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명한다는 사진
1
곧 서른여섯이다. 사회적·경제적 평면에서 관측하면 열여섯만도 못한 서른여섯이지만, 얼굴만은 그렇지 않다. 어느 나이가 되면, 사람의 얼굴은 그 사람의 마음을 비춘다고 한다. 그 말을 믿을 만하다.
거울 속의 내 얼굴은 어떻게 만들어졌나.
서른다섯 해 동안 내가 고른 선택지들, 미워하는 마음과 사랑하는 마음들, 웃었던 횟수, 인상을 찡그리며 내뱉은 욕지거리, 분노, 질투, 인정받고 싶은 욕구와 인정하고 싶지 않은 욕구의 길항, 포기한 꿈, 포기한 믿음, 포기한 사람, 언젠가 다녀왔던 그 평화로운 바다를 떠올릴 때마다 옅게 풀어지는 마음의 꾸러미, 비 내리는 날이면 부르고 싶은 이름과 이름과 이름들……
이제는 결정된 저 얼굴을, 남은 삶을 나는 잘 짊어질 수 있을까.
다 똑같은 과정을 거쳐요. 청춘은 반복돼요. 왜냐하면 누구에게나 한 번뿐이고 지나고 나면 돌아갈 수 없으니까요. 제가 얻은 가장 큰 깨달음은 사람이 나아지는 건 너무나 어렵다는 것. 예전에는 많이 배우면 나아지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에요. 시간이 흐른다는 이유만으로 인간이 진보하진 않아요. 시간이 지난다고 세상이 진보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죠.
_ 김연수, 『청춘의 문장들+』
2
어쩌면 나는 나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힘이 부족하여 상상력이라는 보행기를 타고 겨우 한 발씩 앞으로 나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픔을 과장하고, 슬픔을 창조하면서. 내가 아는 나는 내가 만든 나고, 내가 발견하지 못한 어떤 나들이 잔뜩 있는지도 모른다. 그 나들을 똑바로 바라보지 않고서 내가 글을 써나갈 수 있을까. 내가 내 얼굴을 살아갈 수 있을까.
그때 달 하나 마치 나를 그릴 것처럼 저 혼자 내 속에서 돋아나더니 내 속을 빠져나가 걸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어둠에 감추어져 있던 나는 그렇게 빛 아래 서게 되었는데 (어쩌다가 내 속은 달을 돋아나게 했을까, 일테면 파충의 기억을 내 속은 가지고 있었던가) 후두둑 까마귀가 날아가는 소리 컹컹 늑대 우는 소리 저 먼 산이 나무들을 제 품속에서 끄집어내어 올빼미를 깃들게 하고 (그때 또 달 하나 저 혼자 내 속에서 돋아나더니 내 속을 빠져나가) 먼저 걸어나간 달이 새로 걸어오는 달을 성큼 집어먹자 산은 깃든 올빼미를 얼른 품으로 끌어안아 들였습니다 (그때 또 달 하나 저 혼자 내 속에서 돋아나서는 내 속을 끌고 허공으로 걸어갔습니다) 달을 집어먹은 달은 새로 걸어오는 달과 내 속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때 빛 속에 서 있던 나는 내 속을 성큼 집어먹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 바라보았습니다 내 속에서 돋아든 달과 내 속을 집어먹은 나는 그렇게 서로 바라보았습니다
_ 허수경, 「그때 달은」 전문
3
1920년대에는 이후 보부아르에게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과 카를 마르크스의 사상이 아직 소르본의 교육 과정에 포함되지 않을 때였다. 이는 당시 소르본의 철학 교육 과정이 편협했기 때문이었지만, (…)
_ 우르술라 티드, 『시몬 드 보부아르, 익숙한 타자』, 22쪽
헤 선생님 또 나왔다. 소오오오름. 정말 도망을 칠 수가 없는 인간이다.
그나저나 보부아르처럼 뛰어난 인재가 왜 굳이 저렇게 ‘철학 교육 과정이 편협’한 학교에서 철학을 공부를 하였는고하니,
보부아르는 파리대학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명문 고등사범학교인 소르본에서 철학 교수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미래의 배우자인 사르트르와 동시대의 남성들 대부분은 유명한 에콜 노르말 슈페리에르에서 수학하였다. 파리 센 강의 남쪽 중심부에 있었던 이곳은 프랑스 엘리트 지식인들에게 인기가 높았던 중고등사범학교였다. 1925년에 여성들은 그곳에 들어갈 수 없었다. 대신 파리 남서부 교외에 위치한 세브르의 에콜 노르말 슈페리에르 소속 여성 분교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곳에는 철학 과목이 없었기 때문에 철학을 공부하려면 소르본에 가야 했다.
