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역사분야의 화제작은 이덕일의 <윤휴와 침묵의 제국>(다산초당, 2011)이다. 읽어보진 않았지만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김영사, 2000)를 바로 떠올리게 해준다. 아이가 영화를 보고 나서 요즘 해리 포터 시리즈에 잔뜩 빠져 있어서 몇권 주문하는 김에 나도 이 두 권을 어제 같이 주문했다. 조선사에도 관심을 갖게 되면 읽을 책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텐데 큰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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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11. 07. 24) “주류에 맞서다 죽은 윤휴 과연 우리세대는 떳떳한가”
“나라에서 유학자를 쓰기 싫으면 안 쓰면 그만이지 죽일 것은 무엇 있는가.” 조선 후기 학자이자 정치가 윤휴(1617~80)는 사약을 받으면서 이런 말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10여년 전부터 이 비운의 정치가를 주목했던 역사평론가 이덕일씨(50·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는 당시 윤휴의 후손이 “아직도 말하기를 꺼려하는 것 같다”는 말을 전해들었다. 무엇이 300여년 전 죽은 선비를 그토록 ‘금기’로 만들었는가, 이 소장이 <윤휴와 침묵의 제국>(다산초당)을 내놓은 이유다.
지난 19일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출간 기자간담회에서 이 소장은 “현재 우리 사회는 ‘윤휴를 죽였던 당시 체제와 무엇이 다른가’라는 문제의식이 이 책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라고 말했다. “아직 우리 사회에는 학계의 정설과 다르면 비난하고 추방하려고 하는 풍토가 있어요. 인문학은 늘 세상에 대한 비판적 통찰을 제시해야 하는데, 사고의 다양성을 추구하다 사형당한 윤휴는 과연 우리 시대는 ‘떳떳한가’를 묻고 있습니다.”
이 소장은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를 통해 송시열에 덧칠된 신화를 벗겨냈다. 이번에는 그의 반대편에 섰던 윤휴의 삶을 조명하면서 다시 한번 송시열 계열의 노론 중심 역사관을 비판한다. “아직도 국사교과서는 송시열이 효종을 도와 북벌을 추진했다고 가르치지만, 송시열을 위시한 서인들은 진짜 북벌론자인 윤휴를 죽였습니다.” 그는 송시열이 주장한 북벌이 위로는 조선 국왕을 압박하고, 아래로는 백성을 억압하면서 사대부들의 기득권을 영원히 잇겠다는 전략에 불과했다고 말한다. 효종의 군비 강화책을 사사건건 반대했으며, 북벌 총사령부격인 체부를 설치했다는 것을 도리어 역모의 증거로 삼아 윤휴를 제거한 것 자체가 그 증거라는 것이다.
송시열은 주희의 성리학만을 만고의 진리로 삼아 유일사상 체제를 구축하고자 했다. 윤휴가 <중용>에 주석을 붙인 <중용신주>를 내놓으면서 주희와는 다르게 장·절을 구분하자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아붙일 정도였다. 성리학에는 양반 사대부의 계급적 특권을 절대시할 수 있는 사상이 담겨 있었기에 일점일획도 고칠 수 없었다. 흔히 당파싸움으로만 알려진 예송논쟁 또한 사대부의 특권을 강화하기 위해 조선의 왕을 자신들과 같은 명 황제의 신하로서 동격에 놓기 위한 것이었다. 이 소장은 “국상에 상복을 3년이 아니라 1년을 입으라는 주장은, 대통령이 세상을 떠났는데 가족장을 치르라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설명한다.
윤휴는 ‘송시열의 나라’에 맞서 “어찌 천하의 이치를 주자만 알고 나는 모르겠는가? 주자가 다시 살아온다면 내 견해에는 동의하지 않겠지만, 자사(중용의 저자)는 동의할 것”이라고 응답한다. 그는 중국에서 청나라에 반대해 일어난 ‘삼번의 난’을 호기로 여기고 이때 북벌을 실시해야 한다며 58세에 처음 벼슬길에 나섰다. 북벌에 앞서 윤휴는 양반들에게도 군포를 징수하는 호포제와, 신분에 따른 호패의 차이를 없애는 지패제를 도입했다. 북벌이 추진되려면 나라와 백성들이 부유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양반 사대부의 계급적 특권이 폐지돼야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이 모든 정책은 서인들에 의해 좌절된다. 이 소장은 “윤휴의 죽음 이후 조선은 다른 사고를 허용하지 않는 ‘침묵의 제국’이 돼 버렸고,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고 말한다.
윤휴의 북벌론은 실현 가능했을까. 이 소장에게 이 질문은 본질이 아니다. 그는 정치와 학문의 ‘진정성’을 말한다. 북벌을 부귀영화의 수단으로 사용했던 노론과, 실제 북벌 총책임자가 되길 원했던 윤휴의 삶은 어떻게 전승됐는가. “윤휴의 사상을 이은 강화 양명학자들이 일제에 맞서 만주로 넘어가 독립운동을 했다면, 노론은 대거 친일파로 변절했습니다.” (황경상 기자)
11. 07.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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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송시열과 윤휴를 포함한 17세기 조선 유학자들에 대한 소개는 이경구의 <17세기 조선 지식인 지도>(푸른역사, 2009)를 참고할 수 있다(이선아의 <윤휴의 학문세계와 정치사상>(한국학술정보 2008)은 학위논문인 듯싶다). 윤휴를 다룬 장의 제목은 '근본주의자를 위한 변명'인데, 윤휴의 '이단적' 주자 해석에 대해서 이렇게 평했다.
윤휴 본인은 주자를 반대할 생각이 없었고, 오히려 주자의 정신을 따른다는 신념을 가졌다. 하지만 송시열 등은 주자를 따르는 또 다른 길, 해석의 가능성을 용납할 수 없었다. 국가 재건의 방향이 다르게 흐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윤휴가 제기한 대안은 정치적으로 문제되지 않는 범위에서 유형원, 정약용 등을 통해 이어졌고, 국가주의적 기획은 영조, 정조의 정국 운영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영조는 유학의 시비는 국가와 무관하다고 선언해 유학의 틀 내에서는 더 이상 시비가 강렬하게 전개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윤휴가 대한제국 끝 무렵인 1908년에야, 조선의 문제적 인물 수십 인과 함께 비로소 복권된 것은 권력화된 주자학의 독선이 드린 어두운 그림자일 것이다.(149-15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