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 15주년 행사로 활동 기록이 올라와 있길래 들어가봤다(http://aladin.kr/e/l140701_15th_records). 어떤 방식으로 산출해낸 통계인지는 모르겠지만, 알라딘에서 (4991일 동안) 7336권의 책을 만난 걸로 돼 있다. 회원으로서는 48번째로 많은 페이지의 책을 만난 거라고 한다(분발하라는 뜻인가?). 아무튼 애용하는 서점이 15년 동안 잘 버텨주어 다행이다. 앞으로 15년도 꾸준하길 바라면서 응원의 메시지를 보낸다.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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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달 뉴스레터 '독서인'의 '독서카페'에 실은 글을 옮겨놓는다. 지그문트 바우만 인터뷰, <희망, 살아있는 자의 의무>(궁리, 2014)를 거리로 삼아 쓴 것이다. 컨디션이 좋지 않아 오전에 겨우 써보낸 원고다.

 

 

 

독서인(14년 7월) 지그문트 바우만에게서 배우는 희망

 

현재 영국 리즈대학의 명예교수로 재직중인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고령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활발한 저술활동을 하고 있는 ‘리즈의 현인’이다. 결코 전부라고는 할 수 없지만 국내에 소개된 책만도 20여 권에 이르고 주요 저작은 대부분 망라돼 있다. 독서 여건으로 보아도 우리시대 대표적 사회학자로 꼽을 만한 근거가 있는 셈이다. 그러한 사정이 인디고연구소에서 기획한 인터뷰 <희망, 살아있는 자의 의무>(궁리)가 나오게 된 배경이기도 할 것이다. 슬라보예 지젝과의 인터뷰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에 뒤이어 나온 ‘공동선 총서’의 둘째 권이다.


지젝의 인터뷰도 그렇지만 바우만의 인터뷰도 인디고연구소의 청년 일꾼들이 직접 질문지를 만들고 현지에 찾아가서 얻어낸 대답을 책으로 엮은 것이라 바우만의 핵심 사상과 현재적 고민을 생생한 육성을 통해 접하도록 해준다. 적절한 눈높이의 질문과 깊이 있는 답변이 어우러져 ‘바우만에게로 가는 길’에 가장 유력한 가이드 역할도 겸하고 있다.


사실 바우만에게로 가는 길이란 다시, 우리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길이기도 하다. 바우만의 사색과 성찰이 말해주는 것은 우리 시대의 초상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현재 어떤 시대, 어떤 사회에 살고 있는가에 대한 진단과 해명 말이다. 그 자신이 미소를 지으며 말하듯이 무려 65년 동안 현역 사회학자로 활동하고 있는 바우만은 사회학자의 소명이 “보통의 사람들에게 그들이 사는 세계는 어떻게 구성되었으며, 또 사회는 그 배후의 메커니즘과 어떤 연결 속에서 형성되었고 또 순환하고 있는지를 명확히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말하자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세계의 전체적인 그림을 제공하는 일인데, 이것은 일상생활을 꾸려나가기에도 바쁜 보통 사람들로선 인식하거나 간파하기 어려운 것이다. 전체적인 조망을 갖기에는 다들 너무나 제한적인 시야와 사고 범위 안에 갇혀 있고 일상에 매몰돼 있는 게 현실이다. 학자로서의 특권은 그러한 일상에서 한 발작 물러나 생각하고, 읽고, 관찰하고, 추론할 수 있는 여유를 갖는다는 점이다. ‘더 넓은 지평의 관점’을 제시할 수 있는 바우만의 미덕은 그러한 여유에서 비롯된다. 물론 이 여유는 학자의 소명을 위한 여유이다.


사회학자의 소명이 제공해주는 사회에 대한 총체적 인식은 어떤 쓸모가 있는가. 바우만은 “아마도 사람들의 삶을 조금 더 좋게 만드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회학적 인식 자체에서 쓸모를 찾지 않고, 더 나은 삶, 더 좋은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한다는 점에서 바우만을 실천적 사회학자로 분류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의 실천은 ‘아마도’라는 단서와 함께한다. “최종적으로 이러한 실천의 문제는 각자에게 달려 있기 때문”이다. ‘각자’란 우리들 각자를 말하는 것이니 바우만을 경유해서 다시 우리에게로 되돌아온 셈이다. 우리에겐 어떤 선택이 있는가.


