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크맨
애나 번스 지음, 홍한별 옮김 / 창비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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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나 번스의 <밀크맨>을 읽게 된 것은 순전히 트위터 때문이다. 이 책에 대한 리트윗 중 정희진의 찬사, “압도적! 문장의 구조, 내용 모두 완벽하다”라는 구절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에 거의 흥미가 없었음에도 그 한마디 때문에 책을 사서 이틀 만에 끝냈다. 맨 처음, 이 작품에 흥미가 일지 않았던 까닭은 순전히 ‘북아일랜드 분쟁’이라는 단어 때문이었다. <밀크맨>은 출간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도 알라딘에만 리뷰가 10개나 있어서 신기한 마음에 몇 개 펼쳐서 훑어보았다. 많은 이들이 영국과 북아일랜드 사이의 분쟁을 언급하고 있었다.

사실 나는 소재 때문에 주제까지 얼마쯤 예상 가능한 그런 작품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예컨대 전쟁문학이 그렇다. 전쟁을 소재로 나올 수 있는 이야기들은 조금 뻔하지 않은가? 물론 작가가 어떻게 전개하느냐에 따라 분명히 달라지기는 하지만, 그래도 ‘얼마쯤 예상 가능함’ 때문에 흥미가 떨어지기는 한다. 내 기준엔 ‘국가 분쟁’도 거기에 속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이들이 <밀크맨>을 이야기할 때 ‘북아일랜드 분쟁’을 이야기하고 있으니 이 책은 일찌감치 내 흥미를 벗어났었다. 그런데 정희진이 압도적 찬사를 보내고 있었다. 나는 이 사람의 책 고르는 안목을 높이 사는 터라 한번 믿어 보기로 했다.

이 작품은 영국과 아일랜드 사이의 분쟁을 소재로 삼기는 하지만 그것은 거의 중요하지 않다. 아니, ‘북아일랜드 분쟁’에 대한 작품이 아니다. 배경을 이루고는 있지만 꼭 그 역사적 사실을 알지 못해도 읽는 데 전혀 무리가 없다. 심지어 작품 안에서 그 어떤 페이지에서도 북아일랜드니, 영국이니 하는 단어가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옮긴이의 주를 제외하고). 영국 여왕 이름과 왕 이름이 잠깐 등장하기는 하지만 그 또한 중요하지 않다. ‘물 건너 나라’, ‘길 건너 공동체’, ‘물 이쪽’, ‘길 이쪽’ 등등 지역 이름도 명확하지 않다. 그러니 혹시라도 나처럼 이 책이 영국과 아일랜드 사이의 분쟁을 다룬 정치, 역사적 책일 것이라고 지레 짐작하고 이 책을 멀리하는 이가 없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이 책을 몇 쪽 읽은 상태로 완전히 반해버린 까닭은 화자의 ‘목소리’ 때문이다. 이 작품은 열여덟, 10대 여성의 목소리로 이루어진다. 10대 소녀가 화자인 작품이 한 두 개인가? 그게 뭐가 신선하느냐고 되물을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국가와 국가 사이의 분쟁처럼 굵직한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한 작품에서 화자는 보통 그런 분쟁을 겪은 당사자인 ‘남자’이거나 분쟁 주동자가 아니더라도, 그런 분쟁으로 삶이 파괴된, 그런 인생을 살아내는 ‘소년’인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밀크맨>의 화자는 열여덟살 소녀, 이제 갓 성인기로 진입한 여성이다. 그리고 그녀는 분쟁의 한가운데서 테러리스트로서 국가에 대항해 독립운동을 펼치는 멋진(!) 영웅 ‘밀크맨’을 지켜보면서 찬양하거나 칭송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의 추악한 면을 폭로한다. 그리고 그녀는 밀크맨의 폭력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던 ‘피해자’이다.


아무개 아들 아무개가 내 가슴을 총으로 찌르고 고양이 같은 년이라고 하면서 나를 쏘려고 한 날이 밀크맨이 죽은 날이었다. 밀크맨은 국가암살단의 총에 맞아 죽었는데 그가 총을 맞은 일이 나에게는 전혀 유감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 밀크맨이라는 사람과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루머가 쫙 퍼져 있었고 나는 열여덞살이고 그는 마흔한살이었기 때문이다. (<밀크맨>, 9쪽)


<밀크맨>은 ‘스포일러’라고 할 만한 게 딱히 없는 작품이기도 하다. 애초에 이 작품은 처음부터 중요한 모든 내용을 말하고 시작한다. 작품 첫 페이지에서 ‘나’와 ‘밀크맨’의 관계가 밝혀지고, 그가 결국 암살당해 죽는다는 사실까지 드러난다. 그 다음 쪽을 펼쳐보면, 사람들이 열여덟살인 ‘나’와, 마흔한살에, 유부남에다가 이 공동체(그러니까 국가에 반대하는, 테러리스트)의 우두머리와도 같은 밀크맨과 불륜관계였다고, 온 마을 사람들이 말했던 것과는 달리, 밀크맨이 일방적으로 그녀를 스토킹했던 범죄자에 지나지 않았음이 드러난다. 그러니까 이 작품은 열여덟 소녀를 오직 자기가 꽂혔다는 이유만으로 권력의 모든 장점을 십분 활용해 스토킹하는 마흔한살의 위대한(!) 테러리스트이자 국가 반대자들의 영웅 밀크맨의 이야기이다.

책을 읽으며 걸어서 집에 가는 걸 좋아하는 ‘나’는, 그날도 여느 때처럼 책을 읽으면서 집에 가고 있었는데, 밀크맨이 어디선가 나타난다. 마치 오래 전부터 아는 사이처럼, 말을 걸며 자신의 차에 타기를 종용한다. 나는 당연히 거절하는데, 그 뒤로도 밀크맨은 불쑥불쑥 그녀 앞에 나타나 서로 아는 사이인 듯 행동한다. 그는 ‘나’에 대한 모든 것, 직장, 가족, 일을 마치고 저녁에 무얼 하는지, 주말에는 무얼 하는지도 다 아는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이 거머리 같은 놈을 떼어낼 방법을 알지 못한다. 주변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되지 않을까 싶은데, 그녀는 ‘일촉즉발인 사회에서 자랐’고 그곳에서는 ‘신체 폭력이 없는 한, 명백한 언어적 모욕이 가해지지 않는 한, 눈앞에서 조롱당하지 않는 한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보는 게 기본 원칙’이었다. 때문에 ‘일어나지 않은 일에 피해를 당했다’고 할 수도 없었다. 밀크맨은 옆에서 추근거릴 뿐이지 그녀의 몸에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폭력이 아닌가? 게다가 열여덟인 나는 ‘개인공간 침해라는 게 뭔지 몰랐고 누군가가 접근하는 것을 꺼리거나 거부할 권리가 있다는 것’도 알지 못한다.

무엇보다도 밀크맨은 이 공동체, 그러니까 국가에 반대하는 이들이 모여 살기에 국가에서 ‘테러리스트’ 집단으로 단정 지은 이 공동체의 우두머리와도 같은 존재이다. ‘나’가 속한 이 마을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든 테러와 연관이 있다.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어도 가족이 연루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나’만 하더라도 오빠들 중 몇몇이 테러리스트로 국가에 반대하는 활동을 하다 목숨을 잃었다. 그러므로 이 밀크맨, 공동체의 영웅으로 추앙받는 인물이 자신을 스토킹한다고, 협박하고, 통제하려 든다고 그 어디에도 호소할 길은 완전히 막힌 셈이다. 국가 소속 경찰을 찾아가는 방법은 생각할 가치도 없다. 그들은 적이고, 경찰을 찾아 갔다가는 밀고자로 지목되어 사살당하는 일을 초래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경찰은 ‘나’가 속한 공동체를 범죄 집단으로 봤다. 경찰에게 ‘우리는 적이고 테러리스트이고, 민간인 테러리스트이거나 테러리스트 동조자이거나 테러리스트임이 아직 입증되지 않았을지라도 용의자’였다. 그러므로 결국 모든 잘못은 ‘나’의 잘못으로 귀결된다.

