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지
조세핀 하트 지음, 공경희 옮김 / 녹색광선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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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이해(理解)를 불허한다 
이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두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마음의 파동, 이런 것을 당사자가 아닌 이상 어떻게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 때문에 사랑하는 두 사람이 아닌 타자의 이해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어떻게 그런 사람을 사랑할 수 있어? 어떻게 그런 관계에서 사랑이 싹틀 수 있어? 파국이 뻔한데 어떻게 거기서 벗어나지 못해?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어… 이런 말들은 그래서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 이해할 수 없는 관계에 놓인 당사자들은 타인의 이해를 구하지 않을뿐더러 도리어 타자들이 이해할 수 없음, 그 금기 또는 금지나 마찬가지인 상황, 상태, 관계에서 더욱 불꽃이 타오르기 마련이다. 금기가 열정을 불러온다. <데미지>의 ‘나’와 ‘안나’의 관계가 바로 그 이해할 수 없음의 사랑이다. 그러나 그들은 타인들의 이해를 바라지 않는다. 애초부터 그 따위 것에는 신경 쓰지 않는다. 신경 쓸 겨를조차 없다.

타자들은 왜 그들을 이해할 수 없는가? ‘나’는 모든 것을 가진 남자이다. 어느덧 쉰이라는 나이에 이른 그는 인생의 정점에 있다. 의사가 되었고, 부유한 집안의 아름다운 아내를 만나 결혼했고, 잘생기고 똑똑한 아들, 예쁘고 똑똑한 딸은 번듯하게 성장했다, 그는 의사라는 신분, 아내 집안의 도움과 조력으로 정계에 입문, 어쩐지 욕심이 없는 듯한(정치에서 사적으로 바라는 게 없는 듯한) 무심한 태도로 사람들이 마음을 사로잡아 승승장구, 차기 영국 총리 후보로 거론될 정도로 성공가도를 달린다. 그는 그렇게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안정적이고 안온한 날들을 보낸다. 그 여자 ‘안나 바턴’을 만나기 전까지는 모든 게 완벽했다. 아니, 실은 무언가 공허하고 때로는 헛헛하지만 완벽하다고 생각하며 그렇게 최면을 걸며 살아왔다. 

그런데 그 여자, ‘안나’가 나타난 것이다. 그냥 가벼운 바람인가?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하필이면 안나는 아들 ‘마틴’의 연인. 그것도 바람둥이이던 아들이 결혼을 꿈꿀 정도로 푹 빠진 연인이다. 어떻게 아들의 연인을 욕망할 수 있느냐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노라고, 그저 당신은 노망난 늙은이라고 정신 차리라고 질책하는 것은, 어떻게 그런 사랑이 가능하냐고,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단지 욕정이 아니냐고 되묻는 것은 그에게는 이미 소용없는 일이다. 들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들려도 외면할 것이기 때문이다. 젊고 잘생긴 데다가 심지어 자신보다 8살이나 어린 남자로부터 열렬한 사랑을 받는 여자가 연인의 아버지로부터 욕망이 들끓는 시선을, 추파를 받는다니, 너무나 고통스러울 것이다, 불쾌할 것이다, 오 불쌍한 안나, 가련한 안나...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신은 사랑을, 욕망을 알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랑의 일면만을 아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랑은 이기적이다
안나 또한 그에게, 그러니까 연인의 아버지인 그에게 반하기 때문이다. 아니, 이 표현은 틀렸다. 그를 알아보고, 그가 자신과 동류의 인간임을 알아보고 욕망을 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안나가 마틴을 사랑하지 않느냐 하면, 또 그렇지도 않다. 안나는 마틴은 마틴 대로, 연인의 아버지인 그는 그대로 욕망한다. 아니, 이 표현도 틀렸다. 그들이 자신을 욕망하도록, 갈망하도록 간절히 원하고 또 원하도록 내버려둔다. 쉽게 손에 잡히지 않음으로써 부추긴다. 이 여자는 도대체 왜 그러는 것일까? 팜파탈? 단순히 팜파탈이라고 하기엔 그녀의 내면이 복잡하다. 그래서 이 관계, 삼각관계라 부르기도 애매한 이 ‘이해하기’ 어려운 사랑의 조합은 그렇게 유지된다. 안나와 마틴은 표면적으로는 남부러울 것 없는 연인 사이로, 약혼하고 조만간 결혼할 사이로... 그리고 그 이면에서는 ‘나’와 안나가 은밀하게 내내 서로를 갈망하는 사이로. 물론 마틴은 꿈에도 알지 못한다. 아버지와 자신의 연인이 그렇게 서로의 몸을 탐하는 숨겨진 연인 사이라는 것을.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이 뻔뻔한 것들! 이기적인 것들! 마틴에게 상처 줄 것을 뻔히 알면서 예비 시아버지와 예비 며느리가 어떻게 그런 사이가 될 수 있지? 정말 이기적이다. 정말 추잡하다! 짐승만도 못한 것들! 쯧쯧! 비난과 손가락질이 난무하리라. 그러나 사랑은 이기적이다. 심지어 자신이 사랑하는 그 상대에게조차 이기적이다. 사랑은 언제나 내 욕망이 먼저이기 때문이다. 너의 욕망, 너의 갈망부터 채워주고자 하는 사랑이 이 세상에 얼마나 존재할까? 과연 있기는 할까? ‘나’는 안나를 처음 보는 순간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들어 이제껏 쌓아올린 그 모든 것을 뒤로 한 채 오직 그녀를 가져야 한다는 생각만으로 안나를 찾는다. 이기적 욕망이 먼저이다. 안나는 또 어떠한가? 마틴에게 감당할 수 없는 상처를 줄 것임을 알면서도 ‘나’ 그러니까 연인의 아버지를 받아들인다. 그와의 정기적인 밀회를 약속하기까지 한다. 마틴이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는 것을 십분 활용한다. 안나에게는 그래서 ‘마틴’, ‘나’ 말고도 또 다른 남자들이 존재한다. 언제나 나의 욕망이 먼저이다. 사랑은 이토록 이기적이다. 

마틴은 이 사랑의 게임에서 피해자이기만 한가? 마틴은 안나에게 섣불리 질문하지 않는다. 비밀 많은 그녀의 삶이 궁금하면서도 묻지 않는다. 판도라의 상자를 열면 그녀를 잃어버리고 말 것임을 알기에 침묵한다. 그토록 수많은 금발의 여자들을 만나고 버리고 만나고 버리고를 반복한 끝에 이제 이 검은 머리, 연상의 여인에게 푹 빠진 마틴은 그녀를 잃지 않으려고 묻지 않는 편을, 알면서도 눈감기를 선택한다. 이것은 과연 이타적인 행위인가? 이 또한 자신의 갈망을 채우기 위한 색다른 선택, 이기적 욕망이 아닌가? ‘나’, 안나, 마틴 이 세 사람 외에도 <데미지>에 등장하는 대다수 인물들은 결국 사랑 앞에서 자신이 먼저이다. 자기의 욕망이 먼저이다. 피터, 애스턴… 네가 없으면 나는 죽어, 너를 보지 못하면 나는 죽어이지, 너를 살리기 위해 내가 너를 떠나거나 너로부터 벗어나는 게 아니다. 그래서 ‘나’는 자신의 갈망이, 욕망이 아들을 파국으로, 자기를 파국으로, 가정을 파국으로 몰아갈 것을 알면서도 멈추지 않는다. 멈추지 못한다. 왜냐하면 안나와 함께 있을 때 처음으로 죽은 줄로만 알았던 삶이 살아 있음을 경험하기 때문에.
 
사랑은 상처이다 
그러나 결국 이 이해할 수 없는 사랑은 타자의 이해를 필요로 하지 않음에도 세상은 자신을 이해시키도록 해명을 요구한다. 설명할 수 없음, 설명이 되지 않음, 설명으로도 받아들일 수 없음. 그런 관계는 끝내 세상에서 받아들이지 못한다.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 한데 왜 사랑하는 두 당사자가 아닌 세상이 그 사랑을 받아들여야 하는가? 그러나 세상은 그렇다 치고 무시한다 치고. 이 두 사람과 얽힌 관계에 놓인 자들은 그 두 연인의 욕망의 파동에 휩싸일 수밖에 없다. 마틴, ‘나’의 아내 ‘잉그리드’, 딸 ‘샐리’… 그의 욕망은 그와 안나에게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의 가족 구성원에게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영향은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씻을 수 없는 고통과 상처를 안겨줄 것이다. 그런 ‘나’는 행복하기만 할까? 불행한 가운데서도, 불행해질 것을 알면서도 행복할 수는 있을 것이다. 안나와 함께하는 순간에는. 그 행복이 피투성이 행복임을 알면서도 피범벅이 되기를 거부하지 않을 것이다. 안나와 함께하는 순간에는. 피 흘리면서도 생이 눈앞에서 생동하기 때문에….