바우만은 두 가지 태도가 가능하다고 말한다. 하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대로 ‘좋은 삶이란 좋은 사회에서 사는 삶’이라고 여기는 태도다. 이에 따르면 좋은 삶은 나쁜 사회에서 가능하지 않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뿐 아니라 공자의 생각이기도 했다. “나라에 도가 있을 때에는 가난하고 천한 것이 부끄러운 일이며, 나라에 도가 없을 때에는 부유하고 귀한 것이 부끄러운 일이다”라는 <논어>의 구절을 떠올려 볼 수 있다. 공자가 말하는 ‘나라’를 ‘사회’로 바꿔놓는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말과 같은 취지를 갖는 걸로 이해할 수 있다. 좋은 삶은 좋은 사회에서 가능하다는 것이고, 따라서 각자가 좋은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속한 사회의 행복과 공동선을 도모해야 한다. 곧 나라에 도가 있도록 애써야 한다.


그럼 또 다른 태도는 무엇인가. 그것은 사회의 행복이나 공동선이 나의 행복과는 무관하다는 태도다. 즉 “내가 감히 손댈 수 없는 사회는 제쳐두고, 절대적인 개인의 영역만 더 좋게 만들려는 태도”를 가리킨다. 사회를 위해서는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으니 자기 자신과 가족에게만 편하고 안락한 삶이 가능하도록 애쓰는 게 전부라고 믿는다. 더 극단적으로는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수상처럼 “사회 같은 건 없다”고 선언할 수도 있겠다. 개인들의 총합이 있을 뿐 사회라는 별개의 실체는 없다는 주장이니, 그 경우에는 따로 사회를 위해서 뭔가를 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물론 사회학자로서 바우만은 동의하지 않지만, 사회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다면 사회학이나 사회학자도 존재 근거가 없어질 것이다. 혹은 형이상학의 일종이 되고 말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사회의 존재 유무에 관해 대처주의자가 아니라면, 그래서 사회라는 게 존재하며 각자의 좋은 삶은 좋은 사회와 무관할 수 없다는 데 동의한다면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는 선택의 여지도 없다.  


어떤 사회가 좋은 사회인가. 공동선이 실현된 사회라고 말해보자. 그런 좋은 사회를 상상하는 건 충분히 기분 좋은 일이다. 그렇지만 바우만은 그런 상상보다 더 중요하면서도 힘든 일은 누가 그것을 현실에서 실현할 수 있을지를 상상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좋은 사회를 만들어야 할 주체는 누구인가? 이에 대한 대답이 궁색하다면, 그것은 결정적으로 권력과 정치의 분리 때문이라고 바우만은 말한다. 그의 예리한 통찰에 따르면, 권력이란 ‘무엇인가를 행하는 능력’이고, 정치란 ‘무엇을 행해야 하는지 결정하는 능력’이다. 흔히 이 둘은 결합돼 있었지만 세계화 시대로 접어들면서 따로 분리되었다. 권력은 초국가적이고 전 지구적인 공간으로 확산된 반면에 정치는 지역적 경계 안에 머물게 되면서부터다.

 


이것은 국민국가에 한정된 정치가 갖는 한계를 지적하는 것이기도 하다. 분명 국민이 ‘주권자’이고 국민국가의 기관들이 그 대행자이긴 하지만, 시장 자본주의의 힘은 이미 주권적 역량과 범위 너머에 군림하고 있다. 좋은 사회를 만들려는 시도는 이러한 힘에 맞서야 하지만 현재로선 미약하다. 굳이 바우만의 진단이 아니더라도, 부자들은 단지 부자이기 때문에 점점 더 부유해지고, 빈자들은 가난하기 때문에 점점 더 가난해지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사회적 불평등과 고통은 문제적인 것이 아니라 점점 더 견딜 만한 것으로 간주된다. 도가 없는 세계에 살고 있다고 할까.


