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독서


 

 

흐릿하게 비에 이긴 빛이 유리를 넘지 못하고 다만 두드린다. 아무도 소리를 내지 않아서 비로소 모든 소리가 들리는 시간, 더벅머리 남자가 아직 책 앞에 앉아 있다. 묵독한다. 묵독에 특히 잘 녹는 새벽이 있다. 남자가 새벽을 녹인 활자를 들이켠다. 중력이 없는 활자는 마실수록 가벼워져서, 남자의 질량은 한없이 새벽으로 수렴해간다. 빗줄기가 식히는 것은 이 세상의 밑창. 낙하하는 것들의 착하고 꾸준한 음성이 거들면 읽기는 한결 수월하다. 왜일까.

 

수십억 년 전, 끓어 요동하는 지구를 식힌 많은 물들도 그랬을 것이다. 누군가 있어 천천히 굳는 지구를 차근차근 읽으며 바다와 대륙을 짚어 최초의 이름을 말해 보았을 것이다. 아직 우주는 새벽, 무한히 펼쳐지는 공간을 달리는 광자들이 빛의 속도로 그 소식을 전한다. 어느 은하 어느 항성의 작은 행성에 최초의 활자가 태어났대, 동시에 최초의 독자가 태어났대, 그래서 최초의 독서가 있었대, 우리는 기록한다, 우리는 전한다, 아직 우주는 새벽, 최초의 독서는 새벽에 있었어, 이제부터 무한대의 새벽이 올 것이고, 더 큰 무한대의 독서가 올 거야, 독서하는 이들이 어느 새벽에 우리의 목소리를 들을 거야, 우리의 목소리를 들으려면 새벽에 깨어 읽어야 해, 새벽에 읽어야 해, 새벽은 읽기 좋은 시간이야.

 

새벽은 읽기 위해 태어났어.

 



책을 읽으면 삶이 나아질까. 여기에는 "꽤 그럴 것이다"라고 답하고 싶다. 삶에 있어서 '농도''밀도'는 중요한데, 내 경우 그 밀도를 책을 읽거나 쓴 사람들과의 만남, 혹은 책을 둘러싼 수많은 내용을 통해 채우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을 잘 모르겠다. 이렇게 책 한 가지만 이야기하며 마치 책 바깥의 삶은 없다는 듯이 말하는 것을 싫어할 사람들이 많겠지만, 그 안에 완전히 들어오지 못하면 알 수 없는 세계가 있다. 책이 바로 그런 세계다.

_ 이은혜, 읽는 직업

 

책 읽기는 물을 건너는 것과 비슷하다. 강을 건널 때는 온몸이 젖을 수밖에 없지만 작은 개천을 건널 때는 물방을 튀는 정도에 그칠 것이다. 깊은 강을 건너다가는 몹시 아프거나 죽을 수도 있고, 작은 개울이라도 물이 불었을 때는 사고가 나기도 한다. 비가 온다면 어느 물가를 건너더라도 온몸이 다 젖을 것이다.

_ 정희진, 정희진처럼 읽기

 

독서는 인류가 피할 수 없는 것을 지연시키는 방법이다. 독서는 우리가 하늘을 향해 주먹을 휘두르는 방식이다. 이 장대하고 가능할 성싶지 않은 독서 계획이 우리 앞에 줄지어 있는 한, 우리는 숨을 거둘 수 없다. 나는 아직 빌레트를 다 읽지 못했으니 죽음의 천사에게 나중에 다시 오라 전하라. 거기에는 우리 모두 영원히 행복하게 살아갈 거라는 희망이 있다. 나 믿노니, 이것이 책이 인류에게 주는 가장 위대한 선물이다. 모든 생은, 최고의 생조차도, 끝은 슬프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죽는다. 우리가 듣고 싶은 목소리는 영원히 멈춰버린다. 책은 끝이 다를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드러낸다. 제인은 로체스터와 결혼할 것이다. 엘리자는 사악한 노예주 사이먼을 저지할 것이다. 장발장은 자베르를 이겨낼 것이다. 핍은 에스텔라의 짝이 될 것이다. 악한 이는 나가 떨어지고 정의로운 이는 번창하리라. 우리를 기다리는 아름다운 책들이 있는 한, 아직은 배를 돌려 안전한 항구를 찾을 기회가 있다. 포크너의 말마따나, 그저 살아남는 정도가 아니라 승리할 것이라는 희망이 있다. 아직도, 우리 모두 영원히 행복하게 살아갈 것이라는 희망이 있다.

_ 조 퀴넌, 아직도 책을 읽는 멸종 직전의 지구인을 위한 단 한 권의 책

 

 

--- 읽은 ---


238. 사람의 씨앗

전호근 지음 / 메멘토 / 2021


슬픈 것들은 슬퍼서 아름답고 아름다운 것들은 아름다워서 아름답고 아름답지 않은 것들은 아름답지 않아서 아름답다고 믿었던 시절이 있었다. 아름다운 게 뭔지도 제대로 모르면서. 쓸데없이 밝은 아이였다. 세상이 꽤 밝았다. 모든 것이 저마다의 이유로 아름다웠으므로, 모든 것을 가지고 시를 쓸 수 있었다. 시라는 게 뭔지도 제대로 모르면서. 누구나 사랑할 수 있었고 모든 책을 읽을 수 있었다. 돈을 많이 벌었고 많이 썼다. 사람들을 울렸고 사람 때문에 울었다.

 

그리고 이제 슬픈 것들은 슬프고 아름다운 것들은 아름답고 아름답지 않은 것들은 아름답지 않다. 아름다움이 뭔지 내게 알려준 것들을 적잖이 만났다. 더이상 시를 쓰지 않고, 못 읽는 책이 늘었다. 돈은 벌지 않는다. 그래서 적게 쓴다. 울리지 않고 울지 않는다.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렇지만 가끔은 모든 것이 아름답던 시절의 내 잔해가 고개를 든다. 그것은 피할 수 없는 것, 잊을 수 없는 것, 버릴 수 없는 것으로 내 안에 심어놓은 씨앗 같다. 사람의 씨앗을 심는 시기가 있다. 그 시기에 만난 슬픔들, 아름답고 아름답지 않은 것들, 시들, 사람들, 울린 사람과 울리는 사람들. 그런 것들이 씨앗이 되는 시기. 그리고 책. 가장 값싸고, 그런데도 가치가 크고, 그런데도 사랑받지 못하는 우리의 씨앗.

 

읽어야 할 책은 언제 읽어도 좋지만 어떤 시기에 읽으면 더욱 좋다. 인간의 인생 모든 국면에서 동등한 크기의 가치를 가지지는 않지만, 특정 시기에 읽기에는 좋은, 가치의 그래프가 어느 지점에서 송곳처럼 솟아오르는 책들이 있다.

 

사람의 씨앗을 심으면 사람이 난다. 사람이 뭘까. 세상에 여러 씨앗이 있을 건데, 그중 어떤 것이 사람을 사람으로 싹틔우는 씨앗일까. 전호근 선생님은 동양철학자다.

 

리뷰를 쓸까 하다가 그만한 분량이 안 나올 것 같아서 토막글을 써갈겼더니 아, 엉망진창이다.

 

내가 몇 달 동안 병으로 누워 있으면서 주자의 글을 한 번씩 보았는데 마치 바늘이 내 몸을 찌르는 것 같았고 잠이 확 꺠는 것 같았다.”

  정자중에게 보낸 편지글의 한 구절인데, 그가 선현의 글을 어떻게 대했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퇴계가 활동했던 때는 결코 태평성대가 아니었다. 오히려 사화와 당쟁이 격화되어 탁류가 도도히 흐르는 암흑의 시대였다. 하지만 밤이 깊을수록 별이 더욱 빛나는 것처럼 그는 그토록 어두운 시대에 자신을 수양함으로써 오히려 세상에 드러났다.

  책을 읽다가 바늘에 찔리는 듯한 느낌을 받은 적이 있는가? 그런 적이 없다면 아직 책을 한 권도 읽지 않은 것이다.

_ 전호근, 사람의 씨앗

 

 

 


239. 오후의 글쓰기

이은경 지음 / 큐리어스(Qrious) / 2021

 

놀리는 거 아니에요. 저 진지합니다. 글솜씨를 타고나지 않은 우리는 매우 여유롭고, 가능성이 높습니다. 지금부터 조금씩 점점 더 잘 쓰는 사람이 되는 거니까요.

  이를 악물고 쓰거나 잘 써야겠다고 불타오르는 만큼 잘 쓸 수 있다면 주먹을 힘껏 쥐어야 마땅하겠지만 글은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니에요. 최대한 겸손하고 조심스럽게 그러면서도 할 수 있는 한 정성을 쏟아 성실하게 뚜벅뚜벅 다가가야 해요.

  잘 쓰려고 노력하지 마세요. 잘 쓰고 못 쓰고에 신경 쓰지 마세요. 잘 쓰려고 노력하는 순간 힘이 들어가고, 며칠 못 가 그만두게 됩니다. 무언가를 글이라는 형태로 만들어낸다는 것 자체에 뿌듯함을 느끼세요. 완성한 글을 꼼꼼히 다시 읽으며 마음에 들지 않아 하거나 가까운 누군가에게 보여줘 괜한 핀잔과 지적을 받는 일이 없도록 하세요. 오늘도 다짐대로 쓰긴 썼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스스로 칭찬하세요. 그래야 잘 쓸 수 있어요. 잘 쓰려고 애쓰는 것보다 매일 쓰기 위해 노력하는 게 훨씬 빠른 길이에요.

_ 이은경, 오후의 글쓰기

 

컴퓨터라면 286이라는 물건부터 쓰기 시작헀으니 키보드를 두드리며 지낸 세월이 30년을 거진 다 채웠다. 그렇게 오래 치면 따로 연습하지 않아도 분당 800타는 두드리게 된다. 1초에 키 13개 이상을 누른다는 뜻이니까, 초당 4글자 정도를 만드는 속도다. 그렇다면 1분에 240, 10분이면 2,400, 한 시간이면 14,400자를 찍어낼 수 있다. 에누리해서 14,000자를 생산한다 쳐도, 200자 원고지 70장이다. 오타 고치고 뭐 어쩌고 해서 대략 20% 날린다고 봐도 55장이다. 하지만 시간당 55장 속도로 글자를 찍는 syo, 실제로 한 시간 동안 만들어내는 글은 15장이 채 되지 않는다. 말도 안 되는 효율.

 

문장마다 오래 머무르기 때문이다.

