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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에 나는 꽤 모범생이었다. 적어도 초등학생 때까지는 그랬다.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숙제를 하고, 준비물을 챙겨놓아야만 뭔가 다른 일을 할 수 있었다. 그래야만 마음이 놓였다. 그래봤자 기껏해야 놀거나, 책을 읽거나, 자는 것뿐이었지만 그래도 그래야지만 안심이 됐다. 아마, 초저녁부터 잠이 들어버리기가 일쑤여서 더 미리미리 해둔 건지도 모르겠다. 준비물을 챙기는 그 과정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순간은 연필을 깎을 때였다. 샤파, 은색 기차 모양 연필깎이에 연필을 돌려서 그 뾰족한 심들을 나란히 필통에 넣어둘 때가 가장 좋았다.

중고등학교 때, 나는 모범생의 범주를 벗어났고, 그런 ‘경건한’ 순간은 내 일상에서 사라졌다. 그런데 회사를 다니면서 다시 그런 순간이, 아니 그와 비슷한 순간이 찾아온 것 같다. 요즘은 저녁마다 커피를 간다. 수동 커피 그라인더에 커피 알갱이를 넣고 커피가 분쇄될 때까지 손잡이를 돌린다. 마치 어릴 적 연필깎이 손잡이를 돌릴 때와 비슷하다. 봄이나 가을, 겨울에는 아침에 에스프레소 머신에서 뽑아서 텀블러에 담아서 갖고 나가는데, 여름에는 아무래도 뜨거운 커피를 찾지 않게 된다. 그래서 선택한 게 전날 밤에 미리 커피를 내려놓고는, 아침에는 텀블러에 얼음과 커피만 넣어서 출근하는 것이다. 때로는 이 과정이 무척 귀찮아서 그냥 자버리기도 한다. 그런 다음 날은 에스프레소 머신에서 커피를 투 샷이나 내려서 얼음을 넣고 커피를 넣고 이래저래 바쁘게 움직여야만 한다.

엊저녁도 커피 알갱이를 분쇄기에 넣고 열심히 손잡이를 돌렸다. 부엌의 작은 창으로 바깥을 보면서 무심히 커피를 갈다가, 문득 연필깎이 손잡이를 돌리던 때가 떠올랐다. 어릴 때는 연필 몇 자루로 내일을 준비했는데, 이제는 커피를 갈면서 내일을 준비하는구나. 열 살 이전부터 지금까지- 사람은 늘 이렇게 뭔가를 준비하면서 살아야 하는 걸까? 어쩐지 한숨을 폭 내쉬다가 문득 다시 마음을 고쳐먹는다. 아니야, 준비할 게 있는 삶이 얼마나 좋아? 더는 연필을 깎지 않고, 더는 커피콩을 갈지 않아도 되는 삶, 그런 삶이 온다면 또 어쩐지 슬퍼질 것 같았다. 손잡이를 더 열심히 돌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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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06-14 16:0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잠자냥님 왠지 어릴적에(지금도 그렇고) 완전 모범생에 학구파 이셨을거 같아요. 그리고 커피를 갈면서 저런 생각을 하시는군요. 전 맨날 사먹거나 카누만 타먹어서 ㅜㅜ 반성해봅니다^^

잠자냥 2021-06-14 16:28   좋아요 4 | URL
모범생이었다가 잠시 방황(?)하고 술마시고 놀다가 다시 범생이 라이프로 돌아왔습니다. 범생이라기보다는 사람들하고 어울리는 삶에서 벗어난 삶이랄까요. ㅎㅎㅎ 커피 갈다 보면 그 반복적인 행위에 멍때릴 때도 많은데 저런 생각도 들더라고요. ㅎㅎㅎ

다락방 2021-06-14 16:09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저는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은 아주 어릴적엔 모범생일 수 있어도 청소년기에는 모범생도 아닌 그렇다고 날나리도 아닌 그 어디쯤에 새로운 그룹을 형성하고 있다는 편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 역시도 초등학생(사실은 국민학생) 때는 엄청난 모범생이어서 전교에 소문이 날 정도였지만(대단했어요) 고등학교 시절에는 할리퀸 문고 읽다가 선생님께 걸리는... 그런 아이였지요.. 흠흠.

그렇지만 준비하는 삶, 이라는 잠자냥 님의 페이퍼에는 매우 많이 진심으로 동의하고 공감합니다.
매일에 대해 더는 커피콩을 갈지 않는 삶이 슬프다면, 저는 읽을 책을 준비하지 않는 삶도 슬플것 같아요. 여행이라는 것이 주는 아주 많은 것을 좋아하는데 그중에는 분명 ‘어떤 책을 가져가지?‘ 하고 고민하는 과정 그리고 챙기는 과정도 필수거든요. 세 권 가져갈까 다섯권 가져갈까, 어느 책을 가져갈까 고르는 순간은 정말 너무 짜릿하고 행복하죠.

삶은 그런 작은 준비들로 채워지는 것 같아요.

오늘 페이퍼 너무 좋네요, 잠자냥 님.
:)

잠자냥 2021-06-14 16:34   좋아요 3 | URL
어릴 때부터 책 많이 읽는 친구들이 보통은 얌전한 성향이 있지요. 그래서 어른들은 그걸 범생이라고 착각하는 것도 같고 어린이들은 어른 말 듣고는 아 내가 그런가보다 하는데, 사실 마음속으로는 (특히 문학 같은 책 많이 읽다 보면) 이 세상이 왜 이 모양인지 삐딱선 타고 싶어지는 시기가 있지요. 저도 그랬던 거 같고요. 그렇다고 해도 대부분은 소심한 성격이라 대놓고 반항은 못하고 은근히 그 어디쯤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고 노는 것 같습니다. 저도 그랬고, 다락방 님도 그랬겠지요.ㅎㅎㅎ

맞아요. 준비할 게 없는 삶은 참 여러 가지로 슬픈 것 같기도 해요. 여행이 즐거운 것도 준비하는 그 과정이 즐겁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읽을 책을 준비하지 않는 삶, 그것도 슬플 것 같아요. 그래서 다부장님(과 저를 비롯해 여기 알라딘 개미지옥 개미들)은 그렇게 읽을 책을 무쟈게 준비하나 봅니다. ㅎㅎㅎ

레삭매냐 2021-06-14 16:25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저는 뒤돌아 보면 모범생이었던 적이
1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숙제는 귀찮아서 안하고 그냥 몸으로
때웠습니다.