문제는 단순하지 않다. 해법은 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좋은 삶에 대한 열망이 우리에게 희미하게라도 남아 있다면, 그것을 희망이라고 내세울 수밖에 없다. 그 희망이 바우만의 비유대로 병속에 넣어 ‘바다에 띄운 편지’라 하더라도 우리가 수신한 그의 메시지를 다시 더 많은 병속에 넣어 띄워보낸다면 불가능해 보이는 변화가 어느 순간 가능해질지도 모른다. 바우만을 읽으며 다시 정비하게 된 희망이다.

 

14. 07. 10.

 

 

P.S. 참고로 인터뷰의 이탈리아어본이 작년에 먼저 나왔다. 영어본도 근간인 걸로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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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달 책&(429호)에 실은 '인문학 크로스'를 옮겨놓는다. 진화론과 창조론을 주제로 삼아 몇 권의 책을 읽은 독후감이다. 분량상 충분히 다루지 못한 대목은 나중에 따로 기회를 마련해볼 생각이다.

 

 

책&(14년 7월호) 진화론과 창조론 끊이지 않는 논쟁

 

이번 주제의 길라잡이가 된 책은 신학자 신재식 교수의 <예수와 다윈의 동행>(사이언스북스)이다. 제목에서부터 암시되지만 그리스도교와 진화론의 공존을 모색하는 게 저자의 의도이다. 이미 종교학자 김윤성 교수, 과학자 장대익 교수와 공저한 <종교전쟁>(사이언스북스)에 참여하여 종교와 과학의 공존가능성을 모색한 바 있는 저자가 자신의 생각을 좀더 본격적으로 전개한 책이다. ‘종교’와 ‘과학’이라고 뭉뚱그렸지만 구체적으론 기독교(예수)와 진화론(다윈)이다.


보통은 서로 무시하거나 기피하는 게 한국사회에서 기독교와 진화론이 보여주는 관계의 양상인데, 때로는 정면으로 충돌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2012년의 고등학교 과학교과서 논란이 대표적이다. 한 근본주의 개신교 성향의 단체에서 시조새에 관한 기술과 말의 진화에 관한 기술 일부를 삭제해달라고 교육과학기술부에 청원했고 이를 몇 곳의 교과서 출판사가 수용하자 과학계가 반발하면서 논란이 불거졌다. 과학학술지 <네이처>에서까지 “한국, 창조론의 요구에 항복”이란 기사를 실으면서 국제적인 이슈가 되기도 했다. 그런데 이런 떠들썩한 진행과정과는 달리 한국 개신교 교계는 이 사안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했다. 저자에 따르면 “한국 교회에서 진화론은 여전히 거론조차 해서도 안 될 ‘금기’이며 기피 대상”이어서다. 그는 이런 금기를 넘어서는 첫 걸음을 떼고자 한다.    


일단 저자는 다윈의 진화론이 가져온 혁명을 소개하고 그것이 갖는 함축을 해명한다. 다윈의 진화론이란 무엇인가. 자연선택을 핵심개념으로 하는 그 메커니즘은 네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 자연계에서는 기하급수적인 증가의 원리에 따라서 생존 가능한 개체의 수보다 더 많은 개체가 항상 탄생한다. 둘째, 대부분의 자연적인 개체군에는 변이가 존재하며 변이 중 어떤 것은 유전된다. 셋째, 개체들 사이에서 생존 투쟁이 벌어지고 각 생물들은 서로서로 경쟁하게 된다. 넷째, 이러한 생존투쟁을 통해 조금이라도 이로운 특성은 계속 누적되어 새로운 종이 생겨나도록 작용한다. 그리고 여기에 전제가 되는 명제는 지구가 수십 억 년의 오랜 역사를 갖고 있으며 생물은 그러한 조건에서 발생해 간단한 형태에서 복잡한 형태로 진화해왔고 인간 역시 다른 동물과 마찬가지로 진화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진화론이 함축하는 자연주의적 세계관이라고 한다면, 당장 이 세계를 창조주가 계획하고 설계했으며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는 기독교의 세계관과 충돌한다. 흔히 창조-진화 논쟁으로 불리는 이 충돌을 가리키는 이름이 ‘종교전쟁’이다.


