회로는 다문화주의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기존 별장으로서의 사회역시 주인과 손님의 관계이기에 성공할 수 없다. 그가 제시하는 세 번째 모델은 우리가 함께 만들어가는 고향으로서의 사회. 사회는 더 이상 국가와 시민 간의 계약관계의 산물이 아니라 상호존중과 신뢰에 바탕을 둔 언약의 산물이 되어야한다.





























 

19. 보편적 보편주의를 향하여

 

세계의 일부인 유럽

백색신화, 로버트,J, C , 김용규.

식민주의자의 세계 모델, 제임스 M 블라우트.

 

세계의 일부는 부유하지만 나머지 대부분은 가난하다.”

 

식민주의와 유럽중심주의를 비판하는 책들이 쌓여가는 가운데 제임스 블라우트의 <식민주의자의 세계 모델>은 유럽 중심주의에 대한 본격적인 비판이다.

 

유럽중심주의가 은밀하게 작동하는 영역으로 저자는 지리학과 역사학을 지목한다. 인류사의 중요한 사건들은 모두 유럽쪽에서 발생했다는 시각이 대표적이다. 결론에서 블라우트는 우리 인식의 근원을 건드리는 네 가지 보편주의의 문제를 비판한다. 첫째. 데카르트에서 칸트에 이르는 철학적 이원론, 둘째, 빅뱅이론, 셋째, 아프리카에서 에이즈가 발생해 유럽으로 확산됐다는 역확산론, 넷째, 산업혁명 이후의 산업화 확산론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과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유럽중심주의 해체도 요원하다는 것이 블라우트의 주장이다.

 

로버트 영은 유럽의 기적이라는 신화백색신화라 부른다. 그의 주된 공격대상은 유럽마르크스 주의. 저자가 보기에 마르크스 주의는 여전히 유럽중심주의라는 한계를 갖는다.

 

유럽중심주의와 세계사의 해체,

유럽중심주의 세계사를 넘어 세계사들로, 한국서양사학회,

세계사의 해체, 사카이 나오키. 니시타니 오사무.

 

문명론적인 차원에서만 보더라도 아시아 지역에는 동아시아의 유교 문명, 남아시아의 힌두 문명, 그리고 서아시아의 이슬람 문명 등 각기 다른 세 개의 문명이 별개로 존재해왔지만 유럽 중심적 관점은 이를 한데 묶어서 동양이라는 말로 뭉뚱그린다. 일찍이 에드워드 사이드는 동양과 서양의 이분법적 분할이 허구적인 상상의 지리학이라 말했다


니시타니는 <세계사의 해쳬>에서 후마니타스안트로포스를 대립시킨다. 그리스 로마의 고전학을 가리키는 후마니타스가 앎의 주체로서의 인간을 다룬다면 인류학의 어원이 되는 안트로포스는 인류를 오직 앎의 대상으로만 다룬다. 때문에 인문학(후마니타스)은 유럽 연구 내지 유럽적 인간의 연구가 되는 반면에, 인류학(안트로포스)는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연구가 된다. 한마디로 인문학의 탐구대상은 보편적 인간이 아니라 유럽적 인간이다. 로쟈의 말대로 유럽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은 가능할지언정 극복은 결코 쉽지 않은 과제일터. (세계사, 인문학을 완전히 해체한다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한단 말인가?)

 

보편적 보편주의를 향하여, 유럽적 보편주의, 이매뉴얼 월러스틴

 

월러스틴에 따르면 16세기에 형성되어 지금까지 지속되어온 하나의 긴 시기가 현재 종말을 고하고 우리는 새로운 시기로 진입하고 있다. 어떤 시기가 될지는 알 수 없다. 앞으로 전개될 20년에서 50년 사이의 싸움의 결과에 따라 기존의 세계보다 더 사악한 불평등의 세계가 될 수 있고, 생고르의 표현에 따르면 서로 주고받는 만남의 세계가 될 수도 있다. 월러스틴은 이것이 유럽적 보편주의와 보편적 보편주의 사이의 이데올로기 투쟁을 통해서 결정될 것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이러한 시기에 지식인들이 거짓된 가치중립성의 족쇄를 벗어버리고 대안으로서의 보편적 보편주의를 모색해야 한다고 말한다.

 

주권의 너머와 환대의 사유, 주권의 너머에서, 우카이 사토시.

 

1964년 도쿄 올림픽, 소학교 4학년이었던 저자는 일본 선수를 응원하면서 히노마루(일본국기)와 기미가요(일본 국가)에 갈채를 보냈다. 그러다 5학년이 되자 이러한 행동에 무언가 불편함을 느꼈다. 일본 현대사에 대한 저자의 인식이 깊어질수록 나쁜 국가에 대한 그의 직관은 확신이 됐다.

 

국민국가의 패권주의와 폭력에 대해 저항의 논리로 맞서야 한다고 주장하는 우카이 사토시가 주권의 너머를 모색하기 위해 제안하는 것은 환대의 사유. 주인은 손님을 배척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사해야 된다고 주장한다.

 

한국의 모 여성 개그맨이 일본 TV프로에 나가 기미가요를 열성적으로 불러 논란이 된 적이 있었다. 일본인들은 그 손님을 환대했을까. 아마 그랬을지도 모른다. ‘, 원숭이가 일본 노래를 부르다니하고 즐거워하지 않았을까.















 

20. 사회는 어느 때 망하는가

 

우리 시대의 노동일기, 4천원 인생, 안수찬 외.

 

기자들이 직접 체험한 비정규노동혹은 불안노동의 보고이다. 갈빗집에서 12시간 노동으로 35천원을 받은 임지선 기자는 말했다. “수많은 사람이 빈곤 노동으로 일생을 보내야 하는 사회구조를 만들어놨다는 점에 있어 우리 모두는 공범이다.”

 

명랑 좌파의 한국경제론, 괴물의 탄생, 우석훈

 

<88만원 세대>를 필두로 하여 그가 쏟아낸 한국경제대안 시리즈마지막 책이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일반화되면서 탄생하는 것이 홉스가 말하는 레비아탄’, 괴물이다. 이 괴물의 다른 이름이 인간에 대한 예의를 잃어버린 자본주의. 우석훈의 대안은 사회적 경제’, ‘연대의 경제’, ‘증여의 경제. 이러한 제3부문을 형성하는 경로는 종교 기관, 대기업, 그리고 정부기관이다. 허걱, 한국에서 가능한 일일까? 종교기관, 대기업, 정부라니.

 

억울하면 서울 시민이 돼라? 지방은 식민지다.

 

강준만 교수는 교육 분산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쉽게 말해 서울에 편중된 대학들을 지방으로 분산시키자는 거다. 다산 정약용마저 자식들에게 폐자일지라도 사대문 안에서 버티라 했으니, 지방분권의 길은 요원해 보인다.

 

사회는 어느 때 망하는가? 다시, 민주주의를 말한다. 도정일 외.

 

2008년 이후 무너진 민주주의를 보고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문명의 붕괴>에서 암시를 받은 도정일 교수는 사회는 어느 때 망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했음을 알면서도 대처하지 못하면 그 사회는 망한다. 지금 당장 시급한 것은 우리 사회가 민주주의의 위기에 처했음을 명확히 인식하는 것이고, 거기에 대해 때맞게 대처를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이 시민의 양성이다. ‘민주주의가 밥 먹여주냐? 한홍구 교수의 말에 따르면 민주주의가 밥 먹여준다

 

대한민국 시민은 한 사람 한 사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주체라는 자각을 갖고서 각자가 지금 당장 실천할 수 있는 일을 시작해야 하고, 공부해야 한다. 국가가 무엇인가라는 주제도 긴급한 공부거리다. 로쟈는 우리가 시민에서 난민의 지위로 전락할지도 모른다고 말했는데, 2008년 이후 우리는 천민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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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2016-07-08 05: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진짜 이새끼 글은 역겨워서 못읽겠다..

시이소오 2016-07-08 06:58   좋아요 0 | URL
역겨우면 안 읽으면 됩니다. ^^

만화애니비평 2016-07-08 07: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아이디도 없고 비방글만 남기는 저런사람의 정신승리...
새벽에 잠도 안자고 뮈하는걸까요.

