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스턴 사람들>은 참 신기한 작품이다. 재미있는 것 같으면서도 재미가 없고 속 시원한 것 같으면서도 읽다 보면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 장장 688쪽. 연휴 동안 3일에 걸쳐 읽었다. 마지막 페이지를 쫑낼 때쯤엔 부글부글 끓던 속이 울화통에 터져버리는 줄 알았다. 책을 덮으며 말했다. “아 왜 이렇게 기분이 나쁘지?” 그러면서도 별 넷? 별 다섯? 생각하다가 별 다섯을 줬다. 기분이 너무 나빠서 별 넷으로 깎으려다 그래도 다섯으로 준다. 헨리 제임스.
헨리 제임스는 예전에 폴스타프 님이 딱 적절하게 표현하신 적이 있다. “장황하고 끝도 없는 단어와 문장과 문단의 연속. 유장한 언어의 큰 강어귀, 그 속에서 빠져 죽기 일보 전이다. 2백쪽도 안 왔는데 환장하네, 이거. 하긴 이렇지 않으면 헨리 제임스가 아니지. 안 읽는다, 안 읽는다 하면서도 보이면 꼭 읽게 되는 제임스. 내가 밋쵸요, 밋쵸.”라고 2024년 은행나무출판사에서 출간한 <보스턴 사람들> 100자평을 남기셨는데, 여기에 완전 공감한다. 헨리 제임스 작품은 대체로 그렇다. “안 읽는다 하면서도 보이면 꼭 읽게 되는 제임스”- 이런 작가로 현대에는 <아름다움의 선>, <수영장 도서관>의 앨렌 홀링허스트가 있다. 홀링허스트의 작품도 읽을 땐 좀 질리면서도 눈에 보이면 또 읽게 된다. 홀링허스트는 21세기의 헨리 제임스라고나 할까. 아무튼 이 두 작가의 작품을 비교하면서 읽어보는 것도 재미난........(응? 아니 고통스러운 재미의) 경험이 될 것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보스턴 사람들>의 줄거리는 딱히 별게 없다. 그러면서도 600쪽 넘게 써 내려간 헨리 제임스. 하여간 대단해... 게다가 중간에 딱 덮어도 되는데 뭐랄까 자잘한 소품으로 이어진 드라마를 꾸역꾸역 보게 되는 듯한 심정으로 끝까지 읽게 된다. 그래서 책장을 덮고 나서는 불유쾌한 감정이 들었던 것일까? 꼭 그것만은 아닐 것이다. 자, 별 다섯을 줘놓고도 씁쓸&불쾌한 기분이 들었던 이유는 뭘까 곱씹어 보자. -여기서부터는 스포일러 아닌 스포일러가 있으니 이 책을 읽으실 분들은 실눈 뜨고 읽거나 패스하시라-
<보스턴 사람들>의 주요 등장인물은 세 사람, 두 여자와 한 남자이다. 한 여자는 이 작품의 배경이 되는 1800년대 당시로서는 드문 독신의, 귀족 출신의, 부유한 여성 ‘올리브 챈슬러’이다. 문학동네 책 표지에서 왼쪽의 회색 머리 여성이 올리브 챈슬러로 보인다. 오른쪽에 그려진 남성 ‘배질 랜섬’은 올리브의 먼 친척으로 남부의 몰락한 귀족 출신의 변호사이다. 자 가운데 얼굴을 보이지 않은 빨간 머리의 여성은 누구일까? 이 여성은 젊고 아름다운 연설가 ‘버리나 태런트’로 올리브와 랜섬 두 사람으로부터 동시에 사랑받는 존재이다. 그러니까 젊고 아름다운 한 여자를 두고 보스턴 출신의 부유한 귀족 여성과 남부 미시시피 출신의 가난뱅이 남성이 경쟁을 벌이는 삼각관계의 로맨스물이라고도 볼 수 있다.
