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역사 다니엘 슈타인 ㅣ 대산세계문학총서 200
류드밀라 울리츠카야 지음, 차지원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6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실 <통역사 다니엘 슈타인>은 올해 우주 리뷰상에 응모할 작품으로 읽었다. 처음에는 재미도 있고 할 이야기도 많고 좋았다. 그런데 중반쯤에 접어들면서부터 고개가 갸우뚱해지더니 자꾸만 다른 의문이 고개를 치솟고, 더 읽어 나가다 보니 아, 이건 안 되겠다 싶어졌다. 내가 책을 읽고 리뷰를 쓰게 되는 동기는 두 가지가 있다. 작품이 너무 좋아서 글로 남겨 다른 이들에게도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을 때, 또 다른 경우는 작품에 불만이 많아서 뭐라고 투덜거리고 싶을 때. 이 작품은 어디에 속하는가 하면 후자에 속한다. 작품 자체가 좋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런데 뭐랄까 장점보다는 자꾸만 단점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그런 작품이랄까. 처음에는 리뷰라는 게 꼭 장점만 써야 하는가 싶어서 내가 느낀 불만 그대로를 담아 우주 리뷰상에 응모할까 싶기도 했지만 일단 그건 포기. 그러고 나서도 하고 싶은 몇 가지 말들.

<통역사 다니엘 슈타인>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 통역사 다니엘 슈타인이라는 한 남자의 일생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일반적인 통역사라면 크게 흥미가 생기지 않을 법하나, 이 남자는 폴란드 출신 유대인으로 게슈타포의 통역사가 된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이야. 유대인이 게슈타포의 통역사를 한다니. 우리나라로 치면 일제 강점기 때 일본군의 통역사 역할을 하는 조선인 김 첨지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그에게 주어지는 임무란 제 민족, 유대인을 팔아넘기는 일이 되기 쉽다. 그럴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그럼에도 그는 그에게 주어진 환경, 유대인으로 폴란드에서 태어나 나치 치하를 살아갈 수밖에 없는, 그런 현실 때문에 히브리어와 폴란드어, 러시아어에 독일어까지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언어 천재적 능력을 지니게 되고 그로 인해 게슈타포의 통역사로 살아가게 된다.

살아남고자 유대인 신분을 철저히 숨긴 그의 독일식 이름은 ‘디터’이다. 그러나 반전은 그가, 제 민족을 팔아넘기는 행위에 가담하기보다는 가능한 한 유대인의 목숨을 살리는 데 애를 쓴다는 것이다. 이것은 다니엘을 유대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은(못한) 그의 직속상관 라인홀트 소령이 인도주의적 인물이기에 어느 정도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물론 그렇다고 라인홀트가 적극적으로 디터를 도와준다는 의미는 아니다. 라인홀트는 자신이 무척 아끼던 디터가 독일을 배신해 유대인을 살리는 데 몇 차례나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사실이 발각되어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했을 때 아량을 베푼다. 그로 말미암아 디터가 다니엘이라는 이름을 되찾고 가톨릭 사제로서 살아가는 데 일조하는 인물이다. 라인홀트의 존재가 없었다면 통역사 다니엘은 나치 치하에서 유대인의 목숨을 살리는 역할을 하다 사라진 인물로서 이 작품은 끝을 맺었으리라.....

그러나 본격적인 이야기는 가톨릭 사제가 된 유대인 다니엘의 삶에서부터 다시 시작된다. 유대인이 가톨릭 신부라니! 게다가 그는 기독교인이기도 하다. 유대 민족이 보기엔 게슈타포의 통역사 역할을 한 것도 1차 배신일 터인데, 유대인으로서 기독교를 믿는 가톨릭 사제가 된다는 것은 또 하나의 씻을 수 없는 배신일 것이다. 그렇기에 전후 이스라엘로 돌아가 국민으로 인정받고자 애쓰는 다니엘에게 이스라엘 정부는 그를 전쟁 영웅으로 받아들여 (게슈타포의 통역관으로 유대인을 구한 일이 인정받는다), 귀화 시민권은 주되, 국적을 주지는 않는다. 그의 종교 때문에 그 안의 유대인성을 인정하지 않아 국민으로 허락하지는 않은 것이다. 다니엘은 자조적으로 말한다. “곧 이스라엘 시민이 되겠지만, 스스로를 이스라엘에서 유대인이라고 부를 권리는 없다는 거야. 폴란드에 가든 독일에 가든 거기서 모두에게 나는 유대인이지만 오직 이스라엘 정부에게만 나는 유대인이 아닌 거라네. 내 증명서에는 이렇게 쓰여 있어. ‘국적 미확인’” (p.114)

다니엘, 이 디아스포라적인 인물의 생을 지켜보노라면 참으로 기구한 운명이구나, 안타까운 마음이 절로 든다. 언어에 재능이 뛰어나, 살기 위해 선택한 길이 게슈타포의 통역사요, 유대인임에도 유대교의 랍비가 아닌 가톨릭 사제로 살아가는 생이라니. 참으로 기구하구나. 그런데 여기서 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왜 굳이...? 하는 지점들이 발생한다.

도대체 그는 왜 가톨릭 사제로서 왜 굳이 이스라엘로 가야만 했는가? 이것도 일종의 시온주의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지 않을 수 없다. 1948년 1차 중동전쟁에 이어 지금까지 저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은 물론 영국의 제국주의가 가장 큰 원흉이기는 하지만 유대인들이 이스라엘로 돌아가 그들만의 국가를 세워야 한다는 시온주의 때문에 벌어지고 있는 일이 아닌가. 그런데 폴란드가 조국인 다니엘은, 가톨릭 사제로 살아가면서도 왜 굳이 이스라엘로 간 것인가? 물론 다니엘의 이스라엘행은 일반적인 유대인의 그것과는 다르다. 그는 이스라엘이라는 영토를 유대인만의 땅으로 보지는 않는다. 게다가 그는 이스라엘에서 히브리어를 사용하는 기독교 공동체를 이끌며 민족은 물론 종교적인 화해를 시도한다. 때문에 그의 이런 행보는 유대 민족주의의 폐쇄성에 대한 도전이자 유대인, 아랍인, 기독교인이 역사는 물론·종교적 갈등을 넘어 서로 포용해야 한다는 믿음에 따른 행위이기도 하다. 종교와 민족의 경계를 허문 그야말로 화해와 공존의 통역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런 행위가 가능한 것은 그가 아랍인에 비해, 팔레스타인 민족에 비해, 가진 자, 강자의 위치에 서 있기에 가능한 게 아닐까. 위와 같은 화해와 공존의 실천은 다른 곳에서는 불가능했을까? 나 같은 비종교인의 눈에는 상징적인 의미로도 종교적인 오만으로 보인다. 굳이 무슬림들의 땅에 기어들어 가 가톨릭이든 기독교이든 자신들의 종교를 설파하는 그들의 행위가 나는 평소에도 종교적 오만이라고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그는 그곳에서 히브리어로 미사드린다. 이 또한 언어적 시온주의가 아닌가? 물론 이 부분도 앞서 설명한 것과 같이 기독교의 뿌리인 유대 전통의 복원 및 이스라엘 현지인과 진정으로 소통하고자 하는 의도임을 알 수는 있다. 더욱이 그의 이런 행위는 정통파 유대인들의 눈에는 히브리어로 이방인의 종교인 가톨릭 미사를 보다니! 오히려 시온주의에 대한 도전이나 도발로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그의 히브리어는 갈라진 유대교와 기독교를 연결 지으려는 또 다른 통역의 역할을 한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럼에도 굳이 유대인인 그가 이스라엘로 가서 히브리어로 가톨릭 미사를....? 이것도 결국 또 다른 오만이 아닌가 씁쓸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다.

결정적으로 그 언어 천재가 아랍 땅에서 아랍어를 배우지 않았다는 점은 내 의구심에 기름을 붓는다. 그에게 감화받은 수녀 힐다가 말하길(그녀는 독일인으로 그의 민족이 유대인에게 저지른 죄를 참회하기 위해 다니엘 곁에서 수녀로 살아간다), 다니엘 신부님은 폴란드어, 독일어, 히브리어를 잘하고, 다른 언어는 잘못한다고 하면서도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그리스어, 프랑스어, 영어, 루마니아어 등을 사용하며 이스라엘에 온 견학단을 데리고 다닌다. 체코인, 불가리아인, 아랍인 등과 그들의 언어로 이야기하는 것을 본 적도 있다. 평생 라틴어로 미사를 드리기도 했단다. 그런데 그는 결정적으로 아랍어를 배우지 않았다. 이것은 다니엘의 고백에서도 드러난다. 언어 천재가 그 땅에 살면서 히브리어로 미사들 드리며 현지 이스라엘인들과의 소통에는 진심으로 애를 쓰면서 왜 그 땅의 주인이라 할 수 있는 자들, 아랍인들의 언어는 배우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까? 이제껏 그를 살려온 언어들- 그렇다 다니엘에게 언어는 살기 위한 도구, 실존을 위한 도구이기도 했다-과 달리 아랍어는 생존에 꼭 필요한 언어가 아니기 때문인가? 이는 아랍인들의 땅에서는 굳이 아랍어를 배우지 않아도 살아가기 수월하다는, 생존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또 다른 오만의 증거 아닐까. 다니엘이 살아간 시기에도, 그리고 현재까지도 죽 이어지고 있는 아랍-팔레스타인 현실에 대한 방관이나 마찬가지가 아닐까. 다니엘은 사랑과 용서와 화해를 외치지만, 그의 신, 그가 외치는 사랑과 용서와 화해는 팔레스타인 민족을 향하지는 않는다. 팔레스타인인, 그들의 고통에는 다니엘은 물론 그가 믿고 따르는 신도, 그리고 이 작품을 쓴 작가도 눈을 돌린다.

그렇다. 다니엘, 디터에게 무슨 죄가 있으랴. 그의 뒤에는 류드밀라 울리츠카야 있는 것을. 그녀는 실제로 이 작품 속에서도 직접 등장해 말한다. 이 작품을 “누구에게 필요할까 싶은 자유에 관해서”(p.167) 쓰노라 고심 중이라고 고백한다. 그런데 그녀가 말하는 자유에는 팔레스타인인들이 속하지는 않는 것 같다. 사랑과 용서와 화해의 대상에 당연히 그들도 포함되지 않느냐고? 글쎄... 독자인 내가 읽기엔 유대인을 향한 핍박과 고난에 비하면 작가의 아랍인들을 향한 연민은 거의 느낄 수조차 없으니 무슨 일일까. 심지어 그녀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것에 분노해 러시아를 떠나 현재 독일 베를린에서 살아가고 있는 행동파 작가가 아닌가. 그런데 왜 자기의 민족인 유대인에게는 이토록 한없는 연민만을 보내는 것일까.

