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작가 막심 고리키의 단편소설을 찾아 읽으려고 《고리키 단편집》(최윤락 역, 지식을만드는지식), 《은둔자》(이강은 역, 문학동네), 《어머니/밑바닥/첼카쉬》(최홍근 역, 동서문화사) 이 세 권의 책을 들여다봤다. 《고리키 단편집》에는 고리키의 첫 단편 「마카르 추드라」와 대표작 「첼카쉬」 등 총 7편이 수록되었다. 《은둔자》는 초기, 중기, 후기 때 발표한 대표작을 엄선한 단편선집이다. 그 대신 「마카르 추드라」는 없다. 《어머니/밑바닥/첼카쉬》는 앞의 두 번역본에 소개되지 않은 작품이 있다.

 

 


* 목차

 

《고리키 단편집》 :
마카르 추드라, 이제르길 노파, 첼카시, 심심풀이, 코노발로프, 스물여섯 사내와 한 처녀, 인간

 

《은둔자》 :
거짓말하는 검은방울새와 진실의 애호가 딱따구리, 첼카시, 이제르길 노파, 스물여섯 명의 사내와 한 처녀, 첫사랑, 은둔자, 카라모라

 

《어머니/밑바닥/첼카쉬》 :
첼카쉬, 아르히프 할아버지와 렌카, 에밀리안 필랴이, 매의 노래, 나의 동행자, 어느 가을날, 이제르길리 노파, 마카르 추드라, 단추 때문에 생긴 일, 두 친구, 심심풀이, 코노발로프, 스물여섯 사내와 한 처녀, 인간

 

 


세 권의 책을 다 같이 읽다가 정말 황당한 사실을 발견했다. 《고리키 단편집》과 《은둔자》에 수록된 「첼카쉬」와 「이제르길 노파」 분량에 차이가 있었다. 두 권의 책을 번갈아가면서 꼼꼼하게 읽어봤는데, 《고리키 단편집》에 일부 내용이 빠진 사실을 발견했다. 심각한 점은 문장 몇 줄만 빠진 게 아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등장인물의 대화 일부가 통째로 삭제되었다. 《고리키 단편집》의 번역이 얼마나 최악인지 직접 눈으로 확인해보시라.

 

 

 

Scene #1

 

 

 

 

 

 

* 사진 설명 : 《고리키 단편집》 49~50쪽. 가난한 도둑 첼카쉬가 돈이 청년 가브릴라에게 돈 벌 기회를 주기 위해 함께 일하자고 제안한다. 두 사람은 어두운 밤에 보트를 타고, 값비싼 물건을 훔치려고 한다.

 

 

 

 

 

《고리키 단편집》에서 삭제된 내용은 밑줄로 그었다.

 

 

 

 

 

 

 

* 사진 설명 : 《은둔자》37쪽, 41쪽. 첼카쉬는 가브릴라와 같이 일하기로 한 뒤에 선술집에서 술을 마신다. 가브릴라는 술에 취해 뻗어버린다. 《은둔자》37~41쪽은 첼카쉬와 가브릴라가 선술집에서 술 마시는 장면이 있다. 그런데 《고리키 단편집》은 이 장면이 삭제되었다.

 

 

 

 

Scene #2

 

 

 

 

 

 

* 사진 설명 : 《고리키 단편집》 60~61쪽. 첼카시는 밤바다 풍경을 감상하면서 잠시 회상에 젖는다. 그러고는 혼잣말로 중얼거리다가 잠을 청한다. 상황 전개가 이상하지 않은가. 이유가 있다. 첼카쉬가 잠 자기 전 상황이 '누군가'에 의해 사라졌기 때문이다.

 

 

 

 

 

 

 

 

 

《고리키 단편집》에서 삭제된 내용은 밑줄로 그었다.

 

 


* 사진 설명 : 《은둔자》 60~62쪽. 배에 노를 젓던 가브릴라는 첼카쉬의 명상을 방해하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물어본다. 일행이 향하는 곳은 장물아비 세엘카시가 있는 배. 이곳에 일행은 늦은 잠을 청한다. 《고리키 단편집》에 세엘카시가 잠깐 등장하는 장면이 삭제되었다.

 

 

 

 

 


《고리키 단편집》은 ‘원전으로 삼아 옮긴 것’이라고 알렸을 뿐, 발췌 번역한 사실을 언급하지 않았다. 원래 지만지 출판사는 원전을 발췌한 번역본을 출판하면 ‘편집자 일러두기’를 통해서 발췌한 사실을 알렸다. 발췌 번역을 완역본이라고 거짓말하는 비양심적인 출판사보다 나은 행동이다. 그러나 지만지는 《고리키 단편집》을 원전 번역으로 속인 채 펴냈다. 「이제르길 노파」 경우 번역 누락이 상당히 심하다. 이제르길 노파의 처녀 시절 이야기만 삭제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은둔자》와 같이 읽지 않았으면 몰랐을 것이다. 번역 누락된 부분이 한두 번 정도가 아니다.

