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주간 기획회의(370호) 실은 글을 옮겨놓는다. '여행서, 어디까지 갈 거니?'란 특집의 한 꼭지로 '여행 안 가는 사람이 읽는 여행서'에 대해 써달라는 청탁을 받고 쓴 것이다. 쓰다 보니 특집의 의도와는 좀 다르게 '모든 책은 여행서'라는 결론으로 빠지게 됐다. 말 그대로 여행서를 다룬 다른 꼭지의 글들이 있어서 상쇄는 되는 듯싶다. 여행서 특집까지 나오게 된 건 정여울 평론가의 베스트셀러 <내가 사랑한 유럽 TOP10>(홍익출판사, 2014) 때문인데, 이번에 속편으로 <내가 알고 싶은 유럽 TOP10>(홍익출판사, 2014)이 출간됐다. 다들 어디론가 떠나고픈 게 한국인의 공통 심사인 모양이다...

 

 

기획회의(14. 06. 20) 모든 책은 여행서다

 

‘여행 안 가는 사람이 읽는 여행서’에 대해 써달라는 청탁에 응하긴 했지만 단서를 좀 달아야 할 것 같다. 일단 ‘여행 안 가는 사람’을 대표할 만하지 않다. ‘여행가’는커녕 대놓고 여행이 취미라고 말하는 사람들 축에 들지 못한다는 건 분명하다. 그렇다고 ‘난 여행 반댈세’라고 큰소리칠 만한 여행 반대론자도 아니고, ‘여행은 그냥 싫어요’라며 얼버무리는 여행 기피론자도 아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처럼 ‘여행이라도 떠나면 좋을 텐데’라고 생각하면서도 막상 시간과 비용을 계산하다가 혹은 아예 그런 계산에 이르기도 전에 여행과는 인연이 멀어지는 부류다. 그렇다 하더라도 등 떠밀려서 떠난 여행이 없지 않아서 인천공항을 드나든 횟수가 두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는 된다. 많다고 할 수는 없어도 ‘여행 안 가는 사람’이라고 하기엔 애매하다. ‘여행 자주 안 가는 사람’ 정도가 무난한 분류이지 않을까. 하긴 여행 인구가 부쩍 늘어나고 베스트셀러 여행서도 등장하는 보면 ‘여행 좀 가는 사람’에 견주어 ‘자주 안 가는 사람’은 ‘안 가는 사람’에 더 가까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세계문학 작품들도 모두 여행서
물론 여행을 자주 가건 안 가건 여행서도 책인 이상 여행서에 대해 한마디 거드는 게 곤란할 건 아니다. 문제는 ‘여행서’의 정의다. 인터넷서점의 도서 분류표에는 ‘여행’ 항목이 따로 있으니 일차적으로는 거기에 속한 책들이 여행서일 것이다. 요즘 가장 각광받고 있는 정여울의 <내가 사랑한 유럽 TOP10> 같은 책이 대표적이다. 통상 여행안내서나 여행에세이로도 분류되는 책들이다. 하지만 여행의 개념과 범위를 좀 확장하면, 고전적인 여행기들도 여행서에 포함된다. <왕오천축국전>부터 시작해 <동방견문록>과 <이븐 바투타 여행기> 등을 떠올릴 수 있다. 박지원의 <열하일기>와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도 명망 높은 여행기들이다. 그뿐 아니다. 사실 원초적인 입장에서 다시 생각해보면, 모든 책이 자기계발서로 읽힐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책이 여행서로 읽힐 수 있다. 그러니까 여행서라는 건 존재론적으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화용론적으로 규정된다. 어떻게 쓰느냐, 혹은 어떻게 읽느냐에 달려 있다는 얘기다.

