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싱의 글은 오래 전에 한 에세이를 통해 처음 접했다. 이제는 제목도 생각나지 않고, 어떤 계기로 읽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지만, 그때 그 글이 지닌 고독하고 쓸쓸한, 그러면서도 유려한 문장은 마음에 스민 채 고스란히 남았다. 그 뒤로 기싱을 더 알고 싶어서 <봄의 수상>이라는 제목의 작은 문고판을 사서 한동안 가지고 다니면서 읽었다. <봄의 수상>에 실린 그의 글들을 읽노라니, 기싱은 담백하지만 아름답고 유려한 문장으로 삶의 온갖 비밀을 예리하게 포착하는 섬세한 눈을 지닌 작가였다. 그의 에세이만이 아닌 소설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지만, 그 바람은 쉽사리 이뤄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드디어 올해 이 책, <이브의 몸값 Eve's Ransom> 출간 소식을 접했다. 기싱의 소설이다!

이 작품은 제목이 많은 것을 상상하게 한다. 책을 주문하고 기다리는 동안 어떤 내용일지 가늠해봤다. ‘몸값’, 그러니까 ‘Ransom’이라는 단어에 눈길이 간다. 이브라면 아마도 여성 이름일 것이다. ‘Ransom’은 납치된 사람이나 포로의 몸값을 뜻하기도 하고, 죄 갚음 또는 해방, 몸값을 치르고 자유롭게 한다는 의미도 담고 있다. 어쨌든 이브의 몸값인 것을 보면, 이브라는 여성이 납치를 당했거나 꼭 그렇지 않더라도 자유를 억압받는 환경에 놓여 있는데, 누군가가 그녀의 몸값을 치르고 자유를 되찾아준다는 내용이 아닐까 유추해 볼 수 있다. 혹시 조지 기싱의 개인적 체험에서 비롯된 이야기일까 생각해 보기도 한다. 기싱은 매춘을 하는 여성과 사랑에 빠져 결혼한 뒤 그녀를 구해내기 위해(그러니까 몸값을 치르기 위해) 절도죄를 저지른 뒤 감옥에 갇혀 퇴학당한 경험이 있다. ‘이브의 몸값’이라는 제목은 이런 내용이 아닐까 상상하게 했다.

나의 이런 예상은 얼마쯤은 맞고 어느 정도는 빗나간다. 이 작품의의 주인공 ‘모리스 힐리아드’는 반복되는 단조로운 삶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낭만주의자이다. 그러나 가진 것이 많지 않은 그는 제도공이라는 직업을 쉽사리 벗어나지 못하며 하루하루 불행하게 삶을 이어간다. 그러던 어느 날, 세상을 떠난 아버지에게 빚을 갚지 않았던 사업가를 만나게 되고 그로부터 436파운드의 빚을 돌려받게 된다. 436파운드라고 하면 체감이 잘 되지 않는데, 현재 환율로 헤아려 우리나라 돈으로 계산하면 약 7천만 원에 해당한다. 7천만 원이라.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 돈이다. 사실 인생을 새로 쓴다든가 할 만한 돈은 아니다. 7억이라도 그럴 것이다. 70억이라면 좀 많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렇지 않은가? 당신에게 어느 날, 7천만 원이 생긴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 직장을 때려치우기에도 애매한 돈이다. 어디 멀리 여행을 다녀올 정도랄까.

힐리아드도 이런 생각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못한다. 물론 마음에도 없던 제도공 자리는 집어던지고 그 돈으로 ‘자유로운’ 인간으로서의 삶을 살리라 다짐하고는 자유를 찾아 파리로 여행을 떠난다. 그곳에서 자유를 만끽하지만 예상치 못한 외로움에 괴로워한다. 결국 그는 다시 영국으로 돌아와 자신이 살던 하숙집에서 보았던 사진 앨범 속의 여인 ‘이브 매들리’를 직접 만나보리라 마음먹는다. 런던으로 떠난다고 하니, 하숙집 주인인 브르어 부인은 오랫동안 이브의 소식을 듣지 못했다면서 이브가 사는 주소를 건네주며, 그 근처에 갈 일이 있으면 그녀에게 소식을 전해달라고 그에게 부탁한다. ‘반은 슬프고 반은 웃고 있는’ 이브의 얼굴을 찾아 힐리아드는 런던으로 떠난다.

주소가 있으니 그녀를 찾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러나 힐리아드는 선뜻 이브 앞에 나타나 자신이 이러이러한 일로 찾아왔노라고 말하지 못한 채, 그녀가 사는 집 근처에 방을 빌리고 멀리서 그녀를 ‘관찰’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그가 지켜보는 바에 따르면 앨범 속에서 본 그 웃고는 있지만 어쩐지 슬픈 듯한 여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브는 너무나도 화려하고 세련되었으며, 쾌활하며 밝다. 힐리아드가 상상했던 여성과는 동떨어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상상이 어긋나자 당황하지만, 그럼에도 이상하게 이브에게 이끌리고, 결국 그녀 앞에 나타나 자신을 소개하기에 이른다. 이브가 떠나온 더들리와 그곳의 하숙집, 브르어 부인 이야기를 꺼내자 경계하던 그녀도 곧 안심하고 힐리아드와 조금씩 마음을 터놓는 사이가 된다. 단 이 마음의 크기는 힐리아드와 이브 사이에는 아주 큰 차이가 있다.

이브의 생활은 지켜볼수록 베일에 가려져 있다. 힐리아드 뿐만 아니라 독자도 섣불리 그녀가 어떤 삶을 사는지 판단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녀가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한 삶을 살고 있으며 그로 인해 어떤 위험에 처했고, 그 때문에 자주 우울해한다는 것을 눈치 챌 수 있다. 힐리아드 또한 이브가 처한 암담한 상황을 어렴풋이 알아차리게 되고 마침내 그녀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게 된다. 자신이 경비를 다 댈 테니 함께 파리로 떠나자고. 힐리아드는 신사로서 못할 짓을 하고 싶지는 않기에 이브는 물론 그녀의 친구 패티까지 동행하면 더 좋겠다는 단서를 단다.

이쯤에 이르면 독자는 또 다른 질문을 스스로 하게 된다. 나라면 어떨까? 만일 내가 ‘힐리아드’라면, 7천만 원쯤 돈이 있는데, 그 돈으로 내가 좋아하는 여성에게 함께 파리로 여행을 가자고 제안할 것인가? 단, 그 제안은 사랑이 아닌 우정을 기반으로 한 것이며, 오로지 그녀를 구해주고자 하는 마음에서 비롯되었으므로 그저 함께 파리에 머물면서 여행을 통해 그녀가 현재의 위험한 상황에서 벗어나고,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고 인간다운 삶을 누리는 데에만 집중해야 한다. 오직 그녀가 새 생활을 할 수 있는 어떤 계기를 마련해주는 ‘인간적인 우정’에 그쳐야만 한다! 자신 있는가? 내가 만일 ‘이브’라면 어떤 남자가, 그것도 나에게 이성으로서 호감을 지니고 있음을 거리낌 없이 드러내는 남자가 친구와 함께 파리로 여행을 가자고, 그것도 경비를 모두 대주겠다는데 덥석 그 제안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는 아무런 사심도 없이(!) 단지 내 건강과 내가 처한 안타까운 현실을 돕고자 하는 마음뿐이라는데, 이 제안을 정말 받아들여도 될까? 독자는 이렇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이브는 어떤 선택을 내릴까? 망설임 끝에 힐리아드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다. 만일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이 작품의 절반 이상의 이야기는 쓰이지 못했을 테니까. 게다가 이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바 또한 제대로 전해지지 못했을 테니까.