루카치는 소설을 ‘총체성(Totality)을 상실한 시대의 서사시’로 정의하며 훌륭한 소설이란 파편화된 현실 속에서도 개인과 사회적·역사적 현실 간의 객관적이고 총체적인 관계를 복원해 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런 관점에서 <통역사 다니엘 슈타인>은 명백하게 한계를 지닌다. 오늘날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을 침공하고 억압하는 현실은 군사, 영토, 자본, 생존권이 얽힌 철저히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사회적 모순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이 참혹한 현실을 다니엘 신부의,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자’는 식의 추상적이고 종교적인 박애주의로 해결하려 한다. 그로 인해 이토록 참혹한 현실을 낭만화하기까지 한다. 이것은 역사적 토대에 대한 냉철한 분석 없이 그저 관념적인 도덕론으로 가해와 피해의 객관적 현실을 흐리는 부르주아적 기만이 아닐까. 게다가 역사적·사회적 구조를 총체적으로 직시하지도 못하고, 작가의 출신이 유대인이라는 주관적 한계와 수많은 인물이 주고받은 편지의 나열과 인터뷰 등등 파편화된 서사 형식, 종교적 관념주의 뒤로 도피함으로써 소설이 도달해야 할 진실의 총체성을 획득하는 데 철저하게 실패하고 만다.

10월 8일 오늘은 2026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발표하는 날이다. 류드밀라 울리츠카야는 유력 후보는 아니지만 해마다 이 상의 후보자군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작가이다, 나는 그녀의 수상을 점치지는 않는다. 그런데 만일, 만에 하나라도 그녀가 오늘 수상자가 되어 연단에 서서 연설하게 된다면 현재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벌이고 있는 저 만행에 대해 한소리 할까?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 그저 추상적인 말들-사랑과 용서 화해 운운하면서 자기의 수상 소감을 밝힐 가능성이 더 크다. 이스라엘은 언제까지 피해자일까? 더는 아니다. 가해자의 위치에서 말하는 사랑과 용서, 화해는 공허한 기만일 뿐이다. 



댓글(9)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다락방 2026-10-08 13: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언제나 그랬지만, 이 리뷰도 역시나 정말 너무나 좋습니다. 감탄이 절로 나오네요. 한계가 있는 작품이라 하셨지만 읽어보고 싶기도 하고요. 그리고..

노벨상 누가 탈 지 궁금합니다. 저는 투표했는데요, 아무도 하지 않을 작가에게 해서.. 만약 그 작가가 된다면 2백만원 혼자 갖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잠자냥 2026-10-08 14:10   좋아요 0 | URL
무려 제가 휴가 중인데도!! (할 말이 많아서) 노트북을 켜고 아침부터 쓴 글인데 다락방 님 마음에 든다니 뿌듯합니다. 읽어보셔도 좋을 거 같아요. 기독교 역사에 대해서도 훑어보실 겸…(하필 제가 손석춘의 <교양으로 읽는 기독교> 읽는 중에 이 책을 읽는 바람에 기독교 역사 부분이 좀 중복되는 내용들이 있어서… ㅋㅋㅋ 좀 더 지겹게 느껴진 거 같아요). 저도 다른 사람들이 언급한 작가가 아닌 작가에 투표해서…. 맞힌다면 알라딘 배당금 꽤 될 거 같은데…. 과연?! ㅋㅋㅋㅋ (작년에 이어 또 맞히고 싶습니다!!! ㅋㅋㅋ🤣🥹)

잠자냥 2026-10-08 22:08   좋아요 0 | URL
다락방의 200만 원 꿈은 날아가고….😹

다락방 2026-10-08 22:53   좋아요 0 | URL
저 앤 카슨 했었는데 ㅋㅋ 동료랑 밥 먹다가 적게 가질바에야 200 노려야겠어 이러고 삭제하고 다른 작가 한거거든요? ㅋㅋ 결국 아무것도 못받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역시 고치기 전이 정답이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잠자냥 2026-10-08 22:57   좋아요 0 | URL
😹 앤 카슨 했어도 많이는 못 받았겠어요! 😹

케이 2026-10-08 15: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나치에게 박해당했기 때문에 다른 민족을 박해할 권리가 있다는 듯 행사하는 그들.
유태인임에도 불구하고 아카데미에서 손을 떨면서도 할 말은 한 조나단 글레이저 감독이 더욱 더 대단해보입니다.
오늘 노벨상 발표하는 거 잠자냥님 덕분에 알았습니다. 아마도 이번 수상자도 아는 작가가 아니겠지만 그래도 기대되네요.
좋은 계절입니다. 아름다운 날씨 만끽하시길.
P.S 자우메 카브레가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되면 좋을 것 같단 생각이 퍼뜩 듭니다.

잠자냥 2026-10-08 16:44   좋아요 1 | URL
자기 자신과 관계된 것을 벗어나 객관적인 눈으로 그것들을 판단하는 게 인간에겐 참 어려운 일인가 봅니다. 그래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판단을 하는 사람들이 위대하고 아름다워 보이는 거겠지요. 그런 존재가 귀하게 여겨지기도 하고요. 노벨문학상은 한국 시각으로는 오늘 밤 8시에 발표됩니다. 저마다 자기가 응원하는 작가가 받길 기대해보는 재미도 쏠쏠!? 그러고 보니 자우메 카브레도 있었군요. 내일부터 연휴네요. 날씨도 좋고요. 쌍둥이들과 즐거운 연휴 보내세요!

독서괭 2026-10-12 12: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만”이라는 표현이 와닿네요. 특권을 가진 자의 오만. 그건 스스로 깨닫긴 어려운 것 같아요. 저 최근에 미국인 친구를 사귀었는데 자기도 다른 나라 언어를 배우고 싶다고, 이유는 다른 나라에서 살아보고 싶어서- 라고 말하길래, 영어는 어느 나라에서든 쓸 수 있는데 뭐가 걱정이야~ 했더니, 다른 나라 가서 영어만 쓰는 건 selfish 하다고 말해서 인상적이었어요. 다니엘이 아랍어 안 배웠단 거 보니 이게 생각나네요ㅎ 여행중이라 오랜만에 들렀슙니다!

잠자냥 2026-10-12 12:48   좋아요 0 | URL
여행 중에 서재 들어오는 거 오만아닙니까? ㅋㅋㅋㅋㅋㅋㅋ 여행을 즐기시오.
그나저나 저 말만 들었을 땐 괜찮은 친구 사귄 거 같네요?!
 
예수의 어린 시절
J. M.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말하는나무 / 2026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신간을 살펴보다가 소설 분야에서 이 제목을 마주했다. <예수의 어린 시절>- 제목과 책 표지의 분위기만 보았을 때, 쉽게 스크롤하면서 다른 책으로 넘어갔을 법한 그런 책이다. 그런데 눈길이 머물 수밖에 없었던 것은 “J. M. 쿳시”라는 이름 때문이다. 쿳시? 쿳시가 이런 책을 썼다고? 책 정보를 훑어보고 미리보기로 책을 살펴보면서도 반신반의했다. 지나치게 종교적인 내용이 아닐까, 에이 설마 그래도 쿳시가 그렇게 단순하게 썼으려고. 그래서 바로 사서 읽었다.

읽고 나서는 고개를 더 갸우뚱하게 된다. 오, 지저스Jesus! 도대체 당신은 어디에 있나요? 이 책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정말 이렇게 된다. 도대체 예수는 어디 있는가? 과연 누가 예수인가? 예수가 직접 등장하지 않으리라는 예상할 수 있었지만 은유로서의 예수조차도 발견할 수 없으니 답답한 심정. 한편으로는 내가 기독교인이 아니라서, 예수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이 작품을 읽으며 예수의 발끝 하나 찾지 못한 것은 아닐까? 의심하게 된다. 그러나 꼭 그렇지만도 않을 것이다. 독실한 기독교인이 이 책을 읽는다 하더라도 이 작품 내에서 예수의 그림자를, 그 모습을 찾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물론 제목이 <예수의 어린 시절>이기에 작품에 등장하는 어린 소년 ‘다비드’가 예수를 상징하는 아이인가 싶기도 한데 그런 의심 아래 이 작품을 쭉 읽어나가고 책장을 덮고 나서도 나는 다비드가 예수의 어린 시절을 보여주는 인물이라고는 동의하기 어려웠다. 다비드란 소년, 똘똘하고 귀여운 구석은 있지만 고집불통! 속 터져. 특히 중반 이후 정말 제멋대로 굴 때는 이 녀석은 분명 예수가 아니다!!!! 속으로 외치게 된다.

그렇게 예수 찾기에 실패하고 책장을 덮은 <예수의 어린 시절>- 이 책은 현재 알라딘 판매량에서 “종교/역학 주간 18위, 종교/역학 top100 2주”에 올라있고, 알라딘 분류에 따르자면 아프리카소설/아프리카문학/기독교 문학에 속하는데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이 책의 분류 중 그나마 내가 수긍할 수 있는 것은 영화소설(쿳시의 ‘예수 3부작’을 원작으로 한 영화 <여기(Aqui)>는 2026년 칸 영화제 프리미어 부문에서 상영해 큰 화제를 모았다)/노벨문학상(잘 알다시피 쿳시는 2003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정도이다. 그럼에도 아프리카문학으로 분류된 까닭은 쿳시의 모국이 남아프리카공화국이기 때문일 테고 제목에 버젓이 ‘예수’가 등장하기에 종교/기독교 문학으로 분류된 것이리라. 

그러나 <예수의 어린 시절>을 읽고 나면 이 분류에 딴죽을 걸고 싶어질 것이다. 이 작품을 아프리카 문학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쿳시의 이전 작품들 중엔 아프리카, 남아프리카공화국을 배경으로 쓰인 것들이 꽤 있지만, 이 작품은 스페인어를 쓰는 ‘노비야’라는 공간 때문에 스페인 또는 최소한 스페인어의 영향을 받는 남미의 어느 나라라는 인상을 지울 길이 없다(심지어 이 작품은 영어로 쓰였음에도 영어판보다 스페인어 번역판이 전 세계에서 가장 먼저 출간되었다. 이는 쿳시의 생각이었다고 하는데 영어 패권주의에 대한 저항이자 예수 3부작 주인공들이 가상의 스페인어 사용 국가에 도착해 스페인어를 배우며 살아가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들로 이 작품을 굳이 분류하자면 아프리카도 스페인도 남아메리카도 영어권 국가는 더더욱 아닌 제3의 공간, 디아스포라 문학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이 작품은 나이도 출신국도 정확히 알기 어려운 ‘다비드’(다섯 살로 보인다고 표현된다)라는 어린 소년과 늙은 남자 ‘시몬’(본인은 40대로 보이고 싶어 하지만 사실 남들 눈에는 60대로 보이는)이 ‘노비야’에 도착하면서 시작한다. 과거의 기억을 거의 잊은 이들은 배를 타고 난민 수용소(로 보이는 곳)에 이르러 낯선 언어인 스페인어를 배우면서 이곳에 정착하고자 애를 쓴다. 시몬은 엄마를 잃어버린 소년 다비드의 할아버지 또는 아버지로 오해받는데, 두 사람은 배에서 처음 만난 사이로 시몬은 소년에게 엄마를 찾아주려고 백방으로 노력한다. 과연 다비드는 엄마를 찾을 수 있을까? 그리고 이 두 사람은 언어도 삶의 방식도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곳에서 무사히 정착할 수 있을까? <예수의 어린 시절>은 이 두 가지 얼개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이유로 여기에 있는 거야. 우리에게 살 기회가 주어졌고 우리는 그 기회를 받아들였단다. 산다는 것은 대단한 거란다. 그 어떤 것보다 대단한 거란다.” (p.33)


시몬은 배가 고프다고, 잠자리가 불편하다고 칭얼대는 다비드에게 이렇게 말한다. 산다는 것은 대단하다고. 정말 산다는 것은 대단한가? 그 어떤 것보다 대단한가? 시니컬한 나는 시몬의 말에 쓴웃음을 짓는다. 그 자신은 정말 그렇게 믿는가? 낯선 곳, 난민 수용소에 도착한 첫날부터 일은 쉽게 풀리지 않는다. 뜻밖의 난관에 봉착해 굶주린 배를 채우는 것은 물론이요, 씻기는커녕 편히 잠잘 곳을 마련하기도 쉽지 않다. 이런 엿 같은 상황에서 시몬 그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서도 아이에게는 어쩔 수 없이 사탕발림하는 게 아닐까? 냉소적인 생각이 먼저 든다. 그러는 한편으로는 그렇게 어려운 상황에서도 아이에게 차갑게 말하지 않고 희망을 주려 애쓰는 저 어른의 모습에 슬며시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한다.