시이소오 2016-07-08 08:05   좋아요 0 | URL
일베가 아닐까요?? ㅎㅎ

만화애니비평 2016-07-08 08:10   좋아요 0 | URL
참 그분들은 바쁘네요. 새벽에 잠도 안자고 일하면서요 ㅎㅎ

시이소오 2016-07-08 08:15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일당은 잘 받으셔야 할텐데요^^

singri 2016-07-08 0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저러는건지ㅡ ㅇㅂ의 끝은 어디인가 노답.

시소님의 가열찬 독서를 응원합니다.

시이소오 2016-07-08 08:32   좋아요 0 | URL
아, 응원 감사해용. 싱그리님^^

wasulemono 2016-07-09 16: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본을 못 갖춘 사람도 있었네요!

시이소오 2016-07-09 16:42   좋아요 0 | URL
저분덕분에 댓글이 늘었네요. 감사한 일이네요^^
 

 

11. 푸슈킨과 고골의 나라

 

나보코프와 예술이라는 피난처, 롤리타, 나보코프

 

푸슈킨과 레르몬토프를 제쳐놓고 나보코프가 뽑은 가장 위대한 작가는 1위 톨스토이, 2위 고골, 3위 체홉, 4위 투르게네프. 그가 보기에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류작가라고. 예전엔 인정할 수 없었을텐데, 지금으로선 그렇게 볼 수도 있겠다 싶다. 2007년 영어권의 대표적 현역 작가들이 뽑은 최고의 문학 작품으로 1위엔 역시 <안나 카레니나>, 2위는 플로베르의 <마담 보봐리>, 3위는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4위는 나보코프의 <롤리타>였다고.

 

대부분 평론가들과 마찬가지로 나보코프 역시 레빈-키티 커플의 사랑과 대조적으로 안나 브론스키 커플은 육체적 사랑에만 기초해 있다고 평가한다. 실망이다. 이런 답안은 초등학교 교실에서도 나올 수 있는 분석 아닌가. 안나와 브론스키의 사랑이 단지 육체적 사랑에 기초한다는 평엔 동의할 수 없다. 그들도 레빈, 키티 커플 마냥 진정한 사랑을 했다. 아니, 했다고 생각했다. 안나, 브론스키 커플의 비극은 상대방 보다는 자기 자신을 더 사랑했다는 데 있다. 사실 그들의 사랑은 육체적 쾌락보다는 오히려 허영에 기초한 것이었다.

 

나비의 변태를 거친 기억의 아상블라주, <말하라, 기억이여> 나보코프,

 

나보코프는 기억력이 형편없어 메모리스트가 되었다고. 그래서 그에게 있어 상상력은 기억력의 한 형식이다.

 

그의 지론에 따르면, 모든 사건의 객관적 존재 자체가 하나의 불순한 상상의 형식이며 창조적 상상력의 도움이 없다면 우리의 정신은 아무것도 파악할 수 없다. 그러니 순수한 객관적 현실이나 순수한 기억이라는 개념이야말로 오히려 픽션일 따름이다. 따라서 진실은 언제나 기억과 상상의 창조적인 합성물이다.

 

(<말하라, 기억이여> 아직 절판 상태네요 ^^;;) 


예브게니 오네긴과 차이코프스키, 예브게니 오네긴

 

예전에 <예브게니 오네긴> 광팬 때문에 호기심에 이 책을 읽었다. 나로선 뭐가 좋다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티치아나나 오네긴과 같은 경험을 했다면 공감할 수 있었을까? 상대방이 나를 사랑할 때 나는 시큰둥하다가, 상대방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되자 이번엔 자신이 열정적인 사랑에 빠지는 경험? 아무튼 차이코프스키는 작품을 구상할 때 제자인 안토니나 밀류코바로부터 구애 편지를 받았다. 그는 제자의 구애를 받아들여 결혼을 했다.

 

우리는 모두 고골의 <외투>에서 나왔다외투, 고골.

 

역시 읽었으나 감흥이 없었던 작품이지만 로쟈는 매년 다시 읽으면서 경탄하는 작품이라니 나 역시 다시 읽어봐야 겠다. 주인공 아카키의 외투에 대한 욕망은 여전히 현대적으로 보인다. 라캉의 이론에 어울릴 듯.

 

도스토예프스키와 돈.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

 

맞는 말이다. 돈을 빼놓고 도스토예프스키를 논할 순 없다

<톨스토이, 도덕에 미치다>만큼 재밌을 듯.

 

사냥개 같은 시대의 증언 <회상> 나데쥬다 야코블레브나 만델슈탐

 

20세기 러시아 시의 거장 오십 만델슈탐의 부인 나데쥬다 만텔슈탐의 회고록이라고. 시인 만델슈탐은 두 번째 체포 때, 시베리아 강제수용소 이송 중 사망했다. “무슨 이유로 그를 잡아갔지?”라는 질문은 금기시되었지만, 누군가 그런 질문을 던지면 아흐마토바는 격분하여 소리쳤다고 한다. “무슨 이유가 있겠어? 아무 이유 없이 사람들을 잡아들인다는 걸 아직도 모르겠어?” 바로 그 시대의 목격담이자 증언이라고.















 

12. 한국 문학에 대한 믿음과 불신 사이

 

핏빛 어두운 조수가 퍼져, 도처에

순결한 의식이 침몰하고

최선의 무리는 확신이 없고

최악의 무리만이 열광적으로 날뛰고 있네

 

- W.B 예이츠, <2의 강림>

 

오늘날 한국 문학은 죽었다?’ 로쟈는 문학에 대해 가장된 순진한 믿음’, 즉 문학을 좀

더 진지하게 믿는 척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한국 문단 문학의 종언, 한국 문학과 그 적들, 조영일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 문학의 종언>을 번역한 평론가 조영일의 두 번째 평론집이다.

그는 한국문학이 끝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끝났다고 보는 것은 한국의 문단문학이다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그는 문학편집과 문학비평이 분리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백전 백패의 운명을 찬양함, 자전거 여행, 김훈

 

살아서 아름다운 것들은 나의 기갈에 물 한 모금 주지 않았다. 그것들은 세계의 불가해한 운명처럼 나를 배반했다. 그러므로 나는 가장 빈곤한 한줌의 언어로 그 운명에 맞선다. 나는 백전백패할 것이다.

 

말해 무엇하랴, 김훈의 에세이는 무조건 읽어야 한다.

 

기형도의 보편 문법. <기형도 전집> 기형도

 

인간에게도 누구나 잎이 주렁주렁 달린 가지가 서너 개 이상 있다. 그 개별적 가지들은 시간의 묶음이며 그 시차인 공간인 가지 안에는 썩은 잎부터 부활해가는 잎, 돋는 잎 등이 달려있다. 그 잎들은 나무의 물관, 체관의 관다발로부터 양분 및 수분을 공급받으며 또 외적인 요소, 즉 햇빛을 이용하여 녹색 동화작용을 일으켜 내적 에너지를 확충한다. 고로 잎은 나무와 햇빛의 유기적 매체이다. 개별 인간과 보편 세계의 이질성을 이어주는 것은 동일인으로서의 인칭이다. 우리는 그러한 인칭을 2인칭화(사랑, 친구, 가족)한다. 그러나 과수뿐 아니라 인간의 사육 기간 중에서 우리의 관계들 속에는 엄연히 칼날 같은 전정이 가해진다. 그것은 소극적으로 타의에 의한 단절의 전정과 적극적 전정으로 구분한다.

 

식물적 상상력,모종전정의 시인(기형도의 전정에 최초로 주목한 비평과는 정과리라고. 정과리의 <무덤 속의 마젤란>은 기형도에 관한 필수적인 참고 문헌이라고 한다.)

 

둑방에는 패랭이 꽃이 무수히 피어 있었다. 모두 다 꽃씨들을 갖고 있다니

작은 씨앗들이 어떻게 큰 꽃이 될까. 나는 풀밭에 꽂혀서 잠을 잤다.”

 

부끄럽게도 나는 아직 기형도의 시를 안 읽었다. 죽기 전엔 읽어야.

