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껴뒀던 <다시, 올리브>를 오늘에야 읽기 시작했는데, 첫 단편 <단속>에 나오는 잭이라는 노친네가 너무 밉상이다. 1권에서 이정도였나 기억을 되짚어봐도 가물거리는데, 죽을뻔한 걸 올리브가 살려주고 다독인 것만 생각났다. 그러다가 ... 팬티 얘기가 나온다.
잘해줬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잭은 평생 사각팬티를 입는 남자로 살았다. 몸에 딱 붙는 삼각팬티는 한 번도 입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메인주 크로스비에서는 사각팬티를 구하기가 불가능했다. 놀라운 일이었다. 그래서 벳시는 그가 입을 사각팬티를 사러 프리포트까지 갔다 왔다. (30)
우리집엔 나말고 남자만 셋이다. 이제 막내까지 덩치가 커져서 다들 사이즈 100 팬티를 입는다. 하지만 서로의 속옷을 구별하기는 어렵지 않다. 남편은 희거나 옅은 색의 헐렁한 스타일의 삼각, 큰애는 몸에 딱 붙는 삼각에 짙은 색. 큰 아이 덩치가 아빠랑 비슷해질 즈음 내가 빨래 구별하느라 정해버린 규칙인 셈이다. 그런데 애가 무던한 편이라 그냥 아무 말없이 입는다. 막내는 뚜렷하게 타이트한 드로즈. 내가 궁금해서 한 장 사서 줬더니 마음에 든다고 계속 드로즈 속옷만 고집한다. 이래서 속옷 빨래를 하는 날엔 네 사람의 속옷이 확실하게 구분된다. 시댁에서 살 땐 (아이들이 없던 시절이었지만) 시아버지랑 남편, 시동생 속옷을 구별하느라 신경이 쓰였는데 아버님은 헐렁한 사각인데 남편과 시동생 속옷은 비슷한 삼각이라 어머님께서 따로 색실로 표시를 해놓으셨다.
팬티는 계절별로 바꾸기도 하지만 뜨거운 물로 세탁을 하기에 겉옷보다 빨리 상하고 더 자주 교체해야 한다. 낡은 속옷 두장 쯤 버릴 때 세 장을 새로 사는 식으로 채워 넣는다. 화장실 휴지나 치약, 비누, 세탁 세제 등을 챙기는 것 만큼이나 정기적인 가족 생활의 리듬이다. 그중에서도 팬티는 가장 사적인, 내부의 옷이라 자신과 배우자/부모만 접근 가능한 특별한 품목이다. 잭 처럼 외도를 한 남편, 아무리 전립선 수술 후 회복기에 있다 하더라도, 그가 편안하도록 사각팬티를 사려고 멀리까지 운전해서 갔던 부인 벳시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그런데 잭의 부인은 남편의 팬티 말고도, 그 남자 톰의 팬티도 알고 있었다. 남편의 외도 이전부터, 오랫동안. 그도 사각팬티였을까. 하지만 톰의 부인이 아니었으니 톰의 속옷을 사러 백화점에 갈 일은 없었으리라.
날이 더워져서 매쉬 재질의 속옷들을 다시 꺼내놓았다. 날이 눅눅하니 내일도 빨래는 못하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