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한겨레의 '로쟈의 번역서 읽기'를 옮겨놓는다.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에 대해 간단히 적었다. 네댓 종의 번역본을 갖고 있는데, 이성복 시인이 옮긴 문학과지성사판을 책장에서 찾지 못해 을유문화사판과 펭귄클래식판으로만 읽었다. 작가 지드의 말로는 <배덕자>가 배덕에 대한 비판을 담은 책이라면 <좁은 문>은 미덕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배덕자>도 읽을 만한 번역본으로 다시 나오면 좋겠다...

 

 

한겨레(14. 01. 27) 제롬과 알리사의 사랑을 막은 것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을 오랜만에 읽었다. 제롬과 알리사의 사랑 얘기다. 알다시피 그들의 사랑은 결실을 맺지 못한다. 사촌 관계가 장애물은 아니다. 무엇이 문제였던가. 지드의 자전적 이야기이기도 한 이 소설에서 발단은 제롬이 열네 살 때 벌어진다. 외사촌 누나 알리사는 열여섯 살 때다. 방학 때마다 외삼촌댁에 들르던 제롬이 하루는 외숙모가 자기 방에서 젊은 장교와 희롱하는 걸 엿보게 된다. 알리사의 방으로 가보니 그녀는 침대맡에 무릎을 꿇고 울고 있었다. 눈물에 젖은 알리사의 얼굴을 본 순간 제롬은 자기 운명이 결정됐다고 믿는다. 사랑과 연민에 도취되어 그는 인생의 목적이 알리사를 보호하는 것 외의 다른 것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제롬은 외숙모가 집을 나갔다는 소식을 듣는다. 외숙모는 아름다운 여성이었지만 미덕은 갖추지 못했다. 외삼촌 가족과 같이 간 교회에서 제롬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를 주제로 한 목사의 설교를 듣는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크고 넓은 길은 그에게 외숙모의 방을 떠올려주었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길은 알리사의 방문이 되었다. 그 ‘좁은 문’으로 들어가고자 제롬은 스스로를 축소하고 모든 에고이즘을 비워내기로 한다. 그 사랑으로 가는 길은 고행의 길이어야 했다. 이것이 제롬의 알리사에 대한 사랑의 형상이다. 암시적이게도 제롬은 예배가 끝나자마자 알리사를 찾아보려고도 않고 교회를 빠져나온다. “멀어짐으로써 그녀에게 더욱 합당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서다.

 

제롬은 알리사와의 결혼을 원하지만 아직 젊은 나이와 불확실한 미래를 핑계로 결혼은 미뤄진다. 게다가 제롬은 약혼 같은 형식이 불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약혼을 재촉하는 사촌동생 쥘리에트의 말에 “서약 같은 건 사랑에 대한 모욕”이라고 답할 정도다. 그런 서약은 사랑에 대한 의혹을 무마하기 위한 것으로 여겨진다. 제롬의 속내를 읽은 알리사가 먼저 약혼은 하지 말자고 제안한다. 게다가 만남도 자제하기로 한다. 그리하여 두 사람에게는 마치 결혼이 ‘좁은 문’처럼 된다. 결혼에 이르는 길은 좁고 험한 길이어야 한다!

 

제롬을 짝사랑한 쥘리에트가 잠시 장애가 되지만 쥘리에트가 다른 구혼자와 결혼하자 이제 제롬과 알리사 사이에는 아무런 장애물도 남지 않은 듯 보인다. 하지만 아무 장애물도 없는 상황이 오히려 두 사람의 사랑에 결정적인 장애물이 된다. 알리사에게 이르는 사랑은 좁은 문을 통과하는 사랑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알리사에게도 마찬가지다. 두 사람은 서로를 지극히 사랑한다고 생각하지만 아직 포옹도 해보지 못했다. 제롬이 더 적극적으로 구애했더라면 알리사의 태도도 달라질 수 있었을 테지만, 오랜 지체 끝에 결국 알리사는 ‘지상의 행복’ 대신에 ‘성스러움’을 택한다.

 

제롬과의 결혼 대신에 알리사가 선택한 것은 ‘사랑보다 더 훌륭한 것’이다. 하지만 병든 몸으로 집을 떠나 요양원에서 쓸쓸한 죽음을 맞은 알리사의 운명이 ‘더 훌륭한 것’에 부합할까. 알리사가 제롬에게 남긴 일기는 그녀가 어떤 고뇌에 시달렸는지 알게 해준다. 알리사는 덕성과 사랑이 하나로 합류될 수 있는 영혼의 행복을 꿈꾸지만 결국 덕성이란 ‘사랑에 대한 저항’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덕성의 함정’이면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란 주제를 반어적으로 읽어야 하는 이유다.

 

14. 0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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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민주(통권 10호)의 '삶과 문학' 코너에 실린 인터뷰를 일부 옮겨놓는다. 이 코너를 맡고 있는 문학평론가 정여울 씨가 제안을 해와서 연초에 동대 근처 카페에서 가졌던 인터뷰다. 전문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블로그(http://blog.kdemo.or.kr/1183)에서도 읽을 수 있다(인터뷰 중에 나오는 <생애 바깥에서>란 시집 제목은 <생의 바깥에서>의 오기다).   