 













13. “너 책이야? 나 장정일이야!”

 

장정일의 공부,

장정일의 독서일기 7

너희가 재즈를 믿느냐

보트하우스

내게 거짓말을 해봐.

 

2004년 독서일기 10년째인 6권의 서문은 이렇다.

 

보혁갈등이 첨예하게 부딪치는 지난 몇 년간을 보내면서, 나의 독서관은 개인적으로 내밀한 쾌락을 좇아가는 독서에서 약간 다른 것으로 진화했다. <....> 시민이 책을 읽지 않으면 우중이 된다. 책과 멀리하면 할수록 그 사람은 사회 관습의 맹목적인 신봉자가 되기 십상이고 수구적 이념의 하수인이 되기 일쑤다.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은 내밀한 정신의 쾌락을 놓치는 사람일뿐 아니라, 나쁜 시민이다. <.....> 독서는 민주사회를 억견과 독선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시민들이 행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의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강유원은 장정일의 독서 일기 2권에 대한 독후감을 이렇게 적었다.

 

장정일은 많은 분량의 책을 읽지만 그것을 꿰어서 이론적 줄거리를 만들어내지는 못하는 듯하다.

 

, 로쟈의 말대로 강유원의 장정일 비판은 공감하기 힘들다. 누가 그랬더라. 언젠가 자신의 무지를 깨닫는 날이 기필코 올 것이라고. 장정일 역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자신의 무지를 밝히기 위해 공부한다고 말했다. 덧붙이자면, 또 다시 한나 아렌트를 빌어 말하자면 나는 내 무지가 이제 악이 될 수 있음을 알기에 공부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너희가 독서를 아느냐 <장정일의 독서일기5>

 

역시 장정일, 가차 없다. (그 이후 쓰인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에도 그의 돌직구는 여전히 곧다.) 지식인들 모두가 장정일처럼 말하길 바라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도 안 될 것이다. 단지 검은 것을 검은 것이라고 말해주었으면.

 

장정일 문학의 변죽, <정열의 수난 장정일 문학의 변주>, 문광훈

 

장정일에 대해 말한다면서 저자 얘기만 하는 책이라니, 추천이라기 보단 비추의 리뷰다.

 

로쟈의 페이퍼 03

 

가라타니 고진, <정치를 말하다>, <탐구>, <탐구2>

 

로쟈의 리스트 8. 에리히 프롬 읽기

 

<소유냐 존재냐>, <에리히 프롬의 현대성>,

백민정, <맹자 :유학을 위한 철학적 변론>

박홍규, <우리는 사랑하는가 :에리히 프롬의 생애와 사상>



 













14. 기적에 이르는 침묵

 

기적에 이르는 침묵, <봉인된 시간> 타르코프스키

 

타르코프스키에게 있어서 영화란 시간을 빚어내는 것이다. 로쟈는 타르코프스키 영화가 대단히 격렬하다고 말한다. 그는 <노스탤지어>의 분신 장면과 <희생>의 방화 장면을 예로 든다. 타르코프스키의 영화가 격렬하다는 의견에 적극 동감한다.(동지를 만났다) 그의 영화를 볼 때 나로선 몽타쥬보다는 시점의 파괴 때문에 깜짝 깜짝 놀라곤 했다.

 

타르코프스키의 순교일기에 대하여, 타르코프스키의 순교일기

 

타키역시 도키 빠였다.

 

이제 나는 우선 도스토예프스키 자신이 쓴 글을 모조리 읽어야만 하겠다. 그리고 그에 관해 쓴 모든 글들 그리고 러시아 종교철학자들이 솔로비요프, 베르쟈에프, 레온체프의 글들도 모두 읽어야 겠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내가 영화 속에서 실현시키고자 하는 이 모든 것들의 총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존재론적 살인과 정치적 살인. <데칼로그 십게, 키에슬로프스키, 그리고 자유에 관한 성찰>

 

로쟈는 살인하지 말지니라만을 읽고 쓴다. 저자는 야첵의 살인을 해명하기 전에 주인공 뫼르소를 분석하지만 로쟈는 곧바로 <죄와 벌>의 라스콜리니코프를 떠올린다. 그러나 그의 살인은 야첵이나 뫼르소와는 달리 합리적이고 계획적인 살인이었다.














 

15. 이미지가 들려주는 것

 

러시아에도 미술이 있어?” <러시아미술사> 이진숙

 

러시아 미술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이콘화와 19세기 이동파, 그리고 20세기 초반의 아방가르드 등이라는데, 로쟈는 특히나 19세기 미술에 관심이 있다고. 이동파의 가장 대표적인 화가는 일리야 레핀이다. 그의 <볼가 강의 배를 끄는 인부들>은 러시아 미술사의 기념비적인 작품이라고. 바실리 페로프<트로이카>, <도스토예프스키의 초상>, 니콜라이 야로센코<삶은 어디에나>의 작품 등을 통해 러시아 미술의 메시지를 느낄 수 있다고. 그것은 삶의 고통과 분노, 비애와 절망에 대한 연민이면서 그럼에도 끝까지 버릴 수 없는 희망에 대한 송가다.

 


참고서적

조토프 <러시아 미술사>

캐밀러 그레 <위대한 실험>

이주헌, <눈과 피의 나라 러시아미술>

 

추의 이미지는 미의 이미지보다 다채롭다.

 

추의 역사, 에코

미의 역사, 에코

 

에코는 <미의 역사>의 자료를 1960년 대 초반부터 모았다고. 미에 대한 개념이 시대에 따라 달라지긴 했지만 대체적으로 비례와 균형과도 같은 기준이 있다면 추의 이미지는 훨씬 다채롭고 풍부하다. 형식의 결여, 불균형, 부조화, 외관 손상, 변형, 불쾌함의 다양한 형상들이 너무 방대해서 단순히 추를 미의 반대라고만 말할 수는 없다는 게 에코의 주장이다. 즉 모든 아름다움은 서로 엇비슷하지만, 추함은 저마다 제각각이다.

 

미술의 고고학,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 박이소.

 

원제는 <믿는 것이 보는 것이다>. 저자 스타니스제프스키는 우리가 보기 전에 이미 작용하고 있는 믿음들에 대해 폭로한다. 미술가가 미술작품을 창조한다 하더라도 그 자체로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 오로지 미술의 제도 내로 순환해야만 깊은 의미와 중요성을 획득한다. 뒤샹의 변기를 전시회 좌대에 올려놓고 <>이라 명명함은 고대 인물상을 박물관에 전시하여 <비너스>와 명명한 것과 마찬가지다.

 

참고문헌

존 버거, <이미지>

 

곰브리치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것, 이미지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것.

 

곰브리치는 예술은 어떤 시대정신으로 환원하려는 시도에 반대한다. 그가 보기에 예술은 창조적 개인의 소산이다. 그가 미술사가로서 수호하려는 가치가 단지 서유럽의 전통문명이라니, 지나친 유럽중심주의적인 발상 아닌가.

 

철학자 마그리트, 르네 마그리트 수지 개볼릭.

 

로쟈의 말대로 마그리트 그림은 감동을 주진 않는다. 그러나 분명 지성을 자극한다. 저자는 그 유명한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의 그림을 분석한다. 이 그림은 더 이상 재현적 회화의 불가능성을 선포한다. 이제 회화는 무한한 가능성과 함께 회화적 불가능성에 직면한다. 이러한 모순으로부터 현대 회화의 가능성과 과제가 동시에 산출된다.

 

베이컨이란 무엇인가, 베이컨 회화의 괴물, 크리스토프 도미노

 

들뢰즈에 따르면 베이컨은 형상적인 것에서 형상을 빼내고자 한다. 그는 외치는 사람들이 아니라 외침 그 자체를 그리고자 한다.

 

기술합성 시대의 예술 작품, 미디어 아트, 진중권

 

미디어아티스트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관심은 예술과 기술의 공조이고, 공진화다. 예술가들은 새로운 첨단 기술을 통해 표현의 가능성을 확장시켜나가고, 기술자들은 그러한 예술에서 더 나은 기술을 위한 영감을 얻는다고 한다. 그렇다면, 근대 미학을 관장해온 칸트적 미학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을 듯하다. ‘미적 자율성이나 무목적의 목적성같은 개념이 예술과 기술의 극단적인 결합 형태인 미디어아트에는 들어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히려 예술기술을 모두 뜻하던 아트라는 말의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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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인간의 본성에 대하여.