‘전쟁’이라고 해서 창조론과 진화론이 대등하게 맞서는 것은 아니다. 다윈이 <종의 기원>을 발표한 이래 150년이 지나는 동안 발견된 진화의 증거들이 압도적이기에 비록 진화론도 진화해왔다고는 하지만 진화 자체는 자명한 사실로 간주된다. 마치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돈다는 사실과 마찬가지의 사실성이다. 신학(theologia)을 신(theos)에 대한 합리적 학문(logos)으로 규정하는 저자는 기독교가 합리주의 정신을 배제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종교와 과학이 전쟁 상태에 놓여있다는 이미지는 만들어진 것이며 신학적 합리주의와 과학적 합리주의는 상통할 수 있다고 본다. 과학사가 로버트 머튼을 인용하면, 오히려 “청교도 윤리를 잉태한 합리주의와 경험주의의 결합은 근대 과학 정신의 본질을 형성한다.” 종교와 과학의 관계가 반드시 전쟁으로만 치달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저자는 종교전쟁이 진화론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무관심과 몰이해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다윈의 진화론을 비난하는 기독교인들 가운데 <종의 기원>을 읽었거나 생물학 입문서라도 제대로 읽은 사람이 드물다는 지적이다. 그와 함께 주목할 만한 것은 다윈주의에 대한 거부와 반진화론 운동이 미국의 개신교 교단을 중심으로 전개됐다는 점이다. 반진화론이야말로 참된 신앙을 지키는 것이며 미국의 정신을 살리는 길이라고 그들은 믿는데, 이것은 미국적 특징인 동시에 특히 미국 남부 지역의 특징이다. 창조-진화 논쟁은 철저하게 미국 기독교 역사의 경험과 관련된 논쟁이며, 따라서 보편적인 문제라기보다는 상당히 국지적인 문제이다. 다윈의 진화론에 대해서 유독 강한 거부감을 보인 나라가 미국이기 때문인데, 그것은 주로 미국인의 종교적 성향 때문이다.

 

<과학전쟁>에서 장대익 교수가 소개한 2004년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미국인 중 62퍼센트가 공립학교에서 진화론과 함께 창조론도 가르쳐야 한다고 응답했고, 55퍼센트의 미국인은 신이 인간을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창조했다고 굳건히 믿는다. 이러한 신앙적 보수주의를 토대로 나온 것이 창조과학운동과 지적 설계론이다. 창조과학운동은 성서의 창조설을 과학적으로 입증하려는 운동이고, 지적 설계론은 진화론의 빈틈을 창조주의 ‘지적 설계’에 대한 반증으로 삼으려는 입장이다. 하지만 이 두 가지 운동과 입장이 모두 과학으로서 자격미달이며 고작해야 사이비과학에 불과하다는 게 장 교수의 평가다.

 

한국에서도 창조-진화 논쟁이 부각된 것은 한국 기독교계가 미국 보수주의 기독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인데, 1970년대 들어서 미국에서 창조과학운동이 일어나자 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이공계 교수들을 중심으로 한국에서도 1981년 한국창조과학회가 설립된다. 그리고 창조론 진영은 1990년대에는 미국의 지적 설계론을 국내에 소개하는 데 주력해왔다. 미국의 창조론 ‘직수입 대리점’인 셈인데, 아직까지 이 문제와 관련한 법정 투쟁까지는 벌어지지 않은 것이 미국과의 차이라면 차이다. 1925년 미국 테네시 주에서 열렸던 스콥스 재판(일명 ‘원숭이 재판’)과 1981년 미국 아칸소 주에서 열렸던 동등시간 교육법(진화론을 가르치는 것과 동등한 시간 동안 창조론도 가르치도록 요구한 법) 재판 등이 미국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법정 투쟁들이다.


