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밖 인문학습공동체를 어떻게 볼 것인가란 주제를 다룬 기사 두 편을 자료로 스크랩해놓는다. 문학평론가 이명원의 ‘인문학습공동체의 증가 현상을 보는 시각’이란 글을 정리한 기사와 지난봄 교수신문에 실렸던 문학평론가 오창은의 기사다(이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도 이젠 어느 정도 표준화돼 있다는 생각이 든다). 두 사람은 모두 지행네트워크 멤버라는 공통점도 있다. 개인적으론 대학밖 인문학 강의를 많이 해오고 있기에 내용과 무관하지만은 않다. (대학밖) 인문학 붐이 2005, 6년 즈음부터 일어난 현상이라고 하니까(대학의 '인문학 위기론'과 맞물려 있다) 10년쯤 채워진 뒤에는 나름대로 역사적 의미도 따져볼 수 있겠다...
경향신문(11. 07. 26) “대학 중심 경쟁에서 탈피, 사회 참여의 갈증 풀어줘 인문학습공동체 참여 촉진”
2000년대 들어서 인문학습공동체는 빠른 속도로 증가했다. ‘수유+너머’를 필두로 ‘철학아카데미’, ‘다중지성의 정원’ 등은 대중적으로도 널리 알려졌다. 이들은 대학 중심의 낡은 지식 재생산 구조에서 탈피해, 제도의 외부에서 다양한 지적 활동과 실천을 벌여왔다.
문학평론가 이명원은 반연간 잡지 ‘시민과 세계’에 기고한 ‘인문학습공동체의 증가 현상을 보는 시각’이라는 글을 통해 이러한 현상의 원인과 한계점을 짚었다. 그는 인문학습공동체의 확산과 대중적 열기가 “제도화된 교육기관이 우리 시대의 뜻있는 지식인과 대중에게 근본적인 비판과 성찰의 대상으로 전락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밝혔다. “이전의 교육과 학습 패러다임이 위기에 빠졌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그는 이 같은 현상이 조선 후기 관학에 대항해 벌어진 실학운동, 1980년대 폐색 상황에 맞서 벌어진 진보적 학술운동과 같은 맥락이라고 분석한다.
1990년대 들어 학문 분야에서도 ‘무한경쟁’ 체제가 도입되면서, 교수·연구자들은 연구업적을 둘러싼 과도한 경쟁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기업식 문화가 무차별적으로 침투한 대학에서 학생들은 살아남기 위한 스펙 경쟁에 몰두했고, 카이스트 사태와 같은 비극적 결과가 초래되기도 했다. 이명원은 “사회구성원 모두가 생존을 위한 ‘위험상황’에 처한 현실에서 삶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산다는 일의 존엄을 확인할 수 있는 근거를 찾고자 하는 열망이 인문학습공동체 참여를 촉진하고 있다”고 말한다.
더구나 이명박 정부 들어 ‘민주주의의 위기’가 지적되고 있지만, 오늘날 복잡한 현실의 모순은 ‘거리의 몸싸움’만으로 극복할 수 없다는 문제의식도 나타났다. 이 과정에서 인문학습공동체는 고립된 대중들이 다른 이들과 같은 고민을 공유하고, 사회 참여의 갈증을 풀어낼 수 있게 해 줬다는 것이 이명원의 시각이다. 매년 1만명 이상 쏟아져 나오는 박사학위 소지자들 또한 “지식인으로서의 문제의식을 견지하면서도, 사회운동에 대한 신념도 확장시킬 수 있는 공간”으로서의 공동체를 주목하고 ‘대중지식인’으로 거듭났다.