 

문장마다 오래 머무르기 때문이다.’라는 한 문장이 나오기까지 무슨 일이 있었을까. 처음에 그건 한 문장에 오래 머무르기 때문이다.’라는 문장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건/그건에서 그건을 골랐고, ‘그것은/그건에서 다시 그건을 골랐고, ‘그건뒤에 쉼표를 찍을까 말까를 고민하다 찍지 않았다, ‘한 문장에/문장에서에서 한 문장에를 골랐다가 이내 문장마다로 아예 고쳤다. ‘문장마다앞에 내가를 넣어서 그건 내가 문장마다 오래 머무르기 때문이다.’라고 쓰고 보니 그건을 빼고 싶어졌다. 그리고 나니 내가도 필요가 없을 것 같아서 치웠다. 여기까지 하고 나니 뒤에 있는 오래 머무르기 때문이다.’를 고쳐 생각해 볼 힘이 고갈되었다. 따라서 저 한 문장은 최종적으로 문장마다 오래 머무르기 때문이다.’로 결정되었다. 만약 앞 문단과 저 문장 사이에 한 줄의 공백을 넣지 않았다면, ‘문장마다앞에 접속사 하나를 넣기로 결정했을 거고, 그걸 위해 나는 내가 아는 모든 접속사들을 뒤져 하나씩 넣어보고 입말로 발음도 해봤을 것이다.

 

모든 문장이 이런 과정을 거치지는 않는다. 나도 사람이다. 그러나 적지 않은 문장이 저렇게 만들어진다. 그래서 글이 느리다.

 

syo는 천재가 아니다. 오히려 둔재에 가깝다. 다 만들어진 문장의 나열을 관람하는 분들의 눈에 어떻게 비칠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안다. 우선 나는 한 문장을 써내기 위해 지나치게 많은 시간을 갈아 넣어야 하기 때문에 천재가 아니다. 그리고 문장마다 오래 머무르기 때문이다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기껏 애를 써서 만들어 낸 문장들도 대체로 평범함의 범주에 갇힌다는 점에서 변명의 여지 없는 둔재다. 그리하여 매일 쓰는 일이 가장 어렵다.

 

그럼에도 이은경 선생님의 말씀은 따를 수가 없겠다. 그럴 마음도 없다. 나는 저렇게는 글솜씨를 키울 수가 없는 인간이 되었고, 이제 글쓰기 태도에 대한 책은 읽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배울 게 없어서가 아니라 배울 수 있는 게 없어서.

 

 

 


240. 모두의 데이터분석 with 파이썬

송석리, 이현아 지음 / 길벗 / 2019

 

소멸한 지 벌써 10년도 더 된 공대생 야성을 회복하고자 최근 코딩 책을 좀 보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이런 책이 뭐 어떻다 평할 수 있는 실력이 될 때까지는 책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으려고 한다. 앞으로도 한동안은 이 대사를 복붙할 예정입니다.

 

라고 세 번째 쓰고 있는데, 이제 조금씩 뭔가 이야기를 해도 되지 않나 싶은 마음이 꿈틀거린다.

 

 

 


241. 마르크스의 자본론읽기

최형익 지음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19

 

상품, 화폐, 시초축적, 임금노동, 잉여가치, 자본의 유기적 구성, 이윤율 저하의 경향적 법칙. 최형익 선생님은 여러 개념들 중 이 일곱 가지를 자본론을 관통하는 동시에 초심자가 알아둘 만한 것들로 생각하시는 듯하다. 보시다시피 세창출판사의 이 읽기시리즈는 작은 판형의 소책자라서, 소책자의 기능만 한다. 지나가야 한다. 지나가려고 읽는 책이다.

 

 

 

--- 읽는 ---

응답하는 사회학 / 정수복

안녕, 나의 작은 테이블이여 / 김이듬

여성, 타자의 은유 / 김애령

Do it! 파이썬 생활 프로그래밍 / 김창현

젠더 트러블 / 주디스 버틀러

마르크스 캐피탈 리딩 인트로 / 에르네스트 만델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 김영민

데이터 분석을 떠받치는 수학 / 손민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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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1-07-05 02:5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전 왠지 syo님은 문득 영감이 오면 슈루룩 써내려가는 스타일일 줄 알았는데(그게 아니면 이 독서량과 쓰기량이 설명이 안 된다..) 한땀한땀 수놓는 노력파였군요. 저도 문장마다 더 공들여 읽겠습니다.

syo 2021-07-05 17:20   좋아요 3 | URL
딱히 더 공들여 읽으실 필요까지요 ㅎㅎㅎㅎ
공을 들이고 말고가 아니라 퀄리티가 문제인 것이지요.....

유부만두 2021-07-05 05:4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천천히 읽어야 예의일 것 같아서, 이른 아침에, 두 번 읽었습니다. (전호근 저자의 책 담아가고요)

syo 2021-07-05 17:37   좋아요 3 | URL
ㅎㅎㅎㅎㅎ 아닙니다. 스크롤 휙휙 내리면서 드르륵 읽으시면 됩니다.
그것만으로 동방예의지국..

그렇게혜윰 2021-07-05 13:0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책도 시절 인연이 있는 것 같아요^^

syo 2021-07-05 17:38   좋아요 4 | URL
그러게요. 좋은 때 좋은 책 만나는 것 정말 좋은 일이지요^-^

행복한책읽기 2021-07-05 22: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요즘도 자본론을 읽는 사람이 있군요. 마르크스는 불멸?? ㅋ
글구요, syo님 책 제목 낳으셨네. <새벽은 읽기 위해 태어났어> 가즈아~~~~^^

syo 2021-07-07 11:02   좋아요 1 | URL
ㅎㅎㅎㅎㅎㅎ 마르크스 관련된 책은 아직도 꾸준히 나온답니다.
수염쟁이 맑선성님은 개론서나 연구서 같은 게 가장 활발히 나오고 있는 철학자 중 한명이지요.

scott 2021-08-06 15:4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소요님 이달의 당선 추카!!

소요님 새벽 독서 책들 모조리 장바구니 속으로~@@

syo 2021-08-08 12:21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 감사합니다.

그레이스 2021-08-06 16:4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축하합니다~♡

syo 2021-08-08 12:22   좋아요 0 | URL
그레이스 님도 축하합니다^-^

새파랑 2021-08-06 16:5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페이퍼의 표본! Syo님 완전 축하드려요^^

syo 2021-08-08 12:22   좋아요 1 | URL
페이퍼와 리뷰 둘 다의 표본 새파랑님도 축하합니다ㅎㅎㅎ

독서괭 2021-08-06 17:0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syo님 축하드려요^^

syo 2021-08-08 12:22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 늘 고맙습니다 독서괭님^-^

초란공 2021-08-06 17:2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syo축하드립니다~ 이과도 문과도 적성이 안맞아라고... 당황한 저는 그냥 책을 안읽어서 어디 끼어넣을 데가 없었다는 걸 인정하기로 했어요 ㅋㅋㅋ 그래서 책을 읽어보자 했는데 이제 노안이와서 ㅋㅋㅋ 문과와 이과 어디에도 안맞는 생으로 만족해야 할까봐요... 이제 syo님께 물어봐야겠네요. 대개 두 가지 질문이겠네요. 그 책 야합니까? 아니면 활자 큰가요? ㅋㅋ

syo 2021-08-08 12:25   좋아요 0 | URL
이과와 문과의 범주를 초월하신 것은 아닐까요?
그런데 초란공 님께서 하신 질문이 어떤 책에 대한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ㅎㅎㅎ

초란공 2021-08-08 12:49   좋아요 0 | URL
아^^ 책소개를 많이 해주셔서 syo님께 물어보면 좋겠다 생각했어요 ㅋ

초딩 2021-08-06 17:4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Syo님
이달의 당선 페이퍼 축하드립니다~

syo 2021-08-08 12:25   좋아요 1 | URL
아유 초딩님도 축하드립니다.
축하 분위기 영 어색하네요 ㅎㅎㅎ

초딩 2021-08-08 20:05   좋아요 0 | URL
어색해야 새롭지 않겠습니까 ㅋㅋ

이하라 2021-08-06 17: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syo님 이달의 당선 축하드려요^^

syo 2021-08-08 12:25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이하라님^-^

서니데이 2021-08-06 18: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syo 2021-08-08 12:26   좋아요 1 | URL
늘 감사합니다 서니데이님. ㅎㅎㅎ

황후화 2021-08-06 19: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 축하드려요 ^^

syo 2021-08-08 12:26   좋아요 2 | URL
아유 ㅎㅎㅎㅎ 감사해요 황후화 님^-^
 

 

리슨 투 더 파프리카

 

 

 

꿈을 꾼 건 오랜만이다.

 

꿈속의 나는 아는 사람 조금과 함께 모르는 사람 다수가 떠드는 공간에서 떠들고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말을 참 잘했는데, 그건 그들에게 그런 것들을 말할 자격이 있기 때문이었다. 꿈속의 나는 알 수 있었다. 단단한 성격의 A는 단호하게 말하지만 그 단단함과 단호함은 모두 무르고 들큼한 상처를 오래 눌러서 만들어 낸 것이지. 저토록 차분하게 말하는 B는 그 기적 같은 공감 능력으로 다른 마음을 넘나들며 얼마나 큰 파도들을 제 안에 눅여 왔을까. 도무지 실수하지 않고 모든 질문에 대답하는 C는 한 권을 읽어도 그 책의 모든 문장이 제 문장이 될 때까지 좌초하지 않고 되풀어 읽는다던가. 자기가 사랑하는 것에 대해 말할 때면 티끌만 한 누락도 보아 넘기지 않는 D의 촘촘한 목소리가 들리는구나. , 그럼 다음은 내 차롄데…….