파리에서 그들은 즐거운 나날을 보내고, 예상할 수 있듯이 힐리아드는 점점 이브에게 빠져든다. 그리고 결국 이브에 대한 애정을 서슴지 않고 드러내는 상태까지 이른다. 그러나 과연 이브도 그러할까? 두 남녀가 파리라는 낭만적인 도시를 배경으로, 우연히 손에 들어온 436파운드의 돈과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내면서 서로 사랑에 빠지고, 그 사랑의 영원함을 맹세하면서 이야기가 끝난다면 이 작품은 전형적인 로맨스 소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작품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브는 힐리아드가 상상했듯이 ‘단순’한 여자가 아니다. 힐리아드가 반했던 그 사진 속 여성에 대해 이브는 “아, 그 별 볼 일 없는 사진!”이라며 진정한 자기 자신이 아니라고 항변한다. “슬프고, 고독하고, 열심히 일을 하는, 옷도 화려하기보다는 수수하게 입은 그런 아가씨를 기대”했다는 힐리아드에게 “기가 죽고 희망이 없는 것보다는 건강하고 인생을 즐기는 것이 훨씬” 낫다면서 자신은 그런 여자가 아니라고 말한다. 무엇보다 이브는 가난을 두려워한다. 그녀의 인생 복표는 “나 자신이 살려고 발버둥 쳤던 수년간의 투쟁으로부터. 그리고 참담했던 과거로부터.”(102쪽) 달아나는 것이며, 그녀는 “항상 그랬듯이” 가난을 두려워한다. “결혼 후 가난은 혼자 있을 때의 가난보다 천배나 나쁜 것”(196쪽)이라고 여러 차례 말한다. 그러나, 힐리아드 손에 있는 돈은 고작 7천만 원일 뿐이다. 그 마저도 이 파리 여행이 끝나면 얼마가 남을지 알 수 없다. 그런 그와 그녀가 이 여행이 끝난 뒤에도 함께 할 수 있을까?

힐리아드는 이브에게 약간의 돈으로 자유를 되찾아 주었다. ‘이브의 몸값’을 힐리아드 그 자신이 치른 셈이다. 그러나 단순히 자유를 찾아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무언가를 더 원했기에 두 사람의 운명은 뜻하지 않은 길로 나아간다. 이 책을 읽는 이들 가운데 누군가는 힐리아드에게 감정이입을 하고, 또 누군가는 이브에게 감정이입을 하면서 상대를 나쁜 남자라고 또는 나쁜 여자라고 비난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이 두 사람 모두 436파운드라는 그리 많지 않은 돈으로 ‘인간의 자유를 살 수 있다’고, 아니 한때나마 그럴 수 있다고 믿은 가엾은 청춘들일 뿐이다. 그런 그들의 모습에서 궁핍한 생활로 늘 전전긍긍하며 고통받았던 조지 기싱, 그의 초상이 엿보인다.

<이브의 몸값>을 다 읽고 난 뒤 <봄의 수상>을 펼쳐서 오랜만에 다시 읽다가  다음과 같은 구절을 읽노라니, 이브도, 힐리아드도 결국 기싱의 또 다른 자아라는 생각이 들어 이 청춘들의 모습이 더 가련하게 남는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돈으로는 가장 귀중한 것을 살 수 없다고 말하지만 그 상식적인 말은 아직 돈의 결핍을 경험하지 않은 것을 입증한다. 내가 버는 수입이 1년에 불과 몇 파운드 부족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내 생활에 일어났던 그 모든 비애와 절망을 생각할 때에 나는 금전의 위력에 그만 아연해진다. 나는 빈곤 때문에 즐거운 기쁨을 얼마나 잃어버렸던 것인가. 누구나 당연히 받을 권리가 있는 그 여러 가지의 단순한 행복감을 말이다. 해가 갈수록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만나보는 일도 불가능해졌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없는 데서 비애가 생기고, 오해가 생기고, 아니 잔인하리만큼 친구와 소원해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약간의 돈만 있으면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돈이 넉넉하지 않아서 줄여 버리거나 아주 금해버리기도 한 간단한 위안과 만족도 수없이 많다. 나는 단순히 내 처지가 궁하기 때문에 적지 않은 친구를 잃어버렸다. 친구로 만들 수 있었던 사람들도 결국 낯모를 사람이 되고 말았다. 쓰라린 고독감. 즉 머리속으로나 친구가 그리워 못 견딜 때 닥쳐오는 그 고독감이 가끔 나의 생활을 저주했던 것이지만 그것도 오직 내가 가난한 탓이었다. 일체의 도덕적 선행은 모두 국가의 화폐로 보답할 수 있다고 말해도 하등 과언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 나에게는 빈곤을 피하도록 노력하라는 훈계가 필요 없었다. 런던의 많은 다락방은 내가 그 달갑지 않은 빈곤이라는 동거인과 싸우기에 얼마나 애를 썼는가를 알고 있었다. 나는 그 친구가 끝내 나와 동거하지 않은 것을 이상하게 생각한다. 그것은 일종의 자연의 모순이다. 지금도 가끔 잠 못 이루는 밤이면 그 생각이 막연한 불안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빈곤이 주는 아픔’, <봄의 수상>, 범우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래 전, 조르주 페렉의 책을 읽기 시작했을 무렵, 그의 몇몇 작품을 읽다가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이 사람, 혹시 천재는 아닐까. 그때 내가 읽었던 책들은 <사물들>, <W 또는 유년의 기억>, <임금 인상을 요청하기 위해 과장에게 접근하는 기술과 방법>처럼 주로 그의 소설들이었다. 그 후로 문학동네에서 출간된 페렉 선집의 몇몇 작품을 읽으면서 그 확신을 굳혔다. 그래, 페렉은 천재가 맞다, 맞아. 그런데, 그냥 똑똑하기만 한 천재가 아니라 삶의 애수와 슬픔을 아는 그런 천재.

최근 출간된 <공간의 종류들>을 읽다가 나는 또 한 번 그런 생각 속에서 감탄했다. 이 사람은 어쩌면 이렇게도, 사라져가는 것들, 쉽게 잊힐 것들, 하지만 한 때 나를, 당신을, 아니 우리를 열광하게 했던 그 모든 것들에 대해 이토록 애수에 젖은 눈빛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지나치고 말았을 대상을 기발한 생각과 시선으로 바라보고 의심하고, 기록하고 그럼으로써 다시 그것들을 우리 주변에 새로이 불러오는 것일까. 페렉이 아니었다면 아마 이런 기억을 다시 불러일으키지는 못했으리라.

