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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1
가와바타 야스나리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02년 1월
평점 :
새하얀 나라의 나는 부디
눈에 관해서라면 작년은 좀 유별났다. 첫눈이 11월 첫날이었다. 크리스마스에는 크리스마스니까 당연하다는 듯이 눈이 왔다. 첫눈과 크리스마스 사이에도 눈은 이 별이 기어이 망했구나 싶을 정도로 쉼 없이 내렸고, 그래서 우리는 자주 다퉜다. 그러다 마침내 헤어졌다. 우리니까 당연하다는 듯이. 크리스마스와 새해 첫날 사이의 어느 날이었다. 부주의했다. 이 별 걱정이나 하다가 이별이나 하다니. 제 사랑이나 돌볼 것이지, 별보다 천천히 멸망하는 사랑이 어디 있다고. 우리 사랑의 안위가 어찌 되었건 눈은 그냥 계속 내렸다. 헤어지기 전에도 내렸고 헤어지는 중에도 내렸고 헤어지고 나서도 내렸다. 크리스마스 날이 우리가 헤어지기 전인지 헤어지는 중이었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지만, 하여간 그날은 기록적인 폭설이었다. 그날을 반지하에서 기념한 연인들은(우리는 아니다) 아마 아주 긴 밤을 보냈을 것이다. 눈이 사람들 가슴 높이까지 쌓였으니까. 오늘 밤은 왜 이리 긴 걸까, 창문을 두드리는 저 어둠은 왜 물러가지 않는 걸까. 알람은 울리는데 왜 해는 뜨지 않는 걸까……. 정말이지 기록적인 블랙 크리스마스였다. 이 세상에도, 내게도.
다 눈 덕분이었다. 눈이 쉼 없이 내려서 우리는 아주 원 없이 다툴 수가 있었다. 겉으로 보면 우리는 서로의 미운 모습을 미워하고 고운 모습을 고와하는 보통의 연인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미움과 고움을 테트리스 조각들처럼 요리조리 잘 맞춰 한두 줄씩 상쇄시켜가며 또 다음 조각의 낙하를 준비하는 필수적 연애 기술이 결핍된 사람들끼리 만난 운 나쁜 케이스이기도 했다. 그렇게 각자의 마음속 지하실에 미움은 미움대로 고움은 고움대로 쌓아 올리기를 몇 년, 언제부턴가 우리는 그야말로 애증의 관계라는 말의 사전적 정의라고 해도 될 법한 사이가 되어 있었다. 애가 범람할 때는 증오하던 자신을, 증이 끓어 넘칠 때는 애정하던 자신을 이해할 수 없어하며, 낙원으로 출근하고 전쟁터에서 퇴근하는 심상찮은 연애를 꾸역꾸역 이어나갔다. 하지만 우리에게도 자각이라는 게 있어서 이러다 조만간 큰일 날 공산이 크다는 걸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알아챘고, 이내 둘만 있을 때는 싸우기보다 침묵으로 시공간을 낭비해버리자는 암묵적 합의에 도달했다. 그러나 또 아예 안 싸울 수는 없었던 우리는 밖에서, 그러니까 공공장소에서, 이를테면 보행자 통행량이 많은 지역의 사거리 스타벅스 통유리 안쪽에서 아메리카노를 시켜 놓고, 혹은 퇴근 시간 선릉역 분당선 고색 방면 3-3번 대기열 왼쪽과 오른쪽에 나란히 선 채로 우리 운명에 할당된 다툼의 총량을 의연하게 채워나가기로 한 것이다. 스타벅스에서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놓고 마주 앉으면 아무리 세게 다퉈도 서로의 얼굴에 그걸 끼얹어 후에 벌어질 끔찍한 일들을 감수할 정도까지 분노가 축적되는 일은 없었고, 집으로 돌아가는 직장인들이 꽉 들어찬 열차 안에는 팔을 들어 휘두를 만한 여유 공간이 없었기 때문에 싸대기를 날릴 만큼의 증오가 폭발하는 일도 없었던 것. 주머니 사정이 좀 괜찮을 때는 스타벅스로, 그렇지 못할 때는 선릉역으로, 우리는 가서 다퉜다. 두 곳을 방문하는 빈도가 처음엔 비슷하다가 이내 스타벅스 쪽으로 치우치게 된 것 이유도 다 눈이었다. 언쟁의 텐션을 올려 가다가도, 문득 창밖에 내려 쌓이는 검은 눈에 눈길이 가면 끓던 분노가 시원하게 식어가는 느낌을 받곤 했던 것이다. 