 
‘일이나 유람을 목적으로 다른 고장이나 외국에 가는 일’이 여행에 대한 통상적인 정의다. 여행의 목적은 천차만별이고, 심지어 ‘그냥 가봤어’라는 식의 여행도 가능하기에 초점은 ‘다른 고장이나 외국에 가는 일’이겠다. 그렇다면 그렇게 다른 고장이나 외국으로 안내하는 모든 책이 다 여행서 아닌가. 단적으로 말해서, 강의를 위해서라도 매주 몇 권씩 읽게 되는 세계문학 작품들이 내게는 모두 여행서다. 가령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에서 우리는 19세기 중반 런던과 파리의 여러 역사적 사건과 허구적 인물들을 만날 수 있다. ‘허구적’이라고는 하지만 우리가 실제 여행에서 그냥 스치고 지나가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생생하게 살아있는 인물들이다. 실제 경험담과 허구의 이야기를 동일시할 수는 없지 않느냐는 반론이 가능할지 모르지만, 만리장성에 대한 언급도 없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동방견문록>의 저자 마르코폴로가 정말로 중국을 다녀왔을까 의문을 제기하는 학자들도 있다는 걸 상기해보라. 이 문제는 더 깊이 들어가면 가상과 현실의 차이나 허구세계의 존재론까지 들먹이게 되는데, 실제 여행과 가상의 여행을 구분하는 것이 생각보다 어려운 문제라는 것 정도만 지적하자. 중국에 가본 적도 없는 카프카의 단편 <만리장성 축조 때>가 적어도 만리장성에 대해서만큼은 마르코폴로보다 훨씬 더 많은 생각거리를 제공해준다는 점과 함께.

 

 
여러 가지 사정 때문에 ‘여행을 못 가는 사람’이 아니라 소신을 갖고 ‘여행을 안 가는 사람’이라면 여행에 대한 생각이나 태도가 다를 것이다. 여행을 못 가는 대신에 여행서나 뒤적이는 부류로 이해해서는 곤란한 이유다. 여행을 안 가는 것이 다른 방식의 여행을 이미 충분히 하고 있어서라면, 혹은 좀 특이한 곳을 여행하고 있어서라면 어떨까. 가령 알베르토 망겔의 <인간이 상상한 거의 모든 곳에 관한 백과사전>이나 더글러스 애덤스의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를 읽고 있는 독자를 생각해보라. 하나는 사전이고 다른 하나는 안내서이지만, 두 권 모두 ‘여행서’로 불릴 만하면서 1200쪽이 넘는다는 점도 공통적이다. 맘먹고 읽어도 일주일은 걸릴 만한 분량의 책들이다. 그런데 과연 어떤 여행이 이런 책의 독서를 대신할 수 있을까. 어디로든 떠날 수 있는 여유가 생겨 인천공항에 가본다 하더라도 ‘상상적 장소’나 ‘은하수’ 여행을 대신할 항공편을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책은 탁월한 여행을 저렴한 비용으로 가능케 한다 
오직 독서를 통해서만 가능한 여행도 있다고 하면, ‘여행 안 가는 사람’들의 여행을 무시할 일이 아니다. 그럼 이 글의 주제를 ‘여행 안 가는 사람의 독서 여행’으로 슬쩍 틀어도 무방할 것이다. 좁은 의미의 여행서 정의에서 벗어나면 우리는 모든 책을 여행서로 읽을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어떤 책들을 분명 실제 여행이 제공해줄 수 없는 놀랍고도 탁월한 여행을 아주 저렴한 비용으로도 가능하게 해준다(우리에게 필요한 수고는 단지 눈을 뜬 채 책장을 두 손으로 펼쳐 쥐고 있는 것 정도다). 당장 쥘 베른의 <80일간의 세계일주>나 <해저 2만리>를 펼쳐보라. 방랑의 고아 라스무스를 따라나서도 좋겠고, 닐스의 이상한 모험에 동반자가 되어도 좋겠다. 혹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유럽인상기>나 카잔차키스의 <러시아 기행>을 옆구리에 껴도 좋겠다. 조금 대범하다면 단테의 <신곡>과 함께 지옥으로의 하강도 시도해봄직하다. 그래, 여행의 정수는 어쩌면 지옥 여행인지도 모른다.