<공간의 종류들>에서 페렉은 우리 주변을 둘러싼 ‘공간’- 그 흔하고 사소한 것에 집착해 글쓰기를 시도한다. 페렉이 말하듯 그곳은, 어쨌든 처음에는 ‘별것도 아닌 곳’이다. ‘아무것도 아닌 곳, 만질 수 없는 곳, 실제로 비물질적인 곳, 넓이를 갖는 곳, 외부에 있는 곳, 우리 외부에 있는 곳, 우리가 이동해가는 도중에 있는 곳, 주위 환경, 주변 공간.’....... 문득 그런 생각도 든다. 공간에 대해 그렇게 쓸 이야기가 많은가? 대체 무엇에 대해 이야기할까? 그러나 페렉의 많은 작품이 그러하듯, 아무것도 아닌 듯한, 그 ‘공간’이라는 대상에 대해 페렉은 끊임없이 생각하고 의심하고, 분류하고, 기록하고, 상상하며 써 내려간다.

마르셀 프루스트가 ‘잃어버린 시간’에 대해 써내려갔듯이 페렉은 ‘잃어버린 공간’ 아니, 너무나도 무심해서 잃어버렸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우리를 둘러싼 그 ‘공간’을 이야기한다. 페렉이 보기에 공간은 ‘시간보다 더 길들여진 듯, 혹은 덜 위험한 듯’하다. ‘우리는 도처에서 손목시계를 찬 사람들을 마주쳐도, 나침반을 지닌 사람들을 마주치는 일은 매우 드물다. 우리는 언제나 시간을 알고자 하지만,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는 결코 궁금해 하지 않는다. 그것을 알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는 집에 있거나, 사무실에 있거나, 지하철 안에 있거나, 거리에 있다. 이것은 물론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분명하지 않은 것이 무엇인가? 페렉은 질문한다. ‘때때로 우리는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자문’해 봐야 한다고.

어린 시절 나는 형제가 많은 탓에 온전한 나만의 방을 소유한 적이 없었다. 늘 언니와 함께 방을 썼는데, 그러다 보니 나만의 공간에 대한 욕구가 있었다. 그래서 책을 좋아하는 대개의 아이들이 그러하듯이 나 또한 전집류 책을 잔뜩 꺼내서 집을 만들고 그 안에 들어가 있기를 좋아했다. 책으로 쌓기 힘들면 책상 아래로 들어간다. 책상 위에는 얇은 홑이불을 올려서 늘어뜨려 마치 텐트를 치듯이 해놓고, 책상 안, 정확히 말하자면 책상에 앉을 때 의자와 다리가 들어가는 그 옴폭한 부분에 쏘옥 들어가 있는 것이다. 그러면 그 작은 공간은 오롯이 나만의 작은 세계가 된다. 그곳에서 나는 가만히 앉거나 누워서 공상에 잠긴다. 그러면 그 작은 공간은 어느덧 상상으로 지어올린 온 세계가 된다. 그런데 내가 그토록 좋아했던 책으로 만든 집, 또는 책상으로 만든 집은 지금의 내게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제 완전히 사라져버린 세계이다.

페렉은 그런 공간을 불러온다. “나는 나를 돌아다니기 위해 글을 쓴다.”는 앙리 미쇼의 말을 인용하면서 페렉의 공간은 뜻밖에도 ‘페이지’부터 시작한다. ‘행 하나가 꽤 정확하게 수평적으로 흰 종이에 놓이고, 순결한 공간을 검게 물들이며, 그곳에 하나의 의미를 부여하고 그곳을 매개 공간으로 만든다.’ 그러고 나서 그 공간은 침대, 방, 아파트, 문, 계단, 건물, 거리, 구역, 도시, 시골, 나라, 국경, 유럽, 세계로 뻗어나간다. 페렉이 파리에서 살았거나 혹은 그의 특별한 기억들이 얽혀 있는 장소들이 그려지기도 하는데, 그는 이런 일을 함으로써 ‘삼중의 낡음에 대한 흔적’을 기대한다. ‘장소 그 자체의 낡음, 내 기억들의 낡음. 나의 글쓰기의 낡음.’ (90~91쪽) 페렉의 사유의 흔적은 파편적이지만 놀라울 정도로 날카로우면서도 읽는 이의 공감과 추억을 불러일으킨다.


나는 내 침대를 좋아한다. 이 년 조금 넘게 써온 침대다. 나는 내 침대가 좋다. 침대에 누워 쉬면서 평온한 시선으로 천장을 바라보는 것이 좋다. 하지만 사람들은 더 이상 천장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사람들은 천장을 절망적인 직선으로 만들거나, 혹은 더 나쁘게는 소위 노출형 들보들로 우스꽝스럽게 꾸민다. (35쪽)

방에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어느 장소에 산다는 것이, 그 장소를 제 것으로 삼는다는 말일까? 장소를 제 것으로 삼는다는 건 무슨 말인가? 언제부터 장소는 진정으로 당신 것이 되는가? 분홍색 대야에 양말 세 켤레를 넣어 물에 담갔을 때일까? 휴대용 가스버너로 스파게티를 다시 데우게 되었을 때일까? 그곳에서 기다림의 고통, 열정의 흥분상태, 혹은 극심한 치통이 주는 고문을 경험했을 때일까? 취향에 따라 창문에 커튼을 달고 벽지를 바르고 마루에 광을 냈을 때일까? (46쪽)

문- 사람들은 스스로를 보호하고, 스스로 벽을 쌓는다. 문은 가로막고 갈라놓는다. 문은 공간을 깨뜨리고, 나누며 상호침투를 막고, 분할을 강요한다. 한편에는 나와 나의 집. 사생활, 가정(내 침대, 내 양탄자, 내 탁자, 내 타자기, 내 책들.... 같은 나의 소유물들로 꽉 채워진 공간)이 있고, 다른 편에는 타인들, 세상, 일반인들, 정치가가 있다.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스며들듯 건너갈 수 없으며, 이 방향이든, 저 방향이든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그냥 통과할 수 없다. 비밀번호가 필요하며, 문턱을 넘어야 하고, 식별표지를 보여줘야만 하며, 죄수가 외부와 소통하듯 소통해야만 한다. (63쪽)

나는 시골에 대해 별로 할 말이 없다. 시골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환영일 뿐이다. (113쪽)

여행에 대한 놀라움과 실망. 거리를 정복했다는, 시간을 지웠다는 환상. 멀리 떨어져 있기. (129쪽)


페렉은 왜 이토록 ‘공간’에 집착했을까? 그의 글을 통해 그 이유를 짐작하는 순간, 마음 한편에서는 쿵 하고 작은 파도가 인다. 페렉은 ‘안정되고, 고정되고 범할 수 없고, 손대지 않았고 또 거의 손댈 수 없고, 변함없고, 뿌리깊은 장소’들이 존재하기를 바랐다. ‘나의 고향, 내 가족의 요람, 내가 태어났을지도 모르는 집, 내가 자라나는 것을 보았을지도 모르는(내가 태어난 날 아버지가 심었을지도 모르는) 나무, 온전한 추억들로 채워져 있는 내 어린 시절의 다락방’과도 같은 그런 공간들. 그러나 ‘이런 장소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곳들이 존재하지 않기에 공간은 질문’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끊임없이 그런 곳들 기록해야 하는 의무를 느낀다. 공간은 부서지기 쉽고, 시간이 그것들을 닳게 하고 파괴할 것이다. ‘공간은 모래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듯 사라진다. 시간은 공간을 데려가 형태를 알 수 없는 조각들’만 남겨놓는다. 그래서 그는 글로 기록해둠으로써 그의 기억들이 그를 배반하는 일을 막고자 안간힘을 쓴다.