 

 

 

 

 

 

 

 

 

 

 

 

 

 

 

 

 

 

더욱 놀라운 점은 《고리키 단편집》의 역자 최윤락 씨는 고리키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노어노문학 전공자다. 그리고 열린책들 출판사에서 나온 고리키의 장편소설 《어머니》를 번역하기도 했다. 고리키를 전공한 사람이 고리키 작품 번역을 제대로 하지 않은 것이다. 엉터리 번역을 묵인하고 버젓이 책을 판매한 출판사는 독자를 기만하는 태도다. 이런 일이 생기면 우리 독자는 책 앞에서 지갑을 열 이유가 없다.

 

가끔 출판사 직원이 알라딘 회원 또는 비회원으로 접속해서 ‘비밀 댓글’을 다는 경우가 있다. 혹시 내 글을 본 지만지 출판사 직원이 비밀 댓글을 달 수 있다. 내 블로그에는 비회원으로 댓글을 달 수 없도록 했다. 내 글에 문제가 있어서 반문하고 싶으면 비밀 댓글로 설정하지 말고, 떳떳하게 공개 댓글을 달았으면 좋겠다. 해당 출판사 책의 악평을 비공개해달라고 요구하는 치졸한 내용의 댓글은 사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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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ient-guest 2016-03-02 0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한참 중고로 이런 책을 샀었어요. 그런데, 뭔가 내용도 부실하고 이상해서 보니까, 출판사 멋대로 발췌번역하고 편집한 것이더군요. 그때의 분노란..-_-: 저도 이젠 그래도 믿을 만한 출판사의 고전번역을 사서 봅니다. 예전엔 이런 일이 더 많았을 것 같아요.

cyrus 2016-03-02 20:07   좋아요 0 | URL
지만지 책을 고르기 전에 속표지 앞에 발췌 번역을 했는지 안 했는지 확인할 수 있어요. 발췌 번역본이면 `편집자 일러두기`라고 해서 발췌 번역한 사실을 밝히거든요. 그런데 <고리키 단편집>은 아니었어요. 정말 황당했습니다.

stella.K 2016-03-02 1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이런 걸 잡아내다니! 훌륭하다.
앞으로 고리키의 작품을 읽는다면 문학동네걸 읽어 줘야겠군.

cyrus 2016-03-02 20:08   좋아요 0 | URL
네, 믿고 읽을 만한 고리키 단편선집으로는 <은둔자>와 <대답 없는 사랑>이 좋습니다. 두 권 다 문학동네 출판사에서 나왔어요. 번역자가 이강은 씨인데, 고리키 문학 전공자예요.

서니데이 2016-03-02 1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같은 책의 번역자가 다른 여러 권을 보는 것도 좋겠네요.
cyrus님, 좋은 저녁시간 되세요.
오늘도 퀴즈 준비합니다. ^^

cyrus 2016-03-02 20:09   좋아요 1 | URL
다른 번역본을 참고하는 건 좋은데, 어떤 비양심적인 번역자는 문장을 교묘하게 바꿔서 표절합니다.

짜라투스트라 2016-03-02 2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대단하십니다.^^ 개인적으로 지만지에서 한국에 번역되지 않은 책들을 많이 번역해서 꽤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기는 한데 <고리키 단편집>에 그런 문제가 있었군요.

cyrus 2016-03-03 17:54   좋아요 0 | URL
처음에 지만지가 듣도 보지 못한 고전을 번역해주길래 선호했는데, 이번 번역본을 보면서 많이 실망했습니다.

레삭매냐 2016-03-03 17: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직원들을 동원해서 그런 해괴한 일도 하는군요 하 하

cyrus 2016-03-03 17:55   좋아요 0 | URL
발췌 번역이라고 분명하게 알려줬으면 이런 문제점이 생기지 않았을 겁니다. ^^

시이소오 2016-03-03 2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만지는 지들 멋대로 편집해 놓고 책값은 어이없을 정도로 비싸요. 참 마음에 안들어요. 사이러스님 덕분에 출판사가 각성했으면 좋겠네요^^

cyrus 2016-03-04 19:44   좋아요 1 | URL
출판사 직원들은 이런 조용한 곳에 잘 오지 않습니다. 일부 출판사만 알라딘에 미스터리 회원을 심어놓는다거나 가끔은 관찰하러 들어옵니다. 지만지는 이 글이 있는지 모를거예요. 해당 회사 홈페이지 게시판에 알리려고 했는데 독자용 게시판을 찾지 못했습니다.
 