 

 

 

민주(2013년 겨울호) 불가능한 것에 대한 요구, 그것이 민주주의의 희망이다

 

(...)

 

정여울: 올해 경향신문에서 뽑은 ‘뉴 파워라이터’ 20인에 선정되셨는데, 그 인터뷰에서 ‘나는 문학극대주의자다’라는 표현을 쓰셨더라구요. 어떤 의미인지 자세히 듣고 싶은데요.

 

이현우: ‘문학은 자고로 시와 소설, 희곡이지’ 이런 식으로 딱 정해진 장르와 분과 속에 갇혀 있는 사람들이 문학 극소주의자라면, 역사도 철학도 넓은 의미의 문학이라고 보는 것이 문학극대주의자이지요. 저는 모든 것이 문학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서평을 쓰는 것도 문학의 일부이지요. 문학을 공부하면서 문학작품 자체뿐만 아니라 문학적 지식에 대한 궁금증이 늘어갔어요. 우리는 문학에 대해 뭘 알 수 있는지, 어떤 작품, 어떤 작가에 대해서 안다고 할 때 뭘 알고 있는지를 밝혀야 할 것 같았어요. 문학이 무엇을 알려주는가에 대해서,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로쟈 버전으로 쓰고 싶은 생각이 있어요. 문학이 과연 우리에게 어떤 인식을 보여줄 수 있는지를 좀 더 깊이 있게 탐구하는 책을 써보고 싶어요. 문학극대주의자이기 때문에 문학이 전부로 보이고 모든 것이 다 문학으로 보여요. 문학은 제가 아는 것들 중에서는 가장 커다란 무엇이에요. 그런 의미에서 ‘이것만이 문학이다’라고 주장하는 문학주의자는 별로 좋아하지 않죠.

 

정여울: ‘내가 아는 것들 중에서는 문학이 가장 크다’라는 표현이 문득 뭉클합니다. 과학보다도, 철학보다도, 역사보다도, 그 무엇보다도 문학이 크다고 생각하시는 거군요. 러시아 문학이 바로 그런 문학극대주의자의 유토피아를 실현시켜주는 것이겠지요?(웃음)

 

 

 

이현우: 그렇죠. ‘문학과 정치’, ‘문학과 사회’, 이런 식으로 나눌 필요가 없어져요. 모든 것이 문학이니까요. 문학극대주의자의 망상이지요(웃음). 러시아 문학이 바로 그래요. 문학이 인류를 구원할 수 있다는 망상보다 더 큰 망상이 어디 있겠어요. 하지만 바로 그것이 제가 러시아 문학을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해요. 톨스토이는 합리주의자이면서 문학극대주의자는 아니지요. 제가 좋아하는 도스토예프스키는 바로 이 문학극대주의자의 과대망상증 계보를 잇지요. 그의 눈에는 모든 것이 문학이에요. 그리고 문학으로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고 믿는 과대망상증도 도스토예프스키다운 것이지요. 문학은 문학으로서만 책임을 져야한다고 생각하는 건 톨스토이와 투르게네프 쪽이구요. 그래서 톨스토이는 문학을 끝내 버릴 수 있었던 거예요. 톨스토이는 문학이 자기가 원한 것만큼 크지 않기 때문에 버릴 수 있었던 거고, 도스토예프스키는 모든 곳에서 문학을 보았기 때문에 문학으로 인류를 구원하려 했던 거죠.

 

정여울: 저도 사실 그 ‘과대망상증 계보’가 참 좋아요. 아직도 문학이 인류를 구원할 수 있다고 믿는 과대망상증에 계속 빠져 살아가지요(웃음).

 

이현우: 톨스토이는 영혼의 구원이라는 걸 소설에서 다룰 수는 없다고 생각했지요. 그건 문학의 임무가 아니라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자신이 쓴 위대한 작품들도 말년에는 다 ‘쓰레기’라고 부정할 수 있었던 거예요. 도스토예프스키는 문학이 뭔가 거창한 소명을 떠안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요. 위대한 예술은 톨스토이에게 의미가 없었지요. 톨스토이의 마지막 정거장은 문학이 아니라 사상이었던 것이죠. 그래서 도스토예프스키는 위대한 작가고 톨스토이는 거대한 작가라는 말이 있어요. 도스토예프스키는 문학이라는 것 자체를 위대하게 만드는 작가라면, 톨스토이에게 문학은 너무 ‘작은 것’이었고 그 이상의 뭔가 원대한 이상을 꿈꾼 사람이었던 거죠.

 

정여울: 이 위대한 작가와 거대한 작가가 한 나라에서 났다는 것이 정말 신기하고 내심 부럽기도 합니다. 하지만 도스토예프스키가 소중한 만큼 톨스토이도 대단한 것 같습니다. 결국 두 사람이 품은 이상은 ‘구원’이라는 거대한 판타지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요. 그 무기가 ‘문학’인지 문학이 아닌지는 조금 작은 문제라는 생각도 들어요. 문학이 인류를 구원하는 대단한 소명을 다 하지 못할 때 문학을 버리는 것은 가라타니 고진과도 비슷하네요.

