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작년에 사두었는데, 지난 주말에 읽었다. 표지 이미지나 제목만 봐서는 평소 내가 관심을 가질만한 책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지난해 <나이트메어 앨리>, 이 책에 혹했던 이유는, 아마도 그러니까 <가디언>지가 뽑은 ‘세상에서 제대로 주목받지 못한 열 권의 소설책’에 선정되었다는 문구와 ‘휘몰아치는 내러티브, 위험하고 독특한 서정으로, 1946년 첫 출간 당시 당대 비평가들을 충격에 빠뜨린 매혹의 하드보일드 클래식’이라는 문구 때문이었던 것 같다.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숨겨진 명작, 이런 책을 재발견하면 왠지 짜릿하지 않은가.
그러고 나서는 다른 책들을 읽느라 기억에서 잊혔는데, 얼마 전 개봉한 <나이트메어 앨리>, 이 강렬한 영화 포스터를 보고는, 이 책을 기억해 냈다. 영화부터 볼까 책부터 읽을까 하다가 영화 개봉 즈음 입원 및 수술 등으로 극장을 갈 수 없었고, 어느덧 시간은 흘러 상영관이 마구 줄어들고 있는 지난주 금요일에야 드디어 극장을 찾았다. 극장에는 나 말고 한 커플만 있어서 딸랑 세 사람이 이 작품을 봤는데, 나 혼자서 이 명작을 본 것이 너무나 안타까울 만큼 영화는 강렬했다. 몇몇 장면은 대체 왜? 하는 생각이 들어서 집에 돌아오자마자 원작을 펼쳐들었고, 그날 밤에 거의 다 읽어버렸다.
책과 영화의 커다란 얼개는 거의 비슷하다. 디테일한 부분이 조금씩 다른데 영화를 만든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이 적절하게 생략하거나 강조하거나 바꾼 것 같다. 이 작품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때는 1940년대 초, 텅 빈 집 안에서 한 남자가 아주 커다란 꾸러미를 집 안 한 가운데 크게 파놓은 구덩이 안으로 힘겹게 끌어넣고 있다. 크기와 형태를 보니 시체임이 분명하다. 그는 그 시체를 구덩이 안으로 밀어 넣고, 무표정한 얼굴로 담뱃불을 붙이고는 성냥을 집어던진다. 이윽고 거세게 솟아오르는 불길을 뒤로 하고 그는 집을 떠난다. 그렇게 정처 없이 떠돌던 그는 어느 카니발 유랑극단에서 짐꾼 일을 맡게 되면서 그들과 함께 섞이게 된다. 그의 이름은 ‘스탠턴 칼라일’- (책은 영화의 도입부와 조금 다르다. 시작 부분은 영화가 더 강렬해서 영화의 내용을 소개했다). 스탠은 이윽고 입담 좋은 재능을 발휘해 독심술을 하는 여인 ‘지나’와 그녀의 남편 ‘피트’를 도와 카니발 유랑극단에서 한 역할을 맡게 된다.
이 극단에는 스탠 말고도 살아 있는 닭을 씹어 삼키는 기인, 커다란 덩치와 힘을 자랑하는 브루노, 난쟁이 모기 소령, 전기가 통해도 죽지 않는 소녀 몰리 등 여러 특이한 인물들이 온갖 다채로운 쇼를 선보인다. 스탠은 독심술을 한다는 지나와 내연의 관계를 맺으면서 그녀를 이용해 사람 마음을 간파하는 기술을 터득하고자 애쓴다. 사실, 이 독심술이라는 게 별것 아니라서 우리나라로 치자면 점쟁이라고나 할까? 사람들은 지나에게 자기의 고민을 떠올리면서 그 해결법을 알려달라며 기꺼이 돈을 낸다. 거기에 교묘한 트릭이 숨어있는 줄도 모르고 지나가 특정인에 관한 정보를 맞히면 놀라워하며 너도나도 동전을 내던진다(이 속임수는 책과 영화에서 재미나게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지나의 트릭은 그리 대단하지는 않다. 점쟁이를 찾아가거나 타로 카드 점을 한 번이라도 보러 가 본 사람들은 알 텐데 대부분 점을 봐주는 사람들은 뭉뚱그려 질문을 하고 뭉뚱그려 대답을 내놓는다. 거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머, 어머, 맞아!”하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다. 오늘의 운세나 심리테스트, 별점 등등이 다 그렇지 않은가? 영리한 스탠은 그 점을 간파한다.