고리키 단편집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막심 고리키 지음, 최윤락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2년 4월
평점 :
절판


 

 

고리키의 대표작 ‘첼카쉬’와 ‘이제르길 노파’의 일부 내용을 제멋대로 삭제한 번역본. 고리키 전공자가 고리키의 소설을 성의 없이 번역해서 더욱 놀라웠습니다. 우리나라에서 톨스토이, 체호프보다 인지도에서 완전히 밀리고, 엉터리 번역으로 푸대접받는 고리키가 안습입니다. 번역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지 확인하고 싶으면 문학동네 출판사의 《은둔자》와 비교해보세요. 단, 자기 주변에 화기 도구가 있는지 잘 살펴보세요. 무성의한 번역본으로 불장난하면 밤에 오줌 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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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16-03-01 2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켁.

stella.K 2016-03-02 1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화기도구! 오줌!ㅋㅋㅋㅋㅋ
그런데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도 의외로 번역본이 많지 않더군.
민음사나 문동 같은 메이저 출판사에서 한 번 나올 법도한데
아직까지도 안 나오고 있다는 거야.
그나마 동서문화사판과 잘 알려지지 않은 출판사가 고작인데
좀 이상하더군. <부활>아니 <안나 카레니나>는 나오면서 말야.

cyrus 2016-03-02 20:03   좋아요 0 | URL
제 생각인데 석영중, 박형규, 윤우섭 같은 분들이 우리나라에 많이 있어야하는데, 번역하는 사람의 수가 많지 않아요. 러시아어과 전공한다고 해서 번역가의 길을 가는 사람이 드물어요. 그러니까 번역 경험이 전무한 러시아어과 전공자가 번역을 하는 일이 생기는 것 같아요.

개시끼 2016-03-02 1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만지 책값도 비싼데...그렇군요ㅠㅠ

cyrus 2016-03-02 20:05   좋아요 0 | URL
지만지 출판사의 발췌 번역본 가격도 조금 비싸죠. 반면에 동서문화사는 저렴한 가격으로 어설픈 번역본을 내놓습니다. 책값이 싸다고 해서 책의 수준이 좋다고 볼 수 없어요. ^^;;

레삭매냐 2016-03-03 17: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만지 발췌본은 정말 취급하지 않습니다.

아예 살 생각도 안하는 거죠 뭐.

cyrus 2016-03-03 17:56   좋아요 0 | URL
발췌본치고는 책값이 조금 비싸죠... ^^;;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에 보면 주인공 아드소가 수도원 장서관 내부에 놀라는 장면이 나온다. 거대한 미로로 묘사된 2차원의 장서관 내부는 낭만주의 시대의 대표적 화가이자 건축가인 피라네시의 스케치를 재현한 듯 수많은 계단과 다리로 복잡하게 얽힌 3차원의 비밀스러운 공간으로 구현되어 있었다. 그 기이한 구조를 기억하는 독자들은 예의 장서관이라는 대상에서 대단히 폐쇄적이며 종교적 신비감과 더불어 뭔지 모를 중압감에 휩싸인 그 시대의 지식에 대한 태도를 엿볼 수 있다.

 

그런데 장서관 풍경만 본다고 해서 중세의 텁텁한 공기를 제대로 느낄 수 없다. 이건 소설 일부에 불과하다. 에코는 《장미의 이름》을 완성하기까지 10여 년의 세월을 보냈다. 중세의 시대적 배경을 더욱 생생하게 표현하기 위해 종교적 지식을 쌓았으며 의학 공부도 새롭게 시작했다고 한다. 중세 철학은 말할 것도 없고 당시 수사도들의 의상을 묘사하기 위해 몇 달간을 도서관에 파묻혀 지냈다. 《장미의 이름》은 중세 역사에 해박한 에코가 자신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한 소설이다. 중세를 생생하게 복원한 《장미의 이름》을 읽어 보지 않고, 시공사 출판사의 ‘에코의 중세 컬렉션’에 눈독을 들이는 독자들에게 당부한다. 두꺼운 양의 책을 소화해낼 자신이 없으면, 《장미의 이름》 독서부터 먼저 시작하는 것이 좋다. 이건 에코를 위한 예의다. 왜 쉬운 길을 내버려두고 높이 솟아오른 산에 올라가려고만 하는가.

 

《장미의 이름》 1권의 ‘6시과’ 이야기는 윌리엄 수도사가 프란체스코회의 우베르티노 수도사를 만나는 장면이 핵심이다. 이전 장면은 아드소의 서술로 되어 있다. 윌리엄과 동행한 아드소는 우베르티노를 만나러 가는 도중에 교회 문전과 기둥 장식을 만난다. 아드소는 교회 장식물을 관찰하듯이 구경하면서 연신 감탄한다. 속독하는 독자들은 이 장면을 그냥 훌쩍 넘겼을 것이다. 사실 나도 예전에 이 장면을 주마간산으로 보기만 했다. 하지만 에코가 중세에 낯선 독자들을 엿 먹이려고, 혹은 일부러 책의 분량을 늘리려고 채워 넣은 것이 아니다. 즉, 교회 장식에 대한 아드소의 서술은 이 소설의 불필요한 장면이 절대로 아니다. 중세 기독교 도상학을 이해해야만 아드소처럼 중세를 오감으로 느낄 수 있다.

 

아드소는 사자 형상이 새겨진 기둥의 인각을 발견한다. 그리고 사자 인각에 대한 인상을 서술하기 시작한다.