 

이현우: 그렇죠. 가라타니 고진이 <근대문학의 종언>을 이야기하면서 톨스토이를 언급하기도 해요. 소설이라는 예술 형식이 인류의 삶에서 아주 중요한 질문들에 더 이상 대답할 수 없을 때 문학을 가차 없이 버릴 수 있었던 거죠. 더 이상 문학으로 세상을 치유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자기가 쓴 <전쟁과 평화>나 <안나 카레니나> 같은 작품을 헌신짝처럼 내팽개칠 수 있는 작가가 바로 톨스토이였던 거죠. 가라타니 고진은 문학이 그런 중요한 일을 ‘안 하고’ 있으니까 버린 거고, 톨스토이는 아예 문학은 그런 중요한 일은 ‘못한다’고 생각하니까 버린 거죠.

 

정여울: 박사논문에서는 푸쉬킨과 레르몬토프를 다루셨는데요. 푸쉬킨이 선생님의 문학관에 끼친 영향은 어떤 것인지요.

 

이현우: 푸쉬킨은 기본값이예요. 푸쉬킨은 ‘나는 도스토예프스키가 좋아’, ‘나는 투르게네프가 좋아’라는식으로 선택할 수 있는 취향의 문제가 아니지요. 푸쉬킨은 러시아 문학의 수원(水原)이고 러시아 문학의 전부예요. 러시아는 푸쉬킨 공동체지요. 그리고 그것이 바로 국민문학의 힘이에요. 푸쉬킨은 러시아 근대문학의 출발점이면서 러시아 국민문학의 아버지이지요. 국민문학이라는 것의 개념 자체가 흥미로워요. 물론 국민문학이라는 개념도 판타지이기는 하지만 사회적 분열이나 모순을 봉합시켜줄 수 있는 판타지라는 점에서 소중하지요.

 

정여울: 푸쉬킨은 기본값이다, 개인적 취향의 문제가 아니다, 러시아 문학은 푸쉬킨 공동체다, 이 모든 말들이 무척 의미심장하게 들리는데요. 공동체의 분열과 사회모순을 통합할 수 있는 것이 푸쉬킨 식의 국민문학이라면, 우리나라에는 어떤 작품들이 그런 국민문학의 수원(水原)에 속할 수 있을까요.

 

 

 

이현우: 옛날에는 국민문학의 계보로 이광수의 <무정> 같은 작품을 떠올렸는데, 지금은 아무래도 <춘향전>에서 이미 시작된 것이 아닐까 싶어요. <춘향전>에는 사회적 모순이 응축되어 있죠. 그 모순 때문에 사회가 폭발하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봉합하려는 흔적을 담고 있어요. 양반층의 요구와 천민층의 요구가 결합되어서 묘하게 화해되는 지점이 있습니다. 양반집 규수처럼 수절하겠다고 버티는 춘향이는 그리스 비극의 안티고네를 닮았죠. 자신의 비참한 상황에서도 양반과 대등하게 대우받기를 요구하는 것이지요. 변사또는 권력층에 기대는 악의 무리 중 한 명이고, 그렇기 때문에 좋은 양반, 선한 양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이몽룡을 차별화하기 위한 설정이 아닐까 싶어요. 양반도 천민의 편을 들어줄 수 있다는 것이지요. 양반도 천민도 둘 다 만족시키려는 것이에요. 자아가 초자아와 이드 사이를 중재하는 것처럼 국민문학은 하층계급과 상층 계급을 화해시키고 있어요. 푸쉬킨의 <대위의 딸>도 그렇지요. 민중의 편만 들어주지도 않고 귀족의 편만 들어주지도 않아요. 국민국가라는 판타지를 유지시켜주는 것은 바로 이 통합의 환상, 푸시킨적 판타지이지요. 그건 민주공화국이라는 환상이기도 하구요.

 

정여울: 아, 그럼 러시아 문학이 푸쉬킨 공동체라면 우리나라는 여전히 춘향전 공동체이 아닐까 싶어요(웃음). 푸시킨과 연결시키니까 춘향전이 훨씬 깊이 있는 텍스트로 다시 태어나는 것 같습니다. <춘향전>은 어쩌면 봉건사회 안에서 민주주의의 테마를 태동시킨 집단무의식을 보여주고 있다는생각도 들어요.
 
이현우: <춘향전>에 여러 가지 판본이 있지만 춘향이 ‘양반의 서녀’라는 입장과 ‘천기 출신’이라는 입장, 크게 두 가지를 주목해볼 필요가 있어요. 성참판의 서녀 성춘향보다는 월매의 딸 천기 출신의 춘향이 훨씬 더 래디컬한 버전이죠. 서녀 신분보다는 천기 신분이 훨씬 더 급진적이고 도발적이고, 더 도전적인 문제제기예요. 이건 거의 세계문학 수준이죠. 성춘향이라는 것은 뭔가 저항의 가능성을 거세시키고, 춘향을 좀 더 양반 쪽에 가깝게 순치시킨 버전이지요. 춘향의 고결한 태도나 수절의 의지를 그냥 핏줄로 해결해버리면, 절반은 양반의 피를 타고났다고 하면, 이것은 양반 쪽의 이해관계가 반영된 버전이니까요. 하지만 천기 버전의 <춘향전>은 세계문학사의 고전이 될 만해요. 아래로부터의 문학이거든요. 그것보다 더 분명하게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라는 것을 말한 텍스트는 고전문학에서는 거의 없어요. 한국문학에서는 가장 급진적인 텍스트죠.