그런데 이 노비야라는 곳은 좀 이상하다. 사람들이 무미건조하게 친절하다. 미식을 자극하는 맛있는 음식이 넘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굶주리는 사람도 없다. 시몬이 일자리를 구하면서 어울리게 되는 부두 노동자들이나 난민 수용소 사람들 등등 대부분의 사람들이 온화하다. 폭력적이지도 않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뜨겁지도 않다. 열정이나 욕망 또는 강렬한 사랑 같은 깊은 감정이 사라진 공간 같다. 단조로울 정도로 평온하고 통제된 시스템에 따라 큰 문제없이 흘러가는 사회…. 이런 분위기 때문에 노비야는 실제 도시가 아닌 가상의 도시 같기도 하고(이 책을 읽고 있는 망고 님의 말처럼) 혹시 사후세계인가 하는 의심이 들기도 한다(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쿳시가 한 인터뷰에서 이 작품의 배경을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사후세계”라고 말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굳이 사후세계로 읽지 않고, 난민이나 이주자들이 많은 가상의 도시로 읽어도 무방할 것 같고, 나는 그렇게 읽었다. 그 편이 현실적으로 더 와닿기 때문이다. 

사막처럼 메마른 이 무미건조한 도시에서 시몬은 거의 혼자 뜨거운 사람이다. 그래서 이들의 기계적인 환대가 차갑게(만) 느껴진다. 그렇기에 난민 센터에서 자신과 다비드를 담당해 도와주는 여자 ‘아나’에게 속세에서 살려고 수녀원을 나온 수녀가 아니냐고 질문하기도 한다. 아무도 원치 않는 일을 하기 위해서, 감옥, 보육원, 보호시설, 난민접수센터 같은 곳에서 일하려고 환속한 수녀…. 그러나 아나는 시몬의 질문을 가장한 이런 투정에 일침을 가한다. 센터는 감옥도, 자선단체도 아닌 사회복지의 일부일 뿐이라고. 


“그렇다고 해도 우리처럼 무기력하고 무지하고 가난한 사람들이 끝없이 몰려오는 상황을 아무런 믿음도 없이 어떻게 견뎌낼 수 있죠?” 
“믿음이라고요? 믿음은 그것과 아무 상관이 없어요. 믿음은 눈에 띄는 결과가 없어도 자신이 하는 것을 믿는다는 의미예요. 센터는 그런 곳이 아니에요. 우리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거예요. 우리가 도와주면 그들의 삶이 나아지죠. 그중 어느 것도 확실하지 않은 게 없어요. 어느 것도 맹목적인 믿음이 필요하지 않아요. 우리는 일을 하고 모든 것이 결국 잘 풀려요. 그만큼 단순한 일이에요.” (pp.47~48)


그러나 시몬은 아나의 주장 또는 설득에도 불구하고, 센터의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모든 것이 불확실한 2주전에 비해 이곳에 와서 얼마나 많은 것들이 확실해졌느냐면서 아나는 이것이 발전이라고 말한다. 시몬이 느끼기에 그것은 발전이 아니다. 아나를 비롯한 이 도시의 사람들은 시몬과 다비드를 환대하면서 그들의 욕망의 크기를 “크래커 콩 반죽” 정도로 제한한다. 그러나 시몬은 그 이상의 다른 것, 예를 들면 으깬 감자, 그레이비가 들어간 소고기 스테이크 같은 것을 바란다. 원한다. 

“이 나라에서 가장 놀라운 게 뭔지 아세요? 너무 핏기가 없다는 거요. 모두가 너무 점잖고 친절하고 착해요. 아무도 욕을 하거나 화를 내지 않아요. 아무도 술에 취하지 않아요. 목소리조차 높이지 않아요. 당신은 빵과 물과 콩 반죽을 먹고 살면서 배부르다고 말하죠. 인간적으로 말해 어떻게 그럴 수 있죠? 스스로한테도 거짓말을 하나요?” (p.49)

그렇다. 그, 시몬은 채식주의자가 아니라서, 결코 제 욕망을 채식 정도에서 멈추게 할 수 없기에 콩이 아닌 스테이크를 원한다(다비드에게도 스테이크를 먹이고 싶다). 고기를 원한다. 고기를 먹고 싶다...... 그러니까 그는 육체적으로도 고기, 즉 인간 여자를 원한다. 먹는 게 아니라  여자를 사랑하고 만지고 안고 싶다. 때문에 젊은 여자인 아나를 비롯해 다비드의 친구 ‘피델’의 엄마 ‘엘레나’에게 추파를 던지기도 하고, 욕망 어린 눈으로 바라보며 인간의 본성은 그런 것이 아니라며 그녀들에게 욕망을 불러일으키고자 애를 쓴다. 그런데 참 그것이 쉽지 않으니… 시몬의 이 들끓는 욕망을 따라가면서 모든 것이 기본적으로 제공되는 편한 사회이지만 욕망은 제거되다시피 한 공간에서 인간이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생각해 보게 된다. 

한편 다비드의 생모 찾기에 실패한 시몬은 생면부지의 여성 ‘이네스’를 보고는 느닷없이 다비드의 엄마가 되어 달라고 부탁하기도 한다. 나는 이 장면과 이네스의 선택이 이 작품에서 가장 설득력이 떨어지는 부분이라고 생각하는데(다비드가 예수를 상징한다면, 예수의 처녀 엄마인 마리아와 연결 짓기 위한 쿳시의 무리한 시도로 보임), 진짜 놀랍게도 이 처녀는 아닌 밤중에 홍두깨 같은 이 부탁을 받아들여서 미혼의 싱글 여성이 무려 다섯 살 소년의 엄마가 된다. 한데 특이하게도 시몬은 이네스에게만은 여성적인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줄곤 이네스를 묘사할 때 여자 같지 않다, 남자처럼 느껴진다 등등의 언어를 쓴다. 때문에 나는 혹시 이네스가 아이를 미치도록 갖고 싶은 MTF 트랜스젠더 게이, 또는 레즈비언 여성인가 의심했는데 이야기가 흐를수록........ (안 알려줌!). 아무튼 갑자기 어린 소년의 엄마가 된 이네스는 이전과는 달라진 모습으로 다비드의 교육과 양육에 자기만의 방식으로 나름 애를 쓰는데 이 부분에서는 한 인간을 키운다는 것, 교육한다는 것, 조건 없는 사랑의 의미도 생각해보게 된다.  


그러니까 갓난아이와 젓 먹이의 입에서도 그런 말이 나온다. 호의로부터 우정과 행복이 나오고, 공원에서의 우정 어린 소풍이나 숲속에서의 우정 어린 오후 산책도 나온다. 그에 반해 사랑으로부터는 아니 적어도 사랑이 더 절박하게 표현되는 갈망으로부터는, 좌절과 의심과 상심이 나온다. 그렇게 간단하다. 그는 보편적인 것(호의, 선의)보다 개인적인 것(욕망, 사랑)이 먼저라고 우기는 것일까? 그리고 그는 어째서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그냥 살아가지 않고 끊임없이 이런 질문들을 스스로에게 하고 있는 것일까? 이 모든 것이 낡고 편안한 것(개인적인 것)에서 새롭고 불안한 것(보편적인 것)으로 넘어가는 지나치게 완만한 과정의 일부일까? 이러한 질문들은 새로 도착한 사람이 겪는 성장 과정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 걸까? 알바로, 아나, 엘레나 같은 사람들은 이런 과정을 성공적으로 거친 걸까? 그렇다면 얼마나 더 오래 있어야 그는 새롭고 완벽해진 인간이 될까? (p.84)


육식파이자 육체파(응?)인 시몬은 내내 갈망한다. ‘보편적인 것(호의, 선의)’보다 ‘개인적인 것(욕망, 사랑)’을…. 인간에게는 이것이 먼저라고. 앞서 말했듯이 노비야, 저 세계는 보편적인 것은 주어진다. 그러나 개인적인 것은 많이 부족해 보인다. 인간은 우정이나 보편적인 것만으로도 살아갈 수 있을까? 물론 그럴 수 있다. 때로는 저 개인적인 갈망이 사람을 나락으로, 벼랑으로 몰아가가도 한다. 아니 그렇게 만드는 일이 더 잦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읽는 동안 시몬의 저 드글드글한 욕망이 좀 버겁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냥 좀 콩 반죽만으로는 안 되겠니? 심심하지만 평온하고 좋잖아 싶은.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중년에 이른 시몬을 생각할 때 그러한 것이지 앞으로 살아갈 날이 많은 다비드에게까지 스테이크의 세상은 잊어라, 콩 크래커만으로도 살아갈 수 있다고 속삭이는 것은 기만이리라.