이 중 스콥스 재판에 대해서는 김윤성 교수가 간략하게 정리하고 있는데, 발단은 1925년 테네시 주가 공립학교에서 진화론 교육을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킨 것이었다. 미국의 진보진영은 즉각 이에 반발했는데, 특히 미국시민자유연맹(ACLU) 쪽에서는 법정 투쟁을 통해서 진화론 교육 금지법을 사회적으로 이슈화하고자 했다. 존 토머스 스콥스가 자원자로 나서서 학교에서 과학시간에 진화론을 가르치다가 기소되었고, 이 재판에서 당대의 명사였던 윌리엄 제임스 브라이언과 클래런스 대로가 정부 측과 미국시민자유연맹 측을 대변해 유명한 법정 공방을 벌였다(이 재판은 영화와 연극으로도 만들어졌다). 재판은 진화론 교육 금지법의 문제점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됐지만 스콥스는 벌금형을 선고받았고 교육계와 출판계에서는 논란을 두려워해 오히려 진화론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결과를 초래했다.


과학 저널리스트 에드워드 라슨의 <신들을 위한 여름>(글항아리)는 바로 스콥스 재판의 진행과정과 문제의 발단에서부터 뒷이야기까지 자세히 다룬 논픽션이다. 저자는 이 재판의 교훈을 “이성의 힘이 종교적 반계몽주의를 내몰았다는 것”에서 찾지만 역설적으로 반진화론은 결코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미국의 보수 기독교 하위문화 내부에서는 계속 성장해나간 추세다. ‘원숭이 재판’ 이후 80년도 훨씬 더 지난 시점이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은 것은, 그래서 ‘예수와 다윈의 동행’도 요원한 것은 변함없는 종교적 성향 때문이다. 1950년대와 마찬가지로 2000년대에도 미국의 10명 중 9명이 신의 존재를 믿으며, 그 중 상당수가 창조설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다. 저자의 전망의 부정적인 것은 당연해 보인다. “역사가 미래를 예측하는 지표라면 한동안은 악천후가 이어질 것이다.”

 

14. 07.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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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달 2022-04-27 1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이번 주 시사IN(355호)에 실은 북리뷰를 옮겨놓는다. 파울로 프레이리의 <문해교육>(학이시습, 2014)을 골라서 읽고 적었다. 문해교육에 대해서는 데이비드 아처와 패트릭 코스텔로의 <문해교육의 힘>(학이시습, 2014)도 나란히 출간돼 눈길을 끈다.

 

 

시사IN(14. 07. 05) 읽고 쓰면서 세상 밖으로

 

<페다고지><희망의 교육학> 등 교육학 고전으로 잘 알려진 파울로 프레이리의 <문해교육>을 읽었다. 브라질 월드컵이 한창 진행 중인 것도 브라질의 세계적인 교육사상가에게 주목하게 만든 이유이지만 문해교육 프로그램이 프레이리의 대표적 교육개혁 프로그램이었다는 점에서도 관심이 갔다. ‘파울로 프레이리의 글 읽기와 세계 읽기’가 부제인데, ‘읽기와 쓰기 교육’으로서 문해교육에 대한 강조는 새삼스럽지 않지만 ‘글 읽기’와 ‘세계 읽기’를 같이 묶는다는 점이 눈에 띈다. 프레이리 문해교육론의 핵심이기도 하다.

 

글 읽기와 세계 읽기는 어떤 관계인가. “세계 읽기는 항상 글 읽기에 선행한다. 그리고 글 읽기는 계속해서 세계 읽기를 내포한다”는 구절에 압축돼 있다. 세계 읽기가 글 읽기에 선행한다는 말은 학습자가 글을 깨치기 전에 이미 세계에 대한 이해를 갖고 있다는 뜻이다. 프레이리는 몬테마리오라는 작은 어촌 마을에서의 경험을 들려주는데, 그는 보니투(bonito)라는 물고기 이름과 함께 채소, 전통가옥, 고깃배, 어부의 그림을 먼저 보여주었다. 그러자 그림을 뚫어지게 쳐다보던 주민들이 “아 여기는 몬테마리오예요. 맞아, 이 그림은 몬테마리오야. 정말 몰랐네”라고 말하며 놀라워했다. 그림(상징)을 통해서 자신들의 세계를 인식하고 재발견한 것이다.