그리고 고등학교 시절에는 타이어를
받치고 담치기를 하여 야자 시간에
오락실에 가서 스노볼인가 뭔가하는
오락을 했습니다.

그랬던 닝겡이 지금은 꾸역꾸역 책을
열심히 읽고 리뷰질을 하고 있습니다.

뭐 그랬다고 합니다.

잠자냥 2021-06-14 16:40   좋아요 4 | URL
오, 레샥매냐 님이 책 읽는 모습 보고 부모님이 기절하신 거 아닙니까? ㅋㅋㅋ
아니 이 녀석이 이렇게 늦게 철들다니! 이런? ㅋㅋㅋㅋ
스노우볼이 뭐지? 하고 검색해보니... 아아, 이 게임 저도 해봤어요. ㅋㅋㅋㅋ 잘하지는 못함.

페넬로페 2021-06-14 16:5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는 매일밤 쌀을 씻으며 내일을 준비해요. 그러면서 아이고 또 낼은 무슨 음식을 헤서 먹여야하나 하는 고민을 합니다~~커피콩을 갈면서 하는 잠자냥님의 생각들이 넘 좋네요^^

잠자냥 2021-06-14 17:04   좋아요 3 | URL
아, 쌀씻기! 요즘 코로나 때문에 회사에 도시락 싸갖고 다니다 보니 며칠에 한 번 씻는데도 쌀 씻는 거 정말 귀찮더라고요. =_= 쌀씻기보다는 커피콩 가는 게 덜 귀찮은 거 같아요. ㅎㅎㅎㅎ

mini74 2021-06-14 19: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아버지가 퇴근하시고 저녁을 드시고 나면 연필을 가지런히 깎아주셨어요. 연필잡는게 서툴러 자꾸 연필심이 부러져서 하루에 다섯자루에서 여섯자루씩 깎아야 할 연필이 늘어나자. 아버지가 잠자냥님꺼와 같은 연필깎이를 사오셨어요 ㅎㅎㅎ

그레이스 2021-06-14 19: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들을 너무 잘 쓰셔서...
소재도 다양하고...
^^;
 

얼마 전에 작은 오디오를 하나 샀다. 크기는 작지만, 소리가 꽤 훌륭하다는 평을 받는 오디오였다. 반신반의했는데 물건을 받아 시디를 넣고 돌려보니 생각보다 훌륭했다. 기대보다 더 좋았다. 그리고 이 작은 오디오 때문에 삶의 큰 즐거움이 하나 더 생겼다. 나는 좋은 오디오에 대한 욕심이 있다. 지금은 경제 여건상 이 정도 오디오를 살 수 있을 뿐이지만 능력이 된다면 나중에라도 꼭 어마어마한 음질의 오디오를 마련해보고 싶다. 다른 사람들이 자동차라든가 집이라든가 이런 것에 쏟는 욕심처럼 나는 오디오에 꼭 그런 욕심이 든다.

그런 오디오를 마련해서 책과 시디로 둘러싸인 방에 오디오를 설치해놓고 책과 음악 나, 이렇게 그 방 안에 머무는 것이다. 어떤 방해도 없이. 고요한 가운데 책을 읽다가 어느 순간은 오디오를 타고 흘러나오는 아름다운 음악에 그대로 온몸을 맡긴다.... 볼륨을 한없이 올려도 걱정하지 않아도 될 그런 곳이라면 더없이 좋다. 생각만으로도 즐겁다. 어떤 책은 음악을 들으면서 함께 읽어도 괜찮을 것이다.


예전에 읽은 <스토너>를 보면서 더욱 확고해진 생각 가운데 하나는, 사람이 사람에게서 구할 수 있는 기쁨이나 행복은 매우 가변적이고 한정적이라는 사실이다. 가족, 연인, 친구, 배우자, 동료 등등 사람들은 수많은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그 관계 안에서 기뻐하고 행복해 하며 즐거움을 찾는다. 그러나 사람은 사람이기 때문에 변하기 쉽고 그 변화 때문에 관계는 늘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사람에게서 얻을 수 있는 기쁨이나 행복감 또한 한결같을 수는 없다.

어쩌면 그렇기에 '스토너'가 더더욱 문학 속으로 빠져들어 가면서 자신의 고독한 삶을 위로받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는 그렇게 문학에 자신의 삶을 바쳤기 때문에, 아니 꾸준하게 많은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보통의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은 의미 있는 삶을 살다 간 것처럼 보인다. 적어도 내 눈에는 그렇다. 그리고 그런 삶의 의미를 아는 이들의 눈에는 스토너가 그저 외롭고 고독하게 죽어간 가련한 인간으로만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책이나 음악도 사람이 만든 것이기에 만든 이의 의도를 알고자 사람들은 끊임없이 애쓴다. 그렇지만 작품을 만들어 낸 사람의 의도를 100% 정확하게 알기란 어렵다, 아니 불가능하다. 사람 또한 나 아닌 타인을 100% 완벽하게 알기란 처음부터 불가능하다. 알고자,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이 있을 뿐이지만 완벽한 이해나 앎은 관계 안에서 존재할 수 없다.