환대 또한 그렇다. 환대하는 자들은 보편적인 것만을 제공하면서 제 임무를 다했노라 생각할 것이다. 물론 그래, 그 보편에도 미치지도 못하는 환대는 얼마나 많은가, 환대가 완전히 사라진 세계도 많지 않은가. 그런 의미에서 노비야에서 이뤄지는 환대는 환대의 가장 기본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다음에는? (물론 그렇다고 육체를 제공하라는 것은 아니다). 사실 누구보다 가장 먼저 환대를 보여준 이는 시몬, 그 자신이다. 시몬은 부모를 잃은 다비드에게 조건 없이 대부가 되어주기를 약속하며 소년을 위해 고군분투한다. 쿳시의 펜끝에서 갑자기 마리아가 되어버린 이네스의 선택 또한 또 다른 의미에서의 다비드를 향한 환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다비드를 향한 이 두 사람 저마다의 환대 방식에는 또 나름의 문제가 있어 보인다. 이 책은 이렇게 끊임없이 낯선 자들을 향한 조건 없는 환대가 사라져가는 이 세상에서 환대의 의미를 질문하게 한다. 성경에서는 환대에 관해 예수가 말하길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마태복음 25:45) 했다는데, 환대의 의미를 내내 돌아보게 한다는 점에서 이 작품 자체가 예수의 얼굴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댓글(13)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잠자냥 2026-09-21 16:2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헐.... 😱 나 너무 요즘 종교적이야. 그만 경건해야지. 🤣

망고 2026-09-22 14:48   좋아요 0 | URL
예수천국불신지옥을 외치면...ㅋㅋㅋㅋ

잠자냥 2026-09-23 09:27   좋아요 0 | URL
잠멘~🤣

망고 2026-09-21 17: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이 책 읽고 있으면 그렇게 졸음이 쏟아져요ㅋㅋㅋㅋ 반 정도 읽었는데 머릿속에는 물음표만 한가득! 노비야에서 사는 사람들 다 AI같아요. 뭘까뭘까 쿳시는 무슨 생각으로 이 책을 썼을까...이번에 진짜 잠자냥님한테 제대로 낚임😤

잠자냥 2026-09-21 21:26   좋아요 1 | URL
어허~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니라! 🤣

건수하 2026-09-22 07: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약간 궁금했는데 궁금만 하기로….

잠자냥 2026-09-22 08:49   좋아요 0 | URL
ㅋㅋㅋ 읽을 의욕을 꺾어버리는 리뷰인가요? 😹

건수하 2026-09-22 11:16   좋아요 0 | URL
그 정도는 아닙니다. 다만 세상엔 읽고 싶은 책이 많으므로... ^^

독서괭 2026-09-23 08: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굉장히 생각이 많아지게 하는 책일 것 같아요ㅋ 제목만 보고 산 사람도 많을 것 같은데 머리 위에 물음표 백개 띄우면서 읽을 듯요 ㅋㅋㅋㅋ

잠자냥 2026-09-23 09:28   좋아요 2 | URL
미쿡 교회 안에서 펼쳐 읽어보아….🤣

푸른꽃 2026-09-23 09: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성 가득 담긴 리뷰 감동입니다~

다락방 2026-09-28 1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다비드는 예수인가... 알아맞혀보시오.. 의 궁금증으로 읽어보고 싶긴한데, 끝내 답을 알 수 없을 것 같아서 읽고싶지 않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흠..

잠자냥 2026-09-28 12:15   좋아요 0 | URL
그래도 쿳시인데... 천천히 읽어봅시다. ㅋㅋㅋ
 
라스트 화이트맨
모신 하미드 지음, 권상미 옮김 / 문학수첩 / 2026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따금 집사2와 “다시 태어난다면?” 놀이를 할 때가 있다. 놀이라고 하니 뭐 자주 하는 것 같지만 그건 아니고 주로 일방적으로 집사2가 “다시 태어난다면?” 하고 질문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다시 태어난다면 뭐 전공하고 싶어?” “다시 태어나도 나 만날 거야?/나랑 살 거야?” “다시 태어나면 어느 나라에서 살고 싶어?” “다시 태어나면 어떤 일하고 싶어?” 이런 질문들이다. 일방적이라는 까닭은 나는 현생도 너무나 피곤하여 다시 태어난다는 가정 자체를 하(고싶)지 않기 때문에 집사2에게 저런 질문을 한 적이 없다. 그래서 나는 집사2가 저런 질문을 하면 “다시 안 태어난다니까!” 버럭하기 일쑤이다. 그러면 집사2는 시무룩해져서 “그냥 상상이라도 해보라니까.....”

“페더러로 다시 태어난다면 생각해볼게.” “서유럽이나 북유럽 백인 남자로 태어날 수 있다면 한번 다시 살아볼게.” 이 정도가 내 대답이다. 그러니까 내가 이 피곤한 지구에서 굳이 다시 태어나야만 한다면, 그리고 그걸 선택할 수 있다면 페더러급 백인 남자가 아닌 이상은 다 거절할 것 같다. 페더러는 백인 남자인 데다가 스위스 태생이고, 신체조건은 물론이요 머리도 좋아(모국어인 스위스 독일어를 포함해 독일어/영어/프랑스어 등 4개 국어를 그야말로 유창하게 하고 이탈리아어와 스웨덴어도 할 줄 안다. 헐...), 아무튼 재능&지능&신체조건&성실성 다 갖춰서 테니스에서는 전설적인 선수가 되었다. 부와 명성이 따라온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 물론 그에게도 고통이 왜 없었으랴(신은 그에게 나달이라는 천적을 주어서 번번이 이 남부러울 것 없는 테니스 천재에게 좌절감을 안겨주셨으니). 그럼에도 페더러라면 다시 태어나도 그 자신으로 태어나겠느냐는 질문에는 “Of course!”라고 하지 않을까. 그런데 이 페더러에게 부룬디나 수단의 흑인으로 태어나야만 한다면 어떻겠느냐고 묻는다면 그는 뭐라고 답할까? 일단 이런 나라에서 흑인으로 태어난다면 그가 그토록 좋아하는 테니스 자체에 접근하기조차 어려우리라.

나 자신의 이야기로 다시 돌아와, 페더러가 아니라 서유럽/북유럽의 백인 남자로 태어난다면 그래도 좀 삶이 쉽지 않을까 싶다. 그때도 테니스를 칠 것 같고 그때도 자전거를 타고 여행을 다닐 것 같은데 백남으로 태어난다면 혼자 자전거로 세계일주도 할 수 있을 것 같다(웬만한 나라에서는 길에서 자도 될 거 같음). 아무튼 이 지구에서 부유한 국가 출신의 백인 남성이라는 정체성은 특권 중의 특권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런데 대부분의 백인 남자-백인 여성까지 포함하자-는 그들의 태생 자체가, 인종 자체가 특권처럼 작용한다는 사실을 잊고 지내는 것 같다. 하긴 뭐 그들에겐 공기 같은 것이겠지..... 그런데 이 특권이 하루아침에 사라진다면? 소멸된다면? 그러고도 살아가라고, 살아가야 한다면 이 백남/백녀들은 어떻게 될까? 

모신 하미드의 <라스트 화이트맨 The Last White Man>은 바로 이 백인 남성 ‘앤더스’의 특권이 하루아침에 사라진 세계를 보여준다. 이 작품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어느 아침, 백인 남자 앤더스는 제 피부가 누가 봐도 짙은 갈색으로 변해버린 사실을 깨달았다.” 가만 보자, 어라? 어딘가 익숙하지 않은가? 카프카의 <변신>을 읽은 이들이라면 이 문장에서 당장 그토록 유명한 첫 문장을 떠올릴 것이다. “어느 날 아침 뒤숭숭한 꿈에서 깨어난 그레고르 잠자는 자신이 침대에서 흉측한 모습의 한 마리 갑충으로 변한 것을 알아차렸다.”(카프카, <변신>, 열린책들). 

문득 궁금해서 원문도 찾아보았다. “One morning Anders, a white man, woke up to find he had turned a deep and undeniable brown.”/ “As Gregor Samsa awoke one morning from uneasy dreams he found himself transformed in his bed into a gigantic insect.”(“Als Gregor Samsa eines Morgens aus unruhigen Träumen erwachte, fand er sich in seinem Bett zu einem ungeheuren Ungeziefer verwandelt.”) 독일어 원문에서 영어로 번역한 카프카의 <변신>과 <라스트 화이트맨>의 첫 문장도 거의 흡사하다. 단지 독일어 “Ungeziefer”의 해석을 영어는 물론 우리나라 번역본에서도 “끔찍한 벌레”에서부터 “괴물 같은 벌레” 또는 “거대한 곤충” “갑충”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것으로 알려진다. 내가 읽은 번역본인 열린책들 판에서는 ‘갑충’으로 옮기고 있다.  모신 하미드는 카프카의 이 “벌레(ungeheuren Ungeziefer)”를 “deep and undeniable brown”이라고 바꾸었다. 

백인 남자였던 앤더스가 어느 날 아침 눈을 떴는데, 벌레도 아닌 유색인이 되어 있다니! 이 무슨 일인가! 거대한 해충으로 변한 것도 끔찍하겠지만 유색인, 흑인으로 변했다니 이 또한 난리 또 난리 아닐까? 그에게는 공포가 엄습한다. ‘그레고르 잠자’가 그랬듯이. 그는 또 분노한다. 대체 왜 이런 일이 나에게? 꿈이 아닐까? 그러나 꿈은 아니다 그는 거울을 깨부수고 이불 속으로 숨어버린다. 이게 현실일 리가 없어! 다행인지 불행인지 ‘잠자’와 달리 출근하라고 방문을 두드리는 아버지도 어머니도 누이도 없다. 그는 혼자 살고 있기에. 그러나 그 또한 잠자처럼 직장은 가야 한다. 헌데 이런 피부로? 직장에서 사람들이 과연 알아볼까? 에라 모르겠다. 일단 그는 직장에 전화를 걸어 몸이 아파 출근하기 어려울 것 같다고, 한동안은 그럴 것 같다고 말한다. 한동안...... 정말 한동안일까? 영원히 이렇게 살아야하는 것은 아닐까?

