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달 '경영계'란 잡지에 실은 서평을 옮겨놓는다.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글을 청탁받고 쓴 것이다. 샌델에 대해선 조만간 더 긴 글도 쓸 예정이어서 지난주엔 그의 데뷔작인 <자유주의와 정의의 한계>도 입수했다. 이래저래 머리 한 구석은 샌델과 함께하는 만추가 될 듯싶다...
경영계(10년 11월) 공동선의 가치와 정치를 논하다
‘하버드대 20년 연속 최고의 명강의’란 문구와 함께 소개된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김영사)가 인문서로는 8년 만에 종합베스트셀러 1위에 오르기도 하면서 하나의 ‘사회적 현상’이 되고 있다. ‘정의’에 대한 이런 관심과 독서열이 어디에서 기원하며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정의란 무엇인가>를 계기로 이런 주제와 수준의 교양인문서 독자층이 확대된다면 긍정적인 현상으로 받아들일 만하다.
저자는 이 책에서 어떤 내용의 강의를 우리에게 들려주는가? “정의를 다룬 뛰어난 철학서를 소개하고, 철학적 문제를 제기하는 오늘날의 법적․정치적 논쟁을 다루는 수업”에서 샌델이 주요하게 다루는 철학자는 아리스토텔레스, 칸트, 밀, 롤스 등이다. 하지만 그는 이들을 연대순으로 다루지 않는다. ‘사상의 역사’를 훑어보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철학적 사고’를 계발하는 데 더 큰 목적을 두어서다. 그가 강의하는 정의론의 전체적인 구도는 ‘정의를 이해하는 세 가지 방식’이 어떤 것이고, 각각의 장단점은 무엇인가를 밝히는 쪽으로 짜여있다.
정의를 바라보는 세 가지 관점의 키워드는 행복 극대화, 자유 존중, 미덕 추구이다. 샌델은 먼저 시장 중심 사회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출발점이라는 이유로 ‘행복 극대화’를 주장하는 공리주의자들의 견해를 소개하고, 이어서 정의를 자유와 연관짓는 이론을 살핀다. 자유를 통해서 정의를 이해하는 방식 내에서도 의견은 갈려서 자유방임주의(자유지상주의)와 공평주의가 서로 경쟁하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끝으로 정의가 미덕과 밀접히 연관된다고 보는 이론을 살펴보는데, 그러한 입장의 원조이자 가장 대표적인 철학자가 아리스토텔레스이다. 그리하여 샌델의 여정은 공리주의에서 시작하여 칸트의 도덕철학과 롤스의 정의론을 거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정의론으로 마무리된다. 중립적인 소개를 지향하지만, 이러한 여정 자체에 흔히 ‘공동체주의자’로 알려진 샌델 자신의 입장과 의도가 함축돼 있다.
공리주의자들에 따르면 옳은 행위란 공리(유용성)을 극대화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곧 공리란 쾌락을 극대화하고 고통을 최소화하는 것이다. 쾌락을 좋아하고 고통을 싫어하는 인간의 기본 성향을 도덕적․정치적 삶의 기초로 삼고자 한다. 벤담에게 공동체란 허구이며 존재하는 건 개인들의 총합이다. 그는 이렇게 묻는다. “우리가 이 정책에서 얻는 이익을 모두 더한 뒤에 총비용을 빼면, 다른 정책을 펼 때보다 더 많은 행복을 얻을 수 있을까?” 이렇듯 모든 사안에 대한 계산가능성을 전제로 함으로써 공리주의는 도덕철학보다는 ‘도덕과학’을 자임한다. 샌델은 이러한 입장에 대한 반박으로 모든 가치를 돈으로, 비용․편익 분석으로 환원할 수 있는가란 의문과 함께 공리주의가 개인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한다. 가령 로마의 원형경기장에서 그리스도인을 사자 우리에 던져놓고 구경꾼들이 환호하며 쾌감을 느낀다면 공리주의자들은 어떤 근거로 그런 행위를 비난할 수 있을까.
한편 자유지상주의는 인간의 자유를 명분으로 모든 규제에 반대한다. 개인의 자유는 기본권으로 자신의 소유물은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나는 나 자신과 나의 노동도 소유하며 이러한 권리는 아무도 간섭하거나 침해할 수 없다. 그런 관점에서 자유지상주의자들은 과세(내 수입을 가져가는 행위)에서 강제 노동(내 노동을 가져가는 행위)과 노예제(나는 나를 소유한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행위) 사이에서 연속성을 발견한다. 즉 정부의 과세는 강제노동이나 노예제만큼이나 부도덕하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 대해 샌델은 안락사나 식인 행위에 대해 생각해보자고 말한다. 실제로 2001년 독일의 한 남성이 먹힐 의향이 있는 사람을 찾는 광고를 낸 후 자원자 한 사람을 토막 살해하여 일부를 먹어치운 사건이 발생했다. 자유지상주의자는 합의에 의해 이루어진다면 이러한 식인 행위에 대해서 부당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인간 자체를 목적으로 간주하라고 주장하는 칸트는 행복 극대화나 미덕의 장려로서의 정의론에 반대한다. 칸트에게 도덕은 정언명령에 따른 자유로운 행동만을 가리킨다. 특정한 이익이나 욕구는 도덕의 기초가 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다. 이를 계승하여 롤스는 기본적인 자유가 모든 시민에게 평등하게 제공되어야 한다는 평등원칙과 소득과 부의 불평등한 분배는 그 이익이 사회적․경제적으로 가장 어려운 사람들에게 돌아가는 쪽으로 이루어져야한다는 차등원칙을 사회적 정의를 위한 기본원칙으로 제시한다. 롤스는 분배의 정의가 미덕이나 도덕적 자격을 포상하는 게 아니라고 주장하는데, “노력하고 도전해서 소위 자격을 갖춘 사람이 되려는 의지조차도 행복한 가정과 사회적 환경의 영향”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떠한 성공도 스스로의 공으로 돌릴 수 없게 되며, 이것이 롤스식 공평주의의 귀결이다.
반면에 가장 오래 전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정의란 사람들에게 그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주는 것이다. 정치에 본질적인 목적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현대적 관점과는 달리 아리스토텔레스는 좋은 시민을 양성하는 것이 정치의 목적이라고 생각한다. 정치공동체의 목적은 좋은 삶이며 사회생활의 여러 제도는 그것을 달성하기 위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그는 시민적 자질이 가장 뛰어나고 무엇이 공동선인지 가장 잘 파악하는 사람에게 최고의 공직과 영광이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치란 어느 정도는 시민의 미덕에 영광과 포상을 안겨주기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칸트나 롤스는 무엇이 선이고 좋은 삶인지 선택할 여지를 주지 않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을 거부한다. 그리고 그런 관점에서 ‘중립을 지키는 국가’와 ‘자유로운 선택권을 지닌 자아’를 지지한다. 하지만 샌델이 보기에 그렇듯 선택의 자유만 확보하는 것으로는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 수 없다. 좋은 삶의 의미를 함께 고민하는 노력이 거기에 덧붙여져야 한다. 도덕을 회피하는 정치보다 도덕에 개입하는 정치를 그가 더 옹호하는 이유다. 물론 이러한 결론보다 중요한 것은 정의란 무엇인가란 질문을 던지고 그 해답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시민의 미덕은 그러한 여정을 통해 길러지고 단련될 것이다.
10. 11. 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