어느 날, 그날도 그다지 중요치 않은 무언가를 놓고 이게 다 니 탓이네, 그게 다 천만의 말씀이네, 싸우는 중이었는데, 이유는 아무래도 기억이 나질 않지만 하여간 내가 언성을 높일 차례에서 나는 분노에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화에 취해서, 내 터져나가는 울화통의 안쪽 면을 까뒤집어 낱낱이 보여주겠다는 욕심에 취해서 인사불성으로 막 뭐라고 쏘아대다가 정신줄을 잡아보니 내 앞에 앉은 그 사람은 내 거친 말이나 불안한 눈빛 같은 건 이 세상에 없는 것이라는 평온한 표정을 하고 통유리 바깥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었다. 아니, 지금 이게 무슨 경우 없는 경우-를 외치며 나는 벌떡 일어섰는데, 아, 바깥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검고 굵은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나는 검지를 허공에 쑤시는 자세 그대로 굳어 서서 잠깐 밖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그대로 둔 채로 엉덩이만 다시 의자에 붙였다. 그리고 나도 그 사람도 말없이 내리는 눈을 한참 바라보았다. 바쁜 걸음으로 길을 재촉하는 사람들의 머리 위에, 어깨 위에, 바짓단에, 발끝에, 굵고 검은 눈이 묻어 있었다. 저녁은 아직 오지 않았지만 세상이 온통 눈으로 검었다. 우리가 겨울을 여기서 보내겠구나, 내리는 눈을 보며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그리고 겨울의 꼭대기가 도착하기 전에 우리는 헤어졌다.
다른 날이었다. 왜, 약국에서 안약 줄 때, 그 사람이 말했다. 약사가 그러잖아, 안약은 개봉 후 1개월 지나면 버려야 되는 거 아시죠? 뭐 이렇게. 나는 대답 없이 그저 눈에 안약을 넣는 일에 집중했다. 그 사람도 내 대답을 기다릴 작정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늘 그렇듯 우리가 하고 있던 것은 대화처럼 보이는 것일 뿐이지 대화는 아니었으니까. 한 달 지난 안약을 사람들이 꼬박꼬박 폐기하는 게 보통이라면 약사들도 그렇게 그걸 강조하지는 않을 거잖아. 사람들이 참 그래. 반대쪽 눈까지 투약을 마친 나는 눈을 깜빡여보고는 눈물처럼 흐르는 안약을 스타벅스 로고가 찍힌 티슈로 닦아내며 대답했다. 난 안 그래. 그럴 일이 없지. 난 안약 한 통 다 쓰는 데 한 달도 안 걸리거든. 그러자 그 사람이 말했다. 그래. 넌 그래. 넌 그런 사람이야. 그래서 우리는 헤어지자. 나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그즈음에는 이제 다툼의 한 챕터를 닫고 조만간 또 새로운(완전히 새롭지는 않은) 챕터가 열릴 때까지 잠깐 쉬어가자는 제안의 줄임말로 이럴 거면 우리 헤어지자는 구절을 사용하곤 했으니까. 누구 한 사람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오면 상대방은 그냥 침묵한다. 그리고 넌지시 창밖을 보면 언제나처럼 눈이 내리고 있고, 온통 검게 덮인 세상이 우리의 마음에 암막을 쳐 주는 것. 그 암막 안에서 각자의 생각을 다스리며 시간을 보내다가, 허기가 질 때쯤 손을 잡고 일어나 가까운 식당에 가서 쌀국수와 분짜를 시켜 나눠먹는 것. 그것이 우리가 조리하는 다툼의 코스요리였다. 그렇지만 그날은 거의 모든 게 달랐다. 두 사람이 바깥을 바라보는 것까지는 같았지만, 끝나지 않는 그 사람의 말이 계속 침묵을 적셨고, 침묵은 물에 빠진 휴지 쪼가리처럼 산산이 흩어지는 중이었다. 너는 그런 사람이지. 남들은 보통 한 달이 지나도 버리지 않는 안약을 한 달이 채 되기도 전에 다 써 버리는 사람이지. 왜냐하면 쉬지 않고 안약을 넣으니까. 적당히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이제 들지도 않고, 너가 왜 그러는지가 이제 중요하지도 않아. 그냥 나는 지금 그런 너가 싫어. 이제 와 싫어진 건지 애초부터 싫었던 걸 더는 못 참게 된 건지는 잘 모르겠어. 하지만 지금 확실히 너는 그런 사람이고 나는 이런 사람이야. 이번에는 뭔가 좀 다르다고 느낀 나는 당황에 차서 그 사람을 바라보았지만 그 사람은 여전히 내 쪽으로는 시선도 두지 않고 그저 내리고 쌓이는 눈만 쳐다보고 있었다. 어차피 이쪽을 바라보지도 않을 걸 직감했으면서도 나는 마치 눈이 마주칠까 두려워하는 사람처럼 얼른 고개를 돌려 다시 바깥으로 시선을 던졌다.