인간에서 벌레로 종을 달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서 또 다른 인간으로 단시 피부색이 변했을 뿐인데 무어 그리 걱정이냐고, 앓는 소리냐고 누군가는 말할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세상은 결코 그렇지 않다. 그 사실은 앤더스조차도, 유색인이 아닌 백인이었던 앤더스 그 자신조차도 알고 있다. 외출을 꺼리던 그는 그래도 먹고는 살아야겠기에 거리로 나선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갑자기 위축되는 이 느낌은. 백인 남성이었을 당시의 그는 위축된다는 느낌 자체를 가진 적이 없다. 그게 무슨 느낌인지 알기는 알았을까? 그런데 단지 피부색이 짙어졌을 뿐인데 그는 거리로 나가는 게 안전하지 않다는 느낌을 받는다. 변신한 모습을 감추려고 후드티를 뒤집어 쓸까하다가 누군가에게 위협적인 인물로, 불량하게 보일까 봐 주춤한다. 도로에서는 운전 시비로 백인 여성이 차량 문을 내리고 욕설을 퍼붓는다. 앤더스는 자신의 피부색 때문에 뭐라 항변하지도 못하고 묵묵히 욕을 바가지로 먹는다. 눈도 내리깐다.... 꽤 예쁜 여자라 앤더스는 왠지 억울하다. 집에 돌아온 뒤, 그는 반추한다. 만약 “자신이 백인이라는 사실을 여자가 알 수 있었다면, 그때의 자신은 과연 어떤 태도를 취했을지, 또 취할 수 있었을지” 생각에 잠긴다. 아니, 그보다는 “자신이 백인이라는 걸 스스로 알 수만 있었다면. 하지만 정작 자신조차 제 정체를 알 수 없다는 사실이 새삼스레 그를” 짓누른다.(p.15)

문제는 또 있다. 여자 친구인 ‘우나’가 찾아온다. 우나 또한 백인 여성이다. 앤더스는 이 사실을 숨길 수가 없어 우나를 맞아들이면서 자고 일어나 보니 피부색이 이렇게 변했다며 어쩔 줄 몰라 한다. 우나는 경악할 수밖에...... 그들의 관계는 어떻게 될까? 참 재미있게도 이 와중에도.....(아닌가? 새삼 놀라운 기회인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들은 섹스를 하는데 이 장면이 인상 깊다. 분명 오래도록 사귀어온 연인 사이인데 뭐지? 이 낯선 기분은? 당신은 누구? 나는 어디? 뭐랄까 이런 기분에 두 사람의 변신 이후 첫 섹스는 색다르기 짝이 없다(우나야, 낯선 사람하고 한 거 같아서 좋았던 거 아니니? 그만 하자 이런 이야긴ㅋㅋㅋㅋㅋㅋㅋㅋㅋ). 두 사람은 나중에 우나의 집에서도 섹스를 하게 되는데 우나는 엄마와 같이 사는 중... 근데 아뿔싸 엄마가(백인) 이 장면을 보고(아니 이눔들아! 방문을 왜 안 잠가! ㅋㅋㅋㅋㅋㅋㅋㅋㅋ) 경악. 헐....... 두 사람 앞에서 구토를 한판 거하게 하신다. 아니, 어머님, 토하기까지야.... 백인 여성과 흑인 남성이 하는 섹스가 좀 그렇긴 하다고 해도.... 21세기에 구토까지 할 일인가요. 아무튼 흑인 앤더스와 백인 우나의 묘한(?) 연인 관계는 계속 이어지기는 한다.

앤더스는 이제 어떡할까? 혼자 사는 아버지를 찾아가니 아버지도 경악하기는 마찬가지. 아니 아들이 흑인으로 변했으니 입틀막... 이걸 어째. 어쨌든 일상을 살아가야 하므로 그는 살아간다. 직장에도 출근하기 시작한다. 앤더스는 헬스클럽의 트레이너이다. 백인 전용이나 마찬가지인 곳이라 흑인 트레이너 앤더스의 존재는 껄끄럽기만 하나. 헬스클럽에는 유일하게 유색인이  사람이 있다. “피부가 어두운 야간 청소부”- 앤더스는 늘 그에게 친절하게 대했지만, 자신이 변한 뒤 그 남자가 보내는 새로운 시선은 왠지 달갑지 않다. “자신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이, 마치 자신과 대화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한 시선”(p.57)이 불편하기 짝이 없다. 그렇지만 그는 이 불편함 때문에 평소와는 달리 생각할 기회를 갖는다. 그리고 앤더스는 문득 자신이 그동안 그를 친절하게 대했던 것이 진심 어린 호의가 아니었음 깨닫는다. 단지 상대를 “강아지처럼 대하는 것과 다름없었”다는 것을 드! 디! 어! 깨달은 것이다. “몇 번 쓰다듬으며 ‘잘했다’ 칭찬하는 식의 가식”이라고. 이런 깨달음은 앤더스가 “예전보다 선한 사람이 되어서가 아니라,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 자체가 뒤바뀌었기 때문이다.”(p.58)

어느 아침 흑인이 되어버린 남자, 앤더스. 그는 이대로 이렇게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 자체가 바뀌어 현자가 되어 살아가게 되는 것일까? 우나에게 털어놓은 것처럼 자신이 전과 같은 사람인지 잘 모르겠는 상태, 혼돈 그 자체로 살아가야만 하는 것일까? 그가 우나에게 말했듯이 한 개인의 정체성이란 내가 규정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누구인지는 주변 사람들이 나를 대하는 방식에 따라 결정된다는 사실을 비로소 실감하기 시작”(p.56)한 앤더스. 그의 생이 어떻게 변해갈지 궁금하여 책장을 넘기는데 어라라라... 또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진다. 앤더스, 이 남자 한 사람만 백인에서 흑인으로 변한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서 백인이 흑인으로 변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마치 질병처럼, 유행병처럼 피부색이 짙은 갈색으로 하루아침에 변한 사람들이 속속 등장한다. 도시는 충격과 공포에 휩싸인다. 이때부터는 마치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를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벌어지는 것과 같은 일들이 앤더스가 사는 이 도시에도 일어나기 시작한다. 디스토피아..... 모두가 백인에서 흑인으로 변한다면 그래서 모두가 다 흑인이라면 문제도 소요도 갈등도 차별도 없을 것만 같은데 인간이 사는 세계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모두가 흑인으로 변해가는 이 도시의 운명은 어찌 될 것인가? 그리고 최후의 백인, “The Last White Man”은 과연 누구일까? 안 알려줌....... 페더러는 아님.



댓글(15)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망고 2026-08-19 14: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다시 태어나기는 싫은데 그래도 상상을 해보자면 잘생기고 신체 건장한 남자로 태어나고 싶긴해요ㅋㅋㅋㅋ 다시 태어나서 다시 태어난 잠자냥님이랑 노숙하면서 여행다녀야지ㅋㅋㅋㅋㅋㅋ
이 책 굉장히 이야기가 풍성할 것 같아요. 설정이 백인남자가 흑인이 되는 것에서 더 나아가서 온 세상이 흑인이 된다고요? 드라마로 나오면 재밌겠당

잠자냥 2026-08-19 14:52   좋아요 0 | URL
한국 남자로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고양이로 태어나서 24시간 중 22시간 잠자기는 어때요? 😺

망고 2026-08-19 14:58   좋아요 1 | URL
잘생긴 건장한 남자면 어디든 괜찮지 않을까...고양이도 길바닥에서 태어나면 몸이 힘들거고 집냥이라면 주인놈이 못마땅할거고ㅋㅋㅋㅋ

독서괭 2026-08-19 14: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페더러는 아님 ㅋㅋㅋㅋ
와 재밌는 설정이네요!! 저도 다시 태어나면 건장한 북미 태생 백인 남자요ㅋㅋ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부럽다 진짜.
그나저나 다시 태어나도 나랑 살 거냐니 집사2님은 참… 귀여우시네요 ㅋㅋㅋ

잠자냥 2026-08-19 14:55   좋아요 1 | URL
여긴 북미 백남 ㅋㅋㅋㅋ
한남 망고랑 북미 백남 괭이랑 유럽 백남 잠자냥이랑 만납시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만나서 어서와 한국은 처음이지 찍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집사2는... 자긴 나랑 산다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망고 2026-08-19 14:59   좋아요 1 | URL
한놈 더 데려와서 f4 결성합시다 샤랄랄라라

잠자냥 2026-08-19 17:18   좋아요 1 | URL
F4….? 그게 뭐죠? 젠지 자냥은 잘 모르겠써여….🌸🌷🤣🤣

망고 2026-08-19 18:35   좋아요 2 | URL
젠지 자냥ㅋㅋㅋㅋㅋㅋㅋ오늘 젤 크게 웃습니다😜

다락방 2026-08-19 18: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The Last White Man”은 과연 누구일까?


나다!!!!!!!!!!!!!

잠자냥 2026-08-19 20:00   좋아요 0 | URL
직접 읽어보시게! ㅋㅋㅋㅋ

다락방 2026-08-19 18: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스파이크 리 감독의 영화 <정글 피버> 에서도 흑인 남성과 백인 여성이 사랑에 빠지는데, 그 사실을 알게된 백인 여성의 아버지가 자신의 딸을 허리 벨트로 때리는 장면이 나와요. 그 흑인은 나름 성공한 건축가 였는데도 그러더라고요. 그때 엄청 충격 받았던 기억이 있는데, 오늘 이 리뷰를 읽다보니 그 영화 생각이 나네요.

저는 정말 다시 태어나고 싶지만, 백인 남자로 다시 태어나고 싶진 않네요. 아시아 남자도 싫다.. 전 다시 태어나도 아시아 여자로 태어나서 기존쎄로 살래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시 태어나도 나랑 친구하자, 잠자냥!! 백인 귀족이든 뭐든 하여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망고 2026-08-19 18:35   좋아요 1 | URL
다락방님까지 해서 f4 결성하려고 했는데 금잔디를 하시겠다?ㅋㅋㅋㅋㅋ

잠자냥 2026-08-19 19:59   좋아요 1 | URL
금잔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오ㅏ 진짜 빵 터져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6-08-19 20:05   좋아요 1 | URL
다락방 금잔디로 다시 태어나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F4 후리고 다니겠다!!

독서괭 2026-08-19 22:36   좋아요 1 | URL
🤣🤣🤣🤣🤣🤣진짜 빵 터졌어요 !!ㅋㅋㅋㅋㅋㅋㅋ
저도 위에 댓글 보고 f4 한명은 다락방님 하시면 되겠다 생각했는데 ㅋㅋㅋㅋㅋ 금잔디 ㅋㅋㅋㅋ
 
바라모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96
세사르 아이라 지음, 권미선 옮김 / 민음사 / 2026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늘은 월급날, 당신의 통장에는 일정한 금액의 월급이 들어올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숫자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그 숫자에서 또 일정한 금액들이 이런저런 곳으로 빠져나간다. 카드 값, 공과금, 보험비 등등. 몇 푼의 금액-숫자가 통장에 남을 수도 있고 다 빠져나간 채 통장은 텅장이 되어버릴 수도 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통장에 들어왔던 것은 돈인가? 숫자인가? ATM 기기 앞에 서서 은행에서 발급받은 카드를 넣고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몇 장의 지폐를 출력해서 손에 넣어보지 않는 한, 그것은 영원히 숫자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돈-월급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그것으로 또 이런저런 곳에 돈을 지불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의아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돈은 과연 어디에서 실재했는가? 이것은 하나의 관념일 뿐이지 않은가?

<바라모>의 주인공 ‘바라모’ 또한 그날, 월급을 받는다. 그는 그래도 이 월급을 단지 숫자-기호로만 수용하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눈앞에 존재하는 물질로서 종잇조각으로서 월급을 받는다. 손에 넣는다. 잡는다. 만진다. 그것은 엄연히 100페소짜리 지폐 두 장, 200폐소이다. 그런데 이것은 통장에 찍히는 숫자로서 존재하는 월급보다 현실성-실재성-존재로서의 가치는 명확하지만 단지 기호로 존재하는 월급보다 사용 가치는 떨어진다. 왜일까? 그가 월급으로 받은 지폐 두 장은 위조지폐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 사실을 급여를 손에 쥐는 그 순간 인식했다. 위조지폐로구나! 한데 그는 지폐를 받아든 그때, 위조지폐임을 알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그저 받아들일 뿐. 