 


단테가 상상한 가상의 지옥만 우리의 목록에 있는 건 아니다. 20세기의 지옥이라 할 수용소 생존자들의 소설과 수기도 서가에는 진열돼 있다. 실제로 스탈린치하의 강제수용소에서 8년간 복역했던 작가 솔제니친의 데뷔작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와 대작 <수용소군도>는 어떤가(완간됐던 <수용소군도>가 일부만 다시 출간되고 만 것은 유감스럽다. 우리의 간접 수용소 체험을 절름발이로 만들었다). 나치의 절멸수용소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의 여러 책들, 곧 <이것이 인간인가>에서 <주기율표>를 거쳐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에 이르는 고발과 증언은 참혹했던 지옥으로 우리를 다시금 안내한다. 역시나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인 장 아메리의 <자유죽음>과 <죄와 속죄의 저편>도 마찬가지다. 레비와 아메리는 자살로 생을 마감한 한 시대의 증인들이다. 요즘은 다카우수용소나 아우슈비츠수용소가 관광객들의 여정에 포함돼 있기도 한데, 정작 그런 장소들이 담고 있는 기억을 책으로 먼저 확인하지 않는다면 그 여행은 눈 뜬 장님의 여행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지옥보다는 조금 나은 곳을 찾는다면, 도스토예프스키의 <죽음의 집의 기록>이나 체호프의 <사할린섬>은 어떨까. <죽음의 집의 기록>은 작가가 정치범으로 직접 수감됐던 시베리아의 수용소 체험을 바탕으로 한 소설이고, 무라카미 하루키가 장편소설 <1Q84>에서 언급해 일본에서는 재출간되었던 <사할린섬>은 체호프의 사할린 여행과 현장조사 보고서다. 유형수들의 삶을 조사하기 위해 사람들을 일일이 만나서 면접카드를 만들고 이를 바탕으로 쓴 것으로 그에게는 러시아의 현실과 러시아 민중의 삶을 재발견하는 계기가 된다. 그와 비슷한 의미를 갖는 책이라면 막심 고리키의 자전 삼부작도 빼놓을 수 없다. <어린 시절><세상 속으로><나의 대학>으로 이루어진 이 삼부작에서 고리키는 자신의 삶을 회고하기보다는 그가 만난 사람들을 기억한다. 고리키란 필명의 뜻대로 ‘쓰라린’ 삶을 살았지만 그는 자신이 만난 도시빈민과 노동자들의 모습에서 자신의 삶을 다시 발견한다. 그런 만남과 분리된 개인적인 삶이 그에겐 따로 없었다. 이러한 민중의 발견은 미국 작가 스타인벡의 대표작 <분노의 포도>가 갖는 의의이기도 하다. 소설이긴 하지만 이 작품 역시 미국 중남부 오클라호마에서 서부 캘리포니아까지 66번 국도를 따라 작가 스스로 이주민들과 같이했던 여정에 토대를 두고 있다. 그러한 경험에 힘을 얻어 썼기에 1930년대 이주 노동자들의 험난한 여정과 힘겨운 삶이 독자에게 생생하게 전달된다. 

 

 

여행의 목적은 독서 
여행자에게는 모든 장소가 여행을 갈 수 있는 곳과 갈 수 없는 곳으로 분류된다면, ‘여행을 갈 수 없는 곳’은 ‘여행을 가지 않는 사람’이 단연 선호할 만한 곳이다. 그런 장소 가운데 내가 특별히 애착을 느끼는 곳은 러시아 작가 플라토노프의 ‘체벤구르’와 미국 작가 포크너의 ‘요크나파토파’이다. 공통점은 둘다 가상의 공간이라는 점. 가상의 공간이라고 해서 저 우주 바깥이나 허구세계에만 존재하는 공간은 아니다. 실제 공간을 모델로 했지만 두 작가가 새롭게 이름을 붙였을 따름이다. 지상에 건설된 공산주의 마을 체벤구르를 찾아가는 여정을 담은 플라토노프의 소설 <체벤구르>는 공산주의 유토피아에 대한 작가의 집요한 문제의식과 깊이 있는 성찰을 집약한 작품이다. 1920년 말에 쓰였지만 러시아에서는 작가 사후 수십 년이 지난 1980년대 말에 가서야 발표될 수 있었다. 부재하는 장소에 관한 소설이기 이전에 아예 부재하는 책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플라토노프는 오늘날 가장 심오한 20세기 작가 가운데 한 명으로 재평가되고 있으며 <체벤구르>는 그의 대표작으로 무게를 더해가고 있다.

