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호라, 재밌는 책을 발견했다.

작가 존 다가타와 팩트체커 짐 핑걸의 [사실의 수명]이다.




'열여섯 살 레비 프레슬리가 스트래토스피어 호텔앤드카지노의 350미터 높이 타워 전망대에서 뛰어내린 그날, 라스베이거스에서는...'


한 소년의 투신 사건을 계기로 시작한 글은 소년의 주변을 맴돌다 라스베이거스 인상에서 건축물의 역사로, 태권도의 기원을 찾다 자살예방센터를 돌아 다시 소년에게로 향한다. 이렇듯 작가의 상념에 따라 대도시 속에서 소년의 족적을 쫓고 멈추기를 반복한다. 그리고 이런저런 글의 길목마다 서술되는 다양한 수치와 기록, 역사, 배경 등을 팩트체커가 치밀하게 쫓는다.


책 페이지는 중앙은 작가의 글, 사방은 팩트체크의 기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처음엔 정중하게 주고받던 의견 교환이 갈수록 격하게 다정해지고(♡)... 결국 상대의 똥까지 칭찬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둘의 핑퐁 게임, 창과 방패의 격렬한 전투를 보자니 재미 반, 흥겨움 반ㅋ 역시 싸움 구경이 제일이여ㅋㅋ (만약 내 일이라면... 아이고 두야;;)

어디까지를 팩트의 영역으로 봐야 할까. 팩트체크를 할 수 있는(해야만 하는) 범위와 적용 한계선이란 것이 있을까. 사실로만 글을 구성한다면 그것이 과연 기사로서 유용성 외의 그 무엇도 다름 아닐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모든 사실을 체크할 수 있을까? 그것이 사실임을 체크할 또 다른 팩트체커의 존재가 필요하지 않을까?

작가의 글은 (작가의 의도와 무관하게) 논픽션 에세이로 분류한다. 그렇다면 논픽션 에세이란 무엇일까?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한 만큼 사건과 연관된 사실 파악에 투명해야 함은 기본이다. 그러나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목적은 다르고 그 속에 담긴 개인의 심상까지 사실로서 체크해야만 하는 것일까? 혹은 반대로, 작가는 장르의 모호함을 이용하고 있지는 않은가? 논픽션과 에세이의 불명확한 경계를 작가의 구미에 맞춰 갖다 붙이고 있지는 않는가?




원색적인 다정함이 오고 가기도 했으나 작가와 팩트체커 둘 다 글에 대해서는 진심인 사람들이다.

어쩌면 시작은 자신의 일을 위한 방어적인 설전이었을지는 몰라도, 장르에 대한 정의와 역사를 아우르며 대화는 확장된다. 글쓰기에서 윤색과 꾸밈의 허용에 대해, 사실 반영의 영역과 상상의 영역에 대해, 대화는 깊어지고 그만큼 각자의 일에 대한 자부심도 단단하다. (스트레스는 말로 할 수 없겠지만, 솔직히 이런 대화가 가능하다는 게 내심 부럽다.)


결국 둘 사이에 언급되는 문제들은 본디 '글쓰기란 무엇인가'로 귀결되는 것들이다. 누구를 위한 글쓰기인가, 무엇을 위한 글쓰기인가.

이 책은 펜(키보드)을 든 자의 책임과 글쓰기의 본질을 향한 맹렬한 투쟁의 기록이다.




사실 충돌, 사실 충돌.... 무시무시한 빨간펜 선생님의 체크! 체크! 체크!!!




+ 불만있어요!

188mm x243mm, 160쪽의 얇은 책.


가장 불만인 건 구성 문제다.

권두에 존 다가타의 문제의(?) 논픽션 에세이를 먼저 싣고, 그다음에 현재와 같이 팩트체크가  함께 나오는 구성이었어야 한다.

중앙의 작가 에세이만 먼저 읽고, 그 후 다시 팩트체크와 함께 읽었다. 그러나 재독을 했어도 팩트체크의 빨갛고 검은 참견들이 즐비한 이상, 글의 인상 자체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는 없다.

실례로 글에서 가장 이해할 수 없었던 건 9라는 숫자다. 작가는 9라는 숫자에 상징성을 부여하느라 사망자의 추락 시간까지 바꿀 정도였다. 이 때문에 팩트체커와 막말까지 오가며 '거 냅두슈'로 반박했던 작가가 글의 말미에 이를 아무렇지 않게 뒤집어 버린 것이다. 그런데 이 글을 애초에 흐름에 따라 주욱 읽어 내릴 수 있었더라면 그 중요한 숫자를 간단히 뒤집어버린 작가의 의도가 더 확실히 와닿지 않았을까. 그 허망함을 말이다.


