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라 작가의 <저주 토끼>의 영역서 번역가 안톤 허의 엣세이. 제목과 표지의 이모지가 짜증을 담고 있는데 그 상황이 책 안에 나온다. 이렇게 까칠한 표지를 만들다니 정말 좀 다른 느낌.
저자는 (미국이나 영국 대학 나오고 한국은 쪼콤만 아는 교포 살람으로 예상했지만) 한국의 대학에서 복수 전공을 했고, 방송대도 나오고, 서울대 영문과 대학원에서 석사도 취득했다. 책읽기와 쓰기에 대한 애정은 일곱 살에 시작한 인생의 중심이라고. 스웨덴에서 태어나고 외국과 한국을 오가며 초중고를 다닌 것은 아버지 직장 때문이었다. (외고에서 제임스 조이스 읽다가 공부 안한다고 샘한테 맞았대) 게다가 한국 국적에 군대도 다녀오고 큰 부상으로 상이군인이란 이력은 전부 예상을 벗어난다.
서울대 영문과 대학원 입학시험에서 답안지를 영어로 쓰고 있자니 감독 교수가 한글로 쓰라고 하더란다. 퉁명스레. 하지만 시험지의 가이드 라인엔 한국어로 제한하지 않았고 그걸 표지의 말로 지적했더니 교수가 불쾌해 하더라고. 그런 상황을 저자는 아주 많이 겪었다. 차별과 무시, 그리고 무례함. 그걸 저자는 짚고 넘어가려 한다. 참거나 입닥치고 번역이나 하고 있지 않다.
외국의 책을 우리글로 번역하는 많은 번역자들과는 달리 한영 번역자는 외국의 기획사 몫까지 일을 하며 출판사에 책을 어필하며 적극적으로 출판에 참여한다. 실제 책상의 번역 작업은 그가 하는 일의 절반도 안된다고. 사람들과 부닥치며 자신의 일이 받아야 할 당연한 존중과 보답(돈!!!!!)을 위해 계속 싸우고 있다. 그런데 정작 우리 나라 공공기관과 대학교수들이 한영/한외국어 번역가들의 양성에 힘쓰기 보다는 오히려 언어적 인종적 차별주의를 답습하고 있다고. 저자가 그동안 고생하며 쌓인게 많았구나 알 수 있었다. 해외에 알릴/번역할 작품과 번역가 선정에도 불만을 토로한다. 외국서 팔리고 읽힐 만한 책을 고르는 게 맞다고! 아 당신들은 프루스트나 읽어! 라고 일갈한다. (웃음터짐)
우리나라 작가들의 멋진 문장과 이야기에 대한 칭송과 작업 이야기(듀나의 책 번역할 땐 맞은 편에 토끼가 앉아있다고 상상 ...) 등은 읽기 즐거웠고 부커상 후보 선정을 둘러싼 우리 언론의 편견에는 함께 한숨이 나왔다. (신경숙 작가 부분이 존경을 담아 여러번 나오지만 표절 시비는 언급되지 않는다.) 마지막 3부는 그가 외국의 대학과 행사에서 한 연설문이 실려있다. 멋진 비유(그 바이링귀얼 뱀이랑 이브 이야기 짱)와 위트와 욕설(딱맞게 쓰니 좋아보이는?;;;) 로 이 책에서 정말 하고 싶었던 말. 그는 진정한 독자고, 번역자고, 작가라는 것. 그에 한치 의심도 부끄럼이나 강제된 겸손을 갖지 않는다는 것. 오우 부라보! 책 읽고 박수쳤잖아요.
안톤 허 작가는 영어 소설(sf라고 한다 뇌과학 이야기도 나온다는데, 엄머, 나 이 책 읽으려고 뇌과학 책 읽은건가 싶고) 출판 계약도 했다고! 오우 부라보, 어겐!
다른 번역가 책과는 톤도 색깔도 다르다. 원서를 우위에 두고 따라가기 보다 그 목소리를 다른 언어로 살려내는 창작 작업을 강조한다. 영한 번역가의 일이 더 많은 부분을 담당하기도 하지만 이렇게 강하게 한국번역문화원에 쓴소리를 할 수 있는 건 활동무대가 다르기 때문이리라. 얼마전 벌어졌던 국제적 미출간 원고 갈취 사기극 이야기와 해외 출판계 이야기 등도 재밌게 읽었다. 덕분에 추석을 잠깐 잊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