 

정여울: 그럼 오늘 우리의 대화는 ‘우리의 민주주의는 춘향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정리해도 되겠네요(웃음).

 

이현우: 홍길동만 해도 율도국이라는 별도의 유토피아를 정해서 ‘이곳’이 아닌 ‘저곳’으로 도피해서 인정을 받는 것이지요. 춘향은 체제 내에서 인정을 받아요. 임금이 이몽룡과의 결혼을 허락하고 정경부인으로 봉했다는 것이니까 ‘저 세계’가 아닌 ‘이 세계’ 안에서 천민의 존재가 처음으로 인정받는 거예요. 춘향전의 판본이 이렇게 엄청나게 범람하는 것도 민중들이 보였을 어떤 열광의 흔적이라고 봐요.

 

(...)

 

14. 0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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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극단에서 발행하는 반연간지 <연극>(제6호)에 실은 서평을 옮겨놓는다(문장을 일부 바로잡았다). 한스-티즈 레만의 <포스트드라마 연극>을 서평감으로 삼았다. 연극의 새로운 경향과 연극이론의 현재에 대해 조감할 수 있도록 해주는 책이다.

 

 

 

연극(2013년 겨울) 한스-티즈 레만 <포스트드라마 연극>

 

독일의 연극학자 한스-티즈 레만의 <포스트드라마 연극>(현대미학사, 2013)이 번역돼 나왔다. 20세기 후반 현대 연극의 흐름을 ‘포스트드라마’란 개념으로 명명함으로써 새로운 인식틀을 제공했다고 평가받는 저서다. 원저는 1999년에 출간됐는데, 레만의 기본 개념과 관점을 담은 글 한편이 이 책을 우리말로 옮긴 연극평론가 김기란에 의해 이미 2002년에 <공연과 리뷰>를 통해서 처음 소개된 바 있다고 한다. 역자에 따르면 그때 소개된 글이 「이해되지 않는 난해한 예술을 이해하기 위하여」로 ‘포스트드라마 연극’의 미학적 전제를 꼼꼼하게 논증한 글이었다.

 

<포스트드라마 연극>의 초안과도 같은 성격의 이 글에 이어서 역자는 마침내 레만의 대표 저작을 마저 옮긴 셈이 되는데, 저자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영어본이 아닌 독일어 원본을 대본으로 삼았다. “간략하게 편집된 영어본에는 21세기 디지털 미디어 환경에 대응하는 동시대 연극의 내용이 대부분 생략되어 있기 때문이다.” 곧 영어본이 포스트드라마 연극의 이론적 개요를 중심으로 원저를 절반 가까이 축약한 데 반해서 한국어본은 원저의 내용을 그대로 담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일단 역자의 뚝심과 노고를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포스트드라마 연극 개념에 대해선 레만의 책이 번역되기 이전에 이미 국내에서 많은 논의가 이루어졌고 그중 일부는 <포스트드라마 연극의 미학>(푸른사상, 2011)으로 묶여서 출간되기까지 했다. 한국연극평론가협회 회원들이 2010년에 진행한 ‘포스트드라마 연극 세미나’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레만의 문제의식과 이론적 관점이 연극학자나 평론가들에 의해 적극적으로 수용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그럼에도 독일어로 쓰인 원저의 자세한 내용에 대해선 언어 장벽 때문에 소수의 전공자만 접근할 수 있었다. 순서를 바로 잡자면 사실 <포스트드라마 연극의 미학>을 읽기 위해서라도 <포스트드라마 연극>에 대한 독서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고, 번역본의 출간은 그런 기회를 갖게 해준다.


순서는 그렇더라도 <포스트드라마 연극의 미학>에 실린 서문은 레만의 ‘포스트드라마 연극’이란 개념과 그 한국적 수용 맥락에 대한 사전 이해를 제공해주기에 참고해볼 만하다. 책의 발간 과정과 내용을 소개하면서 저자들을 대표하여 김형기 교수는 레만의 ‘포스트드라마 연극’을 “약 50년 전부터 1990년대에 이르는 시기에 연극에서 발생한 변화의 특질을 강조하기 위해서” 사용한 개념으로 설명한다(레만 자신은 고찰 범위를 대략 70년대에서 90년대까지로 잡았다고 말한다). 이것은 당시 더 일반적으로 쓰이던 ‘포스트모던 연극’을 대체한 것이기도 하다. 아울러 “‘포스트드라마 연극’이란 용어는 단순히 시기적인 관점에서 ‘희곡 이후의 연극’을 가리키는 것을 넘어, 인식론적 관점에서 ‘탈희곡적 연극’을 포함한다”고 덧붙임으로써 ‘포스트드라마 연극’의 번역 용례도 제시한다. 즉 포스트드라마 연극은 ‘희곡 이후의 연극’이자 ‘탈희곡적 연극’을 말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희곡이 통상 문학의 한 장르를 가리키기에 ‘희곡 이후’라거나 ‘탈희곡적’이란 표현은 단순하게 ‘희곡 없는 연극’을 의미할 수 있다. ‘드라마 이후의 연극’ 혹은 ‘탈드라마적 연극’이라고 하는 것이 더 나을 듯싶다. 레만 스스로도 진단하듯이 현재의 상황은 연극 담론이 “문학 담론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켰지만, 문학 담론을 향해 더욱 가까이 다가서고 있는 형국”이기에 더욱 그렇다. 그가 문학과 연극이 동일한 길을 걷고 있다고 한 것은 “연극과 문학은 원래 모사적인 것이 아니며 오히려 기호적인 것으로 조직된다”는 판단에서다.