 
포크너는 자기 소설의 배경이 되는 미시시피주 고향 지방(카운티)에 요크나파토파란 이름을 붙였다. <소리와 분노><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압살롬, 압살롬> 등의 대표작들이 모두 제퍼슨을 행정중심지로 하는 요크나파토파를 배경으로 하고 있어서 ‘요크나파토파 사이클’로 묶인다. 포크너가 소설적 공간으로 새로 고안해낸 지명이지만 요크나포토파는 오늘날 유명한 현실 속 지명이 됐다. 가상의 공간이 현실의 지명이 된 사례 가운데 하나다. 포크너의 소설들에서 요크나파토파는 남북전쟁 이후 몰락해가는 남부의 현실을 집약하고 있는 곳이다. 실제 사진으로 보는 요크나파토파는 낡은 저택들과 황량한 숲으로 우중충한 인상을 심어주지만 그 공간에 깊이를 부여하는 것은 포크너 소설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고독한 목소리다. 갈 수 없는 곳이지만 가고 싶은 곳으로 떠올리게 만드는 것이 이런 소설들의 힘이다. 

 
프랑스 작가 외제 다비는 이렇게 말했다. “세계는 한 권의 책이다. 여행하지 않는 사람은 그 책을 한 쪽밖에 읽지 못한 셈이다.” 이 비유가 적절하다면, 여행의 목적은 독서다. 즉 여행은 세계라는 책을 읽는 한 가지 방식이다. 여행 자체가 독서라면, ‘여행하는 사람의 독서’와 ‘여행하지 않는 사람의 독서’의 차이란 독서 방법의 차이다. 가만히 앉아서 책을 읽는 사람이 있고, 반대로 돌아다니면서 책을 읽는 사람이 있을 따름이다. 정리하자. “세계는 책이고 여행은 독서이며 모든 책은 여행서다.” 그러니 애초에 ‘여행 안 가는 사람이 읽는 여행서’라는 게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여행 안 가는 사람’이 아니라 ‘앉아서 여행하는 사람’이고, ‘여행 가는 사람’이 아니라 ‘돌아다니며 책을 읽는 사람’이다.

 
여기까지 쓰고 나니까 <호밀밭의 파수꾼>의 주인공 홀든이 왜 여행을 단념했는지도 이해된다. 물론 서부로 가겠다는 그의 결심을 꺾은 건 여동생 피비가 같이 따라가겠다고 울면서 따라나선 때문이었다. “난 아무 데도 안 갈 거야. 마음이 변했어. 그러니까 그만 울어.”라고 다독거리며 홀든은 피비를 데리고 동물원에 간다. 어릴 적 피비가 회전목마 타는 걸 미칠 듯이 좋아했다는 걸 떠올린 홀든은 피비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목마에 태운다. 피비가 목마를 타는 걸 보면서 홀든은 비를 흠뻑 맞으면서도 행복감을 느낀다. “너무 행복해서 큰 소리를 마구 지르고 싶을 정도였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피비가 파란 코트를 입고 회전목마 위에서 빙글빙글 도는 모습이 너무 예뻐 보였다. 정말이다. 누구한테라도 보여주고 싶을 정도로.”

 
홀든의 사례에서 알 수 있지만, 여행서를 읽는 것 말고도 ‘여행 안 가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 하나 더 있다. 동물원에 가서 동생이나 아이를 회전목마에 태우고 그걸 구경하는 일. 좀 멋쩍어도 홀든식의 행복은 만끽할 수 있지 않을까. 다음엔 차라리 ‘여행 가서 절대로 읽지 않을 책’에 대해 몇 마디 적어봐야겠다.

