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2/400. 알랭 파사르의 주방 (크리스토프 블랭)
멋진 셰프의 멋진 요리를 멋진 그림과 글로 멋진 책으로 나왔...다만, 그 맛이 와 닿지가 않아서 답답하고 뭐 그랬다. 아, 이런 예술가도 있구나, 그런데 난 이 사람의 요리를 맛볼 처지는 아니구나, 그런데 부러운 대신 세상은 넓구나, 라고 다시 한 번 생각했다.
323/400. 표백 (장강명)
두 번 째로 읽는 장강명 작가의 소설이지만 4년 전 작품. 그래서인지 조금 더 젊고 생생하고 의욕이 과하게 넘친다. 작가 끼리의 분위기를 비교하는 건 바보 같지만, <그믐>이 김연수 분위기의 장강명이라면 <표백>은 김영하 분위기에 더 가깝다. 1부의 첫부분은 젊은이의 분노와 무력감이 빠르게 서술되는데 틱틱대는 주인공은 현대 소설에 등장하는 흔한 좌절남 캐릭터고 여주인공 (이라기보다는 뮤즈) 세연은 흔한 예쁘고 능력있고 까진 팜므파탈인데 자살까지 하고 한 발 더 나아가 5년 후 세상을 놀라게 하는 일련의 자살을 계획한다. 1부를 다 읽고, 아 짜증나, 이거 왭툰 <찌질의 역사> 같은 소설이야? 같은 작가 맞음? 전에 김영하가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에서 했던 분위긴데, 하면서도 2부를 계속 읽는 나는 조금 바뀐 분위기에 어, 조금 다른 가봐? 내가 성급했어, 미안, 하면서도 계속 기분이 나빠진다. 이야기나 문장이 재미없어서가 아니라 신선하지 않는 설정인데 작가가 참 재빠르게 독자의 반응을 한 단락 쯤 앞서서 계산해서 요리조리 조종하는 (혹은 피하면서 핑계를 갖다 대는) 기분이 들기 때문. 그러면서 글은 길게 이어지고. 이럴거면 앞에서 뭔 밑밥을 그리 두텁게 깔았을까. 거창한것도 없잖아. 더 시시해 보여. 찌질하잖아. 거창하게 사회 부조리를 비판하는 것 까지도 아니고, 개인의 회한을 파는 것도 아니고, 기벽을 일삼는 것도 아니고, 이번엔 초능력도 없는데, 말은 잘해요. 귀엽다고 보기엔.... 남주인공이 '강간' 이라던가 '천치'라는 말을 스스럼없이 해대는 게 보기 싫었다. 주인공의 대학시절, 고시원 시절, 그리고 공무원 시절과 이 자살극과의 대결 장면들은 여기 저기 거기로 작가가 독자를 몰아대는 좁다란 무대의 네 귀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영이가 집착하는 "의미없긴 싫어"와 "나 죽은 다음의 파국을 보고 싶어"는 어쩌면 <그믐>에서도 나온 것 같기도 하다. 호불호가 갈린다는 장강명의 다른 소설 <한국이 싫어서>도 이 소설의 다른 버전일지 모른다는 생각. 자, 올해는 여기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