왁스임시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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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투석실에 들어가 있는 동안 미용실에 다녀왔다. 매번 가는 곳에서 매번 해주시는 쌤에게 받았는데 매번 나오던 그 머리가 안 나왔다. 수고하셨습니다, 라고 쌤이 마무리멘트를 쳤을 때, 나는 정말이지 그 말을 믿고 싶지 않았다. 끝이라구요? 진심, 진심으로? 나를 이 꼴로 자동문 밖 저 거친 초원에 내던져 이 동네 빅재미의 마중물로 만드실 작정이세요? 나는 그저 현존재로서 세상에 피투된 초라하고 가냘픈 실존일 뿐인가요. 선생님, 저도 하나의 인간인걸요. 제게 존엄 같은 건, 없는 건가요?! 라고 말할까 말까 망설이는 동안 선생님은 망토(가운? 덮개? 목 치마?)의 찍찍이를 찌익 떼며 더없이 공손한 표정으로 카운터 방향을 가리켰다. 이럴 때 당황하는 기색을 보였다가 쿨하지 못한 인간인 걸 들키고말까봐(이 머리에 내면조차 쿨하지 못하다면 끔찍하다), 나는 과장되게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선생님께 인사를 건네고(+엄지손가락을 수줍게 올리고) 선선히 출입문 쪽으로 걸어 나갔다. 안녕히 가세요. 네, 쌤 다음에 또 올게요. 그러나 우리에게 다음은 없을 예정이다. 쌤도 그 사실을 대충 눈치 챘을 것이다. 이건 다, 선생님이 벌인 일이에요. 뜻밖에도 쌤이 날 재미있게 만드셨잖아요. 도저히 용서 못해. 나는 바람 부는 거리로 나섰다. 도무지 존엄하지 않은 머리를 하고.
다시 병원으로 가야 했다. 나는 머리를 괜히 손으로 계속 흩으면서 걸었다. 내 머리의 실체를 누구도 보지 못하게 하려고. 걸어가는 동안 등장하는 모든 유리에 한 번씩 얼굴을 비추어 보았고, 선팅된 자동차가 나타나면 멈추어 서기도 했다. 얼마 되지도 않는 머리카락을 이리 옮겨도 보고 저리 붙여도 보면서 갖은 수작을 다 부렸지만, 맥수지탄이다. 한번 망한 나라는 다시 일어서지 못한다. 새 나라를 세워야지. 새 나라 건국까지 적어도 두 달은 필요할 텐데, 나는 다음 날 당장 증명사진을 찍어야만 했다. 아, 그렇다면 임시정부를 수립해야 해.
엄마는 내 머리를 보더니 위로했다. 원래 엄마라는 존재의 외모 위로는 공신력이 없다. 동생도 내 머리를 보더니 위로했다. 똘똘하고 말 잘 듣는 공무원 같이 생겼다고. 여친도 내 머리를 보더니 위로했다. 귀엽게 잘 잘랐다고. 이게 위로가 필요한 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위로받고 싶은 날이면, 미용실에 간다.
우리는 현실을 쉽게 받아들인다. 아마도 그것은 그 어느 것도 현실이 아니라는 사실을 직관하기 때문일 것이다.
_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죽지 않는 사람」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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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게 사람들이 말하던 '오바이트'라는 거구나. 그전까지 위장도 비위도 제법 강해서 이렇게 본격적으로 토해본 적이 없던 나는 사람의 위 속에 들어갈 수 있는 음식의 양에 대단히 놀랐다. 기억은 하나도 못 하는 주제에 먹은 것은 이렇게나 많다니, 뇌는 없고 위만 있는 인간이 된 것 같았다. 게다가 오바이트라는 행위에는 포스트모던한 구석마저 있었다. 단일 식품에 위액을 섞어 어느 정도 해체한 후 전혀 다른 질감을 가진 형태로 바꿔 무규칙적으로 다시 섞은 다음, 역순으로 쏟아져 내리게 함으로써 플롯의 순서도 뒤집어놓는다. 매우 더럽고 전위적인 방식의 포스트모던이었다. 그렇게 뒤집힌 플롯을 따라 시간을 거꾸로 더듬어가며 기억에 없는 음식들이 기억에 있는 음식들로 넘어갈 때까지 토하고(오, 그래, 계란말이부터는 기억난다, 우욱, 뭐 이런 식으로…), 엄마가 깨지 않고 조심조심 화장실 청소까지 깨끗이 해 증거인멸까지 마친 후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기억이 또 끊겼다….