그러나 안나는 그하고만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어떠한가? 안나와의 결혼 생활을 꿈꾸는 사람인가? 가능한 사람인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 그래서 안나는 그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본 것이리라. 서로 동류임을 알아본 것이리라. 그러나 이렇게 자기의 욕망에 충실한 자들은 타자들에게 상처를 줄 수밖에 없다. 타인뿐만이 아니라 피투성이 사랑에 자기를 몰고 감으로써 자기 또한 종국에는 상처받고 만다. 그래서 사랑은 상처이다. 내가 피를 흘리고 너 또한 피를 흘리게 하는…. “모든 것을 바꾸는 찰나의 경험, 교통사고, 열어보지 말아야 했을 편지, 가슴이나 사타구니 안의 멍울, 눈을 멀게 하는 플래시 불빛.”(p.46)

거기 상처받은 짐승은 고통에 부르짖으며 눈물을 흘린다. 죽음과도 같은 삶이 형벌처럼 주어진다. 아들을 잃은 눈물, 가족을 잃은 눈물, 안나를 잃은 눈물을 내내 흘리리라...... 그러나 그런 중에도 가족을, 아들을 잃은 슬픔보다 안나를 잃어버린 슬픔과 고통 때문에 흘리는 눈물이 더 농도 짙으리라. 멈췄어야 한다고, 다 잃기 전에 그만두었어야 한다고, 그토록 많은 걸 가진 자가, 그런 욕망에 모든 걸 걸다니 어리석다고, 이해할 수 없노라고, 파국으로 치닫기 전에 당신의 삶을 통제했어야 한다고 타자들은, 세상은 혀를 끌끌 찰지도 모른다. 그러나 통제할 수 있었다면, 떠날지 머물지 고뇌 없이 선택할 수 있었다면 그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을 것이다. 나는 이런 갈망을 결코 품어본 적이 없노라 그 누가 자신할 수 있을까. <데미지>는 사랑의 이런 속성들을 서늘하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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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6-06-05 15: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굉장히 매력적인 작품인가 봅니다. 사랑은 이기적이다… 하긴 그렇죠.
아니… 그래도 아들의 연인은 너무했다…..

잠자냥 2026-06-05 15:30   좋아요 1 | URL
ㅋㅋㅋ 이거 영화 안 봤죠?
영화 보면 욕 나옴 ㅋㅋㅋㅋㅋㅋ (‘나‘가 제러미 아이언스라 용서가 좀 되긴 하지만....)
근데 원작은 그래도 심리 묘사에 치중해서 그런지 그럴 수도 있겠다 싶음.

왜 안 자? 자라 괭.

독서괭 2026-06-05 15:38   좋아요 0 | URL
영화 안 봤어요~~ 하.. 이것도 도서관에 신청해야 할까요?
잡니다 Zzz

잠자냥 2026-06-05 16:15   좋아요 0 | URL
원서요? 도서관에 있을 거 같은데...?
야한 부분 영어로 뭐라 했는지 궁금하다. ㅋㅋㅋㅋㅋㅋㅋㅋ

독서괭 2026-06-06 08:00   좋아요 0 | URL
도서관에 없네요..? 데미지 쳤는데 없어서 굳이 작가 이름 철자 찾아서 찾아봤는데 없어유 dvd만 있군요.

잠자냥 2026-06-06 17:36   좋아요 1 | URL
걍 한국 들어와서 번역본으로 읽어요. 거기서 읽을 책도 쌓였자나….😹

다락방 2026-06-05 2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쉰이요?? 저 영화에서 제레미 아이언스 최소 예순 이상으로 생각하고 봤는데.. 쉰이면 너무 젊은데요?? 충격..
저는 영화에서 제레미 아이언스랑 줄리엣 비노쉬가 앉아서 해괴망측한(?)섹스를 하면서 남자가 여자 옷을 찢던 장면이 강하게 남아있어요. 옷 찢지마.. 라고 부르짖으면서 봤기에..
이 영화 좋아하진 않았는데 이상하게 마지막, 제레미 아이언스가 혼자 지내던 장면이 여운이 깊어요. 그건 그렇고. 제가 아까 헐레벌떡 급박하게 책을 사버렸습니다. 리뷰가 올라올 줄은 모르고.. 😭

잠자냥 2026-06-06 00:33   좋아요 0 | URL
잘했어 🙆🏻‍♀️ ㅋㅋㅋㅋ

네 쉰입니다. 아들이 스물다섯, 안나는 서른 셋.

아니 근데 영화에 그런 장면이 있었어요? ㅋㅋㅋㅋㅋㅋㅋ 아 이 응큼한 여자. 그걸 아직도 기억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난 그런 건 기억 1도 안 남.

잠자냥 2026-06-05 20:46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 근데 락방이가 쉰이 젊다고 느끼는 거 ㅋㅋㅋㅋㅋㅋ 영화 볼 때보다 그 나이에 가까워져서 그런 거 아닌가요? 🤣🤣🤣🤣🤣🤣

망고 2026-06-06 11:27   좋아요 1 | URL
엥 옷을 왜 찢어요 집에 갈때 뭐입고 가라고ㅠㅠ 영화 안 봤는데 계속 안보고 책봐야 겠네요😆

잠자냥 2026-06-06 17:35   좋아요 0 | URL
영화보다는 책 추천합니다요~

다락방 2026-06-06 20:02   좋아요 0 | URL
저도 옷 찢는 거 스트레스 ㅜㅜ 속옷 찢는 것도 스트레스 스트레스 ㅠㅠ

독서괭 2026-06-06 23:36   좋아요 0 | URL
해괴망측한 섹스가 뭔지 궁금 ㅋㅋ

잠자냥 2026-06-07 11:33   좋아요 1 | URL
괭/ 책에서는 그런 장면은 나오지 않아요. 섹스를 여러 차례하긴 하는데…. 그녀를 가져야만 했다/ 가졌다/ 끝났다. 뭐 이런 식임 ㅋㅋㅋ 거기서 dvd 빌려보든가요. 😹

망고 2026-06-07 11:46   좋아요 1 | URL
영화에서 상상의 나래를 활짝 펼쳤나 봐요ㅋㅋㅋㅋ사실 해괴망측한거 궁금한데🙄

다락방 2026-06-07 16:15   좋아요 1 | URL
그러니까 해괴망측.. 이라기 보다는.. 흠.. 너무 욕망이 들끓어서... 아 모르겠다~ 직접 보고 판단하십쇼. 그런데 저는 책이 훨씬 좋을것 같다는 느낌적 느낌입니다. 얼른 읽어봐야지~

구단씨 2026-06-08 16: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출간 소식 듣자마자 장바구니에 넣었다가, 잠자냥님 리뷰 보고 바로 결제합니다. 땡스투~
어렸을 적에 이 영화 보고 충격 받았던 기억이 나요.
그때는 그저 이런 관계(애인의 아버지, 아들의 연인)의 적나라한 몸짓이 도대체 뭔가 이런 생각만 했는데,
지금 보면 또 다른 시선의 이야기가 들어올 것 같아요.
제레미 아이언스 멋있었는데, 저도 그 영화 보면서 그가 50세의 나이라고 생각하지는 못했네요. ^^
책 읽으면서 영화도 다시 봐야겠어요.

잠자냥 2026-06-08 16:31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영화보다는 덜 선정적이고! (ㅋㅋㅋㅋ) 영화보다는 더욱 그들의 심리를 잘 이해하게 되실 것 같아요.
저도 예전에 영화 볼 때는 제러미 아이언스 완전 늙은이라고 생각했는데(그래도 멋있긴 한...) ㅋㅋㅋ 쉰이면 젊네 싶은 것이.... 제가 늙은 거겠죠! ㅋㅋㅋㅋㅋㅋ

케이 2026-06-12 11: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제 쉰에 가까워지는 지금 쉰이 되어서도 그렇게 욕망에 들끓수 있는 것도 일종의 재능이라고 봅니다. 그런 면에서는 어느 정도 리스펙트 해요. 저는 이제 남자들 웃통 벗은 모습만 봐도 그 옷 당장 입지 못할까!!!! 라면서 기분이 나빠지는 지경인데요 ㅋㅋㅋㅋㅋ남자들은 여름에도 긴팔 긴바지 입고 목 위, 손만 바깥에 내놓고 다녔으면. ㅜㅜㅜㅜ양말도 다 갖춰신고.

잠자냥 2026-06-12 12:10   좋아요 1 | URL
그 옷 당장 입지 못할까! 케이 님이 말씀하신다! ㅋㅋㅋㅋㅋ
쌍둥이 육아 때문에 피곤에 절으셔서 더 그런 거 아닙니까? ㅋㅋㅋㅋ 하긴 6070 넘어도 사랑에 숨 넘어가는 사람들 보면 정말 대단하긴 합니다.....ㅋㅋㅋㅋㅋㅋ
 
야생 종려나무 - 예루살렘이여, 만약 내가 그대를 잊는다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95
윌리엄 포크너 지음, 권지은 옮김 / 민음사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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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인가 빔 벤더스의 영화 <퍼펙트 데이즈>를 감명 깊게 보았다. 이 영화에는 꽤 인상적인 인물이 등장한다. 도쿄 시부야의 화장실 청소부 ‘히라야마(야쿠쇼 코지)’가 그 주인공이다. 매일 아침 일어나 카세트테이프로 올드 팝을 듣고, 일터로 향해 누구도 감시하거나 보는 눈이 없어도 온 정성을 다해 공공 화장실 청소를 마치고 점심에는 간소하게 식사하면서 공원의 나무 사이로 비치는 햇살을 필름 카메라에 담는 그. 일을 마친 후에는 자전거를 타고 단골 식당에 가서 술 한 잔을 마시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헌책방에서 산 책을 읽으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혼자 사는 집안은 깔끔하기 짝이 없다. 그만의 루틴으로 꽉 채워진 충실한 삶…. 이런 그가 즐겨 읽는 책 중 하나가 포크너의 <야생 종려나무>이다. 히라야마의 과거는 자세히 밝혀지지 않지만 그가 사람을 대하는 태도나 취미(음악, 책, 분재, 필름 카메라), 문득 찾아온 여동생의 눈물 섞인 한숨과 대사 등으로 보아 화장실 청소를 하면서 살아갈 만한 이력을 지닌 사람은 아닌 것은 분명해 보인다. 포크너의 <야생 종려나무>를 읽어보면 그의 삶을 좀 더 이해할 수 있을까? 궁금했다. 그러나 당시로서는 믿을 만한 번역본이 없어서 일단 궁금증 해소를 나중으로 미뤘다.