너는 우리가 잘 될 것 같아? 나는 안 될 것 같아. 이제 이러는 것도 지쳤어. 지치지 않아? 싸우고, 화해하고, 싸우고, 밥 먹고, 싸우고 섹스하고, 다시 싸우고, 또 싸움이 아닌 뭔가를 하고…… 싸움과 싸움 사이에 뭔가를 끼워 넣으려고 만나는 건 진짜 아니잖아. 더는 못 하겠어. 이런 게 일상이 되는 건 어떻게든 참을 수 있었는데, 일상이 이렇게 되는 것까지는 아무래도 못 하겠어. 내가 할 말을 찾지 못하는 동안 내 눈동자는 통유리 바깥 세상 여기저기를 찌르며 돌아다녔다. 바깥은 너무 어두웠다. 검은 눈송이는 옅은 바람에 흔들리는 커튼처럼 허공에 암막을 쳤고 어떤 빛도 그 사이를 뚫고 들어올 만한 용기가 없는 듯했다. 눈이 내리고 있는지 공중에 멈춰 있는지 구분하기도 어려웠다. 저렇게 검은 눈들도 녹으면 투명한 물이 되는데, 세상은 이번 겨울에 저 쌓인 눈들을 물로 바꿔 치워낼 생각이 없는 것만 같았다. 끝인가, 다 끝났나, 그런 말을 나도 모르게 툭 내뱉었던 것도 같다. 그 사람이 다시 입을 열었다. 통유리에 어렴풋이 비친 그 사람은 나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었다. 고개를 돌리면 눈을 마주칠 수도 있었을 텐데, 그 순간 그만한 용기를 내는 일이 너무도 어려워 나는 그저 밖을 바라보는 척 통유리에 비친 그 사람을 바라보며 묵묵히 그 사람의 마지막 이야기를 들었다. 최근에는 저 눈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이렇더라도 세상이 지금과 조금 달랐다면 또 어땠을까, 그런 생각을 자주 했어. 그러니까 어딘가에 평행 세계 같은 게 있어서, 거기도 너가 살고 내가 살고 우리가 만나서 사랑하는데, 근데 그 세상에 내리는 눈은 흰색인 거야. 여기와는 다르게 눈이 새하얘서 눈이 내리면 세상이 막 밝아지는 거야. 블랙 크리스마스라는 말 대신 화이트 크리스마스라는 말이 있고, 캐럴 노래의 가사도 온통 하얗고 하얀…… 말도 안 되는 생각이지만 그런 세상에 또 다른 우리가 있다면, 거기 사는 우리가 여기의 우리와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사랑하면서 산다는 게 완전히 말도 안 되는 소리는 아닐 것 같다는, 뭐 그런 생각. 그치만 여기서는 이제 안 돼. 이 세상에서 우리는 끝났어. 지금 돌아보면 시작부터 이미 틀어져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다 틀렸어. 너도, 나도, 세상도. 우리가 계속 만나려면 저 세 가지 중에 뭔가 하나라도 부여잡고 갈 만한 게 있어야 했는데. 여기서 우리는 더 할 수 있는 게 없어.
눈이 그쳤다. 바깥 세상이 밝아지자 더는 통유리에 실내가 선명하게 되비치지 않았다. 나는 그 사람이 앉았다 간 자리를 바라보며 흰 눈의 세상에 대해 생각했다. 눈 내리는 날 환해지는 세상. 눈사람이 하얀데 우리는 견딜 만큼만 다투고, 눈이 내려앉은 나뭇가지가 목화처럼 보이는데 헤어지지 않는 우리가 있는 세상. 아주 작은 것이 다른데 그것만으로 모든 것이 달라지는 세상. 그 세상에도 그 사람이 좋아하던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있고, 우리가 몇 번씩이나 읽고 이야기 나누던 『설국』이 있다면, 아마 그 책의 첫머리는 여기와는 다르게, 그러니까 이렇게 시작했겠지.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그러니까 그쪽의 내게 말해주고 싶다. 그쪽 세상이 조금 더 아름답다. 조금 더 아름다운 그쪽 세상의 문장처럼. 더 아름다운 세상에서 사는 사람이 할 수 있고 해야 할 일에 실수하지 않기를 바란다. 여기는 다시 눈이 내리고 있다. 밤의 밑바닥은 자꾸만 검어진다. 눈의 나라라도 될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