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 공지한 극단 산울림의 고전극장과 연계하여 여섯 편의 공연 작품에 대한 소개 강의를 세 차례에 나누어서 마포중앙도서관에서 진행한다. 구체적인 날짜와 세부 일정은 아래 포스터를 참고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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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ngles 2019-06-11 0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정이 연극 본 후 강연으로 짜여져 있어서 작품을 연극으로 표현한 부분에 대한 감상도 기대됩니다. 더불어 샘과 극장에서 우연히 마주치는 행운도 있기를~^^

로쟈 2019-06-11 08:00   좋아요 0 | URL
네 사후강의가 될듯.
 

'산울림 고전극장'의 올해 프로그램은 러시아연극이다. 6월12일부터 9월 1일까지 러시아문학작품을 새롭게 각색한 여섯 편의 공연이 무대에 올려진다(이들 작품에 대해서는 세 차례에 걸쳐서 강의할 예정인데, 구체적인 일정은 추후에 공지하겠다). 관심 있는 분들은 참고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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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글 2019-06-06 1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선생님. 이번 여름에는 연극이랑 소설로 충만할 것 같습니다.^^

로쟈 2019-06-06 19:55   좋아요 0 | URL
네, 연극은 저도 보게 될 듯.~

붕붕툐툐 2019-06-06 2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눈이 번쩍 뜨이는 정보네요~ 연극 모든 작품 다 보고 싶어요~ 감사합니다^^

로쟈 2019-06-06 22:13   좋아요 0 | URL
^^

카스피 2019-06-08 0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죄와벌은 장편이라 다 읽지 못했지만 스페이드의 여왕은 단편이라 쉬이 읽은 기억이 나네요^^

로쟈 2019-06-08 23:17   좋아요 0 | URL
^^
 

토마스 하디보다 한 세대 앞서지만 자연주의적 세계관의 작가로 같이 묶일 수 있는 러시아 작가는 이반 투르게네프(1818-1883)다. 이번 봄에도 투르게네프의 <루진>과 <아버지와 아들>에 대한 강의가 있었는데, 그의 문학사적 의의는 여러 가지로 짚어볼 수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여섯 편의 ‘사회소설‘의 저자로서의 투르게네프다(그에 견줄 만한 것은 단편집 <사냥꾼의 수기>의 저자 투르게네프).

하디의 웨섹스 소설 여섯 편을 거명한 김에 투르게네프의 사회소설에 대해서도 다시 정리해놓는다. 세계문학전집판으로 다시 나오지 않아서 갖는 불만도 토로할 겸. 내가 염두에 두는 건 러시아의 첫 사실주의 소설로 간주되는 <루진>부터 마지막 장편 <처녀지>까지의 여정이다.

<루진>(1856)
<귀족의 보금자리>(1859)
<전날밤>(1860)
<아버지와 아들>(1862)
<연기>(1867)
<처녀지>(1877)

대략 20년간의 여정인데, 장편에 한하여 투르게네프 전작 읽기를 아직 시도하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 탄생 200주년을 맞아 새 번역본에 나오길 기대했지만 불발로 그쳤기 때문이다. 현재 공백인 작품은 <전날밤>과 <연기>, 그리고 <처녀지> 세 편이다.

러시아문학 강의시에는 투르게네프에 할애된 시간이 많지 않기에 통상 <아버지와 아들>이나 중편 <첫사랑>을 읽곤 한다. 톨스토이의 3대 장편소설이나 도스토옙스키의 5대 장편소설(<미성년>을 빠뜨리면 4대 장편소설) 읽기도 분량이 만만하지 않아서 쉽게 엄두를 내기 어럽지만 번역본이 걸림돌이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투르게네프의 경우에는 번역본이 문제가 된다.

이번 겨울에 한 강의에서 투르게네프 읽기를 기획하고 있는데 4주간 네 작품을 읽는 일정이고 그 가운데는 <루진>과 <귀족의 보금자리>(민음사판 <첫사랑>에 들어 있다),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이 포함돼 있다. 나머지 세 작품은 언제 다룰 수 있을지 미지수다(<연기>와 <처녀지>는 범우사판으로만 나와 있다). 개인적으로 <연기>는 과거에 대학강의에서 한 차례 읽었고 <처녀지>는 아직 한번도 강의한 적이 없다. 내게 <처녀지>는 말 그대로 ‘처녀지‘다.