 

 

내 눈은 노인들의 발치에 장미꽃처럼 피어난 창들의 균형 잡힌 리듬에 따라 움직였고, 박공의 삼각면을 떠받치고 있는 중앙 기둥에 인각된 형상에 이르렀다. 무엇이었을까? 걷잡을 수 없는 분노에 사로잡힌 듯, 한 덩어리로 어우러진 세 쌍의 사자가 전하려는 상징적 의미는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이들 사자는 뒷발을 대지에 박고 앞발로는 동료의 곱슬곱슬한 갈기를 그려쥔 채 이빨을 드러내고 위협적으로 으르렁거리는 형태로 덩굴 더미에 휩싸여 기둥의 몸체에 붙어 있었다. 이들 사자의 인각은, 악마적인 사자의 본성을 순치하여 보다 나은 존재로 변용시키는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는 것 같았다.

 

(2002년 구판 《장미의 이름》 1권 89쪽)

 

 

 

중세 사람들은 자연을 창조주가 만들어 낸 피조물로 여겼다. 그래서 중세 기독교도들은 동물이나 식물의 습성에 창조주가 부여한 의미가 숨겨져 있다고 해석했다. 이러한 내용은 기독교적 상징으로 체계화되었고, 신앙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근거가 되었다. 이렇듯 아드소 역시 사자의 본성에서 종교적 의미를 찾으려고 탐색한다. 하지만 각각의 종파마다 자연 대상을 보는 시각에서 상반된 차이가 있었다. 전국 곳곳에 혼재된 기독교 상징들을 하나로 통일시켜 줄 ‘박식한 자’가 있어야 했다.

 

 

 

 

 

 

 

 

 

 

 

 

 

 

 

 

 

 

 

중세 사람들이 보고, 말했던 수많은 상징적 의미들을 좀 더 체계적으로 집대성한 책이 바로 《피지올로구스(Physiologus)》다. 피지올로구스는 ‘자연에 대해 박식한 자’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다. 이 말은 원래 익명의 저자를 뜻하는 이름이었다. 판본이 수백 년 동안 보급되면서부터 책의 이름으로도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현존한 것 중에서 가장 오래된 피지올로구스는 5세기 무렵 에티오피아에 나온 판본이다.

 

기독교들은 피지올로구스를 통해서 하느님의 섭리에 어긋나는 해로운 자연의 피조물을 분류하여 경계했다. 이들은 악마에 가까운 존재로 알려지게 된다. 아드소는 악마의 짐승들이 나열된 장식을 구경하게 되는데, 마치 무서운 환영을 목격한 것처럼 공포심을 느낀다.

 

 

악마의 우화집에 등장하는 모든 짐승들이 추기경 회의를 위해 모인 듯, 옥좌를 향해 영광의 노래(자신들에게는 패배를 뜻하는)를 부르며 옥좌를 보호하고 있다. 판 무리, 양성 동물들, 손가락이 여섯인 축생들, 세이네레스 무리, 켄타우로스 무리, 고르곤 세 자매, 하르피아이, 인쿠부스, 용어(龍漁) 무리, 미노타우로스, 스라소니, 표범, 키마이라, 콧구멍으로 불을 뿜는 카이노팔레스, 악어, 꼬리가 여럿이고 몸에 털이 난 도마뱀 무리, 도롱뇽, 뿔 달린 살모사, 거북이, 구렁이, 등에 이빨이 나 있는 양두수(兩頭數), 하이에나, 수달, 까마귀, 톱니 뿔이 달린 물 파리, 개구리, 그리폰, 원숭이, 루크로타, 만티코라, 독수리, 파란드로스, 족제비, 용, 후투티, 올빼미, 바실리스크, 최면충(催眠蟲), 긴귀곰, 지네, 전갈, 도마뱀, 고래, 두더지, 올빼미도마뱀, 쌍동(雙胴) 오징어, 디프사스, 녹색 도마뱀, 방어, 문어, 곰치, 바다거북. 이 모든 동물의 무리가 한 동아리가 되어 득실거리고 있었다.

 

(2002년 구판 《장미의 이름》 1권 91~92쪽)

 

 

이름이 생소한 짐승의 정체가 궁금한 분은 《장미의 이름》 1권의 주석을 참고하면 된다. 악마의 우화집에는 우리에게 친숙한 동물들이 나온다. 도마뱀, 올빼미, 독수리, 표범, 고래, 족제비, 수달, 까마귀, 개구리 등이 있다. 야행성 동물인 올빼미는 흔히 악의 상징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피지올로구스는 어두운 밤에 사는 올빼미의 습성을 어둠 속에서 헤매는 신자들을 인도하는 예수의 모습으로 이해했다. 표범은 잔꾀가 많은 사악한 짐승으로 알려졌지만, 피지올로구스는 표범의 용맹함을 예수의 상징으로 삼았다. 고래는 순진한 사람들을 유혹하는 향기를 내뿜는 사악한 괴물로 봤다. 개구리는 탐욕에 환장하면서 뛰어드는 타락한 인간을 상징했다. 동양에서는 원숭이를 신성한 동물로 여겼지만, 서양에서는 거의 악마로 취급받았다. 피지올로구스는 원숭이를 마귀가 하는 일을 똑같이 하는 존재로 설명했다. 이처럼 《장미의 이름》에 언급되는 동물들과 피지올로구스의 도상학을 같이 비교해보면 상징 해석의 차이점을 확인할 수 있다. 