그렇게 몇 년이 흐른 후, 2026년 5월에 ‘히랴아마’가 왜 포크너의 <야생 종려나무>를 읽었을지, 읽으면서 어떤 부분에 공감하면서 읽었을지 조금은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빔 벤더스가 괜히 포크너의 작품을 소품으로 집어넣은 게 아닐 것이라는 확신까지 든다. <퍼펙트 데이즈>가 아니었더라도 포크너의 <야생 종려나무>를 읽었겠지만 <퍼펙트 데이즈>를 통해 이 작품을 알게 되었으므로 더 풍부하게 이해하게 된 느낌. 정-반-합 모든 게 딱딱 들어맞는 느낌이랄까. 그리고 나도 어떤 면에서는 <퍼펙트 데이즈>의 ‘히라야먀’, 그리고 <야생 종려나무>의 ‘해리 윌본’ 또 그리고 <노인>의 '키 큰 죄수'처럼 살아야 하지 않을까, 비록 패배하더라도 그렇게 살려고 애는 써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본다. 

이쯤에서 아니, <노인>이라니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싶은 사람도 있으리라. 《야생 종려나무-예루살렘이여, 만약 내가 그대를 잊는다면》은 두 개의 이야기로 구성된다. 처음에는 이 사실을 모르고 읽기 시작했기에 아아아니, 포크너 이 양반 역시나 또 어렵네, 어려워! 하면서 머리를 긁적였다. 이 책의 목차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이 작품은 <야생 종려나무>와 <노인>이라는 장이 번갈아 가면서 전개된다. 그런데 이 두 작품이 완전히 별개의 이야기라는 게 읽는 이의 골머리를 썩이게 한다. 분명히 뭔가 연결고리가 있으니까 이렇게 장을 배치했을 텐데 어떤 이유로 한 작품으로 묶은 것일까? 나 따위가 포크너의 그 깊은 심중을 다 헤아릴 수는 없으니 일단 읽어보자 싶어서 읽어나가기 시작......

<야생 종려나무>는 사랑 이야기이다. 그것도 불륜. 바닷가 한 오두막에 결혼한 지 이십 년이 지난 의사 부부가 살고 있다. 이 의사는 아버지로부터 상속받은 재산으로 바닷가의 별장과 그 옆 건물을 사들여 별장에는 자신과 아내가 살고 옆 건물은 세를 주고서 무료하지만 소박하고 한가로이 살아가고 있었다. 어느 날 이 옆 건물에 새로운 세입자가 나타난다. 남자와 여자, 커플이다. 이 새로운 세입자가 집세만 제때 잘 낸다면 아무런 상관없다는 아내와 달리 이 커플의 뭐라고 말하기 어려운 기묘한 분위기에 의사는 자꾸만 신경이 쓰인다. 의사는 이 젊은 커플이 뭔가 말 못할 비밀이 있을 거라고, 그게 뭘까 호기심을 떨치지 못한다. 아니나 다를까 이 커플을 이 건물에 세들 수 있도록 도와준 부동산 중개업자가 나타나 말하기를, 그들은 부부가 아니라고, 정식으로 결혼한 사이가 아니라는 게 아닌가. 지금이야 그게 별 문제도 아니지만 이 작품의 배경은 1930년대 미국의 남부이다. 보수적인 그 사회에서 결혼하지 않은 남녀가 부부처럼 다니는 것은 금기이자 사회적으로 범죄나 마찬가지였던 시절. 그러니 이 커플의 등장에 부동산 중개업자는 물론 의사 부부도 신경이 곤두서기는 마찬가지. 의사에게는 이 남루한 행색의 남녀, 온 세상을 등진 듯 포기해버린 듯한 태도 등이 내내 눈에 들어온다. 

의사는 생각한다. “돈을 주고 의사 또는 변호사의 기술과 지식을 사면서도 진실의 일부분을 숨기고 싶어 하는”(p.20) 무언가가 저들에게는 있노라고, 부디 저들이 다른 세입자들처럼 “이상한 걸 여기로 가져오지 않았”(p.27)기를 “비밀을 드러내서 나를 괴롭게 만들지” 않기만을 바라고 또 바랄 뿐이다. 야망도 큰 욕심도 없이 하루하루 편하게 살아가는 게 목표인 의사는  말썽에 휩쓸리고 싶지 않은 욕구가 무엇보다 큰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이 바람은 곧 부서지고 만다. 그것도 아주 처절하게. 어느 늦은 밤, 커플 중 남자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의사를 찾아온다. “그녀가 피를 흘리고 있습니다.” 남자가 말한다. “진료비는 얼마 정도...” 우려했던 문제가 터진 것이다. 의사는 그들이 세 든 집으로 향하면서 생각한다. 어디에 피를 흘린다는 것일까? 대체 왜 피를 흘리는 것일까? 독자 또한 의사와 마찬가지로 생각하게 된다. 어디에 피를 흘리는 것일까? 왜 피를 흘리는 것일까? <야생 종려나무>는 그렇게 시작한다.

그다음 난데없이 펼쳐지는 <노인>- 이 장에서는 갑자기 죄수들의 이야기가 그려진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키 큰 죄수’라는, 이름조차 부여받지 못한 어느 죄수이다. 그는 철없던 십 대 시절 기차 강도 행각을 벌이다 붙잡혀 십오 년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다. 그런데 어느 날 감옥 근처, 미시시피강 유역에 큰 홍수가 일어나 죄수들은 제방 작업 및 물에 휩쓸린 시민들을 구출하는 작업에 투입된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이건 하나의 기회이지 않은가. 홍수가 나서 물이 범람하고 있고 비록 간수들이 따라나서기는 했지만 혼란스러운 틈을 타 달아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아닌가. 그러나 어쨌든 ‘키 큰 죄수’는 간수가 지시한 대로 물에 휩쓸려 사투를 벌이고 있는 시민을 구하기 위해 보트에 올라 노를 저어 나아간다. 그런데.....

<야생 종려나무>의 본격적인 이야기는 “그녀가 피를 흘리고 있다”며 의사에게 도움을 구하러 온 청년 ‘해리 월본’과 피를 흘리고 있는 여자 ‘샬럿’의 만남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런데 참 공교롭게도 이 청년 ‘해리’는 의대를 졸업한, 인턴이라는 사실이 곧 드러난다, 아직 정식 의사는 아니지만 의학을 공부했으므로, 피를 흘리고 있는 여자를 진찰할 정도의 실력은 있는 이 남자는 왜 다른 의사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일까? 더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의대를 진학하기까지의 해리의 삶도 저 ‘의사’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렇게 부유하지 않은 집안에서 태어나 어찌어찌 의대를 진학했으나 실력이 뛰어난 것도 아니고 집안의 전폭적인 지원은커녕 고학생으로 겨우 학교를 마칠 정도의 돈만 있는 상태. 해리는 자신의 이런 처지를 스스로 ‘돈을 거부했고’ ‘따라서 사랑마저도 거부’한 삶이라고 자조한다. 그렇게 강의실과 기숙사의 방을 오가는 삶을 살던 그에게 어느 날 룸메이트가 함께 파티에 가자며 조른다. 비사교적인 성격의 해리는 당연히 거절하지만, 그날이 하필이면 그의 생일. 오늘이 해리의 생일이라는 걸 알게 된 룸메이트는 더 조르기 시작하고, 마지못해 따라나선 해리는 그 파티에서 그녀 샬럿을 만난다. 유부녀인 샬럿을. 


그녀를 만날 수 있는 파티에 간접적으로 초대받는 운명 또는 행운 역시 더 이상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행운이 아닌 불운이기도 했다. 만약 여러 파티에 초대받았다면, 그는 햇살과 마찬가지로 사랑이라는 것이 세상의 모든 시간과 모든 들끓는 숨결 중에 딱 한 장소에서 한 순간에 한 사람을 향해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우쳤을 것이다). (p.56)


그 파티에서 샬럿을 만난 것은 해리의 생에서 행운일까 불행일까? 해리가 만약 은둔자처럼 고독과 함께 살아가고 있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다양한 여자를 만날 기회가 있었더라면 그날 그때 샬럿을 선택했을까? 그 이후로 이어진 그들의 인생행로를 보면 분명 대부분의 사람들은 불행이라고 말할 것이다. 어느 순간에는 해리 자신조차 불행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여자를 만날 기회가 조금 더 있었더라면 굳이 유부녀인 그녀와 사랑에 빠지기를 선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녀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의대를 졸업하고 의사로 취업해서 어떤 여자를 만나 결혼하고 저 바닷가에서 낡은 오두막일지언정 자기 집을 갖고 그럭저럭 평범하게 살아가지 않았을까? 해리라면 저 바닷가의 의사처럼 그런 삶에도 분명 만족하고 살아갔으리라. 그러나 그것은 모두 가정에 지나지 않는다. 샬럿을 만났기 때문이다. 그것도 하필이면 연인들은 죽어도 사랑은 결코 죽지 않는다는 믿음을 가진, 지독하리만치 사랑을 믿는 이 여자를. 해리와 샬럿은 그래서 사랑만을 믿으며 도피행각을 벌이다가 여기 이 바닷가까지 오기에 이른 것이다.  