투르게네프의 사회소설에 대해서는 국내 전공자의 책으로 이항재 교수의 <소설의 정치학>이 있다(어빙 하우의 책에서 제목을 빌려왔다). ‘투르게네프의 정치학‘을 음미해보기 위해서라도 <전날밤>과 <연기>, <처녀지>, 세 작품의 새 번역본이 나오면 좋겠다. 그렇게 되면 나도 투르게네프 강의를 완성하여 한권의 책으로 묶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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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오늘 지방강의를 마치고 귀경중이다. 요즘은 매달 두 차례 지방강의가 있다 보니 한달의 절반은 지방에서 주말을 나게 된다. 그나마 아무리 먼 거리라도 KTX로는 3시간 이내라서 가능한 일이긴 하다(물론 서울역이나 용산역에서 집까지는 다시 한 시간여 소요된다).

오늘 강의는 투르게네프의 <아버지와 아들>이었는데 두 시간은 너무 짧아서 투르게네프문학의 의의를 소개하는 정도에 그쳤다. 돌이켜보니 작품의 주제에 대해서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하고 자료로 대체했다(최소 한 시간은 더 필요했다). 하는 수없는 노릇이다. 다음달에는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다룰 예정인데 역시 시간이 턱없이 모자랄 것이다. 하지만 억지로라도 두 시간에 맞추는 것보다는 그렇게 맞추기가 어렵다는 걸 보여주는 게 이 작가들에 대한 예의 같기도 하다. 비록 불완전한 강의가 된다 하더라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강의를 마친 뒤에는 관련서들을 더 주문했다. 국내서로는 더 나온 것이 없으므로 영어로 된 책들인데 한권짜리로 나온 투르게네프 선집과 투르게네프와 플로베르의 서신교환선 등이다. 투르게네프 전기소설도 나온 게 있기에 같이 주문했다. 나로선 그 정도까지가 투르게네프에 대해서 보일 수 있는 관심의 최대치다. 레너드 샤피로의 평전 <투르게네프>의 원서도 장바구니에는 있었지만 책값이 부담스러워서 최종 주문목록에서는 뺐다.

가장 궁금한 건 플로베르와의 서신교환선이다(당연히 불어로 쓰였겠다). 이런 책이 번역돼 나올 가능성은 사실 희박해보이는데(장 그르니에와 카뮈의 서신교환선보다는 플로베르와 투르게네프, 그리고 독일문학에서라면 토마스 만과 헤세의 서신교환선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되지만 전자는 나와도 후자의 책들은 나오지 않는다), 목 마른 자가 우물을 판다고 궁금한 독자가 알아서 수단을 강구해야 한다. 한편으로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두고서도 두 작가가 의견을 교환한 일이 있어서 톨스토이 강의준비와도 무관하지는 않다.

작가들을 강의에서 다를 때마다 평전들을 구입하는데, 좋은 평전의 번역소개가 갈수록 줄어드는 느낌이다. 책세상판 ‘위대한 작가들‘ 시리즈만 하더라도 모두 절판된 상태다. 그러다 보니 조셉 프랭크의 도스토옙스키 평전 같은 대작(축약본이 1000쪽에 이른다)은 엄두도 못 내는 형편이다. 다른 작가들의 결정판 평전 상당수가 비슷한 상황에 놓여 있다. 뭔가 사정이 달라질 수 있을지 궁금하기도 하고 우려스럽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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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주간경향(1326호)에 실은 북리뷰를 옮겨놓는다. 강의 일정이 많다 보니 리뷰도 주로 강의에서 다룬 작품에서 고르게 되는데, 지난주에 쓴 원고에서는 최근에 다시 다룬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에 대해 적었다. 올해가 단행본 출간 150주년이라는 사실에서 의미를 찾았다. 참고로 톨스토이의 역사철학에 대해서는 한겨레의 칼럼에서도 한 차례 다룬 적이 있다...