 

14. 06.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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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공지다. 푸른역사아카데미에서 진행하는 7월 강좌는 나보코프를 읽는다. '로쟈와 함께 읽는 나보코프'(http://cafe.daum.net/purunacademy/8Bko/169). 나보코프의 미완성 유작 <오리지널 오브 로라>가 나온 김에 번역본으로 읽을 수 있는 작품들을 네 편을 골랐다. 7월 7일부터 28일까지 매주 월요일 저녁 7시 30분-9시 30분까지다. 구체적인 일정은 아래와 같다.

 

 

1강 7월 7일 나보코프, <오리지널 오브 로라>

 

 

 

2강 7월 14일 나보코프, <사형장으로의 초대>

 

 

3강 7월 21일 나보코프, <절망>

 

 

 

4강 7월 28일 나보코프 <롤리타>

 

 

14. 06.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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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공지다. 한겨레교육문화센터에서 진행하는 '로쟈의 세계문학: 노벨문학상 수상작 읽기' 시즌3이 7-8월에 진행된다(매주 화요일 저녁 7:30-9:30이고, 8월 12일은 휴강이다), 이번엔 1989년도 수상자 호세 카밀로 셀라에서 2003년 수상자 존 쿳시까지, 여덟 명의 수상작가와 그들의 대표작을 살펴본다.(http://www.hanter21.co.kr/jsp/huser2/educulture/educulture_view.jsp?&category=academyGate9&tolclass=0001&lessclass=0003&subj=F91578&gryear=2014&subjseq=0001&booking=). 구체적 일정은 아래와 같다.

 

로쟈의 세계문학클럽 : 노벨문학상 수상작 읽기 3 (1989~2003)

 

1강 7월 1일_ 카밀로 호세 셀라, <파스쿠알 두아르테 가족> - 1989(스페인)

 

 

2강 7월 8일_ 토니 모리슨, <빌러비드> - 1993(미국)

 

 

3강 7월 15일_ 오에 겐자부로, <만엔원년의 풋볼> -1994(일본)

 

 

 

4강 7월 22일_ 주제 사라마구, <눈먼 자들의 도시> -1998(포르투갈)

 

 

 

5강 7월 29일_ 귄터 그라스, <양철북> -1999(독일)

 

 

 

6강 8월 5일_ V. S. 나이폴, <미겔 스트리트> -2001(영국)

 

 

7강 8월 19일_ 임레 케르테스, <운명> -2002(헝가리)

 

 

 

8강 8월 26일_존 쿳시, <추락> - 2003(남아공)

 

 

14. 06.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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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레터 '독서인'에 실은 '독서카페'를 옮겨놓는다. 한 권에 책을 소재로 한 독서 에세이 연재인데, 이달에 다룬 건 요시미 순야의 <대학이란 무엇인가>(글항아리, 2014)이다. 대학의 역사를 새로운 시각에서 조명하고 있어서(저자는 대학을 하나의 미디어로 본다) 유익하게 읽은 책이다. 이광주 교수의 <대학의 역사>(살림, 2008)와 비교해봐도 저자의 독창성이 두드러진다.

 

 

 

독서인(14년 6월호) 대학이란 무엇인가

 

한국사회를 가리키는 많은 별칭 가운데 하나는 ‘대졸자 주류 사회’다. 이미 2000년대 중반부터 대학진학자 수가 고교 졸업생 수의 80%가 넘어섰고, 이 수치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 90년대 초반 40%에도 이르지 못했던 것과 비교하면 괄목할 만하다. 하지만 이렇듯 유례없는 ‘고학력 사회’가 결코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저성장기조의 장기화와 산업구조 변화로 대졸 취업난 역시 해결의 기미가 없는 상황에서 대학 등록금만 꾸준히 인상돼 학생과 학부모의 부담이 늘어났고 ‘반값 등록금’이 정치적 이슈로 부각됐다. 반면에 오늘의 대학이 과연 학생들의 요구와 사회적 수요에 걸맞은 양질의 교육을 제공하고 있는지에 대한 회의는 깊어졌고 대학 무용론까지 터져 나왔다.