천한 것과 돼먹잖은 놈의 진화 ,

<다윈의 대답1 변하지 않는 인간의 본성은 있는가>, 피터 싱어,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다윈주의 좌파의 가능성을 타진한다고.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에서 설명하듯 극단적인 이기주의 전략보다는 협력적 전략이 생존에 더 유리하다.

 

윤리적 노하우와 가상적 인격, <윤리적 노하우> 프란시스코 바렐라.

 

저자가 보기에 윤리는 노핫know what’의 문제가 아니라 노하우know how’의 문제. 즉 이성적 판단의 문제가 아니라 자발적 대처의 문제라고 한다. 윤리는 규칙보다는 오히려 습관을 따른다고. 바렐라는 특히 맹자의 인간 본성론에 주목한다. 또한 그는 앞 장에서도 언급했듯 우리의 자아가 비어있다고 주장한다. 동양인인 우리로서는 그다지 새로울 것도 없는 관점이다.

 

참고 서적

마투라나, <있음에서 함으로>

데닛, <자유는 진화한다>

지젝, <시차적 관점>


 














호모 무지쿠스가 부르는 여섯 가지 노래

 

호모 무지쿠스, 대니얼, J 레비틴

뇌의 왈츠, 대니얼 J 레비틴

 

레비틴은 인류학자, 고고학자, 생물학자, 심리학자 모두 인간의 기원을 연구하지만, 음악의 기원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적다고 말했지만, 예외적인 인물이 스티븐 핑커다. 그는 음악을 귀로 듣는 치즈케이크라고 말했다. 비유는 말랑말랑하지만 의미는 가혹하다. 핑커가 보기에 음악은 치즈 케이크만큼이나 생존이나 번식에 도움이 되지 않기에, 딱히 연구할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레비틴은 <뇌의 왈츠>를 통해 핑커의 주장을 반박하면서 음악도 진화의 산물임을 주장한다. <호모 무지쿠스>는 이러한 주장의 확장판이라고.

 

즐거운 노래를 들으면 세로토닌의 수치가 증가하여 기분을 좋게 하고 활기를 불어넣으며 스트레스를 줄이고 면역계를 튼튼하게 한다. 슬픈 노래는 프롤락틴을 배출시켜 기분을 전환해 준다. 저자는 이 책의 마지막에 <역사상 가장 완벽한 사랑 노래>마이크 스코트의 <모두 가져와>를 꼽았다고.















 

아버지의 역사, 아버지들에 대한 찬사

<아버지들에 대한 찬사>, 시몬느 코르프 소스

<노아의 외투> 필리프 쥘리앵

 

<아버지들에 대한 찬사>아버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입장에 동조하지 않는다고. 그렇지만 부성의 과거 모델이 작동하지 않기에 새로운 모델을 찾아야 하는 게 오늘날 아버지들이 직면한 현실이다. ‘부성의 과거 모델은 필리프 쥘리앵의 <노아의 외투>가 요긴하단다. 원래 아버지의 일차적 의미는 정치적, 종교적 아버지였다. 이런 의미에서 아들을 낳았기 때문에 아버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이기 때문에 아들을 낳는다.

 

이러한 아버지18세기 루이 16세의 처형으로 커다란 전환을 맞는다. ‘부친 살해에 의해 정치적, 종교적 아버지에서 오로지 가정으로 아버지의 역할이 축소된다. 또한 아버지의 권리를 말하던 시기는 지나가고 아이의 권리라는 새로운 관심사가 등장한다. ‘아이의 권리가 중시되고 어머니의 권리가 강화되면서 아버지의 권리는 더더욱 축소된다.

 

프랑스의 아버지는 다른 나라보다 더 독특한 입장에 놓이게 된다. 임신을 장려하기 위한 정부 정책의 일환으로 아버지가 아이를 양육한다기보다는 오히려 국가가 아이들을 양육하기 때문이다. 즉 프랑스 아버지는 더더욱 아버지의 권한이 축소될 수밖에 없다아버지로서 좋은 시절은 다 끝났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아버지의 권위가 무너지면 무너질수록 사회는 더 좋아질 것을 믿는다.

 

남성과 여성 그리고 소통

<남자를 토라지게 하는 말, 여자를 화나게 하는 말>, 데보라 테넌

<남자다움에 관하여>, 하비 맨스필드

 

저자인 데보라 터넌은 남성과 여성의 언어에도 성차가 있다고 주장한다. 남성의 대화 목적이 독립이라면 여성의 대화 목적은 친교. 이런 차이로부터 소통은 가능할까? 저자는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길 충고한다. 그러나 <남자다움에 관하여>를 쓴 하비 맨스필드는 성별간의 차이를 부인할 수 없다면 언어적 차이 또한 부인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남자는 남자답게, 여자는 여자답게 행동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7. 언어의 종말과 이야기의 향연

 

거꾸로 바벨탑 이야기. <언어의 종말>, 앤드류 달비.

 

저자인 앤드류 달비에 따르면, 오늘날은 언어의 분화 과정이 아니라 언어의 통합이 진행되고 있으며, 이것이 현재 인류가 처한 위험이라고 본다. 그는 21세기엔 25백개의 언어가 사라지고 약 200개의 언어만이 생존할 것이라고 전망한다. 그렇다면 언어가 사라지는 게 왜 문제란 말인가?

 

언어학자로서 저자가 우려하는 것은 세계의 각 언어로 전승되고 보존되어온 지식을 우리가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그에 따르면, 우리는 번역할 때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직접 건너갈 수 없으며 항상 현실 세계를 거쳐서 가야만 한다. 이때 각 언어는 세계를 보고 나누고 구분하는 각기 다른 관점을 갖고 있으며 이에 따라 그것이 그려내는 현실 세계의 지도도 다를 수밖에 없다. 즉 각 언어는 사물이 존재하는 방식에 대해서 각기 다른 통찰력을 제공해주며 우리에겐 그러한 대안적인 세계관이 필요하다. 한 언어의 소실은 곧 인간 경험을 이해할 수 있는 한 가지 대안의 상실이다. 게다가 보다 중요하게는 다른 언어와의 상호작용만이 우리 각자의 언어를 더욱 유연하고 창조적으로 만들어 준다.


외국어를 배울 때 마다 언어가 하나면 안 되는 거야? 그런 거야?’ 라는 투정을 부리곤 했었는데, 그렇구나. 소통되는 언어가 적어질수록 사유의 폭도 그만큼 얇아지리라.

 

이야기 탐구의 철학적 향연, <서사철학> 김용석

 

로쟈의 철학자 김용석에 대한 상찬이 인상 깊다. ‘유래없는 깊이와 넓이’, ‘거대한 향유 고래가 수면으로 솟아오르는 걸 보는 기분이라니. 부끄럽게도 난 이 책을 통해 김용석이라는 이름을 처음 접했다. 로쟈의 상찬은 계속된다.

 

세상 자체가 이야기의 중층 구조다. <서사철학>은 이러한 이야기들의 세계, 이야기들의 우주에서 무엇을 읽을 수 있고, 무엇을 해석할 수 있는지 시범적으로 보여준다. 한마디로 장관이다.

 

내러티브적 인식과 인문 과학, <내러티브, 인문과학을 만나다>, 도널드 폴킹혼.

 

저자는 인간은 세 가지 존재 영역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한다. 물질 영역과 유기체 영역, 그리고 정신(의미) . 이 중 오로지 의미 영역만이 인간 존재의 고유한 영역이고 내러티브는 의미 영역의 작용 가운데 하나다. 저자는 기존의 의미의 철학으로부터 한 걸음 나아가 의미의 영역이 사물이나 실체가 아니라 활동임을 강조한다. 물질 영역이 자연과학적 방법에 의해 연구되듯 의미영역은 역사학과 문학비평이 참조점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인문과학은 역사학과 문학이론에 더 치중해야 한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소설 이론의 역사> 윌리스 마틴

미케 발.