더욱이 누가 내 말을 들어준다고 해도 1970년대의 이곳 사람들은 “쫓아다닌다”거나 “스토킹한다”는 말에 익숙지 않아 이해를 잘 하지 못한다. 성적으로 쫓아다니고 성적으로 스토킹한다는 말이 낯설 뿐이다. ‘그 말들은 미국 영화에 나오는, 도로 가장자리로 천천히 차를 몰면서 여자를 물색하는 행동처럼 너무 이국적이고 여기에서는 일어나지 않는 일로 간주’되었다. ‘이곳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아무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무단횡단하고 비슷한 정도의 위반으로 생각하거나 심지어 그보다도 가벼운 일로 취급될’ 것이다. ‘여자와 관련된 일인데다, 정치적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 어디에도 말할 수 없는 나는 밀크맨과 함께 있는 모습이 목격되면서,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 사이에서 ‘밀크맨의 여자’로 일컬어진다. 열여덟살인데도 당돌하게 유부남인 밀크맨과 불륜을 저지른 사람이 되어 있는 것이다. 엄마를 비롯한 가족들까지도 그 소문을 진실이라고 철석같이 믿으며 그녀를 몰아세운다. 심지어 단, 한 사람 진실을 믿어줄 것이라고 생각했던 이마저 그녀의 잘못이라고, 그건 네가 다른 사람들과 달리 이상하게 행동했기 때문이라고 몰아세운다. 그런데, 그 이상한 행동이란 고작 ‘걸으면서 책을 읽는 행동’이다. 걸으면서 책 읽기는 안전하지 않고, 자연스럽지 않고 스스로를 저버리는 일이었으며 아무튼 이 공동체 사람들이 ‘정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비정상의 범주에 속했다. 이곳에서는 말이 왜곡되고 날조되고 과장되기 때문에 결국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으로서 자신을 지키는 방법을 택한다. 그러는 사이 밀크맨의 교묘한 폭력은 서서히 그녀를 갉아먹어 ‘나’의 일상은 무너져가기 시작한다.

<밀크맨>에서 한눈에 보기에도 끔찍한 것은 ‘밀크맨’이라는 권력자, 이데올로기적 대의를 위해 헌신한다는 허울 좋은 명분 아래 한 사람의 삶을 짓밟는 폭력을 아무렇지 않게 자행하는(그러는 주제에 상대가 자신과의 연애를 자랑스러워하고 즐길 것이라고 자부하기까지 하는!) 존재이다. 그러나 그 괴물 같은 존재보다 더 무시무시한 것은 ‘나’가 속한 공통체의 전체주의적인 사고방식, 저열한 호기심과 거기서 비롯된 유언비어, 소문 등이 얼마나 한 개인을 파멸로 이끌어가는 가이다. 이 작품에는 ‘나’를 비롯해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남자’, ‘문제 여성들(페미니스트)’, ‘핵소년’ 과 ‘알약소녀’ 등 이른바 ‘상도를 벗어난 사람들’이라고 불리는 이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이 공동체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정상을 벗어난 이들이다. 그런데 가만 보면 이 정상을 벗어난 이들이 오히려 인간적이며 예민하고 상처받기 쉬운 성정을 지니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거대한 악, 그 전체주의적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나고자 애를 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이 공동체 사람들은 그들이 ‘상도를 벗어난’ 이들이라고 손가락질하며 외면한다.

때문에 <밀크맨>이 보여주는 지옥은 ‘밀크맨’이라는 한 사람이 아니라, 그런 괴물을 용인해주고 ‘대의’를 위해 활동하는 인물이기에 언제나 ‘영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하늘은 파란색만 있을 뿐인데, 파랗지만은 않다고 말하는 이, 그래서 저녁놀을 보고 아름답다고 느끼는 이, 노을 지는 하늘의 다양한 색깔을 볼 줄 아는 이들을 ‘위험한 사람’이라고 여기고, 다름을 비정상으로 간주하고 그러한 이들을 모두 타자로 만들어버리는 파시스트적인 사람들, 그러면서도 소문과 루머와 유언비어를 유포하고 즐기는 사람들, 그 소문을 진실이라고 믿어버리는 사람들. 그런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풍경 그 자체에 있다. 그래서 ‘알약소녀’가 남긴 편지 속 한 구절, “힘든 날만이 아니라 언제나 꾸준한 타인에 대한 공포”라는 말은 <밀크맨>이 전하고자 하는 핵심이 아닐까.

밀크맨은 죽는다. 스토커가 죽었으므로 ‘나’의 고통도 끝나리라 생각하기 쉽지만, 과연 그러할까? 밀크맨이 죽었다고 해서 밀크맨 문제는 끝난 게 아니다. 사람들은 밀크맨의 죽음을 두고 또 다시 소문을 만들어낸다. ‘그들은 도무지 말이 안 되고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도 거리낌 없이 만들어 내고, 그러고는 그 이야기를 철석같이 믿고 살을 붙인다.’ 그런 이들 때문에 ‘나’(이자 '작가')의 ‘정신적 파탄’ ‘정신적 트라우마’는 끝없이 지속되었을 것이며, 그렇기에 이 작품의 목소리, 그 불안하고 위태로운 목소리가 이토록 생생하게 다가온 것이리라. 온갖 유언비어, 가짜 뉴스, 소문을 만들어 내고 그것을 진실인양 믿고 추종하는 이들이 넘쳐나는 바로 지금 이 땅에서 ‘밀크맨’들은 끊임없이 탄생하고 활개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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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9-10-14 14: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너무 좋습니다, 잠자냥 님.
이 리뷰 덕에 저는 이 책을 반드시 읽기로 결심합니다. 좋은 리뷰 감사합니다, 잠자냥님.
제 책장에는 잠자냥 님 리뷰 읽고 산 책들이 쌓여만 가는군요..

(물론 리뷰 읽으면서 좀 스트레스 받기도 했어요. 열여덟과 마흔하나 유부남에서요 ㅠㅠ 책 읽기도 전에 스트레스 대박 ㅠㅠ 물론 그래도 읽을거지만 ㅠㅠㅠ)

잠자냥 2019-10-14 14:39   좋아요 0 | URL
이 책은 꼭 읽으셔야 합니다! 읽는 내내 정말 빡치는 부분이 너무 많은데, 밀크맨은 물론 그 인간들... 하아... 노답 인간들이여. 부들부들... 그래도 작가가(자기 경험담이라네요 ㅠ_ㅠ) 이런 일을 파묻지 않고 글로 세상에 폭로함으로써 분명 큰 의미를 만들어냈다고 생각해요. 그럼 또 독자들은 읽어줘야죠!

다락방 2019-10-14 14:33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옳습니다!
작가의 경험담이라니, 딥빡이 딥딥빡이 되어 다시 후려치네요.
이런 일을 폭로하는 글이라니, 저도 당연히 읽어주겠습니다. 그것이 독자의 의무니까요!! 빠샤!

coolcat329 2019-10-20 1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을 읽고 싶어졌습니다. 어려울거 같아 패스했었는데, 꼭 읽어야 한다니...도전해보겠습니다^^;

잠자냥 2019-10-20 12:21   좋아요 1 | URL
아니에요! 전혀 어렵지 않아요! 아일랜드분쟁 등등 역사적 배경을 전혀 몰라도 아무 문제 없습니다. 리뷰에서는 쓰지 않은 이야기지만, 중간중간 블랙유머도 있고요, 여러 면에서 흥미로운 책입니다. 꼭 읽어보세요~

coolcat329 2019-10-20 12: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그렇군요. 아일랜드 역사를 전혀 몰라서 겁을 냈었는데, 용기가 납니다.감사합니다 ^^
 