 

 

 

 


《장미의 이름》뿐만 아니라 중세를 배경으로 한 소설 혹은 중세 문학을 읽을 때 기본적인 도상학 지식을 알고 있으면 본문에 나오는 종교적 상징들을 수월하게 이해할 수 있다. 《장미의 이름》 속에는 중세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내용이 암호처럼 숨겨져 있다. 우린 소설이 어렵다는 이유만으로 지금까지 에코의 암호를 발견하지 못한 채 ‘다 읽은 척’ 자랑했다. 줄거리는 다 알고 있어도, 에코가 텍스트 속에 숨겨놓은 상징들을 반 정도 이해하지 못했다. 《장미의 이름》은 한 번 다 읽고 마는 소설이 절대로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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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6-02-26 18: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로도 먼저 봤습니다..실감나더군요..중세의 수도원 ㄷㄷㄷ그 침울한 기분....ㄷㄷㄷ

cyrus 2016-02-26 18:19   좋아요 1 | URL
영화를 지금까지 총 세 번 봤습니다. 영화를 못봤으면 장미의 이름을 다 읽은 척 자랑하지 못했을 겁니다. ㅎㅎㅎ

책한엄마 2016-02-26 18: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희 집에 있지만 감히 엄두를 못 내고 있는 소설이죠.다 읽고 나서도 작가가 숨겨 놓은 보물찾기로 결국 소장할 수 밖에 없는 책인가 봐요.저도 빨리 중세 시대에 빠져들고 싶어요.^^

cyrus 2016-02-26 18:20   좋아요 2 | URL
`보물찾기`, 아주 적절한 비유입니다. 이래서 에코의 소설은 아무리 어려워도 읽고 싶어지게 하는 특별한 매력이 있어요. ^^

서니데이 2016-02-26 18: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yrus님 , 좋은 저녁 되세요.
오늘도 퀴즈 준비합니다.^^

cyrus 2016-02-26 20:29   좋아요 1 | URL
주말 잘 보내세요. ^^

2016-02-26 18: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미의 이름》을 읽다가 이 비기하학적인 두뇌로는 장서관의 구조가 도무지 생생하게 떠오르지 않아서 영화를 부랴부랴 찾아 봤던 경험이 떠오르네요. 얼마나 답답하고 궁금하던지...

cyrus 2016-02-26 20:31   좋아요 0 | URL
저도요. 5년 전까지만 해도 <장미의 이름> 1권도 다 못 읽었어요. 그러다가 영화를 먼저 봤어요. 소설을 다 읽기 전에 영화로 결말을 다 알게 되었어요. 미로의 도서관을 영상으로 직접 보고 싶었어요. ^^

fledgling 2016-02-27 23:50   좋아요 0 | URL
저도 책보고나서 영화를 한 번봤는데 영화는 도서관 미로를 완벽히 재현한 것 같지는 않던데요. 책과 비교해봐야겠지만 영화는 좀더 단순화한 것처럼 느꼈네요. 제한된 공간에서 책과 완벽히 구현하기는 힘드니...

cyrus 2016-02-28 17:20   좋아요 0 | URL
To. fledgling님 / 그렇군요. 생각해보니 소설 속 묘사와 영화 장면을 비교해본 적이 없어서 차이가 나는 줄 몰랐습니다. ^^;;

alummii 2016-02-26 1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가 있었는 줄 몰랐네요~~^^많이 배우고 가요~장미의 이름 어렵다던데 저도 조심스럽게 시작해봐야겠어요 평생 다섯번 읽으면 반 이라도 이해할 수 있을까요 ㅎㅎ

cyrus 2016-02-26 20:32   좋아요 0 | URL
읽다가 중도 포기한 것까지 합하면 저는 <장미의 이름>을 열 번 이상 펼쳐봤어요. <푸코의 진자>와 <전날의 섬>은 아직도 읽어보지 못했습니다. ^^;;

달팽이개미 2016-02-27 15: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리뷰를 읽으니 장미의 이름을 감히 읽어볼 엄두가 나지 않아요ㅠ 무섭;;두렵;; 그러네요..하..;

cyrus 2016-02-27 17:29   좋아요 1 | URL
어떤 독자는 《장미의 이름》이 《푸코의 진자》, 《전날의 섬》보다 내용이 쉬운 편이라고 평가했었습니다. 두려워하지 마시고, 한 번 도전해보세요. 읽을수록 에코의 해박한 지식 수준에 감탄하게 됩니다. ^^

yamoo 2016-02-27 2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미의 이름을 읽은 것만으로도 추천!
이런 멋진 리뷰를 남겨준 거에는 추천 10개!^^

cyrus 2016-02-28 17:22   좋아요 0 | URL
리뷰라기보다는 그냥 생각나는 대로 쓴 글입니다. 생소한 책이 소개된 내용인데도 좋게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

레삭매냐 2016-03-03 1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시 한 번 <장미의 이름>을 읽고 싶은데
쉽사리 도전할 의욕이 생기지 않는 것 같습니다.