왜일까? 바라모가 사는 이곳은 1923년 파나마의 한 도시 콜론. 이 도시는 관료적 사고가 팽배한 곳으로 공무원 바라모조차 바로 그 돈을 받아들이는 순간에도 관료적 사고방식에 젖어 관습적으로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는 이제 이 쓸모없는 돈을, 덧없는 월급을 가지고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의 머릿속에는 이런저런 생각이 스쳐지나간다. 그래, 아무렇지 않게 모르는 척하고 이 돈을 진짜 화폐로 바꾸는 거야! 이 생각은 자연스럽다, 그 오래전 톨스토이의 <위조지폐>에도 이런 생각을 하고 실행에 옮기는 자가 등장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바라모는 주춤한다. 위조지폐를 쓰는 순간 바로 감옥행이 예정되어 있는 것만 같다. 아니, 틀림없이 그럴 것이다. 이곳은 다름 아닌 1923년의 파나마이기 때문이다. 

바라모는 그때까지 파나마에서, 이 나라에서 위조지폐가 유통되고 있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러므로 자신이 이 위조지폐를 사용한다면, 바로 그 순간 새로운 범죄-이 나라, 이 도시의 첫 번째 유형의 범죄자가 될 것이며 그러므로 사법체계도 상상력을 발휘해 그에게 이때까지 한 번도 집행되지 않았던 처벌을 감행할 것이다. 무기징역 또는 사형이면 어떡하지? 그렇기에 그는 이런 두려움, 공포 앞에서 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지폐-위조된 ‘가짜’ 돈을 들고 정부 청사를 나온다. 그는 생각한다. 이 불법 지폐들에 ‘암묵적인 침묵과 신중하게 처신하라는 명령이 담긴 듯’하다고.

거리, 광장에서는 국기 하강식이 치러지고 있다. 바라모는 그때 울려 퍼지는 군악대의 음악 소리에 머리가 지끈지끈하다. 주머니 속 이 저주받은 돈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때마침 차에서 내려 한 남자가 다가온다. 운전기사이다.  월급이 들어오면 여기저기서 돈을 빼가듯이 그에게도 그런 존재가 있는가 보다. 그도 생각한다. 도박빚을 받아가려는 것인가! 이런 제길 운도 지지리도 없구나.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웬 행운인가? 바라모의 어머니가 도박에서 딴 돈을 그를 통해 돌려주려는 것이다. 어머니는 사실 노련한 도박꾼이다. 바라모는 그렇게 운전기사로부터 어머니에게 전달할 돈을 받아 넣는다. 그 와중에도 머릿속에는 여전히 이 쓸모없는 지폐 두 장을 어떻게 한담? 전전긍긍이다. 이 두 장을 다른 지폐로 바꾸는 것은 식은 죽 먹기이지만 계획을 세우지는 못하고 있다. 그저 단지 이 벌어진 상황에 당황해하고 있을 뿐이다. “왜 나한테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거지?”

곤혹스러움의 연속. 그는 당이라도 채우고자 광장 근처에서 젤리 파는 원주민 여자로부터 빨간 주사위 모양의 젤리를 사먹기로 한다. 어머니에게 전해야 할 돈 중 1페소를 지불하는데, 여자는 당황한다. 그 돈은 너무 커요! 거스름돈을 구하기 어려워요! 이때 갑자기 등장한 신체 불구의 한 신사가 다리를 끌고 나타나 자신이 직접 거스름돈을 구해다 주겠노라 한다. 그의 수고로움에 미안해하며 죄송스러워하는 바라모에게 신사는 말한다. “잘못은 화폐를 제대로 발행하지 않아서 액면가가 낮을수록 일반 대중에게 더욱 희귀해지는 비정상적인 상황을 야기한 통화 당국에 있다.”

바라모는 아무에게나 자기한테 빚졌다고 우기며 돈을 뜯어내는 정신 나간 노인을 만나 돈을 뜯기기도 하고, 원주민 여자한테 산 젤리를 오른손에 들고 있어서 손을 자유롭지 사용하지 못하던 중에 문득 광장에 휴지통이 없다는 사실을 재차 확인하면서 “당국의 또 다른 실책 때문에 그의 호주머니는 쓸모없는 종이쪼가리들로 가득 차”게 되기도 한다. 이런 사실을 깨달았을 때 우연히 키 큰 관목 옆에서 있었던 그는 그 가지 끝에 젤리를 꽂는다. 이 젤리는 형체 없이 살집이 통통한 꽃처럼 보인다. 

집에 돌아와 침대에 뻗어버린 바라모에게 어머니의 고함소리가 들려온다. 어머니는 익명의 누군가로부터 편지를 받고 분노 중인데, 편지 내용은 “네 남편이 너를 속이고 있다.” “폭탄을 설치할 것이다.” “네 뜻대로 되지 않을 것이다.” 등등 진부한 경고 문구로 누구에게나 모두에게나 아무에게나 해당될 내용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 종이쪽지의 뒷면을 살펴보니 이것은 매트리스 영수증이 아닌가! 언젠가 어머니가 매트리스를 산 후 영수증이 아닌 종이쪼가리를 매장에 가져가 실랑이를 벌이다 겨우 매트리스를 바라모와 함께 끌고 온 후 끝내 나오지 않았던 그 영수증이 이제 그렇게 섬뜩한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한편 어머니는 정신이 오락가락한지 망상인지 자신은 아이를 낳은 적이 없는데 아이-그러니까 바라모-가 있다고 말한다. 어느 날 누군가가 나타나 자기에게 이 아이-바라모를 맡겼다나. 바라모는 어머니의 친자인가 양자인가? 하긴 그녀에겐 남편이 없다. 그런데도 아이-바라모는 이렇게 존재한다. 그러나 어머니는 중국인, 바라모도 중국인, 두 사람이 친자 관계일 확률이 더 높다. 이 모든 혼돈 속에서 그는 자신만의 안식이 되는 유일한 취미인 작은 동물 박제에 몰두해보려고 한다. 오늘 그가 시도하려는 작품은 ‘피아노를 치는 물고기’. 그런데 아뿔싸. 그는 파나마에서 피아노를 실제로 본 적이 없다 게다가 손이 없는 물고기가 피아노를 친다는 게 말이 되는가? 이 작품은 과연 완성할 수 있을까?

연줄로 간신히 일자리를 얻어 근근이 살아가며 어머니 집에 들어앉아 혼자 가족도 없이 살고 있는 바라모. 정부의 말단 공무원인 바라모는 이렇게 호주머니에 위조지폐라는 독을 담고서는 정부 청사-광장-집-카페 등을 전전하며 대략 열 시간에서 열 두 시간에 걸쳐 긴 시 한편을 쓴다. 그날 오후의 퇴근길에서부터 주머니 속에 차곡차곡 모아 둔 종이쪼가리들을 그대로 베껴 적은 것 뿐. 마침표도 문단 나누기도 없이 오로지 종이 쪼가리가 쌓인 순서대로 불규칙하게 널어놓았을 뿐 모든 것을 우연의 순서에 맡긴 기나긴 시를….

바로 그 결과물이 현대 라틴아메리카 시의 걸작으로 찬사 받는 <아기 예수의 노래>이다. 자, 이쯤에서 눈치챘는가? <바라모>는 ‘바라모’가 위조지폐라는 ‘구체적이고 환원 불가능한 물질성을 지닌’, ‘다른 돈으로 교환될 수 없고 관념적인 수치로 환원 되지도 않았으며 체제 속에 녹아들지도 못’하는 독과 같은 물질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열두 시간 동안 쓴 기나긴 한 편의 서사시이다. 그 이름은 <아기 예수의 노래>라고 불리 수도 있을 것이다. 아이를 낳은 적 없는데 바라모라는 아들과 함께 사는 바라모의 어머니가 마리아라면, 바라모가 아기 예수가 아니고 그 누구이랴! 이 순간 이 기막힌 상징에서 웃음이 터져 나오지 않을 수 없다. 

바라모는 반세기의 인생에서 단 한 번도 시를 쓴 적이 없었다. 시를 쓸 이유도 없었고 그 이후로 다시는 시를 쓰지 않았다. 그는 위조지폐라는 위험한 물질이 손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그냥 살았다. 파나마에서 태어나 그런 사회에 젖어 한 번도 이사하지(장소를 옮기지) 않은 채 관습적으로 살아갔다. 그러나 이 피할 수 없는 골칫거리를 마주하고 나서야 그런 현실을 발판 삼아 시-문학-예술을 창조한다. 그전까지 그는 단지 살아가기만 했다. 바라모는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늘 궁금했다. 그리고 마침내 이제는 답할 수 있을 것 같다. “사람들은 위조지폐를 어떻게 바꿔야 할지 고민할 필요가 없으므로 그냥 살고 있는 것이었다.”고. 그러나 그는 이 골칫덩이, 문젯거리를 마주하자마자 고민하게 되고 그 고민에서 창작의 재료를 구한 것이다. “저 멍청한 위조지폐들. 그건 아무것도 아니고 실제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끝날 수도 있다. 끊임없이 이어져 있는 세상 현실에서.” 그러나 이 두 장의 위조지폐는 새로운 이질성을 부여하기 위해 바라모 앞에 도래했고 이렇게 시로, 예술로 재탄생한 것이다. 곤경, 고통에서 예술은 꽃을 피우지 않는가. 그 꽃은 검붉은 색이기도 하고, 바라모의 <아기 예수의 탄생> 또는 <바라모>처럼 아방가르드한 무채색이기도 하리라.


바라모는 위조지폐가 주머니에 들어 있다는 것만으로도 경찰을 마주하고서 공포를 느끼고, 거리의 여러 사람-원주민 여자, 정신 나간 노인, 운전기사, 불구 신사, 공고라 집안 여자들, 출판업자 등등을 만나면서 파나마의 숨 막힐 듯한 현실(‘정속 경주’ ‘골프채 밀수’ 등등으로 상징되는)을 맞닥뜨리며 깨닫는다. 그날 바라모가 위조지폐 문제로 깨달았듯이, “악몽을 꾸기 위해 꼭 악몽을 꿀 필요는 없다. 단지 어떤 상황에 놓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것이다. 그런 부패한 현실(파나마 콜론은 해적판 출판의 역사적 중심지라는 아이러니!)에서 <아기 예수의 노래> 또는 <바라모>라는 거대한 한 편의 서사시가 탄생하는 것이다. “환상을 빚어내는 재료는 다름 아닌 사실”이다. 예술의 소재는 현실에서 구한다. 그런데 그 현실을 비틀어 어떻게 창작하는가는 오롯이 창작자의 몫이다. ‘바라모’가 바로 그것을 보여준다.우리의 월급은 통장을 스쳐지나갈 뿐이지만 바라모의 월급-심지어 위조지퍠는 이렇게 시가 되었다. 가지에 꽂힌 젤리가 꽃이 되어 새가 날아와 입에 넣었듯이 당신은 바라모의 위조지폐에서 탄생한 시를 지금 읽은 것이다.