살아가면서 비록 실수를 저질렀지만 최선을 다해 행동했던 모든 남자와 여자 그리고 미래에도 살아가면서 실수할 테지만 최선을 다해 행동할 모든 남자와 여자를 위해 부탁하는 거예요. 어쩌면 당신을 위한 부탁일 수도 있어요. 왜냐하면 당신의 인생 역시 고통일 테니까. (p.271)

결국 인간은 아무리 최선의 판단을 따른다 해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해낼 수 없고, 어떤 방식으로 해야 할지도 모르고, 그 일에서 무엇을 배웠는지도 확신할 수 없는 거야. 그리고 내 생각에 돼지는 여전히 돼지일 뿐이야. 겉모습이 어떻든 말이지. (p.309)


지독하게 가난한 연인, 불륜이기에 도망자처럼 숨어 다닐 수밖에 없는 연인, 죄를 지은 남자, 달아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하필이면 구조해 준 여자가 임신 중이라 지독하게 운 없는 자신에게 욕을 퍼부으면서도 “자비 없는 태양 아래에서 움직임 없이 매료된 통나무배들이 원형 경기장처럼 그를 둘러싼 가운데 외롭고 번쩍이는 진흙탕 위에서 사투를 벌이”(p.318)는 ‘키 큰 죄수’. 그들에게는 선택지가 분명 있었다. 선택의 순간이 여러 차례 주어졌었다. 해리는 애초부터 샬럿을 만나지 않았을 수도 있고, 심지어 중간에 여자를 버릴 수도 있었다. 죄수는 또 어떤가? 임신 중인 여자를 외면해 버리고 노를 그 여자를 위해 젓지 않을 수도 있었다. 홍수의 심연 속으로 죽은 척 사라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다른 선택을 한다. 그리고 그 선택은 미련하기 짝이 없어서 보통 사람들 눈에는 바보 천치 같아 보인다. 저 ‘히라야마’가 선택한 삶 또한 그렇지 않은가. 남들이 보기에 번듯하게 살 수도 있는데 화장실 청소부라니! 그러나 그들은 자기가 옳다고 생각한 방향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그 선택에 책임을 진다. 비록 그 선택으로 인해 패배하고 지독한 고통을 겪을지라도. “비통함과 무(無)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나는 비통함을 선택하겠어.”(p.391) 해리 윌본의 이 마지막 말은 그래서 뜨겁게 가슴을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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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26-05-06 17: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나 지금 이거 반 읽었는데 일단 다 읽고 다시 올게요. 좋아요, 누르고... 중간까지 읽었는데 눈물이 자꾸 나네요. 재미없으면 처분하려고 플래그 붙여가며 읽는데 그냥 줄 그으며 소장하려 해요.

잠자냥 2026-05-06 17:48   좋아요 0 | URL
저도 요즘에 읽은 책 읽자 말자 다 팔아치우고 있는데 이건 그냥 소장입니다. 아 그리고 나중에 이 책은 <야생 종려나무>하고 <노인> 각각 따로 읽어도 또 좋을 거 같아요.

건수하 2026-05-07 1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잠자냥님이 어떻게 살려고 하는지 궁금하네요.

<퍼펙트 데이즈>에 나온 <나무>는 별로였는데…… 🙄

잠자냥 2026-05-07 10:05   좋아요 1 | URL
ㅎㅎㅎ 아니 뭐 그렇다고 제가
‘히라야마’처럼 공공화장실 청소를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전 못합니다. 상상만 해도 죽을 거 같음. 우엑ㅋㅋㅋㅋㅋㅋㅋ)
‘해리 윌본’처럼 유부녀랑 사랑에 빠지겠다는 것도 아니고 (엥?)
‘키 큰 죄수’처럼 열차 강도짓을 하겠다는 소리는 절대 아닙니다!
다만 사람들이 보기에 어리석은 선택일지라도 그 선택을 했다면 끝까지 책임지는 삶을 살고 싶다 뭐 그런 정도의 이야기입니다.

이 책 271쪽 인용문에 있는 이 문장처럼요.

˝살아가면서 비록 실수를 저질렀지만 최선을 다해 행동했던 모든 남자와 여자 그리고 미래에도 살아가면서 실수할 테지만 최선을 다해 행동할 모든 남자와 여자를 위해 (....) 왜냐하면 당신의 인생 역시 고통일 테니까.˝ (p.271)

<나무>는.... 영화에서 한 구절이 소개되기도 했던 거 같은데.... 그것만으로도 재미없어보였...; 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6-05-10 15: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영화 퍼펙트 데이즈 줄거리 읽다보니, 영화 패터슨.. 이었나, 제목이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데, 그거 생각나네요. 버스 운전사로 일하고 취미로 시를 쓰는 사람의 이야기요. 집에 돌아오면 개를 산책시키고 단골 BAR 에 가서 맥주를 한 잔 마시고.. 루틴 있는 삶은 한편으로 단순해 보이지만, 그러나 삶을 가장 충실하게 꾸려나가는 방법인 것 같아요.

아, 이 책 너무 재미있을 것 같아요. 저 오늘 책 살건데(사지마!) 이 책도 넣겠습니다. 잠자냥 님은 부자가 되시길 바랍니다.

잠자냥 2026-05-10 22:04   좋아요 0 | URL
패터슨하고 비슷한 결이 있긴 합니다! 직딩의 루틴을 찾은 다락방 이제 자야죠? ㅋㅋㅋㅋ

이 책 절대 후회없을 거라는!
 
제자벨 이렌 네미롭스키 선집 6
이렌 네미롭스키 지음, 채단비 옮김 / 레모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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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 분야에서도 여남 차별이 존재하지만 사법체계에서도 이와 같은 차별은 참 공고하다는 생각을 지울 길이 없다. 가해자가 여성이고 피해자가 남성일 경우 언론은 말할 것도 없고 사법 체계가 작동하는 방식이 참 어쩌면 저토록 투명하게 차별적인가 씁쓸해질 때가 많다. 같은 죄를 지어도 형량이 더 무거울 뿐만 아니라 신상 공개도 놀랍도록 신속하게 이루어진다. 게다가 피해자인 남성에게는 성실하고 착한, 미래가 창창한 청년의 서사가 덧붙여지기 일쑤이다. 그런 남자를 죽인 여자는 마녀이자 악녀가 된다. 그 개인의 사연이야 어떻든.... 

이렌 네미롭스키의 <제자벨>에도 그런 장면들이 펼쳐진다. 2026년의 대한민국 법정이나 비록 소설이긴 하지만 백여 년 전의 프랑스 법정에서나 법이 작동하는 방식은 어쩜 이토록 닮았을까, 젊은 남자, 미래가 창창한 남자, 성실한 남자를 죽인 여자는 물어볼 것도 없이 악녀이자 탕녀이자 마녀이다. <제자벨>에서 그 악녀의 이름은 ‘글라디스 아이제나흐’이다. 작품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한다. 


피고석으로 여자가 들어왔다. 여자는 창백한 얼굴에 멍하고 지친 기색이 드리웠음에도 여전히 아름다웠다. 눈물에 젖어 생기를 잃은 매력적인 눈꺼풀과 입꼬리가 처진 입이 눈에 띄었지만, 그래도 젊어 보였다. 머리카락은 검은 모자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p.15


여자의 아름다운 외모 때문에 배심원은 물론 방청석도 소란스럽다. 예쁘긴 하구먼, 근데 나이가 몇 살이래요? 젊어 보이지는 않는데 그래도 예쁘구먼 숙덕숙덕.... 여자의 죄명은 살인이다. 사람들은 더 숙덕거린다. 저런 미모의 여자가 사람을 죽였다고? 누구를? 살해당한 대상을 알게 되자 배심원석 방청석 모두 크게 동요한다. 젊은 남자를 유인해 살해한 것이다! 심지어 귀족 애인이 있음에도 아들뻘인 남자를 호텔 방으로 끌어들여 죽인 것이다! 아니, 저 가녀린 여자가? 저렇게 부유하고 남부러울 것 없어 보이는 여자가? 대체 왜?! 한데 이상하다. 여자는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지 않는다. 내가 죽였노라고 순순히 인정하기만 한다. 그저 법정에서 빨리 사라지기만을 바라는 것 같다. 애인도 있는 여자가 젊은 남자까지 탐하다가 죽여버렸구만! 온 세상이 여자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기 시작한다. 여자는 정말 이 남자를 죽였을까? 그게 진실이라면 왜 죽였을까? <제자벨>은 그 사연을 숨 가쁘게 펼쳐놓는다.

법정에서는 여자를 물어뜯으며 신이 난다. “피고인과 백작의 약혼은 꽤나 공식적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파혼했어요.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답변하고 싶지 않으십니까? 아마도 구속받지 않는 방탕한 생활과 이러한 자유가 가져다주는 이점을 포기하고 싶지 않아서였겠죠.” “1930년부터 1934년 10월까지는 어떠한 연애사도 확인된 바 없습니다. 4년 동안 피고인은 몬티 백작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우연히 희생자가 될 남자를 만나게 됩니다. 베르나르 마르탱이라는 스무 살 청년이었습니다. 이 청년은 평민 출신이며 호텔 지배인의 사생아였습니다. 베르나르 마르탱은 파리 문과 대학의 학생이었습니다. 이 청년은 사교계 여성이자 미모와 부를 겸비한 매력적인 피고인의 마음을 사로잡게 됩니다. 피고인, 말해보십시오. 피고인은 정말 이상하고 터무니없을 정도로 순식간에 베르나르 마르탱에게 빠져들었습니다. 그 청년을 타락시키고 그에게 돈을 주 다가 결국 살해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운운....

그러면서도 여자의 미모를 내내 칭찬한다. “피고인은 미모가 출중합니다. 잔혹한 짓을 저질렀지만 미모만큼은 부인할 수 없죠.” 그러나 늙어가는 여자가 20대 청년의 젊음에 끌렸을 수도 있고, 낯선 남자와의 연애가 선사하는 자극에 이끌렸던 것일지도 모른다면서 소설을 쓴다. 젊은 애인의 별 볼 일 없는 조건에 끌렸을지도 모른다고, 자신과 같은 계급 안에서의 애정 관계에서 지루함을 느꼈을지도 모른다고, 그래서 청년의 유혹에 넘어갔지만 정신을 차리고 싶었던 여자는 돈을 주고 젊은 애인을 떼어내려고 했을 것이라고 부유한 여성의 오만함이 저지른 일이라고 소설을 쓴다. 그러나 술집 여자나 어린 매춘부만 만나봤던 청년은 여자의 미모와 명성을 떨쳐내기 힘들었으며 그래서 여자를 뒤따라가 협박했고, 그러자 여자는 두려움에 그를 살해한 것이라고..... 정말 이 검사의 추측은, 소설은 진실과 가까울까? 의심의 눈길을 거두지 못하고 여자의 삶을 좇게 된다. 