책이나 음악은 사람의 해석을 기다리고 환영한다. 비록 작가나 작곡가의 의도를 완벽하게 알지 못하고 독자나 청자의 주관이 깊이 배인 해석일지라도 환영한다. 다양한 해석이 있을수록 작품이 풍요로워지기도 한다. 그러나 사람은 그렇지 않다. 있는 그대로 보아주길 바란다. 해석이 있으면 오해가 생기고, 이해가 아닌 오해 때문에 인간관계에서는 늘 불협화음이 따를 수밖에 없다. 타인의 주관적 해석 때문에 사람들은 상처받고 아파한다.

이런 까닭에 어떤 예술 작품을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일보다도 한 사람을 받아들이고 알아가는 과정이, 사람과의 관계가 한층 어렵고 까다롭다. 그러나 그 공들임에 비해 쉽게 어긋나는 것 또한 사람 사이의 관계이다. 그렇기에 사람으로부터 구할 수 있는 행복이나 즐거움은 변하기 쉽고 제한적이며 불완전한 것이다. 

내가 어릴 때부터 이런 사실을 알았다고 말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다만 돌아보면 내가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사람과 함께 할 때가 아니었다. 적어도 어린 시절에는 그랬다. 초등학교 시절 우리집에는 창고처럼 쓰이는 뒤꼍이 있었다. 형제가 많아 온전한 내 방이 없던 나는 그 뒤꼍을 어느 곳보다 사랑했다. 여름이면 그곳에 돗자리를 깔고 라디오(이종환, 김기덕, 배철수 같은)를 들으며 책을 읽을 때가 가장 행복했다.

나는 친구가 많았던 적도 없었고, 많기를 바랐던 적도 없다. 중고등학교 시절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아이들의 많은 관심을 받았던 그 시기에는 사람으로부터 즐거움을 얻기도 했지만, 그때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 모든 것들이 부질없다는 것을, 곧 모두 지나갈 것임을. 쉽게 변해버릴 한없이 가벼운 것임을.

대학을 가고 졸업을 하고 사회에 나와서 더 많은 사람을 만날수록 인간은 인간에게 좋은 존재가 되기 어렵다는 사실을 더욱 깨닫게 되었다. 물론 나 또한 분명 타인에게 그런 존재일 것이다. 인간은 타인을 해석하기 때문에 상처를 주고 자신도 상처 받는다. 그렇기에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는 편이 낫다. 아니면 해석할 여지를 아예 주지 않던가. 그러나 이조차도 불가능하다. 사람은 꼭 가까운 사람만을 해석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도 친구가 얼마 되지 않기도 하지만, 앞으로도 그 숫자가 늘지는 않을 것 같다. 그렇다고 친구를 늘이고 싶어서 마음이 다급하지도 않다. 그런데 묘하게도 좋은 책이나 음악을 만나는 일에는 나도 모르게 마음이 조급해진다. 이 책도 읽어보고 싶고, 저 음악도 들어보고 싶고..... 어떤 이에게는 무척이나 외롭고 지루해 보일 수 있는 이런 삶에 나는 아주 만족한다.

"내 이 세상 도처에서 쉴 곳을 찾아보았으되, 마침내 찾아낸, 책이 있는 구석방보다 나은 곳은 없더라."는 움베르토 에코의 말이 내게는 진리나 다름없다. 그 구석방에 좋은 오디오까지 있으면 더 바랄 게 없는 셈이다. 그리고 지금, 내가 꿈꾸는 이상적인 모습과 딱 맞는다고 할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 가까워졌다. 그래서 행복하다. 어린 시절, 그 안에선 한없이 평화로웠던 뒤꼍에서의 느낌이 고스란히 살아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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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1-05-12 11:30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내일 할 얘기지만, 스토너가 사실은 소세키의 겐조하고 비슷하지 않나 싶어요. 존 윌리엄스가 스토너에게 과하게 선역을 시켜서 말입죠. 사실은 스토너 역시 찌질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가정과 사회생활에서는요. 이번에 소세키 읽으며 확실하게 느낀 건, 소세키 >>>>>> 윌리엄스!!!

잠자냥 2021-05-12 11:19   좋아요 4 | URL
아 맞습니다! 겐조하고 비슷한 인물이죠! 하지만 전 겐조는 어떤 면에선 좋은데 스토너는 좋아할 수는 없더라고요. 스토너는 사실 딱히 매력적인 인간은 아니죠.
소세키>>>> 윌리엄스라는 말에도 공감합니다.
내일 기대하겠습니다.

그레이스 2021-05-12 11:1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스토너 읽을 때 조금 답답하단 생각을 했는데, 제게도 그런 모습이 있더라구요.^^
움베르토 에코의 말 저도 동의해요~
책이 있는 구석 방안 쉴 곳이라는...♡

잠자냥 2021-05-12 11:32   좋아요 2 | URL
아마 알라딘 서재분들은 다들 책이 있는 방구석을 가장 좋아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ㅎㅎ

Falstaff 2021-05-12 11:1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파트 살면 오디오 좋은 거 전혀 필요 없습니다. 어차피 출력대로 들을 수 없어요. 아래층, 위층, 벽 넘어 옆집에서 날마다 쳐들어올 겁니다. ㅋㅋㅋㅋ

잠자냥 2021-05-12 11:32   좋아요 3 | URL
ㅋㅋㅋㅋㅋ 그래서 아파트가 아닌 또 단독주택이 필요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능 ㅋㅋㅋ

2021-05-12 11: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5-12 12: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레삭매냐 2021-05-12 11:50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살짜쿵 태클을 걸자면,
고 쿼테이션은 에코가 아니라
토마스 아 켐피스라는 분이 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려서는 새로운 관계에 점프하
길 원했지만, 이제 나이가 드니
그 관계들을 유지하는 데 더 중점
을 두게 되는 것 같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기억이 휘발되고
나니, 어느 시절 사람들과 함께
보내던 시절이 참으로 행복했었구
나 하고 느끼게 됩니다. 그 땐 그랬
지 하구요.

