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겨울사거리 5

 

 

 

밤에 들으면 좋을 목소리. 밤을 쫓는 듯하다가 이내 꿈을 부르는 듯한 소리의 무늬. 걸어서 갈 수 있는 가장 먼 곳까지 걸어온 사람들처럼 노곤해 하다가도 그렇게 도착한 곳이 처음 있었던 바로 그 자리라서 기쁘게 서로를 바라보는 사람들. 여름에 같이 있으면 좋을 목소리. 어차피 더운 것을 덥히는 탄성과 어차피 젖을 곳을 비처럼 두드리는 파문, 어차피와 어차피들. 들리지 않아도 들리는 목소리. 없는 것을 있다고 말하고 없잖아- 하면 서운해하는 순진함. 여름에 준비하는 겨울처럼, 겨울에 되짚어보는 여름처럼, 소나기를 피하는 작은 동물처럼, 무심한 눈빛으로 유심히 바라보느라 갸웃대는 고개처럼, 이유처럼, 결과처럼, 당연히 도착하면 좋을 목소리.

 

 

 

--- 읽은 ---



220. 조각가

스콧 맥클라우드 지음 / 김마림 옮김 / 미메시스 / 2017

 

많이들 읽어 보셨으면 좋겠어요. 나 쫌 감동받음…….

 

  - 그 말 사실이야? 돌로 어떤 사람을 조각한다는 건…… 그 사람이 아닌 부분을 다 깎아 내는 거란 말.

  - 이 책 읽고 있었니?

  - 아마도.

  - 이거 열 살짜리들이 읽는 책인 건 알지?

  - 미카엘라가 어제 두고 갔어. 너를 이해하기 위해 읽어 보라더라. 정말 궁금해. 그게 정말 조각가들이 하는 일이야?

  - 한 종류의 조각을 보는 한 가지 관점은 될 수 있지. 하지만 요즘 세상에 그 말은 어떤 의미도 될 수 있어. 패션, 헤어, 오브제 투르베…… 예술에는 아주 많은 전통적 표현 방법들이 있지. 여기 자코메티도 그래. 처음에는 철사 줄로 시작해서, 거기에 젖은 석고 반죽을 붙이고, 청동 주물로 완성해.

  - 그럼 이 사람은 깎아 내는 게 아니라 붙여 가네?

  - 그렇다고 볼 수 있지.

 - 난 네가 날 어떻게 보는지 알아, 데이비드. 마치 내 주변의 공기를 깎아 내듯. 내가 아닌 모든 것을 찾아내려는 듯. 난 끌로 깎이거나 축소되고 싶지 않아. 나란 존재 위에 계속 덧붙이고 싶어. 네가 날 이해하고 싶다면 너도 계속 붙여 나가야 해.

_ 스콧 맥클라우드, 조각가

 

 

 


221. 애덤 스미스 구하기

조나단 B. 와이트 지음 / 이경식 옮김 / 북스토리 / 2017

 

죽은 애덤 스미스가 해럴드 아저씨의 몸에 빙의되었다. 방식은 좀 독특하다. 일단 스미스가 해럴드 아저씨의 머리 속에서 자꾸 소리를 지른다. 이 양심도 도덕도 없는 신자유주의로부터 이 사회를 지켜야 해! 내 이야기를 알아들을 수 있는 경제학자를 만나! 해럴드 아저씨는 빡치겠고 미치겠지만 도리가 없다. 그래서 주인공 리치를 만나러 간다. 그리고 잠깐 기다려 봐- 하고는 스미스한테 의식을 양보한다. 그러면 스미스가 뿅 하고 등장한다. 이제 두 주인공이 경제학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애기들 보는 책에 이런 것들 많다. 죽은 철학자나 과학자 아저씨가 등장해서 어린이들에게 이런저런 좋은 말씀을 전해주는 구성. 크게 보면 이 책도 그렇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이야기 속에는 암살 시도, 음모, 그리고 엇갈리다 마침내 이어지는 사랑 같은 요소들이 들어 있다!