다만 이명원은 “인문학습공동체 역사가 10여년이 지난 지금, 최초의 설립자나 발기인을 넘어설 후속 주체들이 형성됐는가”라는 문제를 제기한다. “대부분의 공동체는 상징적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움직이지만, 상징의 다원화가 이뤄지지 않는 한 사유와 실천은 관성화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이미 여러 공동체가 보여주는 ‘커리큘럼의 대동소이화’가 이를 말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또한 “들뢰즈와 라캉, 지젝과 네그리를 읽고 강의하는 것”이 “제도 연구공간의 병폐라 할 수 있는 현실과 유리된 추상주의와 수입학의 경향에서 얼마나 자유로운 것”이었는지를 되묻는다. “생활대중의 관점에서는 좀 더 살아있는 육성의 언어를 발견하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공동체가 취약한 물적 토대하에서 운영되면서 ‘지식의 자본화’에 반대해 온 그들이 오히려 ‘지식을 대중들에게 팔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현실도 한계다.
무엇보다도 심각한 것은 이러한 공동체의 실험을 제도권으로 순치시키려는 국가권력과 자본의 개입이다. 지방자치단체들은 앞다퉈 인문학 강좌를 개설하고 있고, 인문학을 ‘자기계발의 도구’로 사용하라는 목소리도 이곳저곳에서 들리고 있다. 이명원은 “어떻게 제도와 자본과 권력의 압력으로부터 벗어난 공동체를 유지해나갈 수 있을지에 대한 해법을 모색하는 것이 앞으로 10년의 고민거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황경상 기자)
교수신문(11. 04. 18) 대중화 여부 관계없이 학문체계 자체의 위기 반영
인하대 병원에 근무하는 김운용 씨는 지역 도서관을 자주 이용한다. 그러다 지난 2009년 10월에 인천 연수구 도서관에서 개최하는 ‘인문주간 행사’에 참여하면서 인문학에 푹 빠져들었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강의를 듣는 것은 쉽지 않은데 마침 저녁 7시부터 9시까지 강좌가 진행되더라고요. 표정훈, 강유원 선생의 강의를 듣고 인문고전에 매료됐죠. 인문고전은 전공자의 도움 없이 얼개나 개념, 서술 방법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아요. 이 강좌를 통해 왜 인문고전을 읽어야 하는지 자극을 확실히 받았죠.”
김 씨는 인문고전 공부를 통해 “삶을 바라보는 시각”이 바뀌었다고 했다. 서두르지 않고 느긋하게 세상을 살피게 됐고, 심리적 갈등을 스스로 조절할 수 있게 됐다. 김 씨도 인문고전을 접하기 전까지는 자기개발서를 챙겨 읽곤 했다. “자기개발서라는 것이 많이 읽으면 비슷비슷한 내용의 변주에 지나지 않아요. 자신이 실천할 수 있는 것을 선택해서 실천하는 것이 중요한데, 자기개발서가 실천을 대신해주지는 않거든요.” 반면 인문고전은 행복에 대한 자기 기준을 만드는 데 도움을 준다고 했다.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스스로 질문하게 하는 것, 이것이 인문고전의 힘이라고 그는 말한다.
김운용 씨가 2009년 이후 인문학에 기울인 정성은 각별했다. 첫 인문학 강의로 인연을 맺은 철학자 강유원의 인문고전 읽기 강좌를 1년 동안(총 40주 80시간) 수강했고, 국립중앙도서관의 은하문화학교에는 평일 휴가를 내고 참가할 정도로 열성을 보이기도 했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지난 3월에는 ‘인하대병원 북토피아 책향기’라는 인문고전 읽기 모임을 만들었다. 인문학 강좌 수강생에서 출발해 인문고전 읽기를 자발적으로 조직하는 인문학적 실천으로 나아간 것이다.
인문학, 위기인가? 대중화인가?
한국사회에 인문학 열풍이 불기 시작한 것은 2005년과 2006년 즈음부터이다. 2005년 성프란시스대학에서 ‘노숙인을 위한 인문학 강좌’가 개설됐다. 2006년 1월에는 미국의 교육자 얼 쇼리스의 방한 세미나가 있었고, 연말에는 그의 책『희망의 인문학』이 번역 출간되기도 했다. 이것이 기폭제가 돼 이른바 ‘실천 인문학’, ‘평화인문학’이 활성화됐다. 2007년 3월에는 인권실천시민연대 주최로 의정부 교도소에서 ‘수용자를 위한 인문학 강좌’가 개설됐다. 초기에 인문학과 대중의 만남은 노숙인·수용자·소외계층을 대상으로 인문학자들이 찾아가는 실천적 의미가 강했다.