오디오에 대한 로망은... 회사에서
놀고 있는 티악 앰프부터 어떻게
슈킹을...

잠자냥 2021-05-12 11:55   좋아요 4 | URL
아하, 그렇군요.<장미의 이름>에서 나왔기에 그렇게 인용했으나, 정확히는 그게 맞군요. 감사합니다!

mini74 2021-05-12 13:4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남편이 싼값에 얼릉 주워왔다는 오디오, 형부가 우와하며 가격을 말한 후 잔잔한 음악과 책이 있던 방의 평화는 잠시 깨졌었죠 ㅎㅎㅎ

잠자냥 2021-05-12 14:11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 오디오에 환장한 사람들도 은근 많죠. ㅋㅋㅋ

새파랑 2021-05-12 13: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책과 씨디에 둘러쌓인 방에서 살고 싶어요. 언젠가는~!
스토너 읽고 인간관계에서 많이 생각했었는데~ 역시 책 좋아하는 사람은 책만 있으면 혼자있어도 어디있어도 즐겁다는^^

Falstaff 2021-05-12 14:03   좋아요 2 | URL
흠... 자랑으로 읽으시면 곤란하고요,
제가 책 읽는 곳으로 쓰고 있는 방에 한 줄로 늘어놓으면 28미터의 책꽂이와 33미터의 CD 꽂이가 꽉 차있는데요, 책 읽을 땐 음악 못 듣고, 음악 들을 땐 책을 못 읽습니다. 마음 먹고 책이나 음악을 좀 즐기려면 또 술에 취해 있기 십상이고요. ^^;;
책은 두 번 읽기가 쉽지 않고, CD는 두 번 이상 듣기가 쉽지만 듣는 것만 들어서 한 번 달랑 듣고 먼지만 쌓이는 애들 불쌍해 바라볼 때마다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책은 모르겠으나, 음반은 많이 사지 마세요. 딱 들을 것만 사시는 것이.... 전 반올림 해서 3천 장 가지고 있는데, 정작 듣는 건 한 2백장 되려나 그렇습니다.
오디오는 아파트 기준해서, 잠자냥님이 즐기시는 자그마한 거면 충분합니다. 괜히 오디오 입문이네 뭐네 해서 인켈 하이파이 팔아버리고 전문가용이네 뭐네 하는 거 샀다가 아직도 후회 막급입니다. ㅜㅜ

잠자냥 2021-05-12 14:15   좋아요 2 | URL
새파랑 님/ 맞습니다. 책 좋아하는 사람은 사실 어떤 날은 사람하고 악속해놓고도 집에서 그냥 혼자 책이나 읽고 싶다고 생각하죠.

폴스타프 님/ 책하고 음악 같이 감상하기 어렵긴하죠. 책도 두 번 읽기 쉽지 않고, 음반도 듣는 것만 듣는다는 말씀 공감해요. 저도 소싯적엔 음반(주로 락 음악)도 사 모았는데, 결국 듣는 것만 듣고 자리만 차지하고.. 요즘은 정말 어쩌다 삽니다. 올봄 알라딘 수입 음반 할인 행사도 생애(?) 최초로 그냥 넘어갔다능. ㅋㅋㅋ 책도 읽고 되파는 경우가 많고요. 짐이다 짐.

근데 폴스타프 님 그 방 구경하고 싶네요- ㅋㅋ 술 취했을 때 함 올려주세요. ㅋ

로자 2021-05-12 14: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잠자냥님
처음 인사드립니다.
저는 작은 크기에 소리가 훌륭한 오디오가 궁금하네요. 저한테 알려주실 수 있나요?

잠자냥 2021-05-12 15:06   좋아요 2 | URL
제가 완전 반했던 미니 오디오는 필립스 mcm 2150입니다. 전 이 오디오를 두 번이나 샀습니다. 그런데 이 오디오는 시디 넣는 부분에 먼지가 쌓이면 판이 튀는 단점이 있어서... 현재는 브리츠 BZ-T7600 WC 쓰고 있습니다. 디자인은 브리츠가 예쁜데요. 소리는 아무래도 필립스가 더 좋았습니다(특히 중저음).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제 주관적 느낌이니, 실제로 여러 후기 검색해 보시고 판단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공쟝쟝 2021-05-13 1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리뷰를 읽는데 행복해졌어요..* 음악들으면서 고독한 독서하는 모습이 근사하게 느껴졌어요. 저도 오늘은 음악독서를..*
저는 책도 사람도 너무 좋아해요. 불가해하다는 거 알아도 사람에 대해서도 책만큼 혹은 책 처럼 알아가고 싶어요. 수많은 질문들을 던져주는 책처럼 누군가에게 열렸을 때 수많은 질문을 품은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만나고 싶고요. 많을 필요는 없어요. 마치 책처럼요.
아직은 책도 사람도 일단은 많이 보고 읽어가야하는구나 싶긴해여ㅡ 고르는 눈이 없거든요 ㅠㅠ

잠자냥 2021-05-13 14:06   좋아요 1 | URL
쟝쟝님은 사람 좋아하는 거 글에서도 느껴져요. ㅎㅎ
그래서 또 그런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ㅎ
행복해지셨다니 저도 기분 좋네요-

두부 2021-05-15 2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감합니다. 책이 최고의 벗이죠.