예전에 이 영화를 한 번 보고 싶어서 오만 비디
오방을 다 뒤졌던 기억이 나네요. 영화는 책보다
훨씬 못했죠. 기대가 너무 컸던 걸까요 아마도.

cyrus 2016-03-03 17:57   좋아요 0 | URL
저는 영화 속 도서관 장면만 제외하면 나머진 보통이었습니다.
 

 

 

 

 

 

 

 

 

 

 

 

 

영국의 전래 동요 모음집 《마더 구스의 노래》에는 흥미로운 내용의 동요가 많다. 나 혼자 알기가 너무 아쉬워서 잘 알려지지 않은 동요 몇 편 소개해본다. 출처는 1996년 팬더북 출판사의 《마더 구즈의 노래》다.

 

 

 


* Little Tommy Tucker (리틀 토미 터커)

 

Little Tom Tucker

  Sings for his supper.

What shall we give him?

  White bread and butter.

How shall he cut it

  Without a knife?

How will he be married

  Without a wife?

 

리틀 토미 터커

  노래를 불러야 저녁을 주지.

무엇을 먹을 건가?

  흰 빵에 버터를 발라서.

어떻게 그걸 자를 건가,

  나이프도 없는데?

어떻게 부부가 될 건가,

  아내도 없는데?

 

 


아~ 나이프도 없고, 아내도 없고, 동렬이도 없고, 종범이도 없고...

 

그런데 이 동요, 잘 보면 성적 코드가 숨겨져 있다. 프로이트 식으로 해석하면 칼(knife)은 성기다. 그런데 토미 터커는 성기가 없거나 있어도 작았을 것(little)이다. 내가! 내가! 고자라니! 고자는 어떻게 부부가 될 수 있는 건데? 아내를 만날 수 없다. 아내가 있어도 그녀를 만족하게 해줄 수 없는데? 그래서 주인공은 ‘그것’이 작은 토미 터커였다.

 

 

 


* Three wise men of Gotham (고담의 세 명의 현자)


Three wise men of Gotham,

They went to sea in a bowl,

And if the bowl had been stronger,

My song had been longer.


고담의 세 명의 현자,

주발을 타고 바다로 나갔다.

주발이 조금만 더 단단했다면

내 노래도 계속되었을 텐데.

 


고담대구에 거주하는 나로서는 참으로 반가운(?) 동요다. 고담은 뉴욕 시의 별명, 만화 <배트맨>의 배경 도시로 많이 알려졌다. 원래는 바보들만 사는 영국의 마을 이름이었다. 그런데 고담은 진짜 바보들만 잔뜩 모여 있는 이상한 마을이 아니었다. 고담 마을 사람들의 바보 행세를 의미한다. 말 그대로 바보인 척한 것이다.


영국의 존 왕(1166~1216)은 고담을 관통하는 큰 도로를 건설하려고 했다. 그런데 도로를 건설하려면 고담 마을 주민들의 노동력이 필요했다. 마을 주민들은 ‘도로 건설 결사반대 모임’을 만든다. 그들은 일하지 않으려고 바보처럼 행동했다. 마을 주민들의 집단행동에 왕은 백기를 들었고, 결국에는 고담 마을을 우회해 도로를 만들었다고 한다. 미국의 작가 워싱턴 어빙은 19세기 초 뉴욕 시민을 비유해 처음으로 ‘고담’이라는 표현을 썼다.


대구 어르신들이 조금만 더 생각이 있었다면 새누리당의 쾌재가 멈추었을 텐데.

 

 

 


* Taffy was a Welshman (타피는 웨일스 사람)


Taffy was a Welshman, Taffy was a thief;

Taffy came to my house and stole a leg of beef;

I went to Taffy's house and Taffy was in bed;

So I picked up the Gerry pot and hit him on the head.

Taffy was a Welshman, Taffy was a thief;

Taffy came to my house and stole a piece of beef;

I went to Taffy's house, Taffy wasn't in;

I jumped upon his Sunday hat and poked it with a pin.

Taffy was a Welshman, Taffy was a sham;

Taffy came to my house and stole a piece of lamb;

I went to Taffy's house, Taffy was away,

I stuffed his socks with sawdust and filled his shoes with clay.

Taffy was a Welshman, Taffy was a cheat,

Taffy came to my house, and stole a piece of meat;

I went to Taffy's house, Taffy was not there,

I hung his coat and trousers to roast before a fire.