 

이것은 전혀 새로운 세계에 대한 눈뜸이기도 했다. 주민들은 그들이 존재하는 작은 마을을 대상화함으로써 ‘세계의 주인’으로 마주 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호기심 어리고 비판적인 주체’가 바로 문해교육 과정의 출발점이라고 프레이리는 말한다. 그래서 그의 문해교육의 첫 단계는 학습자들에게 글자보다 그림을 먼저 제시하는 것이다. 학습자가 글자를 기계적으로 암기하기보다는 자기 경험에 근거해 그 글자 자체를 이해하게끔 유도하는 것이다. 그림으로 제시된 상황을 해석하고 읽어내는 과정에서 학습자는 자신의 경험세계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할 수 있다. 그 학습자가 가난한 민중이라면 “세계에 대한 비판적 독해가 깊어질수록 민중들은 숙명론과는 다른 방식으로 가난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급진적 교육학을 주창한 <페다고지>의 부제가 ‘억눌린 자를 위한 교육’이라는 점에서도 확인되듯이 프레이리의 주안점은 민중의 해방을 위한 교육이다. 그에게 교육은 지배 이데올로기의 재생산 수단이면서도 동시에 그러한 이데올로기로부터 벗어나게끔 하는 사회변혁의 수단이다. 교육은 억압받는 계급의 사회적 해방을 위한 무기이며, 문해교육은 그러한 무기의 하나다. 그런데 세계 읽기가 글 읽기에 앞선다는 전제를 염두에 두면 해방적 문해교육에 앞서야 하는 것은 사회 변혁이다.

 

문해교육의 의의를 절대적으로 것으로 과대평가하지 않는다는 점이 또한 프레이리 사상의 특징이다. 그는 문해교육을 사회변혁의 유일한 기폭제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주의를 준다. 니카라과 민중이 혁명을 통해 역사를 장악하자 곧바로 문해교육이 실시되었다. 문해과정은 역사를 장악하는 과정보다는 쉽기 때문인데, 니카라과 민중은 자연스레 자신들의 이야기를 다시 써나갈 수 있었다. 사회변혁이 문해교육에도 획기적 전기가 될 수 있다.   

 

흥미롭게도 니카라과와 대조되는 사례가 미국이다. 1980년대 중반의 통계이지만 당시 미국 민중의 6000만 명 이상이 글을 모르거나 제대로 읽지 못하는 기능적 비문해 상태에 있었다. 유엔의 128개국 가운데 미국의 문해율은 49번째였다. 이러한 대규모의 비문해 인구가 방치되고 있는 것이 제1세계의 대표국가 미국의 현실이라면 미국은 프레이리의 문해교육이 제3세계 국가 이상으로 시급하게 이루어져야 할 곳이기도 하다. 물론 한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문해율을 자랑하는 만큼 사정이 좀 다르다. 월드컵 축구팀의 성적이 브라질이나 미국에 비해 좋지 않더라도 다소간 위안으로 삼을 만하다.

14. 07.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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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자 중앙일보의 '삶의 향기' 칼럼을 옮겨놓는다. 4주에 한번씩 반년간 칼럼을 연재하게 됐는데, '북칼럼니스트'라는 직함에 맞게 주로 책 얘기를 하게 될 것 같다. 첫 칼럼은 책 이사에 관한 것이다. 지난 주말에 이사를 하고서 아직 인터넷도 개통되지 않아 이래저래 불편한 생활을 하고 있는데, 달리 생각하면 해오던 일이 준 것이니 오히려 편한 생활인지도 모르겠다...

 

 

 

중앙일보(14. 07. 01) 책 이사를 하고서

 

남들보다 책을 좀 많이 읽고 그에 대해 글을 쓴다는 거 말고는 남다를 게 없지만, 간혹 그게 도드라질 때가 있다. 이사할 때다. 이삿짐센터 직원들도 가장 힘들어하는 게 책짐이 많은 이사인데, 그건 책이 부피에 비해 무겁기 때문이다. 한 직원의 말로는 수석 이사 다음으로 힘든 게 책 이사다. 돌덩이를 옮기는 것 다음으로 힘든 일이 책짐을 나르는 일이라는 얘기다.