오잉? 1800년대에 두 남자가 한 여자를 사이에 두고 벌이는 로맨스도 아니고 남녀가 경쟁한다고? 그것참 파격적이네! 할 수도 있다. 심지어 저 부유한 독신 여성 ‘올리브’는 여성운동에 투신한 사람으로 오늘날의 시선으로 보기에도 남자를 혐오하는(올리브는 남자를 혐오한다) 페미니스트에 가깝다. 자신의 풍요로운 부를 여성운동에 투신한 사람들을 돕거나 후원하는 일에 기꺼이 쓰고 있으며 억압받은 여성들을 위해 그녀 자신 또한 기꺼이 무언가를 하리라 다짐하고 있다. 그러던 중 우연히 한 원로 여성운동가의 거처에서 열린 모임에서 버리나 태런트의 연설을 듣고 그녀에게 홀딱 반해버린다. 그런데 문제는 이 연설을 들으러 간 사람이 올리브뿐만이 아니었다는 것. 올리브는 남북전쟁 패전 이후 재산과 노예를 모두 잃고 집안이 몰락한 배질에게 친족의 도리를 다하고자 그를 보스턴의 자기 집으로 초대했던 터였고, 첫 만남에서부터 그가 자기와는 완전히 다른 생각을 가진 남자임을 알고는 혐오하면서도 여성운동가들의 모임에 굳이 데리고 간 것이었다. 배질 또한 버리나에게 한눈에 반하는데, 버리나의 연설에 깊이 감화받은 올리브에 비해 배질이 반한 것은 버리나의 미모와 목소리였다(왜 안 그렇겠습니까). 근데 여기서 잠깐 궁금해진다. 정말 올리브는 버리나의 연설과 그 연설의 바탕이 된 ‘생각’에 반한 것일까? 올리브는 내내 그렇게 주장하기는 한다.
도대체 올리브의 성별은 무엇이란 말인가? (474쪽)
<보스턴 사람들>에서 가장 인상적인 구절이 아닐 수 없다. 배질 랜섬은 버리나를 사이에 두고 올리브와 각축을 벌이던 끝에 울화통이 터져서 저렇게 절규한다. 올리브 챈슬러, 이 노처녀-랜섬은 올리브를 처음 보자마자 ‘전형적인 노처녀’로 규정한다. 심지어 ‘이는 그녀의 특성이자 운명’이라면서 ‘올리브 챈슬러는 그녀의 존재가 함축하는 모든 의미에서 비혼’이라고 ‘셸리가 서정시인인 것처럼, 8월이 무더운 것처럼 그녀는 비혼의 노처녀’라고 생각한다-가 도대체 왜 그렇게 자신과 성별이 똑같은 버리나에게 그토록 집착하는지 이해하지 못해 저렇게 외치는 것이다.
<보스턴 사람들>이 시대를 앞선 점이 있다면 바로 저 문장이 아닐까(헨리 제임스는 자신도 모르게 젠더 문제를 건드렸어! 주디스 버틀러가 놀랄 만한 혜안이여!!) 그러니까 올리브는 자신이 여성임을 자각하기는 하지만, 자기가 버리나에게 반한 것이 단지 그 감동스러운 연설과 생각 때문이라고 착각한다. 자신의 정체성이나 섹슈얼리티를 깨닫지 못한 상태의 레즈비언인 것이다. 물론 자각은 했으나 적절한 언어가 없어서 표현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마치 저 오래전의 래드클리프 홀의 <고독의 우물>의 주인공 ‘스티븐 고든’이 스스로 자신을 레즈비언이라고 정체화했으나 실은(내가 보기엔 평생 남성으로 살기를 소망했고 남장을 했던 점에서) ‘FTM(Female to Male)트랜스젠더’이므로 결국 레즈비언이 아닌 이성애자였음에도 당시에는 이를 표현할 언어가 없어서 결국 레즈비언 문학의 효시가 되고 말았던 그 스티븐 고든처럼 이 올리브는 레즈비언인데도 레즈비언이라는 언어로 표현 갈 길이 없었던 본투비 레즈비언이었던 것이었으니......
암튼 버리나에게 반한 이후 올리브의 행태를 보자. 그는 일단 돈이 많았으므로 가난한 하층민 출신 이 소녀를 돈으로 산다(성매매를 한다는 소리는 아님ㅋㅋㅋㅋㅋㅋㅋㅋ). 이 예쁜 딸을 이용해 한몫 단단히 벌어보려던 부모에게 뒷돈을 주고 버리나를 자기 집에서 살도록 하는 것이다(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보스턴 매리지의 기원이 된다). 근데 같이 살면 그만일 텐데, 이 인간 좀 보게나. 이 아름다운 버리나 주변에 파리 떼처럼 몰려드는 온갖 젊은 남자들을 다 떨어뜨려놓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평생 결혼하지 않는다고 약속해요!!!!” ㅋㅋㅋㅋㅋㅋㅋ버리나에게 절대 결혼하지 말라는 둥, 누구와 누가 와서 구애를 하는지 밝히라는 둥 버리나의 사생활(특히 남자관계)에는 쌍심지를 켜고 감시하며 버리나를 구속한다. 그러면서도 촉은 좋아서 애초부터 이 잘생긴 사촌 배질 랜섬이 버리나에게 위험한 인물이 될 것임을 알아차리고는 거의 히스테리 부리듯 배질과 버리나 사이를 경계하고 감시하고 구속한다. 근데 이게..... 