 

머쓱한 표정으로(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입을 열었을 때, 입 밖으로 쏟아져 나오는 것은 소리가 아니라 파프리카였다. 사람들이 모두 나를 보고 있었다. 노란 파프리카였다. 바닥을 구르는 그것들을 보고 있자니 할 수 있는 말이 문득 생각났다. 나는 잠시 입을 다물고 숨을 골랐다. 사람들은 태연하고도 다정한 눈빛으로 내 입술을 응시하고 있었지 파프리카를 보고 있지 않았다.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그린 파프리카였다. 그것이 여름날 마법의 콩나무 줄기처럼 줄줄이 쏟아져 나왔다. 나는 마음이 급해져서 손짓 발짓을 동원해가며 말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파프리카를 뱉는 사람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고 생각했을까. 하지만 사람들은 입에서 나오는 파프리카는 물에서 나오는 물고기처럼 하나도 이상할 게 없다는 표정을 하고 간혹 고개를 끄덕여가면서 내 파프리카를 들었다. 할 수 있는 말을 겨우 찾았는데 그 모든 말이 고작 파프리카가 되고 보니 그제야 하고 싶은 말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나는 다시 입을 닫았다. 이제 다시 이 입을 열면 내가 정말 하고 싶은 말을 시작할 텐데, 그게 다른 무엇일 수는 있어도 파프리카일 수는 없을 텐데, 그럼에도 파프리카라면 이번에는 정말 슬플 텐데, 빨간 파프리카라 해도 참을 수 없이 외로울 텐데. 공간은 괴괴하고 내 입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빛에는 떨림이 없었다. 쏟아진 노랗고 파란 파프리카들은 자기들끼리 줄을 맞추더니 소리도 없이 계단 아래로 제 몸을 굴려 내려가고 있었다. 나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할 수 있는 말들과 하고 싶은 말들이 머릿속을 빙글빙글 돌았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늦은 장마가 온다고 해서,”

 


 

 

이처럼 아끼며 간직했던 많은 것을 내보냈던 시절이 있었다. 당신이 해변에서 손가락으로 그려준 상자 안에 세상 모든 것이 들어 있다고 믿었다. 나는 문 앞에서 밀물처럼 밀려오는 밤길을 나란히 걸어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_ 김이듬, 안녕, 나의 작은 테이블이여

 

매일 밤 꿈에 내가 만들 수 있을 것 같은 아주 크고 굉장하며 아름다운 조각들을 봐요. 손을 뻗으면 만질 수 있을 것처럼 너무나 선명해요. 제 상황은 점점 나빠지는데, 꿈은 점점 자라나요. 마치 그것들이 제게 <만들어 줘, 보여 줘, 존재하고 싶어>라고 요구하는 것 같아요. 그런데 그걸 단 하나도 못 만들까 봐 두려워요.

_ 스콧 맥클라우드, 조각가

 

방으로 돌아가서는 이불로 배를 덮고 누웠다. 오후가 되어서 무더웠는데도 발가락이 싸늘했다. 발을 북쪽에 두고 누웠기 때문인가 싶어서 발을 동쪽으로 머리를 서쪽으로 조금 움직여 두었다. 그렇게 누운 방향이 익숙하지 않아 다시 움직였다가 또다시 움직였다. 움직이길 계속하다 보니 본래 누웠던 방향으로 돌아와서도 어딘가 익숙지 않았다. 나침반의 바늘처럼 허리 부근에서 몸이 들린 채로 부들부들 흔들리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얼핏 잠들었다가 깼다가 하면서 두서없이 이것저것을 생각했다.

_ 황정은, 백의 그림자

 

 

 

--- 읽은 ---



233. 자기 자신을 좋아하게 되는 연습

야하기 나오키 지음 / 이정은 옮김 / 홍익출판미디어그룹 / 2021

 

의사들은 환자가 진료실에 들어오면 이렇게 문진부터 시작하는데, 그래야 적절한 처방을 내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병원을 찾은 환자 자신이 치료의 답을 가지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나는 이런 일이 일상적인 상황에서도 똑같이 작용한다고 믿습니다. 나 혼자 떠들어 댈 것이 아니라 상대의 상황과 필요를 먼저 물어보는 태도 말입니다.

  상대가 나와 생각이 다르다고 생각하면, 일단 그의 말을 들어봐야 합니다. 그러면 환자가 그렇듯이 그 사람이 스스로 문제 해결의 답을 말하게 됩니다.

  우리 사회는 생각이 다른 사람들끼리의 분쟁으로 얼룩져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모든 갈등은 남에게 상처를 주어 고통스럽게 하면 반드시 똑같은 고통을 받게 된다는 가르침을 잊어버렸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들입니다.

  내가 먼저 남을 인정하면 그것이 나에게 그대로 돌아오고, 내가 남을 배척하면 그 또한 나에게 그대로 돌아온다는 사실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_ 야하기 나오키, 자기 자신을 좋아하게 되는 연습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고 있지만 이런 뻔하디 뻔한 이야기만 잔뜩 쓰여있는 책을 좋아하게 되지는 않는 것 같다. , 모르는 이야기 좀 해줘.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요런 식상한 이야기들 말고.

 

 

 


234. 상표전쟁

신무연 외 지음 / 이담북스 / 2020

 

갑자기 이 책을 읽을 생각은 왜 든 것일까? 허허허. 좋은 책인지 아닌지 판단할 역량도 관심도 없어서 이번 독서는 이러구러 망한 것이다…….

 

 

 


235. 1년 만에 교포로 오해받은 김아란의 영어 정복기

김아란 지음 / 시대인 / 2019

 

Q4. 슬럼프는 어떻게 극복하셨어요?


A. 슬럼프라는 건 없었습니다. 물에 빠졌다고 생각해 보세요. 물 밖으로 나가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을 것입니다. 물에 빠져 헤엄쳐 나와야 하는 사람에게 슬럼프에 빠질 여유가 있을까요? 저는 물에 빠져 헤엄쳐 나와야 하는 사람처럼, 영어를 배워야겠다는 목적이 분명하고 강렬했습니다. 세상에 제가 보고 싶은 변화를 만들어내기 위해선 제가 영어를 잘해야 했으니까요. 그래서 슬럼프에 빠질 여유 따위는 없었습니다. 슬럼프는 사치입니다. 나약한 의지와 귀찮은 감정에 대한 구실 좋은 핑계일 뿐입니다. 슬럼프가 왔다고 느낀다면, 애초에 왜 영어를 배우기 시작했는지 그 목적을 생각하세요.

_ 김아란, 1년 만에 교포로 오해받은 김아란의 영어 정복기

 

대단히 노력해서 대단한 성과를 만든 대단한 사람이 쓴 대단한 책. 맨날 슬럼프니 뭐니 징징거리기 바쁜 syo는 얻어터지는 심정으로 일독함. 인용한 부분이 하필 이래서, 많이 비판받는 자기계발 담론과 큰 틀에서 다르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어떤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들은 자신의 성공에 대해 이야기할 때 대체로 저런 식으로 말을 한다. 그리고 선한 영향력을 퍼트리는 게 자신의 목표라고 말하더라. 선한 영향력. 세상에 변화를. 훌륭하고 멋진 말들이지만 그래서 때로 무섭다. 슬럼프는 사치다, 정신 똑바로 차려라 하는 호통과 섞이면 더욱 무섭다. , 열심히 하겠습니다…….

 

하지만 슬럼프 경험이 없었다는 사람이 슬럼프는 사치고 의지박약이라는 말을 저렇게 단호하게 해도 되는 걸까? 뭔가를 잘하는 사람은 못하는 사람이 겪은, 자신은 겪어보지 않은 경험에 대해서도 단정할 자격이 생기는 걸까? 나는 아직 뭔가를 잘해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다.

 

 

 


236. 처음 회계

편도선 지음 / 좋은땅 / 2019

 

이 책의 특징은 후반에 세법 관련 내용이 몇 쪽 있다는 것. 친구와 함께 떡볶이집을 운영하기로 한 청년이 회계학 교수인 엄마의 도움을 받아 영업에 필요한 이런저런 회계 지식을 익힌다는 컨셉이다. 주인공이 사업자다보니 세무관련 지식도 조금은 필요하다고 본 듯. 그 부분은 외삼촌이 맡는다. 든든한 집안. 회계 분야는 처음’ ‘’ ‘처음이지?’ 유형의 책들이 꽤 많다. 다들 어슷비슷해서, 이제는 그냥 본격 회계원리 교재를 한 권 파는 게 낫겠다 싶기도 하다.

 

 

 


237. 나의 첫 파이썬

에릭 마테스 지음 / 한선용 옮김 / 한빛미디어 / 2020

 

소멸한 지 벌써 10년도 더 된 공대생 야성을 회복하고자 최근 코딩 책을 좀 보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이런 책이 뭐 어떻다 평할 수 있는 실력이 될 때까지는 책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으려고 한다. 앞으로도 한동안은 이 대사를 복붙할 예정입니다.

 

 

 

 

--- 읽는 ---


사람의 씨앗 / 전호근

AI 최강의 수업 / 김진형

오후의 글쓰기 / 이은경

모두의 데이터 분석 with 파이썬 / 송석리, 이현아

응답하는 사회학 / 정수복

안녕, 나의 작은 테이블이여 / 김이듬

여성, 타자의 은유 / 김애령

이 짧은 시간 동안 / 정호승

살인자의 건강법 / 아멜리 노통브

데이터 분석을 떠받치는 수학 / 손민규

데미안 / 헤르만 헤세

마르크스의 자본론읽기 / 최형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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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21-07-03 16:1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파프리카는 아주 비싼 환금성 작물입니다. syo님은 입만 여세요. 제가 다 팔아 올게요. 안 팔린 건 내가 다 먹는다…아삭바삭와삭

syo 2021-07-03 17:07   좋아요 3 | URL
입 벌리면 나방 나오는 사오정 된 기분이었습니다. 파프리카아아아아아아아~

반유행열반인 2021-07-03 17:24   좋아요 3 | URL
손형 왜 우리엄마 욕해써어? 뭐 이런 캐릭터가 생각났어요 ㅋㅋㅋㅋㅋ

새파랑 2021-07-03 21:1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입이 얼마나 커야 파프리카가 나올수 있는건가요? ㅎㅎ 이래서 장마가 무섭나 봅니다~~!!

syo 2021-07-05 01:50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 뭐지? 별로 재미없는 것 같은데 갑작스런 현웃 ㅋㅋㅋㅋㅋㅋ
파랑님 뭔가 설명하기 굉장히 미묘한 농담 센스를 지니셨네요? 매력있음 ㅎㅎ 😀

붕붕툐툐 2021-07-03 22:3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쇼님~ 말 몇마디만 해주십쇼~ 파프리카 먹고 싶습니다. 이왕이면 빨간 파프리카가 좋은데.. 그럼 욕을 하셔야 하나?ㅎㅎ

syo 2021-07-05 01:51   좋아요 1 | URL
🤬🤬🤬🤬🤬🤬🤬🤬🤬
잔뜩 드렸습니다.