 













8. “ 너희가 한국어를 믿느냐?”

 

이것이 번역이다.

번역의 탄생, 이희재

<번역은 반역인가> 박상익

 

이희재는 들이밀기와 길들이기의 딜레마에 대해 말한다. 직역과 의역 사이에서의 고민을 드러내는 표현이다. 예전엔 발코니를 툇마루로 치즈를 소젖메주로 번역했다고 한다. 길들이기의 예다. 저자는 길들이기로서의 의역을 더 강조한다. “번역이란 외국어를 옮기는 작업이 아니라, 한국어를 바로 세우는 작업이다라고 말한다. 그가 외국어의 부자연스런 조어를 한국어의 특징을 최대한 살려 쓰자는 주장에 대해선 적극 동감한다. 번역이 저자를 위해서 라기 보단 독자를 위한 것이라는 저자의 주장을 따르자면 과도한 길들이기는 오히려 독자에게 해를 끼치진 않을까. 로쟈는 번역에서도 들이미는일은 이제 그만했으면 싶다고 말한다. 내 바램은 적어도 한국 소설이라면 외국 소설인양 일명 번역체 문장이라는 마스카라로 떡칠하는 추태는 그만 벌였으면 싶다. 한국 문단은 포용심이 넓은 건가? 이런 소설가에게 상 좀 그만 안겨줘라. 정말이지 난생처음으로 책 읽다 토할 뻔했다.

 

너희가 한국어를 믿느냐?” <번역비평> 창간호.

 

정가 2만원인 책 2천부를 초판으로 찍었을 때 역자가 받을 수 있는 최대 수입은 320만원 정도라고. 번역료가 번역의 적이었다. <뉴욕 타임스> 서평란의 경우 30~40면이라니! 허걱.

 

번역가의 겸손 혹은 소명의식, <번역, 권력, 전복> 로만 알바레즈

 

오역을 언급한다. ‘하느님의 양신의 횃불이 되고. lamblamp로 해석했다.

 

니체와 문체의 속도, <번역 이론>, 라이너 슐테 외 엮음.

 

한 언어를 다른 언어로 번역하는 데 가장 어려운 것은 그 문체의 속도이다













 

니체, <선악의 저편>

 

예를 들자면 니체는 독일어의 경우 빠른 템포presto’를 거의 표현할 수 없다며 유감스러워했다. 한참 웃었다.

 

우리, 적어도 말인은 되지 말자!”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얼굴 찌푸리게 하는 25가지 인간유형> 류짜이푸.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니체는 ‘Übermensch’‘der letzte Mensch’를 말한다. 영미권에선 ‘superman/overman’으로 번역되고, 우리나라 번역서에선 주로 초인최종 인간으로 번역되곤 한다. ‘초인이란 역어는 대체적으로 합의를 이룬 듯 하나, ‘der letzte Mensch’비천하기 짝이 없는 인간’, ‘말종 인간’, 최후의 인간등등 아직까지 딱히 하나의 공통된 역어가 없는 실정이다. 이에 로쟈는 <얼굴 찌푸르기 하는 25가지 인간유형>을 참조해 말인末人이란 역어를 제안한다. 그에 따르면 말인이란 일반인들보다 하급으로 퇴화하여 위축되고 창조력이라고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보잘것없는 인간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말인이란 말은 루쉰이 만들어냈다고. 루쉰의 Q‘가 이런 말인이었다. 류짜이푸의 설명에 따르면 소인은 생리적이거나 지적인 면에서 일반 사람과 동일하지만 품격이 떨어지고 인격이 보잘것없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말인은 대부분 우매하면서 선량하다.

 

말인은 지혜가 없는 대신 어느 말에나 순종한다. 힘은 없는 대신 상대방의 기분을 잘 맞춘다. 이렇게 되면 사회적으로 대량의 바보 언니가 세세 대대로 뒤를 이을 것이며 미래 사회는 말인이 좌지우지하는 사회가 될 것이다. 이러한 사회의 미래에 멸망의 어두운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질 것은 누가 봐도 자명한 일이다. 우리들이 한사코 말인의 대량 출현을 막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로자의 페이퍼 02. 니진스키의 고백, 니진스키 영혼의 절규

 

무용가 니진스키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울었다니, 그 생각만 하면 로쟈도 눈물이 난다고.

이건 뭐 달리 대책이 없다. 읽으면서 같이 우는 수밖에

 














9. “어머니가 나를 사랑한다니까!”

 

수레바퀴 밑에서데미안의 차이.

 

<수레바퀴 밑에서> 헤르만 헤세

<데미안> 헤르만 헤세

 

지금까지 읽은 책 중에서 가장 충격적이었던 책은?”이란 질문에 로쟈는 단연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밑에서>라고 답했다고. 로쟈에겐 이 책의 주인공 한스 기벤라트가 죽었을 때만큼 슬픈 적은 없었다. 한편 <데미안>은 데면데면했다고. 몇 번씩이나 읽다 그만두고 얼마 전에야 완독했다고 한다. 로쟈는 누구나 한번은 미치게 만드는 책의 마력이 여전히 미심쩍다며 <데미안>나의 이야기가 아니라고 말한다. , 이 얼마나 특별한가. 나는 <데미안>읽고 미쳤었으니 또한 이 얼마나 평범한가.

계란이나 깨버릴까.

 

헤세의 차라투스트라 VS 니체의 차라투스트라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프리디리히 니체

 

헤세는 열세 살 때 니체를 읽고 그의 추종자가 아니며 니체 철학은 오래가지 못할 거라고 아버지에게 편지를 보냈다고. 열세 살 때?? 그러나, <데미안>의 싱클레어는 니체 빠였다.

 

카프카 문학의 기원.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 카프카

 

아버지야말로 카프카 문학의 기원이라는 것.

 

어머니가 나를 사랑한다니까!” <최초의 인간>

 

어머니야말로 카뮈 문학의 기원이라는 것.

 

카프카가 아버지에 대한 증오 때문에 펜대를 잡았다면

카뮈는 어머니에 대한 사랑 때문에 펜대를 잡았다.
















 

10.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단 한 번뿐인 삶 VS 영원회귀,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

 

쿤데라가 보기에 영원회귀 사상이 역으로 주장하는 바는, 한 번 사라지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 삶이란 그림자에 불과하며 아무런 무게도 갖지 않는 무의미한 삶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한 번의 실수처럼 정상 참작의 대상이 되며 노스탤지어까지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반대로 인생의 매 순간이 영원히 반복된다면? 우리는 마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힌 것처럼 영원성에 못 박힌 형국이 된다. 더불어 우리의 행동 하나하나는 엄청난 무게의 책임을 짊어지게 될 것이다. 영원회귀의 삶이 너무도 무거운 삶이라면, 단 한 번의 삶은 깃털만큼이나 가벼운 삶이다. 짐이 무거울수록 우리의 삶은 지상에 더 가까워지면서 생생한 현실감을 갖게 될 테지만, 반면에 짐이 전혀 없다면 우리의 존재는 참을 수 없을 만큼 가벼워지면서 자유롭다 못해 무의미해질 것이다. 그리하여 쿤데라는 묻는다. “그렇다면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 무거움, 아니면 가벼움?”

 

아인말 이스트 카인말Einmal ist Keinmal’, 한 번 일어난 일은 전혀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라는 뜻이다. 쿤데라는 토마스가 바로 이 한 문장에서 태어났다고 말한다. 토머스는 주로 여성들의 차이에 주목한다. 그는 여성들 간의 백만분의 일의 차이에 사로잡힌다. 테레사를 만나면서 토마스는 새로운 독일어 문장으로 대체된다. 에스 무스 자인Es muss sein”, 즉 그래야만 한다. 로쟈는 토머스가 가벼움의 세계에서 무거움과 필연성의 세계로 돌아갔다고 말한다.

 

가벼움과 무거움 사이에서 진동하는 토마스의 삶은 한 번뿐인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그래야만 한다사이에 걸쳐 있는 삶이기도 하다. 어느 쪽이 옳은가? 오직 단 한 번밖에 살지 못한다면 그러한 가치판단은 우리의 몫이 아니다. 그것이 영원회귀의 사상이 던져주는 메시지다.