상처받은 사람들 1 열린책들 세계문학 129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윤우섭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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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을 읽어서 실망했던 적이 있었던가? 돌이켜보건대 한 번도 없었다. 장편이고 단편을 가리지 않는다. 심지어 미완성 작품이라는 <네또츠까 네즈바노바>를 읽었을 때도 나는 푹 빠졌고 마침내 감탄했다. 그래서 나는 책 읽기가 지루해지거나, 어떤 작품을 읽어도 좀처럼 흥미가 생기지 않을 때, 그러니까 독서라는 행위 자체에 권태기가 찾아오면 그 탈출 방안으로 마치 약을 털어 넣듯이 도스토예프스키 작품을 집어 든다. 이번에는 그래서 책꽂이에 얌전히 꽂혀서 읽어주기를 몇 년 째 기다리던 <상처받은 사람들>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독서 권태기에 도스토예프스키는 명약이다. 이만큼 효과 빠른 약도 없다. <상처받은 사람들> 또한 그의 작품이 늘 그러했듯이 ‘지난해 3월 22일 저녁, 나에게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그날 나는 셋방을 구하려고 온종일 시내를 돌아다녔다’는 첫 문장부터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이 작품을 이끌어가는 나(이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분신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는 이제 막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젊은 소설가이다. 그는 셋방을 구하려고 온종일 시내를 돌아다니다가 이상한 노인을 만난다. 노인은 아조르까라는 개 한 마리를 끌고 도시를 유령처럼 배회한다. 이 기이한 노인의 행적을 소설가적 눈으로 유심히 지켜보던 ‘나’는 어쩌다 보니 아조르까의 죽음과, 그 죽음에 잇따라 비명횡사하는 노인의 죽음까지 목격하게 된다. 이반은 가족도 없이 쓸쓸히 죽은 이 노인의 장례를 치러주게 되고, 그의 유품을 정리하려고 노인이 살던 조그만 방을 방문하게 된다. 그런데 이 방은 이반이 그토록 찾아다니던, 글쓰기에 꼭 알맞은 그런 공간이었고, 그는 이 방을 빌려 기거하게 된다. 그렇게 지내던 중 한 소녀가 이반의 방을 찾아온다. 열세 살쯤 되는 이 소녀는 이반에게 할아버지의 행방을 묻는다. 아이는 죽은 노인 ‘스미트’의 손녀였던 것이다. 고아나 다름없는 이 불쌍한 소녀의 사정을 알게 된 이반은 소녀와 불편하고도 기이한 동거를 한동안 시작하게 된다.

이 작품의 또 하나의 이야기는 이반이 사랑하는 ‘나따샤’ 일가와 관련 있다. 부모를 일찍 여읜 이반은 나따샤의 부모인 ‘이흐메네프’와 ‘안나’ 이 노부부가 아들처럼 키웠다. 그래서 나따샤와 이반의 약혼, 그리고 결혼은 어떻게 보면 예정된 순수와도 같았다. 그러나 이반에게는 몹시 안타까운 일이지만 나따샤에게는 따로 사랑하는 남자가 생겼으니, 이흐메네프가 영지 관리인으로 있었던 ‘발꼬프스끼 공작’의 외아들, ‘알료사’가 그 대상이다. 공작 아들과 그 영지 관리인 딸의 사랑이니, 아무래도 신분 차이 때문에 그 사랑의 결실을 맺기 어렵지 않을까 싶은데, 더 큰 원인은 다른 데 있다. 발꼬프스끼 공작과 이흐메네프는 한때 더없이 진솔한 우정을 나눌 정도로 사이가 좋았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공작은 어느 날 갑자기 이흐메네프에게 횡령 혐의를 씌워 거액의 손해 배상을 청구하고 영지 관리인 자리에서도 쫓아낸다. 때문에 공작 집안과 나따샤 집안은 신분 차이를 떠나 원수와도 같은 사이가 된 것이다. 그런데도 나따샤는 알료사를 사랑하기를 멈추지 못하고, 마침내 그와 함께 야반도주하기에 이른다. 이 모든 광경을 묵묵히 지켜보고, 때로는 이흐메네프와 안나 부부의 고통스러운 이야기까지 들어줘야만 하는 이반.

그런데 이 두 개의 이야기, 즉 죽은 스미트 노인과 그의 손녀 딸 ‘엘레나’, 그리고 나따샤 집안과 알료사와 공작 집안의 이야기는 서로 어떤 관련이 있을까. 사실 나는 이 책을 보는 내내 이 두 개의 이야기가 그다지 관련이 없는 게 아닐까, 하면서 읽어가다가 어느 순간 도스토예프스키의 큰 그림을 알아차리고는 놀라고 말았다(그래서 이 책의 1권, 2권 맨 앞에 나오는 ‘등장인물 소개’는 절대로 읽지 말아야 한다! 나는 대부분 등장인물 소개에 스포일러가 있음을 알고 있어서 인물 소개는 그냥 넘어가는 편인데, 아니나, 다를까 이 두 개의 사건이 서로 어떤 관련이 있는지, 알게 된 뒤 등장인물 소개를 떡하니 펼쳐보니 어마어마한 스포일러를 그냥 대놓고 써놓았더라. 그러므로 이 책을 읽으려는 사람은 부디 등장인물 소개는 그냥 건너뛰시라!). 아무튼 이 글조차도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므로 여기서 줄거리 이야기는 그만 두기로 한다.

<상처받은 사람들>에는 온갖 이유로 ‘상처’받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어디 한 사람 상처받지 않은 이가 없다. 물론 그들은 때로는 그 존재 자체로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 이 모든 사건의 묵묵하고 담담한 관찰자이자 서술자인 ‘나’, ‘이반’만 보더라도 그렇다. 그는 일찌감치 자신이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는 여인인 나따샤로부터 상처받는다. 나따샤는 물론 그녀 스스로 의도하지 않았지만 이반이 아닌, 누군가 다른 사람, 즉 알료사를 사랑함으로써 이반의 마음에 생채기를 낸다. 아니 생채기처럼 작은 상처일 리가 없다. 그저 이반이 그 고통을 표현하지 않기에 그렇게 보일 뿐이다. 그럼에도 나따샤는 다른 남자를 사랑해서 생기는 온갖 고통과 번민, 고뇌를 이반에게 털어놓는다. 이 또한 이반에게는 참으로 못할 짓이다. 그렇다고 나따샤가 오롯이 행복할까? 나따샤는 그녀대로 이 작품에 등장하는 많은 불행한 인물 중 한 사람이다. 어린아이(?) 같은 천진난만함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 줄도 모르고 나따샤를 상처투성이로 만드는 사람은 다름 아닌 알료사이다.

좋게 말해 어린아이 같은 천진난만함(!)이지 이 인간은 정말 보는 내내 얼마나 한숨이 나오던지. 아버지인 발꼬프스끼 공작에게 가스라이팅(심리적 조종)을 당해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 진실로 사랑하는 여자가 누구인지도 분간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휘둘리는 이 유약한 인간은 나따샤는 물론 때로는 ‘까쨔’에게도 상처를 준다. 그러면서도 내내 헛된 약속을 함으로써 나따샤를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쉽사리 빠져나오지 못하게 만든다. 그렇다고 해서 알료사가 완전히 행복한 인간인가 하면, 그렇지도 못하다. 이 순진무구한 인간 또한 아버지 발꼬프스키에 휘둘리면서 무엇 하나 자기 의지대로 실행하면서 살아가지 못한다. 아버지의 비열한 모습을 알면서도 자신의 아버지이기에 그렇지 않으리라 믿고 싶어 하고, 아버지가 비열한 인간이 아님을 확인받고 싶어 한다. 그런 면에서 알료사 또한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자기의 핏줄, 가족으로부터 내내 상처받는 인물이다.  


나따샤 또한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알료사와 달아남으로써 아버지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지만, 아버지인 이흐메네프 또한 그런 딸을 사랑하면서도 상처받은 자존심으로 말미암아 딸을 도저히 용서하지 못해서 또 다시 상처를 주는 악순환을 거듭한다. 이처럼 가장 가까운 관계인 가족 사이에서 서로가 서로의 이기적 욕망에서 비롯된 자기만이 아집 때문에 상처를 주고받는데, 이는 죽은 노인 스미트와 그의 손녀 엘레나와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결국 이 복잡한 인물들 속에서 유일하게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악덕을 부리면서도 상처받지 않는 인물은 공작이 유일하다. 그는 인간의 덕행을 조롱하는 인물로 ‘모든 인간 덕행의 토대 위에 한없는 이기심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가 보기에 ‘어떤 행위가 선행일수록, 거기에는 더 큰 이기심이 깃들어’있다. 때문에 그는 ‘자신을 사랑하라’를 삶의 모토로 삼고 이기적 욕망을 채우는 데 온 생을 바친다. 그는 이상을 갖고 있지도 않으며 그것을 결코 동경한 적도 없다. 이상 없이도 세상을 유쾌하고 만족스럽게 살 수 있다고 믿으며 이상 따위보다는 ‘영향력 있는 위치, 관등, 호텔, 판돈이 큰 카드놀이, 그 무엇보다도 여자’를 가장 좋아한다고 거리낌 없이 말한다. 때문에 그는 애초부터 덕행을 지닌 인물인 이흐메네프와 그의 딸 나따샤의 너그러움 등을 조롱하기 위해 오히려 더 악덕을 행하는 자는 아닐까 여겨지기도 한다. 나따샤를 비롯해 이흐메네프는 덕을 지니고 그 선함을 실행하는 인물로서 공작 자신에게는 없는 그 무언가를 지니고 있다. 공작은 이런 인물들을 모욕하고 조롱하고 상처 줌으로써, 그들의 덕행을 짓밟는 데서 쾌감을 얻는다. 단지 자기의 욕망에 충실할 뿐만 아니라 덕을 조롱하고 비웃는 악한, 그가 바로 공작이다.