배심원 여러분, 지금 이 법정에서 피해자를 젊은 애인이나 지속한 기둥서방으로 묘사하며 낙인찍으려 들지만, 사실 그는 얌전하고 성실한 청년이었습니다. 이 청년을 향한 추잡한 추측은 무엇으로도 용인될 수 없습니다. 피해자는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하던 학생으로, 라탱 지구에서 무척 검소하게 생활했습니다. 그는 허름한 여관의 작은 방에서 살았습니다. 사망 당시 그의 방에 있던 돈은 400프랑이 전부였습니다. 가진 것도 조촐한 옷가지뿐이고 보석도 없었습니 다. 여기서 배심원 여러분께 묻겠습니다. 이를 부유한 여자에게 귀여움 받는 젊은 애인이자 끊임없이 협박을 일삼는 사람의 생활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오히려 이 여성이, 배심원 여러분의 앞에 있는 이 여성이 자신의 미모와 재력, 사교계 명성을 등에 업고, 젊은 피해자를 유혹해 타락시킨 다음 죽이기까지 한 것이 아닐까요? -p.36


검사는 이 여자를 부유한 백작 애인이 있음에도 젊은 남자와 놀아나다 잔혹하게 살해해버린 악녀로 만드는 동시에 피해자인 젊은 남자! 오, 그래 전도유망한 이 젊은 남자에게 너무나 안타까운 서사를 부여한다. 정말 이 젊은이는 검사의 말대로 ‘얌전하고 성실’한 청년이기만 했을까? 이런저런 증인이 등장하면서 여자의 과거 및 현재의 생활에서 속속 놀라운 점들이 밝혀진다. 그런데 참 신기하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남부러울 것 없이 살던 이 여자, 글라디스. 빼어난 외모 덕분에 온갖 남자들로부터 숭배와 욕망의 대상이 되면서 애정과 사랑을 받아온 이 여자. 사랑에 빠져 결혼도 했지만 남편을 잃고 또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지고 청혼까지 받아 약혼을 했다가 파혼하고 그러다가 또 이런 젊은 남자와 ‘놀아나기’까지 한 이 여자… 충격적이게도 매춘업소까지 드나들었다는데....... 글라디스는 정녕 기이한 욕망을 지닌, 마음이 병든 탕녀인가? 


“나쁘게 말하고 싶지는 않아요. 신이시여, 저를 지켜주소서. 다들 알고 있는 사실을 말씀드릴 뿐입니다. 글라디스는 지나치게 외모를 꾸몄어요. 가벼운 추파나 남자들의 칭찬을 지나치게 좋아하긴 했지만, 그게 죄는 아니잖아요.”
“그뿐이라면 죄는 아니죠.”  -p.47


가까운 친구로 지냈던 이가 증인석에 앉아 한다는 소리이다. “나쁘게 말하고 싶지는 않다”면서 지나치게 외모를 꾸미고 지나치게 남자들의 칭찬을 좋아했다, 지나치게 관심을, 애정을, 숭배를, 사랑을 갈구했다 말한다. 그러나 그녀도 알고 있다. 그게 죄는 아니다. 하지만 궁금하다. 글라디스는 왜 그런 인생을 살아가기만 한 것일까. 그러나 이 법정에 있는 사람들 누구 하나 궁금하지 않은 것 같다. 어느덧 관심이 사그라들었다. “하룻밤 사이에 모든 아름다움이 글라디스를 영원히 떠나버리기라도 한 것” 같고 “영락없이 지쳐버린 늙은 여자”일 뿐이지 않은가. 글라디스는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검사의 구형을 듣는다. 법원의 문이 열리고 방청객들이 하나둘 밖으로 나온다. “연극이 끝나면 배우를 잊어버리듯 아무도 글라디스 아이제나흐를 기억하지 못했다. 이제 그녀의 역할은 끝났다. 결국 흔하디흔한 역할이었던 것이다. 치정 범죄와 적당한 형벌. 글라디스는 어떻게 되었을까? 글라디스의 미래와 과거를 궁금해하는 사람은 그 누구도 없었다.”(p.63) 

그러나 <제자벨>의 진짜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프롤로그 부분만 60여 쪽. 글라디스 아이제나흐, 그녀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리고 어쩌다 살인자가 되었는지, 피해자는 정말 검사의 증언대로 성실하고 착하기만 한 청년이었는지 1장부터 22장까지 긴박하게 흐르는 이야기에 책장이 절로 넘어간다.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외모와 젊음에 집착한 이 여자 글라디스. 책장을 덮을 때쯤에도 그녀를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고 이렌 네미롭스키에게 양가적인 감정이 들기도 한다. 여성이면서도 이토록 여성혐오적인 시선으로 여자를 그릴 수 있을까 불쾌하기도 하다. 그러나 이렌 네미롭스키의 이 뿌리 깊은 여성혐오는 자신의 상처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부유했지만 불행했던 어린 시절, 딸에게 애정을 주기는커녕 오로지 자신의 삶에만 관심을 두었던 어머니를 향한 복수심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을 알고 애잔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저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요?” 글라디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결국 인생은 슬픈 거 아니겠어요. 다만 취기 오르고 열정 넘치는 몇몇 순간이 존재할 뿐이죠. 밤에 테라스로 나가 경쾌하고 조금은 황홀한 음악을 들을 때처럼, 아니면 춤 출 때처럼. 아, 말로 설명은 못 하겠지만 그런 게 바로 행복이에요. 우리는 그런 행복을 찾는 거고요.” -p. 103



글라디스여, 그대에게 말하노니. 꽃은 시든다. 외모도 시든다. 젊음은 간다. 인생은 진다. 사랑도 간다. 시선도 사라진다. 욕망도 사그라든다. 남는 것은 당신 자신뿐. 그렇다면 그 생을 어찌 살아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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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6-04-30 14: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휴, 리뷰를 읽는데 마치 소설 한 편 읽은 것 같아요. 그냥 뭐랄까, 세상을 다 뒤집어 엎어버리고 싶습니다... 창창한 미래는 남성들에게만 펼쳐져있으니.....

잠자냥 2026-04-30 14:26   좋아요 0 | URL
제가 리뷰에 쓴 내용은 이 책 프롤로그까지일 뿐입니다! ㅋㅋㅋㅋㅋ

다락방 2026-04-30 14: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강뷰 아파트 사게 해줄게요. 딱 기다려..

잠자냥 2026-04-30 14:55   좋아요 0 | URL
🙆🏻‍♀️🤣🤣🤣
 
바다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44
존 밴빌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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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끼는 밴드의 좋아하는 노래 중 이런 가사가 있다. “Since I was born I started to decay” 태어난 이래로 내내 썩어가기 시작했다는, 부패하기 시작했다는 그런 가사… 이 노래를 처음 들었던 시절-그러니까 중2병 시절이라고 하자. 그때도 크게 공감했지만 살아갈수록 늙어갈수록 저 가사는 정말 명언이 아닌가 싶어진다. ‘Teenage Angst’라는 제목의 이 노래는 1996년에 발표되었다. 이 음악을 처음 들을 당시의 나는 사회적 기준으로는 한창 성장 중인, 자라나고 있는 나이였다. 그러나 정말 그런가? 인간은 사실 태어남 자체가 부패의 과정, 죽어가는 과정, 썩어가는 과정, 소멸하는 과정 그리하여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 아닌가.  

<영원히 계속되다가 끝이 난다> <떠난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 등 최근 읽은 책들이 유독 죽음과 상실을 다루고 있어서 저 노래가 가사가 떠오른 것 같기도 하다. 어제 읽기를 마친 존 밴빌의 <바다>마저도 그럴 줄이야. “사물들은 지속된다, 살아가는 것은 조금씩 퇴보하지만.”(p.16) 이렇게 말하는 <바다>는 죽음과 상실의 이야기 그 자체이다. <오래된 빛>을 읽고 존 밴빌의 문장에, 스타일에 흠뻑 반해 사두고 안 읽은 지 수 년째인 <바다>를 드디어 집어 들었다. 이 책은 도대체 언제 사 둔 것일까? 구매리스트를 검색해 보고 깜짝 놀랐다. 2016년 12월 13일. 무려 십 년 전에 사둔 책이다. 10년 전 나는 이 책을 어쩌다가 사두었을까? 기억은 이토록 허술하다. 망각도 잦다. <바다>는 또한 기억과 망각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반스의 <떠난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가 그러했듯이… 인간에게 죽음과 상실, 소멸, 기억, 망각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그림자인가보다.

<바다>에서 죽음은 이르게 찾아온다. 미술사학자인 맥스는 아내를 읽는다. 암으로 투병 중이던 아내의 곁을 지키다 아내가 떠난 후 그 슬픔을 달래고자 어린 시절 한때를 보낸 바닷가 마을을 찾는다. 죽음을 마주하고 생이 끝나갈 즈음의 인간은 과거의 장소, 특별한 기억이 머문 장소를 찾기 마련인 것일까? 맥스에게는 이 바닷가가 그러하다. 이 바다에서 그는 ‘시더스’라는 이름의 여름 별장에 머물며 프랑스 화가 피에르 보나르에 관한 책을 쓰려고 한다. 죽은 아내와 또 언젠가는 죽어갈 자신, 그리고 자기 생의 흔적으로 남겨질 책 한 권….