댓글(17) 먼댓글(0) 좋아요(27)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잠자냥 2026-07-15 15:1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글을 바람과 돌이 님에게 바칩니다. 🤣

바람돌이 2026-07-15 18:01   좋아요 1 | URL
바람돌이가 되고싶은 바람과 돌이입니다. 저의 짧은 투정에 온전한 글로 화답하심에 감격 감격했습니다. 아 이건 말만하면 뭐든 들어주는 진짜 모래요정 바람돌이는 잠자냥님인듯하네요. ㅎㅎ

바라모를 아기 예수로 비유하는 것에서는 오 하고 놀랐습니다. 그 생각은 진짜 안해봤거든요. 그렇게 보면 바라모가 쓴 시니까 그의 작품이 아기 예수의 노래도 되겠네요. 저는 잠자냥님의 파나마의 관료주의, 온갖 부패와 상황에 대한 풍자에 덧붙여서 어쩌면 자동서술이라고 하는 아방가르드 문학 자체에 대한 비아냥으로도 읽히더라구요. 작가 자신이 그런 기법으로 소설을 쓰면서 동시에 자신이 쓰고 있는 예술 기법에 대한 자조가 같이 느껴졌달까요? 하여튼 뭘 말할지 알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하루 곱씹고, 이렇게 잠자냥님 글 보고 하니까 진짜 얘기하다보면 온갖 얘기가 다 나올수도 있겠다 싶네요.

그러면 좋은 소설 맞는거군요. ^^

덧붙여 잠자냥님의 리뷰는 오늘 더위에 풀죽은 바람과 돌이에게 몇 줄기 청량한 바람이었습니다. 감사 감사해요. ^^

잠자냥 2026-07-15 21:55   좋아요 1 | URL
아니 바람돌이 님 투정이라더니 읽어 내실 건 다 읽어내셨잖아요! 이 작품은 다른 분이 읽으면 또 다른 해석이 나올 것 같습니다. 좋은 작품😻

페넬로페 2026-07-15 16: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로 저 또한
잠자냥님께 낚일 것 같습니다.
읽어 보고 싶어요 ㅎㅎ

잠자냥 2026-07-15 16:23   좋아요 1 | URL
🤣 100쪽 남짓이니 한번 도전해보시지요!

망고 2026-07-15 16: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재밌겠다...아니아니...전 낚이지 않겠습니다😠
근데 짧은 분량에 깊고 풍성한 의미가 담긴 소설인 것 같아요

잠자냥 2026-07-15 16:58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 이런 작품의 묘미는 다채로운 해석의 여지에 있지 않겠습니까?
한번 낚여보든가~ ㅋㅋㅋㅋ

망고 2026-07-15 17:04   좋아요 1 | URL
파닥파닥🐬

자목련 2026-07-15 17: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낚이지 않으려고 했는데 이미 결제를~~

잠자냥 2026-07-15 21:56   좋아요 0 | URL
월척이요! 🥳

다락방 2026-07-15 1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가끔 소설가들은 천재들인가! 하고 감탄할 때가 있는데, 이 작품을 읽으면 그런 느낌을 받을 것 같습니다. 대체 어떻게 이런 내용과 구성을 생각한 걸까요? 어메이징 합니다!!

잠자냥 2026-07-15 21:57   좋아요 0 | URL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문학을 읽는 게 아니겠습니까! 자 얼른 낚이십시오. 🤣

독서괭 2026-07-15 21: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왕 전 그냥 읽었으면 뭔지 잘 몰랐을 것 같아요. 위조지폐를 갖게 된 순간 창작을 하게 되는 과정이라니.. 신선하고 날카롭네요. 역시 잠자냥님 분석글 탁월..🥰

잠자냥 2026-07-15 22:01   좋아요 0 | URL
빨리 도서관 검색! ㅋㅋㅋㅋㅋㅋㅋ

독서괭 2026-07-16 05:49   좋아요 1 | URL
읎네유🤣

건수하 2026-07-16 0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잠자냥님의 분석은 재밌지만 저도 그냥 읽었으면 뭔 소리야 했을듯... @_@

잠자냥 2026-07-16 10:29   좋아요 1 | URL
원 텍스트를 안 읽었는데도 분석이 재미나다니! ㅋㅋ 나 천잰가….🤣
 
데미지
조세핀 하트 지음, 공경희 옮김 / 녹색광선 / 2026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랑은 이해(理解)를 불허한다 
이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두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마음의 파동, 이런 것을 당사자가 아닌 이상 어떻게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 때문에 사랑하는 두 사람이 아닌 타자의 이해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어떻게 그런 사람을 사랑할 수 있어? 어떻게 그런 관계에서 사랑이 싹틀 수 있어? 파국이 뻔한데 어떻게 거기서 벗어나지 못해?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어… 이런 말들은 그래서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 이해할 수 없는 관계에 놓인 당사자들은 타인의 이해를 구하지 않을뿐더러 도리어 타자들이 이해할 수 없음, 그 금기 또는 금지나 마찬가지인 상황, 상태, 관계에서 더욱 불꽃이 타오르기 마련이다. 금기가 열정을 불러온다. <데미지>의 ‘나’와 ‘안나’의 관계가 바로 그 이해할 수 없음의 사랑이다. 그러나 그들은 타인들의 이해를 바라지 않는다. 애초부터 그 따위 것에는 신경 쓰지 않는다. 신경 쓸 겨를조차 없다.

타자들은 왜 그들을 이해할 수 없는가? ‘나’는 모든 것을 가진 남자이다. 어느덧 쉰이라는 나이에 이른 그는 인생의 정점에 있다. 의사가 되었고, 부유한 집안의 아름다운 아내를 만나 결혼했고, 잘생기고 똑똑한 아들, 예쁘고 똑똑한 딸은 번듯하게 성장했다, 그는 의사라는 신분, 아내 집안의 도움과 조력으로 정계에 입문, 어쩐지 욕심이 없는 듯한(정치에서 사적으로 바라는 게 없는 듯한) 무심한 태도로 사람들이 마음을 사로잡아 승승장구, 차기 영국 총리 후보로 거론될 정도로 성공가도를 달린다. 그는 그렇게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안정적이고 안온한 날들을 보낸다. 그 여자 ‘안나 바턴’을 만나기 전까지는 모든 게 완벽했다. 아니, 실은 무언가 공허하고 때로는 헛헛하지만 완벽하다고 생각하며 그렇게 최면을 걸며 살아왔다. 

그런데 그 여자, ‘안나’가 나타난 것이다. 그냥 가벼운 바람인가?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하필이면 안나는 아들 ‘마틴’의 연인. 그것도 바람둥이이던 아들이 결혼을 꿈꿀 정도로 푹 빠진 연인이다. 어떻게 아들의 연인을 욕망할 수 있느냐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노라고, 그저 당신은 노망난 늙은이라고 정신 차리라고 질책하는 것은, 어떻게 그런 사랑이 가능하냐고,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단지 욕정이 아니냐고 되묻는 것은 그에게는 이미 소용없는 일이다. 들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들려도 외면할 것이기 때문이다. 젊고 잘생긴 데다가 심지어 자신보다 8살이나 어린 남자로부터 열렬한 사랑을 받는 여자가 연인의 아버지로부터 욕망이 들끓는 시선을, 추파를 받는다니, 너무나 고통스러울 것이다, 불쾌할 것이다, 오 불쌍한 안나, 가련한 안나...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신은 사랑을, 욕망을 알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랑의 일면만을 아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랑은 이기적이다
안나 또한 그에게, 그러니까 연인의 아버지인 그에게 반하기 때문이다. 아니, 이 표현은 틀렸다. 그를 알아보고, 그가 자신과 동류의 인간임을 알아보고 욕망을 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안나가 마틴을 사랑하지 않느냐 하면, 또 그렇지도 않다. 안나는 마틴은 마틴 대로, 연인의 아버지인 그는 그대로 욕망한다. 아니, 이 표현도 틀렸다. 그들이 자신을 욕망하도록, 갈망하도록 간절히 원하고 또 원하도록 내버려둔다. 쉽게 손에 잡히지 않음으로써 부추긴다. 이 여자는 도대체 왜 그러는 것일까? 팜파탈? 단순히 팜파탈이라고 하기엔 그녀의 내면이 복잡하다. 그래서 이 관계, 삼각관계라 부르기도 애매한 이 ‘이해하기’ 어려운 사랑의 조합은 그렇게 유지된다. 안나와 마틴은 표면적으로는 남부러울 것 없는 연인 사이로, 약혼하고 조만간 결혼할 사이로... 그리고 그 이면에서는 ‘나’와 안나가 은밀하게 내내 서로를 갈망하는 사이로. 물론 마틴은 꿈에도 알지 못한다. 아버지와 자신의 연인이 그렇게 서로의 몸을 탐하는 숨겨진 연인 사이라는 것을.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이 뻔뻔한 것들! 이기적인 것들! 마틴에게 상처 줄 것을 뻔히 알면서 예비 시아버지와 예비 며느리가 어떻게 그런 사이가 될 수 있지? 정말 이기적이다. 정말 추잡하다! 짐승만도 못한 것들! 쯧쯧! 비난과 손가락질이 난무하리라. 그러나 사랑은 이기적이다. 심지어 자신이 사랑하는 그 상대에게조차 이기적이다. 사랑은 언제나 내 욕망이 먼저이기 때문이다. 너의 욕망, 너의 갈망부터 채워주고자 하는 사랑이 이 세상에 얼마나 존재할까? 과연 있기는 할까? ‘나’는 안나를 처음 보는 순간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들어 이제껏 쌓아올린 그 모든 것을 뒤로 한 채 오직 그녀를 가져야 한다는 생각만으로 안나를 찾는다. 이기적 욕망이 먼저이다. 안나는 또 어떠한가? 마틴에게 감당할 수 없는 상처를 줄 것임을 알면서도 ‘나’ 그러니까 연인의 아버지를 받아들인다. 그와의 정기적인 밀회를 약속하기까지 한다. 마틴이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는 것을 십분 활용한다. 안나에게는 그래서 ‘마틴’, ‘나’ 말고도 또 다른 남자들이 존재한다. 언제나 나의 욕망이 먼저이다. 사랑은 이토록 이기적이다. 