그는 이흐메데프와의 관계에서 자기들 소송과 다툼의 본질은 ‘당시 서로 주고받은 모욕, 한마디로 서로 상처받은 자존심’ 있다고 말한다. 1만 루블 따위는 그에게는 시시한 돈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그가 이흐메데프로부터 ‘자존심’에 상처를 받은 까닭은, 그에게 없는 덕을 한낱 영지 관리인인, 자기보다 열등한 인물이 지니고 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그런데 이 발꼬프스키 공작은 스스로 자신이 진정한 ‘러시아적 존재이자 애국자’라고 말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인간의 덕행과 선함을 비웃고 조롱하는, 그러면서도 일말의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는커녕 끝까지 승승장구하는 이 러시아적 인물, 공작을 전형으로 삼아 19세기 중엽 뻬쩨르부르그 상류층의 이중적 삶과 그들로 말미암아 고통스러운 삶을 살 수밖에 없었던 하층민의 비극적인 삶을 날카롭게 그리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은 죽은 노인 스미트의 손녀인 엘레나라는 인물의 창조가 아닐까. 이 어린 소녀의 때로는 병적으로 보일 정도의 특이한 성격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여러 작품에서 엿볼 수 있는 신경증과 강박증에 시달리는 인물 유형 중 하나이다. 그런데 이 소녀가 어리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강박과도 같은 자기혐오, 자기비하, 결핍에서 비롯된 두려움, 불안, 도덕적 결벽증 등등이 모두 자기 자신의 잘못이 아닌 타인들의 어긋난 관계, 그로 인해 싹튼 ‘상처’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에서 가장 가련하고도 안타까운 인물이다. 엘레나는 성서 속에서 ‘우리 모두는 우리의 적을 용서해야 한다’는 구절을 읽었노라 고백한다. 그러나 성서에 쓰여 있는 것과 달리 현실 속 인간관계에서 용서란 얼마나 덧없는가. 진정한 용서가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그런데 많은 문학 작품에서 온갖 인물들의 갈등과 우여곡절 끝에 서로 용서하고 화해한다. 그러면서 대단원을 장식한다. 그러나 정말 이 현실에서도 진실로 상처받은 사람들 사이에서 진정한 용서가 가능할까? 이 작품에서는 “배부른 자는 배고픈 자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뿐만 아니라, 거기에 덧붙여 “배고픈 자도 배고픈 자를 언제나 이해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인간 개개인의 상처의 깊이는 제아무리 상처받은 영혼이라도 또 다른 상처받은 이의 영혼을 달래주기에는 무리가 있다. 언제나 이해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혼 깊숙이 상처받은 사람에게 용서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상처받은 사람들>은 여실히 보여준다.

<상처받은 사람들> 2권에서는 이 가련한 소녀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펼쳐지는데, 1권 끝 부분에서 2권의 내용을 암시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폭풍 같은 글 솜씨에는 정말 찬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글은 <상처받은 사람들>을 소개하는 글로 가장 알맞을 것 같아 스포일러가 될 만한 부분은 삭제하고 옮겨본다. 



나는 이 무서운 이야기를 절대로 잊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주된 이야기는 훨씬 후에 다시 이어질 것이다. 그것은 무서운 이야기다. (.....)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를 벌써 이해하며, 평탄하고 걱정 없는 삶을 이어 가는 사람들은 도달하지 못하는 성숙도를 보이는 손녀 사이의 비밀스럽고 거의 이해 불가능한 관계에 대한 기이한 이야기이다. 이것은 우울한 이야기이다. 아주 빈번히, 눈에 띄지 않게, 거의 비밀스럽게 빼쩨르부르그의 무거운 하늘 아래서, 거대한 도시의 어둡고 감추어진 골목길에서, 어지럽게 소용돌이치는 삶, 둔중한 이기주의, 서로 충돌하는 이해관계, 음울한 방종, 비밀스러운 범죄의 한가운데서, 이 모든 무의미하고 비정상적인 삼으로 가득 찬 끔찍한 지옥 한가운데서 벌어지는 음울하고 괴로운 이야기 중의 하나인 것이다..... 하지만 그 이야기는 계속된다. (1권, 290~2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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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9-10-04 15: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읽을 때는 인물소개를 반드시!! 건너뛰겠습니다!!

잠자냥 2019-10-04 15:56   좋아요 0 | URL
네 절대 읽지 마세요~~~!!
 
시핑 뉴스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9
애니 프루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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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실, 끈 따위를 잡아매어 마디를 이룬 것, ‘매듭’- 매듭은 어떻게 묶느냐에 따라 한 목숨을 구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사람을 옭아매기도 한다. 관계도 그렇다. 그래서 매듭은 종종 인간관계에 비유되고는 한다. 애니 프루의 <시핑 뉴스>는 매 장마다 ‘애슐리 매듭서’라는 책에서 선별한 온갖 매듭짓기가 소개된다. 그리고 어쩌면 당연하게도 그 매듭들은 각 장에서 펼쳐지는 인간관계 또는 사건과 관련을 이루거나 무언가를 상징한다.

추석이 끝난 뒤 출근하는 아침, 문득 그 온갖 매듭이 떠올랐다. <시핑 뉴스>에 소개된, ‘애슐리 매듭서’의 밧줄 묶는 방식은 대부분이 처음 보는 것들로, 그 종류도 어마어마해서 무척 신기했다. 매듭 묶는 방식이 이토록 많다니, 놀라움 그 자체였다. 이 책 시작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보통 크기의 매듭인 교차점 여덟 개짜리 매듭의 경우 밧줄을 256가지 방식으로 ‘위와 아래’로 배치할 수 있으며 이 ‘위와 아래’ 배치 방식 중 하나만 달라져도 전혀 다른 매듭이 되거나 아예 매듭이 만들어지지 않을 수 있다.”

밧줄을 묶는 방식만 256가지이다. 하물며 밧줄도 이럴진대. 인간의 삶의 방식은 얼마나 다양하겠는가. 그런데도 이 땅의 많은 이들은 하나의 삶의 방식을 고집하고 강요한다. ‘위와 아래’ 배치 방식 중 하나만 달라져도 전혀 다른 매듭이 되거나 아예 매듭이 만들어지지 않을 수 있음을 인정하지 못한다. 남과 똑같은 방식의 매듭을 짓지 않으면 실패한 인생, 루저, 머저리가 되고 만다. 추석이나 설과 같은 명절은 다른 사람도 아닌 ‘가족끼리’ 그런 상처를 주고받으라고 만들어진 악몽 같은 날은 아닐까.

연휴 기간에 이틀 동안 집에 다녀왔다. 우리 집은 내 인생에 이래라 저래라 하는 분위기가 아니라서 가족끼리 내기 모노폴리 게임을 하면서 신나게 먹고 마시고 웃고 떠들다 왔다. 게임에 이겨서 돈도 땄다. 그런데 애인은 그런 모양이 아닌지, 가족, 그것도 한 단계 건넌 친척들이 던진 무례한 말들에 잔뜩 상처받고 돌아와 며칠을 앓는다. 작년처럼 훌쩍 떠나버릴걸, 괜히 가족 생각해서 집에 갔다가 병만 얻어온 셈이다. 그런데 그런 말들을 쏟아낸 장본인들은 도무지 뭐가 잘못인지도 모르겠지. 모노폴리로 딴 돈이라고 몇 만원 주면서 애교 아닌 애교를 부려도 웃던 얼굴이 금방 어두워진다. 어차피 한 다리 건넌 친척이 한 말이니까 잊어버리라고 하지만, 그런 말을 전해들은 나도 마음이 편하지는 않다. 본인은 오죽할까. 남과 다른 매듭을 짓고 있다고 해서 인생 실패자 취급을 하는 그 어른이란 이들에게 욕을 퍼부어주고 싶어지기도 한다..... 그런데 어쨌든 애인의 가족이지 않은가.