페렉이 생각하기에 ‘우리는 보는 법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특이한 것, 특별한 것, 비참할 정도로 예외적인 것만을 기록하려고 한다. 하지만 페렉은 거의 어리석을 정도로 더 천천히 접근해서 ‘흥미롭지 않은 것, 가장 분명한 것, 가장 평범한 것, 가장 눈에 띄지 않는 것’을 적기 위해 노력한다. ‘더 평범하게 보도록 다짐’한다.(84쪽)- 왜냐하면 그런 것들일수록 더욱 사라지기 쉽기 때문이다. 때문에 공간에 대한 집착에 가까운 이 글쓰기는 ‘무언가를 붙잡기 위해, 무언가를 살아남게 하기 위해 세심하게 노력’하는 행위이자, ‘점점 깊어지는 공허로부터 몇몇 분명한 조각들을 끄집어’내는 행위인 것이다.

폴란드계 유대인으로 태어난 페렉은 제2차 세계 대전 때 부모를 잃었다. 유대인으로서 겪은 어두운 유년의 경험은 페렉의 몇몇 작품, 특히 자전적 작품인 <W 또는 유년의 기억>에서 잘 드러난다. 외롭고 쓸쓸했을 유년 시절, 그가 자신을 둘러싼 공간에서 어떤 생각을 하며 상상의 날개를 펼쳤을지 낱낱이 알 수는 없지만 조금은 그 마음을 헤아릴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이 <공간의 종류들>에 인용된 한 구절인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의 시체소각로를 초록 띠로 장식하기 위한 식물 채집’은 그저 무심히 넘길 수만은 없다. 아니, 이 구절을 읽는 순간, 이 책의 큰 비밀이 풀리는 듯해 가슴이 먹먹해져 오기까지 한다. 흰 종이 위에 검은 글자를 채워가면서 공간을 채우고 있었을 어린 페렉, 침대 위에 누워 천장을 보며 공상을 즐겼을 어린 페렉, 온전한 추억들로 가득한 다락방 속의 어린 페렉...... ‘안정되고, 고정되고 범할 수 없고, 손대지 않았고, 변함없고, 뿌리깊은 장소’들이 존재하기를 바랐지만 결코 그럴 수 없었던 유년을 살았던 페렉. 그런 한 인간의 글쓰기를 통한 영원한 기억과 복원- 그것이 바로 <공간의 종류들>이 아닐까. 그래서 이 책은 단순히 ‘공간’을 집요하게 기록한 에세이로만 읽히지 않는다. 잃어버린 유년 또는 언젠가는 사라지고 말 그 불안정한 삶의 형태를 기록해두고자 하는 인간의 절박한 몸짓으로 읽혀 가슴 깊이 남는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Falstaff 2019-09-24 2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필 처음 읽은 페렉이 <인생 사용법>이었는데요, 이 인간은 장편소설을 써도 열댓 권을 쓸 수 있는 소재를 가지고 왜 한 권의 작품만을 만들었을까가 굉장히 궁금했었습니다.
잠자냥 님 쓰신 글을 읽어보니, 잃어버린 공간.... 흠... 깊이 공감이 되는군요. ^^

잠자냥 2019-09-25 00:31   좋아요 0 | URL
<인생 사용법>은 전 아껴두느라 아직(아니 실은 그 방대한 분량 때문에 엄두가 나지 않아서 ㅎㅎ) 못 읽었는데요, 이제는 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공간의 종류들> 이 책은 에세이에 속하는 터라 폴스타프 님께 꼭 읽어보시라고 권하기는 뭣하지만.... 폴스타프 님의 잃어버린 공간에 대한 에세이는 왠지 기대가 되네요. ㅎㅎㅎ 페렉과 달리 어쩐지 장르는 생활 개그일 것 같습니다만 ㅋㅋㅋ

2019-10-04 13: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0-04 14: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김보라 감독, <벌새>, 2018


<벌새>는 특별할 것이 없는 영화다. 주변에 흔히 볼 수 있는 가족과 어디에나 존재할 것 같은 중학교 2학년 소녀의 이야기. 그런데 그 특별할 것 없는 이야기를 조금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면 완전히 달라진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래서 <벌새>는 특별하다.

1994년, 중학교 2학년 은희는 외롭다. 엄마, 아빠, 언니, 오빠, 그리고 자신. 다섯 식구 중의 막내. 식구들은 서로 무심하지만 딱히 큰 문제가 있어 보이는 가정은 아니다. 은희에게는 단짝 친구도 있고, 좋아하는 남자 친구도 있다. 그런데 은희의 일상을 엿보노라면 열다섯 살 이 소녀의 삶이 그다지 행복해 보이지는 않는다. 딱히 큰 문제가 있는 것 같지도 않은데 왜 그럴까?

영화 첫 장면부터 은희는 엄마를 목이 터져라 부른다. 이런 장면은 영화 중반 무렵에도 또 한 번 등장한다. 은희는 엄마를 애타게 부르지만 엄마는 듣지 못한다. 아무리 불러도 응답 없는 목소리. 열다섯 소녀의 목소리는 가장 가까운 존재일 엄마조차도 듣지 못한다. 그저 파묻힌다. 목소리가 없는 존재나 마찬가지이다. 집안에서 막내이기에 더욱 그렇다. 학교에서도 딱히 공부를 잘하는 존재가 아니기에 은희의 존재는 투명인간과도 같다. 학교가 끝난 뒤에는 아무도 없는 집을 열쇠로 열고 들어가고, 아무리 아파도 혼자 병원에 가야한다. 수술을 받아도 병실에 부모님은 잠깐 들를 뿐, 은희는 또 혼자가 된다.