마틴은 이 사랑의 게임에서 피해자이기만 한가? 마틴은 안나에게 섣불리 질문하지 않는다. 비밀 많은 그녀의 삶이 궁금하면서도 묻지 않는다. 판도라의 상자를 열면 그녀를 잃어버리고 말 것임을 알기에 침묵한다. 그토록 수많은 금발의 여자들을 만나고 버리고 만나고 버리고를 반복한 끝에 이제 이 검은 머리, 연상의 여인에게 푹 빠진 마틴은 그녀를 잃지 않으려고 묻지 않는 편을, 알면서도 눈감기를 선택한다. 이것은 과연 이타적인 행위인가? 이 또한 자신의 갈망을 채우기 위한 색다른 선택, 이기적 욕망이 아닌가? ‘나’, 안나, 마틴 이 세 사람 외에도 <데미지>에 등장하는 대다수 인물들은 결국 사랑 앞에서 자신이 먼저이다. 자기의 욕망이 먼저이다. 피터, 애스턴… 네가 없으면 나는 죽어, 너를 보지 못하면 나는 죽어이지, 너를 살리기 위해 내가 너를 떠나거나 너로부터 벗어나는 게 아니다. 그래서 ‘나’는 자신의 갈망이, 욕망이 아들을 파국으로, 자기를 파국으로, 가정을 파국으로 몰아갈 것을 알면서도 멈추지 않는다. 멈추지 못한다. 왜냐하면 안나와 함께 있을 때 처음으로 죽은 줄로만 알았던 삶이 살아 있음을 경험하기 때문에.
 
사랑은 상처이다 
그러나 결국 이 이해할 수 없는 사랑은 타자의 이해를 필요로 하지 않음에도 세상은 자신을 이해시키도록 해명을 요구한다. 설명할 수 없음, 설명이 되지 않음, 설명으로도 받아들일 수 없음. 그런 관계는 끝내 세상에서 받아들이지 못한다.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 한데 왜 사랑하는 두 당사자가 아닌 세상이 그 사랑을 받아들여야 하는가? 그러나 세상은 그렇다 치고 무시한다 치고. 이 두 사람과 얽힌 관계에 놓인 자들은 그 두 연인의 욕망의 파동에 휩싸일 수밖에 없다. 마틴, ‘나’의 아내 ‘잉그리드’, 딸 ‘샐리’… 그의 욕망은 그와 안나에게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의 가족 구성원에게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영향은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씻을 수 없는 고통과 상처를 안겨줄 것이다. 그런 ‘나’는 행복하기만 할까? 불행한 가운데서도, 불행해질 것을 알면서도 행복할 수는 있을 것이다. 안나와 함께하는 순간에는. 그 행복이 피투성이 행복임을 알면서도 피범벅이 되기를 거부하지 않을 것이다. 안나와 함께하는 순간에는. 피 흘리면서도 생이 눈앞에서 생동하기 때문에….

그러나 안나는 그하고만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어떠한가? 안나와의 결혼 생활을 꿈꾸는 사람인가? 가능한 사람인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 그래서 안나는 그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본 것이리라. 서로 동류임을 알아본 것이리라. 그러나 이렇게 자기의 욕망에 충실한 자들은 타자들에게 상처를 줄 수밖에 없다. 타인뿐만이 아니라 피투성이 사랑에 자기를 몰고 감으로써 자기 또한 종국에는 상처받고 만다. 그래서 사랑은 상처이다. 내가 피를 흘리고 너 또한 피를 흘리게 하는…. “모든 것을 바꾸는 찰나의 경험, 교통사고, 열어보지 말아야 했을 편지, 가슴이나 사타구니 안의 멍울, 눈을 멀게 하는 플래시 불빛.”(p.46)

거기 상처받은 짐승은 고통에 부르짖으며 눈물을 흘린다. 죽음과도 같은 삶이 형벌처럼 주어진다. 아들을 잃은 눈물, 가족을 잃은 눈물, 안나를 잃은 눈물을 내내 흘리리라...... 그러나 그런 중에도 가족을, 아들을 잃은 슬픔보다 안나를 잃어버린 슬픔과 고통 때문에 흘리는 눈물이 더 농도 짙으리라. 멈췄어야 한다고, 다 잃기 전에 그만두었어야 한다고, 그토록 많은 걸 가진 자가, 그런 욕망에 모든 걸 걸다니 어리석다고, 이해할 수 없노라고, 파국으로 치닫기 전에 당신의 삶을 통제했어야 한다고 타자들은, 세상은 혀를 끌끌 찰지도 모른다. 그러나 통제할 수 있었다면, 떠날지 머물지 고뇌 없이 선택할 수 있었다면 그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을 것이다. 나는 이런 갈망을 결코 품어본 적이 없노라 그 누가 자신할 수 있을까. <데미지>는 사랑의 이런 속성들을 서늘하게 보여준다. 



댓글(20)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독서괭 2026-06-05 15: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굉장히 매력적인 작품인가 봅니다. 사랑은 이기적이다… 하긴 그렇죠.
아니… 그래도 아들의 연인은 너무했다…..

잠자냥 2026-06-05 15:30   좋아요 1 | URL
ㅋㅋㅋ 이거 영화 안 봤죠?
영화 보면 욕 나옴 ㅋㅋㅋㅋㅋㅋ (‘나‘가 제러미 아이언스라 용서가 좀 되긴 하지만....)
근데 원작은 그래도 심리 묘사에 치중해서 그런지 그럴 수도 있겠다 싶음.

왜 안 자? 자라 괭.

독서괭 2026-06-05 15:38   좋아요 0 | URL
영화 안 봤어요~~ 하.. 이것도 도서관에 신청해야 할까요?
잡니다 Zzz

잠자냥 2026-06-05 16:15   좋아요 0 | URL
원서요? 도서관에 있을 거 같은데...?
야한 부분 영어로 뭐라 했는지 궁금하다. ㅋㅋㅋㅋㅋㅋㅋㅋ

독서괭 2026-06-06 08:00   좋아요 0 | URL
도서관에 없네요..? 데미지 쳤는데 없어서 굳이 작가 이름 철자 찾아서 찾아봤는데 없어유 dvd만 있군요.

잠자냥 2026-06-06 17:36   좋아요 1 | URL
걍 한국 들어와서 번역본으로 읽어요. 거기서 읽을 책도 쌓였자나….😹

다락방 2026-06-05 2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쉰이요?? 저 영화에서 제레미 아이언스 최소 예순 이상으로 생각하고 봤는데.. 쉰이면 너무 젊은데요?? 충격..
저는 영화에서 제레미 아이언스랑 줄리엣 비노쉬가 앉아서 해괴망측한(?)섹스를 하면서 남자가 여자 옷을 찢던 장면이 강하게 남아있어요. 옷 찢지마.. 라고 부르짖으면서 봤기에..
이 영화 좋아하진 않았는데 이상하게 마지막, 제레미 아이언스가 혼자 지내던 장면이 여운이 깊어요. 그건 그렇고. 제가 아까 헐레벌떡 급박하게 책을 사버렸습니다. 리뷰가 올라올 줄은 모르고.. 😭

잠자냥 2026-06-06 00:33   좋아요 0 | URL
잘했어 🙆🏻‍♀️ ㅋㅋㅋㅋ

네 쉰입니다. 아들이 스물다섯, 안나는 서른 셋.

아니 근데 영화에 그런 장면이 있었어요? ㅋㅋㅋㅋㅋㅋㅋ 아 이 응큼한 여자. 그걸 아직도 기억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난 그런 건 기억 1도 안 남.

잠자냥 2026-06-05 20:46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 근데 락방이가 쉰이 젊다고 느끼는 거 ㅋㅋㅋㅋㅋㅋ 영화 볼 때보다 그 나이에 가까워져서 그런 거 아닌가요? 🤣🤣🤣🤣🤣🤣

망고 2026-06-06 11:27   좋아요 1 | URL
엥 옷을 왜 찢어요 집에 갈때 뭐입고 가라고ㅠㅠ 영화 안 봤는데 계속 안보고 책봐야 겠네요😆

잠자냥 2026-06-06 17:35   좋아요 0 | URL
영화보다는 책 추천합니다요~

다락방 2026-06-06 20:02   좋아요 0 | URL
저도 옷 찢는 거 스트레스 ㅜㅜ 속옷 찢는 것도 스트레스 스트레스 ㅠㅠ

독서괭 2026-06-06 23:36   좋아요 0 | URL
해괴망측한 섹스가 뭔지 궁금 ㅋㅋ

잠자냥 2026-06-07 11:33   좋아요 1 | URL
괭/ 책에서는 그런 장면은 나오지 않아요. 섹스를 여러 차례하긴 하는데…. 그녀를 가져야만 했다/ 가졌다/ 끝났다. 뭐 이런 식임 ㅋㅋㅋ 거기서 dvd 빌려보든가요. 😹

망고 2026-06-07 11:46   좋아요 1 | URL
영화에서 상상의 나래를 활짝 펼쳤나 봐요ㅋㅋㅋㅋ사실 해괴망측한거 궁금한데🙄

다락방 2026-06-07 16:15   좋아요 1 | URL
그러니까 해괴망측.. 이라기 보다는.. 흠.. 너무 욕망이 들끓어서... 아 모르겠다~ 직접 보고 판단하십쇼. 그런데 저는 책이 훨씬 좋을것 같다는 느낌적 느낌입니다. 얼른 읽어봐야지~

구단씨 2026-06-08 16: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출간 소식 듣자마자 장바구니에 넣었다가, 잠자냥님 리뷰 보고 바로 결제합니다. 땡스투~
어렸을 적에 이 영화 보고 충격 받았던 기억이 나요.
그때는 그저 이런 관계(애인의 아버지, 아들의 연인)의 적나라한 몸짓이 도대체 뭔가 이런 생각만 했는데,
지금 보면 또 다른 시선의 이야기가 들어올 것 같아요.
제레미 아이언스 멋있었는데, 저도 그 영화 보면서 그가 50세의 나이라고 생각하지는 못했네요. ^^
책 읽으면서 영화도 다시 봐야겠어요.

잠자냥 2026-06-08 16:31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영화보다는 덜 선정적이고! (ㅋㅋㅋㅋ) 영화보다는 더욱 그들의 심리를 잘 이해하게 되실 것 같아요.
저도 예전에 영화 볼 때는 제러미 아이언스 완전 늙은이라고 생각했는데(그래도 멋있긴 한...) ㅋㅋㅋ 쉰이면 젊네 싶은 것이.... 제가 늙은 거겠죠! ㅋㅋㅋㅋㅋㅋ

케이 2026-06-12 11: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제 쉰에 가까워지는 지금 쉰이 되어서도 그렇게 욕망에 들끓수 있는 것도 일종의 재능이라고 봅니다. 그런 면에서는 어느 정도 리스펙트 해요. 저는 이제 남자들 웃통 벗은 모습만 봐도 그 옷 당장 입지 못할까!!!! 라면서 기분이 나빠지는 지경인데요 ㅋㅋㅋㅋㅋ남자들은 여름에도 긴팔 긴바지 입고 목 위, 손만 바깥에 내놓고 다녔으면. ㅜㅜㅜㅜ양말도 다 갖춰신고.

잠자냥 2026-06-12 12:10   좋아요 1 | URL
그 옷 당장 입지 못할까! 케이 님이 말씀하신다! ㅋㅋㅋㅋㅋ
쌍둥이 육아 때문에 피곤에 절으셔서 더 그런 거 아닙니까? ㅋㅋㅋㅋ 하긴 6070 넘어도 사랑에 숨 넘어가는 사람들 보면 정말 대단하긴 합니다.....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