그런데 왜 하필이면 아내와의 추억이 깃든 곳도 아닌, 이 유년의 바다일까. 이 바다는 그 여름의 소년 맥스에게 특별한, 지울 수 없는 기억을 안겨준 곳이기 때문이다. 부유한 아내 ‘에나’를 만난 덕분에 “태어나기를 딜레탕트로 태어”난 그래서 에나를 만나기 전까지 “부족한 것이라고는 자산뿐”이라고 말하던 이 남자 맥스는 이제는 화가에 관한 책을 쓰면서 유유자적 생을 누릴 수 있는 미술사학자가 되었으나 그 시절에는 참혹하게 가난했다. 스스로 가난하다는 사실을, 자기의 낮은 계급을 누구보다 잘 인지했기에, 또 그렇기에 “내 힘으로 할 수만 있는 일이라면, 나를 망신시킨 부모를 그 자리에서 지워버렸을 것”이라고 서슴지 않고 말한다. “뚱뚱하고 작고 헐벗은 얼굴의 어머니와 돼지기름으로 만든 듯한 몸을 가진 아버지를 바다의 물보라가 일으킨 거품처럼 터뜨려버렸을 것”(p.41)이라고 거침없이 말한다. 그는 이처럼 빈곤과 계급에 민감한 아이였다. 

소년은 그래서 부를, 부의 지표를 동경한다. 이 가난을 벗어나리라, 이 계급을 벗어나리라, 높은 곳으로 날아가고 말리라 열망한다. 그런 소년 앞에 나타난 그레이스 가족. 부부와 쌍둥이 남매로 이뤄진 가족, 그들은 소년에게 마치 ‘신’처럼 보인다. 신을 동경하며 그 주변을 배회하는 작디작은 인간 맥스는 열심히 그 곁을 얼쩡댄 덕분인지 그들과 가까워진다. 신들과 가까워진다. 소년의 애정 또는 동경은 처음에는 이상한(?) 방향으로 흐른다. 소년은 그레이스 부인의 육감적인 매력, 성숙한 매력에 반해 그녀에게 속절없이 빠져든다. <오래된 빛>의 그 소년처럼…. 밴빌의 취향이, 경험이 그랬던 것일까? 아니면 저 시절의 소년들이 친구의 엄마에게 반하는 것은 흔한 일, 일종의 통과의례인가? 잠시 의문을 품어보기도 한다. 물론 소년의 애정은 이윽고 제 자신에게 어울리는 대상으로 향한다. ‘클로이 그레이스’. 그 소녀에게로. 이렇게 시더스, 이 여름 별장이 있는 그 바닷가는 소년 맥스에게 새로운 세상-신들의 세상-이자 첫 경험들-갑작스러운 격렬한 포옹, 더듬거리며 영원한 사랑을 고백한 순간, 피 맛이 나는 첫 키스, 첫 사랑의 기억과 추억을 안겨준 공간이다. 

그러나 노년의 맥스는 이 추억들을 떠올리며 말한다.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 가운데 일부, 또는 전부가 실제로 일어났던 것은 분명하다. 처음 손을 잡고, 포옹을 하고, 고백한 순간이 틀림없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처음들은 점차 사라져가는 겹겹의 과거 속에 묻혀 잊혀버렸”노라고….(p.134) 그는 이런 자기에게 놀라 되묻는다. “어떻게 그 애는 한순간은 나와 함께 있다가 그다음 순간에는 사라질 수 있을까? 어떻게 다른 곳에, 절대적으로 다른 곳에 있을 수 있을까? (....) 일단 내가 있는 자리에서 사라지면 그 애는 당연히 허구, 내 기억 가운데 하나, 내 꿈 가운데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모든 증거로 보건대 클로이는 비록 나와 떨어져 있다. 해도, 늘 견고하고, 고집스럽고, 불가해하게 그녀 자신으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실제로 떠난다, 실제로 사라진다. (,,,) 나 역시도 떠날 수 있다. 아, 그래, 나 역시도 당장에 떠나서는 본래 있지도 않았던 것처럼 되어버릴 수 있다.”(p.133) 제아무리 아름다운 기억과 추억일지라도 망각과 소멸은 불가항력이다.

바닷가에서, 이 여름 별장에서 그는 이처럼 과거의 기억을 헤맨다. 딸인 클레어가 “과거 속에서 사시네요.” 핀잔을 줄 정도이다. 그는 왜 이토록 늦은 나이에 들어서 과거에, 그 오래된 기억에 집착하는 것일까. 그가 생각하기에 ‘삶, 진정한 삶이란 투쟁, 지칠 줄 모르는 행동과 긍정, 세상의 벽에 뭉툭한 머리를 들이대는 의지, 그런 것’이어야만 한다. 그러나 그는, 적어도 어린 시절의 맥스는 그렇지 못한 사람이었다. 돌아보니 그의 ‘에너지의 많은 부분은 늘 피난처, 위안, 아늑함, 그런 것들을 찾는 단순한 일에’ 흘러들어가버렸다. 그는 ‘숨겨지고, 보호받는 것, 그것이 진정으로 원하던 것이었’노라고 털어놓는다. 그는 ‘자궁처럼 따뜻한 곳으로 파고들어 거기에 웅크리는 것, 하늘의 무심한 눈길과 거친 바람의 파괴들로부터 숨는 것’을 갈망했다. 그리고 바로 과거가 그에게 그러한 은둔처이다. 그렇기에 그는 “손을 비벼 차가운 현재와 더 차가운 미래를 털어내며 열심히 그곳”(p.62), 과거로, 기억 속으로 돌아간다. 

언제나 자기의 출신을 부끄러워했던 아이. 애초부터 훌륭해지려고 노력했던 아이. 아주 어렸을 때부터 다른 사람이 되고 싶었던 아이. 그런 소년이 그레이스 가족에게, 클로이 그레이스에게 원했던 것은 그가 말한 대로 그 가족의 우월한 사회적 지위와 같은 수준에 올라가보려는 것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는 열심히 노력해서 그 ‘올림포스 산을 기어올라’가는 데 성공한다. 에나라는 부유한 여인을 만나 그 성공에 폭죽을 터뜨린다. 생의 불꽃을 태워 올린다. 그러나 공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일평생 살아온 나, 딜레탕트로 태어나 딜레탕트로 살아가는 자기, 노년의 맥스는 과연 누구란 말인가? 


그는 자기 자신을 잘 알았다. 그리고 자기가 아는 스스로가 싫었다. “내가 싫어한 것이 나라는 사람, 그러니까 독특하고 핵심적인 나였던 것이 아니라” “내가 싫어한 것은 나의 출생과 가정교육이 개성 대신 나에게 부여한 정서, 경향, 수용한 관념, 계급적 집착 등의 덩어리”였노라 고백하는 맥스. 자신은 개성이라는 것을 가져본 적이 없노라고, 다른 사람들이 가지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또는 가졌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는 가져본 적이 없노라고. 자신은 늘 독특하게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으며, 가장 강렬한 소망은 독특하지 않은 어떤 존재가 되는 것이었노라고 말하는 맥스. “왜 당신 자신이 되려 하지 않아?” 에나의 이 질문은 평생 더 높은 곳을 꿈꾸었으나 진정한 자아는 망각한 한 남자의 본질을 건드리는 뼈아픈 물음이었을지도 모른다. 

“너 자신을 알라” 유년의 바닷가를 찾아 과거의 기억 속을 거니는 이 늙은 남자의 사투는 그래서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자기 자신을 찾는 여정일 것이다. 사별 후 슬픔에 젖은 그에게는 오직 과거만이 “견딜 수 없는 현재로부터 유일하게 가능한 시제”이자, 가장 생명력 있게 고동치는 “두 번째 심장”일 것이다. 그리고 그 기억에서는 지나간 생을 다시, 또 살고 있는 듯한 느낌마저 불러일으킬 것이다. 기억 속에서는 아내도 살아있으며 딸 클레어도 자신이 원하지 않는 놈과 사랑에 빠지지도 않았고, 첫 사랑인 그녀들로부터도 환대받았기에 영원히 안식하며 은둔할 수 있으리라..... “인생은 많은 가능성들을 잉태하고 있다.”(p.240) 잊히고 소멸하고 사라지고 사멸하는 것들도 기억에서는 과거에서는 되살아나 찬란히 빛나기도 하며 영원히 불꽃을 태우기도 한다. 그의 말처럼 “어쩌면 삶의 모든 것이 삶을 떠나기 위한 긴 준비에 불과한 것”(p.95)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소멸의 기나긴 여정에서 인간은 기억과 추억이 있기에 살아갈 의지를 찾는 것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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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수하 2026-04-28 1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은지 4년이 지나긴 했는데 이제 거의 기억이 안 나요. 이래서 자세히 적어둬야 하나봐요... ^^
(그렇지만 별로 적고 싶지 않았다)

잠자냥 2026-04-28 14:07   좋아요 1 | URL
기억의 소멸... 망각은 인간의 숙명입니다!
(건수하 님 리뷰? 페이퍼 있던데요. 제가 하트 누름.... 이 사람 잊었네 잊었어...🤣ㅋㅋㅋㅋㅋ)

건수하 2026-04-28 14:10   좋아요 0 | URL
댓글 봤어요 ㅎㅎㅎ 그걸 읽고 잠자냥님껄 읽어봐도 기억나는게 별로 없지 뭐예요 ㅎㅎ

잠자냥 2026-04-28 14:12   좋아요 1 | URL
마지막에 반전이 있기는 했지만.... 사실 딱히 스토리가 없는 소설이긴 해요.

망고 2026-04-28 16:57   좋아요 2 | URL
저는 이 소설 번역서 제목이 이게 아니었을 때 읽었는데 전혀 기억이 안 나요🙄 근데 그땐 어려서 그랬는지 별 스토리가 없이 문장으로 음미하는 이 소설의 매력을 이해 못 하고 지루하다며 별 두개 줬더라고요ㅋㅋㅋㅋㅋ

건수하 2026-04-28 16:59   좋아요 2 | URL
오, <신들은 바다로 떠났다> 라고 나왔던 적이 있었군요. 역자는 같고...
저도 4개주면서 후하게 준다고 생각을 했었다는;

잠자냥 2026-04-28 17:20   좋아요 1 | URL
네 “신들은 바다를 떠났다”에서 그 신들이 그레이스 가족입니다. 스포일러 같은 제목이라 <바다>로 바꾼 거 같아요.