은희뿐만이 아니다. 은희네 집안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은희의 엄마도, 언니도, 아빠와 오빠에 비하면 ‘없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이다. 이 가족의 풍경은 식탁에서 잘 드러난다. 아버지와 엄마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은희의 오빠는 집안의 제왕이나 마찬가지이다. 단, 아빠가 있을 때는 당연히 두 번째 자리로 물러나야 한다. 아빠의 권위를 앞지르면 안 된다. 때문에 아빠 앞에서 은희에게 폭력을 휘둘렀을 때 아빠는 폭력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어디서 감히 아빠 앞에서 동생을 때리”느냐고 분노하는 것이다. 밥상에서 젓가락을 흔들면서 가족에게 일장훈계를 하는 아빠의 목소리는 폭력 그 자체이다. 흔한 가족 풍경이지만 카메라 시선을 조금 돌렸을 뿐인데 아빠와 오빠로 이어지는 가부장제의 폭력적인 일면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축복이라고 해야 하나. 나는 남자 형제가 없는 관계로 자랄 때 오빠로부터 맞는다거나 물리적 폭력을 당한 경험이 없다. 물론 자매들끼리도 죽기 살기로 싸우기도 한다. 그러나 같은 성별끼리는 일정 나이가 되면 힘이 비슷해지기 때문에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맞는 일은 없다. 같이 머리끄덩이를 잡든 멱살을 잡든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 가능하다. 그런데 은희는 오빠로부터 일상적인 폭력에 시달린다. 비단 은희뿐만이 아니다. 은희의 단짝 친구 지숙은 어느 날 학원에 마스크를 하고 나타난다. 마스크를 벗는 친구의 입가는 보라색 멍이 크게 들어있다. 은희와 친구는 아무렇지 않은 듯 말을 나눈다. “생일인데도 맞았어?” “너희 오빠는 어떻게 때리니?” “오빠한테 맞아서 죽으면 가족들이 슬퍼할까” 등등. 너무나도 담담하게 폭력을 이야기하기에 그 모습이 오히려 기괴하다.

은희와 지숙만 그러할까? 잘 들여다보면 은희의 엄마 또한 은희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성장기를 보냈으리라 짐작이 간다.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은희의 외삼촌. 외삼촌은 술에 취해 자신의 여동생인, 은희 엄마를 바라보며 안쓰럽다는 듯 중얼거린다. 외삼촌의 말을 듣다 보면 너무나도 흔한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남자 형제를 위해 공부도 잘하고, 똑똑했던 여자, 소녀는 일찌감치 학업을 포기하고 돈을 벌어야만 했던, 그런 새롭지 않은 이야기들. 그러면서도 자신의 아들을 위해 딸에게 “오빠 오면 밥 챙겨주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엄마. 은희네 집안 풍경은 어디에서나 있을 법한, 흔히 보아왔던 풍경이라 전혀 새롭지 않은데도 그 익숙한 풍경이, 너무나도 말이 안 된다는 것을 새삼 보여주기 때문에 끔찍하다.

그리고 여기 한 사람이 있다. 김영지. 이 외로운 소녀에게 어느 날 빛과도 같은 존재가 찾아온다. 은희가 다니는 학원의 김영지 선생님은 무심한듯하면서도 세심하게 은희의 아픔을 헤아린다. 은희가 오빠로부터 폭력을 당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때의 그 표정, 그 얼굴은 짧은 순간, 많은 것을 보여준다. 관객들은 어쩌면 영지 선생님 또한 그런 10대를 지나왔으리라는 무거운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 영지 선생님은 은희의 눈을 똑바로 보며 말한다. 더 이상 맞지 말라고. 누구에게도 맞지 말라고. 은희는 이렇게 영지 선생님으로부터 조금씩 세상에 맞서서 자신을 보호하는 법을 배우며 성장해간다. 

영화가 계속 이렇게 흐른다면, <벌새>는 한 소녀의 성장담에서 그쳤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1994년에는 너무나도 많은 일들이 있었다. 김일성이 죽었으며, 성수대교가 무너진 해이기도 하다. 은희가 그 무렵 서울 강남의 한 동네에 살며 학원을 다니고 강남의 중학교를 다니는 설정은 그래서 꼭 필요한 장치였다. 김일성의 죽음은 중학교 2학년인 은희에게 그다지 큰 사건은 아니다. 이 소식을 병실 텔레비전으로 본 은희의 표정은 그래서 어른들과 달리 심드렁하다. 그러나 성수대교가 무너진 소식을 학교에서 텔레비전을 통해 접한 은희는 울면서 교실을 뛰쳐나간다.

김일성이 죽고 성수대교가 무너졌을 때, 나또한 10대였다. 김일성 사망 소식은 그 무더운 여름날 보충수업 중에 들었다. 쉬는 시간에 책상에 엎어져서 자다가 아이들이 “야, 김일성 죽었대”하며 호들갑을 떨던 기억이 난다. 나는 “죽었다고?” 하고 다시 엎드려 잤다. “전쟁 날까?” 하는 소리도 들렸지만 그때 대개 아이들은 ‘전쟁이 나서 시험 안 보면 좋겠다’로 귀결될 정도로 김일성의 죽음은 터무니없는, 왠지 나와는 상관없는 비현실적인 그런 일이었다. 그런데 성수대교 붕괴는 달랐다. 내가 다니던 학교는 강남에 있던 게 아니었는데도 많은 아이들이 소식을 접하고는 공중전화로 달려갔다. 그날, 학교 공중전화 앞은 발을 동동 구르며 어디론가 연락을 하려고 긴 줄을 선 아이들로 가득했다. 교실 책상 서랍이나 아이들 가방에서는 숨겨둔 삐삐가 미친 듯이 울려대기도 했다. 그러니, <벌새>의 은희는 이 소식을 듣고 얼마나 두려움에 떨며 크게 놀랐을까.
 
<벌새>는 이렇게 1994년이라는 특수했던 한 해, 어느 평범한 가족과 한 소녀의 이야기를 엮어서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은희는 그 엄청난 무너짐, 충격 앞에서도 영지 선생님이 가르쳐줬듯이 자신의 손가락을 바라보며 살아있음을 절감한다. 고통과 상처를 쓰다듬는다. 큰 폭력도 작은 폭력도, 큰 상처도 작은 상처도 그렇게 끌어안고 쓰다듬으면서 1994년 그 한해를 보내며 성장하고 자란다. 그런데 은희는 아마도 1995년에 또 한 번 심장을 쓸어내리면서 손가락을 움직이지 않았을까. 성수대교가 무너진 뒤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것 같았지만 그 뒤로 백화점이 무너지고 급기야는 배가 가라앉았다. 은희의 1994년은 지금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은희의 후배가 말했듯이 “그건 지난학기”라고 그냥 흘려보낼 수 없는 날들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벌새>는 그런 세계에서 앞으로도 여러 차례 자신의 손가락을 응시해야 할 나, 또는 세상의 모든 은희에게 가슴으로 남을 영화이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4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락방 2019-09-03 15: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감상 정말 잘 읽었습니다, 잠자냥 님. 이 리뷰를 먼저 읽어서 제가 앞으로 영화 보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아요. 저도 다가오는 주말에 이 영화 보기로 했거든요.
리뷰로만 읽어도 참 좋은 영화네요. 저도 꼭 볼게요, 잠자냥님.

잠자냥 2019-09-03 16:09   좋아요 0 | URL
네, 영화 즐겁게 보세요. 저는 또 한 번 봐도 좋을 것 같더라고요.
책도 궁금해요. 무려 정희진 님의 글이 있어서요. ㅎㅎ

케이 2019-09-03 16: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나. 저는 아직 영화 못 봤는데, 저 책에 정희진 님 글이 있다니! 정희진 님의 영화평 너무나 읽고 싶네요. (책에만 있는 거겠죠? 신문 같은 데 기고하신 게 아니고?) 이 영화 기생충을 넘어선 올해 최고의 영화라고 하는 사람도 많더라고요. 여성 감독이 이런 성과를 냈다는 게 참 소중해요.