어쨋든 글이 먼저고, 그 다음이 팩트체크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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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의 수명 - 진실한 글을 향한 예술과 원칙의 대결
존 다가타.짐 핑걸 지음, 서정아 옮김 / 글항아리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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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존 다가타와 팩트체커 짐 핑걸, 둘 사이에 언급되는 문제들은 본디 ‘글쓰기란 무엇인가‘로 귀결되는 것들이다. 이 책은 펜(키보드)을 든 자의 책임과 글쓰기의 본질을 향한 맹렬한 투쟁의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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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자이너 - 과학의 ‘아버지’들을 추방하고 직접 찾아나선
레이철 E. 그로스 지음, 제효영 옮김 / 휴머니스트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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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랍게도 우주보다, 지구보다, 저 깊은 해양 생태계보다 더 알지 못하는 곳. 아니 알려고하지 않았던 그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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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대부분 자신들이 개소리를 알아차리고 거기에 현혹되지 않을 정도의 지각은 갖추고 있다고 꽤 자만하고 있다. 그래서 개소리와 관련된 현상은 진지한 검토의 대상으로 부각되지 않았고, 지속적인 탐구의 주제가 되지도 않았다. - P7

진리에 대한 관심에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것, 즉 사태의 진상이 실제로 어떠한지에 관심이 없다는 것, 이것이 바로 내가 개소리의 본질이라고 보는 것이다. - P38

위조품에서 잘못된 점은 그것이 어떻게 생겼는지가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만들어졌느냐이다. 이것은 개소리의 본질적 속성에서 유사하게 나타나는 근본적인 양상을 시사한다. 비록 개소리는 진리에 대한 관심 없이 만들어지지만, 그것이 꼭 거짓일 필요는 없다. 개소리를 하는 사람은 진상을 꾸며낸다. 하지만 이것은 그가 반드시 그것들을 왜곡한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 P51

거짓말쟁이는 불가피하게 진릿값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거짓말이란 것을 지어내기 위해서 거짓말쟁이는 무엇이 진실인지 자신이 알고 있다고 생각해야만 한다. 그리고 효과적인 거짓말을 지어내려면 거짓말쟁이는 자신의 허위를 그진리의 위장 가면 아래에 설계해야 한다.
다른 한편, 개소리를 해서 상황을 헤쳐 나가려고 기도하는 사람은 좀 더 많은 자유가 보장되어 있다. 그의 초점은 특수하기보다는 광범위하다. 그는 특정한 허위를 특수한 지점에 삽입하는 데에만 자신을 한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는 그 지점을 둘러싸고 있거나 가로지르는 진리에 제약받지 않는다. 그는 필요하다면 맥락까지도 위조할 준비가 되어 있다. - P54

누군가 자신이 진실을 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가 거짓말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개소리를 지어내는 데는 그러한 신념이 필요 없다.
따라서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진리에 대해 반응한다. 그리고 그는 그만큼 진리를 존중하는 셈이다. 정직한 사람이 말할 때, 그는 오직 자신이 참이라고 믿는 바를 말한다. 거짓말쟁이는, 이에 상응하게 자신의 발언이 거짓이라고 여기는 것이 필수불가결하다.
그렇지만 개소리쟁이에게는 이 모든 것이 무효다. 그는 진리의 편도 아니고 거짓의 편도 아니다. 정직한 사람의 눈과 거짓말쟁이의 눈은 사실을 향해 있지만, 개소리쟁이는 사실에 전혀 눈길을 주지 않는다. 자신이 하는 개소리를 들키지 않고 잘 헤쳐 나가는 데 있어 사실들이 그의 이익과 관계되지 않는 한, 그는 자신이 말하는 내용들이 현실을 올바르게 묘사하든 그렇지않든 신경 쓰지 않는다. 그저 자기 목적에 맞도록 그 소재들을 선택하거나 가공해낼 뿐이다. - P57

개소리쟁이는 진리의 권위에 조금도 신경쓰지 않는다. 이 점 때문에, 개소리는 거짓말보다 훨씬 더 큰 진리의 적이다. - P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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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진 신 - 신은 과연 인간을 창조했는가?
리처드 도킨스 지음, 이한음 옮김 / 김영사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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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이 매끄럽지 못하고 단어 선택이 일차원적이다. 흥미로운 내용인데 왜 이리 진도가 안나가나 했더니 번역이 걸림돌이다. 명저를 졸저로 만들다니 혹시 유신론자의 고도의 전략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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