난티나무 2021-07-03 22:4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꿈도 기똥차게 멋지게 꾸시는 syo님.^^
여성, 타자의 은유 덥석 집어갑니다.

syo 2021-07-05 01:51   좋아요 1 | URL
좋은 책입니다.
데리다 이야기에서는 살짝 어렵긴 했는데, 전체적으로 재미있는 책이었어요^-^

2021-07-04 01: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7-05 01: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7-05 17: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7-05 17: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설국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1
가와바타 야스나리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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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하얀 나라의 나는 부디



 

눈에 관해서라면 작년은 좀 유별났다. 첫눈이 11월 첫날이었다. 크리스마스에는 크리스마스니까 당연하다는 듯이 눈이 왔다. 첫눈과 크리스마스 사이에도 눈은 이 별이 기어이 망했구나 싶을 정도로 쉼 없이 내렸고, 그래서 우리는 자주 다퉜다. 그러다 마침내 헤어졌다. 우리니까 당연하다는 듯이. 크리스마스와 새해 첫날 사이의 어느 날이었다. 부주의했다. 이 별 걱정이나 하다가 이별이나 하다니. 제 사랑이나 돌볼 것이지, 별보다 천천히 멸망하는 사랑이 어디 있다고. 우리 사랑의 안위가 어찌 되었건 눈은 그냥 계속 내렸다. 헤어지기 전에도 내렸고 헤어지는 중에도 내렸고 헤어지고 나서도 내렸다. 크리스마스 날이 우리가 헤어지기 전인지 헤어지는 중이었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지만, 하여간 그날은 기록적인 폭설이었다. 그날을 반지하에서 기념한 연인들은(우리는 아니다) 아마 아주 긴 밤을 보냈을 것이다. 눈이 사람들 가슴 높이까지 쌓였으니까. 오늘 밤은 왜 이리 긴 걸까, 창문을 두드리는 저 어둠은 왜 물러가지 않는 걸까. 알람은 울리는데 왜 해는 뜨지 않는 걸까……. 정말이지 기록적인 블랙 크리스마스였다. 이 세상에도, 내게도.

 

다 눈 덕분이었다. 눈이 쉼 없이 내려서 우리는 아주 원 없이 다툴 수가 있었다. 겉으로 보면 우리는 서로의 미운 모습을 미워하고 고운 모습을 고와하는 보통의 연인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미움과 고움을 테트리스 조각들처럼 요리조리 잘 맞춰 한두 줄씩 상쇄시켜가며 또 다음 조각의 낙하를 준비하는 필수적 연애 기술이 결핍된 사람들끼리 만난 운 나쁜 케이스이기도 했다. 그렇게 각자의 마음속 지하실에 미움은 미움대로 고움은 고움대로 쌓아 올리기를 몇 년, 언제부턴가 우리는 그야말로 애증의 관계라는 말의 사전적 정의라고 해도 될 법한 사이가 되어 있었다. 애가 범람할 때는 증오하던 자신을, 증이 끓어 넘칠 때는 애정하던 자신을 이해할 수 없어하며, 낙원으로 출근하고 전쟁터에서 퇴근하는 심상찮은 연애를 꾸역꾸역 이어나갔다. 하지만 우리에게도 자각이라는 게 있어서 이러다 조만간 큰일 날 공산이 크다는 걸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알아챘고, 이내 둘만 있을 때는 싸우기보다 침묵으로 시공간을 낭비해버리자는 암묵적 합의에 도달했다. 그러나 또 아예 안 싸울 수는 없었던 우리는 밖에서, 그러니까 공공장소에서, 이를테면 보행자 통행량이 많은 지역의 사거리 스타벅스 통유리 안쪽에서 아메리카노를 시켜 놓고, 혹은 퇴근 시간 선릉역 분당선 고색 방면 3-3번 대기열 왼쪽과 오른쪽에 나란히 선 채로 우리 운명에 할당된 다툼의 총량을 의연하게 채워나가기로 한 것이다. 스타벅스에서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놓고 마주 앉으면 아무리 세게 다퉈도 서로의 얼굴에 그걸 끼얹어 후에 벌어질 끔찍한 일들을 감수할 정도까지 분노가 축적되는 일은 없었고, 집으로 돌아가는 직장인들이 꽉 들어찬 열차 안에는 팔을 들어 휘두를 만한 여유 공간이 없었기 때문에 싸대기를 날릴 만큼의 증오가 폭발하는 일도 없었던 것. 주머니 사정이 좀 괜찮을 때는 스타벅스로, 그렇지 못할 때는 선릉역으로, 우리는 가서 다퉜다. 두 곳을 방문하는 빈도가 처음엔 비슷하다가 이내 스타벅스 쪽으로 치우치게 된 것 이유도 다 눈이었다. 언쟁의 텐션을 올려 가다가도, 문득 창밖에 내려 쌓이는 검은 눈에 눈길이 가면 끓던 분노가 시원하게 식어가는 느낌을 받곤 했던 것이다. 어느 날, 그날도 그다지 중요치 않은 무언가를 놓고 이게 다 니 탓이네, 그게 다 천만의 말씀이네, 싸우는 중이었는데, 이유는 아무래도 기억이 나질 않지만 하여간 내가 언성을 높일 차례에서 나는 분노에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화에 취해서, 내 터져나가는 울화통의 안쪽 면을 까뒤집어 낱낱이 보여주겠다는 욕심에 취해서 인사불성으로 막 뭐라고 쏘아대다가 정신줄을 잡아보니 내 앞에 앉은 그 사람은 내 거친 말이나 불안한 눈빛 같은 건 이 세상에 없는 것이라는 평온한 표정을 하고 통유리 바깥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었다. 아니, 지금 이게 무슨 경우 없는 경우-를 외치며 나는 벌떡 일어섰는데, , 바깥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검고 굵은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나는 검지를 허공에 쑤시는 자세 그대로 굳어 서서 잠깐 밖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그대로 둔 채로 엉덩이만 다시 의자에 붙였다. 그리고 나도 그 사람도 말없이 내리는 눈을 한참 바라보았다. 바쁜 걸음으로 길을 재촉하는 사람들의 머리 위에, 어깨 위에, 바짓단에, 발끝에, 굵고 검은 눈이 묻어 있었다. 저녁은 아직 오지 않았지만 세상이 온통 눈으로 검었다. 우리가 겨울을 여기서 보내겠구나, 내리는 눈을 보며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그리고 겨울의 꼭대기가 도착하기 전에 우리는 헤어졌다.

 

다른 날이었다. 왜, 약국에서 안약 줄 때, 그 사람이 말했다. 약사가 그러잖아, 안약은 개봉 후 1개월 지나면 버려야 되는 거 아시죠? 뭐 이렇게. 나는 대답 없이 그저 눈에 안약을 넣는 일에 집중했다. 그 사람도 내 대답을 기다릴 작정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늘 그렇듯 우리가 하고 있던 것은 대화처럼 보이는 것일 뿐이지 대화는 아니었으니까. 한 달 지난 안약을 사람들이 꼬박꼬박 폐기하는 게 보통이라면 약사들도 그렇게 그걸 강조하지는 않을 거잖아. 사람들이 참 그래. 반대쪽 눈까지 투약을 마친 나는 눈을 깜빡여보고는 눈물처럼 흐르는 안약을 스타벅스 로고가 찍힌 티슈로 닦아내며 대답했다. 난 안 그래. 그럴 일이 없지. 난 안약 한 통 다 쓰는 데 한 달도 안 걸리거든. 그러자 그 사람이 말했다. 그래. 넌 그래. 넌 그런 사람이야. 그래서 우리는 헤어지자. 나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그즈음에는 이제 다툼의 한 챕터를 닫고 조만간 또 새로운(완전히 새롭지는 않은) 챕터가 열릴 때까지 잠깐 쉬어가자는 제안의 줄임말로 이럴 거면 우리 헤어지자는 구절을 사용하곤 했으니까. 누구 한 사람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오면 상대방은 그냥 침묵한다. 그리고 넌지시 창밖을 보면 언제나처럼 눈이 내리고 있고, 온통 검게 덮인 세상이 우리의 마음에 암막을 쳐 주는 것. 그 암막 안에서 각자의 생각을 다스리며 시간을 보내다가, 허기가 질 때쯤 손을 잡고 일어나 가까운 식당에 가서 쌀국수와 분짜를 시켜 나눠먹는 것. 그것이 우리가 조리하는 다툼의 코스요리였다. 그렇지만 그날은 거의 모든 게 달랐다. 두 사람이 바깥을 바라보는 것까지는 같았지만, 끝나지 않는 그 사람의 말이 계속 침묵을 적셨고, 침묵은 물에 빠진 휴지 쪼가리처럼 산산이 흩어지는 중이었다. 너는 그런 사람이지. 남들은 보통 한 달이 지나도 버리지 않는 안약을 한 달이 채 되기도 전에 다 써 버리는 사람이지. 왜냐하면 쉬지 않고 안약을 넣으니까. 적당히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이제 들지도 않고, 너가 왜 그러는지가 이제 중요하지도 않아. 그냥 나는 지금 그런 너가 싫어. 이제 와 싫어진 건지 애초부터 싫었던 걸 더는 못 참게 된 건지는 잘 모르겠어. 하지만 지금 확실히 너는 그런 사람이고 나는 이런 사람이야. 이번에는 뭔가 좀 다르다고 느낀 나는 당황에 차서 그 사람을 바라보았지만 그 사람은 여전히 내 쪽으로는 시선도 두지 않고 그저 내리고 쌓이는 눈만 쳐다보고 있었다. 어차피 이쪽을 바라보지도 않을 걸 직감했으면서도 나는 마치 눈이 마주칠까 두려워하는 사람처럼 얼른 고개를 돌려 다시 바깥으로 시선을 던졌다


너는 우리가 잘 될 것 같아? 나는 안 될 것 같아. 이제 이러는 것도 지쳤어. 지치지 않아? 싸우고, 화해하고, 싸우고, 밥 먹고, 싸우고 섹스하고, 다시 싸우고, 또 싸움이 아닌 뭔가를 하고…… 싸움과 싸움 사이에 뭔가를 끼워 넣으려고 만나는 건 진짜 아니잖아. 더는 못 하겠어. 이런 게 일상이 되는 건 어떻게든 참을 수 있었는데, 일상이 이렇게 되는 것까지는 아무래도 못 하겠어. 내가 할 말을 찾지 못하는 동안 내 눈동자는 통유리 바깥 세상 여기저기를 찌르며 돌아다녔다. 바깥은 너무 어두웠다. 검은 눈송이는 옅은 바람에 흔들리는 커튼처럼 허공에 암막을 쳤고 어떤 빛도 그 사이를 뚫고 들어올 만한 용기가 없는 듯했다. 눈이 내리고 있는지 공중에 멈춰 있는지 구분하기도 어려웠다. 저렇게 검은 눈들도 녹으면 투명한 물이 되는데, 세상은 이번 겨울에 저 쌓인 눈들을 물로 바꿔 치워낼 생각이 없는 것만 같았다. 끝인가, 다 끝났나, 그런 말을 나도 모르게 툭 내뱉었던 것도 같다. 그 사람이 다시 입을 열었다. 통유리에 어렴풋이 비친 그 사람은 나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었다. 고개를 돌리면 눈을 마주칠 수도 있었을 텐데, 그 순간 그만한 용기를 내는 일이 너무도 어려워 나는 그저 밖을 바라보는 척 통유리에 비친 그 사람을 바라보며 묵묵히 그 사람의 마지막 이야기를 들었다. 최근에는 저 눈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이렇더라도 세상이 지금과 조금 달랐다면 또 어땠을까, 그런 생각을 자주 했어. 그러니까 어딘가에 평행 세계 같은 게 있어서, 거기도 너가 살고 내가 살고 우리가 만나서 사랑하는데, 근데 그 세상에 내리는 눈은 흰색인 거야. 여기와는 다르게 눈이 새하얘서 눈이 내리면 세상이 막 밝아지는 거야. 블랙 크리스마스라는 말 대신 화이트 크리스마스라는 말이 있고, 캐럴 노래의 가사도 온통 하얗고 하얀…… 말도 안 되는 생각이지만 그런 세상에 또 다른 우리가 있다면, 거기 사는 우리가 여기의 우리와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사랑하면서 산다는 게 완전히 말도 안 되는 소리는 아닐 것 같다는, 뭐 그런 생각. 그치만 여기서는 이제 안 돼. 이 세상에서 우리는 끝났어. 지금 돌아보면 시작부터 이미 틀어져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다 틀렸어. 너도, 나도, 세상도. 우리가 계속 만나려면 저 세 가지 중에 뭔가 하나라도 부여잡고 갈 만한 게 있어야 했는데. 여기서 우리는 더 할 수 있는 게 없어.