지나는 인간을 안다. 인간은 다 비슷비슷하다. 열 명 중 아홉 명에게 똑같은 대답이 적절한 것이다. 다섯 중 하나는 무슨 말을 하든 곧이곧대로 믿고, 맞는지 물으면 맞다고 대답한다. 아니라고 대답할 줄 모르는 호구이기 때문에. 맙소사, 이 일은 정말 식은 죽 먹기다! 여기에 금광이 숨어 있었다니!(<나이트메어 앨리>, 88쪽)
멍청이들은 쑥스러워서 묻지도 못하고 멍청해서 의심도 못하지. 스탠은 중얼거렸다. 하지만 다들 알고 싶어서 조바심이 나긴 할 것이다. 다들 바람피우고 싶으면서. 위선자들, 누구나 원한다. 다른 사람은 절대 안 되고, 자기만, 그는 페이지를 넘겼다. 인간의 본성은 어디나 똑같다. 모두 똑같은 문제를 안고 있다. 걱정한다. 상대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알아내면 누구든지 조종할 수 있다. 질문과 대답 공연도 마찬가지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게 무엇인지 미리 생각해두었다가 바로 거기를 찌르는 거다. 건강, 부, 사랑, 여행과 성공, 누구나 병, 빈곤, 지루함, 실패를 두려워한다. 공포는 인간의 본성으로 이어지는 열쇠다. 그들은 두려워한다. (103쪽)
게다가 ‘지나’도 스탠에게 이렇게 말하지 않는가. “난 언제나 독심술만 했어. 아무도 다치지 않고, 어디에 가든 친구를 많이 만들 수 있지. 운세를 봐준다고 하면 다들 좋아하거든. 뭐 어때. 기분 좋게 해주고, 꿈과 희망을 주는 거야. 다들 최선을 바라고, 최악을 두려워하지. 대체로 실제 벌어지는 일은 최악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이 최선의 희망을 버리지는 않아.”(66쪽) 스탠은 언제까지 유랑극단에 머물면서 독심술을 하며 푼돈을 버느니,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가 한몫 단단히 챙길 꿈에 부푼다. 세상에는 순진한 사람들이 넘쳐나며, 그들의 간절한 마음을 이용해 그들에게 꿈과 희망을 선사하면서 떼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을 간파한 것이다. 스탠은 전기 소녀 몰리와 함께 카니발을 떠나 독심술 쇼로 더 큰 무대에 오른다. 그리고 수려한 외모, 현란한 화술, 마음을 현혹시키는 능력으로 점차 부를 손에 쥐게 되고 그의 사기 아닌 사기극은 차츰 그 대상을 넓혀 뉴욕 상류층까지 파고들어간다. 그런 중 심리학자 ‘릴리스 리터’ 박사를 만나면서 뉴욕의 가장 큰 거물을 소개받기에 이른다. 스탠의 멈출 줄 모르는 부, 명예, 성공을 향한 욕망은 마침내 정점에 이른 것이다. 과연 그는 드디어 만족하게 될까? <나이트메어 앨리>의 한 재미는 이 남자의 성공과 몰락을 지켜보는 데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작품에서 흥미로운 점은 카니발 유랑극단을 구성하고 있는 인물 저마다의 독특한 캐릭터와 그들이 빚어내는 그로테스크한 분위기이다. 더욱이 영화에서는 처음부터 드러낸 스탠을 따라다니는 그 암울한 과거의 이력은 무엇일까 하는 궁금증, 스탠과 지나, 스탠과 릴리스 박사 등 상대의 마음을 꿰뚫어본다는 그들의 심리대결이 아주 흥미롭게 펼쳐진다. 특히 심리학자인 릴리스 박사와 스탠의 대결은 더 그러한데, 그들이 주고받는 대화를(특히 영화에서) 따라가다 보면 심리학 및 정신분석학의 한 챕터를 보고 있는 것 같아 짜릿한 재미가 느껴진다. 작가가 이 분야에 관심이 많았던 게 아닐까 싶은데 아니나 다를까, 저자 윌리엄 린지 그레셤은 자기 내면의 고통과 방황에서 벗어나고자 정신분석학, 마르크시즘, 종교, 심령술 등을 파고들었고 그 경험이 이 작품에 고스란히 녹아들어가 있다고 한다.
<나이트메어 앨리>로 큰 대중적 인기를 얻었던 작가는, 그가 창조한 소설 속 인물 스탠턴 칼라일처럼 돈과 명성을 얻었으나, 또 스탠 그처럼 모든 것을 잃고 타로 카드 ‘매달린 남자’와 같은 운명에 빠졌으니 참 얄궂다고나 해야 할까. 인간은 제아무리 시궁창에 빠져있어도 그 끝에는 언젠가 빛이 있으리라 믿고 살아간다. 어두운 골목 끝에는 빛이 있으리라고 희망을 놓지 못한다. 그렇지만 어두운 골목을 걷고 있는 현재의 삶은 공포이자 두려움이다. 공포가 늘 바짝 뒤따라온다. 그런데 그 공포 끝에 희망이 있다고 약속하면 누구나 그 희망을 믿고 기꺼이 거기에 제 운명을 맡긴다. 그런데 그 희망은 항상 응답을 해줄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 희망에 기꺼이 속아 넘어가기를 자청하는 것 그것이 우리 인간일 것이다. “사람들을 속이는 게 아냐, 사람들이 스스로를 속이는 거지.”라는 영화 속 스탠의 대사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역시나 실망시키지 않는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 원작보다 더 강렬한 영화를 선보였다.

그리고 이 작품에서 가장 압도적인 캐릭터는 바로 이 사람, 릴리스 박사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