잠자냥 2021-05-15 23:37   좋아요 1 | URL
네 살아갈수록 더 그런 생각이 듭니다. ㅎㅎ
 

신경숙 새 책이 나왔다. 책을 굳이 여기 올리고 싶지는 않다. 전에는 엄마 어쩌고 찾더니 이젠 아버지한테 가는 내용인가. 뭐 암튼 그런가 보다. 이 책을 보고 여러 가지 생각이 든다. 작가 자체에 대한 양심이야 그렇다 치고(기대하는 바가 없기에), 창비 출판사 자체의 뻔뻔함도 그렇다 치고. 어제 이 책 출간 소식에 도서 정보를 클릭해 보면서 좀 의아했다. 100자평은 이 작가와 출판사의 양심 없음에 대한 비난으로 별 하나가 주를 이룬다. 그런데 리뷰를 보자. 알라딘 책 소개 창에는 출간일이 '2021-03-05'로 되어 있다. 어제 내가 봤을 때도 그랬다. 어제 세일즈 포인트는 10이었다. 오늘 보니 3,410포인트로 훌쩍 올랐다. 곧 죽어도 신경숙인지, 세일즈포인트는 순식간에 올라가긴 한다. 그걸 믿고 창비도 그런 뻔뻔한 수작을 하는 것이겠지. 아, 물론 작가도.


그런데 참 이상하다. 어제 내가 봤을 땐 리뷰가 2개 있었는데 둘 다 별 다섯을 줬더라. 오늘 보니 리뷰가 7개다. 어제 2개에 이어 5개 더 추가. 근데 다들 별 다섯, 별 넷이다. 세일즈 포인트 10일 때도 벌써 책 읽고 리뷰 쓴 분들인가? 아, 오프라인 서점이나 다른 온라인 서점에서 사서 봤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왠지 그런 거 같지 않다. 창비가 서평단 모집해서 책 뿌렸을 테고 그분들은 그에 응해 별 다섯이 아닌 책인데도 별 다섯을 주는 거다. 그게 공정한 평가일까? '공짜'로 읽은 값이다. 출간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책에 극찬하는 리뷰가 줄줄 달리고, 그런데 실구매자 리뷰는 도대체 볼 수 없는 기묘한 행태. 난 사실 그럴 때 그 독자들의 양심에 더 화가 난다. 책 뿌리는 출판사나 작가보다도 더.



덧. 요즘 미시마 유키오 <봄눈>을 읽고 있다. 더럽게 잘 썼다. 그 작가를 좋아하지 않아도 정말 인정한다. 미치도록 잘 썼다. 신경숙이 얼마나 그의 문장을 표절하고 싶었을지 이해가 간다. 물론 신경숙이 <봄눈>을 표절한 것은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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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21-03-03 11:3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건 제 개인적인 견해인데, 100자평을 구매자가 쓸 수 있도록 해야 하고, 구매자의 100자평이 땡스투 적립금을 받을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책을 사지 않았고, 책을 읽지도 않은 독자의 100자 기대평이 땡스투 적립금을 받는다는 상황이 마음에 안 들어요.

잠자냥 2021-03-03 11:43   좋아요 4 | URL
읽지도 않은 사람들의 ‘기대평‘으로만 가득 채워진 100자평도 참 그렇긴 하죠. 저는 물론 단순 기대평이 아닌 100자평이나 리뷰는 꼭 ‘구매‘ 여부와 상관없이도 쓸 수 있다고 생각해요. 평가 대상인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 읽을 수도 있고, 다른 서점에서 샀을 수도 있고, 선물 받은 책일 수도 있으니까요. 그런데 이렇게 뭐랄까 출판사로부터 책 제공 받은 티가 ‘뚜렷하게‘ 나고 그 대가로 좋은 평 써주는건 좀 보기 그래요. 전 그래서 그런 리뷰는 다 거르기는 합니다.

다락방 2021-03-03 13:30   좋아요 1 | URL
사이러스님, 현재 ‘구매자‘의 백자평에만 땡스투가 적립되고 있습니다. 구매자 표시가 붙지 않은 백자평은 땡스투를 아무리 눌러도 적립되지 않습니다.

cyrus 2021-03-03 14:57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오늘 처음 알았습니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락방님. ^^

Falstaff 2021-03-03 12: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리하야, 제가 서평단 응모를 여태 한 번도 하지 않은 겁니다.
영숙이 쟨 좀 어디가 모자른 거 같기도 하고, 영숙이 하면 미쳐 넘어가는 영숙이 빠들은 확실하게 뭔가가 빠졌고, 아직도 유사성 운운하는 일반 팬들 가운데 상당수는 ‘우연한 문자적 유사성‘을 확신하고 있고, 유럽과 아메리카에선 표절을 한 작가들을 확실하게 매장시키고 있는데, 오호라, 진짜로 대한민국은 글 도둑놈, 글 도둑년 입장에서 별유천지비인간입니다.
한 번 만 더 강조하자면, 영숙이....는 초성자음 부끄럼 탈락 현상입니다아아아.....

잠자냥 2021-03-03 12:29   좋아요 1 | URL
영숙잌ㅋㅋㅋㅋㅋ 초성자음 부끄럼 탈락 현상ㅋㅋㅋㅋㅋㅋㅋㅋ
영숙이 문학이 어디가 그렇게 좋은지도 모르겠어요.

blanca 2021-03-03 17: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미시마 유키오의 <봄눈>을 읽고 저도 소름이 돋았어요. 그의 행적 자체는 논란이 될지라도 필력은 넘사벽이더라고요. 글 쓰는 사람들이 읽고 어떤 유혹을 느낄 정도로. 잠자냥님 생각하신 그대로 저도 생각했어요. 이래서 그랬구나. 그런--;;

잠자냥 2021-03-03 18:18   좋아요 0 | URL
와 정말 소름 돋는다는 말이 딱입니다. 어쩜 그렇게 쓰죠? 그런 문장이 가능하다니 놀랍습니다(비록 번역문일지라도).

행복한책읽기 2021-03-03 18: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신경숙 창비 디스 페이퍼서 미시마 유키오를 낚아갑니다.^^ 그 책을 올려주시지. ㅋ 근데 창비 대표가 작가 남편 아닌가요??

잠자냥 2021-03-03 20:11   좋아요 0 | URL
미시마 유키오 <봄눈>은 저도 아직 읽는 중이라 리뷰 쓰기는 뭐했고요. 다 읽으면 꼭 올리겠습니다. 넘나 잘 쓴 것....