잠자냥 2019-09-03 17:12   좋아요 1 | URL
하하하, 저도 이 책은 관심 밖이었는데, 정희진 님 글이 있어서 한 번 읽어보기로 했습니다. 두둥=33
저도 꼼수부려서 어디 글을 기고하지 않으셨나 찾아봤는데 검색에는 안 나오더라고요. 아마 책에만 실려 있는가봐요. ㅎㅎ
암튼 이 영화 보고 나서 책을 보면 더 좋을 것 같아요. 케이 님도 기회가 되신다면 꼭 보세요. 영화도 책도.
전 이 영화 개봉하자마자 봤는데, 책은 자꾸 9월 1일 출간, 9월 2일 출간 등등 미뤄지더니 드디어 나온 것 같습니다.

coolcat329 2019-09-04 1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볼 영화가 없어 살짝 목마르던 차에 이렇게 소개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좀전에 예매했어요 ㅎ

잠자냥 2019-09-04 10:25   좋아요 0 | URL
네~ 즐겁게 보세요~^^
 

Claude Chabrol, <여자 이야기(Une affaire de femmes / Story of Women)>, 1988


최근 시몬 베유의 책을 읽으며 자발적 임신중단법에 관한 글들을 읽다가 오래 전에 본 영화가 떠올랐다. 끌로드 샤브롤 감독의 <여자 이야기(Une affaire de femmes/ Story of Women),1988>가 바로 그 작품인데, 이 영화는 시몬 베유가 자발적 임신중단법안을 상정하기까지의 프랑스 현실, 그러니까 그 무렵 프랑스의 낙태 현실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때문에 이 영화를 통해서 베유가 언급했던, 낙태가 불법이라 고통 아래 신음할 수밖에 없었던 여성들의 삶을 지켜볼 수 있다. 영화가 시작한 후 중반까지는 평범한 어느 여성의 삶이 잔잔히 그려진다. 그런데 중반 이후 이야기가 격하게 흐르더니 영화 끝 무렵에는 충격적인 반전과 함께 관객의 뒤통수를 때리는 결말로 끝을 맺는다. 더욱이 이 영화는 실존 인물의 삶을 그렸다는 점에서 한결 충격적이다.

<여자 이야기>는 나치가 프랑스를 점령했던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두 아이의 엄마인 마리(Isabelle Huppert)는 가수가 되는 것이 꿈이다. 남편은 전쟁터에 끌려갔고 두 아이와 살아남기 위해 생계를 꾸려나가는 것은 순전히 그녀의 몫이다. 우연한 계기로 이웃에 사는 친구의 낙태를 돕고 그녀는 그 대가로 전축을 선물 받는다. 이로 말미암아 본격적으로 마리는 원치 않는 임신을 한 여자들에게 은밀히 낙태 수술을 해주고 그 대가로 돈을 받으며 생계를 유지하게 된다. 전쟁터에 나간 남편이 곧 돌아오지만 그는 생활을 꾸려나가는 데는 관심 없이, 무기력하고 무능력할 뿐이다.

마리는 계속해서 불법 낙태 시술을 하며 돈을 벌고, 그렇게 번 돈으로 점점 큰 집으로 이사를 가며 나치 치하 프랑스라는 암울한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넉넉한 생활을 누리게 된다. 우연히 사귀게 된 매춘부 친구인 룰루에게는 매춘을 할 공간으로 빈방을 제공하고 돈을 받는 등 ‘돈’을 벌기위한 마리의 모험은 갈수록 위험해진다. 게다가 남편과 애정 없는 형식적인 결혼 생활을 유지하던 그녀는 젊고 잘생긴 남자를 만나 성적인 쾌락까지 느끼며 자유로운 생활을 만끽하게 된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가수의 꿈을 키우고자 본격적으로 개인교습까지 받게 된다.

그렇게 행복한 마리에게 느닷없이 큰 불행이 닥친다. 아내 마리의 방종한 생활을 지켜보던 남편이 급기야 경찰서에 그녀를 신고하는 것이다. 불법 낙태 시술을 하며 돈을 받았으며, 매춘을 알선했다며 그간 마리의 죄를 낱낱이 고발한다. 그런 줄도 모르고 가수가 될 생각에 꿈에 부풀어 있던 마리는 행복에 겨워 두 아이를 끌어안고 춤을 춘다. 그때 집으로 들이닥친 경찰. 그녀는 결국 감옥에 갇힌다. 변호사를 고용하지만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변호사는 여자에게는 그런 중형을 내린 적이 없다고 마리를 안심시키지만 어쩐지 마리는 점점 중범죄자들이 수감된 교도소로 이송될 뿐이다.

그리고 법정은 그녀에게 최고형을 선고한다. 낙태와 매춘 알선 등 ‘불법적이고 비윤리적인’일을 자행했고 그런 비윤리적인 일에는 최고형이 내려져 마땅하다고 선고한다. 전쟁이 끝난 뒤, 국가는 도덕 및 윤리, 사회 기강 확립이 필요했고, 그 선례로 이토록 비윤리적인 일을 자행한 여성은 마땅히 최고형을 받아야 했던 것이다. 그런데 ‘윤리’라니? 도덕적이지 못하다니? 전쟁을 일으키고, 전쟁에서 살인을 하고, 돈을 주고 성(性)을 사고, 그 수많은 불법 낙태를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이들은 모두 남자들이 아니었던가? 남자들의 ‘국가’가 아니었던가? 그런 그들이 ‘윤리적이지 못하다’며 마리에게 최고형을 내린 것이다. 그 또한 남자들로 이루어진 법정이었다. 이 영화 후반부에 국가 윤리 확립, 사회 재건설 등의 말이 쏟아질 때는 참을 수 없는 분노로 현기증이 날 정도이다. 


전쟁 치하에서 마리는 아이들과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그들이 말하는 ‘윤리’에서 벗어난 행동을 했다. 그녀를 찾아와 낙태를 해달라며 눈물로 호소하던 그 수많은 여자들의 사연을 들어보라! 전쟁으로 인해 남편이 끌려가거나, 전쟁터에서 죽거나 등등 아이를 낳아 기를 수 없는 처지가 허다했다. 그런데도 국가는 정작 그런 전쟁을 벌여놓고 윤리와 사회 기강을 말하며 그 여자를 처형하기에 이른다. 과연 누가 누구에게 윤리를 운운할 수 있단 말인가? 그토록 파렴치한 ‘국가’는 여전히 이 지구 곳곳에서 크고 작은 전쟁을 벌이고 있으며, 마땅히 개인의 선택이어야 하는 출산 및 낙태의 권리에 윤리와 죄라는 잣대를 들이대며 간섭하고 있다.