<시핑 뉴스>의 주인공 ‘코일’도 가만 보면 온갖 상처는 가족으로부터 받는다. 어릴 때부터 자라는 동안 내내 가족에게 멸시와 조롱, 놀림을 받고 세상 둘도 없는 한심한 인간 취급을 당한다. 물을 무서워하는데도 코일의 아버지는 죽을힘을 다해 매달리는 그를 수영장으로, 개울로, 호수로, 바다로 던져 넣었다. 그래야만 다른 사람과 똑같은 삶을 살 수 있기라도 하듯이. 그런데, 개헤엄조차 배우는 데 실패한 아들의 모습에서 아버지는 마치 악성 세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듯 다른 실패들이 증식하는 것을 보게 된다. 코일은 말을 똑똑히 하는 것도 실패, 바른 자세로 앉는 것도 실패, 아침에 일어나는 것도 실패, 태도도 실패, 야망도 능력도 실패, 사실상 모든 것에서 실패했고, 그것은 아버지 자신의 실패로 받아들여진다. 많은 부모들이 자식이 남과 조금 다른 삶을 살면 그것을 자기 자신의 실패로 받아들이듯 말이다. 커서는 또 어떤가. 사랑에 빠져 결혼한 아내는 늘 외도를 일삼으며 이 세상 온갖 고통은 있는 대로 코일에게 던져주고는 그를 떠난다. 심지어 이 여자는 데리고 간 어린 딸들까지 누군가에게 팔아넘겨 버린다. 설상가상. 병든 부모, 코일에게 자존감이라고는 심어줄 생각조차 못했던 그 부모는 동반자살로 삶을 마감한다. 부모가 그토록 아끼던 형은 장례식에 참석도 하지 않는다. 끝까지 참 가혹하다. 다행스럽게도 코일은 딸들을 되찾지만 이 실패한 무능력자 코일이 어린 딸들과 함께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막막하기만 하다. 이때 한 사람이 등장한다. 부모의 장례식 때문에 멀리서 나타난 코일의 고모 ‘애그니스’- 애그니스는 코일에게 제안한다. 이 상처뿐인 도시를 떠나 코일 집안의 고향이나 마찬가지인 뉴펀들랜드로 돌아가지 않겠느냐고. 가족 때문에 만신창이가 된 그에게 또 다른 가족이 나타나 도움의 손길을 내민 것이다. 코일은 이 손길로 구원받을 수 있을까?

여기까지의 이야기는 이 책의 시작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 뒤로는 뉴펀들랜드에서의 새로운(?) 삶이 펼쳐진다. 물을 극도로 싫어하는 그에게 바다와 배, 거친 날씨뿐인 이 지역은 그리 살기 좋은 곳이 되지 못할 게 뻔하다. 그런데도 그는 이전까지의 삶과 다른 방식에 적응하면서 서서히 변화해간다. 자존감이라고는 눈 씻고도 찾을 수 없어던 그, 가족으로부터 ‘뚱땡이, 코찔찔이, 못난 돼지 새끼, 흑멧돼지, 바보 멍청이, 악취 폭탄, 방귀 뚱보, 기름덩어리’와 같은 모욕적인 말을 줄곧 듣고 살던 그에게도 새 인연이 찾아오고 서른여섯 해 사는 동안 처음으로 칭찬받는 일도 일어난다. 어떻게 이 모든 일이 가능하냐고? 뉴펀들랜드의 척박한 자연환경과 싸우며 하루하루 살아가는 그곳 주민들에게는 타인의 삶을 쉽사리 재단하는 일이 드물다.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내기도 벅차 보이기 때문이다. 심지가 단단한 ‘애그니스’도 한몫 거든다. 코일은 그곳에서 자기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는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서서히 상처를 회복하고 자존감까지 느끼면서 새로운 기쁨을 알게 된다. 그에 비하면 뉴펀들랜드에서 마주하게 된 가족, 아니 코일 집안의 오랜 비밀은 또 한 번 코일을 몸서리치게 만든다. 애그니스와 그의 어린 딸들을 제외하면 가족은 코일의 삶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그래서 잘라버려 마땅한 ‘매듭’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코일이 새 삶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도 어떤 의미로는 과거의 썩은 밧줄들, 그러니까 부모나 아내, 형과의 인연이 코일 그 자신은 의도하지 않았다하더라도 끊어졌기 때문은 아닐까?



그 옛날 상사병에 걸린 뱃사람은 낚싯줄로 느슨하게 ‘진정한 연인 매듭’을 만들어 사랑하는 이에게 보냈다. 매듭이 느슨한 상태로 되돌아오면 그 관계는 제자리걸음. 단단하게 묶여서 돌아오면 사랑이 맺어지는 것, 매듭이 뒤집혀서 돌아오면 배를 타고 떠나라는 무언의 충고였다고 한다. (<시핑 뉴스>, 28쪽)


코일에게는 그 자신도 몰랐겠지만 매듭이 뒤집혀서 돌아왔던 것이고, 자기 스스로 떠날 정도의 과감성도, 용기도 없었던 그였지만, 그의 삶을 진심으로 응원하고 걱정해준 다른 사람(애그니스)의 손에 이끌려 배를 타고 떠난 것이다. 살다 보면 많은 이들에게 이런 순간이 다가온다. 그런데 또 많은 이들이 매듭이 뒤집혀서 돌아왔는데도 그 신호를 알아차리지 못하거나, 무시한 채 계속 그 매듭, 그 관계에 매달렸다가 불행을 자초하기도 한다. 추석 때 얼마나 많은 이들이 잘못된 매듭으로 인해 상처받았을까. 가족이라는 매듭은 쉽게 끊을 수도 없다. 끊을 수 없다면 배를 타고 조금 멀리 떠나는 것도 한 방편이다. 그럼에도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얽혀 있는 한, 가끔 상처받는 일을 피할 수는 없으리라. 그러나 계속 서로 꽁꽁 묶여 피를 흘리는 지경이 되는 것보다야 낫지 않을까. 피 흘리고 돌아온 사람에게는 애그니스처럼, 묵묵히 그의 삶을 진심으로 응원하는 것도 하나의 단단한 매듭이 되어주는 일일 것이다. 지금 내가 할 일이 바로 그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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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19-09-16 2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으려 사놓은 책입니다.
ㅎㅎㅎ 제가 스포일러를 지독하게 안 좋아해서 애써 쓰신 패스하는 가슴이 찢어지는 마음도 이해해주시리라 믿습니다. ^^;;

잠자냥 2019-09-16 22:36   좋아요 0 | URL
암요 그럼요- 저도 읽으려는 책은 대부분 거의 책 다 읽고 나서 리뷰 읽는답니다. 재미나게 읽으세요!

유부만두 2019-09-16 2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밌죠~?!!