_ 김혼비, 『아무튼, 술』
아파트 단지 상가 1층에는 코 묻은 돈을 쥔 초등학생들과 충동구매의 화신인 아빠들이 애용하는 식료품점이 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우리 동네에는 세운마트가 있었다. 코딱지만 한 그곳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음침했다. 비좁은 내부에 안 팔릴 물건을 어찌나 많이 쑤셔 넣었는지, 과자를 걷어차지 않고는 통로를 지날 수 없을 정도였다. 한번은 라면을 고르느라 몸을 굽히고 있는데 어떤 아저씨가 그의 민망한 부분을 나의 엉덩이에 스치며 지나간 적도 있었다. 동굴 같은 입구의 좌우편에는 온갖 조잡한 사탕이며 조미 오징어, 아몬드, 말린 문어발이 걸려 있었다. 내 기억이 맞다면 그중 가장 큰 문어발은 장장 3년 6개월 동안 아무도 사 가지 않았다.
벽과 바닥을 메운 진열장에는 기준 없이 들여놓은 잡화가 가득했다. 선별 의도를 파악할 수 없는 제품군은 아무도 찾지 않는 온실의 식물을 환기했다. 왼쪽 선반에는 먼지를 뽀얗게 뒤집어쓴 통조림이 꽂혀 있었고, 중앙 선반에는 과자류와 레토르트 식품류가, 오른쪽 벽에는 주방과 화장실에 관련된 모든 것이 쌓여 있었다. 여닫이 냉장고 안에는 신선 식품이 알코올에 절여져 박제된 빛깔을 띤 채 방치돼 있었고, 천막을 내어 도로를 불법 점거한 공간에는 두리안이나 인도 수입 과자 따위가 나와 있었다. 전 세계에서 안 팔리고 남은 물건은 모두 세운마트로 모이는 듯했다. 불법 점거 면적은 해마다 조금씩 늘어 마트의 영토는 점차 확장되었다. 주인아저씨는 천정에 매달린 18인치 텔레비전으로 「케이팝 스타」를 시청하곤 했다. 그는 늘상 체념을 드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우유 한 각을 사면서 빨대 열댓 개를 챙겨 나와도 죄책감은 들지 않았다.
_ 이지원, 『명치나 맞지 않으면 다행이지』
여기서는 아무래도 김혼비 선생님의 판정승인 것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지원 선생님의 툴툴거리는 스타일에도 치명적인 매력은 있다.
어쨌든 여러 선생님들 책 꼼꼼히 읽고 조금씩 개그력을 키워나가야겠다. 사람은 자기가 쓰는 글을 닮아가는 법이라고 했다. 밝고 즐거운 인간이고 싶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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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와 얘를 읽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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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얘와 얘와 얘를 빌려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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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얘가 나타났다
꼴랑 50쪽 읽은 마당이라 섣부른 감은 있지만, 사라 베이크웰의 『살구 칵테일을 마시는 철학자들』은 완벽에 가깝다. 재밌고, 쉽고, 꼼꼼하다. 이러기는 정말 쉽지 않다. 일단 별 7개를 매긴 다음 뭔가 덜컥 걸릴 때마다 하나씩 빼나가 볼 생각인데, 이래도 끝내 별 5개까지 떨어지는 일이 없을 것만 같은 예감이다.
--- 읽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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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장의 지식 경제학 / 니얼 키슈타이니 : 265 ~ 414
+ 바람의 만리 여명의 하늘 하 / 오노 후유미 : 218 ~ 390
+ 미치게 친절한 철학 / 안상헌 : 275 ~ 530
--- 읽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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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란츠 파농 새로운 인간 / 프라모드 K. 네이어 : ~ 101
= 마르크스 / 피터 싱어 : ~ 106
= 부의 지도를 바꾼 회계의 세계사 / 다나카 야스히로 : ~ 203
= 명치나 맞지 않으면 다행이지 / 이지원 : ~ 82
= 읽거나 말거나 /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 ~ 125
= 살구 칵테일을 마시는 철학자들 / 사라 베이크월 : ~ 50
+
알라딘이 syo가 이 글을 올리는 것을 자꾸만 거부했다.
이게 뭐라고.
에러라고 변명했다.
심지어 임시저장조차 시켜주지 않았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만 했다.
나는 울었다.
창밖으로 비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