 

단 한번 뿐인 삶은 가볍고, 영원회귀하는 삶은 무거운 걸까? <무의미의 축제>에서 쿤데라는 말했다. 삶이 무의미하다고. 그렇지만 우리는 그 삶을 사랑해야 한다. 사랑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서정적 바람둥이와 서사적 바람둥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민음사.

 

이 소설엔 두 가지 정본이 있다. 체코어본, 프랑스어본인데 현재는 프랑스어본 번역만이 통용된다. 쿤데라는 자신과 세계와 타인에 대한 인간의 두 가지 태도서정적인 것서사적인 것으로 구분한다. 그러나, 이런 생각이 프랑스인에게는 낯설었다. 그래서 서정적 바람둥이낭만적 한량으로, ‘서사적 바람둥이자유주의적 한량으로 바꾸는 것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고. 이런 이분법은 우리에게도 낯선 것이 되고 말았다기보다는 지금도 낯설다.

 

쿤데라의 안나 카레니나와 비인칭적 열정

 

<안나 카레니나>

<소설의 기술>

<커튼>

 

토마스와 테레사의 강아지 이름이 카레닌이었다니. 쿤데라의 톨스토이에 대한 오마쥬? 쿤데라는 <안나 카레니나>자살의 산문성에 대한 톨스토이의 탐구라고 했다고.

 

로쟈의 리스트 6. 정홍수의 평론집 <소설의 고독>

가라타니 고진, <근대 문학의 종언>

신형철, <몰락의 에티카>

 

밀란 쿤데라의 보헤미안적 삶과 성찰, <커튼> 밀란 쿤데라

 

체코 작가로 활동했지만 체코에게 쫓겨나 프랑스에서 프랑스어로 소설을 쓰는 쿤데라는 체코 작가프랑스 작가로 불리기 보단 중부유럽 작가로 불리길 선호하고, 더 나아가 보헤미아인이라 불리길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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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6-05-12 0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쿤데라도 그렇고 카프카도 그렇고... 좀 이쪽 사람들이 범세계적 글쓰기를 하는 것 같습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카프카적 글쓰기를 소수의 문학이라고 하더군요.

시이소오 2016-05-12 09:28   좋아요 0 | URL
앵글로 색슨적 문학보단 슬라브적 문학에 더 공감이 가네요.
주변인, 망명자, 유배당한 자, 디아스포라, 유목민적 글쓰기라고 할까요.
노마디즘을 주장하는 들뢰즈나 가타리에게도 카프카가 더 와닿을거에요.

읽는 책마다 체스와프 미워시의 <사로잡힌 마음>이 불쑥불쑥 튀어나와서
읽고 싶은데 아직 미번역이네요.

몇몇 작가를 제외하면 동유럽 작가들은 아직 우리에겐 낯선 문학이 아닐런지요?
그야말로 `소수자`문학인 듯.

곰곰생각하는발 2016-05-12 0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국적없음.. 혹은 소속 없음이 카프카와 쿤데라 문학의 정체성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 점에서 나보코보도ㅗ 같은 부류... 이들도 늘 모국어보다는 다른 언어를 사요앴으니 말입니다.

시이소오 2016-05-12 09:53   좋아요 0 | URL
일본어로 쓰긴 하지만 한국에도 서경식 선생님이나 강상중과 같은 `디아스포라` 작가들이 있죠.

소수자, 경계인, 혹은 경계 밖으로 쫓겨난 자의 문학은 아무래도 기존의 가치에 의문을 제시하기에
`우리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뜨리는` 힘이 있는 것 같습니다.
(동성애자, 여성에 대한 열등감이 있어요.)

`디아스포라 문학`의 계보를 추적해 보고 싶네요 ^______^

alummii 2016-05-12 1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읽고싶은 책 많네요 추천감솨...

시이소오 2016-05-12 12:56   좋아요 1 | URL
저도 차근차근 읽어봐야 겠어요 ^^

페크(pek0501) 2016-05-13 0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래전에 수레바퀴 아래서와 데미안을 읽었는데
지금 다시 읽어 보면 그때 놓친 부분이 있다는 걸 알게 될 것 같아요.

오늘 날씨가 아주 좋아 걸으면서 기분이 좋았어요. 미세먼지가 없는 날의 행복을 만끽했어요.
내일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좋은 밤 되세요...

시이소오 2016-05-13 09:40   좋아요 0 | URL
헤세, 저도 다시 읽어보고 싶어요. 어제 저도 가까운 근교 산책 다녀왔어요. 오늘은 서서히 날씨가 개일듯 합니다.

화창한 하루 되시길 ^___^
 

6개월 동안, 240여 권의 책을 읽었다곤 하지만 그 중 반은 읽으나 마나한 책이었다. 닥치는 대로 읽은 결과 적중률이 시원치 않은 탓이다. 믿을만한 가이드를 찾아 책 지도를 만들어 영토화하리라.

 

1. 가장 아름다운 지상의 양식

 

젊은 날 로쟈에겐 사르트르가 영웅이었다. 사르트르의 책 중, 나는 <구토>외엔 다른 책은 안 읽은 반면 로쟈는 <구토>빼고 다른 책들은 다 읽었다고. 90학번 이후의 세대들에겐 사르트르가 한 물 간 철학자처럼 보여 졌기 때문일까.

 

<존재와 무>, <문학이란 무엇인가>,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이제 생각이 난다. 지난날 내가 바닷가에서 그 조약돌을 손에 들고 있었을 때 느꼈던 것이 뚜렷하게 생각난다. 그것은 시크무레한 일종의 구토증이었다. 그 얼마나 불쾌한 것이었던가! 그런데 그것은 그 조약돌 탓이었다. 확실하다. 그것은 조약돌에서 손아귀로 옮겨졌었다. 그렇다. 그것이다. 바로 그것이다. 손아귀에 담긴 일종의 구토증

 

- 사르트르, <구토

 

로쟈는 닉 레인의 <미토콘드리아>는 대충 서론만 읽고 쓴다.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을 터득하신 듯. ‘아포토시스는 예정된 세포 자살이라고 한다. 모든 세포는 더 큰 이익을 위해 몸 전체를 위해 자살을 하는데, 아포토시스가 일어나지 않으면 암이 발생할 수도 있다고. 세포의 입장에서 보자면 두 가지 길 밖에 없다. 숙주를 위해 자살을 하는 방법, 자신을 위한 자유를 찾는 방법. 그러나, 자신의 자유는 곧 숙주를 숙여, 결국 죽을 수밖에 없다.

 

세포의 두 갈래 길에 대한 명상은 프란시스코 바렐라의 <윤리적 노하우>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네오포네라 아피칼리스라는 개미 집단은 전체를 조정하는 중앙 통제적인 자아를 갖고 있지 않음에도 마치 하나의 유기체인 것처럼, 전체의 중앙에서 조정하는 행위자가 있는 것처럼 움직인다고. 바렐라는 이것을 무아적 자아혹은 가상적 자아’, ‘자아없는 자아라고 부른다.

 

선종의 스님들은 툭하면 개미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하곤 조사에게 묻곤 하던데

로쟈의 말을 따르자면 개미에게도 불성이 있다.’

 

제일 지식인 중에 서경식이란 이름은 들었어도 강상중이란 이름은 금시초문이었다. 서경식이 소프트하다면 강상중은 하드하다고. 강상중 씨는 일본 극우파의 공격에 대비해 강연에 나갈 때는 배에 신문지를 넣고 다닌다고 한다.

 

인생은 한 갑 성냥을 닮았다. 소중하게 다루는 건 어리석다. 소중하게 다루지 않으면 위험하다.”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언제나 나는 나 자신을 후위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불현 듯 정신을 차리고 보면 내 앞에 아무도 없고 어느새 내가 전위가 된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나는 언제까지나 후위라고 생각하거니와 후위라는 사실을 영광으로 여긴다. 그럼에도 내가 마치 전위인 것처럼 보이는 것은, 그만큼 일본이라는 사회가 변해버렸기 때문이다.

