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슨 투 더 파프리카
꿈을 꾼 건 오랜만이다.
꿈속의 나는 아는 사람 조금과 함께 모르는 사람 다수가 떠드는 공간에서 떠들고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말을 참 잘했는데, 그건 그들에게 그런 것들을 말할 자격이 있기 때문이었다. 꿈속의 나는 알 수 있었다. 단단한 성격의 A는 단호하게 말하지만 그 단단함과 단호함은 모두 무르고 들큼한 상처를 오래 눌러서 만들어 낸 것이지. 저토록 차분하게 말하는 B는 그 기적 같은 공감 능력으로 다른 마음을 넘나들며 얼마나 큰 파도들을 제 안에 눅여 왔을까. 도무지 실수하지 않고 모든 질문에 대답하는 C는 한 권을 읽어도 그 책의 모든 문장이 제 문장이 될 때까지 좌초하지 않고 되풀어 읽는다던가. 자기가 사랑하는 것에 대해 말할 때면 티끌만 한 누락도 보아 넘기지 않는 D의 촘촘한 목소리가 들리는구나. 아, 그럼 다음은 내 차롄데…….
머쓱한 표정으로(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입을 열었을 때, 입 밖으로 쏟아져 나오는 것은 소리가 아니라 파프리카였다. 사람들이 모두 나를 보고 있었다. 노란 파프리카였다. 바닥을 구르는 그것들을 보고 있자니 할 수 있는 말이 문득 생각났다. 나는 잠시 입을 다물고 숨을 골랐다. 사람들은 태연하고도 다정한 눈빛으로 내 입술을 응시하고 있었지 파프리카를 보고 있지 않았다.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그린 파프리카였다. 그것이 여름날 마법의 콩나무 줄기처럼 줄줄이 쏟아져 나왔다. 나는 마음이 급해져서 손짓 발짓을 동원해가며 말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파프리카를 뱉는 사람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고 생각했을까. 하지만 사람들은 입에서 나오는 파프리카는 물에서 나오는 물고기처럼 하나도 이상할 게 없다는 표정을 하고 간혹 고개를 끄덕여가면서 내 파프리카를 들었다. 할 수 있는 말을 겨우 찾았는데 그 모든 말이 고작 파프리카가 되고 보니 그제야 하고 싶은 말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나는 다시 입을 닫았다. 이제 다시 이 입을 열면 내가 정말 하고 싶은 말을 시작할 텐데, 그게 다른 무엇일 수는 있어도 파프리카일 수는 없을 텐데, 그럼에도 파프리카라면 이번에는 정말 슬플 텐데, 빨간 파프리카라 해도 참을 수 없이 외로울 텐데. 공간은 괴괴하고 내 입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빛에는 떨림이 없었다. 쏟아진 노랗고 파란 파프리카들은 자기들끼리 줄을 맞추더니 소리도 없이 계단 아래로 제 몸을 굴려 내려가고 있었다. 나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할 수 있는 말들과 하고 싶은 말들이 머릿속을 빙글빙글 돌았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늦은 장마가 온다고 해서,”
이처럼 아끼며 간직했던 많은 것을 내보냈던 시절이 있었다. 당신이 해변에서 손가락으로 그려준 상자 안에 세상 모든 것이 들어 있다고 믿었다. 나는 문 앞에서 밀물처럼 밀려오는 밤길을 나란히 걸어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_ 김이듬, 『안녕, 나의 작은 테이블이여』
매일 밤 꿈에 내가 만들 수 있을 것 같은 아주 크고 굉장하며 아름다운 조각들을 봐요. 손을 뻗으면 만질 수 있을 것처럼 너무나 선명해요. 제 상황은 점점 나빠지는데, 꿈은 점점 자라나요. 마치 그것들이 제게 <만들어 줘, 보여 줘, 존재하고 싶어>라고 요구하는 것 같아요. 그런데 그걸 단 하나도 못 만들까 봐 두려워요.
_ 스콧 맥클라우드, 『조각가』
방으로 돌아가서는 이불로 배를 덮고 누웠다. 오후가 되어서 무더웠는데도 발가락이 싸늘했다. 발을 북쪽에 두고 누웠기 때문인가 싶어서 발을 동쪽으로 머리를 서쪽으로 조금 움직여 두었다. 그렇게 누운 방향이 익숙하지 않아 다시 움직였다가 또다시 움직였다. 움직이길 계속하다 보니 본래 누웠던 방향으로 돌아와서도 어딘가 익숙지 않았다. 나침반의 바늘처럼 허리 부근에서 몸이 들린 채로 부들부들 흔들리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얼핏 잠들었다가 깼다가 하면서 두서없이 이것저것을 생각했다.
_ 황정은, 『백의 그림자』
--- 읽은 ---
233. 자기 자신을 좋아하게 되는 연습
야하기 나오키 지음 / 이정은 옮김 / 홍익출판미디어그룹 / 2021
의사들은 환자가 진료실에 들어오면 이렇게 문진부터 시작하는데, 그래야 적절한 처방을 내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병원을 찾은 환자 자신이 치료의 답을 가지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나는 이런 일이 일상적인 상황에서도 똑같이 작용한다고 믿습니다. 나 혼자 떠들어 댈 것이 아니라 상대의 상황과 필요를 먼저 물어보는 태도 말입니다.