 

그런데 그다지 스릴도 없고 큰 재미도 없다……. 캐릭터들은 평면적이고 스미스는 스미스의 사상을 직접 때려 박아야 하기 때문에 그런 장면과 스토리 진행은 다소 겉돈다. 그냥 애덤 스미스 개론서와 쫄깃한 스릴러물을 한 권씩 따로 읽는 게 훨씬 남는 장사다.

 

, 한번 봅시다. 제도라는 것은 단지 잘 작동한다고 해서 존속되는 게 아닙니다. 아무리 잘 작동해도 존속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제도는 사회의 제반 환경을 반영하며, 사회의 저변을 관통하는 도덕적 지지가 있기에 안전하게 보호받으며 존속되는 겁니다. 미국이 몽테스키외의 삼권분립 원칙에 따라 굳건히 유지된다고 생각하겠지요. 하지만 몽테스키외도 공화국의 정신은 도덕이라고 일찍이 강조하면서 경고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해요.”

  그러자 캐럴이 끼어들었다.

  “시민적 양심이죠.”

  그러자 스미스가 포크를 흔들며 열변을 토했다.

  “민주주의와 자유시장, 이 두 가지가 사회의 지도자들이 계몽주의적 이상에 도취해 있던 18세기이 비로소 나타났다는 게 논리적이지 않을까요? ‘개인주의적이라는 어휘에는 상호 권리, 책임, 그리고 의무라는 개념이 녹아 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도덕적 개념들은 개인의 존엄성뿐만 아니라 개인의 사회적 연결성까지도 함께 인정했던 겁니다. 만약 인류가 도덕적 규칙들을 전반적으로 우러러 받들지 않는다면 사회는 결국 소멸해버릴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 나는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지금은 시장과 민주주의가 과거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지요.”

  스미스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 그는 피로해보였지만 그 피로가 오히려 더욱 힘을 내게 하는 것 같았다. 그는 한 마디 한 마디가 모두 중요한 듯 힘주어 말했다.

  “시장은 인간 본성의 기본적 요소들에 의해 돌아갑니다. 여기에다 자비심과 정의를 보태서 균형을 맞춰야 비로소 문명화된 시민사회가 형성되지요.”

_ 조나단 B. 와이트, 애덤 스미스 구하기

 


 


222. 마션

앤디 위어 지음 / 박아람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 / 2021

 

SF를 쓸 때, 있지도 않은 과학기술을 있는 것처럼 쓰면 조금 수월하겠다. 어차피 없는 거라서, 워프 항법으로 공간을 접어가며 우주를 날아다니는 비행체가 달걀 모양이라고 쓰든 접시 모양이라고 쓰든 뭐라고 하기가 어려우니까. , 맞다. SF란 원래부터 허망한 소리를 하는 장르였지- 하고 대충 넘어가게 된다. 이런 게 누군가에게는 SF의 매력이겠지만, 누군가에게는 SF를 읽지 않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미쳤다. 왜냐하면 이 Science Fiction에서 Fiction스러운 거라고는 우주인 중 한 사람이 불의의 사고로 혼자 화성에 남겨진다면? 이라는 가정 딱 하나뿐이고, 그 이후로 벌어지는 모든 일은 완전히 Science이기 때문이다. SF가 기계라면, 당신은 이 책에서 볼트와 너트 단위까지 핍진하게 설계된 정교한 기계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건 레알 존경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와트니 겁나 유쾌함.

 

[11:18] 제트추진연구소: 마크, 벤카트 커푸어다. 우린 49화성일째부터 쭉 자네를 지켜보고 있었어. 전 세계가 자네를 주목하고 있네. 정말 대단해. 패스파인더를 찾아오다니. 지금 구출 계획을 짜고 있어. 제트추진연구소에서 아레서 4 MDV가 잠깐의 육상 비행을 할 수 있도록 개조하고 있네. 그것으로 자네를 태운 다음 스키아파렐리로 데려가게 할 생각이야. 아레스4가 도착할 때까지 식량이 떨어지지 않도록 보급 방법도 연구하고 있어.


  [11:29] 와트니: 기쁜 소식이네요. 정말 죽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대원들의 잘못이 아니었어요. 잘문 하나만. 제가 살아 있다는 걸 알고 대원들이 뭐라고 하던가요? 그리고 참, “엄마, 저예요!”