진정 억압받는 여성의 해방을 외치는 여성의 모습인가? 돈으로 좋아하는 사람을 옆에 구속해두고 사사건건 감시하는 거..... 이건 그녀가 그토록 경멸하는 당시 남자들이 하는 행태와 똑같지 않은가? 그러니까 배질 랜섬처럼 나 또한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올리브 챈슬러, 그녀의 성별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배질 랜섬이야 말해무엇하리. 그는 오늘날 한국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남자들의 전형이다. 미소지니(여혐)의 뜻도 몰라서 내가 여성혐오자라고요? 내가 아름다운 여성들을 얼마나 좋아하는데요! 난 여성들의 능력을 존중합니다. 그들만이 할 수 있는 분야에서 얼마나 뛰어난 능력을 보여줍니까? 집구석에서 돌봄과 남성의 옆에서 아름다운 꽃으로 있는 거 정말 여성들의 뛰어난 능력입니다. 참으로 위대하지 않습니까? 제가 이렇게 여성을 찬양하는데 여성혐오자라니요, 무슨 소리! 이 지랄하는 전형적인 여성혐오자이다. 게다가 대놓고 올리브와 올리브 근처 여성운동가들을 비아냥대는 말을 서슴지 않고 한다. 버리나에게도 당신의 생각이나 연설에 감명받았다고....(입 발린 소리하면서 다가오는 다른 남자들과 달리) 거짓말하는 대신, 당신의 아름다운 외모와 목소리에 반했다면서 끈덕지게 구애한다. 그러니까 랜섬은 그냥 딱 그대로 남부 출신 전형적 보수주의자 꼰대 남자일 뿐이다.
그렇다면 이 두 사람의 사랑을 받는 빨간 머리, 표지에서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 헨리 제임스 왈 너무나 아름답다는 버리나는 어떤 사람일까? 표지에서 얼굴이 드러나지 않은 이유는 여러 가지일 테지만, 뒷모습만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버리나라는 캐릭터의 속성을 잘 알 수 있다. 사실 나는 <보스턴 사람들>의 세 인물 모두 비호감인데(이러기도 쉽지 않음) 그중 이 버리나가 가장...은 아니지만 가장 밉상인 인물 랜섬 못지않게 싫었다. 이 여자는 단지 말만 잘하는, 외모만 그럴듯한 앵무새가 아닌가 싶었기 때문이다. 올리브를 혹하게 했던 연설도 아버지가 시킨 대로 했을 뿐인데 올리브는 알아채지 못한다. 올리브가 개인적으로 버리나에게 여성운동과 여성의 억압, 해방 등에 관한 생각을 물어봤을 때 버리나는 그 질문에 두루뭉술하게 대답할 뿐인데 이미 첫눈에 그녀에게 반해버린 올리브는 제멋대로 해석하면서 버리나가 지성미도 뿜뿜이라고 착각한다. 게다가 그 훗날의 연설들.... 그 연설 원고를 써주는 사람은 올리브이지 버리나 스스로는 원고를 단 한 줄도 쓰지 못한다.
그뿐만 아니라 올리브가 노심초사 걱정하고 경계할 정도로 버리나 주변에는 그녀의 외모에 반해 그녀를 칭송하며 따라다니는 남자들이 끊이지 않는데 자신의 아름다움을 알고 이용할 줄 아는 버리나는 그것을 십분 활용하며 즐긴다. 그러니 이 말 잘하는 허영덩이 앵무새가 여성해방 운운하는 자신의 말에 사사건건 반대하고 비꼬고, 공격하는 랜섬에게 넘어가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 아닌가. 어차피 그녀 고유의 생각이랄 게 없었으므로 오직 갖고 있는 자신의 미모만 찬양하면, 게다가 잘생긴 남자라면 땡큐인 것이다. 헨리 제임스는 결국 이 앵무새가 잘못된 선택을 했노라고 앵무새의 앞날에 눈물이 끊이지 않음을 암시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헨리 제임스가 시대를 앞선 페미니스트인가!? 한다면 글쎄.... 헨리 제임스는 랜섬을 곱게 보지도 않지만 그가 여성운동가인 올리브와 버리나를 묘사하는 방식을 보라. 더 고단수로 그들을 비꼬고 있지 않은가. 여성운동이라고? 올리브, 빨간 머리 앵무새, 정작 니들이 하는 짓을 봐! 하고 마음껏 비웃는 느낌. 그게 <보스턴 사람들>을 읽고 나서 똥물 들이켠 듯한 기분이 들었던 이유이다. 그럼에도 별 다섯? 그래도 19세기에 “대체 그녀의 성별은 무엇이란 말인가!” 외치며 젠더, 섹슈얼리티, 성역할, 결혼제도, 여성해방 등의 문제를 다채롭게 짚고 있다는 점에서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