타피는 웨일스 사람, 타피는 도둑.

우리 집에 와서 쇠고기 한 덩어리를 훔쳐 갔다.

타피의 집에 갔더니 타피는 없었다.

타피가 우리 집에 와서 도가니 하나 훔쳐 갔다.

타피의 집에 갔더니 타피는 안에 없었다.

타피가 우리 집에 와서 밀방망이를 훔쳐 갔다.

타피의 집에 갔더니 타피가 자고 있었다.

나는 부삽을 집어 들어 그놈의 머리를 후려쳤다.

 


17~18세기 영국의 농부는 가난의 고통을 견디지 못해 이웃의 양식을 훔치는 도둑이 되거나 여행하는 방랑자들의 지갑을 노리는 강도가 되었다. 타피는 이웃의 물건을 상습적으로 훔치다가 끝내 이웃의 부삽을 맞고 영원히 잠들고 말았다. 빈곤의 그늘이 만들어 낸 암울한 시대상이 반영된 동요다.

 


타피 대신에 ‘웨일스의 전설’을 대입해서 노가바를 한 번 만들어봤다.

 

 

긱스는 웨일스 사람, 긱스는 도둑.

우리 집에 와서 내 여자 친구를 훔쳐 갔다.

긱스의 집에 갔더니 긱스는 없었다.

긱스가 우리 집에 와서 내 행복을 훔쳐 갔다.

긱스의 집에 갔더니 긱스는 안에 없었다.

긱스의 집에 갔더니 긱스가 젊은 여자와 함께 자고 있었다.

나는 부삽을 들어 내 형의 머리를 후려쳤다.

 

 

※ 라이언 긱스는 웨일스 출신의 축구선수다. 1990년부터 2014년까지 영국 프리미어리그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선수 생활을 한 전설적인 인물이다. 현재 친정 팀의 수석 코치로 활동 중이다. 선수 시절의 경력과 업적은 화려하나 선수 말미에 일어난 불륜 스캔들 때문에 완벽했던 명성에 한순간 금이 가고 말았다. 동생의 아내와의 불륜이 발각되어 막장 선수로 조롱을 받았다. 긱스의 막장 불륜에 군침을 흘리던 황색언론들은 긱스가 장모(!)까지 탐했다는 찌라시를 퍼뜨리기까지 했다. 재미로 만든 것뿐이니 긱스를 좋아하는 축구 팬들이 노가바 때문에 화를 내지 않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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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2-15 20: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2-15 20: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지금행복하자 2016-02-15 22:5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마더구스에상상을초월할내용들이 많습니다. 영어환경에 노출시킨다고 그냥 틀어놓을 노래들은 아닌것이 많구요. 명작동화에 대해서는 경계를 하면서 왜 이런 노래에는 무방비일까요. . . .

cyrus 2016-02-15 23:16   좋아요 0 | URL
네, 맞습니다. 나중에 그점에 대해서 글을 써보려고 합니다. 영감을 주셔서 고맙습니다. ^^
 
천진난만한 탕녀
시도니가브리엘 콜레트 지음, 조민정 옮김 / 문학동네 / 2000년 4월
평점 :
품절


 

 

 

 

 

 

* L’ingenue libertine (1909년 작)

 

 

시도니 가브리엘 콜레트는 네 편의 소설로 이루어진 <클로딘 시리즈>를 발표하여 자신의 문학적 재능을 확인했다. 그러나 여전히 그녀의 재능에 의심의 눈길을 보내는 독자들도 있었다. 콜레트가 남편의 필명으로 <클로딘 시리즈>를 발표한 것이 문제였다. 여성의 글쓰기를 인정할 수 없었던 보수적인 독자들은 콜레트의 실력을 믿지 않았다. 콜레트가 작가인 남편의 도움을 받아 글을 썼을 거라는 추측성 소문이 떠돌기도 했다. 콜레트는 파리 사회의 차가운 냉대를 견뎌 냈다. 이런 와중에 남편은 그녀의 속사정을 이해하지 못했다. 남편은 콜레트에게 <클로딘 시리즈>에 견줄만한 작품을 써내라고 강요에 가까운 제안을 했다. 콜레트는 자신이 재주를 부리고, 남편에게만 명성이 쏠리는 상황을 참을 수 없었다.

 

콜레트는 1906년에 남편과 이혼한다. 싱글이 된 콜레트는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으로 《천진난만한 탕녀(L’ingenue libertine)》(줄여서 ‘탕녀’)를 발표한다. 1904년 발표작 <민느(Minne)>와 이듬해에 나온 <민느의 방황(Les égarements de Minne)>을 합쳐서 새롭게 수정한 것이다. 콜레트는 《탕녀》가 전작의 명성을 뛰어넘지 못할 거로 생각했다. 그렇지만 콜레트는 그동안 억눌렸던 표현의 열망을 펜의 잉크 속에 응축시켜 《탕녀》에 마음껏 쏟아 부었다.

