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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진난만한 탕녀
시도니가브리엘 콜레트 지음, 조민정 옮김 / 문학동네 / 2000년 4월
평점 :
품절
* L’ingenue libertine (1909년 작)
시도니 가브리엘 콜레트는 네 편의 소설로 이루어진 <클로딘 시리즈>를 발표하여 자신의 문학적 재능을 확인했다. 그러나 여전히 그녀의 재능에 의심의 눈길을 보내는 독자들도 있었다. 콜레트가 남편의 필명으로 <클로딘 시리즈>를 발표한 것이 문제였다. 여성의 글쓰기를 인정할 수 없었던 보수적인 독자들은 콜레트의 실력을 믿지 않았다. 콜레트가 작가인 남편의 도움을 받아 글을 썼을 거라는 추측성 소문이 떠돌기도 했다. 콜레트는 파리 사회의 차가운 냉대를 견뎌 냈다. 이런 와중에 남편은 그녀의 속사정을 이해하지 못했다. 남편은 콜레트에게 <클로딘 시리즈>에 견줄만한 작품을 써내라고 강요에 가까운 제안을 했다. 콜레트는 자신이 재주를 부리고, 남편에게만 명성이 쏠리는 상황을 참을 수 없었다.
콜레트는 1906년에 남편과 이혼한다. 싱글이 된 콜레트는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으로 《천진난만한 탕녀(L’ingenue libertine)》(줄여서 ‘탕녀’)를 발표한다. 1904년 발표작 <민느(Minne)>와 이듬해에 나온 <민느의 방황(Les égarements de Minne)>을 합쳐서 새롭게 수정한 것이다. 콜레트는 《탕녀》가 전작의 명성을 뛰어넘지 못할 거로 생각했다. 그렇지만 콜레트는 그동안 억눌렸던 표현의 열망을 펜의 잉크 속에 응축시켜 《탕녀》에 마음껏 쏟아 부었다.
주인공 민느는 열다섯 살의 사춘기 소녀다. 몽상에 잠기는 것을 좋아하지만,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도발적인 발언과 행동을 하는 쾌활한 성격의 소유자다. 민느는 시골에서 태어나서 자란 소녀지만, 풋풋한 목가적 사랑을 원하지 않는다. 강렬한 쾌락이 느껴지는 위험한 사랑을 꿈꾼다. 소녀의 이상형은 살인 전과가 있는 불량배 패거리의 두목. 소녀는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에 대한 갈증을 몽상으로 해소한다. 민느보다 세 살 많은 사촌 앙투안은 민느와의 성격과 정반대다. 앙투안은 민느를 짝사랑하여 조심스럽게 자신의 진심을 고백한다. 그러나 민느는 늦은 밤에 몰래 약혼자를 만나고 다닌다는 거짓말을 하면서 퇴짜를 놓는다. 민느는 짜릿한 쾌락을 주는 사랑을 원할수록 몽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혼란에 빠진다. 여기까지가 책의 1부로 구성된 <민느>의 줄거리다.
책의 2부 <민느의 방황>은 정식으로 부부가 된 민느와 앙투안의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다. 이 작품에서도 민느는 사랑의 쾌락을 누리고 싶어 한다. 앙투안과의 결혼 생활 2년 사이에 세 명의 정부를 만나고 다녔다. 정숙한 아내를 원하는 앙투안은 민느의 바람기를 어느 정도인지 잘 알면서도 불만을 꾹 참고 있다. 한편으로 민느가 사춘기 시절의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했을까 봐 걱정하기도 한다. 민느는 남편 몰래 자크 쿠데르크 남작이라는 정부를 만난다. 남작은 민느보다 어린 스물 두 살의 젊은이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질투심이 많고, 애정 욕구가 강한 편이다. 어린아이가 떼를 쓰듯이 민느에게 구애를 해보지만, 번번이 거절당한다. 민느는 ‘어른아이’ 같은 남작을 좋아할 단순한 여자가 아니다. 남작은 민느의 쾌락을 채워주는 성적 노리개에 불과하다. 민느는 나체 상태로 젊은 정부를 유혹하여 노리개로 전락한 육체를 마음껏 유린한다.
<민느의 방황>은 <민느>보다 대담한 표현과 묘사가 많다. <민느>가 시골에서 자란 작가의 어린 시절을 반영한 소설이라면 <민느의 방황>은 도시적 관능에 익숙해진 세속적인 작가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러나 두 작품에 나타나는 민느가 원하는 것은 단 하나다. 그것은 성숙한 에로스(Eros)다. 여기서 말하는 에로스는 성적 욕망이 형성된 육체적 사랑이 아니다. 사랑받으려는 대상의 영혼에 생동감을 불어넣어 아름답게 해주는 진실한 감정을 의미한다. 성숙한 에로스가 결여된 성적 대상은 아름다움과 거리가 멀다. 오로지 쾌락만 좇을 뿐이다. 성숙한 에로스의 손길을 받지 못한 민느는 이성을 성적 대상으로 여긴다. 그리고 에로스의 부재를 견디지 못해 평범한 결혼 생활에 권태를 느낀다. 이를 참지 못해 자신의 이상형에 환상만 가득 부여한다. 이러한 민느의 태도는 플로베르가 만들어 낸 마담 보바리(Madame Bovary)와 유사하다. 그러나 두 여자의 결말은 극명하게 차이가 난다. 마담 보바리는 진실성 없는 사랑에 집착하는 바람에 불행한 파멸에 이른다. 민느는 쾌락으로만 수렴되는 자신의 삶에 의문을 제기한 끝에 그토록 만나고 싶었던 에로스가 어디 있는지 깨닫는다.
민느가 성숙한 에로스를 만나기까지 방황하는 일련의 과정들이 우리나라 정서상 맞지 않을 수 있다. 민느는 탕녀가 맞다. 그렇지만 변덕스럽고 자유분방한 여주인공의 성격과 ‘탕녀’라는 단어만 보고 벌써부터 눈살을 찌푸리는 반응은 곤란하다. 노골적인 묘사만 가지고 《탕녀》의 작품성을 인정하지 않는 독자가 있다면, 《마담 보바리》가 처음 나왔던 1857년 프랑스로 가보길 권한다. 그러면 《마담 보바리》를 부도덕한 소설로 여기는 비평가들이 당신을 작품 보는 안목이 있는 독자라고 치켜세울 것이다. 《마담 보바리》와 마찬가지로 《탕녀》도 여성의 쾌락에만 중점을 둔 소설이 아니다. 여성이 진정 원하는 사랑이 무엇인지 객관적으로 탐색하는 소설이다. 자주 읽어서 너무나도 뻔한 마담 보바리의 상실감이 지겹다면, 이제부터《탕녀》를 읽어 보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