잠자냥 2019-09-16 22:37   좋아요 1 | URL
네~ 소소한 이야기가 끊임없이 펼쳐지더라고요. 특히 앞부분의 코일에 대한 묘사는 정말 ㅎㅎㅎ

다락방 2019-09-17 0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참... 어제 책 주문했는데 또 사야겠네요... 하아-

잠자냥 2019-09-17 08:40   좋아요 0 | URL
다음에 장바구니에 담으세요! ㅎㅎ

다락방 2019-09-17 08:44   좋아요 0 | URL
저 잠자냥 님 서재에서 보고 장바구니에 담아 산 뒤에 안읽고 쌓아두는 책이 자꾸 늘어난단 말입니다.. ㅠㅠ
잠자냥 님 서재 오지 말까봐요.. ㅠㅠ

잠자냥 2019-09-17 09:51   좋아요 0 | URL
에이 제 서재 오지 않으셔도 사놓고 안 읽는 책 많이 쌓이는 거 다 알고 있는데요 *먼산*

coolcat329 2019-09-17 1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코일에 대한 묘사 읽다가 놀라고 고모랑 뉴펀들랜드로 떠나는 자동차여행부터 지겨워지기 시작하더니 , 기한이 다되서 도서관에 반납했네요. ㅠㅠ

잠자냥 2019-09-17 14:16   좋아요 1 | URL
앞부분에 워낙 스펙타클한 사건이 거의 다 일어나서 뒤로 갈수록 조금 지루해지기는 하죠(앞에 비하면 잔잔한 일상이 펼쳐지니까요). 그런데 뉴펀들랜드에서 만나는 새로운 인물들과 지루해질 때쯤 일어나는 새 사건들이 계속 읽게 만드는 힘이 있더라고요. ㅎㅎ
 
구글은 어떻게 여성을 차별하는가 - 불평등과 혐오를 조장하는 알고리즘 시대의 진실을 말하다
사피야 우모자 노블 지음, 노윤기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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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하루에 몇 시간씩 인터넷을 사용한다. 검색창에 검색어를 입력하는 일도 여러 차례일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검색창이 알려준 결과를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인다. 알고리즘, 데이터, 정보 이런 단어들은 왠지 매우 공평하고 객관적일 것 같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이 질문은 굉장히 어리석어 보이기도 한다. 살아갈수록 이 세상에서 100% 진실이라고 부를 만한 게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하물며 인터넷에서 알려주는 정보가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 가끔 검색창에 어떤 단어를 입력했을 때 나오는 결과를 보고 당황했던 적이 있다. 전혀 그럴 의도가 없었으며, 그럴만한 검색어가 아닌데도 성적 이미지가 와르르 뜰 때가 있다. 회사에서 이런 일을 당한다면 누가 본 것도 아닌데 괜히 더 당황하게 된다.

<구글은 어떻게 여성을 차별하는가>의 저자도 이런 경험을 한 뒤 뒤 이 책을 쓰기에 이르렀다. 저자는 어느 날 ‘흑인 소녀(black girls)’를 검색하다 매우 당황스러운 일을 겪는다. 자신의 딸과 사촌 여자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놀이를 찾기 위해 컴퓨터 앞에 앉아 ‘black girls’를 입력했는데 전혀 뜻밖의 검색 결과가 나타난 것이다. 컴퓨터 화면은 외설적인 포르노그래피로 가득 찬 검색 결과가 가득했다. 게다가 ‘흑인 소녀’에 대한 구글의 첫 번째 검색 결과는 ‘달콤한 흑인 여성 성기닷컴’이라는 성인사이트였다. 그 다음으로는 흑인 여성들을 왜곡된 성적 대상으로 표현한 민망한 게시물들이 잇따라 노출됐다. 저자는 당황해서 컴퓨터를 닫아버린다. 이런 경험이 당신은 없는가?

저자는 의문을 품고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한다. 놀랍게도(?) 흑인 소녀나 라틴계 소녀나, 아시아 소녀나 별반 다를 바 없는 검색 결과가 나타났다. 성차별적인 결과뿐만이 아니라 인종차별적인 결과도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백악관을 검색하니 ‘nigger house’라고 나오지를 않나, 미셸 오바마를 검색하니 연관 검색어에 ‘유인원’이 뜨기도 했다. ‘10대 흑인 3명’이라는 키워드로 구글 이미지 검색해 보면, 구글 검색은 흑인 10대가 마치 범죄의 대명사라도 되는 양 무수히 많은 10대 흑인들의 머그샷(범인을 식별하기 위해 구금 과정에서 촬영하는 얼굴 사진의 은어)을 검색 이미지로 표출했다. ‘유대인Jew’이라는 단어를 검색해본 결과 수많은 반유대주의 웹페이지가 검색 결과에 나타나기도 했다. 이뿐만이 아니라 ‘의사’처럼 전문직 단어를 검색하면 구글 화면은 거의가 백인 남성 이미지로 도배가 된다. 그에 비하면 여성은 인종을 가리지 않고 성적 이미지로 소비될 뿐이었다.


미셸 오바마 연관 검색어에 유인원 등장


부적절한 헤어스타일에는 모두 흑인 여성이 나타나고 '직장인 헤어스타일'에는 백인 여성이 등장함


구글의 참으로 친철한(!) 자동완성 기능



사실 내가 이 책을 읽고 난 뒤 리뷰까지 쓰게 될 줄은 몰랐다. 내가 알고, 나만 조심하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알라딘에서 이 책에 대한 별점 평가가 책의 가치에 비해 유독 낮은 게 마음에 걸렸다. 하나하나 읽어보니 (대부분은 비구매자에 읽지 않은 게 틀림없어 보이는!) 알고리즘이 얼마나 정확한데, 사용자들 검색어를 기반으로 나온 결과인데 구글이 조작할 리가 있느냐, 아무 데나 페미니즘 들이댄다고 비난하는 글 일색이었다. ‘알고리즘’ 같은 남성의 영역을 감히 여성의 ‘편견’으로 판단하느냐, 또는 ‘데이터’처럼 객관적인 자료에 ‘성차별’ 어쩌고를 갖다 붙이느냐 하는 듯한 뉘앙스의 글도 많았다. 위대한 구글은 그럴 리가 없다고, 객관적이라고 옹호한다. 그런 이들의 글을 읽다 보니 리뷰를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달을 가리키면 달을 봐야지, 손가락을 보지 말라고 외치고 싶어졌다.

이 책 저자가 말하고 싶은 바는 구글이 성차별과 인종차별을 하고 있으니 이 검색 엔진을 쓰지 말라는 게 아니다. 디지털 플랫폼을 만든 것은 인간이다. 인간은 오류투성이다. 때문에 그 플랫폼을 실행해서 나타난 결과가 반드시 100% 옳고 진실일 것이라는 믿음을 거두라는 것이다. 앞서 예시했듯이 성차별적이고 유색 인종에 대한 오류와 편견들이 가득한 검색 결과가 나올 수 있음을 ‘알고’, 이 자료가 잘못된 결과일 수도 있음을 ‘의심’하고 사용하라는 말이다. 인간의 오류는 기술로 옮겨갈 수밖에 없다. 인간의 성차별과 인종차별은 기술의 재료이자 도구가 된다. 사람들이 검색한 결과를 기반으로 알고리즘이 생성된다면 성차별적이고 인종차별적인 현실 자체도 고스란히 기술에 투영될 수밖에 없다. 그런 결과가 정보가 되어 ‘객관성’을 지닌 것처럼 흘러 다닌다. 그러나 검색 엔진은 민주주의가 허용한 결함이 많은 도구에 불과하다. 그래서 검색 결과 역시 여성, 소녀, 유색인 여성에 대한 성차별적이고 포르노그래피화된 정보가 가장 ‘인기 있는’ 자료로 표출되는 것이다. 실제로 이 결과는 우리가 마우스를 클릭해 선호도를 제공한 요소들이 반영된 것이다. 성차별과 인종차별을 촉진하는 다양한 장치가 개입된 효과로 볼 수 있다. 기존의 미디어가 보여준 전통적이고 관습적인 왜곡 현상이 대중이 신뢰하는 막강한 알고리즘에 의해 온라인에서 그대로 재현되는 것이다. 모든 정보에는 의도가 있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실제로 고작 며칠 전 우리나라 포털사이트 1위라는 네이버 검색창은 ‘조국 힘내세요’ ‘조국 사퇴하세요’라는 검색어가 1위와 2위에 오르는 기묘한 광경이 벌어졌다. 이 검색어가 객관적인가? 올바른가? 사람들이 ‘조작’한 것이다. 이 사태만 봐도 검색어와 그 결과는 얼마든지 인간의 힘으로 통제 가능함을 알 수 있다.