 

‘모사적’이란 말은 물론 예술의 미메시스적 성격을 가리킨다. 예술은 외부의 현실을 모방 혹은 재현한다는 것이 예술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 이후의 관점이다. 그런 모방적 성격으로 인해 연극과 문학의 언어는 지시적 기능을 갖는다. 그런데 이 지시적 기능만이 전부가 아니다. 레만이 연극과 문학이 ‘기호적인 것’으로 조직된다고 할 때 그것을 그 언어가 갖는 자기 지시적 기능을 가리킨다고 보아도 좋겠다. 언어학자 로만 야콥슨이 ‘시적 기능’이라고 부른 것 말이다. 비유컨대, 예술이 기호적인 것으로 조직될 때, 즉 자기 지시적인 것으로 채워질 때 예술은 다른 무엇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을 위해서 존재한다.


여기서 ‘드라마’와 ‘연극’을 각각 모사적인 것과 기호적인 것으로 이해하면 ‘포스트드라마 연극’이란 말의 의미가 좀더 구체화된다. ‘포스트드라마’는 그 자체로 드라마와 연극, 두 개념 사이의 자연스러운 연결을 문제 삼는다. 서양 연극의 전통적 특징이 ‘드라마 연극’이었다고 하면 포스트드라마 연극은 이를 상대화하는 것이다. 그렇게 ‘드라마적인 것’과 ‘연극적인 것’이 동일하지 않다면, 이 둘은 서로 결합할 수 있으면서 동시에 서로 분리될 수도 있는 것이 된다. ‘포스트드라마 연극’이 가져오는 개념적 충격은 바로 이러한 사태를 지시하는 데 있다. 김형기 교수의 정리에 따르면, “레만에게서 포스트드라마 연극이란 희곡의 우세에서 해방되고, 재현보다 현전, 전달되는 것보다 공유되는 경험, 결과보다 과정, 의미화보다 현실, 정보보다 에너지역학을 강조하는 연극이다.” 다르게 말하면, 포스트드라마는 연극 언어의 지시적 기능에서 해방되어 무대적인 것 자체에 더 주목하도록 하는 연극이다.


여기서 자연스레 한 가지 질문이 떠오른다. 포스트드라마 연극의 개시는 드라마 연극의 종말을 뜻하는가. 사실 <포스트드라마 연극>은 만만찮은 분량에다 연극에 관한 이론적, 철학적 성찰과 현대 연극, 곧 포스트드라마 연극의 주요 양상을 파노라마처럼 펼쳐놓고 있어서 전체를 조감하기 어려운 책이다. 다행스럽게도 길잡이로 삼을 만한 글이 있는데, <포스트드라마 연극의 미학>에 수록된 파트리스 파비스의 「포스트드라마 연극에 관한 고찰들」이 그것이다. 저명한 연극학자 파비스가 포스트드라마 연극론의 여러 쟁점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주고 있어서 <포스트드라마 연극>을 읽는 요긴한 참조점이 된다. 길잡이라고 했지만 그냥 무미한 안내만을 제공하지는 않는다. 정반대로 매우 신랄한 비판을 제기하고 있어서 오히려 더 요긴하다.


새로운 개념을 도입하고 있기에 아무래도 쟁점은 ‘포스트드라마 연극’이란 개념의 유효성일 수밖에 없는데, 파비스는 세 가지를 문제 삼는다. 첫째, ‘포스트’란 말이 시간적인 것인지 아니면 이론적인 것인지 불분명하다. 레만 자신도 책의 기획 의도가 “새로운 연극 영역의 경계를 설정하려는 것”이었다고 말하는데, 사실 그 경계의 성격이 어떤 것인지는 모호하다. 드라마 연극의 시대가 끝나고 포스트드라마 연극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하면, 그 경계는 언제가 될까. 만약 그런 것이 아니라면 포스트드라마는 애초부터 드라마 연극과 같이 존재했다는 뜻일까. 레만은 이 두 주장이 모순 없이 공존한다고 주장하지만 파비스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둘째, 레만은 ‘드라마적인 것’을 부정하면서도 이를 다시 취하고 있다. 그는 한편으론 새로운 연극텍스트가 ‘더 이상 드라마가 아닌’ 연극텍스트라고 주장하면서 다른 한편으론 단지 연극의 방점이 드라마라는 문학 장르에서 무대로 이동한 것처럼 말한다. 포스트드라마 연극에서 드라마의 지분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셋째, 만약 드라마가 연극에 필수적이지 않다는 게 레만의 문제의식이라면 ‘연극’이란 개념의 안정성도 의심해볼 수 있다. 파비스는 유럽 바깥의 문화적 실천들을 고려하면 그리스적 기원의 연극은 더 이상 독점적 개념이 될 수 없다고 암시한다.