  [11:41] 제트추진연구소: ‘농작물얘기 좀 해봐. 우리 계산에 따르면, 현재 갖고 있는 식량은 한 끼를 4분의 3으로 제한할 경우 400화성일째까지 버틸 수 있더군. 농작물로 얼마나 더 버틸 수 있나? 질문에 답하자면, 자네가 살아 있다는 얘긴 대원들에게 하지 않았네. 지구로 귀환하는 데 집중하게 하려고 말이야.


  [11:52] 와트니: 농작물은 감자예요. 추수감사절에 요리하려고 가져온 감자를 재배하고 있어요. 잘 자라고 있긴 한데,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농사를 짓기에는 이용가능한 농지가 부족해요. 900화성일째쯤이면 식량이 떨어질 거예요. 추신. 대원들한테 제가 살아 있다고 얘기하세요! 정신 나간 거 아니에요?


  [12:04] 제트추진연구소: 식물학자들을 섭외해 자네의 농사에 대한 상세한 자문을 구하고 잘하고 있는지 확인해야겠군. 목숨이 걸린 일이니 확실하게 해야지. 900화성일째까지 버틸 수 있다니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야. 좀 더 시간을 갖고 보급 계획을 마련할 수 있겠어. 그리고 말 가려서 해. 자네 메시지가 전 세계에 생중계되고 있거든.


  [12:15] 와트니: 보세요! 젖탱이에요! -->(.Y.)

_ 앤디 위어, 마션

 

 

 


223. 미국, 어디까지 알고 있니?

홍세훈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4

 

유머 코드가 처음에는 깨알처럼 느껴지지만 페이지 숫자가 커지면서 익숙함도 조금씩 커지고 웃음도 함께 커진다. 그렇지만 그렇게 커지고 커져도 마지막 페이지에 빵터짐으로 도착하지는 않는다. 그래도 역사책이 이만하면 할 만큼 한 것. 먼나라 이웃나라 웃을 데 없었던 것 생각하면…….

 


 

 


224. 나 혼자 회의한다

야마자키 타쿠미 지음 / 양혜윤 옮김 / BOOKULOVE / 2021

 

회의는 정말 하기 싫었다. 회의會議. 사전적으로 그것은 모은다-뜻을이라는 의미지만 현실세계에서는 대체로 모여라-내 뜻에라는 용법으로 쓰인다. 그래서 회의는 100명이 모여도 최대 한 사람만 만족하는, 까딱 재수 없으면 누구도 만족하지 못하는 백해무익/백해일익한 기묘한 활동으로 끝나기 마련이었다. 그러니 회의에 회의적이 될 수밖에. 가뜩이나 그런 회의를, 이제 심지어 나 혼자서도 하라고? 희의적이었다.

 

하지만 100명이 하는 회의가 100해무익/1001익의 선택지를 낳는다면, 혼자서 하는 회의에서는 그 ‘11이 내가 될 수도 있다! 그러니까 이건 확률이 꽤 높은 게임이다. 잘만 하면. 어떻게 해야 잘할 수 있는지 궁금하시다면, 읽어보시길.

 

딱히 큰 기대는 마시길.

 

스스로에게 미래를 더 희망적으로 만들기 위한 질문을 해보라. 그리고 그 답을 말이나 문자로 표현해보라. 중요한 것은, 마음속으로 답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종이에 쓰거나 다른 사람에게 말(선언)하는 것이다. 물론 애초에 이미 자신의 마음속에서 예상하고 있던 답을 쓰거나 말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쓰거나 말하는 순간, 또 다른 감정이 생겨난다. 이번에는 새로이 생겨나는 감정까지도 말이나 문자로 표현해보라.

  그 순간, 당신의 마음의 겉껍질(감정)이 한 장 스르륵 벗겨진다. 그리고 그 안에 있던 또 다른 새로운 감정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 감정 역시, 그대로 다시 써보자. 그럼 또 하나의 감정이 스르륵 벗겨지고, 새로운 감정이 점점 진짜 자신의 감정 속으로 안내하게 된다.