 

눈이 그쳤다. 바깥 세상이 밝아지자 더는 통유리에 실내가 선명하게 되비치지 않았다. 나는 그 사람이 앉았다 간 자리를 바라보며 흰 눈의 세상에 대해 생각했다. 눈 내리는 날 환해지는 세상. 눈사람이 하얀데 우리는 견딜 만큼만 다투고, 눈이 내려앉은 나뭇가지가 목화처럼 보이는데 헤어지지 않는 우리가 있는 세상. 아주 작은 것이 다른데 그것만으로 모든 것이 달라지는 세상. 그 세상에도 그 사람이 좋아하던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있고, 우리가 몇 번씩이나 읽고 이야기 나누던 설국이 있다면, 아마 그 책의 첫머리는 여기와는 다르게, 그러니까 이렇게 시작했겠지.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그러니까 그쪽의 내게 말해주고 싶다. 그쪽 세상이 조금 더 아름답다. 조금 더 아름다운 그쪽 세상의 문장처럼. 더 아름다운 세상에서 사는 사람이 할 수 있고 해야 할 일에 실수하지 않기를 바란다. 여기는 다시 눈이 내리고 있다. 밤의 밑바닥은 자꾸만 검어진다. 눈의 나라라도 될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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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21-06-30 11:2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오 6월의 리뷰 선정! 설국 아직 안 읽은 저는 도서관으로 푱.

syo 2021-06-30 11:43   좋아요 3 | URL
ㅋㅋㅋㅋㅋㅋㅋ 설국을 읽어요! 여기에도 어떤 유형의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독서괭 2021-06-30 11:3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앗 블랙크리스마스가 은유인 줄 알았는데!! 전 <설국>보다 이 글에 좋아요를 보내겠습니다. <설국>은 영 공감도 이입도 안 되었는데 이글은 너무 좋아요. 신박한 리뷰쟁이 syo님 최고다~

syo 2021-06-30 11:44   좋아요 4 | URL
저도 <설국>에 크게 공감하지 못했어요. 그냥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고, 아름다우면 됐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럼 이 책은 아름다움 말고는 남는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럼 리뷰에는 ‘아름다움‘이라는 네 글자만 적어야 되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는데, 그 네 글자를 길게 써 보았습니다....

그레이스 2021-06-30 11:3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리뷰 안에 소설이 있네요^^

syo 2021-06-30 11:45   좋아요 2 | URL
원체 리뷰에 소질이 없어서 늘 이런 식으로 장난질을 한답니다....
뭔가 리뷰다운 리뷰 좀 쓸 수 있고 싶다....

그레이스 2021-06-30 11:46   좋아요 2 | URL
제가 아는 syo님의 리뷰 실력은 다른데요?!
훌륭하십니다.!

syo 2021-07-03 14:03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ㅎㅎㅎㅎㅎ
서재 친구님들 다정하셔.....🥰

청아 2021-06-30 12:1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이 별 그리고 이별&테트리스만 봐도 등단각이고 올해의 주목 작가 각인데요!!!(나름 이상해진 ‘이상문학상 수상작‘과 ‘젊은작가상수상작‘ 쫌 읽었으니 믿어달라는 거시기🙄)
그러니까 나는 사탕을 녹여 먹는데 너는 깨물어 먹으니 우리 헤어져 인가요. 저도 대박 싸울때 잠시 멘탈이 돌아와 뭘로 싸웠더라 그 시초를 떠올리곤 경악을 할 때가 있었죠. 하...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저 문장이 다했다고 봅니다.

syo 2021-07-03 14:04   좋아요 0 | URL
나는 녹여 먹는데 너는 깨물어 먹으니 우리 헤어져 라고 말하기까지는 수없이 많은 것들이 축적되잖아요. 결국 사탕 때문이면서 동시에 사탕 때문은 아닌, 뭐 그런 보통의 이야기지요.....

ㅎㅎㅎ 설국은 막상 읽어보면, 뒤쪽에도 아름다운 글들이 꽤 많습니다.
물론 첫 구절이 임팩트가 크긴 한데.

반유행열반인 2021-06-30 16:3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이참 하얀 눈 나라에 살아서 다행이다…

syo 2021-07-03 14:05   좋아요 1 | URL
검은 눈 나라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의 평행소년소녀들을 응원합시다.

2021-07-03 15: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7-03 17: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7-03 17: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초딩 2021-07-07 2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관왕 축하드립니다 :-)

syo 2021-07-08 01:10   좋아요 0 | URL
반사합니다 ㅎㅎㅎㅎㅎㅎ

이하라 2021-07-08 01: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서니데이 2021-07-08 02: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도로시 2021-08-18 1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을 차분히 읽고 싶은데 혹시 알라딘 말고 따로 운영하는 카페나 블로그가 있으신가요? 알라딘 블로그만 운영하시나요?

syo 2021-08-19 17:12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도로시 님.

불행인지 다행인지 syo는 여기 이 공간에만 글을 쓰고 있습니다.
사실 제가 별로 읽을 만한 글을 쓰는 사람도 아니어서요. 차분히 읽으실 만한 게 없습니다 ㅎㅎㅎ
그저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가족

 

 

 

엄마는 큰 솥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동생은 세 가족 사는 집에 큰 솥은 둬서 어디 쓸 거냐고 말했다

나는 이 말들을 적어 시를 쓸 거라고 말했다

 

 

 

--- 읽은 ---



225. 글쓰는 삶을 위한 일 년

수전 티베르기앵 지음 / 김성훈 옮김 / 책세상 / 2016

 

글쓰기 책은 왜 이렇게 많은 것일까. 읽어도 읽어도 바닥이 드러나지 않는다. 글쓰기라는 영역이 글쓰기 책 열 권 정도 읽는다고 알 수 있는 만만한 영역이면 이만한 양의 책들이 쏟아져 나오지는 않았을 것인데.

 

요즘은 글 쓰는 책보다 글 쓰는 삶에 대한 책에 더 관심이 가는데, 글 쓰는 책을 써놓고 글 쓰는 삶에 대한 책인양 제목을 달아놓은 책들에 자꾸 낚인다. 그게 그거 아니냐고 물으신다면 그게 그거 아니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내가 찾는 글 쓰는 삶이라는 건 글 쓰는 이지 글 쓰는 방법이 아니다. 또한, ‘글 쓰는삶이라는 건 작가로서의삶도 아니다. 나도 가끔은 내가 뭘 찾고 있는지 헷갈리긴 한다.

 

로마 신화에서 헤스티아는 베스타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는데, 로마의 고대 광장 포럼에 자신의 사원을 갖고 있었다. 로마와 모든 로마인의 상징적 화로인 그 원형의 사원 안에서는 영원의 불꽃이 타올랐다. 이 불꽃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헤스티아는 중심성과 전체성의 원형이다. 그녀의 상징은 원이다. 헤스티아를 찬양하는 것은 곧 자신의 전체성과 우주의 전체성을 찬양하는 것이다. 이른 아침에 일기를 쓰거나, 낮 시간에 단편소설이나 에세이, 또는 긴 픽션이나 논픽션 등 글쓰기 작업을 하는 것은 곧 자신의 화로를 돌보며 그 잉걸불을 세상의 화로로 가져가는 행위다. 당신의 글은 개인적인 것으로 시작해서 보편적인 것으로 나아간다.

_ 수전 티베르기앵, 글쓰는 삶을 위한 일 년

 

 

 


226. 회계는 어떻게 역사를 지배해왔는가

제이컵 솔 지/ 정해영 옮김 / 메멘토 / 2016

 

 

회계에 관심이 없는 독자가 읽으면 다소 따분한 느낌이 들 수는 있겠다. 하지만 이 책은 역사서로 봐도 훌륭하다. 역사적 사건 자체보다 그 배후에서 사건을 추동하는 에너지들을 설명하는 근래 흥미로운 역사서들의 옆에 나란히, 아니 맨 앞줄에 설 수도 있겠다. 푸거 가의 축재와 그를 둘러싼 역사적 정황에 대해 그려놓은 그레그 스타인메츠의 자본가의 탄생과 느낌이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푸거는 죽었지만 회계는 영원하다는 점에서 이 책이 좀 더 낫지 않을까. 그러니까 인간은 재현될 수 없고 된다고 해도 내가 그 인간이 될 수는 없는 반면, 비인간 동력은 지금도 역사에 작용하고 있으므로 오늘날 읽기에 훨씬 도움이 된다. 그런 효용을 차치하고서라도, 좋은 책 맞다. 저자의 다른 책도 번역되어 들어오면 좋겠다.

 

자본주의와 정부는 재무적 책임성이 제대로 기능하는, 드물고 제한된 기간에만 큰 위기 없이 번영을 누린 듯하다. 사람들은 거의 천 년 동안 건전한 회계를 수행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지만, 많은 금융 기관과 금융 제도는 그런 방법을 선택하지 않았다. 성공적인 사회는 회계와 상거래 문화가 풍부한 사회일 뿐 아니라, 회계를 무시하고 날조하고 등한시하는 인간의 습성에 대처하기 위해 견고한 도덕적 · 문화적 틀을 구축하는 데 노력해온 사회다.