이러한 이론적 시비들은 포스트드라마 연극의 개념이 기대만큼 정교화되지 않은 데서 기인하는 듯 보인다. 그럼에도 포스트드라마 연극이란 개념에 의의를 부여할 수 있다면, 그것이 “새로운 연극이 무엇인가를 설명하고 정의할 수 있는 범주와 말이 부족하다”는 인식과 그 곤경을 타개하기 위한 시도라는 데 있을 것이다. 즉 뭔가 새로운 연극이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게 먼저이고, 그에 대한 이론적 개입으로서 레만의 포스트드라마 연극이란 용어는 사후적으로 이를 지칭하고자 한 기술적 개념의 성격을 갖는다.

 


다시 파비스의 도움을 빌려 말하자면, 레만은 1970-1980년대에 독일, 네덜란드와 벨기에에서 보았던 공연들에서 새로운 변화를 인지한다. 로버트 윌슨, 얀 파브르, 아이너 슐레프, 얀 라우어스 등이 고안해낸 새로운 연극 형식은 그에 걸맞은 주목과 이론적 관심을 요구했다. 당시 이러한 새로운 경향은 ‘포스트모던 연극’이라는 말로 통칭됐지만, 레만의 내기는 이것이 포스트드라마 연극이란 개념으로 더 잘 포착될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사실 포스트담론을 주도했던 ‘포스트모던’이란 말은 너무 많은 것을 지시할 수 있어서, 거꾸로 그 인식적 내용은 의문스러운 개념이기도 하다. 그에 비하면 포스트드라마 연극은 드라마적 연극과의 구체적인 차이 속에서 윤곽이 그려지기에 훨씬 더 효용성이 큰 개념이다. 드라마적인 메시지 전달보다 무대에서의 퍼포먼스에 주안점을 두기에 드라마적 연극의 ‘배우’가 포스트드라마 연극에서는 ‘퍼포머’가 된다는 비교가 대표적이다. 드라마적 연극이 ‘극적 환영’을 유도하고자 한다면 포스트드라마 연극에서는 ‘활동적인 퍼포먼스’ 자체가 연극의 목적이 된다.      


드라마적 연극과 포스트드라마 연극 간의 차이를 이렇게 배치할 수 있다면 드라마적 연극에서 포스트드라마 연극으로의 이 이행을 과연 어떻게 바라볼 수 있을까. 파비스의 근심이기도 한데, 드라마적인 것, 곧 모방적이고 지시적인 기능을 포기할 때 부닥칠 수밖에 없는 궁극적인 난점은 연극과 현실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라는 문제다. 당연한 일이지만, 연극이 그 자체에, 무대에, 퍼포먼스에만 주목하도록 요구할 때, 연극과 사회적 현실은 분리된다. “포스트드라마는 더 이상 이론을 세우고자 애쓰지 않으려고 이러한 난점을 이용하며, 극적인 형식들이 더 이상 커버할 수 없게 된 현실에 관한 모든 관점들을 포착하기를 단념한다.”고 파비스는 지적한다.

 

 


현실을 배제함으로써 현실로부터 해방된다는 것은 연극의 독립을 위한 유력한 방책일 수 있다. 어쩌면 그로써 연극이 음악처럼 좀더 높은 순도의 예술로 거듭나게 될지 모른다. 하지만 그 대가로 사회적 현실에 대한 발언과 책임을 잃어버리게 된다면 포스트드라마가 과연 연극의 진보인지 아니면 퇴행인지 쉽게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를 구성하는 것은 ‘드라마적인 것’과 ‘연극적인 것’이라는 두 항의 관계가 아니라 ‘정치적인 것’까지 포함된 삼항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레만의 <포스트드라마 연극> 이후에 포스트드라마 연극과 정치를 주제로 한 책들이 나오고 있는 것은 그래서 자연스럽다. 그렇다면 <포스트드라마 연극>은 문제를 정리하고 있다기보다는 문제를 새롭게 제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연극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사고하도록 요구한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더 높이 살 수 있을 것이다.      

 

14. 01. 04.

 

 

P.S. 포스팅보단 늦었지만 <연극>이 알라딘에도 올라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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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시사IN(329호)에 실은 북리뷰를 옮겨놓는다. 스티븐 제이 굴드의 <플라밍고의 미소>(현암사, 2013)가 출간된 걸 계기로 그의 자연학 에세이가 갖는 의의를 짚어봤다. 지면 기사에서는 자연학 에세이 가운데 여섯 번째로 출간된 책이라고 적었지만, <힘내라 브론토사우루스>가 근간 예정인 걸 깜박했다. 정정하자면 다섯번째 책이다. 절판된 <판다의 엄지>도 조만간 나오길 기대한다.  