 

주인공 민느는 열다섯 살의 사춘기 소녀다. 몽상에 잠기는 것을 좋아하지만,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도발적인 발언과 행동을 하는 쾌활한 성격의 소유자다. 민느는 시골에서 태어나서 자란 소녀지만, 풋풋한 목가적 사랑을 원하지 않는다. 강렬한 쾌락이 느껴지는 위험한 사랑을 꿈꾼다. 소녀의 이상형은 살인 전과가 있는 불량배 패거리의 두목. 소녀는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에 대한 갈증을 몽상으로 해소한다. 민느보다 세 살 많은 사촌 앙투안은 민느와의 성격과 정반대다. 앙투안은 민느를 짝사랑하여 조심스럽게 자신의 진심을 고백한다. 그러나 민느는 늦은 밤에 몰래 약혼자를 만나고 다닌다는 거짓말을 하면서 퇴짜를 놓는다. 민느는 짜릿한 쾌락을 주는 사랑을 원할수록 몽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혼란에 빠진다. 여기까지가 책의 1부로 구성된 <민느>의 줄거리다.

 

책의 2부 <민느의 방황>은 정식으로 부부가 된 민느와 앙투안의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다. 이 작품에서도 민느는 사랑의 쾌락을 누리고 싶어 한다. 앙투안과의 결혼 생활 2년 사이에 세 명의 정부를 만나고 다녔다. 정숙한 아내를 원하는 앙투안은 민느의 바람기를 어느 정도인지 잘 알면서도 불만을 꾹 참고 있다. 한편으로 민느가 사춘기 시절의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했을까 봐 걱정하기도 한다. 민느는 남편 몰래 자크 쿠데르크 남작이라는 정부를 만난다. 남작은 민느보다 어린 스물 두 살의 젊은이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질투심이 많고, 애정 욕구가 강한 편이다. 어린아이가 떼를 쓰듯이 민느에게 구애를 해보지만, 번번이 거절당한다. 민느는 ‘어른아이’ 같은 남작을 좋아할 단순한 여자가 아니다. 남작은 민느의 쾌락을 채워주는 성적 노리개에 불과하다. 민느는 나체 상태로 젊은 정부를 유혹하여 노리개로 전락한 육체를 마음껏 유린한다.

 

<민느의 방황>은 <민느>보다 대담한 표현과 묘사가 많다. <민느>가 시골에서 자란 작가의 어린 시절을 반영한 소설이라면 <민느의 방황>은 도시적 관능에 익숙해진 세속적인 작가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러나 두 작품에 나타나는 민느가 원하는 것은 단 하나다. 그것은 성숙한 에로스(Eros)다. 여기서 말하는 에로스는 성적 욕망이 형성된 육체적 사랑이 아니다. 사랑받으려는 대상의 영혼에 생동감을 불어넣어 아름답게 해주는 진실한 감정을 의미한다. 성숙한 에로스가 결여된 성적 대상은 아름다움과 거리가 멀다. 오로지 쾌락만 좇을 뿐이다. 성숙한 에로스의 손길을 받지 못한 민느는 이성을 성적 대상으로 여긴다. 그리고 에로스의 부재를 견디지 못해 평범한 결혼 생활에 권태를 느낀다. 이를 참지 못해 자신의 이상형에 환상만 가득 부여한다. 이러한 민느의 태도는 플로베르가 만들어 낸 마담 보바리(Madame Bovary)와 유사하다. 그러나 두 여자의 결말은 극명하게 차이가 난다. 마담 보바리는 진실성 없는 사랑에 집착하는 바람에 불행한 파멸에 이른다. 민느는 쾌락으로만 수렴되는 자신의 삶에 의문을 제기한 끝에 그토록 만나고 싶었던 에로스가 어디 있는지 깨닫는다.

 

민느가 성숙한 에로스를 만나기까지 방황하는 일련의 과정들이 우리나라 정서상 맞지 않을 수 있다. 민느는 탕녀가 맞다. 그렇지만 변덕스럽고 자유분방한 여주인공의 성격과 ‘탕녀’라는 단어만 보고 벌써부터 눈살을 찌푸리는 반응은 곤란하다. 노골적인 묘사만 가지고 《탕녀》의 작품성을 인정하지 않는 독자가 있다면, 《마담 보바리》가 처음 나왔던 1857년 프랑스로 가보길 권한다. 그러면 《마담 보바리》를 부도덕한 소설로 여기는 비평가들이 당신을 작품 보는 안목이 있는 독자라고 치켜세울 것이다. 《마담 보바리》와 마찬가지로 《탕녀》도 여성의 쾌락에만 중점을 둔 소설이 아니다. 여성이 진정 원하는 사랑이 무엇인지 객관적으로 탐색하는 소설이다. 자주 읽어서 너무나도 뻔한 마담 보바리의 상실감이 지겹다면, 이제부터《탕녀》를 읽어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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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6-01-27 1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yrus님 , 좋은 저녁시간 되세요.^^

cyrus 2016-01-28 12:08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