 

대학 교육의 위기 상황을 입증이라도 하듯이 지난 2010년에는 고려대 경영학과에 재학 중이던 김예슬 학생이 자발적 자퇴 선언을 하기도 했다. 김진석 인하대 철학과 교수의 표현을 빌면, ‘저질 대졸자 주류 사회’의 풍경이다. 김 교수는 대학 교육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만 “창조적이지도 않고 상상력도 고갈시키는 비싼 대학교육”은 필요 없다고 일갈한다.

 

질문은 언제나 위기의식의 반영이다. 지금 대학의 의미와 역할을 우리가 다시 묻는다면 그 질문의 배후에는 대학이 처한 현재의 위기가 놓여 있다. 시야를 확장하면 이 위기는 비단 한국 사회만의 것이 아니다. 일본 도쿄대 교수 요시미 순야의 <대학이란 무엇인가>(글항아리)에 따르면 일본의 대학 역시 ‘대학이란 무엇인가’를 근원에서 다시 질문해야 할 만큼 위기적 상황에 직면해 있다.

 

위기의 진단과 처방이 그간에 없었던 건 아니지만, 요시미 교수의 입론이 눈길을 끄는 것은 ‘대학’이라는 개념 자체를 다시 정의할 필요가 있다는 그의 문제의식 때문이다. 대학을 다시 정의하기 위해서 저자는 먼저 대학은 무엇이었던가를 회고한다. 당연한 일이지만 대학이 처음부터 오늘날과 같은 형태와 기능을 가졌던 건 아니다. 대학의 역사에 대한 회고는 대학의 현재를 더 잘 이해하고 그 미래를 조감하는 데 유익한 시사점을 제공해줄지 모른다.

 

요시미 교수에 따르면 대학의 역사는 단선적인 발전사가 아니다. 적어도 “두 번의 탄생과 한 번의 죽음”을 겪었기에 그러한데, 오늘의 위기 상황과 관련하여 주목하게 되는 것은 ‘대학의 죽음’이다. 많이 알려진 대로 대학은 12세기 중세 유럽에서 탄생했다. ‘도시의 자유’를 기반으로 탄생한 중세의 대학은 교황권력과 황제권력의 대립을 적절히 이용하면서 전 유럽으로 증식해갔다. 15세기가 중세 대학의 전성기였다면, 16세기 인쇄술의 발달과 함께 도래한 근대로의 이행기에 대학은 사회적 변화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면서 거의 죽음을 맞는다.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인가.

 

15세기 중반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발명으로 서구 문명은 필사문화에서 활자문화로 이행한다. 인쇄혁명은 종교개혁과 근대과학의 탄생을 가능하게 했고, 새로운 출판문화를 새로운 지식의 담당자, 즉 저자를 출현시켰다. 중세의 지식인들은 교회와 대학이라고 하는 두 가지 ‘미디어’를 통해서 ‘신의 말씀’과 ‘이성의 언어’의 매개자 역할을 해왔지만, 출판이라는 새로운 미디어의 도전에 제대로 응전하지 못했다. 즉 중세 대학은 “출판 유통을 기반으로 하는 새로운 미디어 상황과 그 속에서 새로운 지식을 창출하기 위한 민감한 대응”을 결여했다. 이러한 대응력을 갖췄던 이들은 대학의 지식인이 아니라 르네상스의 인문주의자들과 계몽기의 백과전서파 같은 새로운 지식인과 예술가들이었다. 반대로 대학은 근대적 지식의 주체가 아니었다. 이는 데카르트, 파스칼, 로크,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등과 같은 근대의 지적 거인들은 모두 대학교수직과는 무관한 삶을 살았던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그렇게 오랜 기간 가사(假死) 상태에 놓여 있던 대학은 19세기 민족주의의 대두와 함께 다시금 ‘제2의 탄생’을 맞는다. 직접적인 계기는 프랑스혁명과 나폴레옹에 맞선 프로이센군의 패배였다. 정치적, 군사적으로 프랑스의 압력 하에 놓인 독일은 새로운 근대 대학의 설립을 통해서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고자 했다. 빌헬름 훔볼트의 대학개혁안에 따라 베를린대학이 탄생한 것은 그런 배경에서다. 독일의 대학이 표본적으로 보여주듯 근대 대학은 국민국가, 더 나아가서는 제국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다시금 종합적인 고등교육 및 연구기관으로 화려하게 부활한다.