 

 

 

시사IN(14. 01. 04) 과학 글쓰기의 계관시인이 오다

 

진화생물학에 조금만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스티븐 제이 굴드란 이름이 낯설지 않을 것이다. 비록 국내에서 리처드 도킨스만큼은 독자층을 거느리고 있지 않을지라도 필력으로 따지면 결코 도킨스에 뒤지지 않는, 심지어 ‘과학 글쓰기의 계관시인’이란 평판까지 얻은 이가 하버드대학의 지질학 및 동물학 교수로 재직했던 굴드다.


‘스티븐 제이 굴드 자연학 에세이’ 선집의 하나로 출간된 <플라밍고의 미소>(현암사)는 지난해에 나온 <여덟 마리 새끼 돼지>와 마찬가지로 <내추럴 히스토리>에 연재한 에세이 모음집이다. 미국 자연사 박물관이 펴내는 이 월간지에 굴드는 무려 27년간 글을 연재했고 과학 에세이의 전범을 보여준 에세이 300여 편은 책 열 권으로 묶여서 차례로 출간됐다. <플라밍고의 미소>까지 포함하면 국내에는 이제 다섯 권이 번역됐다.  

 

 


개인적으로 제일 먼저 읽은 굴드의 책은 <다윈 이후>였는데, 바로 굴드의 자연학 에세이 가운데 첫째 권이었다.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 <눈먼 시계공>과 함께 다윈주의와 진화생물학에 눈을 뜨게 해준 책이다. 그 이후에는 자연스레 ‘굴드의 모든 책’이 수집과 독서의 대상이다. 둘째 권 <판다의 엄지>와 넷째 권 <플라밍고의 미소> 사이에 낀 셋째 권 <닭의 이빨과 말의 발가락>도 마저 번역되면 좋겠다는 바람을 갖는 건 그 때문이다.

 

각각의 선집은 책을 묶은 시점과 관련해 통일된 주제가 관통한다. <플라밍고의 미소>의 경우에는 생명사의 패턴이 갖는 의미와 서구 사상에 만연한 편향에 대한 비판이다. 이를 포괄해서 굴드는 ‘역사의 본성’이 책의 주제라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플라밍고의 미소>는 “생명은 우연적인 과거의 산물이지 시간을 초월하는 단순한 자연법칙의 불가피하고 예측 가능한 결과가 아니라 말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에 관한 책”이다.


굴드가 ‘서구의 편향’이라고 특별히 지목하는 건 '진보, 결정론, 점진주의, 적응주의'다. 이들 ‘4대 기수’에 대한 그의 비판은 때로 동료 진화생물학자들을 겨냥하기도 한다. 굴드는 전통적인 다윈주의 이론과는 다르게 진화가 점진적으로 일어나는 게 아니라 단속적으로 갑작스럽게 일어난다는 ‘단속평형설’을 주창해 학계에 큰 파문을 일으킨 바 있다. 그가 평생 강조한 것은 진화가 진보를 뜻하는 건 아니며 진화의 역사는 우연에 지배된다는 사실이다. 사회진화론자가 아닌 이상 진화를 진보와 동일시하는 진화생물학자는 드물기에 굴드의 비판은 과도한 면이 없지 않다. 하지만 그런 흠이 그의 에세이들이 주는 지적 즐거움을 만끽하는 데 지장을 주지는 않는다.  

 


굴드는 과학은 매혹적인 결론들의 목록이 아니라 결실이 많은 탐구의 한 방법으로 정의한다. 공룡의 멸종 문제를 예로 들어보자. 세 가지 가설이 있다고 한다. 첫째는 고환설이다. 백악기 말에 지구의 기온이 상승하면서 공룡의 고환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게 돼 수컷이 생식력을 잃음으로써 공룡이 멸종했다는 설이다. 둘째는 약물설이다. 공룡시대 말기 속씨식물이 진화했고 이들 다수가 향정신성 물질을 포함하고 있었지만 공룡의 간이 이를 해독시키지 못해 결국 약물 과다 복용으로 멸종했다는 설이다. 셋째는 많이 알려진 견해로 재난설이다. 약 6500만 년 전에 소행성이 지구와 충돌하면서 생긴 먼지구름이 햇빛을 차단하는 바람에 공룡을 비롯한 수많은 생물이 멸종했다는 설이다. 모두 흥미를 끌기는 하지만 고환설과 약물설은 검증을 할 수 없는 반면에 재난설은 검증될 수 있고 반증도 가능하다. 유효한 과학적 가설로서의 자격요건이다. 그렇게 과학적 탐구의 과정을 배울 수 있다는 점에서도, 굴드의 자연학 에세이는 과학을 좋아하는 독자들의 훌륭한 수련장이다.

 

13. 01.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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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한겨레의 '로쟈의 번역서 읽기'를 옮겨놓는다. 아감벤의 <예외상태>(새물결, 2009)를 다시 들추고, 특히 '통치 패러다임으로서의 예외상태' 장의 내용을 간추렸다. <예외상태>에서 아감벤은 주로 독일 법학자 칼 슈미트와 대결하는데, 슈미트의 <독재>(1921)와 <정치신학>(1922)이 주된 검토 대상이다. <정치신학>(그린비, 2010)은 번역돼 있지만 <독재>(법원사, 1996)는 절판된 지 오래됐다. 그렇게 없어도 되는 책은 아니라는 걸 요즘 시국은 말해준다. 다시 출간되면 좋겠다. 절판된 <대지의 노모스>(민음사, 1995)도 마찬가지이고, <헌법이론> 같은 책도 번역되길 기대한다. 예외상태(입헌 독재)의 이론적 명분이 어떤 것인지는 알아야 하지 않을까.

