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 년 전, 큰 아이를 입대 시키고 허전한 마음에 무어라도 해야겠다 생각했다. 내가 총을 들 수는 없으니 책을 읽겠다고 (무슨 일만 생기면 '대신' 책을 읽겠다는 이 마음, 이건 다른 사람들이 즐기지 않는 - 아, 여기 이곳 서재에서는 반대지만 - 취미를 무슨 고행인양 생색내는 버릇이다) 그것도 이왕이면 길고 지루하고 인기 없는 번역소설을 골랐더랬는데
기권
그러는 새 아이는 제대하고 학교로 돌아가 맘껏 복학생 티를 내며 신입생들 앞에서 주름 잡지도 못하고 집안에 머무른지 어언 일 년이 되었다. 시간은 화살처럼 흐른다.
다시 읽기로 했다. 이런 결심을 세우고 뽐내기 좋은 시기, 연초에.
알라딘에서 받은 스누피 달력에 하루에 삼십쪽 쯤 계산을 해서 써넣으니 반년을 채운다.
그 책. 작년까지 겨우겨우 1권의 2부까지 읽었던 그 이야기를 처음부터 다시 읽기로 했다.
우리 안의 질료는, 물질적 요소들은 우리의 사후에도 소멸되지 않고 부유하다 다른 질료나 '오성'을 만나서 시간을 무시하고 기억을 불러낼 수 있다고 프루스트 전공학자인 역자가 서문에 써놓았다. 그 유명한 마들렌느의 맛 이외에도 저 높이 솟은 교회 첨탑, 달큰한 시골집 방에서 맡던 냄새, 책에서 만나는 이야기의 한 꼭지 등은 습관이 무디게 했던 나를 어느 순간, 틈을 파고들어 의식이나 이성 저 너머에 있는 질료들과 연결시키고 순간 이동도 가능하게 한다.
사회적 카스트를 엄격하게 여기는 (스노비즘 쩌는) 부르주아 가정의 한가로운 부활절 휴가 일상들이 조금씩 보여진다. 섬세하고 민감하고 짜증도 부르는 화자와 그의 엄마, 외할머니의 독특하고 어쩐지 어설픈 모습들. 두번째로 읽으니까 좀 더 친근하게 읽힌다. 지난번에 잘 읽히지 않아서 민음사로 갔다가 어쩐지 길을 잃은 기분이었는데 다시 펭귄이다. 완역되었으니 천천히 나아가봐야겠다. 고색창연한 어휘들이 국어 고전문학 수업 생각도 불러온다. 남편을 '나의 벗님'이라고 부르는 젊은 엄마가 나오는 19세기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