_ 제이컵 솔, 회계는 어떻게 역사를 지배하는가

 

 



227. 소사이어티 없는 카페

성일권 지음 / 르몽드코리아 / 2020


조지 오웰이 나는 왜 쓰는가에서 정치적 글쓰기의 위대함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 이후, 정치적 글쓰기를 하지 않는 사람들은 때로 그런 글쓰기를 하는 사람들에 대한 열등감이나 부채감을 지니는 반면, 정치적 글쓰기를 하는 사람들은 스스로의 글이 설령 미학적이거나 역사적이지 못하다손 치더라도 여전히 가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모든 글이 사실은 정치적 글임을 오웰도 (당연히) 알았을 것이나 선명하게 그렇다고 말하지 않았고, 오웰의 경지까지 (당연히) 도달하지 못한 많은 사람들은 정치적 글과 비정치적 글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거나, “모든 글은 정치적이다. 그러나 어떤 글은 더욱 정치적이다.”와 같은 생각 방식을 택한다. 그런 방식으로서의 정치적 글이라면 모든 사람이 그런 글을 쓸 필요는 없다. 우리는 모두 제자리에서 각자의 정치를 하고, 각자의 글로 그것에 대해 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각자의 정치 말고 정말 그 정치정치에 대한 글이 불필요한 것도 아니고, 경원시하는 대상이 되는 것도 옳지 않다. 각자의 자리에서 정치하는 사람들도 사전적 의미로서 정치의 자리에서 이루어지는 정치에 대한 글을 읽고 배우고 토론하고 반박하고 재구성하는 일들을 하는 사회가 좋은 사회니까. 소사이어티 없는 카페는 카페 없는 소사이어티만큼이나 슬플 수 있다.

 

불행한 과거의 단절은 과거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 과거를 제대로 인지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과거가 없는 사람이란 뿌리를 상실한 사람이며, 그는 언제든 현재에서 자아를 상실할 수 있다. 기억 없이는 자신의 고유한 정체성을 가질 수가 없으며, 사회적인 존재의 의미를 상실한 존재일 뿐이다. 이는 개인적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집단의 차원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우리에게는 기억해야 할 의무가 있다. 역사의 잔혹한 광경을 생각할 때 어떻게 망각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는가? 죽은 자들과 상처받은 자들을 망각해버리는 것은 두 번 죽이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기억해야 할 의무는 하나의 명령어처럼 다가온다. 또한 그것이야말로 공동의 미래를 준비하는 전제 조건이기도 하다.

_ 성일권, 소사이어티 없는 카페

 

 

 


228. 게 배우는 통계학

구로세 나오코 지음 / 이강덕, 김선숙 옮김 / 성안당 / 2020

 

통계학 책 표지에 웬 고양이냐 싶겠지만 무려 서술자가 고양이다. 쉽긴 한데, 읽다 보면 이게 통계책인지 고양이 책인지 고양이에 관한 통계 책인지 아리까리해진다. 일단 귀여우면 장땡이긴 한데 그건 syo의 사정이지…….


귀엽긴 겁나 귀엽다 🤣🤣

 

 

 


229. 내가 누구인지 뉴턴에게 물었다

김범준 지/ 21세기북스 / 2021

 

물리는 아름답다. 이게 무슨 말인지 제대로 설명하고 싶다. 그러지 못하는 건 그저 syo가 실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 아름다움에 얻어맞고, , 이게 진짜 아름다운 거였구나-라는 글자를 내 뼈에 새겨 놓은 것이 둘 있는데, 하나는 수학-물리 연속체고 나머지 하나는 언어-문학 복합체다. 둘 중 어느 하나에만 능숙했어도 나는 아름다움을 훨씬 더 잘 이해하고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을 텐데. 이런 아쉬움은 문장을 갖춘 물리학자와 물리학을 갖춘 문장가를 찾게 만든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많다. 분명 10여년 전 내가 대학에 다닐 때만 해도, 그 두 영역은 화해 불가능하며 아주 가끔 기이할 정도로 특출난 사람이 있어 두 영역을 아우르며 존재감을 뽐내는 정도었다. 그런데 군대 가고 백수 생활 잠깐(잠깐이라고?) 하는 동안 세상에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요즘은 아름다운 과학을 아름답게 쓰는 사람이 정말 많다. 뭐랄까, 이런 건 이기기 어렵지 않나 싶다. 아름다운 글을 쓰는 사람은 종종 아름답지 못한 것들(인간 같은 것들)에 대해 쓰면서도 아름다움을 빚는다. 그렇다면 그 사람들이 원래 아름다운 것들에 대해서 쓴다면, 세상에, 무슨 일이 벌어진다?

 

우주의 티끌이 만들어낸 티끌 같은 존재인 인간이 눈을 들어 밤하늘을 본다. 반짝이는 별로 가득한 밤하늘은 정말 아름답다. 우리 인간이 탄생한 고향인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우리 모두는 그리움을 느낀다. 밤하늘 아름다움은 고향을 그리는 향수鄕愁. 시간이 흘러 티끌처럼 사소한 인간의 이성이 모여 과학이 되었다. 티끌로 이루어진 티끌 같은 인간이 티끌 같은 이성으로 자신이 이 거대한 우주에서 어떤 티끌인지를 이해하게 되었다. 빅뱅에서 탄생한 물질이 모인 우리가 스스로를 이해하기까지 138억 년의 긴 여정이 필요했다.

_ 김범준, 내가 누구인지 뉴턴에게 물었다

 

 

 


230. 7일 공부

스즈키 히데아키 지음 / 안혜은 옮김 / 전효진 감수 / 21세기북스 / 2018

 

“7일이면 모든 시험에 합격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데, 우리가 알아서 “7일이면 (7일 만에 합격할 수 있는) 모든 시험에 합격할 수 있다라고 읽어주는 정도의 여유가 있어도 좋겠다. 어차피 물리적으로 안 되는 거 있는 법. 밥 먹고 자는 시간 빼고 남은 시간을 다 쏟아부어서 그냥 주교재 한 번씩 독서하는 데만 7일이 걸리는 그런 시험을 이 책으로 이길 수 없는 건 당연지사. 알아서 유두리있게 읽으면 하하호호 재미있군 할 정도는 된다. 실제로 저자는 이 책을 가지고 1년에 자격증 50개씩은 딴다고 한다. 1년이 52주가 아니라 100주였으면 100개 땄을 거라는 식이다.

 

 

 


231. 쇠퇴하는 아저씨 사회의 처방전

야마구치 슈 지음 / 이연희 옮김 / 한즈미디어 / 2019

 

사회의 특정 조직 내부에 천재와 재인의 밀도를 어느 정도로 유지할 수 있는가, 즉 이것은 엔트로피의 문제이다.

  엔트로피라는 열역학 상의 개념을 조직에 적용하는 것은 사실상 일반적이지 않다. 그러나 자연계의법칙과 메커니즘이 대부분 사회와 조직에도 적용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만약 대자연의 법칙으로써 열적 손실이라는 불가역적이고 일방적인 진행 과정이 있다면 우리가 만들어낸 다양한 시스템과 조직에서도 같은 법칙이 적용될 것이다.

  엔트로피가 증가한다는 것은 사용할 수 없는 에너지가 많아진다는 의미이고, 그 결과 무질서를 낳는다. 이에 대해 인간의 몸이 동적 평형을 이루며 적응해 가듯이 기업 조직도 엔트로피 증가에 대항하며 생명력을 유지한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인간에게는 유한한 수명이 전제되지만 기업 조직의 수명은 무한하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기업 조직은 이 지속성을 긍정적인 요소로써 추구하고 있다.

_ 야마구치 슈, 쇠퇴하는 아저씨 사회의 처방전

 

자꾸 철학이나 과학의 개념들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해서 자기계발 영역에 비비는 버릇. 야마구치 슈나 오가와 히토시 같은 사람들은 이 버릇을 고쳐야 하는데, syo 보기에 이미 늦었다. 이건 버릇 수준을 넘어서 거의 정체성이라고 봐야 한다.

 

자연계의 법칙과 메커니즘이 대부분 사회와 조직에도 적용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엔트로피 개념을 조직에 적용하는 근거라고 든 이 문장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증명해야 할 것 투성이라서 지금 다른 주장의 근거 역할을 해줄 처지가 못 된다. 그리고 그 다음 문장은 달리 말하자면, “, 엔트로피는 대자연의 법칙인데 우리가 만들어낸 것도 어차피 대자연의 일부 아니냐?”인데, 이런 식이면 참 할 말이 없다. 심지어 마지막 문단과 모순된다. 기업은 무한하다고? 이 대자연에 무한한 게 있단 말인가!

 

열린 계에서 엔트로피는 감소할 수 있다. 방문을 닫아 놓은 방에 세 살짜리 아들내미를 넣어놓으면 시간이 지날수록 방은 한없이 무질서해지겠지만, 아빠가 주기적으로 방문을 열고 들어가 정리를 하고 나오면 질서가 회복된다. 그러니까 저 문장은, 조직을 어떤 계로 볼 것인가에 대한 저자의 특정 관점, 조직 내의 인간 역량을 다른 무엇도 아닌 계의 에너지 상태에 빗대겠다는 저자의 선택이라는 조건 하에서만 쓸모 있는 비유다. 그러니까 이 문장들은 정확히 말하면 엔트로피의 법칙이 조직에도 적용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저자가 자기 주장의 틀에다 끼워 맞추기 위해 자연법칙의 많은 요소들을 쳐냈다는 걸 보여주는 것이다. ‘법칙이라고 불리는 과학 개념은 그 자체가 해석을 포함하고 있지 않다. 그저 사실만을 지시한다. 그 법칙을 말로, 글로 표현할 때부터 인간의 해석이 개입하는 것이다. 어느 정도 불가피한 일이긴 하다. 그 해석 개입의 의도적이면서 극단적인 형태가 바로 다른 영역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설명하려고 과학 개념을 임의차용하는 방식이다. 나쁜 일이라고는 하지 않겠다. 그렇지만 무책임해지기 쉬운 일이다.

 

 

 


232. 이토록 쉬운 딥러닝을 위한 기초수학 with 파이썬

마스이 도시카츠 지음 / 이중민 옮김 / 루비페이퍼 / 2019

 

소멸한 지 벌써 10년도 더 된 공대생 야성을 회복하고자 최근 코딩 책을 좀 보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이런 책이 뭐 어떻다 평할 수 있는 실력이 될 때까지는 책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으려고 한다. 앞으로도 한동안은 이 대사를 복붙할 예정입니다.

 

 

 

--- 읽는 ---


상표전쟁 / 신무연 외

아무도 아닌 / 황정은

자기 자신을 좋아하게 되는 연습 / 야하기 나오키

체지방 / 츠치다 다카시

이기적 섹스 / 은하선

어떤 글이 살아남는가 / 우치다 다쓰루

아무것도 아닌 것들에 대히여 / 윌리엄 데이비스 킹

주식투자 과외수업 / 박 다니엘

1년 만에 교포로 오해받은 김아란의 영어 정복기 / 김아란

숫자에 약한 사람들을 위한 통계학 수업 / 데이비드 스피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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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1-06-29 14:1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회계, 그러니까 복식부기도 물리 만큼 아름답습니다.
물리는 대학 가려고 열심히 해서 일찌감치 아름답다는 걸 안 반면에,
복식부기는 회사 다니면서 먹고 살기 위해 저절로 배웠는데 그게, 아이고 깜짝이야! 놀랍더라고요.

syo 2021-06-29 14:25   좋아요 2 | URL
그렇군요.
그렇다면 저도 그 아름다움을 조금 배워 볼까요.
아름다운 건 좋은 거니까!