물론 나도 경험이 없지 않아서 대학원 시절 자취방을 옮길 때 친구의 힘을 빌려 100개가 넘는 라면박스를 나른 적이 있다. 라면 대신에 책이 들어간 라면박스였다. 엘리베이터도 없는 빌라 건물의 3층까지 계단으로 박스를 나를 때마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내가 기억하는 가장 힘들었던 이사다. 그 이후로는 노력 동원 수준을 넘어섰기에 주로 용달 아저씨나 이삿짐센터 직원들의 도움을 받았다. 이사를 위해 미리 업체의 견적을 받을 때도 책 이사 경험이 많은지가 가장 중요한 확인사항이었다. 대학 연구실이나 도서관 이사를 해본 경험이 있다면 두말할 것 없이 가산점이 주어진다.

지난 주말에 바로 그런 이사를 또 했다. 예전 집에 이사한 지 4년 만에 전셋집을 비워주게 되었는데, 더 이상의 책이사가 부담스러워 아예 내 집을 마련했다. 보통 신중할 수밖에 없는 내집 마련의 고민을 단숨에 해결해준 것이 책인 셈이다. 형편에 맞게 몇 년 전세를 더 살다가 다시 이사를 하는 것이 결코 대안으로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책이 불어난 탓인데, 짐작엔 1만5000권에서 2만 권 사이가 되지 않을까 싶다.

적정 기준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1만권 이상의 책을 소장하고 있을 경우 충분히 장서가로 분류할 수 있다. 그 정도면 이미 한 장소에 보관하기에는 부담스럽다. 나 같은 경우도 서너 곳에 책을 분산 보관하고 있는데, 이번에 집으로 옮긴 게 대략 전체의 3분의 1 정도다. 이사하기 전에 책장을 충분히 짜놓아서 아직 빈 공간이 조금 남아 있다는 게 이사한 보람이다.

하지만 보람은 잠시다. 일단 마구잡이로 꽂혀진 책들을 마땅한 자리를 정해서 제대로 정돈하는 게 이사보다 더 큰 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건 따로 용역을 줄 수도 없는, 순전히 서재 주인의 몫이다. 이전에 살던 집에서도 가끔씩 애는 써보았지만 결국 4년 동안 온전한 책정리는 끝내지 못했었다. 두 가지 핑계를 대곤 했는데, 인생이 미완성이듯이 책장 정리도 미완성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는 ‘철학적’ 이유가 하나였고, 군대식으로 잘 정렬된 책장보다는 중구난방으로 뒤섞인 서가에서 뭔가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올 수도 있다는 ‘실용적’ 이유가 다른 하나였다.

책들의 위치를 다 기억하고 있다면 모를까, 현실적으로는 필요한 책을 제때 찾지 못하는 일이 잦았으니 실용적이란 말은 어폐가 있다. 그래도 마구잡이 배열이 뭔가 시적이라는 느낌을 줄 때도 있다. 눈앞의 책장 한 칸을 보니 『행복에 걸려 비틀거리다』와 『구텐베르크 은하계』 『나의 햄릿 강의』 『돈을 다시 생각한다』 『영화장르』 『번역이론』 『트랙스크리틱』 등이 두서 없이 꽂혀 있다. 또 다른 칸에는 『문학의 공간』과 『칼 세이건』 『냉전의 역사』 『그레이트 게임』 『물리학으로 보는 사회』 『니체 극장』이 한 편이 돼 있다. 머지않아 자기 자리를 찾게 할 계획이지만 당분간은 이런 무질서도 즐기고 싶다. 장서가의 즐거움이란 게 사실 대단찮다.

‘삶의 향기’란 칼럼을 청탁받으면서 주로 딱딱한 책 얘기나 하게 될 거라며 완곡하게 사양했지만 첫 지면에 ‘무거운 책’ 얘기만 적게 됐다. 무거운 책들과 함께하는 삶은 향기로운 삶이라기보다는 단내 나는 삶이다. 그럼에도 ‘책 속에 길이 있다’는 말을 나는 믿는다. 그 말에 인생을 걸었으니 도박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인간의 정신과 일상의 감각을 보존하고 환기시켜주는 가장 강력한 매체로서 책 이상의 것을 나는 알지 못한다. “이 많은 책을 다 읽으셨어요?”라는 질문을 이사할 때마다 받으면서도 “다 읽을 수는 없지요”라고 멋쩍게 답하면서 여전히 책 속에 파묻혀 지내는 이유다.


14. 07.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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