 

- 강상중, <청춘을 읽는다.>














 

로쟈의 리스트 1

 

마스모토 겐이치, <기타 잇키>

히틀러1

스탈린 강철권력

네차예프 혁명가의 교리문답

괴셀스, 대중 선동의 심리학

로베스피에르 혁명의 탄생

 

2. 책 읽기와 글쓰기.



 












로쟈하면 지젝아닌가? 여기선 지젝의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향락의 전이> 두 권에 대해 말하는데 책에 대해서라기보다는 번역에 대한 문제 제기다. so far as를 이상(理想)으로 번역했다니! 시라노 백작은 키라노 백작이 되고.


 

무질의 소설 <특성없는 남자>에 등장하는 도서관 사서는 350만권의 장서들에 대한 총제적 시각을 유지하기 위해 책은 읽지 않고 제목과 차례만 본다고. 이때만 해도 <특성없는 남자>가 출판되지 않았었나 보다. <특성없는 남자> 1권을 작년에 읽었었는데, 주인공이 도서관 사서였음?? 왜 전혀 기억이 안 날까? 독서를 위해서는 인생이 짧다. 어떻게 해야할것인가? <읽지 않는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의 저자의 충고는 이렇다.

 

중요한 것은 책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얘기를 하는 것, 혹은 책들을 통해 자기 얘기를 하는 것이다.”















 

<햄릿에 관한 앙케트, 귀머거리들의 대화>

 

<, 열 권을 동시에 읽어라> 나루케 마코토.

 

저자는 물리학, 문학, 전기 및 평전, 경영학, 역사, 예술 등 전혀 다른 장르의 책을 적극적으로 넘나들며 동시에 읽을 것을 충고한다. 다치바나 다카시와 마찬가지로 저자 역시 문학책은 읽을 가치가 없다고 말한다. 여러 권의 책을 동시에 읽다가 요즘 들어 너무 편중된 독서를 하는 듯.

 

<독서력>, 사이토 다카시.

 

사이토 다카시는 문학 작품 100권과 교양서 50권 정도를 독서력 기준으로 제시한다. 독서력에 탄력이 붙으면 책 수준에 따라 속독과 정독을 병행하라고. 이후에는 여러 권의 책을 동시에 읽으라고 말한다.

 

김봉석, <전방위글쓰기>

오병곤, 홍승완, <내 인생의 첫 책 쓰기>

박미라, <치유하는 글쓰기>

애디 딜러드, <창조적 글쓰기>

 













김봉석은 일주일에 원고 2,3매라도 꾸준히 쓸 것을 충고한다. 그 다음에는 책을 쓰면 된다. <내 인생의 첫 책 쓰기>는 저자들 자신들이 책을 낸 경험을 바탕으로 전문가가 되기 위해선 책을 쓰는 것 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고 말한다. <치유하는 글쓰기>는 글쓰기 자체가 힐링이 될 수 있음을 강조한다. 글쓰기에 소질과 열정도 있다면 <창조적 글쓰기>처럼 글을 쓰는 삶을 추구할 수도 있다.

 

로쟈의 리스트2 : 한겨례 지식문고 1차분

 

3. 교양이란 무엇인가

 

고미숙, <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

장정일, <장정일의 공부>

강유원, <몸으로 하는 공부>

신영복, <강의 나의 동양고전 독법>













 

고미숙은 공부하는 인간을 호모 쿵푸스라 부른다. 다른 말로 이권우는 호모 부커스라 했다. 장정일은 이탁오의 말을 듣고 눈물이 핑 돌았다고.

 

나이 50 이전에 나는 정말 한 마리 개와 같았다. 앞의 개가 그림자를 보고 짖어대자 나도 따라 짖어댄 것일뿐, 왜 그렇게 짖어댔는지 까닭을 묻는다면, 그저 벙어리처럼 아무 말없이 웃을뿐이었다.”

 

강유원이 강조하는 것은 학이시습지 불역열호로 학이 정신의 일이라면 은 몸의 일이다. 즉 머리로 배우고 몸으로 익히라는 말이다. 이러한 몸으로 하는 공부의 모범적인 사례로 로자는 신영복을 들었다.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신영복 선생이 감방 안에서 노촌 이구영 선생으로부터 서예와 동양 고전, 한학을 배운 것은 익히 알려진 일이다.

 

커드 스펠마이어, <인문학의 즐거움>

에드워드 사이드, <저항의 인문학>













 

스펠마이어는 오늘날의 인문학이 전반적으로 우리의 실제 생활과는 유리되어 있다고 지적한다. 동감이다. 삶에 봉사하지 않는 인문학은 지적 허영이거나 쓰레기에 불과하다. 왈라스틴이나 에드워드 사이드는 근대 사회과학과 인문학이 주로 유럽 중심주의적 관점이라고 말한다. 사이드는 유럽중심주의 관점을 제한하고, 3세계의 전통과 언어를 존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또한 민주적 비판을 강조했다. 그는 지식인을 가리키는 아랍어의 두 단어를 차용한다. ‘무타카프muthaqqaf’무파키르mufakir인데, 무타카프는 문화/교양을 뜻하는 타카파에서, 무파키르는 사유를 뜻하는 키프르에서 온 단어다. 배우면서 비판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이러한 작가 지식인들은 사회정의와 경제적 평등, 그리고 자유로서의 발전을 추구해야만 한다.

 

임철우, 우기동, 최준영 외, <행복한 인문학>

 

미국의 교육자 얼 쇼리스의 가난한 이들을 위한 인문학 강좌를 모델로 사회 소외 계층에 행해진 인문학 강좌를 들은 수강생과 교수님들의 체험담이라고 한다. 당장 먹고 살기 바쁜데 인문학이 무슨 소용인가? 수강생들은 인문학을 통해 어떤 새로운 가능성을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다른 삶과 다른 사회를 꿈꾸려는 근원적인 충동은 누구에게나 있다는 점, 그리고 사람은 타인의 시선을 통해서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서 자신의 존재감과 삶의 의미를 찾는다는 점 등이다.

 

장 폴 사르트르, <지식인을 위한 변명>

 

사르트르가 보기에 지식인들은 언제나 무기력한 상황에 처해있다. ‘무기력한 상황이란 지식인들이 지배 계급에 예속되어 있다는 말이다. 지식인들은 이러한 예속적, 기생적 상횡에서 탈피하여 숙주인 지배계급에 반기를 들고 저항할 때 탄생한다. 이러한 반항의 신화적 형상이 프로메테우스다. 로쟈가 지적하듯 오늘날의 상황은 달라졌다. 오늘날 지식인들은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기보단 지배계급이 던져준 사료를 감사히 쳐 먹는 배부른 돼지가 되길 바란다. 한국엔 주로 이러한 돼지들이 대학에서 학생들을 사육한다.

 

천정환, <대중 지성의 시대>

 

저자가 그려내는 문화사로서의 지식사는 단지 천재적인 개인과 권력의 시계를 통해 이루어진 지성사가 아니라 다양한 다수의 사람들이 소유한 지식과 그 앎- 문화의 변동에 초점을 맞춘다. 소위 아래로부터의 지성사.

 

도쿄대 교양학부, <교양이란 무엇인가>

오마에 겐이지, <지식의 쇠퇴>

 

문사철 학과가 해마다 없어지는 추세는 내년에도 계속 이어질 듯 보인다. 70년대 대중사회가 성립되면서 일본이나 한국은 교양주의의 쇠락을 맞았다.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예전처럼 인생의 의미보다 취업을 더 고민한다. 일본 경영 컨설턴트 오마에 겐이치는 예전의 교양이라는 게 오늘날 전혀 통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이른바 글로벌 리더들이 전통적인 교양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그의 따르면 지금의 리더들은 주로 사회 공헌과 환경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는다고 한다. 허걱, 일본은 그런가? 독일의 경영자들은 대뜸 당신은 터키를 위해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자주 던진다는데, 허걱, 역시 ‘Bildung’ 국가다.