_ 같은 책, 21-22쪽
이런 사연이 있었다고 합니다.
4
어지저찌 만난 보부아르와 사르트르. 그들은 지금 롱디 연애 중인데, 정말 오랜만에 만나 너른 초원의 풀밭에 함께 누워 하늘을 보며 다정한 사랑의 밀어를 나누는 중이다.
다정한 사랑의 밀어 (괄호는 syo)
- 보 : 그럼 당신은 후설의 어떤 점에 가장 끌린 거야? (후설이라고? 얘들아, 너네가 잘 모르는 것 같아서 알려주는 건데, 보통 사람들은 이 타이밍에 후설이 아니라 후식 이야기를 꺼내)
- 사 : 최초의 의식을 향해 거슬러 올라가려는 그 의지가 흥미로워. (그걸 또 받냐?) 그건 어떤 면에서는 물리학자에게 원자와 같은 의미라 할 수 있지. 난 의식이 떠돌고 있다고는 생각지 않아. 실재와 무의식 같은 것 사이를 떠다닌다고 말이야! (느낌표 날리지 마, 그런 대화 할 분위기 아니라고 지금)
- 보 : 그래서 당신 생각은 결국 뭐지, 사르트르? 그 안에 무엇을 끌어들이고 싶은 거야? 주체로서의 ‘나’? (아…… 정말 첩첩산중이군)
- 사 : 확실하지는 않아! (그래, 확실해질 때까지 이 이야기는 여기서 접……)
- 보 : 그렇다 해도 ‘나’는 내재성, 그 겹겹의 깊이의 생산자야. ‘나’가 있어야만 자의식의 문제를 풀 수 있어. (그 문제는 집에 가서 조용히 혼자 풀어도 되잖아. 꼭 여기서 이래야 돼?)
- 사 : 아냐, 카스토르. 나는 의식이란… 지향성에 의해 정의된다고 생각해! (그래, 생각해. 생각하고 그 입은 좀 다물어 이제.)
- 보 : 그렇다면… 의식이… 욕망하는… 모든 대상은… (그렇지, 그렇지, 분위기 깔아! ‘…’ 을 막 남발하란 말야!)
- 둘은 마주보고 씨익 웃는다 (지금이다! 너희들이 해야 할 일을 해! 롱디 커플이 간절히 원하는 뭔가를 시작하라고. 내가 눈을 가리고 있을 테니까(거짓말)……)
- 사 : 의식은 대상을 겨냥해. 미래에 있을 수밖에 없는 일종의 초월이거든. 당신은 언제나 나를 믿어도 돼. 알겠지? (아, 임마, 제발 그 혀를 말하는 데 쓰지 마라……)
- 보 : 하하! 그러니까 방금 한 이야기에 비춰 보자면, 여자는 더 연약하니까 욕망과 관련해서 남자에게 의지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고 싶은 거야? 의식으로서 자신을 정의하자면 그래야 한다는 거군! 그건 남성우월적 생각이잖아! (갑자기? 그게 왜 또 갑자기 그렇게 돼? ……혹시 니들 지금 니들이 무슨 말을 주고받는지 잘 모르면서 모르는 거 들키면 쪽팔릴까봐 그냥 아무 말이나 막 던지는 중인 건 아닌지 난 참 의심이 되고 그렇다?)
- 사 : 하하하! 또 말하고 싶었던 건 내가 베를린에 가면 당신은 나를 몹시 그리워할 거라는 거야. (아, 그걸 아는 새끼가 이래?)
나는 사르트르와 보부아르가 애정과 치정이 난무하는 파격적인 계약연애를 했다는 사실보다, 저러고 연애했다는 것이 더 놀랍고 충격적이다. 보부아르가 아니라 그 누구하고라도, 저런 연애는 딱히 하고 싶지가 않다…….
--- 읽은 ---
+ 철학자 김진영의 전복적 소설 읽기 / 김진영 : 184 ~ 303
+ 겨울 숲으로 몇 발자국 더 / 이경임 : ~ 155
+ 장폴 사르트르 / 마틸드 라다미에, 아나이스 드포미에 : ~ 165
--- 읽는 ---
= 현대 철학 아는 척하기 / 이병창 : 178 ~ 331
= 알레프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 90 ~ 156
= 히쇼의 새 / 오노 후유미 : ~ 187
= 시몬 드 보부아르 익숙한 타자 / 우르술라 티드 : ~ 102
= 지금 당장 경영학 공부하라 / 김태경 : ~ 1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