잠자냥 2021-03-03 20:20   좋아요 0 | URL
창비 대표는 아니고 신경숙 남편은 남진우 시인인데요. 문학평론가이자 교수로 문학권력이 꽤 있는 사람이죠. 신경숙 표절 사태 때도 참 어처구니 없는 궤변을 늘어놓은 것으로 유명합니다. 부창부수.

행복한책읽기 2021-03-03 1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헐. 저 바보였군요. 금각사 저자였다니. ^^;;;

잠자냥 2021-03-03 20:18   좋아요 0 | URL
넵. 그리고 신경숙은 미시마 유키오의 <우국>을 표절했지요.

2021-03-04 09: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3-04 10: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3-04 09: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3-04 10: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 오는 토요일인 오늘, 나는 회사에 나와 있다. 한 달에 한두 번쯤은 꼭 이렇게 토요일에도 근무한다. 쉬는 걸 끔찍하게 싫어하는 노친네가 사장으로 있는 회사라 어쩔 수가 없다. 임시공휴일도 우리에게는 그림의 떡이다. 그래도 토요일은 개인 사정을 이야기하고 회사에 나오지 않는 이들이 종종 있어서 회사는 평일보다 한적한 편이다. 그래서 그런지 평일보다 마음이 편하기는 하다.

점심시간이 다 됐을 무렵 상무님이 내 자리로 슬며시 오시더니, 나지막한 목소리로 “우산 챙겨서 아래층으로 내려와” 하신다. 이건 사장님께서 점심을 사주신다는 신호다. 모든 직장인이 그러할 터인데, 윗사람과 함께 먹는 점심을 좋아할 직원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아무리 내 주머니에서 돈이 나가지 않는다 하더라도 대개의 직장인은 점심때만이라도 자유시간을 보내고 싶어 한다. 나 또한 그렇다. 게다가 오늘은 대충 때울 생각으로 편의점에서 김밥 두 줄을 사왔는데, 이걸 고스란히 다시 갖고 갈 생각을 하니 살짝 얼굴을 찡그리게 되었다. “저, 점심 싸왔는데…….” 중얼거려도 소용없는 항의.

나 말고 다른 직원 한 사람까지 더해서 상무님과 우리 세 사람은 우산을 쓰고 터덜터덜 걷는다. 사장님은 이미 그곳에 가 계신 모양이다. 머릿속으로는 ‘또 무슨 일을 시키려고’ 싶어지기도 한다. 사장님은 뭔가 특별한 일을 시킬 때 이렇게 미리 밥을 사주시곤 하기 때문이다. 날마다 비가 퍼붓는 구질구질한 장마. 습도도 높고 내리는 비에 바지가 젖는다. 그래도 상무님은 계속 앞서 걸으신다. 어디까지 가시는 걸까. 길 건너에 재래시장이 보인다. 여기까지 오니 동료는 목적지가 어디인 줄 알아차렸는지, 아아, 한다. “국숫집 가나 봐요.” 사장님과 나는 이쪽까지 온 적이 없는데, 이 직원은 한 번 가 본 적이 있는가 보다.

재래시장에 들어서니 사장님이 보인다. 노인은 우산을 쓰고 어느 과일 가게 앞에서 과일을 열심히 고르고 있다. 과일 가게 주인은 포도 상자를 포장 중이다. 그러더니 한 상자씩 우리에게 건넨다. 집까지 들고 가기 쉬우라고 커다란 검은 비닐에 그 포도 상자를 넣어준다. 동료가 먼저 받고, 나도 한 상자 받고, 상무님도 한 상자 받는다. “포도가 너무 맛있게 생겼어.” 사장님이 말씀하신다. 동료는 나에게만 들릴 듯한 목소리로 “아, 저 오늘 약속 있는데…….”하며 커다란 검은 봉지를 난처한 듯 바라본다. 노인은 종종 이렇게 상자째 뭔가를 덥석 안겨준다. 기프티콘을 모르는 분이라 크리스마스 때는 케이크 상자를 안겨주고, 때로는 수입과자점에 대뜸 끌고 가서 과자를 한아름 사주는 것이다. 이번에는 포도 한 상자다.

과일 가게를 지나 국숫집으로 향했는데, 토요일이라 그런지 문을 닫았다. 빗줄기는 굵어지고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다들 포도 상자가 담긴 검은 봉지를 들고 망연히 서 있는데, 사장님이 대뜸 “냉면 좋아하지?”하더니 성큼성큼 앞서 걸으신다.

도착한 곳은 함흥냉면집. 전쟁 이후부터 줄곧 그 자리에 있었던 냉면집으로 꽤 유명한 곳이다. 나는 그곳에 들어서는 순간 이십대의 그 시절로 돌아갔다. 대학생이던 그때, 친구와 그 애 어머니, 아버지와 함께 딱 한 번 왔던 곳이다. 그 이후로 단 한 번도 찾은 적이 없던 그 냉면집. 사장님은 회냉면 4개를 주문하고는 당신 나름의 추억에 잠긴다. “여기 와본지도 벌써 50년이 넘었지.” 소년 시절부터 고생고생해가며 자수성가한 이 노인은 굶주렸던 시절 이야기를 하며 그때 처음 먹은 냉면 맛을 예찬한다. 포도도 참외도 모양은 하나같이 예전보다 다 예쁜데 맛은 왜 그때 맛이 안 나는지 모르겠다며 비 온다고 포도 상자 내버리지 말고 집까지 잘 가져가서 엄마랑 먹으라고 당부하신다.