 

문제는 이러한 근대 대학의 모델이 국민국가가 점차 쇠퇴해가는 21세기에도 여전히 유효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게다가 디지털화와 인터넷의 보급으로 마치 16세기처럼 지식의 창출과 유통에서 새로운 혁명이 진행되고 있는 현재 상황은 대학에 또 다른 도전이다. 근대 국민국가와 같이 성장해온 근대 대학이 당장 종언을 고하지는 않겠지만 분명 새로운 변화의 입구에 서 있는 것만은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미디어와 지식의 새로운 관계에 대응하는 변화를 수반하지 않는다면 대학의 기능 부전은 만성화될 가능성이 높다. 더불어 대학의 변신 혹은 혁신이 수반되지 않는다면, ‘대졸자 주류 사회’의 장래 또한 낙관하기 어려워 보인다.

14. 06.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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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반의 책을 옮겨놓고 나머지 책은 쌓아놓는 바람에 낯익은 서재도 낯설게 느껴진다. 열 권도 안 되는 책만이 꽂혀 있는 책장도 나로선 좀처럼 보기 드문 광경이다. 임시방편으로 컴퓨터를 다시 연결해서 페이퍼를 적는다. 당분간은 밤마다 유사 난민 생활을 해야 할 듯싶다. 일단, 이번달 책&(428호)에 실은 '키워드로 읽는 인문학 서재'를 옮겨놓는다. 거짓말에 관한 책 몇 권이 눈에 띄기에 고른 주제가 '거짓말'이었다. 거짓말의 심리학을 다룬 책 두 권 얘기다. 한 권 더 다뤘다면 <거짓말을 간파하는 기술>(21세기북스, 2013)도 후보였다.

 

 

책&(14년 6월호) 크고 작은 거짓말 속에서 사는 우리

 

거짓말을 하는 것은 나쁜 일이라고 생각하는 건 우리의 통념이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많은 거짓말 속에서 살아간다. 여기서 거짓말은 남에게 큰 손해를 끼치는 사기 같은 범죄는 제외하고 하는 말이다. 우리는 정직을 높이 평가하지만 언제 어디서건 본심을 말하는 게 최상의 방책인 것은 아니다. 가령 자신이 싫어하는 사람이 만나자고 할 때 선약이 있다는 핑계를 대는 대신에 ‘나는 당신이 싫고 그래서 만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 언제나 옳은 행동일까. 적당한 거짓말이 사회생활에서는 불가피할뿐더러 때로는 필수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런 관점에서 거짓말의 의의와 심리를 탐색한 책 두 권을 묶어서 이달에는 읽어보기로 하자.  


일본의 심리학자 사이토 이사무의 <사람은 왜 거짓말을 할까?>(스카이)는 제목 그대로 사람들은 왜 거짓말을 하는 걸까란 질문을 던지고 이에 답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로서 집단생활을 하면서도 개인의 자존심도 만족시키고자 한다. 저자에 따르면 이 두 가지 욕구를 동시에 만족시키려는 전략이 거짓말이다. 보통 커뮤니케이션은 정보의 올바른 전달을 목적으로 한다. 그럼에도 그런 정확성과는 거리가 먼 거짓말이 자주 사용되는 것은 다른 목적을 갖고 있어서이다. 바로 양호한 인간관계를 유지한다는 목적이다. 저자는 이러한 목적을 갖고서 일상생활에서 흔히 쓰이는 다양한 거짓말의 사례를 살펴보고 그 심층심리를 분석한다. 심층심리라고는 하지만 거짓말의 여러 양상과 숨은 의도에 따른 유형들을 제시하는 쪽에 가깝다.