그저 노래하는 것이 즐거웠던, 가수가 되고 싶었던 여자 마리. 살기 위해 ‘윤리적이지 못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여자 마리. 그런 그녀에게 돌을 던진 국가는 과연 얼마나 윤리적이고 도덕적인가? 마리를 연기한 이자벨 위페르는 신들린 듯한 연기로 이 작품에 완전히 몰입하게 만든다. 그녀의 도도하고 차가운, 그러면서도 노래를 부를 때는 마냥 행복하던 얼굴, 마침내 죽음을 앞두고 두려움에 덜덜 떨던 표정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여자 이야기>는 자발적 임신중단법과 여성의 권리에 관심 있는 이들에게 꼭 추천하고 싶은 영화이다.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케이 2019-08-23 16: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떤 사람이 이자벨 위페르 연기를 보고 혈관 하나, 머리카락 한 올까지 연기하는 느낌이라고 했는데, 정말 그 말이 딱 맞는 배우예요. 저는 영화 ‘피아니스트‘를 보다가 너무 처참하고 괴로워서 결국 중간에 시청을 중단했답니다. ㅜ_ㅜ (아직도 용기가 안나서 못보고 있음) 정말 대단하고 어떤 면에선 무서운 배우... 이 영화도 보면 참 우울해질 것 같네요.

잠자냥 2019-08-23 16:25   좋아요 1 | URL
<피아니스트> 보시다 말았구나. . 그 영화 정말 처참하죠;; 그래도 저는 끝까지 봤어요. 원작 책도 읽었다는;;; 이 영화도 보면 참 우울해질 영화입니다만..... 그래도 마리 역의 이자벨 위페르는 정말 신급 연기를 보여줍니다. 영화 자체도 매우 흥미진진해요.

설해목 2019-08-23 1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덕분에 좋은 영화를 알게되었네요.
역시 잠자냥님 리뷰는 언제나 기다린 보람을 느끼게 해줍니다! ^^
이 영화 진짜 꼭 챙겨보고싶네요.

잠자냥 2019-08-23 18:10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이 영화는 구하기가 어려울 것도 같은데 어떻게든 꼭 한 번 보시라고 추천하고 싶습니다~~!

다락방 2019-08-23 1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설해목님처럼, 덕분에 좋은 영화를 알게 되었다는 인사를 놓고 갑니다. 알지도 못하는 영화였어요.
저는 사실 설해목님 댓글을 그대로 복사해도 쓰고 싶은 마음입니다.

잘 읽고 갑니다, 잠자냥 님. 글 써주셔서 늘 감사해요.

잠자냥 2019-08-23 18:13   좋아요 0 | URL
늘 읽어주셔서 제가 감사히지요~ ㅎㅎ 이 영화는 다락방 님 꼭 보세요! 아마 부들부들 분노의 포스팅을 할 거리가 많을 거예요. 구하는 게 쉬웠으면 더 좋겠어요. 예전에 저는 어느 영화제에서 봤는데요, 음...

단발머리 2019-08-24 08: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읽고 있는데, 정말 시몬 베유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자신에게 닥쳤던 어려움을 이겨내고 다른 사람들을 돕는 모습들이요.
한나 아렌트 비롯해서 유대 지식인들 가열차게 비판하는 부분도 관심을 끌고요.
부지런히 읽어서 임신 중단법 제정을 위해 애쓰는 시몬 베유도 만나고 싶네요^^

참, 저도 설해목님 댓글 그대로 복사해서 쓰고 싶습니다 2!!!!

다락방 2019-08-24 08:30   좋아요 0 | URL
힝.. 나만 안 읽었어, 시몬 베유 ㅜㅜ

잠자냥 2019-08-24 12:27   좋아요 0 | URL
맞아요. 저도 그 한나 아렌트 비판하는 부분은, 생각지도 못한 부분을 지적한 거라 꽤 공감하고 깊이 새겨둘 내용이라고 생각했어요. 단발머리 님도 이 영화 꼭 보시길 ㅎㅎ

잠자냥 2019-08-24 12:28   좋아요 0 | URL
다락방 님 조만간 시몬 베유 책도 읽어보시고요 ㅎㅎ
 

몇 달 전 신간 목록을 훑어보다가 시몬 베유(Simone Veil)의 새 책을 발견했다. 그때 내가 본 책은 ‘꿈꾼문고’에서 나온 <시몬 베유의 나의 투쟁>이었다. 이 책 표지에는 유대인을 뜻하는 ‘다윗의 별’이 그려져 있다. 게다가 책 제목도 ‘시몬 베유의 나의 투쟁’이니, 나는 당연히 그 유명한 철학자 시몬 베유(Simone Weil), <중력과 은총>, <신을 기다리며>를 쓴 철학자 시몬 베유의 새 책인가 싶었다. 그녀에게 이런 저작이 있었다고? 의아한 마음으로 책 소개를 읽어보다가 뜻밖의 문구를 발견했다. “1974년 프랑스 보건부 장관으로 임명된 직후, 자발적 임신중단에 관한 법, 일명 ‘베유 법’을 통과시키며 여성인권 신장에 앞장선 프랑스 정치인 시몬 베유.” 아하, 그제야 동명이인임을 깨달았다. 그런데 이 시몬 베유의 글도 궁금해진다. 그래서 사서 읽게 된 책이 <시몬 베유의 나의 투쟁>이다. 책을 받아들고 맨 먼저 읽은 장은 자발적 임신중단에 관한 법안을 상정하기 위해 그녀가 의회에서 연설했던 내용을 담은 글이었다. <시몬 베유의 나의 투쟁>은 ‘홀로코스트의 기억을 위한 투쟁’ ‘유럽을 위한 투쟁’ ‘여성해방을 위한 투쟁’ ‘더 나은 사회를 위한 투쟁’으로 이루어지고, 거의 연설문을 글로 담았다. 여성해방과 관련된 글 중심으로 천천히 읽어나가고 있는데, 이윽고 시몬 베유의 또 다른 책이 출간되었다. <나, 시몬 베유> 이 책은 그녀의 자서전이나 마찬가지다. 연설문을 죽 읽어가는 것보다 자서전을 먼저 읽는 게 좋을 것 같아 노란 책부터 읽기를 마쳤다.

두 책의 구성은 거의 비슷하다. <나, 시몬 베유>는 그녀가 어린 시절을 어떻게 보냈는지 시작해서 유대인으로서 홀로코스트를 겪고, 수용소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대학을 진학하고, 교정행정국 판사가 되고, 프랑스 보건부 장관에 올라 임신중단 법안을 통과시키고, 유럽의회 최초 선출직 의장 자리에 오르기까지의 숨 가쁜 삶이 펼쳐진다. <시몬 베유의 나의 투쟁>이 ‘홀로코스트/유럽해방/여성해방’으로 크게 분류한 것과 거의 비슷한 삶의 궤적을 보여준다. 이런 삶을 바탕으로 시몬 베유의 정체성을 단 두 개로 정의하라면 ‘유대인’과 ‘여성’이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시몬 베유는 강제수용을 겪었기 때문에 ‘인간사에서 타인의 존재를 모욕하고 격하시킬 수 있는 모든 것에 극도로 민감해졌다.’고 말한다. ‘신체적으로 밀착하는 것만큼이나 정신적인 소외를 싫어하게 되면서 스스로를 마치 감옥 내의 투사처럼 여길 수밖에 없었다’.(<나, 시몬 베유>, 115쪽) 고백했다.