주간경향(19. 05. 13) 인간의 자유와 역사적 필연은 별개이다


톨스토이의 대작 <전쟁과 평화> (1869)가 단행본으로 출간된 지 150주년이 되었다. 이후에 쓰인 <안나 카레니나> <부활>과 함께 그의 ‘3대 장편소설’로 불리지만, 톨스토이의 기준으로는 <안나 카레니나>만이 유일하게 예술장르로서 소설에 부합하고 나머지 두 작품은 소설을 초과한다.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 단행본에 붙인 후기에서 ‘이것은 장편소설도 아니고, 서사시도 아니고, 역사적 연대기는 더더욱 아니다’라고 분명하게 못박았다. 물론 당대가 기준이기는 하지만 <전쟁과 평화>를 읽고 이해하려면 필수적으로 참고해야 할 사항이다.

톨스토이가 말한 ‘장편소설’은 근대 유럽에서 발명된 산문 장르여서 ‘유럽의 형식’이라고도 지칭되는데, 동시대 작가로 이 장르의 대가는 투르게네프였다. 그런데 투르게네프는 <전쟁과 평화>를 격찬하면서도 작품에 포함된 상당 분량의 역사철학적 성찰이 너무 과도하며 소설의 미학적 성취를 해친다고 보았다. 프랑스 소설의 거장 플로베르도 투르게네프의 권유로 <전쟁과 평화>를 읽고서는 같은 견해를 내놓았다. 일례로 <전쟁과 평화>에는 2개의 에필로그가 붙어 있는데 작가의 역사철학을 장황하게 서술하고 있는 두 번째 에필로그 같은 것은 군더더기에 해당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하지만 톨스토이에게는 그 역사철학을 제시하는 것이 핵심 의도였기에 그러한 비판에 개의치 않았다. 그는 군더더기를 포함한 초소설(소설을 초과하는 소설)을 선택한다. 

톨스토이가 제시하는 역사철학이 과연 장황한 군더더기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1812년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을 중요한 사건으로 다루고 있는 <전쟁과 평화>에서 통상적으로는 톨스토이가 당대의 영웅사관에 맞서서 민중사관을 제시한다고 이해한다. 이 전쟁에서 프랑스군에 맞선 러시아의 승리를 나폴레옹에 맞선 러시아 민중의 승리로 그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톨스토이가 민중을 역사 발전의 주체로 보았다는 견해는 작품의 실상과 맞지 않는다. 역사의 전개는 나폴레옹과 같은 영웅의 의지와 무관하다는 것이 톨스토이의 생각이지만 그렇다고 민중계급이 영웅을 대신해 그 주체의 자리에 들어서는 것은 아니다. 

톨스토이 역사철학의 핵심은 역사가 주체와는 무관한 몰주체적 과정이라는 데 있다. 그것은 마치 개미나 벌과 같은 사회성 곤충들의 행태와 닮았다. 각 개체는 각자의 일에 충실할 따름이지만 결과적으로 전체의 목적에 부합하게 된다. 톨스토이는 이렇게 말한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은 국가의 대세에는 아무런 주의도 기울이지 않고 눈앞의 개인적인 관심에만 지배되고 있었다. 게다가 그런 사람이야말로 당시 가장 유익한 사람들이었다.” 

톨스토이는 역사에서 필연의 법칙을 믿었지만 그것이 개인의 자유나 의지와는 별개라고 보았다. 우리 개개인은 각자의 활동범위에서 자유를 누리지만 그것이 천체의 운동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개인으로서 인간의 자유와 역사적 필연은 별개이며 각기 다른 법칙에 따른다. 비교하자면 인간의 자유가 유기체적 현상인 데 비해 역사는 초유기체적 현상이다. 따라서 역사를 영웅사관처럼 개인적 차원으로 환원하여 설명하려는 시도는 오류를 범할 수밖에 없다. 톨스토이의 역사철학이 이러한 윤곽을 갖는다면 이미 극복된 견해로 치부할 수 없다. 역사에 대한 성찰을 새롭게 하는 데에도 <전쟁과 평화>는 여전히 유효한 작품이다.


19. 05.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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