잠자냥 2026-04-28 17:22   좋아요 1 | URL
이 작픔 부커상 수상할 때 찬반 2:2로 팽팽히 갈렸다는데 반대한 2인은 이 작품 이야기도 뭣도 아니라고 했다고… 🤣

건수하 2026-04-28 17:24   좋아요 2 | URL
아하. 한국 특유의 스포일러 제목이군요 ㅋㅋㅋ 원제는 The Sea 이던데...

제가 그 2인과 같은 생각 =333

망고 2026-04-28 17:50   좋아요 0 | URL
저도 반대입니다👊ㅋㅋㅋㅋㅋ

잠자냥 2026-04-28 18:35   좋아요 1 | URL
망고 이별의 신들의 바다…..🤣

다락방 2026-04-28 2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멋있어... 잠자냥 님 글 멋있어.....

잠자냥 2026-04-29 12:39   좋아요 0 | URL
눈이 나빠져서 멋있어가 맛있어로 보입니다. ㅋㅋㅋㅋ

자목련 2026-04-29 1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고 리뷰를 썼으나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고 잠자냥 님의 리뷰는 정말 좋고요!

잠자냥 2026-04-29 12:39   좋아요 0 | URL
저도 책 다 읽고 자목련 님 리뷰 잘 읽었어요!
 
침대와 침대를 오가며 - 의학과 사랑 그리고 나
퍼트리샤 그레이홀 지음, 송섬별 옮김 / 물결점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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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척 좋아하거나(이때 좋아하는 대상은 ‘사람’이 아니다. 그 또는 그녀의 ‘글’을 뜻한다) 관심 있는 작가가 아닌 경우라면 회고록이나 그에 관한 전기라든가 일기 같은 글들을 읽지 않는다. 작가의 사생활을 굳이 알아내서 작품 감상에 방해받고 싶지 않은 마음이랄까. 그럼에도 회고록, 전기, 일기 같은 것을 읽은 작가들이 종종 있다, 손택, 치버, 카버, 소세키 등등이 떠오른다. 요즘은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 일기와 노트 1941-1995>를 사고 싶어서 눈독 들이고 있는 중이다(다음 달에 사자...). 아무튼 그러니까 이 정도 유명세를 지녔거나, 이 정도로 내가 그들의 작품을, 글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전기, 일기, 회고록 등은 웬만해서는 읽고 싶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최근 읽은 <침대와 침대를 오가며>는 위와 같은 기준에서 모두 벗어난다. 저자 ‘퍼트리샤 그레이홀’은 내가 좋아하고 관심 있는 작가라고 말할 수 없다. 그는 내게 무명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그의 글을 읽은 적이 없으니까. ‘의학과 사랑 그리고 나’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의 저자에 관한 소개 글을 읽어보자. ‘의사, 에세이 작가, 소설가. 2022년 출간한 에세이 <침대와 침대를 오가며>로 다수의 독립출판상을 수상하며 주목받았다. 2023년 배우자와 공동 집필한 <황금빛 노년과 은빛 희망(Golden Years and Silver Lining)>을 선보이며 소설가로 데뷔했다. 2025년 <우리가 머물 곳(A Place for Us)>, 2026년 <프레임드(Framed)>를 연달아 발표하며 집필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의사이자, 에세이스트. 소설가라고도 덧붙여 있기는 하지만 어쩐지 내가 그의 소설을 읽을 일은 없을 것 같다. 이 책 또한 그저 의사가 쓴 병원/환자에 관한 에세이라면 읽지 않았을 것 같다. 너무 뻔해 보이므로. 그런데 이 책에는 다른 키워드가 덧붙여져 있다. ‘레즈비언’이라는 단어이다. 그러니까 이 책은 레즈비언이라는 정체성은 정신질환으로 취급받던 시대의 미국에서 살아온 퍼트리샤 그레이홀의 청년기 회고록이다. 만일 이 회고록이 그의 노년기까지 이어진다면(저자는 현재 일흔을 넘겼다), 그렇게 흥미롭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 책은 딱 저자의 청년 시절 방황이 일단락되고 또 다른 생이 펼쳐지는 지점에서 마무리 된다. 

이 책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1960년대에 레즈비언으로 산다는 것은 정신질환으로 취급받았고, 어떤 이들에게는 그 자체로 사형선고였다.”(p.19) 자신의 성정체성을 당당하게 드러내고 사는 이들도 많아졌고 동성혼이 가능한 나라 또한 많아진 요즘이지만 그럼에도 대다수 동성애자들은 혐오 또는 차별이 일상적인 세계의 벽장 속에 숨어 살아가고 있다. 게다가 여전히 동성애가 금기시 되어 발각되면 목숨까지 위태로운 나라 또한 존재한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데 단지 그 성이 동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죽임당할 수도 있는 것이다. 청교도 국가, 1960~70년대의 미국 또한 그다지 진보한 사회는 아니었다. 게이나 레즈비언은 정신질환을 가진 자들이었고 그러므로 그들을 향한 차별과 혐오 또한 마땅했다. 그런 시대, 그런 세계에 퍼트리샤 그레이홀, 이 책의 저자는 태어난다. 
  
퍼트리샤 그레이홀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그녀의 성정체성을 알고 지지해주느냐(마치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그 가정처럼) 하면 그것도 아니다. 아버지는 몇 년째 깊은 우울증에 빠져 가족을 방치한 채 자기 삶을 지탱해나가기도 버거워 보인다, 어머니 혼자 퍼트리샤와 그의 여동생 두 자매를 돌보다시피 한다. 어머니는 퍼트리샤한테 여자아이다운 꾸밈을 강요하며 여성스러운 정체성을 심어주기 위해 갖은 애를 쓴다. 혹시라도 조금만 이상해 보이면, 정상적인 소녀다움에서 벗어난 행동이나 취향을 드러내면 어머니는 극렬하게 혐오를 드러내며 딸을 야단친다. 이런 호모포비아 가정에서 퍼트리샤는 더 고립감을 느낀다. “내가 애리조나에서는 하나뿐인 레즈비언”일 것이라는 확신을 하며…. 그 고립감을 벗어나고자 자신과 같은 성정체성을 지닌 사람들이 많다는 곳, 샌프란시스코로 떠나리라 마음먹는다.

초반에 그려지는 퍼트리샤의 삶은 순탄하지 않다. 동성애자로서의 자각, 그럼에도 호모포비아적인 엄마(와 가족), 주변 환경 때문에 정체성을 숨기고 사느라, 이성애자인척 하느라 애쓰는 삶이 참으로 애처롭게 그려진다. 이성애자인척 하느라 좋지 않은 선택을 하기도 하는데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안타까운 마음에 탄식하고 만 장면이 있다. 그녀가 나이 든 남자에게 섹스를 허락하고 마는 장면이다. 사실 퍼트리샤는 자신에게 다가온 잘생긴 또래 남자와 연애를 해보기도 하지만(결국 그의 여동생에게 반하고 마는 퍼트리샤!) 집요하게 섹스를 원하는 남자 친구를 거부하다 관계는 끝나고 만다. 그런데 그 이후 이 중늙은이랑 섹스를 하는 것이다! 설상가상, 이 남자와의 관계 때문에 임신하고 마는 퍼트리샤. 미성년자였던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엄마에게 이 사실을 털어놓는다, ‘로 대 웨이드’ 판결 이전으로 낙태가 불법이던 시절이다. 그런 때 퍼트리샤는 임신중지를 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일련의 과정-십대 소녀, 미성년자임에도 성인과의 그루밍 관계에서 성착취를 당하고, 결국 임신, 임신중지를 겪고 몸과 마음이 망가지는 그 모습을 지켜보는 여성이라면 누구나 처참한 심정으로 안타까워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후 샌프란시스코에서 그나마 자유롭게 연애 상대를 만날 기회를 갖게 되지만 그렇다고 삶이 마냥 행복하지는 않다. 이렇다 할 직업도 돈도 거주지도 마련하지 못해 하루하루 살아가기 버겁다. 일상에 이렇게 허덕이는데 연애라고, 사랑이라고 잘 될 리가 있을까. 그럴 때 그 앞에 한 사람이 나타난다. 인간의 생에는 한두 번 쯤은, 운이 좋으면 몇 번쯤은 꼭 도움이 되는 만남이 있다. 이 무렵의 퍼트리샤에게도 그랬다. 그렇게 삶을 낭비하지 말고, 집으로 돌아가 공부하고 대학을 가라고 말하는 여자가 나타난 것이다. 퍼트리샤는 이 충고를 받아들여 집으로 돌아가고, 공부해서 의대에 진학한다. 의대에 진학했으니 성공적인 삶이 펼쳐질까 싶지만 딱히 그렇지도 않다. 퍼트리샤가 의대에 진학한 당시 솔트레이크시티에서 의대생 100명 중 여학생은 다섯 명이 전부이다. 보스턴에서 인턴 과정을 수련할 때는 그가 유일한 여성이다. 1970년대 의료계는 남성 중심적 위계로 움직였으며, 기득권 진입의 기회 역시 남성들이 단단히 틀어쥐고 있었다. 오랜 세월 공고하게 유지된 남성들만의 카르텔에서 여성인 그가, 심지어 동성애자인 그가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고 일과 사랑 모든 면에서 만족스러운 삶을 일구기란 쉽지 않다. 