나는 냉면집을 휘 둘러본다. 스무 살 즈음에 왔던 이곳- 그때는 다들 신발을 벗고 방에 들어가 다닥다닥 붙은 테이블에 앉아서 냉면을 먹었다. 어쩌다 친구 부모님과 이 냉면집까지 왔는지 기억은 잘 나지 않는다. 아마 친구네 집에서 놀고 있는데, 어머니가 냉면이 먹고 싶다 하셨고, 그 바람에 아버지가 운전을 하고, 나까지 포함해서 네 사람이 냉면집을 찾았던 것 같다. 친구 어머니는 그때 신장이 안 좋아서 일주일에 한번은 꼭 투석을 받았다. 엄마가 아프니까 외출을 자주 못했던 친구 집에 내가 종종 놀러가곤 했던 그 시절. 그러다 보니 그 애 부모님과 나는 뜻하지 않게 많은 식사를 함께 했던 것 같다. 그날도 엄마를 휠체어에 태우고 차에 옮기고, 다시 휠체어에 태우는 방법으로 냉면집까지 갔다. 그렇게 힘들게 가서 냉면 한 그릇을 참으로 맛나게 싹싹 비우던 그 애 어머니.

그분은 몇 년 뒤 결국 세상을 떠나셨다. 오늘처럼 아주 무더운 여름날이었고, 나는 검은 옷을 입고 장례식에 참석했다. “엄마가 너 예뻐하셨는데, 마지막으로 우리 엄마 볼래?”라던 친구의 말에 얼떨결에 “응”하고 대답했고, 그래서 나는 그분의 마지막, 아니 죽음 후의 첫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게 지금까지도 내가 유일하게 본 죽은 사람의 모습이다. 빨갛게 얹힌 양념 위에 잘 버무려진 명태회 몇 점. 식초와 겨자를 곁들여 새콤달콤한 냉면을 먹으면서 나는 자꾸만 그분을 떠올린다. 어느새 그릇이 비었다. 냉면 가게를 휘 한 번 더 둘러본다. 밖으로 나오니 비가 그쳤다. 또 얼마만큼의 세월이 지나 내가 이 냉면집에 우연히 다시 온다면 그때도 그분을 떠올릴까, 아니면 오늘 포도 상자를 안겨준 이 노인을 떠올리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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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20-08-01 16:1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뭔가 따수운 글이어서 댓글 남기고 가요. 고즈넉한 오후 보내세요.

잠자냥 2020-08-01 16:20   좋아요 0 | URL
네~ 비오는 휴일 오후 편안하게 보내세요.

레삭매냐 2020-08-01 17: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살짝 빡친 건,
점심을 사주겠다는 제안이었습니다.

오전 근무로 알았는데... 토욜날!
점심까지 멕이고 무언가 일을 더
시키겠더라는. 삐삐삐삐삐 ~~~

잠자냥 2020-08-01 17:59   좋아요 0 | URL
하하하, 토요일도 저희는 점심 지나서까지 일합니다! ㅎㅎㅎ

북다이제스터 2020-08-01 18: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척 공감되는 글 잘 보았습니다. ^^

잠자냥 2020-08-01 21:25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즐거운 휴일 보내세요.

리제 2020-08-01 1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이 참 따뜻해요. 비 살짝 맞은 상태에서 읽어서 그런지 더 좋아요^^

잠자냥 2020-08-01 21:26   좋아요 0 | URL
비가 내려서 그런지 글이 더 그렇게 된 것 같아요. ㅎㅎ

다락방 2020-08-10 0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북플로 보면 이렇게 놓치는 글이 생겨서 제가 좋아하는 분들의 서재는 이름찍고 한 번씩 정기적 방문을 해줘야 합니다. 그랬기에 이 글을 뒤늦게나마 발견할 수 있었어요.
저는 냉면에 얽힌 추억이라고 하면 아름답기보다 뜨거운 것이어서 여기에 풀기는 좀 거시기하고요, 그러나 잠자냥 님의 고운 추억만은 감사히 읽고 갑니다.

잠자냥 2020-08-10 11:07   좋아요 0 | URL
휴가인데 당연히 북플이고 알라딘이고 컴퓨터고 멀리 해야죠. ㅎㅎ 이제 일상으로 복귀하셨군요.
저도 지난주 중반부터 휴가였는데, 코로나에 기록적 폭우에 어디 여행 꿈도 못 꾸고 그저 방콕한 휴가였어요.
다락방 님은 그래도 여행도 잘 다녀오신 것 같아 흐뭇합니다.
그나저나 냉면에 얽힌 뜨거운 추억 궁금하닼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지난 토요일 늦은 오후, 걸으려고 집을 나섰다. 내내 화창하던 하늘에 그때쯤엔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지나가는 비겠지, 하고 우산 하나 챙겨서 나갔다. 잠시 걸으니 빗방울이 떨어진다. 그래도 걸었다. 좀 더 걷다보니 빗줄기가 꽤 거세졌다. 집으로 돌아갈까 싶기도 했으나 지난밤 확인한 일기예보에서는 오후 6시에 잠깐 비가 오고 그 뒤로는 맑음 표시였다. 다시 걷는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는 폭우처럼 쏟아지는 빗줄기 때문에 도저히 우산에 기대서 걷기가 불가능해졌다. 어쩌지? 하다가, 가까운 곳에 있던 맥줏집으로 들어갔다. 카페에 가도 됐을 텐데, 그날 이미 커피를 마신 터라...... 아니 그냥 날 밝을 때 맥주가 마시고 싶던 터라.....

유리창으로 쏟아지는 비를 보며 맥주 한 잔과 치킨을 비우고 나오니, 언제 비가 내렸냐는 듯이 하늘이 맑게 갰다. 공기는 더욱 깨끗해졌다. 그래서 다시 걷기 시작. 한참 걷다 보니 목이 말라서 또 다시 맥주를 마시러 들어갔다. 그러다 보니 한 잔이 두 잔이 되고 밤이 깊어졌다. 어느덧 밤 열두시를 넘긴 시간, 갑자기 출출해져서 근처에 있던 24시간 콩나물국밥집에 갔다. 거기서 해장을 하고 집에 돌아갈 생각이었다.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가니 그 시간에도 꽤 많은 손님들이 있다. 아마 나처럼 한 잔 걸치고 해장하고 집에 돌아가려는 사람들이었으리라. 테이블 자리는 이미 다 차서 나는 사람들 무리와 떨어진 방으로 올라갔다. 좌식 자리에 앉은 건 우리뿐이었다.