일부 인문학자들의 실천이 잔잔한 감동을 불러오면서, 옛학진은 2006년 9월 ‘인문주간’을 지정해 대학과 지역사회의 인문학적 만남을 주선했다. 대학들은 적극적으로 나서 프로젝트 형식으로 지역사회와 연계해 인문학 강좌를 개최했다. 이것이 대중으로부터 좋은 반응을 일으키자, 구청을 중심으로 한 자치단체와 도서관이 나서서 인문학 강좌 프로그램을 개최하기 시작했다. 비제도권의 인문학적 실천운동이 학문제도 속에 있던 대학 인문학을 흔들어 깨운 형국이다.
그렇다면, 대중과 인문학이 만남으로써 인문학의 위기는 극복되고 있을까. 인문학 강좌와 인문고전 읽기가 확산되고 있지만, 대학사회에서도 인문학이 부흥했다고 할 수는 없다. 대학 교양강좌에서 인문학에 해당하는 강좌는 여전히 축소되고 있다. 실용주의를 우선시하는 현재의 신자유주의적 풍토 속에서 이른바 비인기 강좌인 인문학은 외면당하고 있다. 각 대학은 문학·역사·철학 강좌를 줄이고, 대신 교육수혜자의 구미에 맞춰 ‘골프와 비즈니스’, ‘취업역량 개발’과 같은 교양과목을 확대하고 있다.
독일 브레멘에서 역사학을 공부한 유진홍 씨는 “10여년 전 학부제 전환 논의가 이뤄지면서 인문학의 위기 담론이 제기됐다”면서 “한국 인문학의 위기는 근본적으로 한국적 학문축적 체제의 위기”라고 진단했다. 이러한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대학 밖의 인문학 열풍에 환호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유진홍 씨의 주장이다.
그렇다면, 한국 사회에서 인문학의 대중화는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 인하대 병원의 김운용 씨는 “교양있는 삶에 대한 욕망”을 그 원인으로 꼽았다. 인문학적 토론을 통해 삶의 의미를 다시 사유하게 됐다는 이향미 씨는 “세상이 흘러가는대로 살지 않고, 나만의 가치관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을 터득하게 됐다고 말했다. 현대사회에서 불안 요인은 증가하지만, 이것이 단지 경제적 안정만으로 해결할 수 없다. 그래서 삶을 성찰하고자 하는 현대인의 욕망도 강해졌다.
이러한 인문학적 교양에 대한 요구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지방 자치단체들이다. 각 구청에서는 인문학 강좌를 경쟁적으로 운용하고 있다. 강남구에는 2008년부터 ‘수요인문학강좌’를, 송파구는 2010년에 ‘대하소설로 배우는 인문학 강좌’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성북구의 ‘성북구민과 함께 하는 인문학 강좌’나 영등포구의 ‘동네 인문학’ 등도 대표적인 사례이다.
“인문학 열풍, 말랑말랑한 교양수준의 상품화”
문학평론가 이명원은 지금의 인문학 열풍은 “시장의 논리와 연동하면서 상품화 되고 있는 양상”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삶의 가치에 대해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함으로써 정치적 시민의 복권”을 이루는 것이 인문학의 과제 중 하나인데, “시장의 영역에서 인문학이 포섭됨으로써 오히려 말랑말랑한 교양수준”으로 전락하고 있다는 것이다. 민주노총의 박성식 부대변인도 최근의 인문학 열풍에 대해 “기업과 광고가 인문학적 흐름을 주도하고 있는 듯”하다면서, “상품 광고나 기업이 인간화된 모습으로 스스로를 이미지화하는 데 인문학적 방법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인문학은 성장과 효율을 중시하는 자본주의적 가치에 대응하는 가치를 창출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이와 관련 윤채영 중산고등학교 교사의 말이 눈길을 끈다. 그는 “제국주의 시대에 인문학이 성장했는데, 이는 지배엘리트들에게 역사와 문학을 가르침으로써 지배의 기술을 전수하는 것”이었다고 지적했다. 과거 인문학이 체제 내에서 작동하는 것이라면, 한국 사회의 인문학 대중화도 중산층의 삶의 논리화에 기여하는 측면이 있다는 분석이다.