저자는 일상에 파고든 차별과 편견을 인식하는 대중의 통찰력도 중요하다고 말한다. 정보 기술을 제공하는 회사가 구조적으로 불평등한 고용 정책을 시행하고, 그 회사의 일부 직원이 극우적인 가치관을 함양하고 있다면 어떻게 될까? 그 회사가 바르고 공정한 인터넷 상품을 대중에게 제공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실제로 2017년 구글 국정 조사 과정에서 직원 제임스 다모어는 ‘반다양성’ 선언문을 작성하고 유포해 구글 직원들의 열렬한 지지를 얻은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그런데 이 선언문은 여성이 남성에 비해 열등하고 훌륭한 소프트웨어 엔지니어가 될 자질이 부족하다는 주장을 담고 있었다. 때문에 저자는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가 개발되는 양상을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고 말한다. 미국노동부의 인력 데이터에 따르면 2005년 실리콘밸리의 상위 10개사의 거대 하이테크 컴퍼니 최고 관리자 5,907명 중 흑인과 히스패닉계는 296명이었다. 이는 전체의 20%에 달했던 2000년의 수치에서 오히려 줄어든 결과다. 흑인 여성이 구글에 채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그리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흑인은 구글이나 페이스북 같은 유명한 정보 기술 회사에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채용되지 않는다. 제도권에서 여성과 유색인을 기술 영역의 권력 시스템으로부터 소외시켜온 것이다. 이것이 색맹 이데올로기가 작동해온 실리콘밸리의 모습이다. 그들은 인종차별을 넘어 백인이 아닌 이들의 공헌마저 외면해왔다. 성과주의를 바탕으로 한 기술 산업에서 백인이나 아시아계 남성이 주도권을 쥔 현실은 비주류인 아시아계 미국인의 성공 신화를 통해 정당성을 부여받는다. 여성과 유색인들이 정보커뮤니케이션 기술의 노동 시장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관련 산업 종사 인원마저 줄어드는 상황에서 가장 취약한 위치에 있는 노동자들이 목소리를 내지 못할 때, 초래될 가장 큰 충격은 검색 엔진의 검색 결과로 나타나는 자신들의 왜곡된 모습이다.

구글은 미국의 신자유주의 자본과 사회적 엘리트들의 이해관계를 반영하는 편향된 알고리즘 정보를 유통한다. 자신의 독점적 지위를 이용해 광고 수익과 연관된 정보를 우선 유통한다. 그러나 일반 인터넷 사용자들은 구글이 일종의 공공재처럼 사용되는 인터넷 플랫폼이니 노골적인 상업적 이익을 추구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구글이 생성하는 주류 담론은 편향된 패권주의 이념과 관점을 유포한다. 검색창에 나타난 자동 완성 문구를 이용할 때도, 인터넷 검색 자료를 활용할 때도 그 인식의 프레임은 결코 여성이나 유색인의 생각과 관점을 반영하지 않는다. 때문에 우리는 구글 같은 광고 회사가 믿을 만한 정보를 제공하는지 가려내는 안목을 길러야 한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실제로 구글 같은 독점적 정보 기업은 검색 분야를 막론하고 회사의 이해관계에 따라 검색 순위를 조정한다. 검색 결과 표출 방식은 매우 표준화된 형태를 따르므로 쉽게 대중의 신뢰를 얻어 사실처럼 유포되곤 한다. 결과적으로 그 자료들이 정치색이 배제된 중립적이고 정확하고 공정한 정보라는 허구의 신화가 고착되는 것이다.

이 책에 따르면 ‘표준으로서의 백인성’이라는 수사적 관념이 정보 기술과 소프트설계를 구성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서양의 인터넷이 백인과 남성, 자산 계급, 이성애자, 기독교 문화 등을 구조적으로 옹호’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념은 웹브라우저 설계나 그에 따른 정보 오용에 의해 임의로 통제된다. 영어를 쓰는 인터넷 사용자와 콘텐츠 사업자, 정책 결정자, 설계자 등은 자신의 인종적 관점을 인터넷으로 유포하고, 인종 갈등을 해석하고, 문화 자원을 배분한다. 이런 현실은 여성과 유색 인종이 상품화의 도구가 되고 인종에 대한 관념이 재생산되는 온라인 사회 역학을 그대로 보여준다. 검색 엔진이 지배 계층의 이익을 위한 헤게모니적인 장치로 사용되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인터넷에 나타나는 남성의 시선과 포르노그래피의 관계를 연구한 한 논문에 따르면 인터넷은 남성에게 특권을 부여하고 여성을 포르노그래피나 소외 대상으로 인식하도록 하는 커뮤니케이션 환경을 제공한다. 다른 형태의 음란물들처럼 포르노그래피도 여성에 대한 억압을 강화하고 재생산한다. 광고나 예술에 나타나는 여성의 모습도 주로 ‘남성 관찰자의 시선’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인터넷에서 벌어지는 여성의 포르노그래피화 현상은 인종차별과 성차별의 또 다른 이름일 뿐이다. 또한 여성의 이미지가 대상화되는 경우, 늘 백인 여성이 표준이고 흑인 여성은 왜곡되며 라틴계 여성은 대상화조차 되지 않는다.

구글 검색 기능은 사적인 이해관계로 왜곡돼 있으며 금전적인 이익 추구와 높은 시장 점유율을 목적으로 한다. 사용자들은 취향과 개인 정보와 무형의 노동력을 활용하며 구글, 즉 검색 엔진이나 지메일, 구글 학습 검색, 유튜브 등에서 제공하는 ‘무료’검색 서비스를 이용하지만 자신들이 제공한 갖가지 정보가 구글에 의해 활용된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이 교환 방식이 타당한지 생각해봐야 한다. 알고리즘은 컴퓨터 과학자들이 만들어낸 발명품이다. 컴퓨터 코드가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 가능한 일종의 언어라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인터넷 검색 기능 또한 누군가의 의도에 따라 ‘통제되고 조정되기 쉬운 도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검색 결과는 사회적 조건에 따라 가변적이고 얼마든지 조작도 가능하다는 사실 또한 알 수 있다. 객관적이지도 않고 일관되지도 않으며 투명성이 보장되지도 않는다. 그런데 악의적으로 정보가 왜곡되고 빅데이터가 오용된다면 사회적 관계마저 악화되고 성차별과 인종차별은 더욱 공고해질 것이다.

검색 시스템이 인공지능과 알고리즘에 의해 작동되고 인간에게는 일람표 작업만이 맡겨진다고 할지라도 ‘인간의 결정’에 의해 색인이 이뤄진다. 하나의 정보 시스템에서 사람과 문화가 나타나는 방식은 그 문화의 사회적 맥락을 뚜렷하게 반영한다. 검색 엔진은 착취나 물신화의 역사 등 대중이 좋아하지 않는 항목은 드러내지 않고 회피한다. 사용자가 검색하는 자료들은 웹의 일람표나 색인에는 포함돼 있음에도 때로 웹을 총괄하는 ‘설계자의 의도’를 반영하는 것이다. 사용자에게 제공되는 정보는 문맥화돼 있고 상호 관련성의 틀 안에서 의미를 가진다. 그래서 우리는 정보를 형성하는 사람들의 사회적인 맥락과 정보가 형성되는 과정에 개입된 판단과 결과들을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 정보는 맥락 속에서 다뤄져야 한다. “정보는 동기와 의도를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 문화나 사건 또는 당면한 문제 등이 얽힌 사회적인 배경과 연관된다.” 이것이 정보 과학의 출발점이자 정보 검색의 바탕이 된다. 저자는 말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인터넷에서 ‘고급 정보’를 취득하는 능력이며, 동시에 광고를 구별하고 상업적 이익을 위해 유포되는 정보를 알아내는 능력이라고. 또한 ‘공공성을 담보하는 대안 검색 엔진’이 만들어져야 할 때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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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는 침묵했다 창비세계문학 69
하인리히 뵐 지음, 임홍배 옮김 / 창비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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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닭 없이 축 처지는 날들이 있다. 아니, 생각해보면 이유는 있다. 지금까지 살아온 날들이 아무것도 아닌 것만 같고 앞으로 살아갈 날들을 생각하면 더 막막해지는 그런 때. 그래서 이 힘겨운 인생을 왜 이렇게 꾸역꾸역 살아가고 있는지 도무지 답이 나오지 않는 그런 때. 요즘 내가 그렇다. ‘그랬다’라고 쓰지 못하는 이유는 아직도 그 생각을 완전히 떨쳐버리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그럴 때 하인리히 뵐의 책을 읽는다.