그런 유형학보다 흥미로운 건 남자와 여자의 거짓말이 어떻게 다른가에 대한 설명인데, 저자는 거짓말의 성차가 진화심리학적 근거를 갖는 것으로 본다. 그에 따르면, 남자는 눈앞의 이익을 위해 임기응변으로 거짓말을 하는 경향이 있고, 여자는 상대의 기분이나 관계를 고려해서 거짓말을 하는 경향이 있다. 즉 남성은 자신의 이익을 우선시하기 위한 전략으로 거짓말을 활용하는 반면에 여성은 상대의 입장을 우선시하고 배려하기 위한 거짓말을 주로 많이 한다. 거짓말에 대한 대처법에서도 남성과 여성은 차이를 보이는데, 상대방이 거짓말을 했을 때 남성은 상대를 비난하고 상황을 자신한테 유리하게 만들기 위해 애쓴다. 관계 회복이 아니라 권력과 정의의 회복에 주안점을 둔다. 반면에 여성은 상대와의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데 초점을 맞추면서 상대가 왜 그런 거짓말을 했는지 이해하려고 한다. 관계 유지를 중시하는 여성의 입장에서 보면 권력이나 정의는 부차적이다. 가령 남성이 여성에게 하는 가장 대표적인 거짓말은 “전화할게” “사랑해” “너뿐이야”라고 하는데, 이런 거짓말의 진의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자주 속아 넘어가는 것은 여성이 어리석어서가 아니라 그 말을 믿고 싶기 때문에 믿는 척하는 것이라는 게 저자의 지적이다.  


독일의 긍정심리학자이자 베스트셀러 작가 우테 에어하르트가 남편과 함께 쓴 <거짓말의 힘>(청림출판)도 거짓말에 대한 편견을 재고하게끔 한다. 저자의 문제의식은 간명하다. 거짓말은 최고의 지적능력이며, 삶의 일부이고 소통의 필수 요소라는 것이다.

 

통계에 따르면 우리는 하루에 다섯 번에서 이백 번까지 ‘작은 핑계’를 이용한다. 사소한 거짓말은 거의 일상적이라고 해도 과장이 아니겠다. 저자는 이 거짓말을 긍정적인 자기기만이라는 관점에서 해명한다. 예컨대, 이런 가정을 해보자. 친한 친구로부터 사기를 당했다, 앞으로 살 날이 겨우 한 달밖에 안 남았다, 부모가 사실은 친부모가 아니다 등등. 이런 사례들의 공통점은 진실의 인지가 엄청난 정신적 부담과 고통을 안겨다 준다는 것이다. 그래서 흔히 사실을 직시하기보다는 회피하거나 변명하고자 한다. 그것은 고통을 최소화하려는 본능적인 성향의 결과다. 다르게 말하면, “모든 진실이 항상 소화 가능한 건 아니다. 우리는 모든 진실을 알고자 하는 건 아니다.”


여기서 진실보다 우선적인 가치로 등장하는 것이 행복이다. 이 행복을 위해서는 자신을 속이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할 수 있으면 행복하다는 것이다. 너무 거창하게 생각할 것도 없다. 저자는 매일 일기장에 좋은 일을 적으면 삶의 만족도가 올라간다는 사실을 예시한다. 그런 식으로 우리는 마음의 방향을 조종할 수 있다.

 

가령 다이어트를 해야 할 때 음식을 의도적으로 박하게 평가하는 것도 자신을 속이는 한 가지 방식이다. 좋아하지 않는 일을 할 때에도 긍정적 자기암시를 활용할 수 있는데, 쓰레기 수거 아르바이트를 하는 대학생이 무거운 쓰레기통 운반을 매우 좋은 운동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일례다. 이러한 낙관 편향적 태도를 저자는 ‘성숙한 방어’라고 부른다. “비현실적이거나 비도덕적이지 않으면서 자신을 속이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물론 낙관편향과는 반대적인 태도도 가질 수 있다. 비관적인 사람도 실수를 발견하는 데 뛰어난 능력을 발휘한다. 그러나 그것이 행복에는 크게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거짓말이 없다면 삶은 너무 암울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14. 06.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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