특히 의학 수련이라는 거친 바다에 내던져져 만성적인 피로와 감정 고갈을 겪으면서 소진된 나날을 보내던 퍼트리샤는 남성 동료들이 아내나 여자친구에게서 얻는 것과 같은 돌봄과 지지를 바란다. 그런 안정적인 연애를 갈망하며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중얼거리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관계를 찾기란 쉽지 않다. 제2물결 페미니즘 운동과 함께(이 책에는 ‘케이트 밀렛’이 찬조 출연하기도 한다. ㅋㅋ) 성해방이 꽃을 피운 시기라 연애에서의 독점적이고 안정적인 관계에 관한 갈망이나 “아내 운운” 발언은 당시의 기조와는 어긋날 수밖에 없다. 때문에 퍼트리샤는 자기도 모르게 자기 검열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바람이나 발언이 문제인 줄은 알지만 그럼에도 안정적인 관계에서 에너지를 얻고 싶은 것을 어찌하랴. 퍼트리샤는 일에서도, 사랑에서도 성공해서 안정적인 삶을 살고 싶다. 레즈비언은, 게이는, 동성애자는 일에서도 사랑에서도 실패하고 말 것이라는, 불행한 삶을 살다 혼자 쓸쓸히 죽어갈 것이라는 사회의 저주, 경고, 편견을 모두 깨버리고 싶다. 

그런데 참 재미나다. 인간이란 참으로 모순적인 존재라 드디어 그런 관계를 가꿔나갈 수 있는 여자(캐스)를 만났는데 도리어 퍼트리샤는 한눈을 팔기 시작한다. “한때 나는 배려심 있고 잘 챙겨주는 여자를 원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커리어를 치열하게 추구하는 여자, 내 눈에 섹시하고 호감 가는 여자를 원했다. 그 모든 특성을 다 가진 한 여자만 만나는 건 불가능하게 느껴졌다.”(p.266), 캐스를, 또 다른 연인을 속이며 또 때로는 대놓고 다른 여자에게 한눈을 팔거나 일시적인 연애 관계에 놓이면서 퍼트리샤는 자신을 폴리아모리라고 말하기도 한다. 인간이란 이토록 이기적이고 비열하기조차 한 존재이다. 그렇게 침대와 침대를 오가던 퍼트리샤에게 제대로 임자가 나타난다. 그녀의 이름은 ‘다니’- 지금껏 퍼트리샤를 매혹했던 여자들과는 사뭇 다른 매력을 지닌 이 여자에게 속수무책으로 빨려 들어가는 그녀. 

헌데 ‘다니’는 퍼트리샤와 사귀게 되면서 이렇게 말한다. “동성애자는 니가 처음이야!” 레즈비언이면서도 그간 헤테로 여자만 사귀었다는 다니가 너무나도 신기한 퍼트리샤....는 다니의 그 말이 지닌 의미를 곧 깨닫는다. 동성애자 이성애자 가릴 것 없이 끌어들이는 이 마성의 여자는 정말이지 문젯거리, 위험한 존재는 사실을…. 어느덧 퍼트리샤는 독점적인 관계를 원하던 ‘캐스’의 입장이 되어 ‘다니’와 안정적인 관계를 만들어나가고 싶지만 다니는 그럴 생각이 딱히 없어 보인다. 전 여친도 만나고 새 여자도 만나고 커플 상담사도 꼬시고 그러면서도 퍼트리샤 너 없이는 못산다 하고…대환장 파티다. 퍼트리샤는 다니에게서 지나간 시절, 폴리아모리를 외쳤던 자기 자신을 마주한다. 퍼트리샤와 다니, 이 커플은 퍼트리샤의 바람처럼 안정적이고 독점적인 커플을 이룰 수 있을까? 퍼트리샤는 자신이 원하던 바로 그 ‘아내’를 얻을 수 있을까?

사람들은 누군가를 사랑할 때 상대가 자신에게 많은 것을 해주기를 바란다. 인간의 속성이 그렇다. 지고지순하고 헌신적인 애정은 물론이요,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응?) 자신에게 모든 것을 바치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러한 자기 자신은 사랑하는 그 대상에게 그런 존재인가? 그렇게 온 마음과 에너지, 시간 등등 정성을 다해 그 상대를 사랑하는가? 이렇게 물으면 대다수 사람들은 자신이 그렇지 않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퍼트리샤도 그랬을 것이다. 안정적인 관계, 따뜻한 돌봄과 끊임없는 지지와 사랑을 바라면서도 정작 자기 자신은 그렇게 하기를 꺼리던 사람, 이기적이고 철없는 사랑의 표본과도 같았던 그녀. 그리고 때로 그 말은 폴리아모리라는 말로 정당화되기도 한다. 때문에 그 스스로도 “20대 시절의 나는 믿을 만한 사람도, 존중받을 만한 사람도 아니었고, 내가 나 자신에게 주어야 마땅할 사랑과 수용, 돌봄을 연인이 줄 것이라고 기대했다.”(p.430)라고 고백한다. 

그러나 그 고백이 단지 고백으로만 끝났다면 허무했으리라. 그녀는 자신이 달라져야 한다고 깨닫는다. 그리고 그 깨달음 끝에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내가 함께하고 싶은 그 여자가 되기로 했다.” 퍼트리샤의 이 다짐은 성공할까? 인간은 사랑에 실패했을 때 관계에 실패했을 때, 상대, 타인으로부터 문제를 찾는다. 그러나 그런 나 자신은 과연 그 또는 그녀에게 그런 사람이었는가? “나는 내가 함께하고 싶은 그 여자가 되기로 했다.”라는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은 사랑은 물론 삶 전반을 되돌아보게 하는 강력한 한 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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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고 2026-03-09 20: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yo 치버 카버 소세키 🎵 ㅋㅋㅋㅋ래퍼인줄ㅋㅋㅋㅋ
내가 함께하고 싶은 사람이 되겠다는 다짐 저도 읽고 한방 맞은 것 같은 느낌입니다 나는 안 그러면서 상대방이 그러기를 원했던 이기적인 마음들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며... 하지만 행동하긴 어려워요 어려워ㅠㅠ

잠자냥 2026-03-10 09:17   좋아요 1 | URL
yo 치버 카버 소세키 🎵
망고가 말했지~
˝나는 내가 함께하고 수영하고 싶은 그 여자가 되기로 했다.˝ 🤣

케이 2026-03-11 17: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성커플도 둘 중 하나는 전통적 의미의 아내 역할을 해주길 원하는군요? 결국 뒷바라지를 해주고 받는 건 성별이 아니라 권력에 의한 것인가봐요. 서로 도와주면 안되는 것일까요. 너무 이상적인 얘기긴 하지만. 전 동성 연애는 이성 연애보다는 서로 동등한 관계 유지가 되지 않을까 했거든요. 사랑이라 말하지만 그 사랑 역시 갑을관계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인지 흑흑.
저도 잠자냥님 글로 처음 듣는 작가네요. 전 누구의 전기를 한번도 못 읽은 것 같아요. 대학 시절 무려 레닌의 전기를 읽으려다 중도 포기 했던 일이 있습니다. 전 누군가의 일생 같은 거 별로 재미가 없더라고요.

잠자냥 2026-03-12 10:26   좋아요 1 | URL
권력이 작동하기도 하겠지만 커플 각자의 직업(누가 좀 더 여유로운가)이나 개인의 성격, 처한 상황에 따라서 조금씩 달라지지 않을까 싶어요. 이 책의 작가는 의대생이었다가 의사가 직업이 되니까 워낙 일에 치여서 집에 돌아갔을 때 심정적으로 기댈 사람이 필요했던 것 같아요(근데 또 실제로 그런 사람이 생기니까 싫어하더라고요?ㅋㅋㅋㅋ). 그걸 아내(당시 미국은 아내들이 대부분 전업주부였을 테니까요)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표현한 거 같고요. 아, 참 저자는 어린 시절부터 이성애 커플을 모델 삼을 수밖에 없었다고 하니까 이것도 일정 정도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무려 레닌의 전기라니! ㅋㅋㅋㅋㅋㅋ 말만 들어도 재미없을 거 같아요. 이 책은 저자의 일대기를 다루지 않고 정체성 깨달은 10대부터 시작해서고 방황하던 청년기에서 끝나서 좋았어요. ㅋㅋ

독서괭 2026-03-13 0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우 흥미롭군요. 미성년자 시절 성착취 넘 안타깝고요 ㅠㅠ 의대에서 수련하는 내용 얼마나 나오는지 모르겠지만 거기서도 성차별 어마어마하게 당했을 것 같습니다..
연애 얘기도 흥미롭네요. 내가 주창하던 폴리아모리, 당해보니 이건 아닌 듯! ㅋㅋ 사랑이란 끌림이란 뭘까요.. 참

잠자냥 2026-03-13 09:54   좋아요 1 | URL
그래도 꽤 많은 비중이 나옵니다. 2부 의대에서 / 3부 의사 이 장이 특히 그렇고요.
연애 이야기 재밌어요. 특히 이성애자(라고 계속 주장하는) ‘질리언‘하고 밀당하는 부분이 있는데 아우 이 여자가 너무 이랬다저랬다 대환장..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6-03-15 15: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장기적 연애에 돌입하지 못하는 이유가 ‘내가 함께하고 싶은 그 여자‘가 아니기 때문인거라고 이 글을 읽으니 생각하게 되네요. 저는 연인으로는 영 꽝인 사람인 것 같아요. 그래서 상대들이 저를 못견뎌한다, 가 아니라, 그래서 내가 애초에 걍 안한다.. 쪽이 되어버리는...

‘인간의 생에는 한두 번 쯤은, 운이 좋으면 몇 번쯤은 꼭 도움이 되는 만남이 있다.‘ 에 동의합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그들이 시절 인연이라 한때 만나고 다시 만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런 사람은, 그런 인연은 존재하는 것입니다.

잠자냥 2026-03-15 21:10   좋아요 0 | URL
ㅋㅋㅋ 일단 다락방은 혼자만의 시간이 너무 중요한 줄 아뢰오~ 근데 그게 잘 맞는 사람이 어딘가 있을 것입니다! 느슨하면서도 깊은 그런 관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