 

 

 

한겨레(13. 12. 30) 민주주의 위해 민주주의 희생하자는 논리

 

법과 법의 공백에 대해 한번 더 생각하게 하는 영화 <변호인>을 본 때문인지 책장에 꽂혀 있던 조르조 아감벤의 <예외상태>에 손길이 갔다. 이 이탈리아 철학자의 이름을 전세계에 알린 ‘호모 사케르’ 연작 가운데 하나다. 예외상태란 무엇인가. 법의 효력이 정지되는 법의 공백 상태를 가리킨다. 당장 갖게 되는 의문점. 예외상태는 법 안에 있는가, 법 바깥에 있는가. 법의 공백을 법으로 규정할 수 있는가.

 

아감벤의 문제의식도 멀리 가지 않는다. 예외상태라는 개념 자체를 정의하기가 어렵다는 것. 예외상태는 공법과 정치적 사실 사이의 불균형점이며 법률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이 교차하는 모호한 경계선에 자리한다. “예외상태는 법률 차원에서는 이해될 수 없는 법률적 조처라는 역설적 상황”에 놓인다.

 

예외상태란 개념의 기원은 흔히 ‘긴급 사태는 법률을 갖지 않는다’는 라틴어 격언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격언은 “긴급 사태에서는 어떤 법률도 인정될 수 없다”와 “긴급 사태는 그에 고유한 법률을 만들어낸다”는 두가지 상반된 의미로 해석된다. 하지만 중세를 배경으로 한 이 격언에서 법률이란 말은 무엇보다도 교회법을 가리켰다. “적절하지 않은 곳에서 미사를 올릴 바에는 아예 미사곡을 부르거나 듣지 않는 편이 좋다”는 식의 규정 같은 것이다. 규정은 그렇지만 최고도로 긴급한 사태일 경우에는 규정의 위반도 정당화된다는 게 중세의 긴급 사태론이다. 예외상태론에서 주장하듯이 공동선을 위해서라면 법의 효력 정지도 필요하다는 생각은 중세와 무관하다. 그것은 근대적 발상이다.

 

헌법의 효력을 일시적으로 정지시키는 ‘계엄 상태’는 프랑스 혁명기에 처음 제도화된다. 곧 예외상태는 절대주의 전통이 아니라 민주주의 혁명 전통의 창조물이다.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은 대다수 교전국에 예외상태가 등장하게끔 만들었다. 프랑스에선 전쟁이 끝날 때까지 유지된 계엄 상태에서 행정부가 실질적인 입법기관이 됐다. 전후 독일에서는 제국의 대통령에게 광범위한 예외적 권한을 부여했다. “(대통령은) 군대의 힘을 빌려서라도 공공의 안전과 질서 회복에 필요한 조처를 취할 수 있다”고 헌법에 명시함으로써 ‘대통령 독재’로의 길을 열었다. ‘민주주의 수호’란 명분이 실상 민주주의와는 무관하며 입헌 독재는 전체주의 체제로 가는 한 국면에 불과하다는 걸 나치 독일의 사례는 극명하게 보여준다. 물론 유신체제를 경험한 우리에게도 예외상태는 낯설지 않다.

 

오늘날 군사적 비상사태나 경제적 비상사태는 예외상태의 흔한 명분이 되고 예외상태는 상례가 되고 있다. 통상적인 통치술로 전환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의회가 아닌 행정부가 주도하는 국가에서라면 권력분립이라는 민주주의 원칙은 의미를 잃는다. 아감벤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이러한 헌정 질서의 변환이 서구 민주주의 국가 전체에서 진행중이라고 경고한다. 문제는 법학자나 정치가들에게 너무도 익숙한 이런 상황이 시민들에게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민주주의를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도 크다고 할 수 없다. 사정이 이러할진대, 민주주의 자체의 일시적 희생 따위야 정말 사소한 것”이라며 예외상태, 곧 입헌독재를 옹호하는 한 헌법학자의 말이 섬뜩하게 들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미 민주주의와 함께 있지 않다.

 

13. 12. 29.

 

 

 

P.S. 마지막 문단의 인용은 미국의 헌법학자 로시터의 말로 <입헌 독재>(1948)에서 아감벤이 인용한 것이다. 로시터는 거물급 학자로 보이는데, <페더랄리스트 페이퍼> 보급판의 편자이기도 하다.

 

 

원래 법학도였던 아감벤 덕분에 헌법에 대한 관심이 다시 살아나 몇 권 더 구입했다. 아직 헌법학이나 헌법이론서에까지는 손길이 가고 있지 않지만, 법제사 관련서와 칼 슈미트, 로널드 드워킨의 책들을 새로 장바구니에 넣어두었다. 법학도가 아닌 일반 시민도 헌법을 공부해야 하는 게 법비(法匪)들이 판을 치는 세상이다('법비'란 말의 뜻에 대해서는 한홍구 교수의 칼럼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617380.html 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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