그리고 그녀의 어머니- 유대인과 여성이라는 정체성 못지않게 현재의 시몬 베유를 있게 한 존재로 어머니를 꼽을 수 있겠다. 베유의 집안은 화목했지만 아버지는 가부장제에 충실한 사람으로 그려진다. 그녀의 집에서 정치는 언급될 수 없는 주제였는데, 부모의 정치적 성향이 달랐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우파 일간지를 구독했고, 어머니는 사회주의 경향의 신문을 구독했으며 아버지 몰래 중도좌파 또는 좌파 잡지를 읽었다. 그런 틈에서도 베유는 ‘아버지의 결정이나 금기가 어머니를 괴롭히는 것 같다’고 서슴없이 말하곤 했다. 게다가 베유와 언니들은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너무 (경제적으로) 의존한다고 생각했고, 그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돈을 버는 일을 하지 않았기에, 경제적인 자율성을 전혀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에, 아버지에게 가계부를 상세히 보고해야 했다. 어머니는 딸들에게 여러 번 주의를 준다. 그들은 유념해 듣는다. 절대 잊히지 않는 교훈이 담긴 충고였다. “일을 해야 할 뿐 아니라 번듯한 직업을 가져야 한다.” 어머니의 가르침으로 베유와 자매들은 여성은 남편이 반대하든 아니든 공부하고 일할 수 있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유와 독립’에 관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시몬 베유가 홀로코스트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프랑스로 돌아와 대학에서 법학과 정치학을 전공하고, 그 사이에 결혼해서 세 아이를 낳고 마침내 변호사협회에 등록하겠다고 나섰을 때 그녀의 남편은 불만을 터뜨린다. 그때 그는 자신이 원하는 공부를 하면서 사회 경력도 쌓아가는 중이었다. 그런데도 재능 있는 아내가 집에서 육아에 전념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베유는 가만히 있지 않는다. “뭐야? 당신 일이 궤도에 오를 때까지 기다리고 나서 일하기로 했잖아. 당신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잖아. 국립행정학교에 가서 잘 되고 있잖아. 내가 일하는 걸 막을 수 있는 것 아무것도 없어.” 이렇게 말했지만 베유는 자신의 남편이 이토록 부정적인 답을 할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 같다. 자신의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녀의 남편 또한 아내가 직업을 갖는 것을 거북해한다. 게다가 그는 법의 엄밀성과 힘을 믿으면서도, 변호사라는 직업을 그리 존중하지 않는다. 베유가 변호사라는 직업에서 피고인과 피해자를 바라보는 데 반해, 그녀의 남편은 돈을 낼 수 있는 의뢰인의 입맛에 따라 태도를 바꾸는 변덕스러움만을 보았다. 만일 이때 베유가 남편 뜻에 따라 집안에서 세 아이를 키우는 일에 만족하며 살았다면 임신중단법은 어떻게 됐을 것이며, 과연 그녀가 프랑스 국립묘지인 팡테옹에 묻히게 되었을까? 그저 가족 묘지에, 남편 옆에 이름 없는 여인으로 묻혔을지도 모른다.

여기에 시몬 베유의 삶을 일일이 옮길 필요는 것을 것 같다. 다만 그녀는 고통의 역사를 몸소 겪은 뒤 그 고통을 다른 사람들은 겪게 하지 않으려고, 다시는 그 고통이 반복되지 않게 하려고 자신의 평생을 바쳤다는 점만은 이야기하고 싶다. 베유 자신은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여성의 대의를 위해 투쟁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녀가 살아갈수록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는, 역설적이지만, 살면서 여성이기 때문에 얻은 기회가 많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아우슈비츠에서는 베유가 여성이기 때문에 한 여성이 일이 덜 고된 작업반으로 그녀를 지정해서 옮겨주며 보호해준 덕분에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이 모든 것은 여성의 권리에 대한 자신의 입장이 개인적인 복수심에서 오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그녀가 보기에 ‘여성을 위한 기회는 그저 운에 맡겨져 있었고 법이나 제도를 통해서 기대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런 ‘차별을 시정하는 대가로, 사회는 여성이 신음하는 불평등을 줄임으로써 구체적인 이득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기회의 불평등과 이를 바로잡기 위해 필요한 조치란 성차별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사회통합과 결속에서도 중요’한 문제이다. 이 책들을 읽고 나서 <시몬 베유의 나의 투쟁> 표지를 다시 보니 ‘다윗의 별’로만 보이던 그것이 이제는 장미꽃처럼 보인다. 자신의 고통스러운 경험을 타인의 행복을 증진하는 데 바친 사람, 세상에 장미꽃을 주고 간 사람. 그녀, 시몬 베유.


당시 나는 남자들이 임신중단보다 피임에 더 적대적인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피임은 여성에게 자유를 부여하고, 이전까지는 남성의 손에 쥐어져 있던 여성의 몸에 대한 통제권을 도로 여성에게 가져온다. 그러므로 피임이란 이전부터 내려져오던 관념을 문제시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임심중단은 여성을 남성의 전권으로부터 면하게 해주는 문제가 아니었다. 오히려 여성을 멍들게 하는 것이었다. (<나, 시몬 베유>, 152쪽)

“대부분 남성으로 이루어진 의회에서 이렇게 말씀드리기가 송구합니다만, 우선은 여성으로서의 저의 신념을 나누고자 합니다. 낙태 수술을 즐겁게 받는 여성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 문제는 여성의 말을 듣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여성에게 낙태는 비극이고, 언제나 그러할 것입니다. 비탄에 빠진 이 여성들을 누가 보살피고 있습니까? 현재의 법은 여성들을 오욕, 수치, 고독에 빠뜨릴 뿐 아니라 익명의 존재로 만들고 구속에 대한 두려움에 떨게 합니다. 여성들은 자신의 상태를 감추어야 하고, 곁에 자신의 말을 들어주고 한 줄기 빛이 되어 도움과 보호를 제공해줄 사람 없이 홀로 남겨집니다.” (<나, 시몬 베유>, 270쪽)

“우리는 여성의 직업 활동과 더불어 여성의 삶의 방식에 대해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저는 이러한 용어들과 함께 종종 따라오는 잘못된 논쟁에 참여하고 싶지 않습니다. 여성들은 일을 해야 한다 혹은 집 안에 있어야 한다. 여성 해방이나 속박이냐 같은 논쟁 대신, 저는 여성들이 바랄 수 있고, 바라야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선택의 자유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여성들은 어떤 결정을 내리는 것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거기서부터 삶의 틀과 환경이 세워지고, 이어서 여성의 존재 방식의 모델이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프랑스 여성들은 일과 가정의 양립을 추구하고자 합니다. 공권력의 책무는 여성들의 이러한 욕구를 고려하는 것입니다’, <시몬 베유의 나의 투쟁>, 295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