 

로쟈의 리스트 이삭 바벨

 

4. 고전은 왜 읽는가

 

디트리히 슈바니츠, <슈바니츠의 햄릿>

여석기, <나의 햄릿 강의>

해럴드 블룸, <세계문학의 천재들>

 














왜 고전을 읽어야 하는가? 슈바니츼의 경험담이 재밌다. 어릴 적 <헨리 4>를 읽었던 저자는 아이들과의 욕 경연대회에서 어느 날 상대방 뚱보 아이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 삶아놓은 돼지머리 같은 놈아, 헛바람만 들어찬 똥자루, 지 다리도 못 보는 한심한 배불뚝이, 물 먹인 비계, 물러터진 희멀건 두부살, 푸줏간에 통째로 내걸린 고깃덩이, 푸딩으로 속을 채운 출렁거리는 왕만두, 버터를 접시째 퍼먹는 게걸딱지......” 그리고 옆에 끼어든 빼빼 마른 친구에겐 꺼져버려, 이 피죽도 못 얻어먹은 몰골아, 뱀장어 껍데기, 말린 소 혓바닥, 북어 대가리 같은 놈, 수수깡, 뜨개바늘보다 더 가늘어서 치즈 구멍으로 술술 빠지는 놈아, 갑자기 성난 비둘기라도 된 거냐? 아니면 세상에서 제일 용감한 생쥐?”

 

슈바니츠는 욕 경연대회의 챔피언이 된 것은 물론이고 친구들은 그를 존경의 눈빛으로 바라봤다고 한다. 슈바니츠는 필립 아리에스의 <죽음에 대한 서양의 태도>를 언급하는데, 동문선에서 필리프 아리에스의 <죽음의 역사>로 국역돼 있다.

 

로쟈는 블룸의 <세계 문학의 천재들>이 완역돼있지 않아서 구입을 포기했다고 한다. 허걱, 몰랐었다. 그렇다. 난 완역도 아닌 책을 멍청하게 다 읽었다.

로쟈 ......다 읽지도 않으면서. 다 안다.


 













가와이 쇼이치로, <햄릿의 수수께끼를 풀다>

 

전반적으로 작가의 해석에 동의하기 힘들다. 헤라클레스? 영웅이 되고자 했다고?

 

박민영, <논어는 진보다>

리쩌허우, <논어금독>

 

<논어는 진보다>의 주된 내용은 공자와 논어가 보수가 아니라고.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다를 듯하다. 묵자와 비교하면 공자는 보수다. 한국 보수들에 비하면 진보다. 러쩌허우에 따르면 <논어>의 이름난 주석자만 하더라도 2천 명이 넘는다고. . 리쩌허우 말대로 원문 읽기 보다 중요한 것은 광범위한 인문학적 지식과 철학적 사고능력일 것이다.

 

이상수, <한비자, 권력의 기술> “목숨이 붙어 있다면 개혁가가 아니다.”

 

개혁가는 군주의 마음을 얻어야만 한다. 그래서 유세를 해야 하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개혁가의 의견은 중요하지 않다. 군주의 마음을 움직여야 한다.


한비자는 유세객 또는 개혁가가 무엇을 알고 있느냐보다 그 지식을 어떻게 세상에 내놓아 실행되도록 하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한비자가 보기에 권세가들, 즉 신하들은 오로지 사리사욕만을 추구하는 존재다. 군주와 권세가 사이에서 개혁가는 어떻게 군주의 마음을 잡을 것인가? 개혁가는 그런 와중 대개 모함과 누명으로 형리에게 죽거나 자객에게 죽임을 당할 운명이라고 단언했다. 그의 말처럼 한비자 역시 그를 시기한 이사의 모함 때문에 결국 죽고 말았다.

 

신병주, <이지함 평전>, 토정 이지함을 말한다.

 

<토정비결>은 이지함이 쓴 게 아니란다. 국부증대책, 해상통상론을 조정에 건의한 걸로 보아 18세기 북학파 실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듯하다.

 

로쟈의 리스트 4 유르스나르 읽기

 

5. 행복이란 무엇인가

 

미하일 숄로호프, <인간의 운명>, <고요한 돈강>


 














<고요한 돈강>으로 1965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미하일 숄로호프의 중편이다. 러시아 혁명과 내전을 겪고,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된 평범한 가장 안드레이 소콜로프가 주인공이다. 아내와 두 딸이 죽은 줄도 모르고 포로 생활을 전전하던 소콜로프는 어느날 과중한 노동량에 불평을 터뜨렸다가 수용소 소장에게 불려간다. 소콜로프는 죽음 앞에서도 기어코 자신의 품위와 자존심을 지켜낸다.


지젝,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

마르셀 모스, <증여론>

부르디외, <실천이성>

 

포틀래치라는 게 있다. 북미 원주민의 말로 선물이라는 뜻인데, 보통은 선물을 주면서 크게 벌인 잔치를 가리킨다. 많은 손님을 초대해 생선과 고기, 모피와 담요 따위를 나누어줌으로써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인정받고 과시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선물을 받은 사람은 또 더 큰 포틀래치를 열어서 자기도 못지않다는 걸 보여주어야 했다.

 

로쟈는 포틀래치와 대조적인 것이 자본주의 시장경제라고 보았다. 포틀래치가 주인들 사이의 행위라면 교환은 노예에 속하는 행위라고. 내 생각엔 포틀래치 역시 노예에 속하는 행위다.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

 

행복한 가정은 모두 서로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제각각으로 불행하다.”

 

행복은 나비와 같다. 잡으려 하면 항상 달아나지만, 조용히 앉아 있으면 너의 어깨에 내려와 앉는다.”

 














<소비의 사회>, 장 보드리야르,

<무소유>, 법정

 

티베트 토종개 짱아오열풍. 중국에선 한국 돈으로 십 수억을 호가한다고.

 

보드리야르에 따르면 사회 평등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행복은 계량 가능한 것이 되어야 했다. 그 척도는 소비다. 그러나 가장 가난한 나라에 속하는 방글라데시 국민의 행복지수가 세계 최고 수준인 것만 들여다보아도 소비가 행복의 척도는 될 수 없을 것이다.

 

함께 읽을 책.

 

<풍요한 사회> 갤브레이스,

<새로운 산업국가> 갤브레이스.

<행복의 역설> 리포베츠키

 

납작하다고 다 홍어는 아니다. <이기적 유전자>, 리처드 도킨스















 

상어와 가까운 종류인 가오리과의 홍어는 정규 과정을 거쳐 몸을 납작하게 만들었다. 녀석은 몸을 양 옆으로 늘려서 커다란 날개를 만든 것이다. 그래서 마치 압착기를 통과한 상어와 같은 모양을 갖게 되었고 좌우가 대칭이다. 하지만 가지미목에 속하는 광어(넙치)는 다른 방식으로 몸을 납작하게 만들었다. 경골여류인 이 녀석은 상어와 다르게 세로로 납작하다. 따라서 광어의 조상이 바다 밑바닥에 엎드릴 때, 홍어의 조상처럼 배를 깔고 엎드리는 것보다는 몸을 한쪽으로 눕히는 것이 자연스러운 행동이었겠다. 하지만 이런 방식은 아래를 향한 눈 하나가 항상 모래 속에 파묻히게 되어 결과적으로는 외눈박이를 만드는 문제점을 낳았다. 이 문제는 진화 과정에서 아래로 내려간 눈이 위쪽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해결됐다. 눈이 돌아가는 과정은 광어의 어린 새끼가 자라는 동안 재연된다고 한다. 그래서 어느 정도 자란 광어는 양쪽 눈이 모두 위로 향한, 마치 피카소의 그림과도 같은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하고 바다 밑바닥에서 살아간다.

 

로쟈는 기초단체장 선거에서 드러난 정치가들의 비리를 지적하기 위해 홍어와 광어를 비유로 든다. 즉 유권자 앞에 정직하게 엎드리기보다는 앞뒤 가리지 않고 일단 한쪽으로 드러누운 정치가들은 마치 잘못된 진화로 뇌마저 뒤틀린 광어와 같다. 납작하다고 다 홍어는 아니다.

 

민주주의 이론서

민주주의는 죽었는가

데이비드 헬드, <민주주의의 모델들>

 

로쟈의 리스트5. 스티븐 제이 굴드.


-2014년 11월 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