상대가 나와 생각이 다르다고 생각하면, 일단 그의 말을 들어봐야 합니다. 그러면 환자가 그렇듯이 그 사람이 스스로 문제 해결의 답을 말하게 됩니다.
우리 사회는 생각이 다른 사람들끼리의 분쟁으로 얼룩져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모든 갈등은 ‘남에게 상처를 주어 고통스럽게 하면 반드시 똑같은 고통을 받게 된다’는 가르침을 잊어버렸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들입니다.
내가 먼저 남을 인정하면 그것이 나에게 그대로 돌아오고, 내가 남을 배척하면 그 또한 나에게 그대로 돌아온다는 사실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_ 야하기 나오키, 『자기 자신을 좋아하게 되는 연습』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고 있지만 이런 뻔하디 뻔한 이야기만 잔뜩 쓰여있는 책을 좋아하게 되지는 않는 것 같다. 아, 모르는 이야기 좀 해줘.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요런 식상한 이야기들 말고.
234. 상표전쟁
신무연 외 지음 / 이담북스 / 2020
갑자기 이 책을 읽을 생각은 왜 든 것일까? 허허허. 좋은 책인지 아닌지 판단할 역량도 관심도 없어서 이번 독서는 이러구러 망한 것이다…….
235. 1년 만에 교포로 오해받은 김아란의 영어 정복기
김아란 지음 / 시대인 / 2019
Q4. 슬럼프는 어떻게 극복하셨어요?
A. 슬럼프라는 건 없었습니다. 물에 빠졌다고 생각해 보세요. 물 밖으로 나가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을 것입니다. 물에 빠져 헤엄쳐 나와야 하는 사람에게 슬럼프에 빠질 여유가 있을까요? 저는 물에 빠져 헤엄쳐 나와야 하는 사람처럼, 영어를 배워야겠다는 목적이 분명하고 강렬했습니다. 세상에 제가 보고 싶은 변화를 만들어내기 위해선 제가 영어를 잘해야 했으니까요. 그래서 슬럼프에 빠질 여유 따위는 없었습니다. 슬럼프는 사치입니다. 나약한 의지와 귀찮은 감정에 대한 구실 좋은 핑계일 뿐입니다. 슬럼프가 왔다고 느낀다면, 애초에 왜 영어를 배우기 시작했는지 그 목적을 생각하세요.
_ 김아란, 『1년 만에 교포로 오해받은 김아란의 영어 정복기』
대단히 노력해서 대단한 성과를 만든 대단한 사람이 쓴 대단한 책. 맨날 슬럼프니 뭐니 징징거리기 바쁜 syo는 얻어터지는 심정으로 일독함. 인용한 부분이 하필 이래서, 많이 비판받는 자기계발 담론과 큰 틀에서 다르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어떤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들은 자신의 성공에 대해 이야기할 때 대체로 저런 식으로 말을 한다. 그리고 선한 영향력을 퍼트리는 게 자신의 목표라고 말하더라. 선한 영향력. 세상에 변화를. 훌륭하고 멋진 말들이지만 그래서 때로 무섭다. 슬럼프는 사치다, 정신 똑바로 차려라 하는 호통과 섞이면 더욱 무섭다.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하지만 슬럼프 경험이 없었다는 사람이 슬럼프는 사치고 의지박약이라는 말을 저렇게 단호하게 해도 되는 걸까? 뭔가를 잘하는 사람은 못하는 사람이 겪은, 자신은 겪어보지 않은 경험에 대해서도 단정할 자격이 생기는 걸까? 나는 아직 뭔가를 잘해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다.
236. 처음 회계
편도선 지음 / 좋은땅 / 2019
이 책의 특징은 후반에 세법 관련 내용이 몇 쪽 있다는 것. 친구와 함께 떡볶이집을 운영하기로 한 청년이 회계학 교수인 엄마의 도움을 받아 영업에 필요한 이런저런 회계 지식을 익힌다는 컨셉이다. 주인공이 사업자다보니 세무관련 지식도 조금은 필요하다고 본 듯. 그 부분은 외삼촌이 맡는다. 든든한 집안. 회계 분야는 ‘처음’ ‘첫’ ‘처음이지?’ 유형의 책들이 꽤 많다. 다들 어슷비슷해서, 이제는 그냥 본격 회계원리 교재를 한 권 파는 게 낫겠다 싶기도 하다.
237. 나의 첫 파이썬
에릭 마테스 지음 / 한선용 옮김 / 한빛미디어 / 2020
소멸한 지 벌써 10년도 더 된 공대생 야성을 회복하고자 최근 코딩 책을 좀 보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이런 책이 뭐 어떻다 평할 수 있는 실력이 될 때까지는 책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으려고 한다. 앞으로도 한동안은 이 대사를 복붙할 예정입니다.
--- 읽는 ---
사람의 씨앗 / 전호근
AI 최강의 수업 / 김진형
오후의 글쓰기 / 이은경
모두의 데이터 분석 with 파이썬 / 송석리, 이현아
응답하는 사회학 / 정수복
안녕, 나의 작은 테이블이여 / 김이듬
여성, 타자의 은유 / 김애령
이 짧은 시간 동안 / 정호승
살인자의 건강법 / 아멜리 노통브
데이터 분석을 떠받치는 수학 / 손민규
데미안 / 헤르만 헤세
마르크스의 『자본론』 읽기 / 최형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