폐허 문학. 전쟁 뒤의 참혹한, 폐허와도 같은 그런 시기를 그린 문학. 요즘처럼 우울할 때 이런 책을 읽어도 될까? 조금 걱정스러웠지만, 도서관에서 빌린 책이라 반납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므로 어쨌든 읽는다. 책장을 펼치자마자 그려지는 세계는 말 그대로 황폐함 그 자체다. 2차 대전이 끝날 무렵, 탈영병으로 가까스로 살아남은 ‘한스 슈니츨러’. 그런데 그의 여정을 따라가다 보니 어쩐지 마음에 잔잔한 위로가 밀려온다.

이 작품 14장을 읽다가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14장은 하인리히 뵐이 이 장만 따로 단편으로 발표한 적이 있다고 한다. <천사는 침묵했다>는 뵐이 죽고 난 뒤인 1993년에야 세상에 선보였다. 1949년 이전에 집필되었지만, 작품이 쓰였을 무렵 독일 사회는 이 작품을 받아들일 만한 정신적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만큼 이 작품은 전후 독일의 무너질 대로 무너진 사회상을 세밀하게 담고 있다. 가난한 이들은 도둑질과 매혈, 구걸 등으로 목숨을 부지한다. 그런데 전쟁 때 나치에 부역했던 권력자들은, 전쟁이 끝난 뒤로도 사회 곳곳에 숨어서 여전히 잘 먹고 잘 살아간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독일 사회가 이 작품을 쉽사리 받아들이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왜 이런 폐허와도 같은 작품에서 위로를 받는가. 그것은 폐허 속의 꽃 때문이다. 그 꽃은 뵐의 문장에서 피어난다. 쓸쓸하지만 아름다운 문장이 빚어내는 따스한 세계가 있기 때문이다. 14장만 따로 떼어 이야기하자면, 이 장은 두 남녀가 다 쓰러져 가는 낡은 집, 무엇하나 제대로 갖춰진 것이 없는 작은 공간, 폐허와도 같은 공간에서 서로 마음을 아주 조금 확인하고 체온과 입김을 나눠가지면서 잠드는 장면이 그려질 뿐이다. 그들은 어떻게 만났고 어떤 과정을 거쳐 드디어 조금씩 마음을 열면서 의지하게 됐을까? 14장만으로는 유추가 쉽지는 않다. 그럼에도 모든 것을 잃어버린 가난한 두 남녀, ‘한스’와 ‘레기나’가 그저 서로 체온을 나누며 의지하는 이 장면은 어쩐지 눈물겹다.

한스는 탈영병이다. 번번이 다른 사람의 신분증을 위조해가면서 목숨을 부지했기에 이제는 자기 자신의 진짜 이름이 무엇인지 헷갈릴 정도이다. 그는 징집되기 전에 사랑했던 여인과 결혼한 전력이 있다. 그런데 전쟁은 모든 것을 앗아갔다. 아내라고 잠시, 아주 잠시 불렀던 여인과도 어쩌다 하룻밤을 보낸 게 전부다. 그리고 그 아내마저 전쟁 때문에 잃어버렸다. 레기나는 또 어떤가. 그녀는 전쟁의 폐허 속에서 갓난아이를 잃었다. 이 두 사람에게 남은 것은 오로지 자기 목숨뿐이다. 그마저도 제대로 부지해 나가기가 쉽지 않다.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지켜보노라면 너무나도 힘겨워, 전쟁 때 그냥 목숨을 잃어버린 편이 낫지 않았을까 싶어지기도 한다.

탈영병 검거를 피하기 위해 의사의 도움으로 가짜 신분증을 손에 넣은 한스는 추위 때문에 병원에서 무심코 걸쳤던 외투를 돌려주기 위해 외투 주인을 찾아간다. 외투 주인은 아기를 잃고 빈집에서 홀로 살아가던 레기나. 그녀의 집에서 한스가 주춤거리면서 묻는다. “당신 집에 있어도 될까? 내 말은 당분간…… 좀 오래…… 아니면 영영?” 레기나의 대답은 무뚝뚝하기 그지없다. “그래. 이 집에 있어도 돼.” 그 뒤로 한스는 레기나의 집에서 시체처럼 몇날 며칠 잠을 자며 그녀가 가져다주는 빵이나 커피를 받아먹는다. 별다른 말도 서로 나누지 않는다. 다정한 말도, 따스한 위로도, 강렬한 열정 같은 것도 아무것도 없다. 그럼에도 서서히 서로 의지하게 된다. 레기나는 한스에게 배급표를 얻어다주고, 한스는 거리로 나가 신부로부터 얻게 된 미사용 와인이나 빵 한 덩이를 볼 때마다 레기나를 떠올린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그들에게는 어떤 말이 없어도, 모든 상황을 다 안다는 듯이 품어주는 한 사람의 공감과 이해가 그 어떤 열정적인 사랑보다도 더 깊은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마침내 사랑을 이야기하며 그런 가운데서도 슬프다고 말하는 장면은 애잔하기 그지없다. 그 참혹한 상황 속에서 발견한 한줄기 작은 빛의 소중함을 알기에 어쩐지 눈물이 난다.

하인리히 뵐은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에서 전쟁 뒤 비참하게 살아가는 중년 부부 ‘프레드’와 ‘캐테’의 삶을 그린 적도 있다. 가난한 부부의 어느 주말을 그린 이야기 속에서 전후 독일의 피폐한 상황, 가난에 찌든 하층민의 삶, 돈 있고 힘 있는 사람들의 위선적인 면모를 폭로했다. 이 작품 또한 삶의 비애가 절로 느껴진다. 삶에 지치고 꿈이 부서진 중년 남자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생의 씁쓸한 단면에 깊은 공감이 간다. <천사는 침묵했다>의 한스와 레기나가 함께 늙어간다면 프레드와 케테가 되지 않았을까……. 그런데도 금세라도 부서질 듯한 삶 속에서 그들의 사랑만큼은 단단해 보인다. 폐허를 함께 겪었기에 그 어떤 설명도 필요하지 않다. 그들 사이에는 이해와 공감이 자리하고 있으며 그런 상대방으로 인해 어떻게든 살아나가야 한다고 마음을 다잡게 된다. 하인리히 뵐은 전쟁은 사람 때문에 일어난 비극이지만 그럼에도 사람 때문에 다시 살아갈 수 있다고 희망을 말한다. 힘겹게 살아가는 이들을 향한 연민을 잃지 않는다. 그 시선이 나를 위로한다.

이 책을 읽느라 눈가가 젖었는데 곁에 있던 고양이가 나를 보며 뭔가 다 안다는 듯한 얼굴로 나를 보며 눈을 지그시 감아준다. 애정이 담뿍 담긴 눈이다. 고양이들이 요물이라고 하는 까닭은 함께 사는 존재에 대해, 그 존재의 감정에 무척 예민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내가 기쁜지, 슬픈지, 우울한지, 화가 났는지 너무나도 잘 안다. 내가 눈물 흘리면 옆에서 그냥 동그란 두 눈을 끔뻑끔뻑 감아줄 뿐이다. 아무 말도 필요 없다. 공감과 이해. 세상 그 어떤 사랑보다 더 깊은 애정이다. 살아가야지, 살아야 한다. 한스와 레기나처럼 전쟁 뒤의 폐허를 살아가는 것은 아니지만 하루하루 살아가기 벅찬 인생이다. 생이 폐허와도 같다. 그러나 그 황폐한 터 위에도 꽃은 피어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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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19-08-29 1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읽고 위로를 받는 경험 흔치않죠. 작가로서도 자신의 작품이 누군가에게 위로가 된다면 큰 보람을 느끼지 않을까 싶어요. 하인리히 뵐의 작품 리뷰를 몇 번 읽고 꼭 읽어봐야지 했었는데 잠자냥님의 글이 따뜻하게 느껴져서 저 또한 위로 받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잠자냥 2019-08-29 14:31   좋아요 1 | URL
네, 아마도 그런 경험들 때문에 책 읽기를 멈추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하인리히 뵐 작품은 꼭 추천합니다. 가짜뉴스가 판을 치는 요즘 우리나라 상황을 보면 <카타리나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를 읽어보셔도 좋을 것 같고요. 이 책을 비롯해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도 괜찮고요. 국내에 번역되어 출판된 작품은 그 어떤 것을 읽어도 마음에 드실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