살기 위한 인문학, 삶을 위한 인문학
최근 17만부나 팔려 인문고전 읽기 붐을 일으키고 있는 책이『리딩으로 리드하라』이다. 저자는 인문고전을 읽음으로써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다고 강조한다. 인문고전을 번역서가 아닌 원서로 읽고, 베껴쓰라고 권한다. 이러한 당황스러운 주장이 대중을 매혹시키고 있다. 마치 고갈되지 않는 성공의 에너지원으로‘인문고전’의 위치를 격상시킨 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저자가『꿈꾸는 다락방』이라는 자기계발서를 간행해 100만부 이상을 판매한 베스트셀러가라는 사실이다. 자기계발의 자리에 인문고전을 위치시킴으로써 그의‘성공신화’는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리딩으로리드하라』와『꿈꾸는 다락방』사이의 간극은 한국 인문학이 직면한 크레바스처럼 위태롭다.
그렇기에 윤지관 덕성여대 교수(영문학)의 이야기는 중요한 사실을 환기시킨다. 그는 “인문학 연구는 대학의 틀 안에서 이뤄질 수밖에 없는 특성”이 있다면서, “대학밖 인문학은 인문학의 대중적 향유이지 인문학 연구의 대중화로 수 없다”고 지적했다. 한국 인문학이 대학 바깥에서 대중적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은 긍정적이다. 그렇다고, 인문학의 대중화가 인문학 자체의 위기 극복의 대안일 수는 없다. 오히려 대중은 인문학적 인식에 목말라하면서 한국의 언어로 형성된 인문학을 한층 더 요청하고 있다.
인문학 대중화는 노숙인·저소득층·재소자·비정규직 노동자 등과 대화하려는 인문학자들의 실천적 노력과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통치의 기술로 작동하는 ‘순화된 인문학’이 충돌하는 담론 투쟁의 장이 되고 있다. 대학 내 인문학의 위기가 대학 바깥의 인문학 담론의 유행으로 힘을 얻고 있는 것은 긍정적이다. 반면 인문학을 상품화하는 일부 경향은 궁극적으로는 인문학의 가치를 왜곡시키는 것일 뿐이다.
인문학은 실용적으로 전환될 수 있는 고갈되지 않는 에너지원이 아니다. 이러한 태도로 접근하는 인문학은 궁극적으로 ‘인문학 해체’ 담론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근본주의적 성격을 지닌 인문학이 자본주의 체제의 재활성화의 도구로 전락한다면, 거기에는 ‘절망과 기만의 인문학’이 남게 될 것이다. 살기 위한 인문학이냐, 삶을 위한 인문학이냐 문제인 것이다. 따라서 지금 한국 인문학은 대중화 여부와 상관없이 여전히 위기이고, 이것은 한국 학문체계 자체의 위기에 기인한 것이기도 하다.
한국의 인문학자들은 스스로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야 한다. 한국 인문학은 뉴타운·행정수도·후쿠시마 원전·건강한 먹거리 등과 같은 현안에 대해 인문학적 언어로 이야기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한 대답은 한국 인문학이 자본의 스토리텔링 일부로 편입될 것인가, 체제 바깥을 상상할 수 있는가는 근본적 문제설정과 연결돼 있다.(오창은 지행네트워크 연구위원)
11. 07. 26.
P.S. 대학밖 인문학 붐과 연관된 흐름은 '자가학습'용 책들의 증가다.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에서 출간한 '앎과 삶' 시리즈도 그런 맥락에 놓이는 듯싶다. 우리 삶에 필요한 앎을 그때그때 충족해보자는. 1차분으로 <교육>, <20대>, <중국> 세 권이 출간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