Falstaff 2021-06-29 14:29   좋아요 3 | URL
빨리 배우시려면, 선배나 상사 새끼들한테 허벌 깨지면서 배우는 게 장땡입니다. ㅋㅋㅋㅋㅋ

syo 2021-06-29 14:31   좋아요 3 | URL
역시 세상 만물이 저마다 의미가 있다더니만, 선배나 상사새끼들도 다 써먹을 때가 있군요! ㅋㅋㅋㅋㅋㅋ

초란공 2021-06-29 16:13   좋아요 1 | URL
라마르크가 획득형질이 유전된다고 말했을 때 틀림없이 과롭히는 선배나 상사들로부터 깨달은 바가 많았을 듯도 싶습니다. ㅋㅋㅋ

행복한책읽기 2021-06-29 19:47   좋아요 3 | URL
아. 역시 폴스타프님 댓글은 웃음 유발 제조기^^

syo 2021-06-29 20:21   좋아요 2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 폴스타프님도 누군가의 선배 상사이실 거라는 것이 바로 제가 아는 폴스타프식 웃음 포인트입니다.

Falstaff 2021-06-29 20:49   좋아요 1 | URL
음하하하.... 은퇴할 때까지 누군가의 선배, 상사일 수 있는 봉급쟁이는 천 명 가운데 한 명입니다. 전 정상인이라서 그런 예외에는 들지 못했습니다. ㅋㅋㅋㅋㅋ

독서괭 2021-06-29 15:3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니, 이제 회계학 서적도 고양이로 낚는답니까! 고양이들 너무 피곤하겠다..(아놔 이노므 인기..난 왜 쓸데없이 귀여운거야..) / 음 이번 책들 중 그러니까, 229번이 추천할만한 책인 거죠? 일단 담습니다.

잠자냥 2021-06-29 15:55   좋아요 3 | URL
ㅋㅋㅋㅋㅋㅋㅋ 독서괭님 댓글 느무 귀엽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근데 고양이가 낚는 건 통계학인뎁쇼... 회계가 아니라 ㅋㅋㅋㅋㅋㅋ 역시 고양이라 약간 멍충미?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syo 2021-06-29 16:09   좋아요 3 | URL
부랴부랴 사진을 하나 첨부해보았습니다. 귀여운 고양이들.....
늘 말씀드리지만, 즉시 구매로 이어지는 추천은 조심스럽습니다 ㅋㅋㅋㅋㅋ

잠자냥 2021-06-29 16:16   좋아요 3 | URL
이럴수가...O.0;;;; 그림 보니까 넘 귀여워요. 통계고 회계고 물리고 뭐고; 저 고양이들이라면 다 정복 가능해 보입니다...@_@

독서괭 2021-06-29 16:28   좋아요 2 | URL
앗 통계학이었군요! 이 페이퍼에 회계학 책도 있어서 헷갈렸나봐요. 통계학이든 회계학이든 난 안 읽겠다는 마음가짐이었나 봅니다.. ㅋㅋㅋ
그림 보니 본격 고양이만화네요? 아이고 읽고 싶어진다…

행복한책읽기 2021-06-29 19:46   좋아요 3 | URL
지두 닉넴 바꿀까요? 독서괭이로 ㅋ

syo 2021-06-29 20:20   좋아요 1 | URL
고양이 진짜 짱귀엽습니다. 저 온몸으로 갸웃하는 거 좀 보소.....

Cinema Paradiso 2021-06-29 17: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Syo님 공대생이셨군요 ㅋㅋㅋ 반갑습니다 :)

syo 2021-06-29 20:21   좋아요 1 | URL
아 ㅋㅋㅋㅋㅋㅋ 시네마님 공대출신이신 거 저는 알았습니다 ㅎㅎ

새파랑 2021-06-29 18:0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Syo의 의미가 솥이었군요? ㅎㅎ 솥에관한 시가 궁금해지네요^^

syo 2021-06-29 20:22   좋아요 3 | URL
놀랍게도, 저 위의 세 줄이 바로 그 시입니다..... 진짜 놀랍지요....?

행복한책읽기 2021-06-29 19:4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미 시를 썼구만유. syo님은 글쓰기 책 진짜 꾸준히 읽으신다. 하긴 독서 영역이 워낙 전천후라. 지는 귀여움보다 아름다움에 혹해 229번 챙겨감요. 근데 6월에 232권입니까. 아으. 진짜. 여기도 AI

syo 2021-06-29 20:23   좋아요 3 | URL
역시 시 읽기의 달인 읽기님, 바로 알아채셨네요. 저게 바로 그 시라고 찌끄린 거라는 것을......
아름답다고 했지만, 시종일관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아름다운 것은 또 아니어서, 부분부분 좋았던 거라 막 추천하기는 그렇습니다.

붕붕툐툐 2021-06-30 00: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230번은 그냥 미친놈 정도로 읽고 싶은 제 마음.. 흙흙....(떨어진 시험 다수)

syo 2021-06-30 11:06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 대단하긴 하던데요? 자기가 그렇게 해서 자격증 수백 개 땄다고 하니 뭐 딴죽을 걸기도 어렵고....
 


초겨울사거리 5

 

 

 

밤에 들으면 좋을 목소리. 밤을 쫓는 듯하다가 이내 꿈을 부르는 듯한 소리의 무늬. 걸어서 갈 수 있는 가장 먼 곳까지 걸어온 사람들처럼 노곤해 하다가도 그렇게 도착한 곳이 처음 있었던 바로 그 자리라서 기쁘게 서로를 바라보는 사람들. 여름에 같이 있으면 좋을 목소리. 어차피 더운 것을 덥히는 탄성과 어차피 젖을 곳을 비처럼 두드리는 파문, 어차피와 어차피들. 들리지 않아도 들리는 목소리. 없는 것을 있다고 말하고 없잖아- 하면 서운해하는 순진함. 여름에 준비하는 겨울처럼, 겨울에 되짚어보는 여름처럼, 소나기를 피하는 작은 동물처럼, 무심한 눈빛으로 유심히 바라보느라 갸웃대는 고개처럼, 이유처럼, 결과처럼, 당연히 도착하면 좋을 목소리.

 

 

 

--- 읽은 ---



220. 조각가

스콧 맥클라우드 지음 / 김마림 옮김 / 미메시스 / 2017

 

많이들 읽어 보셨으면 좋겠어요. 나 쫌 감동받음…….

 

  - 그 말 사실이야? 돌로 어떤 사람을 조각한다는 건…… 그 사람이 아닌 부분을 다 깎아 내는 거란 말.

  - 이 책 읽고 있었니?

  - 아마도.

  - 이거 열 살짜리들이 읽는 책인 건 알지?

  - 미카엘라가 어제 두고 갔어. 너를 이해하기 위해 읽어 보라더라. 정말 궁금해. 그게 정말 조각가들이 하는 일이야?

  - 한 종류의 조각을 보는 한 가지 관점은 될 수 있지. 하지만 요즘 세상에 그 말은 어떤 의미도 될 수 있어. 패션, 헤어, 오브제 투르베…… 예술에는 아주 많은 전통적 표현 방법들이 있지. 여기 자코메티도 그래. 처음에는 철사 줄로 시작해서, 거기에 젖은 석고 반죽을 붙이고, 청동 주물로 완성해.

  - 그럼 이 사람은 깎아 내는 게 아니라 붙여 가네?

  - 그렇다고 볼 수 있지.

 - 난 네가 날 어떻게 보는지 알아, 데이비드. 마치 내 주변의 공기를 깎아 내듯. 내가 아닌 모든 것을 찾아내려는 듯. 난 끌로 깎이거나 축소되고 싶지 않아. 나란 존재 위에 계속 덧붙이고 싶어. 네가 날 이해하고 싶다면 너도 계속 붙여 나가야 해.

_ 스콧 맥클라우드, 조각가

 

 

 


221. 애덤 스미스 구하기

조나단 B. 와이트 지음 / 이경식 옮김 / 북스토리 / 2017

 

죽은 애덤 스미스가 해럴드 아저씨의 몸에 빙의되었다. 방식은 좀 독특하다. 일단 스미스가 해럴드 아저씨의 머리 속에서 자꾸 소리를 지른다. 이 양심도 도덕도 없는 신자유주의로부터 이 사회를 지켜야 해! 내 이야기를 알아들을 수 있는 경제학자를 만나! 해럴드 아저씨는 빡치겠고 미치겠지만 도리가 없다. 그래서 주인공 리치를 만나러 간다. 그리고 잠깐 기다려 봐- 하고는 스미스한테 의식을 양보한다. 그러면 스미스가 뿅 하고 등장한다. 이제 두 주인공이 경제학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애기들 보는 책에 이런 것들 많다. 죽은 철학자나 과학자 아저씨가 등장해서 어린이들에게 이런저런 좋은 말씀을 전해주는 구성. 크게 보면 이 책도 그렇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이야기 속에는 암살 시도, 음모, 그리고 엇갈리다 마침내 이어지는 사랑 같은 요소들이 들어 있다!

 

그런데 그다지 스릴도 없고 큰 재미도 없다……. 캐릭터들은 평면적이고 스미스는 스미스의 사상을 직접 때려 박아야 하기 때문에 그런 장면과 스토리 진행은 다소 겉돈다. 그냥 애덤 스미스 개론서와 쫄깃한 스릴러물을 한 권씩 따로 읽는 게 훨씬 남는 장사다.

 

, 한번 봅시다. 제도라는 것은 단지 잘 작동한다고 해서 존속되는 게 아닙니다. 아무리 잘 작동해도 존속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제도는 사회의 제반 환경을 반영하며, 사회의 저변을 관통하는 도덕적 지지가 있기에 안전하게 보호받으며 존속되는 겁니다. 미국이 몽테스키외의 삼권분립 원칙에 따라 굳건히 유지된다고 생각하겠지요. 하지만 몽테스키외도 공화국의 정신은 도덕이라고 일찍이 강조하면서 경고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해요.”

  그러자 캐럴이 끼어들었다.

  “시민적 양심이죠.”

  그러자 스미스가 포크를 흔들며 열변을 토했다.

  “민주주의와 자유시장, 이 두 가지가 사회의 지도자들이 계몽주의적 이상에 도취해 있던 18세기이 비로소 나타났다는 게 논리적이지 않을까요? ‘개인주의적이라는 어휘에는 상호 권리, 책임, 그리고 의무라는 개념이 녹아 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도덕적 개념들은 개인의 존엄성뿐만 아니라 개인의 사회적 연결성까지도 함께 인정했던 겁니다. 만약 인류가 도덕적 규칙들을 전반적으로 우러러 받들지 않는다면 사회는 결국 소멸해버릴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 나는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지금은 시장과 민주주의가 과거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지요.”