_ 야마자키 타쿠미, 나 혼자 회의한다

 

 

 

--- 읽는 ---

글쓰는 삶을 위한 일 년 / 수전 티베르기앵

소사이어티 없는 카페 / 성일권

7일 공부법 / 스즈키 히데아키

상표전쟁 / 신무연 외

쉽게 배우는 통계학 / 구로세 나오코

나의 첫 파이썬 / 에릭 마테스

아무도 아닌 / 황정은

단어의 배신 / 박산호

젠더 모자이크 / 다프나 조엘, 루바 비칸스키

쇠퇴하는 아저씨 사회의 처방전 / 야마구치 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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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1-06-25 20:4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하여튼 우리 초 사이오 님은 읽은/읽는/읽을 책이 저하고 조금씩 핀트가 맞지 않아요. ㅋㅋㅋㅋ

syo 2021-06-25 20:42   좋아요 3 | URL
그래서 제 입장에서도 폴스타프님은 겁나 신비로운 사람인 것입니다ㅋㅋㅋㅋㅋ

반유행열반인 2021-06-25 21:0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몇 년 전에 마션 읽으면서 제일 감명 깊었던 건 그 무한한 긍정, 혼자 남아서도 농담치는 그 무사태평. 과학이 살린 게 아니라 긍정이 살린 거야 쟤는..했어융. 마션 좋아서 아르테미스도 봤는데 그건 후졌음 ㅋㅋㅋ

syo 2021-06-25 21:06   좋아요 3 | URL
아르테미스도 읽어봐야지 하고 있었는데.....
근데 어차피 지금 리스트에 올려놔도 이번 여름에 읽을 수나 있을지......
그러다 시간 지나면 약발 다 떨어지면서 안 읽게 되겠지.....

반유행열반인 2021-06-25 21:11   좋아요 2 | URL
시간 남아 돌고 심심하고 그런데 읽을 건 없고 하면 읽는 대도 안 말리지만… 남는 건 욕 뿐이에요. 진짜 좆나빌어미친젠장 이런 욕이 나온다니까?! 영어로 찾아보니 funt (아마 fxck cxnt )이런 신조욕 가득ㅋㅋㅋ) fusumitch(fxck sxck bxtch )이런거 섞은 거… 그때 번역보고 너무 궁금해서 몇날 며칠 원서 구글링해봄 ㅋㅋㅋㅋ마션은 영화도 그럭저럭 좋았습니당

새파랑 2021-06-25 21:1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많은 책을 동시에 읽는다는게 언제나 신기하네요~! 파이썬과 통계학을 보면 공대출신 이신거 같은데~ 다른책들 보면 작가같기도 하고...

syo 2021-06-29 14:13   좋아요 1 | URL
요즘은 공대 출신 아니어도 파이썬이나 통계학 책 읽는 일이 예전보다 많겠지만,
네, 공대 출신 맞습니다 ㅎㅎㅎㅎㅎㅎ

다락방 2021-06-25 21:2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젖탱이 부분 읽다가 나도 빵터져서 페이퍼 썼던 것 같은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몰리 2021-06-26 06:29   좋아요 0 | URL
아 이 댓글에 빵터짐.
저 그 페이퍼 읽은 거 같아요. 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1-06-26 08:39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syo 2021-06-29 14:13   좋아요 0 | URL
저런 유쾌한 친구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겠지? ^ㅂ^

레삭매냐 2021-06-25 21: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앤디 위어의 달나라판
삼시세끼, 책으로 만나봐야
하는데...

syo 2021-06-29 14:14   좋아요 0 | URL
책이라는 것이 진짜 많긴 많군요.
매냐님의 사정권 바깥에도 책이 있다니....

공쟝쟝 2021-06-25 22:1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마션 ㅋ 영화 존잼이었는데 책으로도 읽으면 더 꿀잼이겠다 생각했는데 역싀 읽어야겠다요!!

syo 2021-06-29 14:15   좋아요 0 | URL
재밌습니다.
우주복이니 우주선이니 하는 과학적 얼씨구절씨구들은 이과생 읽으라고 주고 나서도 재미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