주문을 마치고 사람들이 열심히 지켜보고 있는 텔레비전을 한번 바라보니, TV에서는 축구 경기를 중계하고 있었다. 아아, 그래서 오늘 사람들이 삼삼오오 술집에 많이 모여 있었구나. 나는 그저 토요일이라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모두의 눈이 텔레비전에 쏠려 있을 때, TV를 보지 않고 있는 한 남자의 등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이제 예순을 조금 넘었을까. 일어선다면 160을 조금 넘을 키에 60킬로그램도 채 되지 않을 것 같은 작은 체구를 지녔다. 그가 내 눈길을 끈 이유는 홀로 잔뜩 취한 채 웅얼웅얼 뭔가를 내내 중얼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 환한 국밥집에서 혼자 취해 허공에 삿대질을 하고 있었다.

이윽고 내 밥상에도 국밥이 올라왔고, 나는 밥을 먹는 일에 열중했다. 그런데 그때 들려오는 소리, “아, 여기서 이러지 마시라니까. 안받아주려다 받아줬더니 또 그러네. 얼른 드시고 가.” 고개를 돌려보니 우리 테이블에 국밥을 주고 돌아가던 가게 아주머니가 아까 그 취한 사내에게 잔소리를 늘어놓고 있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는 자주 이렇게 취한 상태로 와서 옆자리 사람들에게 시비를 걸거나 하는 모양이었다. 그 남자 옆 자리에는 40대로 보이는 한 남자가 텔레비전에 시선을 고정한 채 묵묵히 국밥을 입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국밥을 다 먹은 그 남자는 금세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계산대로 향했다. 계산을 치른 그 남자는 갑자기 등을 돌리더니 아까 그 노인을 향해 폭언을 퍼붓기 시작했다. “밥 좀 편하게 먹자. XX야. 나이 처먹으려면 곱게 처먹어. 그 꼬라지니까 그 나이에도 그렇게 혼자 밥 처먹으면서 남한테 시비나 걸고 있지 XX야. 너, 내가 손봐주려다 오늘 바빠서 그냥 간다. 새꺄” 등등. 아까 가게 아주머니가 한 소리하는 걸 듣고 기세가 등등해진 것인지, 꼭 저렇게까지 해야 할까 싶을 정도로 폭언을 퍼부었다. 노인에게 한창 퍼부으면서 헬멧을 쓰는 폼과 차림새를 보니 그는 늦은 밤까지 택배를 나르고 뒤늦게 식사를 하던 사람인 듯싶었다.

지켜보니 노인은 시비를 건다기보다는 이 사람 저 사람 가리지 않고 중얼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이제 그는 자신의 옆 자리 건너 자리 사람들에게도 말을 걸고 있었다. 웅얼거림이나 마찬가지라, 시비라고 보기에도 어려웠다. 노인의 옆 건너 자리에 있던 그들은 30대로 보이는 건장한 남자 셋이다. 그들 중 하나는 몸집이 노인의 두 배는 돼 보였다. 그는 살기등등한 눈빛으로 줄곧 노인을 쏘아보더니 담배를 피우러 나가다가 노인에게 덤벼들 기세를 취했다. 그때 나머지 둘이 그를 말림으로써 아무 일도 일어나지는 않았다.

노인의 맞은편 자리에는 남녀가 앉았다. 그런데 그들 중 여자가 아까부터 노인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웃고 있었다. 조롱이랄까. 여자는 이제 주변의 그런 분위기에 고무됐는지, 아니면 자기 앞에 남자가 앉아 있기에 안심이 되었는지 급기야 노인에게 “할아버지, 쉿!쉿!”하면서 껄렁껄렁한 얼굴로 노인을 계속 비웃었다. 나는 여자의 그 조롱이 아까 폭언을 퍼붓던 남자의 태도 못지않게 섬뜩하고 불쾌했다. 저 여자가 혼자 국밥을 먹으러 왔어도 저럴 수 있을까? 아니, 저렇게 홀로 술을 마시면서 웅얼대는 저 노인이, 건장한 30~40대 남자였어도 다들 저럴 수 있었을까? 물론 내가 그 노인 옆자리에서 밥을 먹고 있는데 그가 계속 그렇게 술 취해서 중얼중얼 거린다면 나도 불편하기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노인을 향한 그 주변 남자들과 그 여자의 태도에는 분명 지나친 무엇인가가 있었다.

텔레비전 속 축구 경기에서 우리나라가 1대 0으로 앞서나가고 있는 상황에서도 노인 주변 사람들은 축구경기보다 노인을 조롱하거나 위협하는 일을 더 즐기는 듯했다. 여자의 얼굴은 개미집을 발견해서 마구 짓밟아버리는 심술궂은 아이의 얼굴에나 있을 법한 그런 웃음이 스며있었다. 나는 얼마 전 본 영화 <기생충>이 떠올랐다. 기우네 가족과 입주 가사도우미 문광이 서로 죽일 듯이 싸우던 그 장면……. 그 국밥집에서 나를 불편하게 만든 것은 술 취한 노인의 웅얼거림이 아니라, 그에 대응하던 남자의 폭언과 또 다른 남자의 살기어린 눈빛과 여자의 비웃음이었다. 노인보다 젊고 힘세고 곁에 무리가 있고, 남자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그 행동들. 그런데 그들은 모두 그 시간에 4천 원짜리 국밥으로 한 끼를 때우고 있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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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19 17: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6-19 17: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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