  스미스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 그는 피로해보였지만 그 피로가 오히려 더욱 힘을 내게 하는 것 같았다. 그는 한 마디 한 마디가 모두 중요한 듯 힘주어 말했다.

  “시장은 인간 본성의 기본적 요소들에 의해 돌아갑니다. 여기에다 자비심과 정의를 보태서 균형을 맞춰야 비로소 문명화된 시민사회가 형성되지요.”

_ 조나단 B. 와이트, 애덤 스미스 구하기

 


 


222. 마션

앤디 위어 지음 / 박아람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 / 2021

 

SF를 쓸 때, 있지도 않은 과학기술을 있는 것처럼 쓰면 조금 수월하겠다. 어차피 없는 거라서, 워프 항법으로 공간을 접어가며 우주를 날아다니는 비행체가 달걀 모양이라고 쓰든 접시 모양이라고 쓰든 뭐라고 하기가 어려우니까. , 맞다. SF란 원래부터 허망한 소리를 하는 장르였지- 하고 대충 넘어가게 된다. 이런 게 누군가에게는 SF의 매력이겠지만, 누군가에게는 SF를 읽지 않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미쳤다. 왜냐하면 이 Science Fiction에서 Fiction스러운 거라고는 우주인 중 한 사람이 불의의 사고로 혼자 화성에 남겨진다면? 이라는 가정 딱 하나뿐이고, 그 이후로 벌어지는 모든 일은 완전히 Science이기 때문이다. SF가 기계라면, 당신은 이 책에서 볼트와 너트 단위까지 핍진하게 설계된 정교한 기계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건 레알 존경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와트니 겁나 유쾌함.

 

[11:18] 제트추진연구소: 마크, 벤카트 커푸어다. 우린 49화성일째부터 쭉 자네를 지켜보고 있었어. 전 세계가 자네를 주목하고 있네. 정말 대단해. 패스파인더를 찾아오다니. 지금 구출 계획을 짜고 있어. 제트추진연구소에서 아레서 4 MDV가 잠깐의 육상 비행을 할 수 있도록 개조하고 있네. 그것으로 자네를 태운 다음 스키아파렐리로 데려가게 할 생각이야. 아레스4가 도착할 때까지 식량이 떨어지지 않도록 보급 방법도 연구하고 있어.


  [11:29] 와트니: 기쁜 소식이네요. 정말 죽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대원들의 잘못이 아니었어요. 잘문 하나만. 제가 살아 있다는 걸 알고 대원들이 뭐라고 하던가요? 그리고 참, “엄마, 저예요!”


  [11:41] 제트추진연구소: ‘농작물얘기 좀 해봐. 우리 계산에 따르면, 현재 갖고 있는 식량은 한 끼를 4분의 3으로 제한할 경우 400화성일째까지 버틸 수 있더군. 농작물로 얼마나 더 버틸 수 있나? 질문에 답하자면, 자네가 살아 있다는 얘긴 대원들에게 하지 않았네. 지구로 귀환하는 데 집중하게 하려고 말이야.


  [11:52] 와트니: 농작물은 감자예요. 추수감사절에 요리하려고 가져온 감자를 재배하고 있어요. 잘 자라고 있긴 한데,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농사를 짓기에는 이용가능한 농지가 부족해요. 900화성일째쯤이면 식량이 떨어질 거예요. 추신. 대원들한테 제가 살아 있다고 얘기하세요! 정신 나간 거 아니에요?


  [12:04] 제트추진연구소: 식물학자들을 섭외해 자네의 농사에 대한 상세한 자문을 구하고 잘하고 있는지 확인해야겠군. 목숨이 걸린 일이니 확실하게 해야지. 900화성일째까지 버틸 수 있다니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야. 좀 더 시간을 갖고 보급 계획을 마련할 수 있겠어. 그리고 말 가려서 해. 자네 메시지가 전 세계에 생중계되고 있거든.


  [12:15] 와트니: 보세요! 젖탱이에요! -->(.Y.)

_ 앤디 위어, 마션

 

 

 


223. 미국, 어디까지 알고 있니?

홍세훈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4

 

유머 코드가 처음에는 깨알처럼 느껴지지만 페이지 숫자가 커지면서 익숙함도 조금씩 커지고 웃음도 함께 커진다. 그렇지만 그렇게 커지고 커져도 마지막 페이지에 빵터짐으로 도착하지는 않는다. 그래도 역사책이 이만하면 할 만큼 한 것. 먼나라 이웃나라 웃을 데 없었던 것 생각하면…….

 


 

 


224. 나 혼자 회의한다

야마자키 타쿠미 지음 / 양혜윤 옮김 / BOOKULOVE / 2021

 

회의는 정말 하기 싫었다. 회의會議. 사전적으로 그것은 모은다-뜻을이라는 의미지만 현실세계에서는 대체로 모여라-내 뜻에라는 용법으로 쓰인다. 그래서 회의는 100명이 모여도 최대 한 사람만 만족하는, 까딱 재수 없으면 누구도 만족하지 못하는 백해무익/백해일익한 기묘한 활동으로 끝나기 마련이었다. 그러니 회의에 회의적이 될 수밖에. 가뜩이나 그런 회의를, 이제 심지어 나 혼자서도 하라고? 희의적이었다.

 

하지만 100명이 하는 회의가 100해무익/1001익의 선택지를 낳는다면, 혼자서 하는 회의에서는 그 ‘11이 내가 될 수도 있다! 그러니까 이건 확률이 꽤 높은 게임이다. 잘만 하면. 어떻게 해야 잘할 수 있는지 궁금하시다면, 읽어보시길.

 

딱히 큰 기대는 마시길.

 

스스로에게 미래를 더 희망적으로 만들기 위한 질문을 해보라. 그리고 그 답을 말이나 문자로 표현해보라. 중요한 것은, 마음속으로 답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종이에 쓰거나 다른 사람에게 말(선언)하는 것이다. 물론 애초에 이미 자신의 마음속에서 예상하고 있던 답을 쓰거나 말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쓰거나 말하는 순간, 또 다른 감정이 생겨난다. 이번에는 새로이 생겨나는 감정까지도 말이나 문자로 표현해보라.

  그 순간, 당신의 마음의 겉껍질(감정)이 한 장 스르륵 벗겨진다. 그리고 그 안에 있던 또 다른 새로운 감정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 감정 역시, 그대로 다시 써보자. 그럼 또 하나의 감정이 스르륵 벗겨지고, 새로운 감정이 점점 진짜 자신의 감정 속으로 안내하게 된다.

_ 야마자키 타쿠미, 나 혼자 회의한다

 

 

 

--- 읽는 ---

글쓰는 삶을 위한 일 년 / 수전 티베르기앵

소사이어티 없는 카페 / 성일권

7일 공부법 / 스즈키 히데아키

상표전쟁 / 신무연 외

쉽게 배우는 통계학 / 구로세 나오코

나의 첫 파이썬 / 에릭 마테스

아무도 아닌 / 황정은

단어의 배신 / 박산호

젠더 모자이크 / 다프나 조엘, 루바 비칸스키

쇠퇴하는 아저씨 사회의 처방전 / 야마구치 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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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1-06-25 20:4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하여튼 우리 초 사이오 님은 읽은/읽는/읽을 책이 저하고 조금씩 핀트가 맞지 않아요. ㅋㅋㅋㅋ

syo 2021-06-25 20:42   좋아요 3 | URL
그래서 제 입장에서도 폴스타프님은 겁나 신비로운 사람인 것입니다ㅋㅋㅋㅋㅋ

반유행열반인 2021-06-25 21:0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몇 년 전에 마션 읽으면서 제일 감명 깊었던 건 그 무한한 긍정, 혼자 남아서도 농담치는 그 무사태평. 과학이 살린 게 아니라 긍정이 살린 거야 쟤는..했어융. 마션 좋아서 아르테미스도 봤는데 그건 후졌음 ㅋㅋㅋ

syo 2021-06-25 21:06   좋아요 3 | URL
아르테미스도 읽어봐야지 하고 있었는데.....
근데 어차피 지금 리스트에 올려놔도 이번 여름에 읽을 수나 있을지......
그러다 시간 지나면 약발 다 떨어지면서 안 읽게 되겠지.....

반유행열반인 2021-06-25 21:11   좋아요 2 | URL
시간 남아 돌고 심심하고 그런데 읽을 건 없고 하면 읽는 대도 안 말리지만… 남는 건 욕 뿐이에요. 진짜 좆나빌어미친젠장 이런 욕이 나온다니까?! 영어로 찾아보니 funt (아마 fxck cxnt )이런 신조욕 가득ㅋㅋㅋ) fusumitch(fxck sxck bxtch )이런거 섞은 거… 그때 번역보고 너무 궁금해서 몇날 며칠 원서 구글링해봄 ㅋㅋㅋㅋ마션은 영화도 그럭저럭 좋았습니당

새파랑 2021-06-25 21:1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많은 책을 동시에 읽는다는게 언제나 신기하네요~! 파이썬과 통계학을 보면 공대출신 이신거 같은데~ 다른책들 보면 작가같기도 하고...

syo 2021-06-29 14:13   좋아요 1 | URL
요즘은 공대 출신 아니어도 파이썬이나 통계학 책 읽는 일이 예전보다 많겠지만,
네, 공대 출신 맞습니다 ㅎㅎㅎㅎㅎㅎ

다락방 2021-06-25 21:2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젖탱이 부분 읽다가 나도 빵터져서 페이퍼 썼던 것 같은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몰리 2021-06-26 06:29   좋아요 0 | URL
아 이 댓글에 빵터짐.
저 그 페이퍼 읽은 거 같아요. 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1-06-26 08:39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syo 2021-06-29 14:13   좋아요 0 | URL
저런 유쾌한 친구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겠지? ^ㅂ^

레삭매냐 2021-06-25 21: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앤디 위어의 달나라판
삼시세끼, 책으로 만나봐야
하는데...

syo 2021-06-29 14:14   좋아요 0 | URL
책이라는 것이 진짜 많긴 많군요.
매냐님의 사정권 바깥에도 책이 있다니....

공쟝쟝 2021-06-25 22:1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마션 ㅋ 영화 존잼이었는데 책으로도 읽으면 더 꿀잼이겠다 생각했는데 역싀 읽어야겠다요!!

syo 2021-06-29 14:15   좋아요 0 | URL
재밌습니다.
우주복이니 우주선이니 하는 과학적 얼씨구절씨구들은 이과생 읽으라고 주고 나서도 재미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